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량면 소재지에서 마량 쪽으로 내려 가다가 월궁마을에서 우회전 하여 1km쯤 들어가면 바닷가 어촌인 봉황마을이 나온다. 마을의 전체적인 지형은 봉황새가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마을의 뒷산이 머리, 본 마을은 몸통 부분, 덕동 앞산이 날개, 월궁은 꼬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또 대섬은 봉황새의 먹이가 된다고 한다.
봉황마을은 ‘독점’ 또는 ‘옹점’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리 주위에 장독·김치독·쌀독·항아리 등으로 흔히 보아왔던 전통옹기가 생산되었던 마을이다. 예전엔 많은 가구가 옹기를 구웠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단 한 가구(정윤석 씨, 봉황옹기)가 남아 무형문화제 전승자로 지정 되어 굽고 있을 뿐이고 거의 농업이나 바지락 등의 어업으로 돌아 섰다.
이 곳 옹기가 삼흥청자 도요지와 대구 청자도요지등과 함께 성행했던 이유는, 이 인근에 찰지고 철분이 많은 흙이 풍부 했을 뿐만 아니라 봉황리가 항구로써 옹기수송이 용이했던 이유도 있다.
이 인근의 점토를 채취하여 생산 된 옹기는 사람에게 해로운 납 성분이 들어 있지 않으며, 그 안에 김치, 간장, 된장 같은 것을 담아 놓으면 맛이 변하지 않고 발효에 좋다고 한다. 즉 곡식이나 장류, 과일 등을 옹기에 담아두면 식품의 보관기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전래의 맛을 다시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갖가지 장류나 장아찌, 김치 등의 보존식품 저장에 전통옹기의 쓰임새가 늘어나고 있다.
또한 다른 지방의 옹기는 600~700도°C 정도에서 굽는데 반해 칠량옹기는 1,000°C가 넘는 온도에서 구워 내기 때문에 훨씬 단단하다.
“이 곳에서 생산된 옹기는 주로 돛단배 등 목선에 실려 팔려 나갔는데, 순풍에 돛을 달면 제주도가 3일, 강릉이 15일 걸렸다” 한다.
“강진만을 출발해 동서남해안을 거슬러 전국을 다니면서 때로는 바람의 혜택도 있었지만, 태풍 등 풍파와 싸우기도 했다. 이로 인해 동네에서는 같은 날 제사가 많은데, 그 이유는 배가 침몰하면 배에 탄 일행이 같은 시각에 사망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옹기는 매년 개최되는 경기도 이천 ‘세계도자비엔날레’에까지 출품된다”는게 정00 씨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면서 플라스틱 그릇의 등장으로 옹기는 사양길에 접어들더니, 최근 토기옹기의 우수한 점들이 다시 재조명되어 외부인 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나. 도기의 유래
도기(陶器)를 맨 처음 만든 이는 순(舜) 임금인데, 그는 홀로 된 아버지와 계모, 이복동생 등 세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고 온갖 박해를 다하였어도 그들을 탓하지 않고 오직 자기가 잘 받들어 모시지 못한 것만을 한탄했다. 이러한 대효(大孝)를 실행하여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효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다. 봉황리(鳳凰里)
이 마을의 이름은 일대의 지형이 봉황 형국인데서 유래한 것으로, 문헌상으로는 1789년 ‘호구총수’에 그 이름이 처음 나온다. 이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옹점(甕店)'으로 바뀐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옹점 · 덕동 · 보련 · 사부를 합해 다시 봉황리로 개명한 후 지금에 이른다. 원래 봉황이었던 옹점(또는 독점)만을 별도로 '원봉황'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봉황을 중심으로 한 칠량의 옹기는 언제부터 생산되었을까. 이를 밝힐 수 있는 정확한 자료는 아직 없다. 다만 마을의 이름이 1800년대 말이나 1900년대 초에 봉황에서 옹점으로 바뀐 것이 문헌상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칠량의 옹기는 조선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라. 옹점(甕店)
‘옹점'이라 함은 ‘옹기를 만들어 파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 이곳 사람들은 봉황을 구 옹기점, 사부를 신 옹기점이라고 부르는데, 1895년에 펴낸 ‘호남읍지’ 중 강진현 편에는 '신옹점(新甕店)'이라는 지명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어 칠량의 옹기가 1800년대 후반부터 생산되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칠량의 도자기는 대구면 청자도요지가 쇠퇴하면서 천태산을 넘어 삼흥리와 명주리 일대로 이동한 뒤, 흥학리와 장계리 해안을 거쳐 봉황리 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봉황리는 고려청자도요지가 있는 대구면 사당리로 부터 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만큼 마을 사람들이 일찍이 도자기 빚는 기술을 알게 모르게 배워 옹기를 빚게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칠량 봉황의 옹기는 대구 사당리의 귀족적인 청자에서 조선조 서민적인 백자를 거치면서 실용적인 옹기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한 때 봉황에는 동막(작업장)이 30∼40곳에 달할 정도로 온 마을 주민들이 옹기사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동막에서 공동으로 일을 하던 사람들은 대략 7∼8명이었는데, 질꾼 2명·거내꾼 2명·뒷일꾼 1∼2명·접장이 2∼3명이었다. ‘접장’은 질그릇을 만들고 ‘거내꾼’은 그것을 말리고 잿물을 먹이는 일을 했으며 ‘질꾼’은 한 굴을 구워낼 점토(찰흙)를 맡았다. 그리고 ‘거내꾼’은 손가락으로 그릇에 문양을 넣는 일을 맡았다.
