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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 주석
그리스도의 발에 기름 부은 마리아(요한복음 12:1-11)
이 부분에서 우리가 접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우리 주 예수께서 베다니에 있는 친구들을 "친절히 방문하심"(1절). 그는 "유월절 엿새 전에," 시골로부터 올라오셔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베다니에 머무르셨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얼마 전에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신" 그의 친구인 나사로와 함께 머무르셨다. 그가 베다니에 오신 것은 이제 다음과 같이 고찰될 수 있다.
1. 유월절에 참석하시려고 오신 것이었다. 이 사실은 본문에서 "유월절 엿새 전에"라고 함으로 그가 유월절 즈음하여 오신 것을 강조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경건한 자들은 이 절기를 준비하기 위하여 절기 앞서 예루살렘으로 왔다. 주 예수께서도 이같이 하심으로 "모든 의를 완성하시었다." 이같이 예수께서는 절기를 맞는 자가 지녀야 할 경건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심으로 복음 시대의 제반 절기들을 우리가 어떻게 맞아야 하는가를 보여 주고 계신다. 우리는 여기서도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2. 그의 원수들의 광분에 스스로를 드러내시고자 그는 예루살렘 가까이로 오셨다. 비록 그가 전에는 그들의 함정들을 쉽게 피하실 수 있는 것을 보여 주셨었지만 이제 그의 때가 가까웠으므로 그는 그들의 손에 닿을 곳에 오셨으며, 그들에게 자신을 선뜻 내어주셨다. 주의할 점,
(1)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의 고난에 대하여 자발적이셨다는 것이다. 그의 생명은 그로부터 "강탈된"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포기하신 것이었다." 그는 "보라 내가 왔도다"라고 그들에게 시위하셨다. 그를 박해하는 자들의 세력이 그를 누를 수 없었듯이 마찬가지로 그들의 간계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었다. 그가 죽음을 당하신 것은 스스로 죽음을 당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자신의 보존을 위해 해야 할 시기가 있듯이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바칠 것이 요구되는 시기도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이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향했을" 때의 태도가 그러한 것이었다.
3. 그는 당신이 사랑했고 이제는 두고 떠냐야 하는 베다니의 친구들에 대한 마지막 정을 나누기 위해 이곳에 오셨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송별의 방문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송별을 하고 다가오는 환난의 날에 대한 위로의 말씀을 남겨 주시려고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잠시 그의 백성들을 떠나실 때라도 그들에 대하여 노하셔서가 아니라 사랑하시지만 따나셔야 한다는 것을 일러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베 다니는 여기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살던" 마을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여기서 행해진 기적은 그 장소에 새로운 영예를 부여하셨고, 그곳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이 기적에 의해 어떠한 향상이 이루어졌는가를 살피시기 위하여서 이리로 또한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기사를 행하시고 굉장한 은혜를 나타내신 곳은 그 후에 찾아 보시며, 기적을 통해 이루시려던 그의 뜻이 이루어졌는가를 살피신다. 그는 자신이 풍성하게 씨뿌리신 곳에서는 과연 싹이 텄는가도 관찰하신다.
Ⅱ. 그곳의 친구들이 그에게 제공한 "친절한 환대." 그들은 "거기서 그를 위해 잔치를 배석하였다"(2절). 본문의 내용이 마태복음 26장 6절 등에 기록되어 있는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내용과 같은 것인가 하는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의도와 많은 정황이 서로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의 본문은 유월절 이전 "이틀"이라고 언급된 다음에 전개되며, 반면 요한의 본문은 "엿새 전에" 행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마르다가 그녀 자신의 집 외의 집에서 집안 일을 하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처럼 마태의 기록과 요한의 기록에서도 다른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마태복음의 사건은 유월절 주간의 제 삼일에 있었고 본문의 사건은 유월절 바로 전 안식일에 있었던 것으로써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바로 전날 밤의 일이었다. 또한 전자는 시몬의 집에서 후자는 나사로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다 베다니에서 예수에게 베풀어진 가장 공개적이고 엄숙했던 잔치였다. 마리아는 아마 그녀의 존경의 표적으로 두 잔치에 다 참여하여 기름을 부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녀는 첫 번째 잔치 때 기름을 다 쓰지 않고 남겨 두었다가(당시 그녀는 한 파운드의 기름만을 사용하였다) (3절) 두 번째 기회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이때 그녀는 "향유를 전부 부었던" 것이다)(막 14:3). 이제 저희가 어떻게 주님을 대접하였는가 살펴 보자.
1. 그들은 "잔치를 베풀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만찬을 최고의 식사로 여겼다. 그들은 존경과 감사의 표시로 이 잔치를 베풀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식탁을 함께 하는 것은 우정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와 함께 자유롭고 즐거운 담화를 나눌 기회를 갖기 위해 이 만찬을 베풀었다. 아마 그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도록"(계 3:20) 그들의 마음의 문을 그에게 열 것을 약속하신 것은 그가 육신으로 계시던 날에 그리스도에게 베풀어진 이와 같은 환대를 암시하는 듯하다.
2. 마르다는 "일을 보았다." 그녀는 선생님에 대한 큰 경의의 표로써, 몸소 식탁의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비록 상당한 계급의 사람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식사의 "시중을 드는" 것을 비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몸을 굽혀 시중을 들므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을 불명예나 치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전에 마르다가 "시중드는 일에만 전념한다"고 책망하셨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흔히 지나치다고 하여 책망 들은 일은 내버려두고 슬그머니 다른 일만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 인해 시중들기를 그만 두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일을 보았다." 그녀는 그전처럼 그리스도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일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일을 보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시종들에 관한 말했듯이 예수의 시중을 들면서 계속 그의 지혜의 말씀을 듣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생각하였다. 이같이 그녀는 군주의 식탁에 손님으로 "초대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시중드는" 것을 더 낫게 여겼다.
3. 나사로도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다." "그와 함께 먹고 마신"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부활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도 그와 함께 먹고 마신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로 증명됨을 보게 된다(행 10:41). 나사로는 그의 부활 이후에 "광야에서 은둔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저 세상을 갔다 왔다고 하여 세상에서는 은자가 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아니,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람들과 친근하게 사귀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행하신 기적의 기념으로써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영적인 생명에로 "일으키신" 자들은 훗날 "그와 함께 앉게" 되는 것이다(엡 2:5, 6 참조).
Ⅲ. 마리아가 그리스도에게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특별한 존경을 보여 그의 발에 좋은 향유를 부은 일(3절). 그녀는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을 위해 쓰려고 보관해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이 그녀로 하여금 그와 같은 향유를 사용하는 일을 단념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것을 "예수의 발에 붓고" 그에 대한 그녀의 존경과 그녀 자신에 대한 무관심의 징표로써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이 사실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곧 알려지게 되었다(잠 27:16 참조).
1. 의심할 바 없이 그녀는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 대한 그의 사랑의 참 표시를 보여 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사랑의 징표로써 이 일을 의도하였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제 이 사실에 의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다음과 같음을 볼 수 있다.
(1) "아낌없는" 사랑이었다. 그녀는 그를 섬기는데 드는 필요한 경비를 절약하려고 하기는커녕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종교에 있어서의 희생의 기회를 순수한 마음으로 마련하였다. 만일 그녀가 다른 것보다 더욱 값진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가져오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이 세상보다 훨씬 더 그를 참으로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자기가 가진 최선의 것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2) "자신을 낮추는" 사랑이었다. 그녀는 향유를 그리스도에게 바쳤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의 손으로 그에게 부었다. 그녀는 시종들 가운데 하나에게 그 일을 명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보통 그러하듯이 그의 "머리"에 붓지 않고 그의 "발"에 부었다. 참된 사랑은 그 대가를 아끼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데 있어서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고 고통받으신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어떠한 봉사이든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다든지 몸을 굽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천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진실로 배은망덕한 일일 것이다.
(3) "신뢰하는" 사랑이었다. 그녀에게는 이러한 사랑을 낳게 하는 믿음이 있었다. 즉 예수를 메시야요 그리스도를 기름 부음을 받는 자로서 믿는 신앙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그녀는 그가 제사장이며 동시에 왕으로써, 아론과 다윗처럼 기름 부음을 받은 분임을 믿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우리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붓지 않은 기쁨의 기름을 그에게 부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최선의 사랑의 향유를 그에게 붓자.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승인함으로써, 그를 "우리의 머리"로 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는 부응해야 한다(호 1:11).
2. 기분좋은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찼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1)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그들의 마음과 가정에 그윽한 향기를 가득 채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우리에게 "마음을 기쁘게 하는 향유"가 되신다.
(2) 그리스도에게 끼쳐진 영예는 그의 모든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드려진 존귀는 하나님께와 선한 자들에게 "그윽한 향기나는" 제물인 것이다.
Ⅳ. 마리아의 경의,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존경에 대한 유다의 증오(4.5절).
1. 이 행위를 트집잡은 자는 "그의 제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형식상의 제자였지 본질상은 그의 제자가 아니었다. 인간 중 가장 악한 자가 최선의 직책의 가면 아래 숨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추호의 존경도 품지 않은 자가 그와 관계되는 것처럼 가장하는 자들도 많이 있는 것이다. 유다는 사도요, 복음의 설교자였으나, 그럼에도 이 경건한 사랑과 헌신의 예를 저지하고 통제하였다. 신앙의 삶과 거룩한 것에 대한 열심히 그것을 돕고 격려해야 하는 직책을 가진 자들에 의해 저지되고 반대되는 것을 보는 일은 슬픈 사실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더군다나 이 자는 "그리스도를 배신할" 바로 그자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차가운 사랑, 그리고 진지한 경건에 대한 은밀한 모욕이 신앙의 고백자들 중에서 나타날 때, 그것은 최종적 배교의 슬픈 조짐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위선자들은 세속적인 삶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자신을 은폐하지만 이러한 위선은 결국 더 큰 유혹에 자신을 팔아 널길 조짐에 불과한 것이다.
2. 그의 반대한 그럴 듯한 이유. 사실 그 내면에는 그리스도에 대한혐오가 깔려 있었다(5절). 그는 "이 향유가 경건한 용도를 위해 계획된 것이라면 왜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우리 돈으로 8파운드 10실링)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힐문한다.
(1) 여기 더러운 불의가 허울좋고 그럴 듯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같이 사단은 자신을 빛의 천사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2) 여기 경건한 열심을 경솔하고 잘못된 죄로써 몰아버리는 세속적인 것에 두고 남들의 "신실한 경건"을 낮게 평가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유다의 정신을 그들 안에 가지고 있는 자들인 것이다.
(3) 여기 그리스도에 대한 경건을 반대하려는 저의가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의 탈을 쓰고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는 구제를 빙자로 하여 자기의 탐심을 슬쩍 은폐시키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선사업을 하기 위해 "비축한다"는 구실 아래 현재 자선 사업에 "투자"하는 일을 기피한다. 그러다가 불행한 사태가 닥치면 그 돈을 자신이 다 써버린다. 유다는 "어찌하여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주 예수에게 바쳐지는 것이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행하지 않는 자들을 보고 그들은 열납될 만한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우리의 척도와 성향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을 모두 경솔하며 부적합한 것이요 시정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교만한 자들은 자기들의 충고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분별이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3. 유다의 위선에 대한 탐지 및 그의 위선의 저의가 드러남(6절). 여기 복음서 기자가 "마음을 살피시는" 자의 지시에 의해 유다의 속셈을 지적한다.
그는 본문에서 "이렇게 말함은 저의 말대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감 이러라"고 지적한다.
(1) 그의 반대는 구제해야 한다는 심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본문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도 관심도 없었다. 그는 오직 가난한 자들을 돌본다는 이유로 그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했을 뿐이었다. 이같이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확장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같이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교회의 순결을 위해 노력하는 듯이 보이나 실상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교회가 아닌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들은 실상은 교회의 참된 유익은 가라앉아 버리든 떠내려가든 개의치 않고 오직 이러한 구실 아래 그들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시므온과 레위가 할례를 열렬히 수호하려는 것처럼 가장했으나, 그 본의는 "언약을 수호하려는 배려 때문이 아니었으며," 예후가 "와서 나의 열심을 보라"고 했을 때도 만군의 여호와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2) 그의 말은 탐욕의 본심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본심은 이 향유가 그의 선생님을 위해 계획된 것이 되었으나 그는 오히려 그것을 돈으로 바꿔 그가 맡고 있던 재정 가운데 포함시키려는 데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다음을 살펴 보자.
[1] 유다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재정을 맡은 회계였다. 그 이유로 어떤 이들은 그가 "가룟, 즉 궤을 맡은 자"로 불려졌다고 생각한다.
첫째,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생계가 달려 있었던 "재정" 형편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것은 "조금"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농장도 거래할 상품도 있었으며, 외양간도 창고도 없었고 오직 몇 푼의 현금이든 "주머니"만 있었다. 혹은 혹자의 생각처럼 "가룟"이란 말은 "금고"라는 말로 볼 수도 있겠다. 그들은 거기에 그들이 살아가기에 넉넉할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유가 있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로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자의 가정이 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다녔다. Omnia mea mecum porto - 즉 나는 내 모든 소유를 나와 함께 가지고 다닌다는 속담에 일치하는 생활을 하였다. 이 주머니는 선한 사람들의 기부에 의해 채워졌으며, 이 "궤"는 선생님과 그의 제자들 "공유"의 것이었다. 이 교훈을 통해 우리는 세상부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아야 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겠다. 또한 지위와 의례에 의한 형식적 겉치레를 버리고 검소하고 낮은 생활 방식에 적응하는 태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님이 이러한 처지에 있었다면 우리 또한 그러한 삶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는 우리 때문에 "가난하게 되셨던 것이다."
둘째, 그들이 가진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맡은 "집사"는 누구였는지를 보라. 그는 유다로서 금고를 맡은 자였다. 그의 직책은 돈을 받고 지불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가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에 대해 한 번도 주님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그는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일을 맡게 되었을 것이다.
a. 그가 재정을 맡은 것은 그가 모든 제자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요 낮은 자였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회계 집사를 맡은 자는 베드로나 요한이 아니라 제자들 중 가장 천한 유다였다. 복음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세속적인 일들은 본연의 임무가 아니다. 또한 복음 사역자는 세속적인 일을 경하게 여겨야 한다(고전 6:4 참조). 그리스도의 왕국의 초기 성직자들 곧 사도들은 재정에 관여하기를 거절하였다(행 6:2).
b. 또는 그가 지정을 맡은 것은 그가 그 자리에 대해 욕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는 내심으로 돈을 관리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그래서 돈주머니가 그에게 맡겨졌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에게 돈의 관리가 맡겨진 것은 다음의 측면에서 볼 수도 있겠다.
