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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짓는다는 것
Preaching the Luminous Word:Biblical Sermons and Hamiletical Essays
엘렌 데이비스, 오스틴 매키버 데니스,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26
추천 서문
스탠리 하우어워스
엘렌 데이비스는 일상에서 숨죽이고 있던 낯선 감각을 되살리는 데 은사를 지닌 사람입니다. 이 책의 설교들에서 그런 엘렌의 은사가 유독 돋보입니다. 이 서문에서 제 글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있다면, 어떻게 이 설교들이 교회에 '설교'의 참 의미를 다시 일깨우는지를 제시하는 일일 것입니다. 설교의 중요성을 왜 회복해야 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어쨌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가면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일상적 전제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당연함이 문제입니다. 정작 우리는 "왜 우리가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 "기독교 전통에서 설교란 무엇인가?" 혹은 "이 전통에서 설교가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잘 던지지 않습니다. 이런 질문들이 사라지다 보니, 특히 현대에는 설교가 인생의 난관을 극복하는 데 유용한 통찰력을 지닌 인물의 강연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잘 통하는 '좋은 설교'란 유머와 감동을 곁들여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잊게 해 주는 설교로 여겨집니다.
엘렌 데이비스가 이곳에서 선보이는 설교의 실천 방식은 설교를 강의나 강연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입니다. 엘렌에게 설교는 단순한 '정보'나 '행복으로 가는 처세술'이 아닙니다. 엘렌의 설교는 본문 주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데, 이는 설교를 '그 자체로 독립된 어떤 것'으로 만들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입니다. 형식과 내용 어느 면으로 보나 엘렌의 설교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온 베드로의 위대한 설교를 닮았습니다. 알다시피 베드로의 설교는 이후 모든 기독교 설교의 전형입니다. 그의 설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곧 어떠한 이야기로 자기 삶이 규정되는 백성이라는 점이 명징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복잡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이야기는 거듭 반복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이라 부르는 것은 물론이고, 이야기들은 기억을 통해 살아 숨 쉬기 때문에 이야기는 거듭 반복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마다 모이는 광경은 우리가 기억 및 이야기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누구나 알 만한 삶에 관한 일반적 교훈들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주 교회에 나와 우리를 진정으로 우리 되게 하는 이야기들을 거듭해서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와 예수라 불리는 한 유대인의 이야기에 따라 삶이 규정되는 사람들입니다. 엘렌은 이런 본문들에서 직접 설교를 세공해 내고, 그 결과물을 통해 아픔과 고난, 하나님 영광의 이야기가 잉태한 언어들이 우리 삶의 동력임을 기억하게 합니다. 인간의 단어들words을 통해 알려지는 그 말씀The Word은 '어떤 존재가 모든 것을 시작했어야만 한다'는 논리에 근거하여 존재해야 하는 막연하고도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십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만의 언어로 스스로를 알리시는 분입니다. 설교라는 기독교적 말하기 장르는 그러한 하나님을 반영해서 드러내는 반사체에 불과합니다.
엘렌은 그녀의 저서 「경이로운 깊이: 구약을 설교하다』 Wondrous Depth: Preaching the Old Testament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에 수록된 여러 에세이는 오늘날 북미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스캔들을 다릅니다. 그것은 바로 피상적인 성경 읽기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뭐라 말할지 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데 그치고 맙니다. 다들 성경을 새롭게 읽으려면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는 확신에 빠져 있는데, 사정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이나 '자유주의적인' 그리스도인이나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두 집단이 공유하는 이런 태도가 그들 사이의 생산적 논쟁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논쟁의 열기가 남다르고 의견이 격하게 갈리더라도 교회가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끌고 가지 못합니다. 성경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혼란한 상황에 새로운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을지, 우리 삶의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조차 자극하지 못합니다.(Ellen F. Davis, Wondrous Depth: Preaching the Old Testament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5), p. xi.)
