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시조 대승공 사우(祠宇) 대동사(大東祠)를 성역화를 해야하느냐? 현 상태로 유지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1. 대동사 주변에 타문은 성씨의 시조가 아니지만 성역화해서 정부로부터 막대한 지원금을 지원 받아 향사(享祀)를 모십니다.
2. 어느 기회가 되면 대동사 성역화 문제가 나왔을 때 재정(財政)문제와 건물배치 등은 제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기에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대동사가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에 있는데 다른 사우를 창건하지 않아야하는 타당한 역사적 근거를 알아보고자 몇편 글을 대종회홈페이지, 뿌리깊은 버드나무카페, 페북에 류씨명문가, 문화류씨전국청년연합회밴드, 문화류씨하정공파고양공종중밴드에 공유하여 글에 대한 다른 의견과 수정할 부분을 댓글과 전화로 받아보았습니다.
3. 문화류씨 종원의 훌륭한 식견과 본관이 다른 류문의 의견을 종합하고 보완한 결과는
① 대승공께서 903년 왕건 나주해전에 군량과 수레와 家兵(神軍)을 제공하였고 나주해전때 광주 광산구 본량동(여황현)로 왕건군대가 침투했고 914년 나주해전을 마치고 태봉 수도 철원으로 가면서 당시 여황현에 있던 오씨부인(장화왕후)를 만나고 여황포에서 배를 타고 갔는데 903년에는 왕건家 왕건장인 류천궁家 류천궁과 종씨(宗氏,같은성씨)인 대승공이 합동으로 동원한 1,000명 가병으로 나주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909년부터는 태봉국 수군이 합류하여 2,000명 912년은 3,000명 군사가 동원 되는데 출전한 대승공 가병으로 부터 여황포 소식을 들었던 여황현에 대승공 사우가 있게 되는 타당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1945년 선조들께서 본량 신촌에 대승공 사우를 창건했습니다.
② 흥률사 상량문에 기록된 “사해황제” 실체문제입니다. “흥률사가 사해황제들 모이는 장소”라 했으니 믿어야 되는데 의문을 제기하는 종원이 있어 지금까지 올린 글에 근거를 제시 했습니다.
사해황제는 신흥호족+당나라 유학파인 지식인(스님)으로 846년 장보고가 암살된후 851년 청해진이 폐지되고 완도에 살았던 주민 10만여명이 김제(벽골군)로 강제이주 당해 지금의 벽골제를 축조하게 되는데 선박 건조술과 항해능력을 갖춘 청해진 군인 만명 중에 일부는 황해도 작제건 류천궁家 류차달家(청의동자) 등에게 합류하고 일부는 고향으로 흩어졌는데 정주지방으로 간 청해진 세력들은 수백 수십척 무역선박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하게 되는데 이들을 통제한 호족들 모임이 사해황제입니다(완도와 김제는 자매시군임).
③ 대승공께서 “사해황제”일원이였느냐?는 의문점 : 할아버지(청의동자)가 사해황제 일원이기에 궁예의 위협을 무릅쓰면서(영암 형미스님은 왕건을 편들었다고 궁예에게 사형당한 것처럼 왕건에게 군대와 군량을 준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사안임) 다른 사해황제들은 복지부동하고 있는데 류천궁과 함깨 왕건을 도와 주었습니다.
④ 파란 옷을 입은 분은 부모나 직장 상사가 지시를 하는 사람이고 동자가 어떤 지시를 했다면 그 지시로 행함으로 인하여 위기상황을 극복되고 운세가 좋아지게 됨을 암시합니다(동양철학자 말)
청의동자는 꿈속에서 무엇을 가르쳐 주고 여러가지 고난 끝에 성취하는 것으로 대승공 행적과 일치하고 청의동자가 대승공 할아버지이며 왕장군이 군량이 떨어졌다고 알려 주었고 궁예의 위협을 무릅쓰고 하루밤에 수레천대를 만들어 군량을 실고 신력(神力)으로 신군 천명을 불러내어 전공(戰功)을 세웠다는 해석(꿈해몽)이 흥률사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기에 청의동자가 대승공 할아버지(903년 대승공 나이가 20대초반이므로 대승공 아버지는 생존하여 꿈과 관련 없음)라는 것입니다.
⑤ 903년 나주해전이 그렇게 큰 역사적 사실이냐?의 문제점 : 해군사관학교 임원빈교수는 한국 4대해전이 “금성전투의 해전”이라 했습니다.
4. 이런 정도의 역사적 근거로 다른 장소에 대승공 사우를 건립하겠다는 말을 하지 말고 대승공과 풍수 지리적이나 역사적 관련이 있는 본량동에 대승공 사우를 지켜야 한다입니다.
광주보다 더 남쪽에 있는 광산김씨, 하동과 동래정씨, 반남박씨, 남평문씨 등은 그들 시조 향사에 대절버스를 20대 이상과 승용차가 100여 대 오고 대중교통으로 오는데 삼한갑족 대승공 후손은 멀다고 참여하지 않고 중부지방에 사우를 만들어야 한다는 헛소리를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사정이 있어 참사를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멀다는 말은 삼가해 주십시오).
5. 카페나 밴드는 글과 사진을 순서로 쓸 수 있으나 페북은 글과 사진이 분리해서 보게 되기에 의미전달이 안되어 카페에 글을 올리고 밴드나 페북에 공유하는 방법으로 사용했습니다.
※ 참고로 저의 개인 페북에 종사(宗史,宗事)를 올리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