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9일 Gulf of Alaska 항해 중
계속 시달렸는데 어제 밤부터 잠깐 바다가 조용하다.
아침에 일어나 선교에 올라갔다.
눈이 내려 갑판이 하얗고 시정은 좋지 않다.
작동 중인 레이다와 자동식별 장치를 확인하니 주변에 아무 것도 없다.
근처에 접근하는 선박들이 없음을 확인한 후 마음을 놓고 밤사이 수신한 항해 관련
정보들을 검토하며 해도 위에 어제 새벽부터 보고 있던 폭풍의 진로를 작도한다.
예측하던 대로다.
본선을 겨냥하고 그대로 올라오고 있다.
본선 금일 야간 Sanak 섬을 우현으로 보고 접근하여 Unimak Pass를 내일 새벽에
통과하는데 내일 새벽 3시 경에는 정통으로 폭풍 중심을 돌파해야한다.
지금 항해 중인 조용한 이 해역은 앞으로 열두어 시간 후면 폭격이 시작되면서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서쪽 알래스카 만 전체가 지금 접근하는 이 폭풍으로 평균 파도 높이 38피트, 풍속은
전체적으로 시속 65노트에 이를 것으로 보이고 지금 항해하는 이 해역은 폭풍 지나간
직후의 위험반원에 들어가 급속히 아주 좋지 않은 모습으로 변하는데 조속히 베링 해에
들어가 오히려 알류산 열도에 접근하여 속항하는 것이 그래도 직접적인 노출을 조금이라도
줄일 것 같기에 일단 최고 속력으로 항해토록 기관실에 지시하고 다시 본선이 폭풍 중심
통과할 상황의 상세 점검을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베링 해에 들어가면서 폭풍의 북쪽을 통과해야 한다.
그 후 폭풍을 동쪽으로 보내면서 뒷바람을 받으며 서항하면 가장 좋겠으나 중심에
휘말린 후 강한 역풍과 선수 방향의 대파를 맞을 확률이 더 크다.
폭풍의 중심을 통과하며 갑자기 고요할 두어 시간을 최대한 이용해서 기관 최고 속력으로
빠져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다행히 중심을 통과한 후(규모로 보아 눈은 형성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닥칠 남쪽
방향에서 오는 대파를 알류산 열도에 흩어진 섬들이 좀 막아주기도 할 것이고 그 후 열
서너 시간의 황천을 파도와 선수 방향, 기관을 적절히 이용하면 견뎌 낼 수 있을 것이다.
암흑의 시야와 비산되는 파도 때문에 시정이 극히 악화되어 파도 방향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최대한 냉정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동경 앞 바다에서 1004밀리바로 움직이기 시작한 저 놈이 시속 40~50노트로 북동진하며
990-970밀리바로 발달하더니 내일 새벽 본선과 정통으로 조우할 때는 967 밀리바까지
강해진다.
아무튼 가야하는 상선의 숙명과 알래스카 만을 전체적으로 뒤덮는 넓은 저기압 세력권
때문에 피치 못해 만나게 되는 이런 불편한 만남들이 종종 있다.
벌써 이번이 미국 출항 후 두 번째이지 않은가.
북태평양 바다가 요즘 급하게 바뀌고 있다.
십 오년, 이십년 전에는 저기압 흐름에 일정한 패턴이 있었는데 요즘은 공식은 모두
무너지고 깨져 종잡을 수 없는 흐름으로 바뀌고 있다.
갑자기 생기고, 가다가 뒷걸음질 치기도 하며, 한자리에서 계속 맴도는 녀석도 있고,
그러다가는 무서운 속도로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리기도 한다.
5천 미터 상층 500밀리바 기상도를 보면서 예측해도 안보이며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지난 항차 캄차카 반도 밑에서 같은 저기압을 두 번 만나기도 했을 때는 고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계속되는 이런 이변은 결국 우리 인간들의 책임이리라.
아까는 일등항해사가 계속되는 악천후 상황이 잠깐 진정되어 갑판을 검사했는데 선수에
설치된 소화전 박스가 파도에 유실되었을 뿐 큰 손상은 없다고 보고한다.
다행이다.
