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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23일 토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클레멘스 1세 교황 순교자 또는
[백] 성 골룸바노 아빠스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힌 두 예언자가 죽음을 당한 뒤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 두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1,4-12
나 요한에게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나의 두 증인이 있다.”
4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5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9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10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는 두 증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두 증인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를 가리킵니다.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묵시 11,6)은 아합 임금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삼 년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한 엘리야를 떠올리게 하고(1열왕 17,1 참조),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묵시 11,6)을 가진 예언자는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킨 모세를 떠올리게 합니다(탈출 7,14-12,13 참조).
이 두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며 자신의 사명을 다하였지만, 사명을 마친 뒤 지하의 짐승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도성 한길 가에 내버려집니다. 사흘 반 동안 무덤에 묻히지도 못합니다. 마치 악이 승리한 듯 보이고, 이 예언자들은 조롱거리가 됩니다. 불의한 자들은 예언자들의 죽음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을 일으키시고 하늘로 불러올리시어, 그들의 승리를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실 하느님에 대한 희망입니다. 부활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결국 선이 승리하고 악이 심판받으며 모든 것이 질서 잡힐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해결하실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부활이 없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은 아무 쓸모가 없을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계심과 그분께서 이루실 하느님 나라는 지금의 우리의 노력을 의미 있게 합니다. 부활에 대한 전망은 이 세상에서 정의를 위한 작은 노력이, 비록 큰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완성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라는 것을 보증해 줍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죽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에서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과 위로로 가득찬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언젠가 우리의 수명이 다하는 날, 우리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 은혜롭고도 영광스럽게 주님 부활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은 천사들과 같아진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게 된답니다. 육신의 허물을 벗은 우리 모두는 더 이상 혈육에 연연하지 않는 주님의 자녀가 된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요.
위령 성월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 자주 죽음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의식은 철저하게도 차별화됩니다.
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은 거부하고 도망치다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다가오면 온 몸이 경직되고 살이 떨리며 두려움에 사지를 떨게 됩니다. 끝이요 멸망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죽음의 순간은 그토록 간절히 고대해왔던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고,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다시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니 기쁨의 순간이요 축제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께만 희망을 걸고 살아왔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천상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결국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께로 나아가고 나면 천사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될것입니다. 주님 곁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존재로 재창조될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이지만,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죽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그분 자비의 품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같은 내용이지만 이름에 따라서 의미가 무척 다르게 다가옵니다. 같은 사람인데 ‘개똥이’라고 부르면 왠지 가볍게 느껴집니다. 흔하게 느껴집니다. 같은 사람인데 ‘우주’라고 부르면 왠지 귀하게 느껴집니다.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른들은 아이의 이름을 정할 때 신중하였습니다. 기업에서도 제품의 이름을 정할 때 막대한 비용을 기꺼이 지출합니다. 그만큼 이름이 매출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도요타는 성능과 품질에 비해서 저렴하게 취급받았습니다. 도요타는 자동차의 브랜드를 아예 ‘렉서스’로 바꾸었습니다. 같은 도요타의 자동차이지만 렉서스는 미국에서 성능과 품질은 물론 가격에서도 충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름을 바꾸었을 뿐인데 인식이 바뀐 겁니다. 미국에서 현대도 성능과 품질에 비해서 저렴하게 취급받았습니다. 현대는 자동차의 브랜드를 아예 ‘제네시스’로 바꾸었습니다. 같은 현대의 자동차이지만 제네시스는 미국에서 성능과 품질은 물론 가격에서도 충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름을 바꾸었을 뿐인데 인식이 바뀐 겁니다.