(a) 그를 기쁘게 하여 그로 하여금 그의 선생님에게 충실하게 만들려는 배려에서 재정이 그에게 맡겨졌다고 볼 수 있겠다. 신하들은 가끔 그들의 승진에 대한 불만 때문에 정부를 싫어하곤 한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재정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b) 또는 그에 대한 심판으로써, 즉 그의 은밀한 악심을 벌하기 위하여 즉 그것을 그의 손에 맡김으로 그것이 그에게 함정과 올무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겠다. 내부에 범죄의 강력한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으면 그것은 언제인가 가장 강력한 유혹에 의해 밖으로 노출되어 범죄 행위로 나타나게 되며 결국 처벌당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리가 재정을 맡는 것은 좋아하거나 그것은 자랑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돈을 맡아 보아야 결국 "돈 관리인"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재정을 맡은 청지기는 고약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태어날 때부터 목매어 죽도록 예정된 유다였다(이러한 표현법을 쓴 것을 용서하라). "어리석은 자들의 재물은 그들을 파멸시킨다."
[2] 주머니를 맡게 되자 그는 훔치는 자기 되었다. 이 말은 그가 훔치는 기질을 가진 자라는 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분노와 원한을 품는 것이 곧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 듯이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은 마음으로 이미 도적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니면 아마도 그는 참으로 그의 선생님의 금고를 횡령하여 공공 소유로 주어진 것을 그 자신을 위해 돌려 사용하는 죄를 범하였기에 그를 도적이라고 한 것이라고 하겠다. 혹자는 그가 다가오는 환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선생님에게서 듣고 자신은 결코 그 고난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제 그의 주머니를 채우고는 도망쳐 그의 선생님을 떠나려고 하고 있다고 추측을 한다. 공공의 재물을 관리하고 처분하는 책임을 맡은 자들은 정의와 정직의 확고한 원칙에 의해 지배되어 어떠한 오점도 그에게 붙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속이는 것을 재미있는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만일 그 속이는 것이 "도둑질"이며, 또 (공동체는 일 개인보다 더 중요한 까닭에) 공동체를 대상으로 도적질하는 것은 개인을 대상으로 도적질하는 것보다 더 큰 죄라는 것을 생각할 때 도적질은 재미거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도적질하므로 자기에게 불신하였던 유다는 곧 그의 선생님을 배반하였던 것이다.
Ⅴ. 마리아의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인정(7,8절). 주님은 "저를 가만 두어라"는 말로 가룟 유다의 말을 저지하였다. 이 말을 통해 주님은 자신이 그녀의 친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과(그는 모든 감각의 즐거움은 전혀 멸시하였으나 그럼에도 본문에서의 행위는 그녀의 선의의 징표였으므로 그는 그 행위를 기뻐하심을 나타냈다) 그녀가 그 일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하려는 그의 배려를 볼 수가 있다. 이 말은 "그녀를 용서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즉 "비록 그것이 잘못이라 해도 그녀의 사랑에서 우러나온 잘못일진대 이번만은 그녀를 용서하라"는 말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비록 그들의 정직한 노력 속에 있어야 할 모든 진중함이 결여되었다 하여도 진실되게 그를 기쁘게 하려고 하는 자들을 욕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으려 하신다는 점을 주목하라(롬 14:3). 비록 우리가 그들처럼 행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여도 "그들을 가만 두어야" 한다.
1. 마리아를 인정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그녀가 행한 일을 은혜롭게 해석하신다. 그의 해석은 그녀의 행위를 비난한 자들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본문에서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나의 죽은 후 시체의 방부를 위하여 향유를 붓는 날을 위하여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라는 듯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하몬드(Hammond) 박사는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이다. "너는 너의 죽은 친구들의 시신을 썩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향유를 아까와하지 말고 또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도 말아라. 이제 이 여인의 기름 부음은 나의 방부를 위하여 의도되었거나 적어도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장례일이 가까웠고, 따라서 그녀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몸에 기름을 부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을 기억하자.
(1) 우리 주 예수는 그 자신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 많이 그리고 자주 생각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그 날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것이 역시 좋을 것이다.
(2) 우리가 무심코 주님을 위하여 행한 섬김이 우리가 생각한 이상으로 적절하고 아름다운 봉사라는 것이 나타날 때가 흔히 있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를 통해 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기회의 문을 열며, 은혜의 성령은 그렇게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
(3) 은혜가 풍성하신 그리스도는 선한 사람들의 경건한 말과 행위에 대하여 좋은 해설을 붙이시며 신통치 않은 것도 최선의 것으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좋은 행위는 최선의 것으로 해석하신다.
2. 그는 유다의 반대에 대해 충분한 해명을 하신다(8절).
(1)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어," 자선의 적절한 대상이 되곤 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신 15:11). 가난은 어리석고도 문제투성이인 이 타락된 인류 국가가 존속하는 한 늘 존재할 것이다.
(2) 교회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현존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은 은혜의 왕국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며 오직 지금 잠시 뿐이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의무가 주어질 때 어느 쪽에 우선권을 줄 것인가를 아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은 그때의 정황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기회들이 부여된다. 이 여러 기회들 가운데서 잠깐 있다가 곧 사라지고 말 기회의 경우에 우선권을 부여하여 그 일을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어느 때나" 행해질 수 있는 선한 의무는 "지금 즉시"하지 않으면 행해질 수 없는 것에 양보해야만 한다.
Ⅵ. 우리 주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이 만찬에 참석하고 계신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9절). 그러므로 본문은 "유대인의 큰 무리가 그가 거기 계신 줄 알았다"고 전해 준다. 그 이유는 그는 그 마을의 중심 화제거리가 되었기 때문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그리로 몰려왔다. 또한 더 큰 이유는 그가 근자에 행방을 감추었다가, 이제 어두운 구름 뒤로부터 해가 나오듯이 출현하셨기 때문에 그의 출현은 더욱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고 하겠다.
1. 그들은 그 이름이 크게 칭송되고, 나사로를 살리는 최근의 기적에 의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예수를 보려고 왔다.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온 것이 아니라 여기 베다니에서 그를 봄으로써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왔다. 바로 이 호기심 때문에 그들은 그가 전에와 같이 이 유월절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으실까 보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를 체포하거나 그에 대해 정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비록 정부는 그를 법률 위반이란 명목으로 기소하고 있었지만) 그를 보고 또 그에게 찬탄을 표하려고 왔다. 그리스도의 주변에는 그를 중상하려는 원수들의 모든 기도(企圖)에도 불구하고, 그가 잘 되시기를 바라는 몇몇 사람이 있었다.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알려졌을 때, 무리가 그에게 다가왔음을 보게 된다. 왕이 있는 곳에 아첨하는 자들이 있듯이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백성의 무리가 모여들었던 것을"(눅 17:37) 기억하자.
2. 그들은 나사로와 그리스도를 함께 보려고 왔다. 그들의 함께 있는 모습은 매우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광경이었다. 혹자는 이 이야기를 나사로 자신의 입에서 들음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확인하려고 왔다. 또 다른 이들은 오직 그들의 회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즉 그들이 죽어서 묻혔다가 이제 다시 살아난 자를 보았다는 이야깃 거리를 얻기 위하여 왔다. 이같이 나사로는 이 거룩한 날들에 아덴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에 대해 떠들고 또 듣는 것으로 그들의 시간을 보내는 자들의 구경거리로 봉사하게 되었다. 아마도 혹자는 나사로에게 죽음의 상태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 찬 질문을 하려고 즉 타계에 대한 소식을 물으려고 던 것이리라. 우리 자신도 가끔 '우리가 나사로와 한 시간 동안 이야기 한다면 큰 도움이 될텐데……'라는 미련을 품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누가 이전 목적으로 왔다면, 나사로는 아마 침묵하며, 그들에게 그의 여행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성서는 그가 본 내세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기록된 것 이상으로 지혜롭게 되기를 탐해서도 안 된다. 더구나 거기 우리 주 예수께서 계셨다. 사실 그는 나사로보다는 훨씬 더 그들이 문의하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사실 만일 우리가 모세와 예언자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또한 만일 우리가 그들이 타계에 낙한 우리에게 들려 주는 말에 주의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비록 나사로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났다고 해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Ⅶ. 우리 주 예수에 대해 증가하는 관심을 보고 대제사장들이 분노하였고, 그것을 꺾으려고 음모를 꾀했다(10,11절). 또한 그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였다"(혹은 결의하였다). 그 이유는 나사로 때문에(그의 말이나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이루어진 일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관찰할 것은,
1. 지금까지의 그리스도에 대한 저들의 모의가 얼마나 헛되이 좌절되었느냐는 점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그로부터 격리시키고 그들을 선동하여 그에 대하여 격분케 하려고 있는 애를 다 썼으나 많은 유대인들과 그 이웃들, 그들의 추종자들, 그들을 찬미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적의 확실한 증거에 의해 꺾여져서, 제사장 무리로부터 "떠나갔고," 그들의 폭정에 복종하던 데서 떠났으며, "예수를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나사로 때문이었다. 즉 그의 부활이 그들의 믿음을 생동케 했으며, 이 예수가 의심할 바 없이 메시야요, 그의 안에 생명이 있고 또 생명을 주는 힘을 그가 가졌다는 사실을 확신시켰다. 이 이적은 그들로 하여금 갈릴리에서 행하신 그의 다른 이적들까지도 믿도록 확신시켰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자에게 불가능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라고 그들은 생각하게 되었다.
2. 이 날의 표결, 즉 나사로를 사형에 처하기로 한 것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부조리했느냐는 점이다. 이는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의 일례였다. 그들은 "그물에 사로잡힌 야생소처럼" 격분으로 가득하여 전후 사정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날뛰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표적이었다. 왜냐하면,
(1)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더라면, 하나님에 대한 이같은 도전적인 행위를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에 의해 나사로를 살리셨는데 그들은 악의로 그를 죽이려 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얼마 전에 그를 다시 이 땅에 보내사, 그가 사는 것이 매우 적합함을 선언하셨는데 그들은 외치기를 "그 놈을 없애자. 그가 사는 것이 적합하지 않도다"고 했다. 이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 이외에 무엇이었겠는가? 그들은 마치 하나님과 겨룰 수 있고 또 왕 중 왕과 우위를 다툴 수 있다는 듯이, 나사로를 죽여 그를 다시 일으키신 전능한 힘에 도전하려 하였다. 도대체 누가 죽음과 무덤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그들인가?
"O caeca malitia! Christusqui suscitare potuit mortunm, non possit occisum - 즉 눈먼 악의여! 자연적인 죽음을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는 그리스도께서 살해당한 자를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하다니! (Augustine in loc) 나사로는 그들의 특별한 증인의 대상으로 그들에 의해 선정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특별한 사랑의 징표로 그를 뛰어나게 하셨기 때문에 더욱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어 그를 해치고자 하였다. 우리 생각에는 그들이 어떻게 하면 나사로와 그의 가족들과 사귈 수 있을까를 의논했어야 옳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나사로와 그의 가족의 중제로 그들이 박해한 이 예수와 화목하였어야 했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세속에 속한 신이 "그들의 마음의 눈을 멀게" 하였던 것이다.
(2) 만일 그들이 인간을 존중히 여겼더라면, 아무 죄도 없으며 그에 대해 그들이 어떠한 범죄도 뒤집어 씌울 수 없는 나사로에게 그와 같은 불의의 행위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처럼 쉽사리 가장 거룩한 공의의 줄을 끊고, 자연 자체조차 가르치고 있는 공리를 어기는 자들을 붙잡아 매둘 만큼 강한 끈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자신의 폭정과 미신에 대한 저희의 신봉 때문에 로마 카톨릭 교회처럼 가장 큰 악행을 정당화할뿐더러 그것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칭찬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요한복음 12:12-19)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승리 속에 입성하는 이 이야기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써, 모든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볼 수 있다.
Ⅰ. 일반 백성들이 우리 주 예수에게 부여한 존경(12,13절).
1. 그에게 존경을 표시한 자들 o;cloj polu.j - 즉 많은 사람들 즉 명절을 지키러 올라온 "큰 무리"들이 그에게 영광을 돌리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거민이 아니라 절기를 지키러 예배하러 먼 지역으로부터 온 시골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주의 성전에 가까이서 살수록 성전에 계신 주님으로부터는 먼 생활을 한다. 이들 주님께 영광을 돌린 자들은 "명절에 은" 자들이었다.
(1) 아마 그들은 시골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던 자들로 거기서 그를 크게 찬미하던 자들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의 대적자들이 많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에서도 그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입증하려고 앞을 다투어 나왔던 것 같다. 그리스도의 참된 가치를 알고 또 그에 대하여 존경을 품은 자들은 그에게 영예를 표할 수 있는 경우라면 언제든지 사람들 앞에서 그를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2) 아마 그들은 얼마 전에 스스로를 정결케 하려고 명절에 온 좀 더 "경건한 유대인들"로 보이며 그들은 그들의 이웃들보다 더 신앙심이 돈독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앞을 다투어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과 종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진 자일수록 더욱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종교를 더 잘 영접하고자 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이같이 기독교는 기독교 이전의 모든 진리와 제도들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러 나온 사람들은 통치자들이나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혹자는 그들을 오합지중에 불과한 무리로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약하고 미련한 것들을 택하셨으며(고전 1:27), 지체 높은 자들의 호위에 의해서 보다는 군중들의 호의에 의하여 더 영광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을 판단하시되 그들의 이름이나 명예로운 지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영혼에 의해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2. 그들이 그렇게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된 사건의 계기. 본문에 보면 "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들었다." 그들은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그를 찾았었다(11:55, 56 참조).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가 온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찾는 자는 틀림 없이 그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그가 온다는 말을 듣자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려고 활발히 움직였다.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의 도래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깨어나 그 날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즉 그 날에 되어질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숙고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며, 처녀들은 "신랑의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3. 그들이 그들의 존경심을 표현한 방법. 그들은 그에게 증정할 "행운의 열쇠"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를 시위할 칼이나 철퇴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또한 그를 축하할 악대를 준비한 것도 아니었고 오직 그들이 가진 것을 그에게 드렸다. 그리고 이들은 비천한 무리일지라도 그들은 요한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본 저 영화로운 무리의 희미한 그림자였다(계 7:9, 10). 비록 이들이 보좌 앞에 있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어린 양, 즉 이제 관례에 따라 명절 사일 전에 우리를 위해 희생되려고 선별된 속죄의 어린 양 앞에 있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의 어린 양에 대한 찬양과 본문의 예수의 입성에 대한 무리들의 축하를 비교해 보자.
(1) 하늘나라의 성도들은 손에 종료나무를 들고 있음을 보게 된다. 본문의 무리들 또한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다. 종려나무는 항상 승리와 승전의 상징이었다. 키케로(Cicero)는 많은 상을 획득한 자를 plurimarum palmarum homo - 즉 많은 종려나무 가지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이제 그의 죽음에 의하여 정사와 권세를 정복할 것이었고, 따라서 그가 승리자의 종려 가지를 가지셔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비록 그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으나 이 종려 가지에 의하여 왕복을 입은 것과 같은 위의를 갖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종려 가지를 가져오는 것은 초막제 의식의 일부분이었다(레 23:40; 느 8:15). 따라서 그들이 이 절기의 상징인 종려 나뭇가지를 가지고 우리 주 예수를 환영한 것은 그의 복음을 지시하는 모든 절기들(역주:그리스도 이전의 모든 절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한다고 보고 있다)이 그 안에서 완성되었고, 특별히 초막제가 그러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슥 14:16).