엘렌 데이비스는 성경 읽기에 대한 오늘날의 통념을 두고 이렇게 볼멘소리를 한 셈입니다. 그렇다고 그녀를 호전적인 논객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엘렌은 성경을 읽는 방식, 곧 읽기의 기예를 드러내는 데 진력을 쏟습니다. 교회가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던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읽기의 기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게 되면 설교도 '요점을 만들어 내려는 의욕에 매몰되고 맙니다. 엘렌은 다릅니다. 엘렌은 성경 본문에 우리 삶에 필요한 은혜들이 담겨 있다고 믿으며 설교합니다.
엘렌이 피상적 성경 읽기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 분노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분노마저도 엘렌이 하나님과 성경을 무척이나 사랑한 탓일 것입니다. 다수가 젖어 있는 읽기 방식에 일침을 가하는 것도 분명히 사랑의 몸짓이며 교회를 세우는 데 힘이 될 선물입니다. 이 책에 실린 설교들은 바로 그 선물이 언어로 구현된 것입니다. 설교 하나하나에는 우리가 더 나은 성경의 독자요 청자가 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담아내기를 바라는 희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엘렌 데이비스가 구약학자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물론 데이비스는 전문적 학식을 오롯이 교회를 섬기는 데 쓰고 있습니다. 혹자는 엘렌이 성경을 신앙 고백적 틀 안에서 읽는다며 마뜩잖게 여기기도 합니다. 엘렌이 본문을 둘러싼 학문적 쟁점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오해는 엘렌의 '방법'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엘렌은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읽도록 도우려 할 뿐입니다. 성경이 경이로운 주님으로 계시하는 하나님을 향해 눈을 열고, 그 경이로움을 맞이할 준비를 시키려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리처드 헤이스와 엘렌 데비이스가 편집한 「성경 읽기는 예술이다」(성서유니온)에 실린 저자의 글을 참조하라. Ed. Richard Hays and Ellen F. Davis, The Art of ReadingScripture, Grand Rapids: Eerdmans, 2003, pp.9-26, 163-180. 특히 '고백적 방식으로 성경 가르치기"(Teaching the Bible Confessionally in the Church)와 "비판적 전승 계승: 성경 내부의 해석을 찾아내기" (Critical Traditioning: Seeking an Inner Biblical Hermeneutic)라는 제목의 장들을 보라.)
역사적 연구는 당연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엘렌의 탁월함이 드러납니다. 다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증 받으려는 조급함 탓에 본문을 쉽사리 놓쳐 버리곤 하지만, 엘렌은 바로 이때 쉽사리 포착되지 않는 본문의 요소들을 들추어서 우리의 시선을 거기에 고정시킵니다. 예컨대 창세기 22장에 관한 그녀의 놀라운 설교를 보십시오. 엘렌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헌신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제시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를 아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학문적 경륜을 쏟아부어 독자들이 성경을 더 깊이 읽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단연코 백미는 엘렌이 학문적 솜씨로 세공해 낸 설교입니다. 이 설교에서 성경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엘렌의 역량이 빛을 발합니다. 그것이 이 책을 감사히 받아들여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성경을 읽는 데 신학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그런 주장에 동참해 온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만으로는 신학적 읽기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엘렌 데이비스는 이 설교들을 통해 성경을 신학적으로 읽는 모범을 제시하고, 한 발 더 나아가 내공과 품격을 두루 갖춘 현인의 모범적 읽기가 얼마나 큰 위력을 지녔는지를 증명합니다. 엘렌이 언어를 다듬고 구사하는 능력이 워낙 탁월한지라, 활자로 박혀 있던 성경의 언어들은 그녀의 설교를 타고 되살아나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말씀의 내용만 아니라 그 말씀이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도 주목시킴으로써 엘렌은 그 일을 해냅니다.