본당 설정 50주년을 준비하면서 ‘건축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사제관과 수녀원 건축, 체육관 건축, 교리실 확장, 축구장 설치, 납골당 건축’과 같은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건축위원회는 ‘왜’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해서 필요한 시설을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시설을 만드느냐였습니다. 건축위원회는 두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는 찾아오고 싶은 성당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향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땅이었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해서 만들어지는 시설은 교우들이 언제나 다시 찾고 싶은 성당이 되게 하자는 의미를 담자고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성당입니다. 타주로 이사를 갔어도, 한국으로 갔어도 다시 올 수 있는 성당이 되게 하자는 의미를 담자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는 이유는 그곳에 예수님의 발자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곳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고, 그곳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납골당’에 대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납골당이라는 이름 대신에 ‘추모관’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납골당이라고 하면 뼈를 모아 놓은 곳처럼 느껴집니다. 추모관이라고 하면 기억이 담겨 있는 곳처럼 느껴집니다. 저를 지탱하는 건 61년 동안 살아온 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지탱하는 건 몸이라는 육체와 더불어 61년간의 기억입니다. 기억은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연결해 줍니다. 기억은 절망 중에도 희망을 줍니다. 기억은 두려움 속에서도 담대함을 줍니다. 기억은 슬픔 속에서도 위로를 줍니다. 기억은 어쩌면 존재의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기록과 나의 작업이 삭제된 컴퓨터는 그냥 컴퓨터이지 나의 컴퓨터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서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독서는 구약의 두 인물을 기억해 냅니다. 율법의 상징인 모세와 예언의 상징인 엘리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율법과 예언으로 시작되었지만, 우리의 신앙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활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저는 부활의 상태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바로 지금이 부활의 때입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
<삶 너머 삶 앞의 삶>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삶 앞의 삶을
살기에
삶 너머 삶을
헤아릴 순 없지만
삶 너머 삶을
믿기에
삶 앞의 삶은
올곧게
삶 너머 삶을
바라기에
삶 앞의 삶은
기쁘게
삶 너머 삶을
사랑하기에
삶 앞의 삶은
따뜻하게
삶 앞의 삶이
삶 너머 삶을
닮아갑니다
오늘의 성인
성 클레멘스 1세(Clement I)
신분 : 교황, 교부, 순교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30?-101년?
같은 이름 ; 글레멘스, 끌레멘스, 클레멘쓰, 클레멘트
성 켈수스(Celsus)와 성 클레멘스(Clemens)에 대해서는 로마(Roma)의 순교자라는 것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91년경 교황 성 아나클레투스(Anacletus, 4월 26일)를 승계해 제4대 교황이 되었으나,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의 박해 때 크림(Krym) 반도로 귀양을 갔다.
성 골룸바노(Columban)
신분 : 설립자, 수도원장, 선교사
활동지역 : 보비오(Bobbio)
활동연도 : 540-615년
같은이름 : 골롬바노, 골롬바누스, 골롬반, 골룸바누스, 골룸반, 콜롬바노, 콜롬반, 콜룸바노, 콜룸바누스, 콜룸반
아일랜드의 웨스트 렌스터(West Leinster) 태생인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 또는 골룸바노)는 그의 모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아주 어렸다고 한다. 그는 얼마동안 신넬(Sinnel)이란 수도자와 함께 언(Erne) 호수의 수백 개의 섬 중의 하나인 클루아인(Cluain) 섬에서 살다가 뱅거(Bangor)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12명의 다른 수도자와 함께 프랑스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고(590년경), 이 선교활동이 성공적이었으므로 뤽세이유(Luxeuil)와 퐁텐(Fontaine) 지방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추종자들이 유럽 전역을 선교하면서,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반대를 받았는데, 특히 프랑크계의 주교들로부터 극심한 반대를 받았다. 그는 성좌에 서한을 보내어 실정을 보고하는 한편, 603년에 샬롱(Chalon)에서 개최된 갈리아(Gallia) 시노드에 불참하면서 항의하였다. 또한 610년에는 부르고뉴(Bourgogne)의 국왕 테오도리쿠스 2세의 결혼을 반대함으로써 이 지역의 모든 아일랜드 수도자가 추방당하는 곤경을 겪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롬바르디아(Lombardia)의 아리우스계 왕인 아지올드의 영접을 받고 이탈리아 선교에 착수하였다. 그는 보비오, 밀라노(Milano), 제노바(Genova) 등지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들 수도원들은 그 당시에 학문과 문화 그리고 영성의 중심지로서 큰 기여를 하였다.
성 콜룸바누스는 자신의 수도회 규칙, 강론집, 시 그리고 아리우스(Arius) 이단 반박문 등 수많은 글을 남겼다. 그는 615년 11월 23일 자신이 발견해서 성모님께 봉헌한 보비오 수도원 부근의 한 동굴에서 생활하다가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보비오에 있는 성 콜룸바누스 성당의 지하에 모셔져 있다.
