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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불자들이 얼마나 속아 왔는지 함 보십시오
불교의 세계관
아비담마 해설서 (강종미 번역)에서 요약 정리
4악도((ap?ya)
지옥(niraya)
야마왕 : 사천왕천인 중에 포함되는 ‘궁전을 가진 아귀’(vam?nikapetti) 왕을 야마왕이라고 부른다. 낮 동안에는 천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밤 동안에는 나쁜 악업의 결과로 다른 아귀처럼 고통을 겪는다. 야마왕은 한명이 아니고 많이 있다. 인간세계에 정부관리가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처럼 야마왕들도 사면에 창이 있는 지옥의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지옥에 들어온 사람들을 조사하고 질문한다. 지옥에 들어온 모든 사람이 조사를 당하진 않는다. 불선업이 커서 지옥에 던져짐이 분명한 사람들은 단번에 지옥에 떨어진다. 불선업이 작은 사람들은 구제되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야마왕 앞에서 조사를 받을 기회를 얻는다. 야마왕이 조사함은 허물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벗어날 기회를 주기 위해 선업을 상기시키게 한다. 야마왕들은 오늘 날의 변호사와 같다. 그러므로 야마왕은 법을 지키는 훌륭한 왕일뿐이다.
지옥사자 : 지옥사자(저승사자)들 역시 사천왕천인 종류에 속하는 나찰들이다. 지옥사자들은 아주 작은 불선업으로 떨어져 들어온 사람들을 야마왕 앞에 데려오고 지옥에 도착한 사람들을 무자비한 사형집행인처럼 잔혹하게 찌르고 괴롭히는 일을 한다. 지옥의 불을 ‘업으로 인하여 생겨난(kamma paccaya)것이기에 지옥중생에게는 뜨겁게 불타오르지만 저승사자에게는 뜨겁게 불타오르지 않는다.
야마왕의 심문 : 어린 시절 늙은 사람 병자 죽은 사람을 가리키며 선업을 기억해내게 한다. 선업을 기억해내지 못하면 야마왕은 ‘저사람이 선업을 지을 때 나에게 복덕을 나누어 주었는가?’ 생각해본다.(그래서 선업을 지을 때 야마왕에게 공덕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생각해 내면 그 선업을 드러내 보인다. 야마왕이 선업을 드러내 보이든지 아니면 자시 스스로 선업을 이억해내든지 하면 선업을 기억해냄과 동시에 지옥에서 벗어나 천상에 이르는 사람들도많다. 그러나 선업을 기억해내지 못하면 지옥자사들이 끌고 가서 갖가지 방법으로 고문하고 학대한다.
八熱지옥
等活지옥(sanj?va): 지옥사자들이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무기로 토막쳐 잘라버려도 또 다시 살아난다. 그런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수명이 계속된다고 해서 등활지옥이라 한다.
黑繩지옥(k??asutta) : 지옥 사자들이 칼로 조각조각 난도질을 하고 줄자로 재단하여 자른다.
衆合지옥(sa?g?ta) : 쇠로 된 땅 속에 파묻히고 쇠 바위들이 뜨겁게 달어져 사람을 태운다.
叫喚지옥(j?laroruva) : 검붉은 불길로 태워지는 지옥사람들이 가련한 연민을 일으키게 하는 크나큰 비명을 질러댄다.
大叫喚지옥(dh?maroruva) : 지옥의 화염의 연기에 휩싸여 익혀지는 지옥사람들이 가현한 연민을 일으키는 크나큰 비명을 질러댄다.
蕉熱지옥(t?pana) : 붉게 달구어진 쇠로 된 상자 위에 움직이지 못하도록 앉혀져서 뜨겁게 불탄다.
大蕉熱지옥(pat?pana) : 불타오르는 산 정상에 오르게 한 뒤에 산 밑의 날카로운 칼 날 아래로 떨어지게 하여 불태운다.
無間지옥(av?ci) : 시뻘건 불길로 형벌을 당하는 지옥사람들에게 극심한 고통이 한 순간도 끊어지는 순간이 없다.
小地獄(웃사다) : 웃사다는 많은 이라는 뜻이다. 팔열지옥의 사방에 소지옥들이 둘러싸고 있다. 여기에는 배설물 지옥, 뜨거운 잿더미 지옥, 가시나무 지옥, 쇠칼날 입사귀 지옥, 덩굴 강 지옥이 있다.(데와두따 경)
배설물 지옥: 아위찌에서 벗어낫다 하더라도 불선업이 남아있는 자들은 아위찌 바로 옆에 연결되어 있는 지독한 냄새의 똥무더기 지옥 속으로 들어간다.
뜨거운 잿더미 지옥 : 배설물에서 벗어낫다 하더라도 불선업이 남아 있는 자들은 배설물 지옥 바로 곁에 있는 뜨겁게 이글거리는 잿더미에서 익혀져야 한다.
가시나무 지옥 : 뜨거운 잿더미 지옥에서 벗어날지라도 불선업이 남아있는 자들은 뜨거운 잿더미 지옥 바로 곁에 있는 거대한 가시가 달린 나무들의 수풀 지옥에서 찔리고 ??겨지면서 머물러야 한다.
쇠칼날입사귀 지옥 : 가시나무 지옥에서 벗어날지라도 불선업이 남아있는 자들은 가시나무 지옥 바로 곁에 있는 불타오르는 날카로운 쇠 칼날 잎사귀 숲인 작은 지옥에서 불태워진다.
덩굴 강 지옥 : 가시나무 지옥에서 벗어날지라도 불선업이 남아있는 자들은 날카로운 쇠 잎사귀 숲 지옥 바로 곁에 연결되어 있는 뜨겁게 불타오르며 가시덩쿨로 뒤덮혀 있는 강에서 떠다니며 익혀진다.
축생(tiracch?n?) : 포유류 짐승, 조류, 어류, 양서류, 파충류.
아귀(pet?) : 먹고 마시지 못한다. 일부 아귀는 사람들의 밥 찌꺼기, 음식, 가래, 땀, 똥 등을 먹과 마시기도 한다.
아수라(asura) : 바다 속, 강변 등지에서 머무는 매우 굶주리고 목마른 존재이다. 이 아수라는 아귀의 일종이다.
다양한 아수라들
1. 시네루산 아래에 머무는 아수라 : 33천의 적인 아수라들이다.
2. 위니빠띠까 아수라들 : 큰 지신에 의지하는 힘이 작은 천인들이다.
3. 웨마니까 뺏띠(훌륭한 궁전을 가진 아귀들, 야마왕) : 천인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간혹 아귀들처럼 고통을 당하는 천인들이다.
4. 로깐따리까 지옥의 존재들 : 빛이 들어오지 않는 철위산(Cakrav?la)의 절벽에 박쥐처럼 붙들고 매달려 지낸다. 극심한 굶주림으로 한 마리와 한 마리가 서로 가까이 마주치게 되면 서로 물어뜯다가 땅을 받치는 차가운 물에 떨어져 가루가 되도록 바스라져 버린다.
