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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이현필
청산 정대용 추천 1 조회 30 11.08.26 19:4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2009년 8월 중순 전북 남원 대산 운교리 동광원 수양회에서 발표한 말씀입니다. 동광원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이현필, 그 말씀과 영성 회복

-환갑을 맞은 귀일원과 동광원이 할 일에 대하여-

 

이덕주

 

 

1. 들어가는 말: ‘환갑’의 신학적 의미

귀일원(歸一園)과 동광원(東光園)이 ‘창설 60주년’을 맞았습니다. ‘60주년’이 서양에서는 ‘sixtieth anniversary’라 하여 60번째 되는 생일이란 수학적 의미 외엔 없겠지만 동양에서는 단순한 ‘육십세’가 아니라 ‘환갑’(還甲), 혹은 ‘회갑(回甲)이라 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환갑 혹은 회갑이란 “甲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한자에서 甲은 첫째, 시작, 처음을 의미합니다. 본래 甲이란 한자어는 본디 고대 중국에서 점을 칠 때 사용하던 거북의 등껍질이 갈라진 모습을 보고 그린 상형(象形) 문자입니다. 고대인들은 거북이 등껍질에 나타난 모양을 보고 하늘의 계시를 읽었습니다. 등껍질이 갈라진 모양을 보고 甲, 乙, 丙, 丁 등으로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런 식으로 열 가지 하늘의 운행 원리를 정리하여 그것을 천간(天干) 혹은 십간(十干)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에 지지(地支) 혹은 십이지(十二支)로 불리는 땅의 원리, 즉 짐승을 형상화하여 子(쥐), 丑(소), 寅(호랑이), 卯(토끼) 등으로 시작되는 열두 가지 요소를 만들었습니다. 이 10개 천간과 12개 지지가 조합을 이루어 甲子, 乙丑, 丙寅, 丁卯 등으로 시작되는 육십 간지(干支)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 육십 간지는 하늘의 기운을 받아 땅을 사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환갑’ 혹은 ‘회갑’이라는 말은 그것이 시간이든 공간이든 한 바퀴 돌고 처음 출발했던 ‘제자리’에 다시 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석 선생님이나 이현필 선생님께서 말씀 풀이하실 때 즐겨 쓰셨던 파자(破字) 놀이로 ‘甲’ 자를 한 번 풀어보았습니다. 옥편을 찾아보면 갑은 ‘밭’ 전(田) 부에 들어있습니다. 甲은 田을 약간 변형시킨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밭’은 ‘바탕’을 의미합니다. 살아가는데 기본이고 근본이 되는 터전 말입니다. 먹고 사는데 꼭 필요한 곡식을 내는 밭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밭은 생명과 생산과 추수와 소멸의 현장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자라고 일하다 죽어서 묻히는 일생의 바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환갑은 삶의 바탕으로 돌아갊을 의미합니다. 甲을 달리 풀어보면, 해를 뜻하는 ‘날’ 日(일)에 ‘위 아래로 통할’ ?(곤)이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해는 하늘입니다. 절대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甲은 하늘에 계신 그분과 통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또한 甲을 ‘가로’ 曰(왈)에 ‘위 아래로 통할’?(곤)을 합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曰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甲은 ‘하늘에서 내려온 말씀’, ‘말씀과 통하여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甲을 ‘입’ 口(구)에 ‘열’ 十(십)을 합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口는 몸을, 十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甲은 십자가를 몸에 지고, 혹은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十은 ‘하나’(一)와 ‘위 아래로 통할’ 곤(?)이 합쳐진 것입니다. 하나任과 우리를 연결시키신 분,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 몸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풀이하든 甲은 하늘에서 내려온 말씀(만나)을 양식 삼아 하늘과 통하여 사는 은총의 삶, 그 삶의 본바탕을 의미합니다. 환갑은 그런 본바탕으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30년 전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활동하다가 지금은 영국 셰필드대학의 동아시아학과 교수로 있는 인류학자 그레이슨(James H. Grayson) 박사가 ‘환갑’을 영어로 ‘Returning to the First Heavenly Stem’이라고 재미있게 번역하였습니다. 직역하면, “하늘의 첫 번째 근간(根幹)으로 돌아감”이라 하겠습니다. 60년 전, 이 땅에 처음 태어날 때 이루어진 하늘의 위대한 계획, 그 본질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집 나갔던 탕자가 세상 곳곳을 방황하다가 결국은 자기가 태어난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그 품에 안기듯, 십자가에서 내리우신 예수님이 그를 처음 잉태했던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기듯, 60년 만에 자기 생명과 삶의 근본으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귀일원이 그런 환갑을 맞게 됩니다. 귀일원이 세상에 생겨나 오늘까지 생명을 유지하게 된 그 ‘甲’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갑을 맞는다는 것은 그 본바탕으로, 본질로 돌아가라는 하늘의 축복이자 명령입니다. 본디를 잃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모든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任’, 그분의 말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 예수, 바로 우리의 본질이요 본바탕입니다. 그것을 잃지 말고,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60년 전, 선생님이 왜 귀일원(歸一園)이라 하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

