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17 부활 제4주일)
그분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캐나다 와서 제일 많은 본 짐승은 단연 ‘개’입니다. 여기 개들은 주인과 산책을 다니며 집에 함께 삽니다. 개만큼 사람을 잘 따르는 짐승이 없지요. 후각과 청각이 발달해 있어 멀리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바람에 묻어나는 냄새만 맡아도 금방 주인인지 아닌지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가축 가운데 양도 마찬가지랍니다. 성경에 목자와 양은 자주 등장하는 비유인데요, 오늘날과 달리 방목하여 키우는 양들은 주인의 목소리를 기가 막히게도 잘 알아 듣습니다. 왜냐하면 생존을 위하여 그렇게 주인의 목소리가 인식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척박한 이스라엘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목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생명의 물과 신선한 풀이 있는 곳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목자들은 들판에 양들을 풀어 놓고 키웠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한 우리 안으로 그 양들을 다 모으지요. 이 때 각 각의 주인이 서로 다른 양들이 섞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침에 돼서 우리에서 한 마리씩 양들이 빠져 나올 때 저마다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 듣고 제 주인을 따라 간다는 것입니다. 다른 목자들의 목소리와 자기 주인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구분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 복음에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는 표현은 실제 양들이 자기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 듣고 따라가듯 우리 신앙인들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참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우리는 언제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이른바 성소라고 불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특별한 계기를 통하여 들릴 수도 있고 아니면 일상 안에서 은은하게 다가 올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 사제성소를 받았고, 지금은 사제가 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성소를 받고 있는 중에 있으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제직을 향하여 계속 수행 중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특별하게 사제직으로 불림을 받았지만 사제서품을 받았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그 사제직이 지향하는 바를 실천하도록 매일 수양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사제직의 완성은 죽은 다음 영원한 대사제이신 주님 앞에서 판가름 날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위하여 우리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초대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결혼생활로, 어떤 이들을 수도자와 성직자와 같은 독신생활로. 그러나 성소는 혼인성사와 성품성사를 기준으로 양분할 수 없습니다. 성소란 그 보다 훨씬 크고 넓은 영역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부르심은 각 자의 생활 영역 안에서 다양하게 주어집니다. 어떤 이들은 사제로 불림 받은 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깁니다. 맞습니다. 직무 사제직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수많은 기도와 자신의 노력과 응답,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왜 누군가의 아빠가 되고 남편이 되는 것은 특별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이것 또한 어마어마한 성소입니다. 누구나 아빠가 되고 남편이 될 수 있지만 누구나 다 좋은 아빠와 좋은 남편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왜 가정생활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치부합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왜 사제만 특별한 성소자로 여깁니까? 교회를 이루는 여러분들도 제 각기 성소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제 각기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교우들과 하느님을 위해서 봉헌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도네이션이든 노력 봉사이든 기도이든 말입니다. 제게 여러분들은 다 특별한 사람들이니 아니 하느님께 여러분들은 다 특별한 사람들이니 여러분 각자는 모두 하느님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독서하는 것도 특별한 부르심이고, 성당 청소하는 것도 특별한 부르심이고, 친교 식사 준비한다고 양파 까는 것도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온전히 계시며 오히려 미미한 것을 통하여 위대한 당신의 일을 해나가십니다. 가령 우리 중에 소방관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생계를 위한 수단일 수 있겠지만 더 넓게 보면 소방관이라는 직책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직업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화재로부터 국민들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거룩한 임무입니다.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컨비니언스면 어떻습니까? 자신의 수고에 비해서 벌이는 넉넉지 않지만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고 소박한 만족을 주는 직업이 아닙니까? 그리고 내가 만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친절과 미소를 베풀 수 있는 복음적 실천의 장이 아닙니까? 그렇게 보자면 내 일상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성소의 장인 것입니다.
이제 저의 체험담을 말하겠습니다. 저는 특별하게 사제직을 받았지만 제 자신이 특별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떠한 자격과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입니다. 사제직 자체는 정말 특별한 것이지만 그 사제직을 받는 제 자신은 오히려 평범한 사람입니다. 또 사제직 자체는 완벽한 것이지만 그 사제직을 수행하는 제 자신은 여전히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도 안 되게 그런 저에게 분에 넘치게 그 일을 맡기셨습니다. 사제직은 저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방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사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도 없었고, 더 더욱이 제게 사제직이란 스타와 같은 선망의 대상도 아니었지만 신비하게도 하느님께서는 저를 그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뿌리칠 수는 묘한 매력이랄까요? 그것은 큰 깨달음 후에 결심한 출가자의 마음에서도 아니었고 성직자 가문을 학수고대하던 부모들의 바람에서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마치 바람 같았습니다. 스치고 지나가는데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그 바람 말입니다. 바람의 존재는 흔들리는 나뭇잎이나 휘날리는 머릿결을 보고야 아는 것입니다. 제게 하느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어릴 때 성당에 홀로 앉아 있으면서 느꼈던 말할 수 없는 평화와 따뜻함, 복사 설 때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의 관심과 사랑, 부모님과 함께 바치던 묵주기도 등 평범한 일상 가운데 그 바람은 저를 그렇게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사범대 가려는 꿈을 가질 무렵 하느님은 강력하게 저를 붙드셨습니다.
(성령 묵상회 체험담: 아무 소득 없는 나에게 찾아오신 하느님의 선물)
그 때 분명히 들었습니다. ‘나 좀 도와줄래?’ 저는 성소를 또 하나의 순례라고 생각합니다. 순례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그 모든 여정이 곧 순례입니다. 요즘 창세기 공부하고 있는데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가나안 땅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인지 알고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도착하고서야 알았습니다. 왜 그분께서 여기까지 이끄셨는지 그리고 왜 허구 많은 좋은 땅 중에 하필 이 땅이어야 하는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사제가 무엇인지 알고 신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은 단 하나, 하느님께서는 이 사제직을 통해서 저를 당신 곁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사제성소의 뜻을 다 아는 것은 죽어서 그분을 만나서겠지요.
평신도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부부생활이 뭔지 알고 결혼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르고 했는데 살면서 조금씩 알아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항상 미지 속을 걷는 순례자입니다. 형제 여러분, 바람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남기고 간 흔적은 볼 수 있습니다. 내 생애에 작은 것 하나 하느님께서 이루지 않으신 것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모든 만남과 사건, 그리고 인연. 바람과 같은 하느님은 그 흔적들을 통해 지금 나에게 말씀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목소리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난 희로애락을 하느님과 연관지어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나를 키우셨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나를 아끼고 사랑하시는지를. 또 그분이 얼마나 당신의 목소리를 내게 들려주고 싶었는지를.
첫댓글 강론을 들으면서 제가 주님께 들었던 것들이 하나하나 생각나면서 퍼즐이 맞춰지는것 같은 강한 전율을 느꼈습니다..레지오를 처음 시작했을때, 성가대를 처음 들어갔을때 기타등등 모든것이 주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되었고 성령의 힘이었다는것을..늘 깨어있어 주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함을 다시한번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