인간(manuss?)
四天王天(c?tumah?r?jik?) :
사천왕 : 다따랏따, 위주라까, 위주빳카, 꾸웨라
사천왕에게 봉사 헌신하는 천인들(짜뚜마하라지까)
부마데와 :땅을 의지하여 머무는 지신, 숲 산 나무에 의지하여 머무는 산신, 정령, 인간을 지키는 수호신,
건달바
나무에 사는 목신은 건달바 천인의 한 종류이다.
요기니(들러붙은 생명체) : 여자들의 몸에 붙어서 여자들이 시키는 일을 하는 건달바 천녀도 있다.
락카사(나찰) : 땅 속에 뭍힌 금은보화 등의 재물, 호수를 지키고 돌보면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천인의 종류를 나찰이라고 부른다. 옹형나찰, 나찰, 식인 거인 등은 단지 즐기고 괴롭히기 위하여 지옥의 저승사자 혹은 사나운 개 모습으로 변신하여 지옥에 머물기도 한다. 재물을 지키는 수호신도 나찰에 포함된다. 간혹 그들이 즐기고 환락에 젖어 기뻐하고 훌륭한 일에서 환호하는 등으로 땅이 진동하기도 한다. 땅을 지키는 수호신은 용의 종류이다.
三十三天(t?vati?s?) :
마가라는 젊은이와 함께 훌륭한 선업을 지은 동반자 삼십삼인의 남자들이 탄생한 곳이기에 삼십삼천이라고 부른다. 왕의 이름은 제석천왕이다.
夜摩天(y?m?) : 고통에서 벗어난 천인들이다. 천상의 행복에 도착한(y?t?) 천인이라고 해서 야마라고 부른다. 왕의 이름은 수야마천왕(suy?ma)이다.
도率天(tusit?) : 만족하고 기뻐함에 다다른 천인들이다. 왕의 이름은 산뚜시따천왕(santusit?)이다.
化樂天(님마나라띠) : 스스로 창조한 부귀영화의 재물을 즐긴다. 본래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재물
을 즐기고 체험하기를 원하면 그 마음에 꼭 맞아떨어지게 창조하여 즐길 수 있는 천인이다. 항상 아내를 거느린다.
他化自在天(빠라님미따와사왓띠) : 현재 있는 대상보다 더 훌륭한 것을 즐기고 체험하고자 할 때, 화락천 천인들처럼 스스로 창조하지 않고 시중드는 시봉천인이 마음에 꼭 맞아떨어지게 창조하면 그 대상들로 오욕락을 즐기는 천인들이다.
욕계천상의 삶
● 저택이 아주 호화롭고 아름답다. 하지만 선업의 차별에 의해서 저택의 화려함과 몸의 아름다움이 차이가 난다.
●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의 모습의 아름다움으로 한 평생 머문다, 치아가 부러지거나, 흰 머리가 나거나, 늙고 병들고 눈이 멀거나, 주름이 생기는 일이 없다.
● 자양분의 정수만 먹기 때문에 대소변이 없고 월경이 없다. 불순물이 없고 피의 흐름만 있다.
● 여자는 임신하지 않는다. 자식은 남자 여자의 가슴이나 침대 위에서 탄생한다.
● 결혼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부모나 천왕의 결정에 의해 정해지는 수가 있으며, 때로는 독신으로 사는 경우도 있다.
아나함, 아라한 : 오욕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천상에서 아나함과 아라한은 오욕에서 벗어난 분이므로 천상에 길게 머물지 못하고 아나함은 색계천으로 들어가고 아라한은 빠리닙바나에 든다.
욕계천상에서의 수행 :
● 천상에서 오욕의 즐거움에서 벗어나 열심히 수행 정진하겠다는 생각을 갖지 말라. 인간계에서 매우 확고하고 굳은 결의로써 부처님 시대에 부처님 법을 들은 사람들만 천상에서 법이 증진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환희의 공원(난다나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법은 도망쳐버리고 환락에 빠져들어간다.
● 계를 지키는 것도 매우 힘들다. 천녀들이 부드럽게 스치고 사랑스럽게 말하기 때문에 계의 파괴만이 있을 뿐이다. 숨어 있을 장소도 없기 때문에 제석천왕도 포살일에 인간계에 내려와서 계를 지킨다. 보살은 천상에서 바라밀을 성취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원에 의해서 죽어서 인간계에 내려와 바라밀을 성취시켜간다.
● 천상에는 탑에는 1요자나 높이의 미랴사쩨띠라는 탑이 있고, 그 탑에는 부처님의 출가전의 머리카락과 오른쪽 어금니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신심이 견고한 천인과 천녀들은 수명도 길고 마음이 맑기 때문에 환락의 동산에서 노는 대신 탑에 와서 꽃과 촛불등의 공양물로써 예배하고 서원을 세운다.
● 사천왕천을 제외한 5개의 천상에는 각각의 수담마 법당이 있다. 법당은 갖가지 보물로 치장되어 있고 주위에는 빈레까 나무가 화려한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장식하고 있다. 법당 중앙에는 法床이 있고 그 위에는 일산이 있다. 법상 양 옆으로 제석천왕, 빠자빠띠 천왕, 와주나 천왕, 이사나 천왕 등 동반자 33인의 천왕의 자리가 있다. 그 뒤에는 힘이 큰 천왕과 보통의 천왕의 자리가 있다. 집회시간이 되면 제석천왕이 직접 시간을 알리는 범라를 부른다. 범라의 소리는 1만 유자나 이르러 수닷사나 도시로 퍼져나가고 천인들은 모두 법당에 모인다. 그러면 색계에서 내려온 사낭꾸마라 색계천왕이 법상에 올라가 법을 설한다. 때로는 제석천왕이 법을 설할 때도 있고, 법력 높은 천인이 법을 설할 때도 있다. 그러나 천인들은 도과를 얻기가 힘들고 단지 오욕을 적당하게 피할 수 있을 뿐이다.
● 미륵불을 섬기면서 경배하면서 법을 들은 천인들도 환락의 공원에서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서원을 굳건하게 세워야 한다. 만약 천상에서 마음껏 환락을 즐기는 천인들은 미륵불께서 오실지라도 오욕의 접촉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참된 성품을 잃어버린다. 그러니 천상의 부귀영화도 하찮게 여기고 법을 증득하기 위해 분투노력해야 한다.
색계, 무색계
梵衆天(Brahmap?ricajj?na?) : 대범천의 왕들의 무리에서 생겨나서 대범천의 왕들을 추총하는 작은 색계천인들이다.
梵補天(purohit?) : 대신, 고문, 제사관, 대범천을 시중드는 천인들, pura(앞에) : dh?(두었다)에서 파생한 단어.
大梵天(Brahm?na) : 선정과 신통이 뛰어나서 초선천에서 가장 긴 수명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천인, 왕은 대범천왕이다.