또한 데이비스는 성경 안의 누추하거나 비극적인 대목들을 다룰 때도 글과 말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습니다. 가령 예레미야를 다룬 설교를 보면 그녀는 "누구도 예레미야가 본 것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라는 문장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실제로 유다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고국이 파멸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도 예레미야가 본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습관 탓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점점 파국에 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파국을 전혀 감지조차 못하니, 관건은 어떻게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킬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놀랍게도 데이비스가 그 일을 해냅니다. 그녀는 "켄터키주의 산들을 폭발시키는 광경을 그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됩니다"라는 수사적 장치를 사용하여, 예레미야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엘렌이 반복이라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위대한 설교자들이 자주 활용하곤 하는 시적 장치였습니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목사를 떠올려 보십시오. 알다시피 설교는 시간의 숙성과 섬세함이 요구되는 예술, 곧 한 편의 짧은 시와 같습니다. 엘렌은 심혈을 기울여 성경의 텍스트들이 우리의 세상을 어떻게 비추는지를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서 엘렌은 세상이 스스로를 해석한다는 섣부른 가정에 휩쓸리지 않고, 이 세상은 성경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애써 전하고 싶었지만 전하지 못해 아쉬워한 내용이 있었는데, 엘렌 데이비스가 그것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같은 이력을 공유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엘렌과 저는 예일에서 대학원 공부를 했지만, 시기도 다르고 전공도 달랐습니다. 엘렌은 브레바드 차일즈Brevard Childs 밑에서 구약을, 저는 제임스 구스타프슨Jacms Gustafson 밑에서 기독교 윤리를 공부했습니다.
예일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곧 같은 지적 흐름을 공유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당시 예일에는 일종의 '공기처럼' 퍼져 있던 신학적 발전들이 있었고, 우리의 생각이 바로 그 지점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엘렌보다는 제가 한스 프라이Hans Frei와 조지 린드벡George Lindbeck에 더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물론 프라이는 엘렌의 박사 논문 심사 위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프라이와 린드벡이라면 엘렌의 연구 속에서 자기들이 주창한 주제들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아울러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의 첫 학기를 차일즈 교수님 문하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제게 커다란 행운이었다고 기쁘게 말하고 싶습니다.
엘렌이 제게 이 책의 서문을 써 달라고 한 이유는 제가 공공연히 밝혀 온 설교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저는 늘그막에 이르러서야 제가 설교를 가장 사랑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구약학자인 엘렌과 윤리신학자인 저는 설교야말로 신학에 생기를 불어넣는 데 가장 좋은 일이라는 신념에 공감했습니다.(나는 여러 설교집에서 설교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해 왔는데, 유독 이 책에서 집중해서 다루었다. 다음을 참조하라. Without Apology: Sermons for Christ's Church, New York: Seabury. 2013, pp. xi-xxxii.)
설교를 준비하고 실연하는 과정가운데 미처 알지 못했던 신학적 확신들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설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엘렌이 설교 덕분에 더 나은 구약학자가 되었다고 밝혔듯이 저도 설교 덕분에 더 나은 신학자, 더 나은 윤리학자가 되었음을 밝히고 싶습니다. 설교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설교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게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는 일이 모조리 거짓으로 끝나고 만다는 사실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엘렌 데이비스가 성 빅토르의 위그 Hugh of St, Victor가 지닌 관점에 주목한 점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위그는 석조 작업이라는 비유야말로 설교 준비와 선포 과정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보았습니다. 저 역시 벽돌공으로 자랐기에 위그의 비유에 매료되었습니다. 데이비스가 잘 짚어 주었듯이 신학적 의미에서 한 단계 높은 수준이 가능해지려면, 잘 눈에 띄지 않아도 단단한 초석 위에 서야만 합니다. 일단 초석이 깔리면 좀 더 고난도의 일에 착수해야 합니다. 석공은 이미 자리 잡은 다른 돌들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적절한 크기와 색깔의 돌들을 찾아내서 제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데이비스는 이와 비슷하게 설교도 본문이 요구하는 상호 연결성에 의존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상호 연결성이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위대한 이야기와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 사이에 있는 연관성을 말합니다.(Davis, Wondrous Depth, p. 71.)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돌담을 쌓는 데 서툴렀습니다. 