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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불교(佛敎; 붓다佛의 가르침敎)의 변질
<어떤 스님과의 대화>
“남방에서도 사시불공을 합니까?”
“하지 않습니다.”
“아니,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는다니, 그들에게는 붓다에 대한 공경심이 없는 모양입니다.”
“진짜로 붓다(석가모니 부처님)를 공경하기 때문에 공양을 올리지 않습니다.”
“아니, 그 말에는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스님은 붓다께서 어딘가에 살아계시면서 음식을 올리면 받아먹고 물을 올리면 마실 거로 생각하십니까?”
“붓다께서 먹고 마시지는 않더라고 그 정성은 받으시겠죠.”
“그 정성을 받으시려면 붓다께서 어딘가에 살아계시면서 우리를 살피고 있어야 하겠군요.”
“그럼 붓다께서 소멸해버렸다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려는 겁니까?”
“소멸이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지만, 하여튼 붓다(석가모니 부처님)는 마하빠리닙바나(대반열반, 무여열반)에 드셨습니다.”
“붓다께서 대반열반에 드셔서 어딘가에 머물며 뭇 생명체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기복 종교의 교리처럼 들립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마하빠리닙바나(대반열반)은 이렇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요.”
“‘더 이상 몸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까? 몸을 받지 않더라고 정신은 어딘가에 머물 수 있지 않을까요?”
“몸은 없고 정신만 존재하는 곳을 무색계라고 하죠. 무색계의 존재는 아라한이 아닙니다. 수다원조차도 아니고 다만 무색계 선정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럼 정신으로만 존재하는 무색계 사람들과 아라한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아라한은 삼계에서 해탈한 성인입니다."
”스님이 말하는 ‘더 이상 몸을 받지 않는다’라거나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거나 ’삼계를 벗어났다‘는 말은 다 소승의 교리입니다. 아라한이 끝이 아닙니다. 아라한은 다시 마음을 내어 중생 세계에 뛰어들어 뭇 중생들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이 보살입니다. 반야심경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무노사 역무노사진’이라고요. ‘생사가 없다. 또한 생사가 끝이 없다’라고요. 생사가 없는 경지에 올랐지만, 중생들을 위해 생사를 계속하는 겁니다. 이것이 양극단에 빠지지 않는 중도입니다.”
“하하! 대승의 교리가 매우 인간적이고 매력적이고 감동적입니다.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사후 부활처럼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감동의 문제가 아니고 팩트의 문제입니다.”
“아라한은 소승이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붓다는 대열반에 들었어도 그 열반의 세계에 머물며 중생들을 보살피지 않겠습니까?”
“붓다와 아라한은 대반열반에 들어 ‘더 이상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붓다와 아라한의 차이는 붓다는, 고타마 보살이 깨달은 자(붓다)가 될 때 다른 깨달은 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암중모색하여 실상과 지혜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깨달아 아는 지혜를 갖추었다는 것에서 다를 뿐입니다.”
“그럼 붓다께 공양을 올려 복을 빌어야 하는데, 그럼 남방에서는 불공을 올리지 않고 어떻게 공덕을 짓습니까?”
“북방에서는 쓰리쿠션을 이용합니다. 신도들이 붓다에게 공양물을 올리면 스님들이 약간의 퍼포먼스를 해주고 내려 먹습니다. 남방에서는 신도들이 다이렉트로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며 공덕을 짓습니다. 남방에서는 공덕을 짓는 것은 뭐든지 직접 당사자에게 합니다. 불쌍하고 가난한 이웃을 돕거나 직접 스님에게 음식을 제공합니다.”
“그럼 형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결과는 같지 않습니까?”
“절대 같지 않습니다. 북방에서는 마치 붓다께서 어딘가에 머물고 계시면서 공양을 올리면 자신을 보살펴 줄 거라는 판타지를 신도들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을 좋게 보면 중생들에게 붓다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나쁘게 보면 사기입니다. 또한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붓다의 말씀을 왜곡시킨 것도 문제입니다. 붓다를 기독교와 힌두의 신으로 만들어 버린 것도 문제입니다. ‘무아(無我)’의 교리가 변질되어 ‘상락아정(常樂我淨)’이 되어버린 것도 문제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구멍이 제방을 무너뜨립니다.”
[출처 : 무념스님 포스팅, https://www.facebook.com/mahabhante/posts/55189173221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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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락아정(常樂我淨)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붓다(석가모니 부처님)는 ‘무아(無我)’라고 했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이 교리를 고수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교단에서 ‘무아’의 교리에 반론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아’이기는 하지만 어떤 개체적 성질을 지닌 개아는 존재할 거 아니냐? -인상(人相)-
뭔 소리냐? 내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내가 소멸해버리는데 그럼 뭐하러 수행하느냐? 깨달음을 얻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 그럼 나는 해탈을 추구하지 않고 중생으로 남겠다. -중생상(衆生相)-
깨달음이란 업을 완전히 정화해서 순수 영혼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순수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 -수자상(壽者相)-
이렇게 ‘무아’에 대한 반론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가장 지독하게 공격한 곳이 브라만교(지금의 힌두교)입니다.