초선천의 3가지 영역은 아래위로 구분됨이 없이 한 평면에 머문다. 수명이나 저택의 모습은 범중천보다 범보천이 범보천보다 대범천이 훨씬 월등하다. 대범천왕은 한 명이다. 범중천은 범보천을 볼 수 없고 범보천은 대범천왕을 볼 수 없다. 마치 천왕은 가택신을 볼 수 있고 가택신은 천왕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집을 지키는 수호신은 인간을 볼 수 있고 인간은 수호신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대범천왕이 하위 신들에게 나타날 때는 의도적으로 몸을 창조하여 보여주어야 한다.
小光天(빠릿따바) : 약한 광채가 있다.
無量光天(appam???) : 몸에 무한한 빛이 있다. ?bh?(몸의 빛)
光音天(?bhassar?) : 번쩍번쩍 광채를 발한다. 구름 가운데 번갯불이 치는 것처럼 몸에서 번쩍번쩍 빛을 발한다.
2선천 역시 3개의 하늘이 한 평면에 존재한다. 광음천이 2선천의 왕이다.
少淨天(parittasubh?) : su(아름다운) + bh?(몸의 빛), 작고 아름다운 몸을 빛을 지니고 있다.
無量淨天(appam?n?subh?) : appam?n?(한계가 없는) + subh?(아름다운 몸의 빛), 한계가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운 몸의 빛이 있다.
邊淨天(수바낀하) : 아름다운 몸의 빛으로 뒤섞인 천인들이다.
3선천 역시 3개의 하늘이 한 평면 위에 자리잡고 있다. 타화자재천과 초선천은 558만 유자나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5,580,000*12km=66,960,000km) 각각 색계의 천들 사이의 거리도 그 정도 일거라고 추정된다.
廣果天(vehapphal?) : vipula?(풍부한, 많은) +phala?(과가 있는), 풍부한 과보가 있는 천인들이다.
無想有精天(asann?satt?) : assann?(인식이 없는) + satt?(생명체, 존재), 인식(지각)이 없는 존재이다. 여기서는 인식의 마음부수만을 말하고 있지만 다른 마음부수도 모두 없다. 그래서 마음(識)과 마음부수(心所)도 없이 몸(色)만 있어서 움직이지 않고 매우 고요히 있으므로 ‘정말 생명체인가?’라고 의혹이 있기 때문에 ‘인식이 없는 존재’라고 부른다.
무상유정천과 광과천은 한 평면에 머문다. 그렇지만 광과천인들이 사는 장소, 무상유정천인들이 존재하는 장소가 따로 있다고 할 수 없다. 마치 인간계에 갖가지 다양한 집들이 뒤섞여 있는 거와 같다.
淨居天(suddh?v?s?) : suddh?na?(깨끗한) + ?v?s?(머무는 영역),
번뇌가 거의 없는 아나함과 번뇌가 전혀 없는 아라한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이다. 여기에는 5천이 있는데 각 하늘은 한 평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 아래가 있다.
無煩天(avih?) : na vihati (자신들의 영역을 잠시 순간도 버리지 않는다), attano(자신의) sampatti?(부귀영화를) na vihanti(버리지 않는다)라고 해서 아위하라 부른다.
無熱天(atppa) : na tappanti(근심 걱정하지 않는다), 어떤 원인으로도 근심 걱정하지 않은 채 매우 평화스럽게 머무는 천인들이다. 한 명의 천인조차도 근심 걱정하지 않는다.
善現天(sudassa) : sukhena(행복감으로) + dissanti(보인다), 매우 아름답고 장엄하여 행복하게 보이는 천인들이다.
善見天(supassi) : sukhena(행복하게) +passanti(바라본다), 다른 사람을 몸의 눈과 지혜의 눈으로 훌륭하게 바라보는 색계천인들이다.
色究竟天(akanit?ha) : kanit?ha(작은 이들의 상태는) + natthi(없다), 재물과 부귀의 행복감이 크므로 작은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최상층에 이른 천인들이다.
색계천인들의 재물과 부귀 : 색계천인들의 저택과 정원, 재물, 생활용품은 욕계천인보다 훨씬 훌륭하다. 그러나 색계천인들은 선정을 닦아 오욕을 싫어했으므로 오욕을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 여자의 성기도 없다. 그러나 모두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부분 수행자들처럼 깨끗하고 맑게 생활한다. 일부는 mett?(자애), karu??(연민), mudit?(기뻐함), upekkh?(평정심)의 4무량심을 증가시키면서 머문다. 일부는 선정에 몰입하며 머물기도 하고 아리야성인들은 과선정에 몰입하여 행복하고 평화 속에 머문다.
無色界天
空無邊處天(?kas?nanc?yatana)
識無邊處天(vinn??anc?yarana)
無所有處天(?kinc?nn?yatana)
非想非非想處天(nevasann?n?sann?yatana)
4천이 있으나 하늘이라 부를지라도 실제로 저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장소가 정해져 잇는 것이 아니다. 물질이라 불리는 것을 혐오하고 싫어하여 단지 마음만을 얻기 노력했던 수행의 원인으로 저택이라는 물질이 있다는 견해는 생각해볼 일이다.
인도인의 세계관을 불교에서 수용하여 이것을 교리와 결합시킨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형이상학적인 전생, 우주관, 사후등은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남방 주석가들에 의하면 초선천에서 언급된 수명의 단위는 아승지겁이며, 소광천 이상의 천신들의 수명에 사용된 단위는 대겁이라고 한다.
범중천의 수명의 한계는 3분의 1겁 (아승지겁)
범보천-2분의 1겁
대범천-1겁
소광천-2겁(여기서부터 대겁이 적용됨)
무량광천-4겁, 광음천-8겁, 소정천-16겁, 무량정천-32겁, 변정천-64겁
광과천, 무상유정천-500겁, 무번천-1천겁, 무열천-2천겁, 선현천- 4천겁
선견천-8천겁, 색구경천- 1만 6천겁
<무색계의 수명>
공무변처-2만대겁
식무변처-4만대겁
무소유처-6만대겁
비상비비상처-8만4천대겁 <이상 아비담마 길라잡이 상권>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는 다른 어떤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의식의 변화상태를 표현해 놓은 것일 뿐이다..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이런 것들 모두 비유일 뿐이다
수행중 일어나는 상태에 대해서 알아 봅시다. 욕계에서 비유상비무상처정까지
참선(參禪)의 초보자를 위한 기초지식 월창거사 김대현 저 / 민족사
4. 욕계정(欲界定 第八章)
호흡법을 수행합에 따라 마음이 점점 비고 집중되어 다시 대상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거칠게 머무는 마음(序住心)이라 한다. 그 마음이 없어진 듯 미세하게 바뀌는 것을 미세하게 머무는 마음(細住心)이라고 한다. 또한 이 거친 모습과 세밀한 모습이 생길 때에는 반드시 몸을 지탱하는 법(特身法)이 일어난다. 즉, 자연히 신심이 바르고 곧아져서 앉아 있어도 피로하거나 지겹지 않고 마치 어떤 물건이 몸을 지탱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단지 미미하게 몸을 돕는 힘이라면 좋은 경계이다. 만일 그 힘이 급하고 강하게 지신법이 일어나면 몸을 긴장되게 하여 괴롭고, 지신법이 사라지면 사람을 느슨하고 노곤하게 할 경우 이것은 좋은 법이 아니다.