 

2. 동광원과 귀일원의 뿌리와 전통

1930년대 서울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신 정경옥(鄭景玉, 1903-1945)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진도 출신으로 서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삼일운동 때 시위에 참여하고 제적당한 후 고향에 내려와 ‘보향단’(補鄕團)이란 비밀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목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신 분입니다. 목포 감옥에서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고향에 교회(진도중앙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서울 협성신학교(후의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 유학, 3년 만에 두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따고 돌아와 1931년부터 모교 교수로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를 ‘혜성과 같은 신학자’로 묘사하였습니다. 천재적인 기억력에 현란한 말솜씨로 방대한 기독교 고전과 세계의 첨단 신학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풀어내는 그의 강의실엔 항상 학생들로 넘쳐났습니다. 글도 잘 써서 신문과 잡지사에서 원고 청탁도 많이 왔고 귀국하자마자 쓴 《기독교의 원리》는 70년 넘게 읽히고 있으며 1939년 출판한 조직신학 개론서 《기독교신학개론》은 지금까지도 신학교 교재로 사용될 정도입니다. 교회와 기독교 단체로부터 설교와 강연 요청도 자주 받아 요즘 말로 ‘뜬’ 강사, 인기와 촉망을 한 몸에 받은 교수였습니다.

 

2.1 신학교 교수의 낙향 이유

그런데 이처럼 ‘잘 나가던’ 교수가 1937년 봄, 개강을 앞두고 갑자기 교수직을 버리고 고향 진도로 내려갔습니다. 거기 교회나 학교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의 갑작스런 교수직 사임에 주변에서 여러 가지 설이 난무했지만 어느 것도 확실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전영택 목사님이 발행하던 <새사람>이란 잡지 1937년 7월호에 실린 정경옥 교수의 “위기 ? 흙 ? 나”란 글을 통해 비로소 낙향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지 5, 6년 동안에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봄이 되면 봄과정을, 가을이 되면 가을과정을, 그리고 겨울이 되면 겨울과정을 해마다 같은 노트에 같은 방법으로 기계를 틀어놓은 것 같은 강의를 반복하는 동안에 해마다 말은 자라나 생명은 죽어서 스스로 독서도 하지 않고 연구도 끊이고 생활에 반성이 없으며 창작력이 진하였다. 날마다 사는 것이 외부에 있어서 광대(廣大)하고 내면에 있어서 외축(畏縮)하는 생활이었다. 나의 영은 나날이 황폐의 여정을 밟고 있었다. 기도를 하여도 마음속에 솟아 나오는 기도가 아니었고 노래를 불러도 혼이 들어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이것이 끊임없이 괴로웠다. 누가 무어라고 말하는 이는 없으나 나로서는 쓴 잔을 마시는 것 같이 괴로웠다. 내 몸이 세상에 알려지고 칭찬하는 소리를 들을 때 마다 나는 더욱 괴로웠던 것이다.”

 

창작력이 쇠한 기계처럼 반복되는 강의와 설교도 그러했지만 그를 괴롭게 만든 것은 “기도를 하여도 마음속에서 솟아나오는 기도가 아니었고, 찬송을 불러도 혼이 들어있는 찬송이 아닌” ‘영적’ 위기였습니다. 위기의 원인은 정치적인 것도, 경제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이고,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황폐의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황폐의 극한에 있어서 자아반성의 새로운 길을 찾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아직도 나의 교만이 있고 나의 명성이 있는 동안은 내가 나를 반성할 기회를 주지 못한다. 현재의 나 전체를 매장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좀처럼 나를 버리지 못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경험한 성도의 체험을 가지고 싶었으나 현재의 내가 죽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생명 전체에 대하여 총결산을 감행하기 전에는 새로운 생명을 가질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생명의 총 결산’을 감행 한 것이 교수직 사퇴와 낙향이었습니다. 그는 ‘밀려서’ 떠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고’ 떠났습니다. 나를 찾기 위해 나를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감동과 감격이 사라진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서의 신학,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지식의 허울들을 떨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려는 각오로 자기를 낳아 준 고향을 찾은 것입니다. 낙향 이후 그의 생활은 단순했습니다.