신에게 헌공물을 올리며 제사를 지내고 그 복을 받는 은총신앙이니까 복을 빌어야 할 대상인 신이 존재해야 하고, 복을 받는 주체인 ‘내’가 있어야 합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무아를 깨달아 해탈해야만 한다면 기복신앙은 존립 자체가 위험해집니다.
그렇게 수많은 종교단체의 무자비한 공격을 초기대승불교까지는 열심히 방어합니다.
초기대승불교의 꽃이라고 불리는 <금강경>이 ‘무아’의 이론을 방어하기 위해 이때 만들어집니다.
<금강경>에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이라는 문장이 수없이 반복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승의 이론이 변천하면서(정확히 말하면 붓다가 가르친 교리가 변질되면서) 은총신앙(가피신앙)이 후기대승불교(화엄경류, 법화경류, 정토경류를 만든 불교)에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신적 능력을 가진 보살이라는 신들이 만들어지고 붓다도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열반(대반열반/마하빠리닙바나)에서 되돌아와 법당에 앉아 공양을 올리면 받아먹고 복덕(가피, 은총)을 내려주어야 합니다.
이제 ‘무아’를 깨달아 괴로움에서 해탈해야 한다는 교리는 복덕(가피, 은총)을 바라는 자들의 현실에 맞지 않게 되었습니다.
복을 주는 붓다도 영원히 존재해야 하고 복을 받는 나도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열반이라는 개념에 수정이 가해집니다.
초기불교에서 열반은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더 이상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후기대승불교의 은총신앙(가피신앙)에서는 열반을 성취했어도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해야 할 일은 다시 몸을 받아 세속에 내려와서 중생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열반이라는 것이 무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순수 영혼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며 뭇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들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 노력 봉사해야 하는 상태로 바뀝니다.
그래서 후기대승불교의 <법화경>에서 붓다는 수 억겁 전에 붓다가 되었지만, 순전히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인간 석가모니 몸(천백억화신 석가모나불)으로 태어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닫는 모습을 퍼포먼스로 보여주고 다시 열반에 듭니다.
즉 열반이라는 것이 ‘무아’를 깨달았지만 ‘순수한 아’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는 어떤 것이며, 언제든지 몸을 만들어 인간계에 태어날 수 있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후기대승불교의 <대승열반경>에서 열반의 개념이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바뀌게 됩니다.
상(常); 열반은 영원히 상주하는 어떤 상태다.
락(樂); 그 열반의 상태는 지복의 상태다.
아(我); 그 상태는 ‘무아’가 아니고 ‘아’이다.
정(靜): 그 ‘아’라는 상태는 중생들이 경험하는 ‘아’가 아니다. 즉 이기적인 ‘아’가 소멸하고 탐진치가 완전히 제거되어 고요하고 깨끗하고 순수하다.
남방에서 붓다는 이미 가고 없는 사람입니다.
남방에서 열반은 존재의 소멸은 아니더라도 하여튼 몸을 더 이상 만들 수 없는 영원한 해탈입니다.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완전한 소멸인지 붓다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무아’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상태입니까?
열반이 도대체 어떤 상태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 붓다는 “네가 수행해서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한 아라한이 되면 스스로 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다(언어도단言語道斷; 언어言語로 표현할 길道이 끊어졌다斷).’ 또는 ‘설명해봐야 희론에 불과하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붓다 당시에 아라한이 된 사람들(이른바 천이백 아라한) 중에 ‘무아’라는 교리에 이의를 제기한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후기 대승에 들어와서 그렇게 과거 선배들이 지키려고 했던 붓다의 말씀이 불순한 의도(탐진치가 개입된 의도; 예컨대, 죽기 싫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믿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나와 나의 확장인 내가 속한 집단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들어주고 구원해주면 좋겠다.. 등등과 같은 개인적, 집단적인 탐진치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개입된 의도)에 의해 왜곡되면서 불교는 바야흐로 샤머니즘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49재, 천도재, 영산재, 수륙재, 예수재 등등등....
어~으~아이~오으~!(이것은 감탄사가 아닙니다. '범패, 절에서 재齋를 올릴 때 내는 소리'입니다.)
‘무아(無我), 윤회(輪廻), 열반’의 교리가 변질되어 ‘상락아정(常樂我淨)’식으로 되어버린 것은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구멍이 제방을 무너뜨립니다.