(2)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은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하였다(계 7:10). 본문에 보면 역시 많은 무리들이 그렇게 환영을 하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환영할 때 외치는 소리인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었다. 그런데 여기서 "호산나"는 바로 구원을 뜻한다. 그것은 시편 118편 25,26절에서부터 인용되었다. 이 평민들이 얼마나 성서와 친숙해 있었으며, 그들이 얼마나 적절하게 그것을 메시야에게 적용하였는가를 보라. 그리스도에 관한 가장 고차적인 표현은 성서적인 언어로 그리스도를 묘사할 때인 것이다. 이제 그들의 환호 속에서,
[1] 그들은 우리 주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한다. 비록 메시야까지 지금은 가난과 멸시 속에서 그들에게 나타났지만 그리고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들에게 가르쳐 준 메시야 관념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가 나타났지만 그들은 그를 왕으로 고백한다. 그들이 그를 왕으로 일컬음은 그의 위엄과 영예를 동시에 나타내는 것이며 우리도 그렇게 찬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통치와 권세에 우리는 순복해야 한다. 그들은,
첫째, 그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하나님이 보내신 의로운 왕이심을 고백한다. 즉 예언자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그를 찬미한다(시 2:6).
둘째, 약속되었고 오래 고백하던 왕, 곧 메시야 군주로서 고백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깨달음에 따라 예루살렘 거리에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인이었으므로 이에 의해 그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백하였다.
[2] 그들은 진심으로 그의 왕국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였다. 이것은 바로 호산나의 의미이다. 곧 이스라엘 왕의 번영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 백성들은 "하나님이여 솔로몬 왕을 축복하소서(호산나)"라고 외쳤던 것이다(왕상 1:39). 호산나를 외침으로써 그들은 세 가지를 위해 기원하였다.
첫째, 그의 왕국이 임할 것을 기원했다. 그들은 그 왕국의 빛과 지식이 광포되고 그 왕국이 권세와 능력 가운데 임할 것을 기원했다.
둘째, 그 왕국이 모든 적들을 정복하고 승전하게 되기를(계 6:2) 기원했다.
셋째, 그 왕국이 계속 되도록 기원했다. 호산나는 "왕은 영원히 사시옵소서"이라는 뜻이다. 비록 나라에 여러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나라로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하라(시 72:17)고 외쳤다.
[3] 그들은 그를 예루살렘으로 영접했다. 그들은 외쳤다. "오시는 이를 환영하라. 우리는 그를 만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한다. 당신 여호와의 복된 이여 오소서. 우리는 그의 축복을 내려 주시려 오시는 그를 진심으로 맞으리라." 이 환영은 "네 머리를 들라. 너 문들아 너 머리를 들라"는 환영사(시 24:7-9)와 같은 뜻이다. 이같이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 속으로 영접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를 찬미하고 크게 기뻐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의 관계를 크게 기뻐하여야 함과 같이, 주 예수의 인격과 직책,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그의 중재를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영광받으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표해진 경의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취하신 자세(14절). "그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혹은 획득하여 타셨다." 그가 홀로 나귀 위에 타시고 백성의 무리는 그의 주위에서 "호산나"를 외치는 광경은 초라한 형상이었다.
1. 그러나 이러한 행렬은 그가 흔히 취하셨던 행렬보다 훨씬 나은 상태의 행렬이었다. 그는 흔히 도보로 여행하시곤 하셨으나 이제는 나귀를 탔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초라한 행렬을 만족하게 여겼고 웅장하게 보이려고 꾸미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한 미천한 동물로 하여금 그를 섬기게 하셨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과 계약을 하실 때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에 의하여 우리에게 허락하신 한 동물에 의해 주님은 섬김을 받으시게 되었던 것이다.
2.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이 흔히 취하는 행렬보다 훨씬 못한 행렬이었다. 만일 그가 높은 지위의 사람의 행렬의 격식을 갖추어 공적 입성을 행하려 하셨다면 솔로몬의 수레와 같이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인" 수레에 탔을 것이다(아 3:9, 10). 만일 이스라엘의 왕이 예수와 같은 형태로 입성하셨다면 이런 행렬은 이스라엘 왕에게 명예를 준다기 보다 수치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하게 보이기는 바라면서 그 방법은 알기 못하는 어리석은 자로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행렬은 외적인 장관을 동반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은 자신을 낮추셨다. 그러나 요한은 환상 중에 그의 영광을 입으신 모습을 보았는데 그때에 그의 모습은 "흰 말을 타시고 활과 면류관을 갖추고" 계셨던 것이다.
Ⅲ. 이 일을 통하여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본문에 보면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15절)고 하였다. 이는 스가랴 9장 9절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모든 선지자들의 증거는 메시야를 지시하는 것이다. 특히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입성에 관한 증거이다.
1. 시온의 왕이 오실 것인데, "이처럼 나귀 새끼 위에 앉아" 오실 것이 예언되었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같이 이 미세한 환경까지도 예언되었고, 또 그리스도는 그것이 어김없이 이루어지도록 배려하셨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는 시온의 왕이다. 거룩한 산 시온은 오래 전부터 큰 도성 혹은 메시야의 왕도가 되도록 정해진 것이었다.
(2) 시온의 왕은 시온을 돌볼 것이며 또한 시온에게 입성하실 것이다. 비록 그는 짧은 기간 동안은 물러나 계실 것이나 때가 되면 그는 돌아오실 것이다.
(3) 비록 그가 서서이 오시지만(나귀는 걸음이 느리다), 그는 확실히 오신다. 그는 그의 신하들이 자유롭게 기구할 수 있도록 겸비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다. 그러므로 비천한 사람들도 자유로이 그에게 나아와 탄원할 수가 있다. 만일 그의 왕이 장엄한 지위나 큰 힘을 가지고 나타나시지 않는다는 이 사실이 시온에게 실망이 된다면, 비록 그가 나귀 새끼를 타고 시온에 오시지만 그럼에도 그가 그의 원수들과 싸우러 나갈 때는 "시온을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리라"(신 33:26)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싸우러 나가신다는 말이다).
2. 그러므로 시온의 딸들에게는 "시온의 왕을 보라"는 초대가 주어진다. 그의 오심에대한 통지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또한 그가 비록 외적인 위용을 갖추지는 않았으나 만민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셨으므로 그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라고 추대된다(마 3:11). 또 본문에 보면 시온의 딸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되고 있다. 스가랴서에서는 시온은 크게 기뻐하여 외치라고 하였으나 이것이 본문에 인용될 때는 "두려워 말라"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다. 불신에 의한 두려움은 영적 기쁨과는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만일 불신에 의한 두려움이 치료된다면, 또한 만일 불신으로 인한 두려움이 정복된다면 기쁨은 저절로 오게 마련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두려움을 "잠잠케 하려고" 그의 백성에게 오신다. 아직은 우리가 극도의 기쁨의 환호를 외칠 때가 오래하지는 않았더라도 우리는 두려움의 압박 밑에서 빠져 나오려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게 기뻐하라"는 말씀이 "두려워 말라"는 말씀으로 소극적으로 표시되었던 것이다.
Ⅳ. 복음서 기자가 여기서 제자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16절). "그들은 처음에" 왜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시며, 어떻게 성경이 이루어졌는가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 또한 그로 인해 성령이 부어진 이후에, 그들은 그에게 이루어진 이 모든 사실이 구약에 기록되었다는 것"과 또 그들과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구약의 예언대로 영광을 돌린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였다.
1. 여기서 아직 어린 상태에 놓여 있던 제자들의 불완전함을 살펴 보자. 본문에 보면 제자들조차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들은 나귀를 데려다가 그를 그 위에 앉혔을 때, 그들이 시온의 왕의 입성식을 수행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성경은 흔히 그들이 행하는 것이 바로 성서의 말씀을 이루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행위에 의해 성취된다(사 45:4)는 사실이다.
(2)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 중에는 제자들까지도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는 많은 뛰어난 일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들을 처음 접했을 때는 잘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소경이 처음 눈떳을 때 "사람들을 보고 나무들이 걸어가는 것으로 착각한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이같이 후에는 분명해지는 것이 처음에는 알기 어렵고 의혹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식에 있어서 성숙하게 성장했을 때, 끊임없이 그들의 첫 출발 때의 우행과 약점들을 반성하게 됨으로 자신들의 성장은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되고 또 다른 무지한 자들을 관대하게 대할 수 있게 된 것은 잘 된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어린 아이였을 때는 어린 아이와 같이 말하였노라"고 하였던 것이다.
2. 여기서 제자들이 성숙된 상태로 발전하는 것을 살펴 보자. 비록 그들이 아이에 불과했었으나 항상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온전한 데로 나아갔다. 다음을 살펴 보자.
(1) 그들이 그것을 깨닫게 된 시기. 그것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였다. 그 이유는
[1] 그때까지 그들은 올바르게 그의 왕국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것이 외적 광휘와 세력 중에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다. 따라서 메시야에 관해 예언된 성서의 내용이 그렇게 비천한 예수에 대한 것임을 미처 깨달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왕국, 그 세력, 영광, 승리의 영적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는 것을 막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그때까지는 아직 그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할 성령이 임하시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령(그가 또한 성서 기자들을 감동케 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에 의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계시의 성령"은 모든 성도들에게 "지혜의 영인" 것이다(엡 1:17, 18).
(2)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게 된 경위. 그들은 예언과 일어난 사건을 비교하고 그것들을 서로 맞추어 보고 그 상관 관계에 의하여 양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우에야 그들은 이것이 예언자들에 의해 그에 관하여 기록된 것임을 기억하였고" 또 그들이 그에게 행한 것이 곧 성경에 기록된 대로 행한 것임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役事)를 이해하도록 해 주며, 행해진 역사에 대한 관찰은 기록된 말씀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돕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이르기를 "우리가 들었고 또 보았다"고 하였다. 성경은 매일 성취되고 있다.
Ⅴ. 정부가 그를 크게 방해했음에도 우리 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데 대하여 백성들이 이러한 존경을 표하도록 만든 이유. 그것은 그가 근래에 나사로를 일으키심으로써 행하신 뛰어난 이적 때문이었다.
1. 여기서 그들이 이 이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확신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자. 확실히 온 성읍이 그것에 대한 소문으로 자자했고, 그 소식이 모든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 기적을 그리스도의 사명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또한 그에 대한 그들의 신앙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다 확실히 알기 위하여 그 기적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을 만나서 가능한 최선의 증거에 의해 그 일의 "확실성을 알려"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낼 때에 함께 있던 무리"들을 찾아 내어 그들이 진짜 목격자인가의 여부를 확인하고 그들의 증거를 들었다(17절). 그런데 이들 목격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일이 논쟁이나 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임을 단언하였고 만일 필요하다면 자기들 증언에 대해 맹세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저희의 결의는 VEmariu,rei라는 말 속에 잘 함축되고 있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그리스도의 이적의 확실성은 반박할 수 없는 증거들에 의해 입증되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바로 이 기적을 목격한 자들이 그들에게 묻는 이들에게 기적에 대해 확증했을 뿐만 아니라 이 입성 날에 사람들이 묻지도 않는데도 그 사실을 말하였던 것 같고 그러므로 이 엄숙한 입성의 의의를 더욱 높였으리라고 여겨진다. 또한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행하신 베다니로부터 오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다시 한 번 그 일을 상기하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자들은 그의 영예를 더욱 높이기 위하여 자기가 아는 바를 공포하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2. 이 표적에 대한 소문이 무리들에게 끼친 긍정적 영향(18절). 그들은 본문에 보면 "이 때문에 그를 맞았다."
(1) 어떤 이들은 호기심에서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을 행하신 자를 보고 싶어했다. 예루살렘에서 베푸셨던 많은 훌륭한 설교도 이 하나의 기적이 가능하게 한 것만큼 많은 무리가 그를 따르도록 이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2) 다른 이들은 마음에서 울어나 그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서 명예를 돌리고자 하였다. 이 기적은 그가 행하신 최초의 기적들 가운데 하나로써 이것은 그가 이전에 행하셨던 기절들을 입증해 주었고 또한 바로 그의 수난 이전에 그로 하여금 영예를 받으시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은 전부가 "잘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잠 7:7) "시간적으로도 알맞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Ⅵ. 이 모든 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분노. 아마도 그들 중 몇몇은 그의 입성을 보았을 것이고 또 나머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공적 입성을 곧 전해들었을 것이다. 그를 제거할 수단을 찾고 있었던 공회는 그가 숨어 다니시는 것을 보고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곧 예루살렘에서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들의 상상이 "헛된 것"에 불과했었음을 깨닫고 분격하고 속을 태웠던 것이다.
1. 그들은 그에 대한 대적이 전혀 실패한 것을 고백한다. 그들의 계획이 "전혀 주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서 예수를 박해하게 하려 했으나 그럼에도 그에 대한 백성들의 사랑을 버리게 할 수 없었다. 또한 백성들을 위협하여 보았으나 그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그의 왕국과 싸우는 자들의 시도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임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들의 보잘 것 없고 무력한 악의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의도를 성취하실 것이다. 본문에 보면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희랍어로 ouvk wvfelei/te - 즉 그래 보아야 아무 유익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대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2. 그들은 그가 확고한 발판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본문에 보면 그들은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큰 무리가 본문대로 한다면 "온 세상"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온 세상이 그를 따랐다"는 표현은 어느 언어에나 흔히 있는 것과 같은 과장된 표현법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가야바가 자기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예언했듯이 정말로 훗날에 "온 세상이 그를 좇으니라"는 것을 예언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각계 각층에서 또 각처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좇게 되며 나라들이 기독교화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을까?를 살펴 보자.
(1) 그들이 이같이 말한 이유는 그가 유리하게 사태가 전개되는 것이 고통스러워서였다. 그들은 시기로 초조하게 되었다. "그 의의 뿔"이 영화롭게 들리리니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리로다(시 112:9, 10)는 성경 말씀이 바로 그들을 두고 한 말씀이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권력을 누리고 있었고 또 누구나 그들을 존경한 것을 생각할 때 누구나 이제 그리스도에게 행해진 보잘 것 없는 환영 때문에 그들이 그를 질투할 것까지야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은 영예를 독점하려고 하며, 하만처럼 남과 그것을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2) 이리하여 그들은 더욱 가혹하게 그리스도와 대적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였다. 그들의 말의 배후에는 이러한 뜻이 숨겨 있었다. "이처럼 우물쭈물하거나 지체해서는 결코 안된다. 우리는 무슨 다른 더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여, 이 전염병을 멈추게 해야 한다. 사태가 수습할 수 없도록 확대되기 전에 최선의 기술과 힘을 발휘하여 저를 없애자." 신앙의 원수들은 패배할수록 더욱 확고하게 되며 활동적으로 된다. 반대로 신앙인들은 그 원수들을 보고 실망하여 좌절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리스도의 신앙이 의로우며 마침내는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못하게까지 되는 것이다.