 

“내가 이 마을을 찾아 온 후로 나의 생활은 극히 단순하다.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을 가질 수 있는 흙의 사람이 된 것만으로도 기쁘다. 노동하는 것이 세끼 밥 먹는 것, 밤이면 잠자는 것, 이런 것 밖에는 아무런 원망도 공명심도 없이 운명을 달게 받고 그 날 그 날을 즐기는 단순한 생활이 그 얼마나 거룩한가. 자동차를 타고 먼지를 피우며 거리를 달리는 것보다 꽃 피고 새 노래하는 들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뚜벅 뚜벅 걸어보는 것이 얼마나 깨끗하고 엄숙한가. 어제도 종일토록 바닷가에서 조개를 주었다. 어린애와 같이 단순한 마음으로 노래도 부르고 뛰기도 하였다.”

 

고향 진도에서는 강의할 교실도, 설교할 강단도 없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농사일이나 뱃일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세 끼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아이들과 바닷가에 나가 조개 줍는 것, 자연에 어울려 사는 ‘단순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단순함에서 얻는 엄숙한 진리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그 진리탐구의 우물이고 밭이었습니다.

 

2.2 정경옥과 이세종의 만남

정경옥 교수가 낙향해서 단순한 생활을 하며 성경을 읽고 있을 그 무렵, “화순 땅에 성자가 있다.”는 소문이 그의 귀에 들렸습니다.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개천산 밑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이세종(1880-1942)이었습니다. 득도한 후 이름을 이공(李空)으로 바꾼 이세종은 고아로 자라나 억척같이 일해 마을 큰 부자가 되었으나 나이 사십에 성경을 구해 읽고 혼자 독수도(獨修道)하면서 말씀을 깨우쳤고 말씀대로 실천하였습니다. 득도한 후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반은 교회에 바치고 반은 동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아내를 누이로 여겨 성생활을 중단하고 정결을 지켰으며, 하루 한 끼만 먹되 육식은 금하였고, 생명을 소중히 여겨 짐승이나 곤충은 물론 살아있는 풀까지도 함부로 꺾지 아니하였고, 걸인이나 나그네를 천사처럼 대접하였고, 한 벌 옷에 구멍 뚫어진 모자를 쓰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해도 그것을 오히려 감사하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기인’, ‘도사’, ‘광인’, ‘성자’ 등등 칭호가 붙었고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예수를 믿으려면 이공처럼 믿어야지.” 할 정도로 그의 철저한 ‘말씀 생활’은 모든 이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지만 묵상과 기도로 깨달은 성경 풀이가 독특하고 깊이가 있어 말씀을 배우러 찾아오는 제자들이 생겨났고 광주의 최흥종 ? 강순명 ? 백영흠 목사 등도 자주 찾아와 성경을 논했습니다.

 

정경옥 교수는 이런 소문의 주인공을 등광리로 찾아가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그 이야기를 “숨은 성자를 찾아서”란 제목으로 정리하여 <새사람>(1937.7)에 기고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최첨단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정경옥 교수의 눈에 비친 이공의 모습입니다.

 

“그[이세종]는 果然 자기를 이긴 사람이오 참된 사랑의 使徒이다. 그에게는 깐디의 政策도 없고, 싼다싱의 理論도 없고, 內村氏의 智識도 없다. 그러나 나는 깐디보다도 싼다싱보다도 內村氏보다도 李公의 인물을 崇敬하여 마지아니한다. 나는 이러한 偉人들보다 그를 이 세상에 자랑하고 싶다. 물론 그는 說敎家도 아니오 神學者도 아니오 經理家도 아니오 事業家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의 假裝 없는 인물을 尊敬한다. 公은 몸 갈피가 호리호리하고 키는 다섯 자도 되지 못한다. 그의 목소래는 옆 사람이 겨우 알어 들을 수 있으리만치 적고 부드럽다. 나는 이 素朴하고 醇厚한 聖者를 대할 때는 마음에 넘치는 感激을 禁할 수 없었다.”