1984년도에 일본에서 건조된 노후선으로 선체 강력 구조에 문제점이 자꾸 발견되어
마음이 무겁던 차다.
이번의 황천항해가 지나가면 검사 가능한 탱크를 열고 내부를 검사하여 강력 주부재들이
지난 항차와 비교해서 손상을 더 입었는지, 진행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아볼
예정인데...
언제나 해상이 좋아 질 것인지.
오전 내내 선교에서 폭풍의 진로와 본선의 대비책 분석, 바다를 바라보며 있다가 점심을
먹으러 내려왔다.
아침부터 몸은 물먹은 솜처럼 피곤하지만 오늘 밤과 내일 오전, 그 후 얼마가 지나면
좀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피곤하더라도 치러야 할 것은 피할 수 없으니 별 수 있겠는가.
이번 말고도 오호츠크 해, 베링 해 서부에서 기다리는 두 녀석이 또 있고 동해 북쪽
블라디보스톡 앞바다에서도 동북동쪽으로 오면서 발달하고 있는 놈도 하나 더 있다.
부산으로 가면서 또 어떤 저기압이 생겨 반길 지 알 수가 없지만 이쪽에서 사는 숙명이라 생각하고 견디어 나가자.
지난 세월 많이 경험했고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 치러내야 할 일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선교에 올라가니 접근하는 저기압의 영향으로 바람 방향이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는 거의 북풍이었는데 지금은 우현 선미
방향으로 한참을 돌아 동풍으로 바뀌었다.
풍향이 변하고 아침 일찍부터 무리를 감수하며 기관을 최고 회전수까지 올려놓아 본선은
예정 항로를 전속으로 달리고 있다.
그 사이에 수신한 NWS와 JMH의 폭풍 위치 정보가 경도 1도 정도 차이가 있지만 본선을 똑바로 보고
접근하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폭풍은 이미 아침 여덟시에 북위 50도 선까지 북상하고 있다.
예상보다 조금 약화되어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놓인다.
본선 오늘 정오 위치는 북위 54도 01분, 서경 159도 44분, 온 거리 1588마일, 부산까지
갈 거리 3147마일. 도착 예정 시간 3월 12일 2200시. 정상 항해 같으면 3월 9일 이면
부산 도착 할 수 있었는데 포틀랜드 출항 후 악천후를 계속 만나는 바람에 본선 속력이
아주 형편없었다는 이야기다.
기압계에서 기압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아침에 1012밀리바였는데 오후 네 시의 기압이 995밀리바이다.
풍속도 사십 노트 정도로 강해지며 해상에 백파가 가득한데 선체는 눈이 오고 어두워지는
바다를 육중하게 진동하며 묵묵히 가고 있다.
몇 시간 안으로 갑자기 힘들어지는 시간이 오리라.
조금 있다가 발전기를 병렬 운전하라고 기관실에 통보해야겠다.
이번 부산 기항 중 한국 선급과 국토 해양부에서 시행하는 ISM과 ISPS 외부 심사가 있다.
육지에 닿으면 짧은 기항 일정 중 치러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번 아니면 다음번 국내 항 기항 시 기국 검사도 있을 거고 선급 연차검사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국제법, 국내법령들이 강화되고 세분화되면서 맞춰서 많은 일들이 생긴다.
귀찮고 짜증나는 일들이지만 그 또한 피하지 못할 일들이다.
우선 오늘 밤과 내일 새벽이 많이 길겠지만 이것부터 견디고 볼 일이다.
가끔 생각한다.
누구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깐일망정 쉬고 싶을 때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내 삶에 과분한 호사일 것이다.
책임 질 일 밖에 보이지 않던 인생이었다.
아직 무너지지 않았으니 대개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 거다.
한 밤중 담배를 피우며 홀로 위스키 한잔을 두고 껌벅거리면서 앉아 있다가 잠들면
다음날 아침이 또 온다.
짧은 휴가 기간 중 잠깐 사람 사는 시늉을 내다가 다시 돌아와 맞는 건조한 일상들이
이어지던 수십 년의 세월도 이제 끝이 보이는 시간, 별로 긴 세월이 아니었으니 그 다음도
잠깐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두자. 그러면 조금 더 편해진다.