예수를 보고자 한 희랍인들(요한복음 12:20-26)
본문에서 존경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찾는 어떤 헬라인들에 의해 그에게 영광이 돌려진다. 본문은 이날이 그리스도의 최후의 주간 중 어느 날인가는 전해주지 않고 있다. 아마 그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던 날은 아니고(왜냐하면 그 날은 공적인 일로 분주한 날이었으므로) 하루나 이틀 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Ⅰ. 본문은 이 존경을 우리 주 예수께 돌린 자들이 누구였는가를 전해 준다. 그들은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 온 사람 중에 있던 헬라인 몇 명"(20절)이었다. 혹자는 그들이 "흩어진 유대인들"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즉 이방인들 가운데 흩어졌던 열두 지파 사람들 가운데 몇으로 그리스도에 거하는 유대인들로 본다. 이들 헬라에 거하는 유대인들을 "헬라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들이 고넬료나 내시같이 "문의 개종자"로 불리우는 이방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유대교가 여러 종교 중에 가장 뛰어난 종교였었다. 따라서 이방인들 중에서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던 자들은 허락되는 한도 내에서 유대인들의 엄숙한 집회에 동참하고 싶어하였다. 이같이 이스라엘 공동체와 경건하게 예배하던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이처럼 모여든 것은 유대 교회의 후기 시대에서부터였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간막이 벽이 붕괴되어가는 복된 전조였다. 요세푸스의 말에 의하면 제사장들이 이방인으로부터의 어떠한 헌납이나 희생 제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규제한 것이 로마인들이 유대를 침입한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Ro Bello Jud. lib. ii cap 30). 여하간 이 헬라인들은 무할례자인 경우에는 유월절 음식을 먹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들은 "명절에 예배하러"왔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는 특권들이 있더라도 주어진 특권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으로 사용해야 한다.
Ⅱ. 그들이 그에게 돌린 영예는 무엇이 있는가. 그들은 그를 알게 되기를 바랐다(21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그들은 시간을 가능한 한 가장 잘 이용하기를 원했으며 따라서 빌립에게 그가 그들을 주 예수와 개인적으로 담화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1. 일단 그리스도를 뵈옵고자 하는 소원을 품게 되자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그를 뵈올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그가 많은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그와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바라기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럼에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스도에 대해 알기를 바라는 자들은 또한 그를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그들은 제자들 중 하나인 빌립에게 청원하였다. 혹자는 그들이 이전에 그와 친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이방인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본문의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다 더 잘 알기 위해서 선한 사람들과의 친교를 증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는 주님을 알고 있는 자를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일 이 헬라인들이 갈릴리 근처에서 거행한다면 아마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대부분 거주하셨던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빌립에서 청원한 이유는 오직 그들이 보기에 빌립이 그리스도의 가까운 추종자였고 그들이 말을 붙일 수 있었던 첫 번째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이야기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그의 제자들 중의 하나에게 먼저 청을 넣은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고 그들이 비록 외모는 비천하게 보였지만 예수를 큰 자로 여겼다는 표징이었다. 이제 그가 하늘에 계시는 현 세대에서 믿음에 의해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자들은 예수의 사역자들에게 이러한 청을 드려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찾는 불쌍한 영혼들을 인도하게 하기 위해 사역자들을 임명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아나니아에 의해 또 고넬료는 베드로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인도됨을 받았던 것이다. 빌립에 의해 이 헬라인들이 그리스도의 지식에 인도되었다는 것은 사도들의 기능이 무인가를 나타내 주는 의미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이방인들을 믿음에로 회심시키고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는 것이 사도들의 사역의 본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3. 빌립에 대한 그들의 말은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빌립에게 명예로운 자가 받을 존칭을 부여했는데, 그 까닭은 그가 그리스도와 관계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를 뵈옵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을 봄으로 집에 돌아가서 굉장히 유명한 분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만이 아니라(아마 그들은 이미 그가 공적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를 보았을 것이다), 그와 자유롭게 담화하므로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공적인 일로 분주하셨으므로 그가 쉴 때에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명절에 예배하려 올라와서 예수를 뵙고자 하였다는 사실을 주의하자. 우리가 각종 교회의 절기에 참여할 때 예수를 뵈올 것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절기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다 더 잘 알게 되고 그에 대한 우리의 의존을 고무시키며, 삶이 그와 일치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그를 우리의 주로서 여기고, 그와의 교제를 유지하며 그로부터 은혜의 전달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예수를 뵙지 못한다면 절기에 참석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4. 본문에 빌립이 그의 선생님에게 이 일에 관해 말씀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22절). 그는 자기와 같은 벳새다 출신이었고 사도들의 무리 중에 베드로와 비슷한 연배였던 안드레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그에게 의논하였다. 즉 자기의 건의가 예수께 용납될지는 여부를 안드레에게 물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가끔 그가 "오직 이스라엘 집을 위해 보내졌다"고 말하셨기 때문이었다. 의논한 후 그들은 예수께 이 사실을 아뢰어야 된다는데 합의하였다. 또한 빌립은 안드레더러 같이 가지고 했다. 그 까닭은 빌립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말씀 즉 "그들 중에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이든지 구하면" 이루어 주시리라는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마 18:19).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영혼들을 인도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돕고 뜻을 합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 이유는 "둘이 하나보다 낫기 때문이다." 안드레와 빌립은 그리스도께서 공적으로 가르치고 계실 때 그에게 이 메시지를 가져왔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본문에 보면(29절) 예수의 곁에 무리들이 있었다는 내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혼자 계시던 적은 실상 거의 없었다.
Ⅲ.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돌려진 이 영예를 수납하심. 이 사실은 그가 거기 모인 백성들에게 한 말씀에 의해 나타난다(23절 등). 이제 그는 그가 장차 영광을 받을 것과(23, 24절) 그를 좇는 자들이 영광을 받을 것을 예언하신다(25,26절). 이 말씀은 이 헬라인들과 그를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요 또 그들을 향하신 격려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1. 그는 풍성한 추수 즉 이방인들의 개종에 대해 예언하신다. 그는 이 헬라인들이 이 풍성한 추수의 첫 수확인 것처럼 말씀하신다(23절). 그리스도는 이 헬라인들을 자기에게 소개하고 자기들이 한 일이 과연 잘 한 일인지 의문을 품고 있던 두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이 교회에 오게 되므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음을" 말씀하셨다. 이방인들로 그에게 나아오게 하시기 위해 그는 유대인들에게 배척되셔야 했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된 목적. 그것은 구세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신다. "과연 그러하냐? 이방인들이 나를 찾기 시작하는가? 새벽별이 그들에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저 축복된 날이 동트고 있는가? 그렇다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방인들의 나아옴은 그리스도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의 주변에 있던 자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다음을 기억하자.
[1]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교회에로 나아옴은 인자의 영광에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구원된 자들의 증가는 곧 구세주를 높이는 것이다.
[2] 인자가 영광을 받으실 시간 또는 때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영광 받으실 때는 바로 그의 겸비의 날들의 수가 차고 끝날 때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쁨과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자신이 영광받으실 날이 다가옴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때가 왔도다"고 하신다.
(2) 이방인들을 얻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된 기이한 방법. 이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었다. 이 사실은 아래의 비유의 말씀에서 나타난다(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고 뿐만 아니라 속으로 들어가 죽지 아니하면, 즉 파묻혀 없어지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너는 그 이상의 결과를 결코 기대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만일 자연의 과정에 따라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는 한 알이 밀이요, 또한 가장 가치있고 유용한 알곡이시다. 이제 이를 통하여 다음의 사실이 암시된다.
[1] 그리스도의 겸비의 필요성이 암시된다. 그가 만일 하늘에서 이 저주받은 땅으로 내려오시고 땅에서 저주받은 나무로 올라가시사,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시지 않았더라면, 살아서 생명을 주시는 교회의 머리요 뿌리가 결코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영혼을 사망에게 맡기셔야"했고 그렇지 않고서는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을"수가 없었다(사 53:12). 그에게는 자손이 주어질 것이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사고 그들을 정케하기 위해 그의 피를 흘리셔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그의 낮아지심은 수많은 무리가 그의 교회에 나아옴으로써 누리실 저 영광에 대한자격을 얻기 위해서도 또한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고난받으시므로 죄를 보상하시고 또 영원한 의를 가져오지 않으신다면, 결코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 오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그는 홀로 있으실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2] 그리스도의 겸비의 유익함이 묘사되었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땅에 오셔서 이제는 이 땅에서 잊혀져 버리고 말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하시었다. 따라서 그의 영광도 완전히 실추된 것처럼 보였다. 더군다나 "그는 죽으셨다." 불멸의 존재이신 그가 죽음의 법에 극복하신 것이다. 그는 씨가 흙 속에 묻히듯이 무덤에 누우셨다. 그러나 땅에 떨어진 씨가 다시 푸르게 싹이 나고 싱싱하게 성장하여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한 번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수많은 산 그리스도교인들을 그 앞으로 모았고 그는 그들의 뿌리가 되셨던 것이다. 이제부터 세상 끝날 때까지 영혼의 구원은 모두 이 "한 알의 밀"의 죽음의 덕을 입게 되었다. 이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영광을 받고 교회가 채워지고, 신비로운 몸이 유지되고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날 때 우리 구원의 대장은 그의 죽음의 덕택으로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이끄실 것이며" 또한 그는 고난에 의해 완전하게 되셨으므로 이제 영원히 성도들과 천사들의 찬미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이다(히 2:10, 13).
2. 그는 진심으로 그와 그의 복음과 유업을 받아들이며 또한 그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인 표시로 그를 위해 고난받는 일과 혹은 그를 섬기는 데 있어서 신실한 사람들에게 넘치는 보답을 예언하고 약속한다.
(1) 그를 위해 고난받는 자들에게 주어질 상급(25절). 그리스도보다 "자기 생명을 더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 생명보다 그리스도를 더 귀히 여기는 자들은 생명을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한다. 이 교훈을 그리스도께서는 크게 주장하셨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그의 종교의 큰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1] 여기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이 지닐 치명적 결과를 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말 자신에게 애착심을 가지고 산다. 또한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함으로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 동물적 삶을 사랑하여 탐욕에 빠져 "육체의 정욕만을 위해 사는" 자는, 그로 인해 그의 생애를 단축시키고, 결국 그가 거처럼 사랑하던 육신의 생명과 또 다른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다. 육체의 생명에 탐닉하며, 육신을 꾸미는 것과 육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사모하는 자들, 이 육신의 생명과 저 세상에서의 더욱 참된 생명을 잃게 되듯이 또한 자기의 생명이나 재산이 해를 입을까 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도 육신의 생명과 저 세상에서의 축복을 잃을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일막의 꿈에 불과한 행복을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저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잃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제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현명한 처사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얻기 위해 그의 영혼, 그의 하나님, 그의 하늘을 내 놓는 자는 너무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자기 생명을 사는 것이 될 것이며, 팥죽 한 그릇에 상속권을 파는 자와 같은 우행을 범하는 것이라 하겠다.
[2] 또한 생명에 대한 거룩한 경멸이 가져오는 축복된 보답을 본문에서 보게 된다. 육체의 생명을 미워하는 그의 영혼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육신의 생명도 내놓기를 꺼리지 않는 자는 영원한 세계에서 이 두 가지를 다 찾는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주목할 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할 것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서의 생을 보고 우리는 저 세상에서의 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저 세상에서의 생명보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덜 사랑할 때 곧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명이라는 말에는 우리의 현실에의 즐거움, 부, 명예, 쾌락, 그리고 그들을 소유하여 보내는 긴 생애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미워해야 한다. 즉 그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에는 헛되며 불충분한 것으로 여겨 멸시하며 그들 중에 있는 유혹을 두려워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과 충돌하게 될 때마다 기쁘게 그들을 떠나야 한다(행 20:24; 21:13; 계 12:11). 여기서 "경건의 능력"이 심히 큰 사실을 살펴 보자. 즉 그것은 세상에 대한 가장 강한 애착도 끊게 한다. 그리고 "경건의 신비"가 심히 큰 사실을 살펴 보자. 즉 그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지혜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생명까지도 미워하게 한다.
둘째,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들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들은 의인의 부활 때에 넘치는 보답을 받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그것을 보존하리라"고 하였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그것을 보존하실" 분의 손에 그것을 맡기는 것이 되며 지상의 생명을 주는 대신 하늘나라의 생명으로서 다시 생명을 복구하게 된다.
(2) 그를 섬기는 자에게 주어질 상급(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마치 종이 그 주인을 따르듯이 "나를 따르라." 그리고 나 있는 곳에 evkei/ kai. o`dia,skonoj evmo.j e;stai - 즉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을 것이다고 본문에 말씀되고 있다. 어떤 이는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인간이 그리스도에게 행해야 할 의무를 규정하는 말씀으로써 읽는다. 즉 "나 있는 곳에 그도 있게 하여 내 수종을 들게 하라"는 뜻으로 본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을 약속의 말씀으로써 즉 "그도 나와 함께 있으면서 축복을 누릴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또한 주님은 이 약속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첨가해 약속하신다. 이 주님의 약속은 너무나 과분한 약속의 말씀인 것이다. 헬라인들은 예수를 보고자 했다(21절).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로 하여금 그를 보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그를 섬겨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다. 그는 우리의 구경거리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통치할 왕으로서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는 그를 찾아와 그의 종이 되려고 하는 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신다. 종을 고용할 때는 할 일과 삯을 먼저 정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두 가지를 여기서 정하시고 계심을 볼 수 있다.
[1]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종들이 해 주기를 바라시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 일은 그들에게 매우 쉽고 합리적인 것이며 그들 각자에게 알맞는 것이었다.
첫째, 그들의 선생님이 가시는 곳에 그들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며 그가 지시하신 방법과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그가 말씀하신 것을 행해야 하며 그가 보여 주신 본과 규범을 따라야 한다. 또한 그들은 그가 가시는 곳을 따라 가야 하며 또한 그의 지도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의 행하심을 본받아 행해야 한다. 우리는 그가 우리를 이끄시는 곳으로 따라가야 한다. 또 그가 인도하시는 길로 걸어야 한다. 또한 우리 앞서 가시는 어린 양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누구든지 나와 관계를 갖고자 한다면 그는 내가 하는 일을 해야 하며 또 언제나 나의 부름에 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또는 본문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볼 수도 있겠다. "누구든지 진실로 나를 섬기고자 한다면 그는 나를 따르므로 그의 나와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마치 종들이 대로에서도 그의 주인의 뒤를 따르므로 그의 주인을 섬기고 있음을 나타내듯이 말이다."
둘째, 그들의 주님이 휴식하실 때 그의 수종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은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게 하여 그로 나를 수종들게 하라"는 말씀으로도 볼 수 있다. 그의 교회 곧 그의 성도들의 모임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 또한 계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의 규례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곳에 계신다. 따라서 그의 종들도 거기 그의 앞에 대기하여 서 있으면서 그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본문은 다음의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즉 "내가 이제 있게 될 그리고 내가 갈 하늘나라에 나의 종들은 그들의 뜻과 애정을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계신 곳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2]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종들에게 약속하신 삯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삯은 매우 풍족하며 고귀한 것이다.