마음이 아주 세밀하게 되어 감각이 자연히 밝고 깨끗해지며 선정법으로 마음을 지탱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임의대로 할 수 있다. 얕은 곳에서부터 깊은 곳으로 들어가 뜻이 흩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욕계정(欲界定)이라고 한다. 그것은 욕계보신(報身)의 상이 아직 다하지 않은 때를 말한다.
이즈음에서 만약 방편을 잘 쓰지 못하여 어기거나 범하는 바가 있으면 선정을 잃게 된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선정상을 드러내거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여 다른 사람이 알도록 하거나 혹은 어떤 일의 인연으로 선정의 모습을 파괴하면 이것은 밖의 장애가 된다. 바라는 마음 의심하는 마음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애착하는 마음 근심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은 안의 장애이다. 이 여섯 가지 마음도 선정을 파괴하니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한다.
모든 선의 중간에는 다 미도지정(未到地定)이 있다. 즉, 욕계정에 있으면서 아직 초선을 얻지 못했을 때 다른 경계가 있어서 초선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욕계정의 뒤에 몸과 마음이 없어진 듯 욕계의 몸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다. 가만히 앉아 있는 중에 머리나 손을 볼 수가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을 미도지정이라고 한다. 이것은 초선의 방편정으로 미래선(未來禪)이라고도 하고 또 홀연잠심(忽然湛心:갑자기 맑아진 마음)이라고도 한다.
이 선정을 얻었을 때 간혹 삿된 거짓이 생기는데, 지나치게 밝은 것과 지나치게 어두운 것이다. 이것은 모두 삿된 선정이다. 밝음이란 선정에 들었을 때에 바깥 경계의 모든 색과 형상을 보는데 마치 신통을 얻은 것과 같은 것이다. 어두움이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아무 지각이 생기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무심상법(無心想法)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를 만나게 되면 빨리 버려야 한다.
5. 초선정(初禪定 第九章)
수행자가 욕계의 미도지정 가운데에서 움직이는 감촉(動觸)의 열 가지 좋은 법을 얻게 되고 동촉이 일어난 뒤에 또 열여섯 가지의 감촉을 증득하게 된다. 이것을 성취하는 것이 초선의 상이다. 미도지정 가운데에서 선정이 점점 깊어져서 몸과 마음이 비고 고요하여 안팎을 보지 못한다. 혹은 하루나 이레가 가거나 혹은 한 달이나 한 해가 지나도록 선정심이 허물어지지 않는다. 이를 지키고 증장시키면 선정 가운데에서 홀연히 몸과 마음이 응집되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움직일 때 도리어 그 몸이 구름과 같고 그림자와 같음을 느낀다.
움직이는 감촉이 일어날 때는 공덕이 한량없으나 대략 말하면 열 가지 좋은 법이 권속이 된다. 첫째는 안정됨(定)이고, 두 번째는 걸림이 없는 것(空)이며, 세 번째는 밝고 깨끗한 것이고, 네 번째는 희열이며, 다섯 번째는 즐거움이다. 여섯 번째는 좋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며, 일곱 번째는 지견이 밝아지는 것이고, 여덟 번째는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아홉 번째는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고, 열 번째는 마음이 고르고 유연하게 되는 것이다. 이 열 가지 권속은 움직이는 감촉과 더불어 생겨서 혹은 하루도 가고 혹은 한 달도 가며 혹은 한 해를 지내기도 한다.
이러한 일이 지난 뒤에 또 다른 감촉이 차례대로 일어난다. 움직임, 가려움, 시원함, 따스함, 가벼움, 무거움, 거칠음, 미끄러움 등의 여덟 감촉과 흔들림(掉), 기댄 듯한 느낌, 차가움, 뜨거움, 들뜸, 가라앉음, 딱딱함, 유연함 등의 여덟 감촉이니 합하여 열 여섯 감촉이 된다. 여기에도 권속으로서 수많은 좋은 법이 있다. 왜 그런가· 색계의 청정한 사대(四大)가 욕계의 몸 속에 머물러 거친 것과 세밀한 것이 서로 어긋나므로 흔들리는 느낌 등이 생기는 것이다. 이 열여섯 감촉을 다 갖추는 경우도 있고 혹은 다 갖추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미도지정을 얻지 못했을 때에 먼저 이 감촉이 일어나게 되거나 또는 열 가지 좋은 법이 수반되지 못하면 대부분 병든 모습이거나 혹은 마사(魔事)이니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이 초선에 다섯 가지 특징(支)이 있다. 첫 번째는 각지(覺支)이니 첫마음에 알아차려 느끼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관지(觀支)이니 세밀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는 희지(喜支)로서 그 마음이 경사스럽고 기쁜 것을 말한다. 네 번째는 낙지(樂支)로서 그 마음이 편안하고 담담한 것이다. 다섯 번째는 일심지(一心支)로서 고요하여 흩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지(支)'란 갈래로 나누어진다는 뜻이며 또한 지탱한다는 뜻이다. 마치 나무가 뿌리와 줄기로 인하여 가지가 있고 또 뿌리와 줄기는 하나뿐이지만 가지는 각각 다른 것과 같다. 지금 한 선정의 마음 속에서 다섯 가지가 생겨나는 것이 마치 많은 나무가 숲을 이루는 것과 같으므로 또 가지의 숲(支林)이라고도 한다.
욕계정이나 미도지정에도 비록 하나의 고요한 선정심이 있지만 각과 관 등의 다섯 가지가 서로 잡아주고 도와주지 못하므로 선정심이 얕고 엷어서 잃어버리기 쉽다. 만약 초선을 얻어 다섯 가지가 숲이 되어 도와주면 선정심이 안온하고 굳세어서 파괴되기 어렵다. 초선을 여의었다(離)라 부르기도 하며 또한 갖추었다(具)고도 부르는데, 여의었다는 것은 다섯 가지 덮개를 버렸기 때문이고 갖추었다는 것은 다섯 가지 특징을 갖추었다고 하는 뜻이다. 2선과 3선과 4선에 모두 다섯 가지의 숲이 있으므로 모두 이구선(離具禪)이라고 한다.
6. 이선정(二禪定 第十章)
초선 다음의 미도지정에서 느낌(覺)과 관찰(觀)을 싫어하여 떠나게 되니 이것을 '성스럽고 고요한 선정(聖默然定)'이라고 한다. '각'이란 신근(身根)과 신식(身識)이 상응하는 것을 말하고, '관'이란 의근과 의식이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 법은 마음을 어지럽게 하므로 받아들이거나 집착하지 않아서 그 마음이 고요한 것이다.