그러나 제 아버지는 돌쌓기에 관해서는 가히 장인이었습니다. 벽돌 쌓기와 돌쌓기는 전혀 다른 기술입니다. 벽돌은 규격이 균일해서 각 벽돌의 모양새를 일일이 견주지 않아도 수월하게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을 맞추려면(벽돌 쌓는 이들도 '돌 맞추기'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미 놓인 다른 돌들과의 관계를 보아야 합니다. 폭넓은 시야를 놓치면 담장 끝자리에 작은 돌들만 잔뜩 끼워 넣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저는 너무 서두르다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곤 했습니다. 각 돌이 지닌 고유한 아름다움을 유심히 살피면서도 이웃하는 돌들과 어우러지며 발현할 아름다움을 조망하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가만히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돌을 맞춘다는 것은 바로 그 인내심을 먹고 자란 상상력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저는 비록 노련한 석공은 아니었지만 더 나은 설교자가 되었기를 소망해 봅니다. 분명한 것은 데이비스의 설교는 돌쌓기의 명장이 빚어낸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설교자로서 데이비스의 작업 방식을 조명하는 데 '돌쌓기'라는 비유가 왜 그토록 탁월한 통찰을 제공하는지 이제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보고자 합니다. 석공들이 돌 놓는 법을 알고자 할 때 이미 가진 설계도를 굳이 펼치지 않듯이, 데이비스는 본문이 요구하는 작업이 설교를 설교답게 하는 이론에 선행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데이비스 설교의 실천 방식은 놀랍게도 어떤 이론에도 속박당하지 않습니다. 데이비스는 특정 이론으로 추동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신학자들이 자기 본문 해석에 동의하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데이비스의 관심은 본문 안에서, 본문을 통해, 우리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본문을 읽어 내는 것입니다. 데이비스는 분명히 폭넓은 방식을 동원해 성경 본문을 읽어 왔고 그런 전문적인 읽기 방식이 설교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만, 그녀의 읽기 방식을 규정하는 것은 인내심을 갖고 긴 호흡으로 성경 본문을 찬찬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엘렌 데이비스는 자기의 '방법'을 상상력의 실천이라고 매우 통찰력 있게 묘사합니다. 상상력이 환상과 관련된다고 보는 통념과는 달리, 데이비스는 상상력이야말로 그 어떤 방식으로도 얻을 수 없는 정교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데이비스에게 상상력은 무엇보다도 단어들, 특히 성경의 단어들을 찬찬히 주시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힘입니다. 주시함이야말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본문의 의미를 새롭게 읽어 내게 합니다.(이에 관한 설명은 Davis, Wondrous Depth의 "imaginative precision" (pp. 68-72)을 보라.) 따라서 데이비스의 설교가 지닌 시적 성격은 모든 시인이 다루는 궁극적 주제, 곧 단어 자체에 대한 탐구를 반영합니다.
데이비스에게는 설교학 이론이 굳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본문 자체와 주해적 통찰로 빚어진 상상력입니다. 그녀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숙련된 상상력에서 나온 정교한 이해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 본문은 종종 직설적이고 불친절한 본색을 드러냅니다. 성경 본문들은 우리가 지닌 "하나님에 관한 통념이나 세상 속에서 그분이 마련하신 우리의 자리에 관한 통념을 거침없이 들이받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약 전체가 일관된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에게 말씀하고 있으며,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친밀하면서도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관계로 이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렇듯 데이비스가 강조하는 상상력으로부터 뿌리 내린 정교한 이해는 설교의 근간을 이루는 신념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애써 하나님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보호하려는 '신'은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현실을 부인하는 바람에 생겨나는 감상적 자기 확신의 투사에 불과합니다. 데이비스의 관점에서 보면, 진실한 성경 읽기를 교란하여 처참한 설교를 낳게 하는 주적은 감상주의 sentimentality(글쓴이는 실재를 정직하게 마주하지 않으려는 습성을 묘사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편집자)입니다. 차라리 무신론이 감상주의보다 덜 해롭습니다. 적어도 무신론자는 하나님을 부정해야 하는 중대한 존재로 여긴다는 점에서 일말의 정직함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감상주의로 가공한 신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절규한 아들을 가지신 하나님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앞서 저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이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행태라는 데이비스의 통찰을 인용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피상적 읽기가 만연한 이유는 복음이 우리에게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그릇된 전제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현실을 부정한 나머지 성경 읽기의 방식을 왜곡하는 우를 범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위험천만한 곳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 세상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그리고 설교 행위는 이 세상을 견뎌 낼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책에 실린 여러 편의 설교가 보여 주듯 엘렌 데이비스는 남수단 교회를 섬기는 데 헌신하고 있습니다. 