첫째, 그들은 그와 함께 행복하게 될 것이다. 본문에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라"고 했다. 그가 빈궁과 수치 가운데 계시된 이 세상에서 그와 함께 있는다는 것은 단지 불행한 선택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우리 보고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것은 낙원에서 그와 함께 있으며 그의 식탁에 그와 함께 앉으며, 그와 함께 보좌에 앉게 되는 것을 뜻하신 말씀이었다. 즉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누리게 될 것은 하늘의 행복인 것이다(17:24). 그리스도는 마치 그가 이미 그곳에 계신 것처럼 행복에 대해 말씀하신다. 즉 그는 본문에서 '내가 있는 곳"에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또 그것에 가까이 가고 계셨고 또 그 나라가 "그의 마음에 그의 눈에"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모든 섬김과 고난에 대한 충분한 보상으로 주어질 것으로 기대하시고 있는 기쁨과 영광이 그의 종들에게도 보상으로 주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그를 따르는 길을 가는 자들은 목적지에서도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둘째, 그들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 영광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들에게 영예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모든 고통과 손실에 대해 보상하실 것이다. 그가 부여하시는 것은 크신 하나님의 선물로써 부끄럽지 않은 놀라운 것일 것이다. 더욱이 그의 선물은 지상의 무가치한 벌레 같은 자들이 받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일 것이다. 보상자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는 그들이 주 예수께 행한 봉사를 그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기신다. 그가 주시는 보상은 명예, 즉 진실로 영속될 명예요 가장 높은 명예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명예이다. 기록된 바(잠 27:18) "자기 주인을 시종드는 자는(겸손하고 근면하게) 영화를 얻으리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를 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입히시는 영화를 얻을 것인데, 그것이 지금은 비록 가려져 있으나 후일에는 밝히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은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 또 흔히 세상의 비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은 때가 되면 높임을 받을 것이다.
Ⅳ. 이제까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강론을 통해 "그를 보고자"하던 저 헬라인들에게 그를 섬기게까지 하고자 그들을 격려하셨다. 우리는 저 헬라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해 듣지 못하지만 이처럼 그들의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또 그리로 가는 길을 물었던 자들이 그것을 찾고 그리로 걸어갔으리라고 믿어 마지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아버지 증거(요한복음 12:27-36)
여기서는 그의 아버지가 하늘로부터 소리를 발하여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내용이 기록되고 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강론 뒤이어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리스도의 백성들과의 강론이 더 계속됨을 보게 된다. 본절들에서 우리가 살피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리스도께서 이 순간에 곧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고민의 순간에 그의 아버지께 호소하신다. 그는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다"(27절)고 하신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의 지금까지의 강론의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이하고도 놀라운 말씀이었다. 그 까닭은 그가 이 말씀을 여러 가지 소망스러운 내용을 말씀하시던 중간에 하셨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형편이라면 그는 지금 내 영혼이 "기쁘다"고 말씀하셨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기쁨 뒤에는 영혼의 고통이 따라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뒤죽박죽인 이 세계에서 우리는 기쁨 배후에 좌절이 따를 것을 기대해야 하며, 위로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닥쳐올 환난을 각오해야 한다. 바울이 삼층천에 있었을 때도 "육체에는 가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살필 내용은,
1. 그리스도께서 다가오는 고난을 두려워하심. 그는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다"고 하신다. 이제 어둡고 음울한 정경이 닥쳐오고 있었다. 이제 그의 영혼의 진통의 첫 고비가 오고 있었다. 이제 그의 고뇌가 시작되고 있었다. 또한 그의 영혼이 "크게 슬퍼할 때"가 오고 있었다. 다음을 기억하자.
(1) 우리 영혼의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맛보셨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고 구속하시며, 그의 영혼을 우리 죄에 대한 희생 제물로 삼으시려고 하시는 순간 그의 영혼에는 고통이 닥쳤다.
(2) 그의 영혼의 고통은 우리 영혼의 고통을 덜으시려고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왜 너희도 근심하고 나도 근심해야 하는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는 그의 앞에 놓인 기쁨을 전망하시며 그의 일을 즐겁게 해 나가셨으나, 그럼에도 그는 영혼의 고통에 자신을 맡기셨다. 거룩한 애통은 영적인 기쁨과 부합하며, 영원한 기쁨으로 향하는 길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민망하였고, 슬퍼하셨고, 두려워하셨다. 그러나 그 고난이 항상 있지는 않을 것이고 오래 계속되지도 않을 것이다. 고통 중에 있는 그리스도교인들도 이 사실을 기억하고 동일한 위로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단지 "잠시 동안" 고난을 받을 뿐이며, 곧 그 고난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 분몬에서 우리는 그가 곤경에 처하신 듯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은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라는 말 속에 암시되고 있다. 이 말씀은 그가 조언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논의하고 싶다는 뜻의 말씀은 아니다. 이 말씀은 다만 스스로 이제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적당할지 숙고한다는 뜻의 말씀인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번민에 빠졌을 때 우리는 남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또한 우리 자신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자처럼 말씀하신다. 그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고난이 수반된 사명과 그가 택하셨던 인간으로서의 본능 사이에 투쟁이 있었다. 이 인간으로서 본성이 이 고난을 두렵게 하였다. 이 둘 사이에 서서, 그는 "무슨 말을 할까?"하며 망설이신다. 그는 주변을 바라보셨으나, 아무도 그를 "도울 자는 없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그는 멈칫하고 당황해 하셨다. 칼빈(Calvin)은 이를 그리스도의 겸비의 위대한 보기로써 간주한다. 그는 본문을 보고 예수께서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처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Quo se magis exinanivit gloriae Dominus, eo luculentius habemus erga nos amoris specimen - 즉 영광의 주께서 더욱 전적으로 자신을 비우실수록 그가 우리에게 그러므로 품으신 사랑의 증거가 더욱 명백해진다라고 말한다. 이같이 그는 우리를 격려하시고자 "우리처럼 모든 점에서 시험당하셨다." 그 이유는 유리가 곤혹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로 그를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3. 이 곤경 중에 하나님께 드린 그의 기도. 그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신다. 그는 evk th/j w[raj gau,thj - 즉 이 때로부터라고 하셨다. 즉 고난이 임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그가 그것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의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그런 뜻이다. 이는 그의 인성에서 나온 말이었다. 우리는 그의 기도 속에서 이 인간적인 감정이 넘치고 있음을 본다. 신실하고 열렬한 기도에 의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기도 중에 그를 아버지로 바라보는 것은 고민하는 영혼의 의무요 관심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는 자발적으로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럼에도 그로부터 구원받기를 기도했다. 환난을 앞에 놓고 하는 기도는 환난을 참으며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가 그의 고통을 "이 때"라고 부른 것은 이제 그가 각오하고 있는 사건이 임박해 있음을 뜻한다. 이리하여 그는 그의 고난의 때를 다음과 같이 암시한다.
(1) 이 고난의 때는 정해진 때였음을 말씀하신다. 그는 이 때를 알고 있었다. 이전에 그는 두 번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씀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때가 매우 가까웠으므로 그것이 닥쳤다고 말씀하셨다.
(2) 이 고난의 때는 잠시에 불과한 것임을 말씀하신다. 한 시간이란 것은 금방 지나간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때 또한 한 순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고난을 통해 "그의 앞에 놓인 기쁨"을 보실 수 있었던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겼다. 그는 곧 자신의 태도를 비로 잡고, 자신이 그가 한 말을 회상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러나 이를 위해 내가 이 때에 왔나이다"라로 말씀한다. 먼저 번의 말은 인간으로서의 그에게서 나온 말이었으나 이번의 말은 그의 신성에서 우러나온 지혜와 사랑에 찬 말씀이었다. 하나님 뜻을 따라 살려는 자들은 이 예수의 두 번째 말씀을 따라 생활해야 한다. 처음에는 불만이 터져나오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르게 판단하려면, 또 다른 측면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생각을 고치셨다. 그리하여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고 말씀한다. 그는 자신이 그것을 피할 수 없으며 구제책이러기에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이 고난을 피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통해 고난을 수용하신다. 왜냐하면 그의 고난은 그 자신의 자발적 관여에 의거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의 모든 사업의 최고의 절정(면류관)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제 고난을 피한다면 이제까지 행해진 모든 것은 다 수포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그의 고난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따를 것을 말씀한다. 그가 고난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그는 이처럼 복종하고 고난 당할 각오를 가지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말을 통하여 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우리가 접할 때 그 고난이 우리에게 예정된 것임을 깨닫고 순응하게 하는 지혜를 가르쳐 준다(살전 3:3 참조)을 보라.
5. 아버지의 영화에 대한 그의 관심. 그는 그의 앞의 청원을 철회한 후, 그가 준수해야 할 다른 사실을 말씀한다. 그는 "아버지여 이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옵소서"와 같은 취지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곧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취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단순한 순복 이상을 표현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이 고난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중재적 의미의 말씀이었다. 그 이유는 이 말은 우리 죄를 대속하여 자신을 드림으로 신적 정의를 만족시키기를 목적하신 우리의 보증이 되시는 그분에 의해 말씀된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범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잘못은 그의 영광, 즉 그의 선포된 영광을 손상시켰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다른 해를 입힐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영예를 손상시킨다. 우리는 결코 그에게 행해진 이 잘못을 배상할 수 없으며, 또 우리를 대속해 줄 어떤 피조물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완전히 멸망시키므로 우리로 인해 손상된 영예를 회복하시는 길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주 예수께서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침해된 영예를 만족시키려 하셨고 예수는 자신이 수치를 입으심으로 하나님의 영예를 회복시키셨다. 그는 성육된 하나님의 아들에게 부여될 마땅한 영광을 스스로 부인하셨고 박탈당하셨으며, 가장 큰 모욕에 자신을 맡기셨다. 그리고 이제 그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내 희생을 받으시고 당신의 손상된 공의를 회복하소서. 그리고 죄인들의 허물을 나에게 돌리소서. 내가 그것을 감당하리이다"라고 하셨다.
Ⅱ. 이 말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 하나님은 항상 그의 말을 들으셨으며, 여전히 그러하셨다. 살필 것은,
1. 어떻게 이 대답이 주어졌느냐는 점이다. 그 대답은 하늘로부터의 소리에 의해 주어졌다. 유대인들은 바트콜(Bath-ko/i) - 즉 소리의 딸에 대해 흔히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지난 세대에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저 여러 가지 방법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직 우리 주 예수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누구에게 말씀하신 예를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유의 하나님의 응답은 오직 예수를 위해 보존된 영예였다(마 3:17; 17:5). 이 들리는 음성 이전에 빛이나 흑암 등의 현상이 먼저 나타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는 흔히 빛과 흑암이 잘 쓰여졌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답변의 내용 이 답변은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간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리고 응답 내용은 "내가 이미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그의 이름에 거룩히 여김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1) 하나님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즉 그의 교훈과 기적에서, 그리고 그가 보이신 거룩함과 선함의 모든 행위에서 영화롭게 되셨다.
(2)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을 통해 더 영화롭게 되실 것이었다. 그의 지혜와 권세, 그의 공의와 거룩함, 그의 진리와 선하심은 이미 크게 영광을 입으셨다. 파괴된 율법에 대한 변상은 완전히 치루어졌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가해진 모욕 또한 보상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보상을 받으셨고, 스스로 자신의 만족을 공포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행하신 일(곧 우리의 대속을 위해 아들을 주셨음)을 보고 우리는 용기를 얻게 되며 또 그가 아직 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실까 하고 기대하게 한다.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을 이롭게 하신 그는 앞으로도 영광을 얻으시고자 계속 인간에게 유익함을 베푸실 것이다.
Ⅲ. 이 음성에 대한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의 의견(29절). 우리는 그들 중에 몇몇은 그 마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도록 잘 준비되어 있어서 하늘의 음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기록하여 보관했으리라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에게 무리들의 엉뚱한 제안들을 전해 주고 있다. 본문에 의하면 그들 중의 혹자는 "우리가 울었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분명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늘어나음을 간파하고, 확실히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했다. 이제 이것이 나타내는 바는,
1. 하늘에서 음이 들린 것은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에게 전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자들에 의해서조차 긍정적으로 수긍되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사명에 대한 그처럼 분명한 증거조차 받아들이기를 꺼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그 어떤 다른 것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천둥치듯 하는(계 10:3, 4 에서처럼) 분명한 소리로 들렸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은 틀림 없는 일이었다. 혹은, 만일 천사들이 그에게 말했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므로 그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번 또는 두 번까지 말하시지만 인간은 알아 듣지 못한다."
Ⅳ. 우리 구주께서 이 음성에 대해 설명하셨다.
1. 그 소리가 전해진 이유(30절). 그는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니, 단순히 나를 격려하고 만족시키려고 난 소리가 아니라(그렇다면 그 소리는 그의 귀에 사적으로 속삭여졌을 것이다)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하신다.
(1) "그 소리를 들은 너희 모두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믿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한다. 우리 주 예수에 관해 그리고 그 안에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에 관해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우리가 그에게 순복하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즉 우리 때문에 난 것이다.
(2) "고난을 당하며 나를 따르는 너희 곧 나의 제자들이 내게 주어진 동일한 위로로 위로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한다. 만일 이 음성이 제자들을 위해 들려진 것이라면 그들이 그를 위해 생명을 포기할 수도 있을 만큼 큰 격려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로 인한 그들의 헌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하게 할 것이었다. 고통 중에 계신 우리 주 예수에게 주어진 약속과 지시의 말씀은 우리를 위하여 의도된 말씀임을 기억하자. "우리를 위하여 그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고 또 스스로 위로를 취하셨다."
2. 하늘에서 들려진 음성의 의미. 아버지의 품에 안겼던 그분은 그의 음성을 알았고, 그 뜻을 알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리라"고 말씀했을 때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의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예수는 아셨다.
(1)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리란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사탄이 정복될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31절). 그러므로 주님은 "이제 심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신적인 환희와 승리감에 도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구원의 해(年)가 왔도다. 뱀의 대가리를 부수고, 어두움의 세력을 완전히 부술 예정된 때가 왔도다. 이제야 말로 영광스러운 성취의 때로다. 이제 그렇게 오랫 동안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무르익어 왔고 그렇게 오랫 동안 성서 속에서 언급되었고 그토록 성도들이 소망하고 마귀들이 두려워하던 그 때가 임하였도다." 승리의 내용은,
[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kri,sij"는 본래 의학 용어로 가른다는 뜻의 말이다. "이제 이 세상에 위기(crjsjs - 즉 수술할 때)가 이르렀다"는 말이다. 병든 세계는 이제 전환점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날은 모든 인류의 생사를 가늠할 결정적인 날이었다. 이 수술에 의해 회복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소망이 끊어질 것이다. 또는 kri,sij는 법률적 용어로 다음가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즉 "이제 이 세상의 임금을 정죄하고 추방할 심판이 닥쳐왔도다"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첫째, 그의 죽음은 의인과 악인을 분별해 내는 심판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judicium discretions"이라고 말하였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척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각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대하였느냐에 따라 그들의 장래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어리석은 것과 거침돌로 여길 것이며 어떤 이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으로 여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두 강도가 그 예표가 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사람들은 심판될 것이다.