수행자가 초선의 허물을 꾸짖을 수 있으면 초선의 다섯 가지 특징과 고요함까지 모두 물러간다. 초선을 떠나고 이선이 생겨나지 않은 가운데에도 역시 선정법이 있다. 이것을 중간선(中間禪)이라고 하니 그 마음이 다 사라져 없어진 듯하다. 한마음으로 오로지 정진하여 공들이기를 그치지 않으면 마음이 맑고 고요하여 흩어짐이 없다. 이것이 미도지정이다. 이와 같이 오래 지내면서 잃거나 물러나지 않으며 전일한 마음이 그치지 않으면 그 마음이 확 트여 밝고 맑고 희고 깨끗해지면서 선정의 마음이 기쁨과 함께 일어난다. 마치 어떤 이가 어두운 방에서 나와 바깥의 광명을 보는 것처럼 활연히 밝아진다.
열 가지 좋은 법은 초선에서 일어나는 모양과 같으나 기쁨이 더 크고 미묘함이 초선보다 뛰어나다. 다만 초선은 16촉의 즐거움을 느낄 때 신식과 상응하기 때문에 '바깥이 깨끗함(外淨)'이라고 이름하는 데 비해 제2선에서는 심식(心識)과 상응하기 때문에 '안이 깨끗함(內淨)'이 된다. 마음에 느낌과 관찰함이 있으면 '안의 더러움'이 되지만, 지금은 느낌과 관찰함이 없으므로 '안의 깨끗함'이 된다.
제2선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안이 깨끗함(內淨)이며, 둘째는 기쁨(喜)이며, 셋째는 즐거움(樂)이며, 넷째는 일심(一心)이다. 일심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기쁨과 즐거움이 있으나 안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연하지 않고 밖으로 생각함을 연하지 않아서 한 마음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일심이라고 한다.
7. 삼선정(三禪定 第十一章)
제2선은 한편 희구선(喜俱禪)이라고 부르니, 그 선정이 기쁨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3선은 한편 낙구선(樂俱禪)이라고 부르니, 이 선정이 몸 전체에 두루한 즐거움과 더불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2선은 관찰하면 비록 선정이 안의 깨끗함으로부터 일어나지만 큰 기쁨이 용솟음쳐서 선정이 견고하지 않으므로 세 가지 법으로써 물리친다. 첫째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꾸짖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을 관찰하여 끝까지 검토하는 것이다. 끝까지 살펴서 허물을 알고 허물을 알아서 꾸짖으며 꾸짖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 기쁨과 고요함이 점차 물러나 버린다.
3선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중간에도 선정이 있다. 일심으로 오로지 3선의 공덕을 상념하면 마음이 맑고 고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3선의 미도지정이다. 그 후에 마음이 없어진 듯 선정에 들어가니 안팎에 의지하지 않으며 즐거움이 함께 일어난다. 이에 따르는 공덕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다만 용솟음치는 기쁨이 없고 면면히 이어지는 즐거움이 안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아름답고 묘함이 비유하기 어려우니 그것이 다를 뿐이다.
즐거운 선정이 처음에 생겨나 아직 몸에 두루 미치지 않았을 때 흔히 세 가지 허물이 있게 된다. 첫째는 즐거움과 선정이 아직 얕은데도 그 마음이 가라앉아서 지혜의 작용이 적은 것이다. 둘째는 즐거움의 선정이 미약하지만 마음의 지혜가 세차게 일어나 안정되지 못하는 것이다. 셋째는 즐거움과 지혜가 모두 면면하고 미묘하면 대부분 탐착이 생겨나 마음이 미혹되어 취한다. 그러므로 경전에 "이 즐거움을 성인은 버릴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은 버리기 어렵다"고 하였으니 수행자는 마땅히 잘 조절하여야 한다.
만일 마음이 가라앉으면 상기함(念), 정진, 지혜 등의 법을 써서 북돋우어야 한다. 만일 마음이 지나치게 일어나면 삼매 선정의 법을 생각하여 거둬들인다. 만일 마음이 미혹되어 취하면 나중의 즐거움과 여러 가지 뛰어나고 묘한 법문을 생각하여서 스스로 깨달아 마음이 집착하지 않도록 한다. 만일 즐거운 법을 잘 닦을 수 있다면 점점 늘어나 몸에 두루 가득하게 된다. 이때 비록 바깥 경계가 식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즐거운 법이 안에서 일어나 모든 근에 가득 차서 의식과 상응하니, 세간에서 으뜸가는 즐거움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나다.
3선에도 다섯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버림(捨), 둘째는 상기함(念), 셋째는 지혜(智), 넷째는 즐거움(樂), 다섯째는 일심(一心)이다.
버림이란 즐거움의 선정이 생겨날 때 기쁜 마음을 버리는 것이고, 상기함이란 능히 조절함을 생각하여 즐거움이 늘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지혜는 세 가지 법을 알맞게 써서 세 가지 허물을 떠나는 것이고, 즐거움이란 상쾌하고 즐거움을 온몸에서 두루 느끼는 것이며, 일심이란 즐거움이 쉬어 일심으로 고요하고 안정되는 것이다.
8. 사선정(四禪定 第十二章)
수행자가 3선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고통과 근심이 있음을 깊이 보아서 일심으로 싫어하면서 꾸짖고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움직이지 않는 선정인 제4선을 구하면 미도지정에 들어가 마음에 움직이거나 흩어짐이 없게 된다. 그 후에 활연히 눈앞이 열리고 선정삼매가 안온해지면서 들고 나는 숨이 끊어지니, 이것이 4선이다.
선정이 일어날 때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어서 평등함(捨)과 함께 생겨난다. 그러므로 사구선(捨俱禪)이라고 한다. 마음이 밝은 거울처럼 움직이지 않으며 또한 맑은 물처럼 파도가 없으니 모든 어지러운 생각이 끊어지고 바른 생각이 견고하다. 마치 허공과 같이 모든 더러움에 물듦이 없으므로 또한 '움직이지 않는 선정(不動定)'이라고 한다. 또 '세간의 진실한 선정'이라고도 부른다. 이때 수행자는 마음이 선(善)에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악에 의탁하지도 않는다. 의지하여 기대는 바가 없고 모양도 없고 바탕도 없으나 신통변화가 모두 이 선정으로부터 나온다.
제4선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不苦不樂)이고, 둘째는 평등함(捨)이며, 셋째는 생각이 청정함(念淸淨)이고, 넷째는 일심(一心)이다.
이 선정이 처음 일어나면 평등한 느낌과 함께 일어나며 괴로움이나 즐거움과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선정을 얻고 나면 아래 단계의 뛰어난 즐거움을 버리고도 싫어하거나 후회함이 생기지 않는다. 또 선정을 일으킨데 대해 집착이 생기지 않으므로 평등함이라고 한다. 선정이 명료하여 평등한 지혜로 비추어 깨달으므로 생각이 청정함이라고 한다. 선정의 마음이 고요하여 온갖 대상을 대하여도 마음에 움직임이 없다. 그러므로 일심이라고 한다.
