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단을 세우고 토대를 다진 정화의 주역 청담스님이 1971년 11월15일 입적했다. 기마경찰이 호위하는 가운데 스님의 법구가 동국대를 나와 도선사로 향하고 있다.
1971년 11월15일 밤10시 15분 조계종 총무원 청사 내 총무원장 실에서 총무원장 청담스님이 입적했다. 세납 70세, 법납 44세였다. 이날 아침7시께 주석하던 도선사 앞 뜰에서 쓰러진 청담스님은 오전9시40분 께 우석대학병원으로 이송돼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회생 가망성이 없다는 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오후5시 총무원장실로 옮겼다. 극비에 붙였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스님, 신도들이 병원을 찾아와 병실 복도를 꽉 메웠다. 종정 고암스님, 종단의 중진 스님들, 상좌 3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님은 입적했다. 입적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자 총무원 주변과 조계사 경내에 있던 사부대중은 땅에 엎드려 통곡했다.
정화 주역, 종단 출범·발전 토대 마련한 종단 상징 평가
강력한 지도력·추진력 발휘, 종단 위기마다 나서서 극복
스님은 전날 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군포교에 많은 열정을 쏟았다. 스님이 참석한 마지막 외부 공식행사는 13일 열린 강원도 원주 1군 사령부 법당 법웅사 준공식이었다. 청담스님은 이 자리에 1군 사령관 한신(韓信) 대장과 정권의 실세이던 이후락 씨, 강창성 장군 등과 함께 참석해 법문을 하고 격려했다. 스님은 “오늘 건립되는 법웅사는 장병들에게 생사일여의 뚜렷한 젊은 뜻을 깨치게 하여 승공통일 정신을 함양하는 곳이 될 것으로 기대 한다”는 법문을 했다. 법웅사 이지행 법사는 청담스님에게 유치원이 필요하다는 부탁을 했고 스님은 흔쾌히 수락했다.
전 날인 12일에는 지금은 보라매 법당으로 이름이 바뀐 대방동 공군사관학교 법당 호국 성무사 준공식에 참석했다. 10일에는 이화여대를 찾아 법문했다. 불교 인사가 기독교 계통 학교인 이화여대를 찾아 강의한 것은 처음이었다. 13일 원주 법웅사 법회에 참석하고 귀경해 오후에는 서울 원각법회에 참석해 법문한 청담스님은 14일은 일요일이어서 도선사에 머물렀다. 오전에는 신도들의 야외법회에 동참하고 오후에 법회에서 법문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일어난 뒤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영결식은 19일 오전11시 동국대 대운동장에서 종단장으로 거행됐다. 종단장은 거의 국장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박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보내 조문토록 했으며 빈소에는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 백두진 국회의장, 김수환 추기경, 최덕신 천도교 교령 등 정 관계 종교계 인사들이 모두 다녀갔다. 영결식을 마친 스님의 법구는 장충체육관, 서울 운동장 앞, 동대문, 종로5가, 혜화동 서울 문리대 앞, 혜화동 로터리를 거쳐 도선사로 운구 됐다. 스님의 법구가 지나는 길가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애도했다.
조계종단 설립자이며 설계자이던 거목이 가고 정화의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정화운동을 통해 탄생했다. 정화운동은 비구 비구니 스님과 재가자들뿐만 아니라 정 관계인사 및 학자들이 모두 힘을 보탠, 한국사회의 정신 문화 혁신 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간이 길고 동참 인원이 많은 만큼 어느 한 두 명을 대표자로 꼽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대표자이며 상징인물을 들라면 누구든지 주저 없이 청담스님을 꼽는다.
청담스님이 본격적으로 정화운동에 나선 때는 1954년 8월29일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부터다. 처음에 망설였던 스님은 한번 결심하자 무섭게 열중했다. 초기에 정화를 이끌었던 고승들 대부분은 1955년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자 지방의 사찰로 내려가 선원을 열고 후학들을 공부시키는데 집중한다. 4.19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뒤 종단은 큰 위기를 겪는다. 이에 순교(殉敎)를 각오하면서 버텨낸 분이 청담스님이다.
5.16 군사 쿠데타로 다시 한번 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적극적으로 활로를 모색한 주인공이 청담스님이었다.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서슬퍼런 시절 청담스님은 박정희 의장의 장모와 불교 간 연결고리를 찾아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 결과가 비구승 측에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진행되던 소송의 취하였다. 군부가 강제 소송 취하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면 비구승 중심의 통합종단 출범은 어려워졌을 것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청담스님을 일컬어 ‘혁명가 유형’에 가깝다고 평한다. 목표를 향해서는 절대 좌고우면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추진력에다 뛰어난 대중 동원력, 좌중을 사로잡는 권위 등을 두고 이같은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열반 5일전 이화여대에서 강의하기 위해 기다리는 청담스님과 시자 혜성스님.