둘째, 예수의 죽음은 세상에서 선택된 자들에게는 은혜와 사면의 심판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의로운 하나님과 죄악된 세상 사이를 중재하셨다. 그는 죄를 대속하는 희생물이 되셨고, 또 죄인들에게는 구원의 보증이 되셨다. 따라서 그가 심판받고 유죄 판결을 받으시고 또 우리 범죄 때문에 상처받으신 것은 마치 이 세상에 대한 심판과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영원한 의가 유대인들 만 아니라 온 세계를 위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요일 2:1, 2; 단 9:24).
셋째, 예수의 죽음은 흑암의 권세에 대한 저주의 심판이다.
16장 11절을 참조하라. 재판은 침해된 권리를 옹호하고 억울한 자를 석방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운명하실 때 그리스도와 사탄, 약속된 씨와 뱀 사이에는 결코 잊혀질 수 없는 대결이 있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건지시려 하였고 사탄은 세상에 대한 권세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사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랫 동안 인간 자녀들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지냈다. 이제 그는 사람들의 죄악을 이유로 들어서 자신의 권리는 주장하였다. 우리는 그가 그럴 듯한 구실을 내세우는 데는 명수하는 사실을 잘 안다(눅 4:6, 7)뿐 전에도 그는 그리스도에게 자기 아래 굴복하면 이 세상 나라들을 다 주고 또 다스리게 하겠노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를 이기셨다. 그는 죽으심으로 손상을 입으신 신의 정의를 회복해 놓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리를 하나님에게 돌려 드렸다. 이제 이 재판에 의해서 사탄의 인간에 대한 지배는 불법적인 것임이 선언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주 예수의 소유로써 그에게 이양되었던 것이다(시 2:6, 8).
[2] "이제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는 것이다.
첫째, 본문에서 "이 세상의 임금" 일이라고 칭해지는 것은 악마이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물질을 이용하여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의 흑암에 대한 지배자이다." 즉 어두운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들"의 지배자이다(고후 4:4; 엡 6:12).
둘째, 이 악마가 쫓겨나리라는 것이 말씀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악마의 왕국이 약화되도록 많은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왕국이 끝장날 것이 말씀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으심에 의하여 세상을 하나님께 화해시키시므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다. 그리고 사탄을 파멸자로 정죄하여 쫓아내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의 교리를 통해 세상으로 하나님께 향하게 하심으로 죄의 권세를 깨뜨리셨다. 그리고 사탄을 사기군으로 정죄하여 쫓아내셨다. 그는 자신의 발꿈치를 상하심으로 뱀의 머리를 깨뜨리셨다(창 3:15). 사탄의 신탁이 잠잠해지고 사탄의 전들이 폐허가 되고 사탄의 우상들이 굶주리고 세상 나라들이 그리스도의 소유가 될 때 "세상의 임금"인 악마는 쫓겨날 것이다. 이 사실은 요한의 묵시를 통해서도 나타나는데(계 12:8-11) 거기서 사탄의 추방은 "어린 양의 피"에 의한 것으로 말씀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주 사람들의 몸에서 악마를 내쫓으신 것은 그의 전 사업의 대 목적이 무엇인가를 암시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확신을 가지시고 사탄에 대한 승리를 선언하신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죽음에 항복하실 때조차도 죽음에 대한 승리를 선언하셨던 것이다.
(2) 그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말씀은 그의 죽음에 의해 영혼들이 회개할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사탄의 추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32절).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신다. 본문의 말씀을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자.
[1] 우리 주님 예수의 대목적. 그것은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는 것"이었다. 즉 오랫 동안 하나님과 가까운 백성으로 여겨져 왔던 유대인들 만 아니라, 오랫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었던 이방인들까지 그 앞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그는 "만국의 보재"이시다(학 2:7). 그러므로 모든 백성들은 그에게로 나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두려워한 것은 세상이 그리스도를 좇을까 보아서였다. 또한 자기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백성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어갈 것을 두려워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인간의 영혼이 회심하는 데는 오로지 그리스도 한 분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첫째, 백성들을 모으실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이끌겠노라"고 하신다. 백성들을 모으실 분은 때때로 아버지로 묘사되기도 하였다(6:44). 그러나 본문에서 백성들을 모으실 분은 "여호와의 팔"아신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는 무력에 의해 사람들을 모으시지 않는다. 그는 "인정(人情)으로" 또는 "사랑의 줄로" 사람들을 이끄신다(호 11:4; 렘 31:3). 그는 마치 자석과 같으셔서 사람들로 스스로 그에게 오게 하신다.
둘째, 우리가 인도되어야 할 곳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가 그들을 내게로 인도할 것인데 그 이유는 내가 그들의 구심점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이제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있던 영혼이 그와의 사귐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고 불신하던 영혼이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게 되었고, 그의 품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나라로 가실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곳에 있는 당신에게로 향하게 하실 것이었다.
[2] 그가 자기 뜻을 성취하고자 하여 사용하신 기이한 방법. 그것은 "땅에서 들리시므로"서였다. 복음서 기자는 이 말씀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하여(33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고 전해 주고 있다. 즉 그의 원수들은 그를 돌로 쳐 죽이려 음모하고 또 계획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의해 처형되실 것을 말씀한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 처형되신 그 분은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음 그것에 달리워 올려지셨던 것이다. 그는 "세상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높이 달리셨다." 또한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리심으로 땅과 하늘에 의해 다 배척을 당하신 것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또한 이 말씀은 영예로운 승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eva.n u`ywqw/ - 즉 만일 내가 높임을 받는다면이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난을 그의 영예로 간주하셨다는 것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떠한 죽음을 죽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기만 한다면 이 죽음의 무덤, 곧 사자굴에서 들리워 빛과 사랑이 넘치는 것으로 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죽음을 대범하게 오히려 거룩한 기쁨을 가지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또한 그에게서 "우리도 그 때에 높임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제 본문은 우리에게 그가 "땅에서 들리우심으로" 그 다음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끄실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첫째,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끄는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 그가 먼저 들리우시고 난 다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생존하신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설교를 들었던 사실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야 그에 대한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이 교리에 들어 왔다는 사실을 대하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번창하기 시작한 것도 요셉이 죽고 나서부터였던 것이다.
둘째, 많은 사람을 그 앞으로 이끄는 것은 그의 높이 들리우심의 공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영혼들을 그에게로 이끄시는 강력한 힘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침돌"이었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자석"이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것에 비유한다. 즉 그리스도의 들리우심은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마 13:47, 48).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들리우심은 병사들로 보고 모이도록 하기 위한 "깃발을 올리움"과 같다고도 하며 또는 광야에서의 구리뱀을 높이 매단 것과 같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즉 무서운 독사에 의하여, 물린 사람들이 이 구리 뱀을 보면 거기 치료의 능력이 발생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치료의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이 십자가 아래로 모여들었던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올 때 그를 통한 구원이 전 민족들에게 전파되는 것이다(3:14, 15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의 모습 속에서도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즉 그는 팔을 벌리고 못 박힘을 당하셨는데 이는 아마도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시며 또 오는 자들을 포용하시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리라. 그리스도로 이 치욕적인 죽음을 맛보시게 한 자들은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을 그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사탄은 자기가 쏜 화살에 자기가 맞았던 것이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 함과 같은 것이다.
Ⅴ. 그가 말씀하신 것에 대한 백성들의 이의(異意) 및 말씀에 대한 그들의 비방(34절). 그들은 하늘로부터의 음성을 들었고 또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를 반대하고 시비를 걸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였다(23절). 그들은 이 칭호가 메시야에 대한 칭호들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단 7:13). 그는 또한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또한 그의 죽으심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그가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전에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즉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3:14)를 여기서도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1. 그들은 메시야의 영존(永存)을 언급하고 있는 성경 구절을 들어 그의 말씀을 공박한다. 즉 그들은 메시야가 죽기는커녕 "영원한 제사장"이 되며(시 110:4), "영원한 왕"이 되시며(시 89:29), "그의 날이 영원하며" "그의 년수는 여러 대에 미치리라"(시 21:4; 61:6)는 말씀을 인용하여 메시야가 죽지 않으실 것을 말하였다. 이같이 성서의 내용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하여도 마음이 성별되지 못하면 그 말씀에 대한 지식을 불신을 위한병기로 잘못 사용하며 기독교의 무기인 말씀으로 기독교를 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이 말씀들을 들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반박한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점은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나타난다.
(1) 그들은 성서를 근거로 메사야의 "영존성을" 입증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해 주는 성경 본문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 우를 범하였다. 그들은 구약을 통하여 "메시야가 영존하시리라"는 말씀은 들었으나 메시아가 땅에서 "끊어지고"(단 9:26)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한다"(사 53:12)는 말씀과 "그의 손과 발"이 관통되리라는 말씀은 결코 읽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그들이 이러한 말씀을 들었다면 왜 그들은 "인자가 들러워야 한다"는 말씀을 이렇게 이상히 여겼는가? 우리는 때때로 큰 실수를 범하고 이러한 실수를 성서의 말씀을 들어 변명하려고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고 또한 한 말씀을 지지한다는 구실 아래 다른 말씀의 진리를 흐리게 하기를 잘한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복음은 자유로 주어지는 은사임이 찬양됨을 보게 된다. 그러나 또한 거기에는 의무에 대하여 규정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면을 다 충실하게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분리시키거나 따로따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2)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인자의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반대하면서 그가 또한 그 말씀을 통하여 인자의 영광과 높아지심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들은 구약의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영존하시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 주 예수께서 자신이 영광받으실 것과 많은 열매를 거두실 것과 모든 사람들을 그에게로 이끌 것을 말씀하신 것은 못들은 양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가 그를 따를 사람들에게 없어지지 않을 명예를 약속하신 사실을 통하여 그가 영존하시리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은 간과하였다. 이같이 사람들은 흔히 상대방의 말의 일면만을 들어 상대방을 공박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상대방의 말을 전체적인 윤곽 속에서 파악하려 하면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는 역설들이 존재한다.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다"고 하였고 반대로 그가 "영화롭게 되실 것"이 말씀된다. 그리고 그가 "땅에서 들릴 것"이 말씀되고 또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끌 것"이 말씀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말씀의 역설적인 일면은 마음이 완악한 인간들에게 하나의 거침돌이 되는 것이다.
2. 그들은 "이 인자가 누구냐?"라고 물었다. 그들이 이것을 질문한 것은 가르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를 향하여 빈정거리고 모욕을 하므로 훼방을 놀았던 것처럼 다른 비난거리로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인자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우리가 알기로는 메시야는 죽음을 당하실 분이 아니시다. 그렇다면 네가 어찌 메시야라고 할 수 있는가? 자칭 인자라고 하는 네가 메시야일 수 없다면 이제 네가 누구를 사칭하겠는가"라고 말한다. 지금 그들이 그리스도를 외곡하여 판단하는 것은 그의 낮아지심과 빈곤 때문이었다. 그들이 대하는 현재의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Ⅵ. 무리들의 이의(異意)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저희들의 반박은 완전히 비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의 하신 말씀은 그들에게도 이해가 되는 말씀이었다. 그의 말은 "사람이 육체는 죽으나 영혼은 불멸하는 것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듯이 인자도 그러하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능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어리석은 질문에 답변하시지 않고, 그들에게 좋은 기회를 이같은 헛되고 무익한 비난으로 무산시키지 말도록 다음과 같이 진지하게 경고하셨다(36, 37절). "잠시 동안 빛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니 스스로 지혜롭게 되어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 행하라."
1. 넓은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찾아 볼 수 있다.
(1) 인간들의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심과 그들의 안녕에 대한 그의 소망. 그는 자기를 향하여 악을 도모하고자 애쓰는 무리들을 상냥하게 타이르셨다. 그는 "죄인들의 자기를 향한 모함에 직면하셔서 조차도" 그들이 회개할 방도를 강구하셨다(잠 29:10 참조).
(2) 반대자들에 대하여 그가 취하신 방법. "그는 거역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징계하셨다"(딤후 2:25). 만일 인간들의 정신이 저희들이 거할 영원한 세계에 대한 각을 통하여 그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또한 그들이 소일할 시간이 거의 없으며 촌시도 낭비할 수 없음을 안다면 귀중한 정신과 시간을 쓸 데 없는 비난을 일삼는 데 낭비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2. 협의에 있어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찾아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접할 수 있는 특권을 그들은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기간은 짧고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을 동안"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빛이시었다. 고대 교부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자신을 빛이라고 칭하시므로 그들의 반박에 대하여 무언의 답변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양이 매일 밤마다 서편으로 넘어간다고 태양이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있는 것처럼 그에 십자가의 죽으심이 그의 영원한 현존을 손상시키지 아니한다. 구약에서도 그리스도의 나라의 존속(存續)이 태양과 달의 존속에 비교되고 있다(시 72:17; 89:36, 37). 하늘의 법칙은 변화없이 고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태양은 지고 달은 기울어간다. 마찬가지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는 영원히 거하시나 수난에 의하여 기울어지고 계셨다. 그는 인간의 역사의 지평에 잠시 동안 머물러 계셨다.
[1] 당시의 유대인들은 "칩과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육체로서의 사심을 직접 보았고 그의 설교를 듣고 기적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성서는 우리에게 어두운 구석을 비쳐주는 빛이다.
[2] 빛이 그들과 함께 거한 것은 잠시 동안이었다. 그리스도는 곧 그들을 떠나실 것이었고 그가 떠나신 후 그들의 유대교회는 붕괴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에게서 사라질 석이요 맹목과 무지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게 될 것이로다. 우리가 빛과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짧으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세월은 짧고 기회도 그리 길지는 않다. 언제인가 촛대는 옮겨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곧 옮김을 당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에게 생명의 빛이 있는 동안은 순간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에게 복음의 빛이 있는 동안도 순간에 불과하다. 또한 은혜의 날, 은혜의 길, 은혜의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도 지극히 짧은 것이다.
(2) 이 빛을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동안 이 특권을 최대한도로 활용하라는 경고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빛을 잃을 위험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라"고 하였다. 여행자들이 목적지를 향하여 갈 길을 재촉하는 것은 여행 도중에 밤을 맞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밤중의 여행이란 불편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이같이 우리도 빛이 있을 동안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여행자들은 말한다. "해가 있을 동안에 자 빨리 서둘러 갈 길을 갑시다"라고. 영원을 향하여 여행하는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우리도 이같이 현하게 행하도록 하자.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하늘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과 또한 그 나라에 가까워질수록 그 나라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는 것이 우리의 임무임을 기억하자.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 우리의 일생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하루의 여로만이 있다.
[2] 걷는 데 가장 적당한 시간은 빛이 있는 동안임을 기억하자. 밤이 휴식을 위하여 있는 것처럼 낮은 일하는데 아주 적당하다. 은혜를 받는 제일 좋은 시간은 은혜의 말씀이 우리에게 설교되고 은혜의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힘쓰시는 때이다. 그리고 이 때야말로 우리가 힘을 내야 할 시기인 것이다.