남수단을 여러 차례 방문한 그녀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어떤 형태를 띠든, 그것을 견뎌 내기 위해 진리가 절실해지는 순간, 설교는 새로운 차원의 긴박함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 데이비스는 목회자 훈련 과정에 있는 남수단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고 싶은 과목 중에 히브리어가 있음을 알고 무척 기뻐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된 씨름 속에서 자기들의 모습을 보았기에 히브리어를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데이비스는 설교에서 주해에 우선순위를 두고, 예화 사용을 비판하며, 설교가 선포되는 구체적 시공간을 세심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데이비스가 강조한 이 행위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길들은 교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삶의 덧없음을 자각하는 일임을 망각해 버린 교회는 '다 괜찮다'는 식의 세속적 전제를 강화하는 설교를 반복하고 양산합니다. 이 거짓 전제 위에서 움직이는 교회는 지금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설교들이 중요합니다. 이 설교들은 우리가 이스라엘의 주님을 향한 예배를 지속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도움을 빌려야 할 그 미래를 위한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줍니다. 주님이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왕께서 가차 없는 정직함으로 단련된 설교를 통해 세상과 마주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런 설교는 예화나 감상주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화가 오히려 본문을 가리는 경우가 많다는 데이비스의 통찰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느 설교자가 "최근에 열두 살 된 제 아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여러분은 더 이상 그런 설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런 설교는 설교자에게도 가정이 있고,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회중에게 암시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화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듣고 싶어 하는 그 감상주의를 설교자가 뒷받침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설교의 최종 결론을 두고 종종 회자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설교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반드시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로 결론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보편적 '진리'를 생생하게 예증한다는 구실로 가족, 혹은 낯선 이를 위해 희생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더해집니다. 하지만 그런 설교를 듣고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 것은 예화뿐입니다. 그런 설교의 문제점은 데이비스가 지적한 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토록 진부한 진리와 예화는 예수님이 부활하든 말든 상관없이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이비스가 강조한 점을 기억한다면 감상주의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설교란 본문과의 지속적인 대화에 참여하는 일이며, 그것은 수 세기에 걸쳐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본문을 읽어 온 해석 전통에 참여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데이비스가 밝히듯 그녀의 설교 스타일은 존 던 John Donne과 같은 옛 설교자들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존 던 덕분에 데이비스는 설교에 설득력을 위해 예화가 필수라는 통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데이비스는 주제 설교도 달갑지 않아 했는데, 그 이유는 그런 형태의 설교가 기존 견해를 정당화하고 반복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설교 본연의 목적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는 설교가 신앙 공동체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도전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일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Ellen F. Davis, Imagination Shaped: Old Testament Preaching in the Anglican Tradition (Valley Forge, P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5), p. 256.)
"중요한 것은 언어입니다." 엘렌 데이비스의 설교관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장은 바로 이 짧은 문장일 것입니다. 언어에는 그 언어의 고유한 내력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설교자는 우리가 전해 받은 말을 "현대적 합리주의에 기반한 일의적 언어"로 번역하려는 유혹을 거부해야 합니다. 이러한 번역에 대한 요구 탓에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결과를 초래하며, 데이비스는 이것이야말로 현대 설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진단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요구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안주하는 교회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이런 교회의 주된 기능은 '지금 이 세상의 모습이 원래 그래야만 하는 모습'이라며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하는 데 있습니다.
