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파 옷속의 솜이나 형장 풀밭의 풀을 뜯어 먹고 순교 당한 성지
병인년 박해의 연속인 1868년 무진년에 여산군의 속읍인 고산, 진산, 금산 등에서 체포되어 온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터다. 칼 쓴 ‘죄인’들은 형장인 풀밭에 가서야 칼을 풀었고 얼마나 굶주렸던지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전해지는 순교 성지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axkorea.kr%2Fbbs%2Fdata%2F1001%2F1415281255%2Fyeosan_supjungi_2.jpg)
여산 숲정이는 지금은 논과 밭 가장자리가 되어 있지만 박해 당시에는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숲정이 성지로 유래되어 오고 있다. 이곳 순교자 중 10명의 시신은 지금 고산 천호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 이곳에서 순교한 분 중 다수가 고산 널바위 사람들이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칼 쓴 죄인들은 형장인 풀밭에 가서야 칼을 풀었고 얼마나 굶주렸던지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김성첨은 “우리는 이때를 기다려 왔으니 천당 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괴로움도 이겨 내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甘心)으로 참아 받자”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순교 후 그 시신들은 형장 곁에 있던 미나리꽝에 던져졌다. 이것을 눈여겨보고 있던 신자들은 야음을 틈타 시신들을 건져냈는데, 겨울에 입는 솜옷 속에는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배가 고파 솜을 먹어 버린 탓이었다.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일단 한 곳에 가매장 하였다가 훗날 일부를 찾아내 천호산에 안장하였다.
박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순교자들은 임금의 명을 거역한 역적이므로 죽어서도 얼굴을 바르게 세워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다. 1983년 5월 10일 여산 순교자들의 유해를 천호산에서 발굴하였을 때 순교자들의 두개골은 한결 같이 얼굴 쪽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순교자의 유해 발굴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라고 한다.
이곳 여산 숲정이에서 치명한 이들 가운데 10명의 시신은 신도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자루에 담아서 야음에 천호산으로 짊어지고 와서 안장시켰다고 한다. 천호 성지에 가면 성인들 묘소 아래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를 볼 수 있다. 그 순교자들 모두가 이곳 여산에서 순교했다. 따라서 이곳 여산 성지와 천호 성지는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axkorea.kr%2Fbbs%2Fdata%2F1001%2Fyeosan-supjungi-4.jpg)
■ 순교자
◆ 김성첨 토마스( ? ∼1868)
그의 본관은 선산 김씨이며 함양 출신으로 언젠가는 알 수 없어도 넓은 바위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던 중 1866년 1월 고산 관아의 포졸들이 이곳을 수색하여 신도들을 체포해 갈 때 그의 사촌인 김 프란치스코를 대신해서 끌려갔다가 석방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1868년 9월 10일이었다.
여산 포교 일행 28명이 넓은 바위를 덮쳐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여산 포교들은 해당 고을의 사법권이 없다 하며 완강하게 저항하므로 포교들은 할 수 없이 물러갔다. 그런지 4일 후 여산 포교들은 고산 포교들을 앞세우고 다시 찾아와 그를 체포하여 고산 관아로 끌고 갔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고산 주민들에게도 김성첨은 알려진 인물이었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에게 배교한다면 여산 부사에게 상신하여 석방해 주겠노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성첨은 만 번 죽을지라도 배교는 천만부당한 일이라면서 여산 부사에게 이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여산은 고산과 진산을 관장하였고 영장(營將)이 있어 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김성첨은 다른 10명의 신도들과 여산으로 압송되어 와서 영장으로부터 심문을 받고 혹독하게 형벌하는 받았다.
김성첨과 함께 갇힌 신도들 중 다섯 명은 그의 종질과 재종손이었다. 그는 혹형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며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위로하며 격려하였다. 김성첨은 신도들과 함께 아침저녁 기도 등을 공동으로 합송하며 기도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었다.
김성첨과 함께 끌려간 신도들은 그해 10월 21일(양력 12월 4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으나, 김성첨은 그의 종손 마티아와 함께 11월 10일(양력 12. 23) 교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2세(어떤 기록은 57세)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