“잿물은 갈퀴나무(갈쿠리로 긁어모은 나무)를 태운 재를 쓰거나 검복산 근처에서 황토를 파다가 수비(水飛)해서 바로 쓰던지 아니면 삭도록 두었다가 입혔다”고 한다.
점토는 주로 영동·강동·영풍 등의 논에서 파왔는데, 가장 그 질이 좋은 곳은 영동마을 일대였다고 한다. 점토 운반은 “처음엔 직접 파서 지게로 져 나르다가 나중에는 리어카로 나르고 1963년경부터는 소달구지를 이용했다”
땔나무는 칠량면 삼흥·명주·흥학·장계리 등지를 비롯 완도·해남·진도에 까지 가서 구입해 사용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 근방에서 도자기를 굽게 된 첫째 이유는 주변에 땔감이 풍부했기 때문이다.”라고도 한다.
마. 풍선(風船)
칠량옹기는 6·25 전까지만 해도 멀리는 함경도지방 여염집 장독대에 놓여 있는가 하면, 가까이는 풍선(風船, 돛단배, 7쪽 당두리)에 실려 여수·목포·제주는 물론 김해·마산·부산 등지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옹기 운송이 주목적이었던 풍선이 한 때 40여 척에 이르렀을 만큼 칠량옹기는 이 나라의 장독대를 채우는 필수품이었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배의 종류로는 ‘서로 가까운 곳을 오가고 작은 짐으 나를 때에는 3쪽짜리 거룻배를 사용하였고, 많은 짐을 싣고 더 먼 곳을 갈 때에는 5쪽 야거리나, 7쪽 당두리인 돛배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풍선에 관해서는 완도읍에서 한선공예를 하시는 마00(63세, 노동부선정 한선공예전승자)씨가 수년간 공을 들여 제작한 바가 있다. 마씨는 수년전 강진의 옹기 운반선을 만들면서, 이 곳 칠량에까지 와 옹기 운반선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90세 된 노인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한다.
그는 “증언을 토대로 배를 조금씩 만들어 나갈 때마다 배를 차에 싣고 강진으로 와 둘이서 얼굴을 맞대고 배를 요모조모 뜯어보며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연구했다”고 한다.
그렇게 완도와 강진을 열다섯 번 오간 끝에 옹기선을 완성했다.
“인자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들어졌구만, 드디어 노인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기쁨은 잊을 수 없었다” 한다.
마씨는 힘들여 만든 옹기운반선을 강진군에 기증하면서 “언제라도 복원할 수 있게끔 내 머리가 기억하고 내 손이 기억하고 있으면 그 뿐이다”라며 감회를 말하였다.
그러나 칠량옹기는 1970년대 초부터 가볍고 저렴한 프라스틱 제품이 등장하면서 집집마다 아낙들이 장독대를 "헌 계(개)집 버리듯" 내침에 따라 경쟁력을 잃고 급격한 사양길로 접어든다. 그리하여 옹기 굽는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던 이 마을 가마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말았다. 현재는 유일하게 정00(58세)씨와 그의 아들만이 옛 칠량옹기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바. 죽도귀범
봉황 앞바다 한가운데는 둥그렇고 거무스름한 섬이 하나 떠 있다. 무인도인 이 섬은 대나무가 울창하여 대섬(竹島)이라 부른다. 죽도(대섬)는 봉황마을 서쪽에 있는 섬으로 전죽(箭竹,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이 이 곳에서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부른 지명이다. 대섬의 전죽생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기록되어 있어 오랜 유서를 갖고 있다.
탐진만의 7개 섬 중 가장 위쪽에 자리한 이 섬은 주변 풍광이 뛰어나 금릉 8경 중 1곳으로 꼽힌다. 경회 김영근 시인의 한시 ‘죽도귀범(竹島歸帆)’이 그것이다.
죽도귀범(竹島歸帆)
아담한 섬 하나 대밭이 푸르렀다
한가해라 백조들도 삼삼오오 춤을 추네
후젓이 젖은 비에 일엽편주 돌아오니
뉘라 이곳을 선경이라 아니하랴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강진현여지승람’(1895)에 따르면 죽도는 한양이나 강진 병영성에 전죽(箭竹,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을 납부하였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에 배를 타고 낚시질이나 뱃놀이를 즐겼던 곳이기도 하다.
한편 죽도는 탐진만을 중심으로 한 강진의 지형을 요니(尿尼, 여자의 음부) 형국으로 보았을 때 음핵에 해당하는 곳이라고도 한다. 강진출신 김00 시인의 ‘강진문화답사기’에는 “강진의 요니(女陰) 형국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소 과장되었긴 해도 탐진만이 바로 그 요니의 질부분, 탐진만의 양쪽 산줄기들이 대음순, 바다위 아래로 흩어져 있는 섬들이 소음순, 그 섬들중 맨 위에 있는 대섬(竹島)이 음핵에 해당한다”고 했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강진이 부자고을임을 시기한 일본인들이 그 기(氣)를 죽이기 위해 죽도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하여 폭파시키려 하였으나 주민들의 결사 저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강진 출신 시인인 영랑과 현구도 이 죽도를 비롯한 탐진만의 섬들을 물 위에서 잠방거리며 노는 오리새끼들에 비유한 바 있다.
첫댓글 몰랐던 내고향의 아름답고 재미난 전설들을 많이 올려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이해하기 쉽게 잘 기술하셨네요 . 강진의역사공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