대개 이 4선에는 아직도 색계의 속박이 있다. 외도들은 생멸(生滅)이 있는 유위(有爲)의 심식(心識)을 매우 싫어하고, 고요하고 항상 즐거운 열반을 구하려고 한다. 하지만 참으로 색을 파하는 법을 알지 못하여 겨우 삿된 지혜로 그 마음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삿된 법이 상응하여 마음에 생각함이 없데 되면 열반을 증득하였다고 말한다. 이때 목숨을 버리면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지만 이것은 여전히 색계이니 또한 객천(客天)이라고도 한다.
혹 어떤 수행인은 색이 있음을 감옥과 같다고 여겨 일심으로 색을 타파하여 곧바로 네 가지 공한 선정(四空定)을 닦는다. 이것은 범부선(凡夫禪)이다. 만일 불제자라면 이미 자신의 수행을 갖추고서 다시 남을 이익케 하고자 하므로 먼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을 닦는다.
9. 사무량심(四無量心 第十三章)
사무량심이란 사랑함(慈), 가엾이 여김(悲), 기뻐함(喜), 평등함(捨)을 말한다. 사랑함이란 중생을 사랑으로 생각하여 늘 즐거운 일로써 그들을 이익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엾이 여김이란 중생이 다섯 갈래 세계에서 괴로움받는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늘 착한 법으로써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뻐함이란 중생들이 모두 기쁨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평등함이란 세 가지 마음을 버리고 다만 중생을 생각함에 미워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것이다.
무량(無量)이란 이 네 가지 마음이 친한 이나 원수, 가까운 사람이나 먼 사람의 차별 없이 시방에 두루 미쳐 평등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의 성내는 느낌을 없애기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닦으며, 중생의 괴로운 느낌을 없애기 위하여 슬퍼하는 마음을 닦으며, 중생의 즐겁지 않음을 없애기 위하여 기뻐하는 마음을 닦으며, 중생의 미워하거나 좋아함을 없애기 위하여 평등한 마음을 닦는다.
어떻게 '사랑이 한량없는 마음(慈無量心)'을 닦는가· 선정에 들어가려고 할 때 먼저 '일체중생이 다 즐거움을 받는 것을 내가 선정 가운데서 수 상 행 식을 통하여 보게 되어지이다'하고 서원한다. 처음 닦을 때 생각이 청정한 마음을 써서 먼저 부모나 형제 같은 가장 가깝고 좋아하는 한 사람을 택하여 즐거움받는 모습을 일심으로 반연한다. 만일 다른 생각이 끼여들면 거두어서 돌이키고, 다른 경계가 보이면 모두 취하지 않는다. 다만 한마음으로써 그가 즐거움 얻는 모습을 관찰하여 확실하고 분명하게 상속하여 끊이지 않으면 삼매가 곧 일어난다. 삼매의 힘 때문에 선정 가운데서 그들이 즐거움을 받아 몸과 마음이 기쁘고 얼굴색이 온화해지는 것을 명료하게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친한 사람을 보고 나면 점점 넓혀서 다음에는 중간으로 가까운 사람을 보며 나아가 원수에까지 이른다. 또 열 사람, 백 사람, 한 나라, 한 천하에 이른다. 이렇게 시방 다섯 갈래 세계의 중생에 이르기까지 다 즐거움을 받는 것을 봄으로써 선정의 마음이 점차 깊어져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으니 성냄, 원한 등의 괴로움을 여의게 된다.
즐거운 일을 중생에게 주는 것은 중생을 연한 사람(衆生緣慈)이고, 법을 주는 것은 법을 연한 사랑(法緣慈)이며, 무위심(無爲心)으로써 취하거나 버림, 주체(能)나 대상(所)이 없이 중생으로 하여금 이익을 얻게 하면 반연이 없는 사랑(無緣慈)이다. 가엾이 영김, 기뻐함, 평등한 마음 또한 이 경우와 같다.
어떻게 '가엾이 여김이 한량없는 마음(悲無量心)'을 닦는가· 수행자는 자무량심의 선정 가운데서 늘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생각한다. 자무량심의 선정에서 일어나 여전히 중생들이 여러 가지 몸과 마음의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서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생각을 내어서 이렇게 생각한다. "다섯 갈래 세계의 중생이 이런 큰 괴로움을 받는데 나는 알 수 없고 볼 수 없어서 긴 밤 동안 게을러 구제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았으니 이것은 장님과 같다. 바라건대 선정 가운데서 다 알고 다 보아서 부지런히 구제하고 보호하리라." 이와 같이 원을 세우고 선정에 들어가 자무량심의 관법과 같이 먼저 친하고 좋아하는 한 사람을 취하여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나아가 시방의 다섯 갈래 세계 일체중생에 이른다. 삼매의 힘으로써 명료하게 보게 되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깊어진다.
어떻게 '기뻐함이 한량없는 마음(喜無量心)'을 닦는가· 수행자가 비무량심 가운데에서 중생이 고통으로 핍박받음을 불쌍히 여겨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어떤 법으로써 저 중생을 구제하여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고 모두 환희하게 하겠는가·" 이때 깊이 중생을 살펴서 "비록 괴로움을 받으나 이 괴로움은 실체가 없다. 없는 것에 대하여 있다고 여기니 본래 이것은 망령된 법이다. 저 고통이 이미 실체가 아니므로 쉽게 없앨 수 있다. 내가 마땅히 감로법을 중생에게 두루 주어 번뇌의 병을 없애고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고 관찰한다. 자비의 관법에 의거하여 한 사람에서 열 사람까지, 나아가 한량없은 중생이 기쁨받는 모습을 보는 것이 명료하고 분명해진다. 그 마음이 기뻐서 말로 다할 수 없으나 마음에 동요가 없어서 선정이 점점 깊어진다.
어떻게 '평등함이 한량없는 마음(捨無量心)'을 닦는가· 수행자가 기쁨의 선정에서 나와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사랑으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가엾이 여김으로 괴로움을 없애주며 기쁨으로 크게 기뻐하게 한다고 하여 나를 이익 주는 이라고 하면 또한 뛰어난 행이 아니다. 비유하면 자애로운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익을 주어도 은덕을 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내가 능히 즐거움을 주고 기쁨을 주었다고 말하면 이것은 부덕한 것이다. 지금 마땅히 이 세 가지 마음을 버려야 한다. 바라건대 중생과 더불어 모두 묘한 평등함으로 장엄하리라." 이와 같이 선정에 들어서 중생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받는 모습을 다 보면 그 마음이 평등하여 좋아하거나 미워함이 없다. 그리하여 삼매가 점차 깊어져 견고하며 안온하다. 평정한 마음 가운데서 능히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갖가지 일을 지어도 취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이 평등한 마음이다.
