누구에게나 있는 일이고 있을 법한 일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하고 나아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 마음을 계속 부여잡고 살아야 할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당함에 대한 기억은 분명히 오래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 부여잡은 채로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쉽지 않은 말씀의 근본은 우리가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이다.
분노와 격정에 자신을 맡긴 채, 그것만을 붙잡고 사는 것은
그야말로 원수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의 최종적인 목적은 1독서의 말씀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룩하지 않은 것에 발목이 잡혀 내내 그것만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바라보는 그것을 닮을 수밖에 없다.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
이웃과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를 흔들고 힘들게 하는 것들에 발목을 잡힌 채로 옴쭉달싹 못하며 살지 말라는 의미다.
그렇게 원수가 바라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땅을 칠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방법이란 어쩌면 무척 간단한 것이 아니겠는가.
원수를 열 받게 하는 방법은 그 원수 때문에 열 받아 날뛰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그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우리가 별일없이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노래 가사도 있지 않은가.
“니가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맘 편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뭐냐하면 나는 별일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없다”
그러니 전전긍긍하지 말자.
우리가 진짜 닮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열 받게 하는 그것이 아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
어디서나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바로 “진짜”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