청담스님의 가장 큰 업적은 조계종단을 출범하고 토대를 마련한데 있다. 스님은 정화 후 종단의 토대를 만든 뒤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그 기초를 다졌다. 통합종단 출범 후 초대 중앙종회 후반기 의장, 종정, 장로원장, 총무원장 등을 맡아 종단의 토대를 다지는데 주력했다. 총무원장을 맡고 난 뒤 스님이 한 일은 많다.
2003년 지금의 역사문화기념관으로 변한 총무원 청사 기공식, 소임을 맡은 스님들을 위한 현대식 교육인 중앙교육원 개원, 세계고승대법회, 세계불교지도자 대회 등 각종 국제불교대회 유치 등 많은 성과를 냈다. 스님은 종단 3대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위해 총무원 부장을 젊고 유능한 스님들로 채우고 각종 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종단 발전을 위한 의욕을 냈다. 스님이 바라는 종단은 다름 아닌 스님들이 수행 잘하고 신도 포교에 적극 나서는 아주 단순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종정 때 해인사에 총림을 설치하고 총무원장 때는 중앙교육원을 설립했다.
강력한 지도력을 통한 추진력은 필연적으로 반대자를 양성한다. 청담스님과 가장 가까이서 함께 걸어온 경산스님과 일시적이나마 갈등이 생긴 것은 특히 아픈 대목이다. 당신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는 욕심은 반대세력을 만들었다. 1960년대 후반 나타난 종단 혼란의 중심에 청담스님이 서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화 후 나타난 스님들의 비행과 지지부진한 종단 개혁, 정화운동 폄훼 등을 바로잡아야하는 당위는 공감하면서도 이를 해결하기위해 사용한 극약처방, 종단행정 직접 개입이 옳았는가 하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입적 전날까지 법문, 군 포교 현장 방문, 梨大 찾아 강의
청담스님 이후 강력한 지도력 상실로 7년간 혼란에 빠져
경산스님이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 4년을 무문관에 들어가 잠시 현실에서 비켜선 것과 달리 청담스님은 어렵게 정화에 발을 디딘 후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다. 빨리 종단을 반석에 올려놓아야한다는 조급함과 열정이 스님의 입적을 앞당겼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청담스님이 만약 현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수행하면서 10여년을 더 종단을 지켰다면 1970년대 중 후반 종단의 모습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스님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종단이 그토록 극단으로 흐르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스님이 총무원장을 맡으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분열 조짐을 보이던 종단이 조용해졌다. 스님의 강력한 추진력과 권위가 분열의 싹이 움트는 것을 막은 것이다. 일시적으로 안정되었던 종단은 스님의 열반으로 곧 거센 회오리에 휘말린다. 종단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스님들의 자질은 높지 않았으며, 의욕에 비해 운영 능력은 떨어졌다. 경험도 없었고 불교 재산이 얼마 되는지 알지도 못했다. 비리가 개입될 소지가 많았다. 부족한 점을 청담스님이라는 강력한 권위로 다스려 왔는데 그 리더쉽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청담스님 입적 후 총무부장 광덕스님이 서리로 선임되어 종단을 수습했다. 1971년 11월22~23일 제27회 정기 중앙종회를 열고 새 총무원장에 파벌색이 없는 석주스님을 모셨다. 총무부장 광덕스님, 재무부장 성준스님, 교무부장 월주스님, 사회부장 청하스님은 모두 유임됐다.
청담스님 재직 시절부터 추진해오던 승려이동질서법이 그대로 추진되었다. 혹시해서 다시 들춰낸 봉은사 땅 매각 사건은 아무런 문제가 없음이 드러났다. 이듬해 7월 교단정화사를 편찬하기로 결의했다. 청담스님의 입적으로 종단 정통성에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많이 제기돼 이를 불식하기위한 조치였다.
1년간 종단을 무난히 이끌던 석주 스님이 1972년 12월11일 돌연 사표를 냈다. 그러자 지지파와 반대파가 대립해 종단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청담스님 체제가 석주스님 체제에서도 그대로 지속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스님들이 계속해서 총무원을 압박해왔던 것이다.
석주스님에 이어 초대 후반기부터 10여 년 간 중앙종회의장을 맡았던 벽안스님도 자리를 물러난다. 1973년 1월 새 총무원장과 중앙종회의장이 선출되고 종단은 새로운 체제를 맞이한다. 하지만 청담스님의 공백은 컸다. 이후 7년간 종단은 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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