데이비스는 설교단에 선 이들이 세상의 기존 질서에 맞서고 그 질서의 재생산을 막는 설교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는데, 그것은 설교자가 자기를 "언어의 기초를 가르치는 교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청중의 상상력을 훈련시켜 성경이 열어 보이는 세계로 들어갈 언어적 능력을 갖추게 하고, 그리하여 그들이 진정으로 그 세계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Davis, Imagination Shaped, p. 250.)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을 다룬 설교 "피조물 됨은 먹는다는 것입니다"에서 데이비스는 피조물로 산다는 것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의미라는 간단명료한 관찰에서 출발합니다. 이 간명한 사실이 하나님과 우리를 구분하는 본질적 차이인데, 알다시피 하나님은 먹을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데이비스는 1999년 4월 7일 부활절 설교에서도 이를 지적한다(뒤의 471-478쪽을 보라). 내가 이 지점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주변을 둘러싼 여타 신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떠한 신체적 욕구도 없으셨다는 주장이 분명 흥미로우면서도 근본적인 신학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구분하는 흥미로운 방식입니다. 보통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두고 '존재와 본질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하나다'라는 형이상학적 진술을 동원합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먹을 필요가 없으신 분이라는 데이비스의 통찰 또한 형이상학적 결을 지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면목을 탁월하게 포착합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피조물의 위치를 깊이 자각하게 만듭니다.
데이비스는 오랜 세월 창세기를 읽어 왔지만 음식에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환경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면서 비로소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지를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음식은 창세기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데이비스가 음식이 중요하다고 보는 까닭은, 성경에서 먹는 행위와 농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이 주제가 분명히 등장함에도 우리는 이 관계를 무심코 지나칩니다. 하나님과 음식 사이에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그 분의 백성인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대한 차이를 만든다는 점에 무지하다니 말입니다. 우리의 첫 선조가 하나님을 거역할 때 음식이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그 오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데이비스는 이러한 창세기 1장의 해석이 오늘날 강단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해석이 아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해석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비추어 우리의 문화적 상황을 읽어 내는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문화적 상황에 비추어 성경을 읽어 내는 태도와는 정반대입니다. 성경의 빛 안에서 우리의 상황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어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실재적인 희망이 무엇인지를 보게 한
다는 뜻입니다. 데이비스의 창세기 해석은 환경 파괴에 대한 그녀의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그녀 자신도 그렇게 인정합니다), 애초에 성경이 데이비스를 이 문제로 인도했으며, 그 결과로 생겨난 확신에 힘입어 데이비스는 환경 위기가 어떻게 창세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읽도록 돕는지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린드벡이 말한 "텍스트 내재적 intratextual 신학"의 모범을 보고 싶다면, 즉 성경 본문이 세상에 흡수당하는 게 아니라 성경이 세상을 '흡수하는' 실례가 필요하다면, 창세기를 통해 우리 삶을 읽어 내는 데이비스의 방식은 훌륭한 모범이 됩니다.
물론 '흡수한다'는 표현은 데이비스의 '방법'을 설명하기에는 과도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데이비스는 '세상'이 성경의 세계 안에 완전히 흡수되기를 거부할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런데도 데이비스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 죽음, 부활의 이야기를 탁월한 솜씨로 들려주어서 파괴적인 삶의 방식에 우리를 복종시키는, 알아채기 어려운 교묘한 내러티브들을 폭로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설교는 놀라우리만치 예
언적인 성격을 지닙니다.(린드백의 '텍스트 내재적 신학'에 관한 설명은 그의 다음 저서를 참고하라. The Nature of Doctrine: Religion and Theology in a Postliberal Age, 25th anniversary 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9), pp. 104-108. 「교리의 본성」(도서출판100).)
데이비스 설교에 깃든 예언자의 면모는 하나님의 절대적 위엄과 영광에 근거합니다. 데이비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거룩하심은 창조 세계 속에서 빛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은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사변이나 개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을 비춰주는 그분의 속성입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이 하나님은 데이비스의 설교에서 항상 주연이시기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 당신이 지으신 사람들 가운데, 율법을 주신 사람들 곁에 늘 현존하십니다. 데이비스의 본문 중심 설교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이 가깝고도 멀다는 심오한 통찰이 담깁니다. 마치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하게 한 숯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숯이 바로 성경임이 드러납니다.