[출처 : 무념스님 포스팅, https://www.facebook.com/mahabhante/posts/552003585535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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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무아, 윤회, 열반' 등의 불교용어에 대한 오해와 진실_
위의 무념스님 포스팅에 언급된 것과 같이, ‘무아(無我), 윤회(輪廻), 열반’의 교리가 왜곡되어 ‘상락아정(常樂我淨)’식으로 변질되어버린 것은 큰 문제를 일으킵나다. 이런 왜곡과 변질로부터 불교가 점점 샤머니즘화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아, 윤회, 열반' 등 불교(佛敎; 붓다佛의 가르침敎)의 중요 용어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분명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무아無我’ vs ‘아낫따an·Attā’
; '무아無我'는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가 설법(법法을 설명)할 때 사용한 고대인도어(빠알리어) '아낫따an·Atta'(산스크리트어 an·Atman)를 중국어(한문)로 번역한 것이다. 아낫따an·Attā(아낫트만an·Atman)는 '앗따Atta(아트만Atman;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 즉 실체)가 아니다(an)'(비실체)라는 뜻이다.
영어 un·happy의 un처럼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에서 an은 단어 앞에 붙는 부정형 접두사인데 모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앞에 붙는다. 닛짜Nicca처럼 자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앞에는 a가 붙는다. 아닛짜a·Niccas는 '닛짜Nicca(항상)하지 않다(a), 즉 매 순간 변한다'라는 뜻이다. 아닛짜a·Nicca는 '무상無常, 즉 항상(常)함이 없다(無)'로 한역했는데, 무상無常은 별로 오해를 일으키지 않는다.
'무아無我, 즉 나(我)는 없다(無)'라는 말과 '아낫따an·Attā, 즉 나를 포함하여 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실체; 앗따Attā, 아트만Atman)가 아니다(an)'라는 말의 차이는 천지 차이다. 특히 붓다의 가르침(불교佛敎, 불법佛法)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잘 이해한 후에는 그 차이가 미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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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생衆生(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무리)이란 단지 무상無常(아닛짜a·Nicca; 인과 연기적으로 매 순간 생멸 변화함), 고苦(둑카Dukkha; 근원적인, 즉 근본 원인이 있는 괴로움을 내포하고 있음), 무아無我(아낫따an·Attā, 아낫트만an·Atman; 비실체, 즉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가 아님)라는 특성을 지닌 '몸(물질작용 무더기; 색온)과 마음(정신작용 무더기; '수상행식'온)'이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작용하여 일으키는 인과 연기적인 생멸(생기 소멸) 현상(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실상)을 깨달았다."
"‘고정불변(상주불변; 늘 동일)하고 독립적인(독자적인) 존재’(이를 서양 철학과 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실체'라고 함; 고대인도어로는 앗따Attā 또는 아트만Atman)로서의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과 연기적인 현상(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으로서의 내가 없는 것도 아니다."
- 붓다
탁월한 분석과 명료한 설법으로 대중을 제도한 논의제일 제자, 마하깟짜야나(마하가전연 존자)가 붓다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자신과 세상을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까?"
"그는 (수행을 통해서) 자신과 세상이 지금(현재 순간, 매 순간) 사라지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세상과 자신이 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또한, 그는 자신과 세상이 지금 일어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세상과 자신이 없다는 생각도 내지 않는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적으로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하는 하나의 연기적 현상(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으로 존재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나와 세상이 지금(현재 순간, 매 순간) 일어나고(生) 사라지는(滅)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내가 그리고 세상이 있다(有)는 것에도 없다(無)는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이른바 양극단, 생멸, 유무, 상견과 단견 ... '나'를 기준으로한 선과 악,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좋고 싫음, 사랑과 미움 ... 등등에서 벗어나라는 중도中道의 가르침이다.