 

낙향 이후 ‘단순한 삶’에서 성경을 읽어가며 진리를 깨달아 가고 있던 정경옥은 한 벌 옷에, 구멍 뚫린 모자를 쓰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공에게서 ‘소박하고 순후한 성자’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과연 이공님은 ‘성경의 사람’이었습니다.

 

“公은 聖經을 거진 외이다 싶이 잘 알었다. 무슨 말을 하든지 聖經 말씀을 引用하였다. 그의 聖經 解釋에는 너무나 象徵的인 것도 없지 아니하고 細密한 字句에 억매여 大義에 어그러진 것도 있는 것 같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에게도 指導를 받지 아니하고 單獨으로 받은 靈感이 非凡한 것을 否認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聖經을 學問으로 배우려고 하지 아니하고 神學을 理論으로 꾸미려고 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를 尊敬하는 것이다. 그가 받은 靈感을 누가 부인하랴. 그의 嚴肅한 信仰을 누가 拒逆하랴. 公의 얼골은 창백하나 눈에는 밝은 빛이 비최이고 그의 外樣은 憔悴하나 靈은 산 기운이 있다.”

 

이로써 천태산 골짜기에 숨어 수도생활을 하던 이공을 처음 세상에 알린 이도 정경옥 교수고, 그에게 ‘성자’ 칭호를 붙인 것도 정경옥 교수가 처음입니다. 그의 철저한 극기수도생활과 말씀풀이를 이해하지 못한 주변 사람들이 ‘산중파’(山中派)라 부르며 ‘이단시’하던 이공을 ‘조선의 성자’로 소개한 정경옥 교수도 그 무렵 그의 진보적 신학을 이해하지 못한 보수파에서 자유주의 ‘신신학자’(新神學者)로 이단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단’이 ‘이단’을 알아본 것일까요? ‘진리’가 ‘진리’를 알아본 것일까요? 이단과 진리의 판단 기준은 그 교리와 가르침에 있지 않고 그걸 고백하는 사람의 삶과 생활에 있으니 이공이나 정경옥 교수의 이후 삶을 보아 이들이 이단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식으로 교수직을 버리고 낙향한 정경옥은 단순한 흙의 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읽고, 이공을 만나 교제하면서 고갈되었던 ‘영적 우물’에 샘이 다시 솟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감동과 감격이 회복되었습니다. 찬송을 하면 눈물이 났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낙향 1년 만인 1938년 봄, 평양의 감리교계통 광성고등보통학교에서 학생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가 평양에 올라가 학생들에게 설교한 내용을 묶어 《그는 이렇게 살았다》는 책이 나왔는데 여기서 ‘그’는 물론 예수입니다. 그는 한 주간 동안 학생들에게 설교한 것은 그저 ‘예수 이야기’였습니다. 말구유에 태어나실 때부터 부활 승천하시기까지 예수 이야기를 시간시간 전하면서 설교 마지막엔 “그는 이렇게 살았다. 나도 그렇게 살리라.” 외쳤습니다.

 

그런데 정경옥 교수는 ‘예수전’(傳)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쓰면서 2천년 전 팔레스틴의 예수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예수 마음과 혼을 가지고, 예수 삼을 사는 ‘예수인(人)’들을 다수 소개하였는데. ‘역사적’ 예수만 아니라 ‘현재적’ 예수도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양의 위인 뿐 아니라 조선의 신앙위인도 소개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소개한 조선 위인 중에 전주 고아원 설립자 방애인(方愛仁)의 이름을 언급하였고 등광리 이공도 소개했습니다. 즉 정경옥 교수는 아니 져도 될 십자가를 지시는 ‘곤고(困苦)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등광리 성자 이공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남한 지방 화순이란 곳에 이상한 사람이 한 분 계신다. 그는 학식도 지위도 없는 산꼴 농부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운 후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인고(忍苦)를 즐겁게 받고 있다. 그는 음식을 먹어도 사람이 참아 먹지 못할만한 것을 먹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드려보아도 결단코 먹지 아니한다. 그는 불상한 거지나 어려운 생활을 하는 빈민들을 생각하면 부드러운 밥이나 맛있는 반찬이 목에 걸리어 넘어가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그는 잘 때에 이불을 덮어도 몸을 절반만 가리우고 잔다. 왜 다 덮지 아니하느냐고 물으면 치운 때 잘 곳이 없이 길가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아 이불을 끄을어 덮기 어려워 손이 떨린다고 한다. 우리는 그의 미숙한 사상이나 독단적인 이론을 반박할 수도 있고 그의 기괴한 생활형식을 배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이단인지 정통인지 그것조차 심판하여 보려고 하지도 아니하였다. 나는 다만 그의 순진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곤고를 본받아 실천하여보려는 열성만을 존경하고 사표(師表) 삼고 싶은 것이다.”