데이비스가 이 설교집을 통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구약을 설교하는 방법', 더 정확히 말하면 '구약과 함께 설교하는 방법'의 본을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데이비스가 개탄하듯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풍조는 구약 본문 설교가 드물다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설령 설교 본문이 구약이라 하더라도 설교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걸핏하면 설교자들이 구약의 하나님이 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과 다른가에 대해 자꾸만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 의지하며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백성이라는 인식을 잃어버립니다. 이스라엘 및 유대인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지혜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자기 통제를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통제권을 내려놓은 채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하는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영광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의 소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데이비스의 1992년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식 고별 설교(99-108쪽)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설교에서 데이비스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던 모세의 간구를 다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 속에 드러난다는 사실을 굳게 신뢰하는데, 모세의 이 확신을 데이비스는 정확하게 짚어 냅니다.
데이비스의 구약 설교의 진가가 빛나는 곳은 그녀의 시편 설교입니다. 데이비스가 볼 때 시편의 시들은 그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성경의 거대한 이야기로 연결해 주는 독보적인 잠재력을 응축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시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예수님의 기도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시편을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데이비스는 걸핏하면 구약을 기독론에 욱여넣는 해석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편에 귀를 기울이면, 시편이 요구하고 예수님이 삶으로 증명하신 그 겸손함으로 우리의 삶을 읽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앞서 저는 엘렌 데이비스가 설교를 통해 우리 삶을 구원의 드라마 안에 위치시키는 데 탁월한 설교자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을 데이비스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까닭은 설교가 처한 다양한 때와 상황을 세심하게 파악하는 감수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조셉 타반 라수바Joseph Tabun Lasubu를 위한 짧지만 강렬한 추도설교를 보십시오. 그의 죽음이 남긴 비통함이 짙은 안개처럼 깔린 곳에서 데이비스는 시편 116편을 빌어 그의 삶과 죽음을 담담히 서술하면서, 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차분하게 드러내면서도 결코 애상에 취하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은 이 세계 안에서 더는 육체적으로 함께할 수 없음을 뜻하지만, 그는 죽음을 거쳐 하나님 곁으로 더 가까이 나아갔기에 우리는 그와 더 깊은 친밀함을 나누게 되었다고 데이비스는 설득력 있게 주장합니다.
조셉 타반 라바를 위한 설교에는, 설교자들이 특히 장례식에서만큼은 거의 피할 수 없다고 여기는 감상주의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저는 데이비스가 시편에 강하게 이끌리는 이유 중 하나가 시편에는 감상주의의 흔적조차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짐작합니다. 데이비스의 해석에 따르면, 시편은 하나님을 간절히 알고 싶어한 사람들이 쓴 기도이자,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쓰인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 열정도 만일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신비를 부정한다면 결코 진실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데이비스의 시편 설교를 통해 우리는 시편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자기에게 삶의 고통을 감추지 않았던 믿음의 선조들과 하나가 됩니다. 그녀의 언급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은 감상주의나 자기기만 없이 담대히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 성경 본문에 대한 데이비스의 주시를 강조했습니다만, 미처 언급하지 않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데이비스가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성경 이야기가 어떻게 전해지는가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교회력은 본문이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전례의 시간에 주목할 때 우리는 하나의 본문이 다른 본문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더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데이비스는 그날 주어진 본문에 집중하면서도 이 본문이 '더 큰 성경 이야기' 안에 속해 있음을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큰 이야기는 성경 전체에 흩어져 있는 작은 이야기 조각들로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에 담긴 설교들은 탐독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그날의 본문과 성경 전체의 이야기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풀어내는 데이비스의 섬세한 신학적 작업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 설교들은 저를 비롯한 다른 누구의 소개도 실상 필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도 엘렌 데이비스가 이 서문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니 제게는 큰 영광입니다. 저는 이 기회를 통해 왜 데이비스가 그렇게 강력한 설교자인지를 밝힐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아마도 데이비스 자신이 서문에서 고백한 것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성경이 진정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을 인간의 언어에 담아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우리가 '그것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임을 거듭해서 저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레 18:5). 하나님 그분이 이렇게까지 알려지기를 원하시다니 참으로 기이합니다. 엘렌 데이비스는 그 기이함'을 다시 발견하도록 도와주었으니 우리 모두 큰 빚을 진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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