성녀 펠리치타(Felicity)
활동년도 : +165년
신분 : 과부, 순교자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펠리치따스, 펠리치타스, 펠리키따스, 펠리키타스, 필리서티
성녀 펠리치타(Felicitas)는 귀족으로 세례를 받은 부인인데 남편과 사별한 뒤로는 과부로서 하느님을 섬기고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으며, 자선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은 열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래서 이 열심한 부인 때문에 귀족 집안이던 그녀의 집안에 있던 우상들이 모두 제거되었는데, 이것을 보고 이교도의 사제들이 그녀를 고발하였다.
그래서 그녀와 그녀의 자녀 일곱 명이 황제 앞으로 끌려가서 이교도의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도록 강요당했다. 이때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위협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영이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이에 심문관이 그럼 죄 없는 자녀들마저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그녀는 “만일 그들이 신자라면 영원히 살도록 힘쓸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불을 기다려야 할 뿐입니다”고 대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리하여 황제는 그들을 각기 다른 형벌로 죽임으로써 모두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되었다.
보통 7형제(the Seven Brothers)로 불리며, 성녀 펠리치타의 자녀로도 주장되는 순교자들은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성 비탈리스(Vitalis), 성 마르티알리스(Martialis),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펠릭스(Felix), 성 필리푸스(Philippus) 그리고 성 실바누스(Silvanus)로 알려져 있다. 7형제의 축일은 모두 7월 10일에 기념하고 있다.
복녀 마르가리타(Margaret)
활동년도 : +1464년
신분 : 과부
지역 : 사보이아(Savoia)
같은 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말가릿다
사보이아 공국의 아마데우스(Amadeus) 왕과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마르가리타(Margarita)는 두 자녀를 둔 홀아비인 테오도레(Theodore)란 사람과 결혼하였다. 그녀 자신에게는 자식이 없었지만 남편을 극진히 섬겼을 뿐만 아니라, 제노바(Genova)에 기근과 전염병이 극성을 부릴 때에는 자신을 온전히 잊어가면서 주민들을 간호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던 중 1418년에 남편과 사별한 후 그녀는 성 빈첸시오 페레리우스(Vincentius Ferrerius, 4월 5일)의 도움을 받아가며 기도생활에만 몰두하면서 25년을 살았다. 또한 그녀는 주님의 환시를 보는 도중에 질병과 중상 그리고 박해의 세 글자가 적힌 화살 세 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모두 그녀가 받을 고통을 의미했다고 한다. 결국 이것이 사실로 나타났는데, 그녀는 위선자라는 고발과 동시에 중병에 걸렸으며 또 발도파 이단이라는 누명을 썼다. 그녀는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운명하였다. 그녀는 1669년 교황 클레멘스 9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복자 미겔 아우구스티누스 프로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과달루페 멕시코
활동연도 : 1925 - 1927
같은이름 : 미겔, 미카엘, 오스틴, 아오스팅, 프로
미겔 아우구스티누스 프로는 1891년 멕시코의 과달루페 데 사카테카스에서 태어났습니다.
1911년에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조국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멕시코가 아닌 벨기에와 스페인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926년 사제서품을 받고 멕시코로 돌아왔지만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비밀리에 사목활동을 하였습니다.
악의를 품은 이의 무고(誣告)로 인하여 1927년 11월 23일 아침, 프로 신부는 전 국가원수 살해기도 미수 및 반정부 종교지도자, 불법공동체 운영등의 죄목으로 재판도 없이 바로 총살형을 당하게 된다.
사형 집행장에서 소총수들 앞에 선 프로 신부는 군인들을 행해 강복을 준 후, 잠시 무릎을 꿇고 짧게 기도를 했다.
그는 눈가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한 손엔 십자가와 다른 손엔 묵주를 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모습처럼 양팔을 벌리고 서서 큰 소리로 "당신들에게 주님의 자비가 있기를!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라고 부르짖고 "주님, 저는 무고하오나 진정으로 저들을 용서하겠습니다" 라고 외쳤다.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된 미겔 아우구스티누스 프로는 타고난 밝은 기질과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사목활동에 헌신했던 모습을 통해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