붓다는 듣는 사람의 수준(근기; 6근-여섯 감각기관을 통한 물질적 정신적 경험과 그 경험으로부터 형성되는 소질, 적성, 성향, 성격, 여러 가지 능력-이해력, 인내력, 집중력.. 등)과 처지(처해 있는 상태; 사정이나 형편, 환경, 상황 등)에 맞춰서 비유적, 우화적, 시적(게송), 문학적, 함축적, 서술적, 분석적, 종합적, 논리적, 경험적, 합리적, 과학적 표현 방법 등 다양한 표현 방법을 사용해서 듣는 사람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다양한 수준의 수많은 설법說法(법法을 설명說明함; 이른바 대기 설법)을 하셨다.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듣는 사람의 수준과 처지에 맞춰서 설(설명)하신 수많은 가르침(설법)은, 수행(붓다께서 설명하신/가르치신 수행)의 실천을 통해서 사람들이 무지(인식의 착각, 의식과 무의식의 착각, 전도된 생각)를 극복하고 자신과 세상의 실상(실제 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우주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깊이 관찰)하여 통찰지를 계발함으로써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에 도달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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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언어도단言語道斷
; '열반(무여열반/마하빠리닙바나/대반열반)의 상태, 윤회를 벗어난 상태'를 말(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른바 언어도단言語道斷(언어言語로 표현할 길道이 끊어졌다斷)
붓다Buddha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를 뜻하는 고대인도어로 일반명사다. '고타마Gautama 붓다Buddha'(이른바 석가모니불, 석가모니 부처님)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불佛, 즉 불타佛陀'는 고대인도어(산스크리트어 & 빠알리어) 붓다Buddha를 중국어(한문, 한자)로 음사(음역)한 것이다. 우리말(한국어, 한글)로는 '부처'라고 음역한다.
붓다는 자신과 중생(생명의 무리)을 포함한 우주자연을, 수행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직접 통찰(깊은 관찰)한 현생 인류 중 최초의 사람이다. 붓다는 자신이 수행을 통해서 발견한(깨달은) 우주자연의 실상(실제 상태, 실제 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우주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를 법法(고대인도어로 담마Dhamma 또는 다르마Dharma)이라고 지칭했다. 붓다는 법法을 깨닫고 나서 법法을 가르쳤다.
법法은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빠알리어 담마Dhamm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달마達磨는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를 중국어(한문)로 음사(음역)한 것이다. '물 수水 + 갈 거去'의 합성어인 법法은 '물이 흐르듯 가는 것'이라는 뜻으로 ‘물이 자연의 법칙(질서, 이치)에 따라 흘러간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글자는 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되 거기에는 일정한 길(질서, 이치, 법칙)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법法은 '우주자연의 질서, 우주자연의 이치, 우주자연의 법칙'을 의미하는 단어다.
노자老子는 우주자연(우주만물)에 대해 깊이 사유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우주자연의 근본 질서 또는 이법理法(이치와 법칙)을 도道라고 지칭하였다. 노자는 우주자연의 근본 이치(원리)와 법칙(질서)인 도道가 개체적으로 구현된 현상을 덕德이라고 지칭하고, 도道와 덕德에 대한 가르침(<도덕경>; <도道경>과 <덕德경>을 통칭하여 <도덕道德경>이라 함)을 남겼다.
노자가 가르친 도道와 붓다가 가르친 법法은 그 내용(깨달음의 내용, 즉 도道 또는 법法을 깨달은 내용)이 일맥상통하다. 도道가 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우주자연의 이치/법칙)에 대한 철학적·문학적 표현이라면 법法은 과학적(경험적·합리적) 표현인 셈이다.
하지만 노자의 가르침에는 '도道의 경지(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도道 또는 법法을 깨닫는 구체적인 방법; 실천법, 수행법)과 '나(我, 己, 自我, 自己, ego)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인 자비慈悲(Metta-Karuna)'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아쉬움이 있다.
노자는 일생 동안 말로 (자세히, 상세히, 소상히, 친절하게) 가르치고 글로 쓰는 걸 싫어했지만, 설산(히말라야?)을 향해서 떠나는 생의 마지막 여정에서 만난 국경수비대 제자의 간곡한 권유로 <도덕경>으로 알려진 5천 여자 정도로 된 <도道경>과 <덕德경>을 저술하여 제자에게 남겼다.
<도道경>은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한다. 이 구절은 '말(언어)을 사용해서 도道라고 표현 가능可한 도道는 항상常한(진정한, 보편적인, 예외가 없는, 완전한) 도道가 아니다非'라는 뜻이다.
인간의 언어란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한 이래 인간의 물질(육체)적 정신적 경험을 기호화(개념화)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언어는 실재(여기서는 道)가 아니라 실재의 근사치일 뿐이다. 때문에 도道 또는 득도의 경지(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상태, 도道 또는 법法을 완전히 깨달은 경지/상태; 완전한 해탈/열반의 상태, 윤회를 벗어난 상태)를 말(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른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언어言語(말)로 표현할 길道이 끊어졌다斷.'
그러나 도道의 경지(완전한 깨달음의 경지; 완전한 해탈/열반의 상태)에 도달하는 길을 안내하는 것(도道 또는 법法을 완전히 깨닫는 방법, 수행법을 언어로 가르치는 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2500년 전에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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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정(생물)과 무정(무생물)의 '무아無我 윤회輪廻’
; 유정(정신작용이 있는 존재; 생명현상, 생물, 생명체, 중생-생명의 무리)과 무정(정신작용이 없는 존재; 물질현상, 무생물, 물체-물질 무더기)의 ‘고정불변(상주불변; 늘 동일)한 주체(실체)가 없는 윤회, 이른바 '무아無我 윤회輪廻'
Q (GMS님) : 불교는 무아를 가르치는데 그러면서도 윤회를 강조합니다. 무아와 윤회는 상호 모순되는 가르침인 듯합니다. 어떻게 무아이면서 윤회합니까? 어떤 분은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도 하던데… 윤회는 부처님 가르침인가요?