후기, 3월 2일 아침
피할 수 없어서 했던 정면 돌파가 다행히도 통했음.
어제 새벽 4시 조금 넘어 남동쪽에서 급속도로 접근하는 폭풍 중심을 20여 마일 앞으로
통과했다.
지근거리여서 거의 중심을 통과한 것이겠지만 극한 상황은 다행히 면한 셈이다.
아침 일곱 시 예정보다 조금 늦게 Unimak 해협을 통과해 베링 해에 들어왔다.
오전, 오후 선교에서 강풍이 남서, 북서풍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내려와 저녁 먹으며
술을 좀 마시고 양치질도 하지 않고 깊이 잠들었다.
아홉 시간 넘게 잘 잤다.
오늘 아침 일곱 시 일어나니 갑판이 얼음으로 뒤덮이고 많은 곳에 고드름이 얼었다.
코만도르스키 섬 남쪽을 보고 간다.
3월 5일 경 또 하나의 폭풍이 기다리고 있다.
첫댓글 이글을 보고 있자니 내가 폭풍속에 있는
선장이 된것같아 대책이 안서네
서선장 글을 읽고 나니 마치 한 편의 공포! 스릴! 서스펜스 대작 영화를 보듯 긴장감이 고조되다가 겨우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네. 강하고 중차대한 결정을 수 많은 정보와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여 거함을 리딩하는 자네가 정말 자랑스럽기 그지 없네. 친구의 현재와 나를 비교 해보니 간 나약함과 불만만 표출했던 내 지난 날들이 정말 부끄럽고 바보스럽게만 느껴지는구먼~ 자네 글을 읽으며 많은 교훈을 얻게 되서 정말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네. 언제나 안전과 건강 우선하여 챙기고 늘 행운의 여신이 자네를 보살피도록 진심을 담아 기도하겠네. 서선장! 화이팅!!!!!!!!!!!!!!
그렇지 이제는 끝이 보이는 시간이 와가네. 우리 모두가 그동안 젊음과 열정을 바쳤던 나름의 바다. 그래서 바다가 깊은 모양이네. 인생도 그렇고.... 우리의 내면을 자네는 실생활에서 현상을 보여 주는구만. 자네는 친구중 유일한 투사일세.
고맙네 친구들. 살면서 이렇게도 힘을 얻을 수도 있구먼.
대영아.진심을 담아 기도하겠다는 목소리를 참 멀리 하면서 살아왔네. 정말 고마우이.
내가 쓴 것에서 무슨 교훈을 얻는 것은 아닐 것이네.
생전 처음 인터넷에 들어와서 이렇게 만나는 친구들의 삶에서 많은 것을 느끼며 얻네.
모두들 창회 말대로 각자의 바다에서 훌륭하게 성공해내는 모습들을 감탄을 하며 보고 있네.친구들 모두 잘 살아온 것이 눈앞에 보이듯이 펼쳐지네. 각자 인생속 파도와 태풍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낸 우리 친구들의 모습을 몇차례 보아왔네만 한겨울 바닷가에서 본 동요없이 고요한 종수의 얼굴에서 친구들의 성공한 삶을 대표적으로 보았었네.고마워.
병인아. 폭풍속의 선장이 된 것 같아 대책이 안 선다고.. 혼동하지 않기를. 네 인생의 선장은 너였으며 단순하게 지나가는
내 상황보다 훨씬 더 성공적으로 극복해내고 치열하게 투쟁한 투사가 너 자신이었음을 기억하기를 진심으로 바래. 대영이도 그렇고........... 그리고 창회. 일억 오천만원을 십오천이라고 겸손하게 속삭이던 사색하며 살아온 흔적들을 보며 얼마나 내가 부끄럽던지... 대영이가 말한 그, 진심을 담아 기원하겠다는 음성은 또 어떻던가. 나 살아내기가 급박하고 바빠서 지나간 것들을 뒤돌아보지 못하고 살아왔던 삶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심란해 하던 어젯밤의 깨우침은 무엇이었나. 참 부끄럽게 돌아보았던 기억일세.
삶의활력소 대상 서충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