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Today’s Meditation)
본문 :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 19절(Heb 11:13~19)
성경에서 제시하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종교개혁 전에 로마카톨릭 교회는 믿음이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선한 행위를 많이 하므로 선한 업을 쌓는 것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성경을 통해 발견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예정하시고 때가 이르러 택한 백성들에게 은혜와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믿게 하심으로 구원 얻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람들이 구원 얻기 위해 행하는 선한 행위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구원과 복주시기 위해 행하신 모든 것을 수용하(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3절에 언급된 이 사람들은(All theses people) 누구입니까? 문맥상 2절에 나온 믿음의 선진(the ancients of Faith)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된 것들을 받지 못했습니다. 개역 개정판에서는 “약속들을 받지 못했다”고 나오지만 영문 NIV 성경에서는 “약속된 것들을 받지 못했다고 표현합니다.(the thing promised).”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표현과 약속된 것들을 받지 못했다는 표현은 의미상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진들에게 약속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이며 .. 약속된 것들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이 믿음의 선진들 시대에 성취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번역과 약속된 것들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의미상 큰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후자인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다는 표현이 번역상 올바르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을 어떻게 기다렸습니까?
첫째 그들은 멀리서 그 약속들을 보았습니다. 멀리서 보았다는 것은 이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시대에는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보지 못했으나 장차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그 약속들이 성취될 것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또는 땅의 모레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은 아브라함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후손들의 숫자가 그야말로 바다의 모레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진 것을 보면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약속이 성취된 것을 봅니다.
둘째 그들은 그 약속들을 환영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셋째 땅에서는 자신들이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외국인처럼 혹은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는 어느 곳에 정착하여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잠시 그곳에 머무를 뿐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자신들이 영원히 머물 수 없고 오직 잠시 머무를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넷째 이 땅이 자신들이 돌아갈 본향이 아니고 더 나은 본향, 즉 하늘에 있는 것을 사모함으로 기다렸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하늘에 있는 본향은 자신들이 태어나서 자란 본향보다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본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 진정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믿음의 선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하나님이라 불리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한 성(a city)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성은 영원한 천국(The eternal heaven)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주할 영원한 도성인 천국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자기의 백성들을 위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천국에서 우리들이 있을 곳을 예비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지난번 묵상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다시 언급합니다. 17절에서 19절에 언급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에게 있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고 나이 100세나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에 믿음으로 바쳤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격은
첫째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인도하시고 또 자신을 연단하셔서 믿음의 순종을 훈련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절대적으로 믿음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받고 얻었던 독자 이삭이라도 바칠 수 있는 순종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18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음을 상기시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레와 같이 많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무슨 일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아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레와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믿었기에 아들을 죽여서 제물로 바친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셔서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믿음이 필요하며 그 믿음을 소유하고 그 믿음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