Q (JJS님) : Moosim Park님이 페북에 올리는 포스팅 감사합니다. 수양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기회가 되시면 ’재생연결식‘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Q (DUO님) : 삼보에 귀의합니다. 재생연결식과 윤회에 관한 책을 읽다가 궁금증이 생겨 여쭙니다. 그야말로 잘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니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재생연결식은 말 그대로 생의 마지막 의식이 다음 생의 첫 의식과 연결되는 의식으로 윤회의 고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두 식은 찰나에 연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생의 기억을 지닌 사람들의 실제기록이 언급된 책을 보니, 죽은 날과 태어난 날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꽤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보통 2, 3년이나 혹은 그보다 훨씬 길거나 또는 짧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저는 단순히 생각하여, 재생연결식은 찰나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사람이 사망과 동시에 새 몸을 얻어(어머니의 자궁에 수태되어) 10달 후에 태어나는 것이려니 생각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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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oosim Park) : 아래의 글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행의 직접 통찰(깊은 관찰)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고(깨닫고) 설(설명)하신, 유정(정신작용이 있는 존재; 생명현상, 생명체, 중생-생명의 무리)과 무정(정신작용이 없는 존재; 물질현상, 무생물, 물체-물질 무더기)의 삼사라samsāra(계속되는 생멸 흐름의 순환; 윤회輪廻-바퀴처럼 계속 돌고 돎), 그리고 '고정불변한(상주불변; 늘 동일)한 주체(실체; 앗따Attā 또는 아트만Atman)가 없는 윤회, 이른바 '무아無我(아낫따an·Attā) 윤회輪廻(삼사라samsāra)'에 대한 붓다의 설법(法을 설명함)을 오늘날의 지식과 용어를 사용하여 옮긴 것입니다.
"나는, 중생衆生(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무리)이란 단지 무상無常(아닛짜a·Nicca; 인과 연기적으로 매 순간 생멸 변화함), 고苦(둑카Dukkha; 근원적인, 즉 근본 원인이 있는 괴로움을 내포하고 있음), 무아無我(아낫따an·Attā, 아낫트만an·Atman; 비실체, 즉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 또는 주체가 아님)라는 특성을 지닌 '몸(물질작용 무더기; 색온)과 마음(정신작용 무더기; '수상행식'온)'(이를 통칭하여 '오온五蘊'이라 함)이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작용하여 일으키는 인과 연기적인 생멸(생기 소멸) 흐름의 미시(찰나)-일상-거시(생로병사, 일생一生)적인 순환[삼사라samsāra] 현상, 줄임말로 연기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실상)을 수행의 직접 통찰(깊은 관찰)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다.“
"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물질, 정신적인 모든 현상(자연현상)은 모두 인과 연기적인 현상(연기현상)이다."
- 붓다(석가모니 부처님)
식識(윈냐나viññāṇa; 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오온五蘊('색·수·상·행·식'작용 무더기; '물질色-정신名'작용 무더기) 중 한 부분이자, 십이지연기의 열 두 고리 중 한 부분이다. 한 생의 마지막 식識(의식+무의식)이 다음 생의 첫 식識(의식+무의식)으로 연결되는 식識(의식+무의식)을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라고 한다. 재생연결식을 ‘윤회의 연결고리’라고도 한다.
매 순간 생멸하는 정신작용과 물질작용 무더기가 인과 연기적으로 상호의존 작용하는 생명현상(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인 중생(생명의 무리) 또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죽는 순간, 매 순간 생멸하는 정신작용('수상행식'작용) 중에서 죽는 순간의 식識('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 고대인도어로 '빠띠상디-윈냐나paṭisandhi-viññāṇa'; 이전 생의 마지막 식이자 다음 생의 최초의 식)작용의 인과 연기적인 생멸 흐름은,
정신작용('수상행식'작용) 무더기가 상호의존(연기) 작용하던 물질작용('지수화풍'작용[註1]) 무더기(몸)와의 인연(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이 다하는(끊어지는) 순간, 물질세계의 시공간(시간-공간)을 초월하여(다른 표현으로, 물질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통한 '오고 감이 없이')[註2],
인과 연기적으로 상응하는 장소(세계)에서 인과 연기적으로 상응하는 새로운 물질토대(몸)와 연기(인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 작용하여 생명체(생명현상; 정신-물질 작용 무더기/집적/쌓임의 인과 연기적 생멸 흐름 현상, 줄임말로 연기현상)의 또 다른 생이 이어진다.