[3] 우리가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기 위하여 최선의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우리가 주어진 인생의 과업과 우리의 여행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인생이 끝나고 말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너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기회란 되찾을 수 없는 것이며 네가 해야 할 일도 기회가 없으면 속히 처리할 수 없게 되리라"고 하신다. 어두움이 닥치면 그 큰 구원을 경홀히 여긴 까닭에 조심성 없었던 죄인은 참담한 정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놔두면 그것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3) 복음을 멀리 떠나 죄를 짓고 있다가 은혜의 시대를 맞게 되는 자들의 슬픈 상태, 그들은 "어두움 가운데 다녔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며 또한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이 걷고 있는 길이 어느 길인지 또 그들이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걷는지도 모른다. 복음의 빛을 잃어버리고 그 빛을 찾지도 못하고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실수와 오류 가운데서 헤매이게 되며 몇 천 번씩 구부러진 통로를 직면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기독교의 교훈이 제시하는 지시를 곁으로 제쳐놓아 보라. 그러면 우리는 선과 악 사이에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셔서 이다. 그는 파멸로 나아가면서도 그가 직면할 위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함정의 가장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거나 춤을 추고 있기 때문이다.
(4) 이 모든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큰 임무와 특권(36절). 의무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기회를 선용해야 했던 것이다. 이 후에도 사도들은 어디로 가든지 그곳에서 유대인들에게 제일 먼저 복음을 권고하였다. 본문의 말씀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그들에 대한 경고이다. 그리고 복음이 그들에게 제반되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경고이다.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즐거워할 것을 말씀하신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복음의 빛"을 믿고 그것을 신이 주시는 빛으로 받아들이며 그 빛이 밝히 보여 주는 진리를 응락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의무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보게 하는 빛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복음의 안내를 따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의 발에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빛이시다. 또한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계시된 대로 믿어야 한다. 결코 우리를 속이시지 않을 진실된 빛으로 또한 우리를 잘못 인도할 리 없는 확실한 빛으로 믿어야 한다.
[2] 우리에게 빛이 있는 동안 우리가 믿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길을 안내하고 가야 할 길로 우리를 지시해 주는 복음이 있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계속 매달려야 한다.
[3] 빛을 믿는 사람들은 "빛의 자녀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될 것이다. 이 그리스도인들을 "빛의 자녀들"이라고 하였고 "낮의 자녀들"이라고 하였다(눅 16:8; 엡 5:8; 살전 5:5).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섬기는 자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로부터 태어났고 하늘의 상속인들이요 빛의 자녀들이다. 그 이유는 하늘은 빛이기 때문이다.
Ⅶ. 그리스도께서 무리들로부터 떠나심.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의 말을 생각할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이같이 하신 목적은
1. 그들이 회개와 각성을 하기를 바라셔서였다. 만일 그들이 그가 한 말씀에 대하여 아무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가 그들에게 말씀을 더 이상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에브라임이 우상을 버리지 못하였듯이 그들은 그들의 불신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을 홀로 남겨 두셨다." 그리스도는 자기와 쟁론을 벌리고자 하는 자들에게서 은총의 수단들을 거두어 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패역한 세대로부터 그의 얼굴을 숨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신 32:20).
2.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는 그들의 분노와 광란을 피하여 그가 기숙하고 계시던 베다니로 물러가셨던 것 같다. 이 사실을 보아 그가 말씀하신 것이 그들로 화나게 하고 불쾌하게 하였음이 나타난다. 또한 그들이 좋게 되기를 바라서 하신 말씀에 의하여 그들이 더욱 나빠지게 된 사실도 드러난다.
무리들의 불신(요한복음 12:37-41)
우리는 본문에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우리 주님 예수께 돌린 영광에 대한 말씀을 대하게 된다. 그들은 그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불신을 예언하고 또 탄식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적고 또 반대하는 자들은 많았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에게는 참으로 불명예스럽고도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본문의 선지자들의 말씀은 모든 의문과 또한 모욕을 제거시켜 준다. 또한 그의 가르침에 대한 무례를 제거시킨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통하여 성서가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를 실망에서 지켜드리는 힘이 되었다. 본문에 이 불순종하는 백성들에 관하여 두 가지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요 또 믿지 못하리란 것으로써 복음적 선지자인 이사야에 의하여 예언된 것이었다.
Ⅰ. 그들은 믿으려하지 않았다(37절).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 행하셨으나"(이러한 표적은 그들을 회개시킬 수 있었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대적하였다.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셨던 풍부한 회개의 기회를 그는 기적을 행하시되 tosau/ta shmei/a - 즉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많고도 큰 기적을 행하셨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이 말은 그가 전에 행하셨던 모든 기적들까지 포함된 말이었다. 그는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그의 앞에 나왔을 때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 21:14). 그가 행하신 기적들은 그의 사명을 나타내 주는 훌륭한 증거였다. 그리고 그는 그 기적의 증거를 신뢰하셨다. 그가 행하신 기적과 관련하여 그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신다.
(1) 기적의 회수(回數). 그가 행하신 기적은 많았다. 즉 다양한 여러 가지의 기적을 행하셨다. 또한 같은 기적을 반복해서 행하시기도 하였다. 그리고 매번의 새로운 기적들은 전에 행하셨던 모든 기적들이 사실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었다. 그가 행한 기적의 회수가 많음은 그의 다함이 없는 능력의 증거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는 기적들의 진위를 측정해 볼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주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 기적들 가운데 속임수가 있었다면 그 가운데 하나라도 그 허위성이 밝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행한 기적은 심판의 기적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기적"이었으므로 그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유익한 것이었다.
(2) 무리들의 완악함. 그는 이러한 기적들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다. 무슨 먼 데서 또는 길 모퉁이에 숨어서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볼 수 있도록 많은 증인들 앞에서 행하셨다.
2. 그리스도가 제공한 수단들의 무효능(無效能). 그러므로 본문에 "그럼에도 저희가 믿지 않더라"고 기록되고 있다. 그들은 기적들을 부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인 단계인 믿음은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아무리 풍성하고 강력한 수단들도 잘못된 선입관으로 꽉찬 인간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저희는 보았으나 그럼에도 믿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3. 이 일을 통해 이루어진 성서의 성취(38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 신앙이 없는 유대인들이 성서를 성취시키려고 계획하였다는 뜻이 아니라(그들은 오히려 본문의 성귀들이 교회의 제일 훌륭한 아들들인 자기들 안에서 성취될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상상하였다) 그 사건 속에서 정확하게 성경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이다. 즉 이로써 이사야의 일에 대한 말씀이 성취된 것이었다. 있음직하지 않은 사건이 성취될수록 그 사건에 대한 예언의 신적인 선견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의미심장한 증거들로 밑바탕이 되고 있는 메시야의 나라의 도래가 유대인들 가운데서 이같이 많은 반대에 봉착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저희의 불신은 "r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이라고 언급되고 있다"(사 29:14). 그리스도 자신까지도 저들의 불신에 놀라셨다. 그러나 그것은 이사야가 예언한 것이었고 이제 그것이 성취된 것이다(사 53:1).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복문에서 복음은 그들이 전한 것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th/| avkoh/| h`mw/n - 즉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는가?"라고 본문에 기록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이요 너희는 우리로부터 들은 것이다. 우리의 보고는 사실그대로의 보고요, 국회의 엄숙한 결의 사항에 대한 기록처럼 오류가 없는 것이다"라는 뜻의 말씀이다.
(2) 이 보고를 전해들은 사람들 중에 비교적 소수의 사람만이 납득하고 그것을 믿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다. 그러나 복음을 영념하여 받아들이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러므로 "누가 그것을 믿었는가?"라고 기록되고 있다. 믿는 자들은 여기 저기 간혹 한 사람씩 눈에 뛰었고 그들마저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하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현자나 지체 높은 자들은 믿는 자들 가운데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들 현자와 지체있는 자들에게 복음은 확증할 수 없는 보고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3) 복음에 대한 보고를 믿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는 사실이 대단히 비판할 사실로 기록되고 있다. 본문에 "주(Lord)"는 70인역에서 유래된 서두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구약 성서에는 이 용어가 생략되었다. 이 "주여!"란 말은 그들과 그들의 전한 보고가 냉대를 받는데 대하여 사자(messengers)들이 하나님께 아뢰는 슬픈 정황을 강조해 주고 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였다"는 말씀과 같다(눅 14:21).
(4) 사람들이 복음에 대한 전함을 듣지 않은 이유는 "주의 팔이" 저희에게 나타난 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지 못하였고 또 스스로를 거기에 복종시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은덕과 또 그 죽음과 부활과의 사귐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안에서 주의 팔이 나타나셨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나타난 주의 팔은 보지도 못하였다.
Ⅱ. 그들은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이사야의 말씀대로 그가 저희 눈을 멀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누가 이 말씀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은 무단히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인간들은 날 때부터 악하게 하는 필연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 즉 그의 섭리에 선에 대한 무기력이 갖추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의 단독적인 주권에 의하여 아무도 정죄하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능히 믿지 못하였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본문의 말씀을 주석함에 있어서 그의 섭리의 신비에 물음을 던진다는 데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Justa sunt judicia ejus, sed occulta - 즉 그의 심판은 의로우시다. 그러나 감추어 있다고 하였다.
1. 그들은 능히 믿지 못하였다. 즉 다시 말하여 "그들이 믿으려 하지 않았다." 즉 그들이 오만하게 믿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다는 말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어거스틴이 본문을 이같은 식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크리소스톰은 인간 의지의 말씀에 대한 거절을 보여 주는 성서의 여러 가지 내용들을 예로 열거하고 있다. 그 몇 가지 예로써 창세기 37장 4절에 "그 형들이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는 말씀이라든가 7장 7절의 내용, 또한 예레미야 13장 23절의 "악에 익숙한 너희"라는 말씀 속에 나타난 도덕적인 무력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2.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사야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저희 눈을 멀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곤란한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되의 유래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완고하게 불신을 고집하는 자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을 구원받을 수 없게 하시므로 하나님은 그의 의로운 판단을 나타내신다. 이 하나님의 의에 의하여 그들은 그들의 이전의 신적인 빛에 대한 저항과 신적 법에 대한 도전에 대하여 마땅한 처벌을 받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은혜를 값싸게 여기도록 내버려 두신다면 또는 인간들을 욕망에 탐닉하도록 버려 두신다면 또한 그가 악령으로 하여금 의로우신 성령에 항거하는 자들에게 역사하도록 용인하신다면 그리고 그의 섭리 가운데서 괴인들의 길 가운데 거치는 돌을 놓아 그들의 편견을 더욱 공고히 하시며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면 이것이야말로 영적 심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상에게 절하는 이방인들을 "악을 사랑하도록" 버려두시며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을 "강한 유혹"에 사로잡히도록 버려두시는 것, 이 모든 것이 영적 심판의 실례이다. 여기서 회개의 방법과 그 단계를 고찰하도록 하여 보자.
[1] 죄인들의 눈이 시력을 찾아 신적 사실의 실제를 분별하고 신적 사실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
[2] "마음으로 깨달아." 깨달은 내용들을 자신들의 삶에 응용한다. 그들은 신적 사실들을 동의하고 찬성할 뿐만 아니라 승낙하고 영접해 드린다.
[3] "돌이킨다." 즉 죄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세상과 육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선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지복(至福)이요 유업으로 여긴다.
[4] 하나님이 저희를 "치료하신다." 즉 저희를 의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신다. 또한 유혈이 낭자한 상처를 치료하시듯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그리고 숨겨진 질병과 같은 저들의 부패함을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거절하시면 이 과정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의 하나님과 신적 생활로부터의 소외, 또한 그것들에 대한 마음의 도피는 뿌리깊고 항거할 수 없는 혐오로 자리나게 되고 결국은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고 만다.
(2) 형벌로써의 눈을 멀게 함과 마음을 완고하게 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고의적으로 악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로 주어지고 있으며 특별히 유대교와 그 민족에 관하여 예고되어진 말씀이다. 우리를 기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전에 누가 그를 배반할지를 아시고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다(6:70). 이 사실은 성서의 예언들의 진실성을 확증하여 준다. 또한 유대인들의 불신은 우리의 신앙을 강건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또한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인들에 대한 경고로써 주어진 말씀이었다. 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는 말씀이라고 하겠다(행 13:40).
(3) 하나님이 예고하신 것은 확실히 이루어진다. 따라서 본문에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이 믿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필연적인 결과로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말씀되고 있다. 하나님의 지식이 이러하시기 때문에 그의 예견하심에 있어서 속임을 당하실 수 없으며 그의 진실하심이 이러하시므로 그가 예언한 사실에 대하여 속임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긋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예언이 어떤 특정 인물의 이름을 지정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이러이러하게 말하였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사람은 능히 믿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본문은 유대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그들은 성서의 말씀대로(사 6:11, 12) 그들의 성이 주민이 없을 정도로 황폐해질 때까지 자기들의 불신을 고집하게 된다. 그렇지만 남은 자는 아직 보족을 받는다(그러므로 사 6:13 에 "그 중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으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보류는 그 중에 신앙을 이러한 지키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충분한 소망의 근거가 된다. 이로써 각자는 "나라고 남은 자의 무리에 속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라는 소망을 품게 해 주는 것이다. 끝으로 복음서 기자는 구약의 예언을 인용한 후 그 예언의 말씀들은 선지자가 살던 당대를 뛰어 넘어 메시야의 시대를 말하고자 하는데 그 주된 의도가 있는 것임을 제시한다(41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1] 우리는 예언서에서(사 6:8, 9) 본문에 인용된 같은 말씀이 이사야 당대에 적용되는 말씀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말씀이 장래 목적을 위해 그에 의하여 말씀된 멋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선지자로서 그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전해 듣지 않은 것을 전한 것이 없었다. 또한 보냄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가 전하지 않아도 될 내용을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것도 없었다(시 21:10 참조).
[2] 선지자가 그때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가졌던 환상은 본문에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뵈온 것이라고 말씀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사야가 주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권력과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 하시다. 그러므로 그도 아버지와 동등하게 찬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이 지어지기 이전에" 영광을 가지셨다. 그리고 이사야는 이 영광을 본 것이라고 하겠다.
[3] 그때에 선지자가 "주님에 대하여 말씀한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본문은 얼핏 보면 선지가가 선지자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처럼 보인다(역주:한글 개역 성경에는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하여 분명히 구분되지만 영문판에는 "spake of him"으로 되어 있어서 이사야가 자신을 가리켜 한 말이라고도 여겨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사야에게 사명과 교훈할 내용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본문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모든 선지자들이 주를 증거하였고 따라서 그들의 증거는 모두 주를 한 유형으로 예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오심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의 오심이 그들에게 치명적 요소가 되어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되리라고 말씀한다. 그의 교훈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반대가 있을 수 있다. 만일 그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유대인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을 리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변이 본문에 나타난다. 즉 그것은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었고 "저희의 마음이 자고하여지고 저들의 귀가 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구별된 남은 자들의 구원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사실이 말씀되고 있다.