 

정경옥 교수에게 이공은 도반(道伴)을 넘어 본받고 싶은 사표(師表)였습니다. 즉 그가 본 것은 한반도 땅에 이공의 몸을 빌어 ‘성육신’(incarnated) 하신 예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정경옥 교수가 낙향해서 회복한 것은 예수였습니다. 성경의 예수였고 이공의 삶에 계시된 예수였습니다. 예수와 영성을 회복한 정경옥 교수는 1939년 봄부터 감리교신학교 교수직에 복귀하였습니다. 그 무렵 신학생이었던 김옥라 장로는 ‘돌아온’ 정경옥 교수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학교를 떠나기 전 정경옥 교수는 달변의 멋쟁이 교수였다. 그런데 2년 만에 돌아온 정경옥 교수는 외모도, 언변도 옛날과 같지 않았다. 2년 전 정경옥 교수는 학생들에게 해박한 신학 지식을 가르쳤다면 돌아온 정경옥 교수는 지식보다 진리를 가르치려 애썼다. 그리고 수업 시간마다 학생들에게 강조한 말씀이 ‘복잡에서 단순으로!’였다.”

 

“복잡에서 단순으로!”(from many to one) - 이것은 그가 해방 4개월 전, 태평양전쟁 직후 ‘미국 스파이’ 혐의로 투옥되었을 때 얻은 병 늑막염으로 별세하면서 지켜보는 제자들(김천배, 성갑식, 조아라 등)에게 남긴 유언이기도 했습니다. 정경옥 교수가 그토록 제자들에게 돌아가라고 호소했던 ‘단순’은 그가 그토록 닮고자 했던, ‘오직 한 분뿐이신 예수’인 것은 당연합니다. 바로 환갑을 맞은 우리가 해야 할 귀일(歸一)의 목표이자 내용입니다. 예수를 모시고 따르는 삶은 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2.3 동광원과 귀일원

그저 말씀 따라 단순하게 살던 이공은 해방직전 신사참배를 피해 화학산 골짜기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공은 화학산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뒤에 나 같은 사람 하나가 나올 것이요.” 하였는데 그가 바로 이현필(1913-1964)이었습니다. 이공과 같은 도암면에서 태어난 이현필이 이공을 처음 만난 것은 18세 때였으나 이후 10년간, “마음보다 육신의 끌림을 좇아” 광주에 나가 전도사 생활도 하고 결혼도 하였으나 “파라, 파라, 깊이 파라”, “같이 살기로 했으며 남매처럼 사시오.” 하셨던 스승의 말씀에 끌려 결국 결혼 3년 만에 ‘출가’하여 독수도에 들어갔고 그도 스승처럼 ‘말씀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공에게 말씀공부를 하던 제자들, 예를 들어 이상복과 김광석, 수레기어머니 같은 이들이 이현필의 도반(道伴) 겸 제자가 되어 말씀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현필은 해방 직전부터 광주와 남원, 화순, 진도를 오가며 말씀을 가르쳤는데 특히 서리내 골짜기에서 실시한 말씀 공부와 수련은 웬만한 인내심을 가지고는 배겨낼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하고 철저하였습니다.

 

“오장치[거지 살림살이]를 져야 예수를 따를 수 있다.”

 