이렇게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포함한 유정(정신작용이 있는 존재; 생명현상, 생명체, 중생-생명의 무리)은 매 순간 생멸 변화하는 '정신작용과 물질작용 무더기'('색수상행식'작용 무더기; 오온五蘊)의 인과 연기적인 생멸 흐름의 순환[삼사라samsāra; 윤회]을 미시(찰나)-일상-거시(생로병사, 일생一生)적으로 계속한다.
이처럼 '윤회輪廻[순환; 삼사라samsāra]의 고정불변(상주불변; 늘 동일)한 주체(실체; 앗따Attā) 없이(무아無我; 아낫따an·Attā)', 매 순간 생멸 변화하는 오온('색수상행식'작용 무더기; 물질-정신작용 무더기)이 인과 연기적인 생멸 흐름의 순환을 '미시(찰나)-일상-거시(생로병사, 일생一生)'적으로 계속하는 것, 이른바 '무아無我(아낫따an·Attā) 윤회輪廻(삼사라samsāra)'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가 설(설명)한 윤회, 즉 불교(佛敎; 붓다佛의 가르침敎)의 윤회'다.
'미시(찰나)'적 측면에서 보자면, 매 찰나(순간) 계속되는 오온의 생멸(생기 소멸) 순환 자체가 윤회다. 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생명현상)는 매 찰나 생멸 윤회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거시(일생)'적 측면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찰나 사몰심死沒心(또는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 일어났다(생기했다) 소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에서 식온을 포함한 오온의 생멸(생기 소멸) 순환을 계속하는 것이 윤회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루빠rupa(色; 물질, 물질작용) 무더기'(색온; 몸)는 수정란 단계에서 하나의 세포로 존재한다. 하지만 계속 분열하며 집적되어 태어날 때는 약 3조 개의 세포 무더기(집적/쌓임)가 되고, 어른이 되면 평균적으로 약 60조 개까지 늘어난다. 그 중 약 50만 개의 세포가 1초 내에 소멸되고 동시에 약 50만 개 세포가 생기(생성)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상관없이, 그런 일상적인 매 찰나(순간)의 생멸(생기 소멸) 순환[삼사라; 윤회]의 반복 과정으로 '나'라는 생명체의 몸(물질현상, 물질작용 무더기; 색온)이 유지된다. '일상'적 측면에서, 나의 몸(물질현상, 물질작용 무더기; 색온)을 구성하는 전체 세포의 생멸(생기 소멸) 순환[삼사라; 윤회] 주기는 (세포의 기능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25-30일 정도다. (참고로, 금연 등과 같은 몸의 습관 또는 육체적 습관을 바꾸려면 평균 25-30일 정도 이상을 꾸준하게 해야 한다)
'거시'적 측면에서, 생명체가 한 번 생로병사하는 생멸(생기 소멸) 순환[삼사라; 윤회]에 걸리는 시간(기간 또는 주기)을 '일생一生(a life cycle period)'이라하고, 우주가 한 번 성주괴공하는 생멸(생기 소멸) 순환[삼사라; 윤회]에 걸리는 시간(기간 또는 주기)을 '일겁一劫(a world cycle period)'이라고 한다. 겁劫 또는 겁파劫波는 붓다가 설법 시 사용한 고대인도어 깝빠kappa를 한문(중국어)으로 음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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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석가모니 부처님)는 설법(법法을 설명함) 시, 이 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모든 존재(삼라만상)를 큰 범주에서 유정(정신작용이 있는 존재)과 무정(정신작용이 없는 존재)으로 대분류하여 설명했다. 붓다의 설법에 따르면, 유정(정신작용이 있는 존재; 생명현상, 생명체, 중생-생명의 무리) 뿐만 아니라 무정(정신작용이 없는 존재; 물질현상, 무생물, 물체-물질 무더기) 또한 매 찰나(순간) 생멸 변화하며 순환하는 '물질 무더기(물질작용 무더기, 물질의 사대작용 무더기; 색온)'의 인과 연기적인 생멸 흐름의 순환[삼사라samsāra; 윤회]을 미시(찰나)-일상-거시(성주괴공, 일겁一劫)적으로 계속한다.