관원들의 비겁함(요한복음 12:42, 43)
이 관원들은 그리스도에게 약간의 영예를 보여 드렸다. 왜냐하면 그들이 "저를 믿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확신하였고 그의 가르침을 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게 만족할 만큼 영예롭게 해드리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인정할 만한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실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고백한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를 상당히 신뢰하고는 있으면서도 실제로 고백하는 것은 꺼리고 있었다. 이들 당국자들에게서 그들의 확신과 타락한 마음 사이의 갈등이 어떠하였는가를 아래에서 고찰하여 보자.
Ⅰ. 말씀의 능력에 대하여 먼저 생각하여 보자. 그들 중에 빛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눈을 감으려 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니고데모처럼 "저를 믿었고 그를 하늘로부터 온 선생으로 생각하였다." "복음의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양심에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부끄러워 표현은 안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복음을 인정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이들 고위 당국자들은 그들의 믿음이 매우 약하여 연기나는 부지깽이 같을지라도 참된 신앙인들이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엘리야는 홀로 남았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내에 칠천의 신실한 예배자들을 예비해 놓고 계셨다. 또한 어떤 이들은 외모로 보기보다 실제로는 더 훌륭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사람의 결점은 쉽게 알려지나 뉘우치는 마음은 잘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인간의 선성은 작은 잘못 때문에 숨겨지기 쉽다. "하나님의 나라가 누구나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선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선도 누구에게나 보이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Ⅱ. 우리는 여기서 관원들이 이 세상의 세력에게 굴복하고 자기들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보게 된다. 관원들은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되었으나 동시에 자기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출교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리스도 앞에 나서서 감히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없었다. 다음의 사항들을 관찰해 보자.
1. 관원들의 결점과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들은 그리스도께 나아와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신앙의 참모습을 나타내 보이기를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 했던 관원들의 신앙을 신실한 신앙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입으로 시인"(롬 10:9)해야 하기 때문이다.
2. 관원들이 두려워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당으로부터 출교당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회당으로부터 출교당하는 것을 자신들의 치욕과 큰 손해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탄의 회당으로 변한 회당으로부터 출교당하는 화를 면하기는 했으나, 실상 그 회당은 이미 하나님께서 떠나 버리신 회당이었다.
3. 그러면 그들이 지녔던 두려움의 근본 원인을 생각해 보자. 관원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귀중히 여기고 그것을 계속하여 추구해 나갔다. 이것은 암암리에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로써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롬 1:25) 결과였다. 관원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을 차례로 저울에 올려 놓고 저울질하기를 계속했다.
(1) 사람의 영광을 저울에 올려놓은 그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고 바리새인들의 의견에 경의를 표함으로써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계산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사람들은 이 관원들을 유대교의 훌륭한 아들들이라고 칭찬했다. 따라서 관원들은 바리새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며, 자기의 인기를 높여서 윗자리에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리스도께 신앙 고백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나쁜 평판과 멸시를 당했다. 이러한 것은 남들의 존경만을 받아 오던 관원들로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관원들이 자기들 서로의 마음속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좀 더 용감해질 수 있었겠지만 그처럼 생각의 통일을 가질 수 없었던 그들은 각각 자기만의 생각 속에서 그리스도의 편에 나서는 것은 혼자가 되고 자기를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순간에 누구든지 이 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깨고 자기의 결심을 나타냈더라면, 그는 스스로 생각했었던 것 이상의 많은 증보자들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2) 관원들은 그 다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저울에 올려 놓았다. 그리스도께 신앙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과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것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만족해 하시면서 "잘 하였도다"라고 말씀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충분히 직감할 수 있었다.
(3) 그러나 관원들은 사람의 영광 쪽을 선택함으로써 저울의 중량은 결정되었다. 순간적인 재치가 신앙을 압도하게 되자, 그것은 곧 하나님 편을 떠나서 바리새인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의 사항을 주목하자.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과 경건을 해치는 가장 큰 요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주는 칭찬과 그 가치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소홀히 했다.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태도는 종교가 널리 전파되어 그 안에 속함으로써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될 때에 위선자를 만들어 내며 이것은 그래도 이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태도가 만들어 내는 좀 더 근본적인 종교에 속하는 것이 치욕거리가 되고, 그로 인하여 명성을 상실케 될 때에, 마치 본문의 구절에서와 같이 배교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롬 2:29 참조).
유대인과의 마지막 담화(요한복음 12:44-50)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영광을 받으려 하시지 않고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보내심 받은 자로서의 입장을 고수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담화는 43절까지의 내용과 같은 때에 말씀되어진 것이 아닌 것 같고(36절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셨음) 그 이후의 또 다른 때에 다시 군중들 앞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인 것 같다. 요한은 이 구절들이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에게 하신 고별 설교임과 동시에 공적인 가르치심의 최후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후에 기록된 모든 가르치심의 최후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후에 기록된 모든 가르치심들은 제자들과의 개인적인 만남에서 들려주신 말씀들이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하신 최후의 공적인 말씀 가운데 "외쳐 가라사대"란 말을 살펴보자("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냐" 잠 8:1). "지혜가 소리를 높이며"(잠 1:20)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외치는 것은 비슷한 말이다.
1. 이 말씀은 주님의 담대하심을 나타내 준다. 관원들은 주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그에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 만큼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으나, 예수님은 공중 앞에서 자신의 말하고자 하는 것을 크게 외치실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계셨다. 관원들은 부끄러워했으나 주님은 안색조차 변하시지 않으시고 부싯돌과도 같은 굳센 얼굴로 말씀하셨다(사 50:7).
2. 이 말씀은 또한 주님의 열정을 보여 준다. 정색을 하고, 나서서 얼마나 신중하게 말씀하셨던지 어리석은 군중들에게 너무나 끈질기고 성가시고 귀찮은 말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주님은 선한 열정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영혼까지도 그들에게 심어 주려고 노력하셨다.
3. 이 같은 주님의 담대하고 열정적인 말씀에 모든 군중은 주의를 집중했을 것이다. 이것이 공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을 아신 주님은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따를 자는 지금 나오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을 최종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이 담화의 결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세 가지 선언을 볼 수 있다.
Ⅰ. 믿는 자가 가지게 될 특권과 존엄성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거나 무엇을 소유할 때에 부끄러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과 같이 신앙을 고백하는 것도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관계 속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오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44,45절).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1) 눈에 보이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단순한 한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동등한 능력과 영광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2) 그의 신앙이 그리스도에게서 멈추어 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에게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나아가야 할 최종 목표이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인다. 믿는 자의 영혼은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는다.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 내어 맡김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철학이나 정치학으로서가 아니고 순수한 신성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나를 보는 자는(보는 것은 믿는 것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신앙은 영혼의 눈이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45절)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도 깊어진다. 왜냐하면,
[1] 하나님은 "그 본체의 형상"(히 1:3)아신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 속에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2]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보는 자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까지 나아간다.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과 영으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신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본래 모습을 나타내시고,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대리자이시며 그를 통하여 신성한 빛과 법, 그리고 사랑이 우리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 봄으로써(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은 그를 우리의 구주요 왕자요 주님으로 추앙하는 것을 의미) 동시에 우리의 주관자요, 통치자요, 보호자로서의 아버지를 그의 창조 질서 속에서 보게 된다. 하나님은 낙망한 인간의 대리자로서 일하시기를 즐겨하시기 때문이다.
2. 우리는 46절에서 평안과 기쁨을 만나게 된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함이로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1) "나는 세상의 빛으로 왔나니"란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성격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태양이 아침에 떠오르기 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이미 빛으로써 존재하고 계셨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물론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있었지만, 위에 있는 세계에서 빛으로 존재하시다가(3:19)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2)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없이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1]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빛이므로 더 이상 그들이 태어났던 어두움 속에 머물 필요가 없다. 이제까지 그들에게 진정한 위안도 기쁨도 희망도 없었으나, 이제 빛이 그들에게 비쳐졌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러한 조건은 계속되지 않는 것이다.
[2] 설사 이후에 그들에게 어떠한 고통이나 불안, 공포의 어두움이 다가올지라도 그 어두움이 그들을 엎어 씌우지 못하도록 모든 조치가 이미 취해진 것이다.
[3] 그들은 이제 영구적인 존재이며 언제나 인간을 따라 다니던 철저한 어두움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그 어두움은 희미한 불빛이나 가냘픈 희망같은 것이 전혀 없는 완전한 어두움이다.
Ⅱ.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당하게 될 위험에 대한 말씀은 불신앙에 계속 거하고 는 사람들을 깨우쳐 주는 훌륭한 경고의 말씀이다(47,48절).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라는 말씀에서 심판할 자가 "내가" 아니고 또 "지금"이 아니라(48절)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본연의 목적이 심판에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사람들이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나를 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을 심판할 이가 있으니"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불신앙의 파멸을 본다.
1. 심판받을 불신앙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이다. 즉 복음을 듣지 못하여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고, 복음을 듣고도, 또는 들을 수 있었는데도 이를 거절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들이 받은 빛에 의하여 심판을 받는 것이다(율법이 없이 죄지은 사람들은 율법 없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2. 그들의 불신앙의 원인을 이루고 있는 악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48절에서 그리스도를 "저버리고(헤 아세톤 에메)"라고 설명되어 있다. 즉 조소와 멸시로써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추종자가 되든지 원수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3.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그를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찬양할 만한 끈기와 인내심을 보여 주셨다.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라든가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신 말씀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반대자들에게 어떤 조급한 대책을 내기시지 않고 관용으로 기다리셨다. 즉, 그들로 벙어리가 되게 하시거나 죽이지 않으시고 또 엘리야처럼 이스라엘을 판단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도 나서지 않으셨다. 물론 주님은 그들을 판단하실 권위를 가지고 계셨지만 그 권위를 나타내시지 않으신 것은 세계의 구원이라는 또 다른 근본 과제를 먼저 수행하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가 오신 것은,
(1) 타락한 반대자들의 육신을 심판하기 이전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며,
(2) 온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여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더 많이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다. 그의 겸손하심으로 심판은 얼마 동안 연기되어진 것이다.
4.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심판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날에 있을 터인데 그때에 불신앙은 저주받을 죄에 해당할 것이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이미 그들이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자기가 자신을 심판하고 파괴함으로써 스스로 처벌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의 고발자로서 나설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대변자로서 나서 주지 않으면 진실로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언제 어디서 평가될 것인가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1)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심판은 그들의 허물에 대하여 인내를 가지고 참아 주지 않고, 은혜로 감싸주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이 없이도 일시적인 안식과 쾌락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다음에는 자비로움이 전혀 없는 심판만이 있을 것이다.
(2) 불신자들의 최후의 심판은 마지막 날까지 보류되고, 그날까지 주님은 모든 불사자들을 한 데 모으신 후 그들이 이제껏 퍼부었던 멸시와 조롱에 대하여 답해 주실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한 날을 정해 놓으셨으나 그날이 언제인가를 발표하는 일은 연기하시고 계시다(마 26:64).
(3) 그날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을 심판할 것이다("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그리스도의 말씀은 두 가지 면에서 불신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1] 그들이 저지른 죄의 명백한 증거가 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설교와 가르치심과 친절한 행동들이 그들에게 증거로써 제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속에 있는 법에 의하여 그들은 책망을 받을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 - 나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 이 모든 불신자들을 심판하여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할 것인데, 이같은 말씀은 한두 번 되어진 말씀이 아닌 것을 명심해야 한다.
Ⅲ.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그의 심판에 대한 가르치심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권위있게 선언하신다(49, 50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주목하자.
1.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에 전하라고 아버지께로부터 부여받은 위임에 대해서 주목하자(49절). "내가 단순히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자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가 7장16절에서 하신 말씀과 동일한 내용이다. 즉, 내 교훈은,
(1) "내 것이 아니다." 이는 "내가 스스로 말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자로서 오신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생각이나 마음의 평온함에서 얻어진 것을 가지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신 그리스도는 독단적으로 행동하거나 함부로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얻어진 결론만을 말했을 뿐이다. 그는 또한 스스로 원하여 중재자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2) 그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1]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시어 전권대사로서 세상에 보내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조화를 이루어 평화의 조약을 맺고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심는 일이었다.
[2]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르침을 그리스도께 주셔서 세상에 보내셨다. 이것은 일국의 대사가 상대국에 가서 반드시 그대로 전해야 하는 본국의 훈령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 보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그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첫 아담에게 명하셨으나 그는 불순종함으로 우리를 파멸로 이끌었고, 하나님께서 두 번째 아담에게 명하시니 그가 복종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이란 말은 같은 의미로 반복으로써, 이는 나의 하는 모든 말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때때로 자기 자신의 말을 했지만 그리스도는 언제나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말씀하셨다. 그는 설교와 이야기 등을 통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을 성령의 역사 속에서 지시받았고 또한 지금 전해야 할 것과 마지막 날 심판 때에 생겨질 일에 대한 것을 지시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위임되었고 그의 뜻을 지시받았기 때문이다.
2.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50절)라고 위임된 말씀의 중요성이다. 이 위임의 말씀 속에서 사람의 후손이 영원히 계속될 것과 또한 생명과 행복이 그들과 함께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알려 주심으로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감당케 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고(요일 5:11), 왕으로서의 사명을 담당하도록 다스릴 권세를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17:2).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은 영생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시고는 "내가……아노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고,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그의 사명을 수행했으며 그 결과로써 아름다운 결실을 수확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이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거절한 사람이 어떻게 멸망당하리라는 것도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께 불복종한 그들은 영생도 멸시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그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말한 그 말들이 그들 스스로를 정죄할 것이며 그들의 운명은 그들 자신이 결정한 셈이 되고 만다. 누가 이 운명을 거역할 수 있을 것인가!
3.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어진 위임과 가르침, 그리고 그것을 수행해 나감에 있어서 얼마나 열정적이고 철저했는가를 살펴 보는 것이다. 그는 서슴지 않고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분명하게 알고 계셨고 따라서 인간에게 전달되어야 할 모든 것을 찾아내어 전달하는데 전력을 다 하셨으며 인간에게 유익한 것을 남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는 진리를 그리고 오직 진리만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다음의 사항들을 주목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이 우리의 신앙에 큰 격려가 되는 말씀으로써 이해되어지게 되면 우리는 그의 모든 말씀에 우리의 영혼을 전적으로 맡기고 모험을 시도해 보게 될 것이다.
(2) 이 말씀은 또한 위대한 순종의 예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가 명령을 받은 대로 우리에게로 명령하시니 순종할 수밖에 없고, 또 그가 들으신 대로 우리에게 알려 주시니 우리는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행 4:20).
그리스도를 존경의 대상으로 만드는 요소는 무엇보다도 그가 아버지의 주신 말씀을 따라 그대로 말씀했다는 것이며,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그처럼 충실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는 요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 속에 반영되어 있는 그의 순수한 믿음과, 영혼으로부터의 철저한 복종에 대하여 마땅히 영광을 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