절대 청빈과 절대 순종, 절대 순결을 몸으로 실천하는 이현필의 주변에 그처럼 ‘예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기성교회 설교에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 교인들이 교회와 가정을 떠나 산골짜기로 몰려들었습니다. 김준호와 오북환, 조동록, 강차남, 김금남, 김춘일, 김은연, 이희옥, 박공순, 복은순 등 출가하여 공동체에 합류한 이들도 있지만 기성교회나 기독교 단체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현필의 가르침에 동감하여 협력하는 이들도 늘어났습니다. 광주기독교청년회 총무를 역임했고 수피아여고 교감이었던 정인세 선생을 비롯하여 오방정(五防亭)의 최흥종 목사와 독신전도단의 강순명 목사, 백영흠 목사, 그리고 다석 유영모 선생과 김준 선생, 원경선 선생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말씀과 수도 공동체’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소문은 해방직후 서울 기독교청년회 총무 일을 하던 현동완(玄東完) 선생의 귀에도 들렸습니다. 평소 ‘성인 사적’(聖人史蹟)에 관심이 많아 외국의 성인 사적지를 여러 차례 방문하였던 그는 “전라도 화순 땅에 성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내려와 이공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이공의 제자들이 말씀과 수도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동안 모아두었던 ‘십일조’를 내려보내 수련 장소를 겸한 예배당을 짓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봉선동 밤나무골에 집 한 채가 생겼습니다. 남원 서리내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이현필의 제자들이 광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무렵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1년 넘게 지리산과 광주 일대는 전쟁터와 다를 바 없었고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광주 시내로 몰려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광주에 있던 기독교 유지들이 고아원 설립에 뜻을 모으게 되었고 그 책임을 기독교청년회의 정인세 선생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정인세 선생은 이현필 선생과 같은 ‘수도 생활’에 뜻을 두고 나름대로 출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망설이고 있던 정인세 선생에게 이현필 선생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그 때 이현필 선생은 화학산에서 ‘묵언’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정인세 선생이 고아원 경영을 두고 고민한다는 말을 듣고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적어 보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이 말씀은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 역사에 끊임없이 나타난 수도공동체의 원리가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흠 없이 정결한 경건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신자의 근본도리라면 그것은 두 가지로 해결되는데, 첫째는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보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사랑의 실천으로서 구제사업과 영적 순결을 지키기 위한 경건 훈련입니다. 수도생활과 구제활동이 사람의 양손처럼,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수도원 옆에 고아원이나 병원이 있었던 이유입니다. 이 두 가지 원리는 언제나 공존하며 협력해야 합니다. 어느 한 쪽이 결여되어서는 온전한 경건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말씀에 의거해 정인세 선생은 고아원 경영을 맡기로 했고 그렇게 해서 황금동 적산 가옥에 동광원(東光園)이란 간판을 걸고 고아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현필 선생의 제자들이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철저한 말씀 공부로 사랑이 충만했던 수도자들은 주님 섬기듯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고아들이 늘어날 것은 당연했고 전쟁이 끝나자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고아원을 지산동으로 옮겼으나 계속 늘어나는 고아들을 수용하기엔 시설이나 보육 능력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1954년 전남도청의 결정에 의해 동광원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고아들은 시설 좋은 전국 고아원으로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흩어졌던 고아들이 그곳 고아원을 탈출하여 광주로 돌아왔습니다. 시설보다 사랑이 그리워 찾아온 아이들이었습니다. 밤나무골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이현필 선생의 제자들은 그렇게 찾아온 아이들과 다시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고아원이 재개된 것입니다.

 

부활된 고아원에 ‘귀일원’(歸一園)이란 새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사실 귀일원이란 이름은 1949년 이현필 선생이 화학산에서 ‘묵언 수도’하던 중 ‘하늘로부터 받은’ 새로운 신앙운동의 좌표였습니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고, 여러 사람이 한 숟가락씩 모아 가난한 사람 한 끼 식사를 마련해 주는 사랑 실천운동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귀일원은 오갈 데 없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섬기며 돌보는 사랑 실천의 훈련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귀일원이란 이름의 등장과 함께 동광원에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동광원이란 간판을 내건 건물은 없지만 그것은 이현필 선생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말씀과 수도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건물이 아닌 가슴 속에 동광원 간판을 건 셈입니다.

 

이후 이현필 선생은 전라도 광주와 화순, 남원, 진도, 그리고 경기도 능곡과 고양 계명산에 수도공동체를 만들고 청빈과 순결, 순명의 삶을 살도록 지도하였습니다. 이런 각 곳의 수도공동체들을 통괄하여 동광원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동광원에서 훈련받은 제자들을 귀일원에 보내 고아와 환자들을 돌보게 했으니, 그렇게 해서 야고보 1장 27절 말씀이 이 땅에 응답되었습니다. 귀일원이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보는” 사랑실천의 현장이라면 동광원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훈련의 현장이었습니다.