여기서, '삼사라samsāra'는 '순환(circulation), 계속된 흐름(continuous flow)'이라는 뜻을 지닌 고대인도어다. '바퀴(輪)처럼 계속 돌고 돎(廻), 바퀴(輪)처럼 회전(廻)하면서 계속 굴러감' 이라는 뜻을 지닌 '윤회輪廻'는 부처님이 설법 시 사용한 고대인도어 '삼사라samsār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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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 물질의 사대('지수화풍') 작용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가 수행의 통찰(깊은 관찰)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고 설(설명)한 ‘물질(rūpa)을 형성하는(bhūta) 기본(근본; mahā) 작용’은
(1) 빠타위pathavi(地) 작용; 무거움/질량/중력 작용
(2) 아뽀apo(水) 작용; 수축/응축/인력 작용
(3) 와요vāyo(風) 작용; 팽창/척력 작용
(4) 떼조tejo(火) 작용; 변화/열 작용이다.
물질의 기본 구성체인 원자(물질의 최소단위; 붓다가 사용한 용어로는 깔라빠kalāpa)도 물질이기 때문에 극미하지만 얼마간의 ‘지地[pathavi, 무거움/질량] 작용‘이 있다. 이 무거움(질량, 地) 작용은 다른 작용, ’수水[apo, 수축/인력] 작용’에 의해서 잡아당겨져 연결되어 있고, 동시에 또 다른 작용, ‘풍風[vayo, 팽창/척력] 작용’에 의해서 어느 정도 밖으로 당겨져 형체적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또 다른 작용, ‘화火[tejo, 변화] 작용’에 의해서 끊임없이 매 순간 변하고 있는 것이다. '고정불변(늘 동일)하고 독립적인 존재'(실체)로서의 원자는 없다. 원자(깔라빠)로 구성된 모든 물질(물체, 육체)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물질을 형성하는 네 가지 기본 작용('지수화풍' 작용)이 인연(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라 상호의존 작용하면(연기 작용하면, 인연 화합하면) 깔라빠(물질의 최소단위, 원자)라고 인식된다.
붓다가 설(설명)한 '물질(rūpa; 色)을 형성하는(bhūta) 네(四) 가지 기본(근본, mahā; 大) 작용(또는 요소)'을 한문 번역 경전에서는 ‘사대색四大色 또는 사대四大’라고 번역했다.
"루빠rūpa(물질, 물질현상; 물체-물질작용 무더기)는 '형상과 색깔'을 지니는 것이 그 특징이다."라는 부처님의 설법(법法을 설명함)에 따라 표의문자인 한문의 특성상 한 글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루빠rūpa를 '색色'이라는 한 글자로 번역했다.
물질(루빠rūpa; 물질현상, 물체-물질작용 무더기)은 정신(나마nāma; 정신현상, 정신작용 무더기)과는 달리 물질세계의 공간을 차지하는 형상(형태)을 지니기 때문에 '형상의 변화'(변형)는 물론이고 물질(물체)이 차지하는 '공간의 변화'(예컨대, 아인슈타인과 현대 물리학자들이 설명하는 공간의 휘어짐, 빅뱅 이후 우주 공간의 팽창, 수축 등)' 또한 물질세계의 근본적인 특성(성질)이다.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가 설(설명)한 물질을 형성하는 네 가지 기본(근본) '작용'을 요즘 시대의 표현인 물리학 용어를 빌려서 ‘힘(force, 力)’으로 병행 표현하는 쪽이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고 부처님이 가르친 의미에도 가깝다. 부처님이 설법 시 사용한 고대인도어 ‘마하부따루빠mahā-bhūta-rūpa’를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물질(rūpa; 色)을 형성하는(bhūta) 네(四) 가지 기본(근본, mahā; 大) 작용(힘)’이다.
참고로, 현대물리학에서 설명하는 우주자연의 물질세계를 지배하는(형성하는) 네 가지 기본(근본) 힘(작용)은 '강력(강한 상호작용), 약력(약한 상호작용), 전자기력(전자기 상호작용), 중력(gravity 상호작용)'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우주자연의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네 가지 기본(근본) 힘(작용)'에 대한 설명보다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가 설(설명)한 '물질을 형성하는 네 가지 기본(근본) 작용(힘)'에 대한 설명이 일반인들이 자신의 몸(육신, 육체)을 포함한 우주자연의 물질세계의 실상(실제 상태, 실제 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를 더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깔라빠(물질의 최소단위; 원자) 그리고 깔라빠(원자)로 구성된 모든 물질(루빠; 물질현상, 물체-물질작용 무더기)은 사대四大('지수화풍') 작용이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 작용하여, 미시(찰나)-일상-거시(성주괴공, 일겁)적으로 매 순간 생멸(생기 소멸) 변화하며 순환[삼사라, 윤회]하는 ’사대四大 작용(힘)’의 역학적力學的 '인과 연기 연속체’ 또는 ‘인과 연기적인 흐름현상', 줄임말로 '연기현상'이다.