이 네 가지 마음을 닦으면 공덕이 넓고 크니 현세에서는 끝내 뜻밖의 죽음을 당하지 않고 좋은 신이 옹호한다. 내세에도 범왕(梵王)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중생을 거두기 때문이다.
10. 사공처정(四空處定)
1) 공처정(空處定 第十四章)
색계의 네 가지 하늘은 곧 앞의 네 가지 선정이고 무색계의 네 가지 하늘은 곧 네 가지 공한 곳(四空處)이다. 한편으로는 사무색정이라고 하니, 형태가 없고 빛깔이 없음을 말한다. 또한 사공정처(四空定處)라고도 하는데 이미 형태와 빛깔이 없으니 다만 관찰되는 경계로서 '처'라고 한다. 사념처(四念處), 팔승처(八勝處), 십일체처(十一切處)가 모두 관찰되는 곳으로부터 이름을 얻은 것과 같다.
네 가지 공(四空)이란 첫째는 공처(空處), 둘째는 식처(識處), 셋째는 무소유처(無所有處), 넷째는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말한다. 이들은 모두 느낌도 없고 관찰함도 없는 성스럽고 고요한 마음과 평정한 마음을 갖춘 선정(捨俱禪)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경지에 이르기를, "허공처정을 얻으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서 그 마음이 점차 늘어난다"고 하였다.
공처정은 다음과 같다. 수행자는 색법의 허물과 죄를 깊이 생각한다. "만일 형색을 갖춘 몸이 있으면 안에는 굶주림, 목마름, 질병, 거칠고 무겁고 헛되고 거짓되는 등의 고통이 있다. 바깥으로는 추위, 더위, 칼, 몽둥이, 묶임, 형벌 등의 괴로움을 받는다. 인연이 화합하여 과보로 이 몸을 받게 된 것이 곧 괴로움의 근본이다. 또 색법은 마음을 얽매어 자유롭지 못하게 하니 이것은 마음의 감옥이다. 어찌 탐착할 수 있겠는가· 허공은 형색이 없이 텅비어 트이고 고요하여 이런 허물과 근심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한마음으로 자기 몸을 자세히 살펴본다. 그러면 모든 털구멍과 아홉 구멍이 다 비고 성기어 얇고 고운 비단처럼 안팎이 서로 통하고, 또한 파초와 같이 겹겹으로 되어 있어서 알맹이가 없다. 또한 떡시루나 체와 같고, 거미줄 그물처럼 보이면서 점점 미세하게 없어지다가 몸이 모두 다한다.
이와 같이 살필 때 눈으로 보는 색이 없어지고 소리, 냄새, 맛, 감촉도 차례로 모두 사라진다. 색법이 다 사라지고 일심으로 공을 연하면 색의 선정이 물러나는데, 공처정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도 중간선이 있다. 이때 삼가여 걱정하거나 후회하지 말고 마음을 오로지 하여 부지런히 힘쓰면서 공을 생각하여 버리지 않으면 그 마음이 없어진 듯이 자유롭게 공에 연하는 곳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미도지정의 모습이다.
그런 후에 활연히 공과 상응하여 그 마음이 밝고 깨끗해지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 점점 늘어난다. 선정 가운데 오직 끝없는 허공만을 보아 마음에 흩어짐이 없다. 이미 색에 묶임이 없어 심식이 깨끗하고 고요하여 걸림 없이 자재하니, 마치 새가 새장에서 나와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
2) 식처정(識處定 第十五章)
수행자가 공처정에서 색법을 타파하여 허공을 관하는 것은 바깥의 법에 연하는 것이므로 흩어져 없어지기 쉬우니 식처정(識處定)만 못하다. 식처정은 안의 법을 연하는 것이니 선정에 안온함이 많다. 이에 공처정을 버리고 일심으로 현재의 심식을 연하여 생각생각마다 떠나지 않으면 곧 다 없어진 듯 자유자재로 스스로 식의 연에 머무르니 이것을 미도지정이라 한다.
이 이후에 활연히 식(識)과 상응하여 마음이 정해져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일을 보지 않고 오직 현재의 심식이 생각생각 머물지 않는 것만을 본다. 선정의 마음이 분명하여 식으로 생각함이 대단히 넓고 한량없고 끝이 없다. 또한 선정 가운데서 과거에 이미 사라진 한량없고 끝없는 식을 기억하며, 미래에 일어날 한량없고 끝없는 식도 다 선정 중에 나타나 식법과 상응한다. 식법으로 마음을 지니면 산란한 뜻이 없어진다. 이러한 선정은 편안하고 청정하며 고요하여 심식이 밝고 예리해지는 것이 어떤 비유로도 설할 수 없다.
3)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第十六章)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은 불용처정(不用處定)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공은 바깥 경계고, 마음은 안의 경계이니 이 두 경계를 버려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소처정(少處定)이라고도 하니 이 선정은 일체를 다 버렸으나 의근에 아직 법진(法塵 ; 法境)이 조금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무소유처정은 또한 무상정(無想定)이라고도 한다.
수행자가 깊이 식처정의 과실과 우환을 관하여 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심식은 무량무변하므로 식을 연으로 하여 선정에 들어가는 것은 진실한 법이 아니다. 오직 심식처가 없어 마음에 의지할 것이 없어야 비로소 편안함이라 이름한다. 곧 식처를 버리고 마음을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매어 둔다. 무소유란 공(空)도 아니고 식(識)도 아닌 무위법의 경계이며 분별도 없다.
이와 같이 알고 나서 그 마음을 고요히 쉬어 무소유법(無所有法)을 생각한다. 그러면 식처정이 사라지고 중간정과 미도지정에 나타난다. 이때 수행자는 일심으로 안이 깨끗하고 공하여 의지할 바가 없으므로 모든 법을 보지 않는다. 고요하고 편안하여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 이러한 선정을 얻을 때 온화하고 고요하게 생각이 끊어져 모든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의 모습도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다른 법이랴! 분별하는 바가 없으니 무소유처정이라 하고 또한 무상정(無想定)이라고도 한다.
4)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 第十七章)
이 선정의 이름에 대해 고금의 해석에 다른 점이 많지만 각각 뜻이 있으므로 모두 살펴본다. 어떤 이는 비상(非想)이라고 할 때의 '비'는 거친 생각이고 비비상(非非想)이라고 할 때의 '비비'는 미세한 생각이라고 한다. 이것은 거친 생각은 없지만 여전히 미세한 생각이 남아 있기 때문에 비상비비상이라고 한다는 해석이다.
어떤 이는 식처정일 때는 생각이 있고 불요처정일 때는 생각이 없다. 지금 이러한 유무(有無)를 함께 버린다. 비상으로 유상(有想)을 버리고, 비비상으로 무상(無想)을 버리기 때문에 비상비비상이라 한다고 설명한다.
또 어떤 이는 이 선정에서는 모든 모습을 보지 않으므로 비유상(非有想)이라 한다. 그러나 오로지 무상(無想)뿐이면 나무나 돌과 같으니 어찌 무상이라고 알 수 있는가· 그러므로 비무상(非無想)이라 한다고 한다.