이 각주, [註1]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행의 직접 통찰(깊은 관찰)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고 지식(교학, 교리)차원에서 설(설명)하신 '물질(rūpa; 色)을 형성하는(bhūta) 네(四) 가지 기본(근본, mahā; 大) 작용', 이른바 물질의 사대('지수화풍') 작용에 대한 설법(법法을 설명함)을 오늘날의 지식과 용어를 사용하여 좀더 소상히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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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2] 물질세계의 시공간(시간-공간)을 초월하여(다른 표현으로, 물질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통한 '오고 감이 없이')
우주가 생기生起하여 팽창하는 작용을 현대물리학에서는 ‘빅뱅Big-Bang’이라고 표현한다.
빅뱅 시, 물질이 생기하면서 동시에 물질이 차지하는 시공간(시간-공간; 시간과 공간)도 함께 생기하여, 시공간(시간-공간)과 물질은, 붓다의 표현으로는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관계', 양자역학의 표현으로는 ‘시時-공空-양자量子(질량)수 관계', 상대성이론(아인슈타인)의 표현으로는 '시공간(시간-공간)과 질량의 등가 관계'를 형성하고, 매 순간 변화하는 물질-시간-공간의 팽창 흐름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매 순간 변하고 팽창하며 흐르는 시공간(시간-공간)과 함께 물질이 인과 연기적으로 매 순간 생멸 변화하며 분산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우주, 즉 해, 달, 지구, 별, 은하 등의 물질 무더기와 시공간(시간-공간)이 되었다.
붓다(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법法을 설명함)에 따르면, 현재의 우주는 생기하여 팽창 중에 있지만 인연(직간접 조건)이 다하면 수축하여 소멸하고 다시 생기하는 인과 연기적인 생멸(생기 소멸)의 순환[삼사라samsāra; 윤회輪廻, 바퀴輪처럼 돌고 돎廻]을 계속한다. 좀 더 상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사대작용('지수화풍'작용, 현대물리학의 표현으로는 우주 4대 상호작용, 즉 강한 상호작용, 약한 상호작용, 전자기 상호작용, 중력 상호작용)이 연기(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라 상호의존) 작용하여 (다른 표현으로 인연화합하여) 물질이 생기하면 그와 동시에 물질이 차지하는 시공간(시간-공간)도 함께 생기하여 물질은 시간-공간과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관계를 형성하고, 매 순간 인과 연기적인 생멸(생기 소멸)의 순환[삼사라; 윤회]을 미시(찰나)-일상-거시(성주괴공, 일겁一劫)적으로 계속한다.
서로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 물질세계의 물질-시간-공간은 한 세트로 함께 생기 소멸한다.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죽는 순간, 즉 인간의 정신작용('수상행식'작용)이 인식정보(여섯 감각 정보)를 의존하고 있던 육근(六根, 여섯 감각 기관; 육신, 몸, 물질)과의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관계가 끊어지는 순간, 물질세계의 아무 공간도 차지하지 않는 정신(정신작용)은 물질(물질작용)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물질세계의 시간-공간과의 관계도 한 세트로 함께 끊어진다.
그리고 정신작용('수상행식'작용 중에서 한 생의 마지막 식이자 다음 생의 최초의 식인 '재생연결식')은 물질세계의 시공간(시간-공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다른 표현으로 물질세계의 시간-공간(시간과 공간)을 통한 '오고 감이 없이' (예컨대, 1년 뒤든 10년 뒤든 상관없이 또한 한국이든 미국이든 상관없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과 연기적으로 상응하는 장소(세계)에서 인과 연기적으로 상응하는 물질토대(몸, 여섯 감각 기관-6근)에 인식정보(여섯 감각 정보)를 의존하여, 매 순간 생멸 변화하는 정신작용('수상행식'작용)의 인과 연기적인 생멸 흐름의 순환[삼사라samsāra; 윤회輪廻]을 미시(찰나)-일상-거시(생로병사, 일생一生)적으로 계속한다.
GMS님, JJS님, DUO님의 질문에 도움이 되셨길 바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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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무념스님 포스팅에 언급된 바와 같이, ‘무아(無我), 윤회(輪廻), 열반’의 교리가 왜곡되어 ‘상락아정(常樂我淨)’식으로 변질되어버린 것은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왜곡과 변질로부터 불교는 점점 샤머니즘화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아, 윤회, 열반'과 같은 불교의 중요 용어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분명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구멍이 제방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진정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해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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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좌) : 지리산 실상사 사시불공
사진(우) : (우상) 49재, (우중) 천도재, (우하) 영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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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_()_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진정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May all beings
following the Buddha's sammā Dhamma
really be happy.. be peaceful.. be liberated(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벗어나기를, 해탈하기를)...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