수행인이 무상(無想) 중의 허물과 죄를 깊이 안다. 즉 무소유처정은 우매한 것 같고 취한 것 같으며 잠자는 듯, 어둠 속에 있는 듯하다. 무명에 덮여 깨달아 아는 것도 없으니 사랑하거나 즐거워 할 만한 것이 없다. 이렇게 그 선정을 자세히 관하면 수 상 행 식이 대단히 미세하더라도 또한 무상 괴로움 공 등의 법임을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곧 무소유처정을 떠나 비유비무를 관한다. 무슨 까닭인가· 나의 지금 이 마음은 과거 현재 미래에 구하더라도 다 얻을 수 없으니 이미 모습도 없고 처소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있음이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 만약 과연 이렇게 없다면 무엇을 '마음'이라 부르겠는가· 만약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다시 별도의 무(無)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무는 본래부터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타파했기 때문에 무라고 한다. 만약 유가 없다면 무도 없으므로 비유비무라 한다.
이와 같이 관할 때 유나 무를 보지 않고 한마음으로 중도에 반연하는 가운데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유상비무상정을 수습하는 것이다. 이때 불용처정이 문득 사라져 중간선을 얻고 그 마음이 자유자재로 대상 가운데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런 후에 갑자기 진실한 선정이 일어나 유무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 일체가 없어진 듯 고요하여 마음에 동요가 없으며 조용히 청정해짐이 열반의 모습과 같다.
이 선정은 미묘하여 삼계(三界)에서 더 나은 것이 없다. 외도가 이것을 증득하면 중도실상 열반 상 락 아 정이라 하며 이 법에 애착하여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 선정에 들어가면 유나 무를 보지는 않지만 능히 비유비무를 알 수 있는 마음이 있음을 깨달으니 곧 이 마음을 계탁하여 진신(眞神)으로서 멸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제자라면 이 마음은 4음(四陰:수 상 행 식)이 화합하여 있는 것으로서 허망하고 실체가 없으니 별도의 신지(神知)는 없다고 안다.
다음으로 허공처정은 색을 타파하므로 공이라 한다. 식처정은 공을 타파하므로 식이라 하며 유상(有想)이라 한다. 불용처정(무소유처정)은 식을 타파하므로 무식(無識)이라 하고, 무상(無想)이라 한다. 지금 이 선정은 무소유를 타파하므로 비무상(非無想)임을 말하여 비유상비무상이라고 한다. 이 선정은 들뜨고 가라앉음이 똑같으며 공과 유가 고르고 평등하니 세간선 중에 가장 높고 뛰어나다.
다음으로 무상(無想)에는 세 가지 내용이 있다. 첫 번째는 무상천정(無想天定)이고 두 번째는 비유상비무상정(非有想非無想定)이며 세 번째는 멸수상정(滅受想定)이다. 방편을 모르는 외도는 마음을 멸하여 무상천정에 들어가고 방편을 아는 사람은 마음을 멸하여 비유상비무상정에 들어가며, 불제자는 마음을 멸해 멸수상정에 들어간다.
인간의 심리상태와 선정 상태를 욕계 색계 무색계로 나타낼 뿐인데...이걸로 얼마나 겁주었지요?
살아서 죄지으면 죽어서 지옥간다, 축생보를 받는다, 복지으면 천상에 간다,? 삼매 상태로 죽으면 무소유처-6만대겁을 산다고?
얼마나 소카 묵은겨?
첫댓글 인간들이 사후에 어디로 갈것인가를 가장 궁금해하고 저 높은 하늘나라의 파라다이스를 꿈꾸고 산다, 티벳인을 보라.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고 평생을 무소유적 삶을 살고 있다.이것도 나쁘다고 볼수 없다.지족하고 사는 것이 부처님이 가르치신 것과 같기에...그러나 윤회 족쇄에 걸려 자기 삶을 옭죄고 사는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거짓말을 하지마라...부처님 가르침이 아닌가? 방편이라고 은근 슬쩍 넘어가지말고 진실만을 말해 달라는 것이다.!!!
저작권 땜시 막아 둡니다.
불교가 과학적이라고? 증명할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요소들이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과학적이라는 말은 할수가 없을 것이다.부처님법은 와서 보라는 법이고 현실에서 증명할 수 있다고 분명히 하셨다.
범부 중생은 알수없는 일을 헤아릴수 없는 사안을 가지고 아는체 하기는요. 중생의 눈으로 가서 본들 무엇을 볼수 있을 까요. 기껏해야 지눈에 안경으로 보겠지요. 과연 부처님의 눈으로 볼수 있을 까요 위의 교리가 맞다고도 할수 없겠으나 더우기 틀렸다고 하는것은 시기상조
如夢幻泡影 여몽환포영 -신, 귀신 역시 헛개비 -환
관념,이데올로기,신,귀신등은 현상이라 할수 있겠지요. 현실에 나타날수 있는 어떠한 실제--이것을 아울러 현실이라고 보아야지요. 위의 여몽환포영 -----, 범소유상 개시 허망 역견제상비상 즉견여래등은 실상법문입니다. 현상과 실상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어찌 정신 분열이 일어나지 않고 살수있을 까요. 바른 법으로 들어갈수 있을 까요. 사다리를 타고 올라 가야 하는데 사다린지 하늘인지도 모르고 어찌 높은곳에 오르려 한단말입니까. 우리 분별하지말라에 속지말고 좀 정확히 분간 합시다.
모든 몽환포영을 만들어내는 주범이 바로 '나'라고 할만한 것이 있다는 취착심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모든 정신분열과 전도몽상은 바로 거기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놈을 또렷이 볼 수 있을 때 범소유상 개시 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이것이 바로 자신안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법으로 확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다리는 부처님께서 이미 튼튼하게 만들어 준비해 주셨습니다.. 사념처의 수행이 바로 그것이지요.. 이것이 자아의 분별을 똑바로 보게 해주는 수행이고 모든 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승의 길이다..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수행의 도입니다..
선불교에서 스스로의 허망의식을 또렷이 보지 못하고 화두참선하는 것이나.. 남방불교에서 연기의 통찰이 없이 위빠사나 수행하는 것이나 허망으로 빠지는 것은 똑같습니다..부처님께서 똑바로 보라고 하는것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붙들고 앉아 있는 것이니까요.. 결과는 위의 아비담마에서 늘어놓는 온갖 몽환포영이 실제로 있다고 매달리게 되지요..
리처드 도킨스가 신은 만들어진 신이라고 밝혔잖아요. 기독신은 가짜고 불교의 신들은 진짜다? 죄다 허상이여
자심화작 自心化作 ;자기 마음이 변화하여 곡두처럼 물체를 만들어 내다. 자심현량現量과 같음 ..망념이 제멋대로 생각해 냄으로써 곧 지옥이 있고 귀신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달마어록중- 돌을 새겨서 부처를 만들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