 

3. 이현필 선생의 ‘말씀’을 다시 읽으며

회갑을 맞는 동광원과 귀일원 사람들 뿐 아니라 이곳을 사랑하는 이들이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무엇일까요? 지난 60년 동안 귀일원은 참으로 남들이 하지 못하는 위대한 일들을 해왔고 그 결과와 영향력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입니다. 귀일원은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적’ 사회복지기관으로 감사장과 표창장도 많이 받았고 여기서 배출된 이들이 사회 각 곳에서 지도자로 훌륭하게 자기 몫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동광원 역시 ‘영성 고갈’이라는 현대적 위기 상황에서 ‘맑은 샘과 같은 영성’을 고이 지켜온 한국의 대표적인 수도공동체로 이름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서, 영적 기갈을 해소하려고 남원과 화순, 벽제에 흩어진 동광원 동산들을 찾습니다. 그리하여 귀일원과 동광원은 이제 ‘성지순례’ 장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정신과 사업을 배우려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축하하고 경하할 ‘회갑’이지만 오히려 동광원과 귀일원 식구들은 냉철하게 자신을 되돌아볼 일, 즉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정신을 과연 우리가 어느 정도 지켜 왔는지 되돌아 볼 일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선생님이 와 계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칭찬을 하실까? 꾸중을 하실까? 박수를 치실까? 호통을 치실까? 그런데 선생님은 침묵하십니다. 답을 우리 스스로 구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되돌아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반성하라는 말입니다.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회복할 것은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살아계실 제 그 말씀을 기억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했던 제자들이 예수님 떠나신 후에야 비로소 성신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을 기억하고, 깨닫고, 실천했던 것처럼 이현필 선생님 살아계실 때, 그 그늘 아래 숨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따라만 다녔던 제자들이 선생님 떠나신 후 60년 세월을 지내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제대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살았는지 되돌아보라는 말입니다.

 

과연 말씀에 비추어 오늘 우리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귀일원도, 동광원도 처음 시작은 ‘말씀’ 뿐이었습니다. 말씀 밖에서 지혜와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목적이었고 도구였으며, 하루 일과를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끝냈습니다. 말씀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도 동광원과 귀일원의 존재와 사업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동광원과 귀일원을 시작하신 선생님은 이곳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 고아든, 걸인이든, 나그네든, 수도자든 말씀만 느끼고, 말씀만 맛보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 오늘 우리를 반성해보려 합니다. 마침 제 손에 이현필 선생님이 1955년 12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광주와 계명산에서 동광원 식구들에게 가르치셨던 말씀을 기록한 <강의 노트> 복사본이 들어왔습니다. 동광원이 간판을 내건 지 7, 8년, 초창기를 벗어나 그 기틀을 잡아가던 때 주신 말씀입니다. 그 속에 담긴 ‘선생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서, 그 말씀에 비추어 오늘 우리의 생각과 일, 믿음과 생활을 반성하고자 합니다.

 

3.1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귀일원이 ‘회갑’을 맞아 회복하야 할 ‘갑’(甲), 돌아가야 할(歸) ‘하나’(一), 그것은 무엇일까요? 이 선생님이 1956년 3월, 신안리 농대 묘목장에 식구들과 함께 가셨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 외에 영적 진보의 길은 없다. 그는 길이오 진리오 생명이며 도 구령을 원하는 자가 드러갈 유일한 문이다. 그럼으로 누[누구] 만일 편하고 쉬운 길만 거닐고자 한다면 그리스도를 모방함에서 어긋나는 것이니 그러한 정신을 나는 선량한 것이라고 인증할 수 없다.

 

二. 그대의 최대의 관심은 그대의 모든 행위에 있어 주를 닮고자 하는 열열한 사랑에 충만한 소원을 갖게 하는 것이오라. 매사를 주任께서 이렇게 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그대로 행하기로 힘쓰라.

 

三. 그럼으로 어떠한 소원이나 즐김이라도 만일 그것이 순수하게 천주任의 명예와 영광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야 이를 버릴 것이다. 주께서는 이 세상에서 이르시는 동안 나의 음식이라고 부르신 성부의 뜻 외에는 아무런 취미나 소원도 갖지 않으셨다.

 

四. 비록 아무리 거륵한 사람일지라도 결코 그를 그대의 모든 행위에 완전한 모범으로 가리지 말라, 마귀가 그대의게 그의 불완전함을 본받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거륵하시고 가장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할 것이니 그러면 그대는 결코 그르칠 위험이 없으리라.

 

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항상 그리스도와 더부러 십자가에 못 박혀 살라. 그러면 그대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평화를 깨닷고 그 평안을 그리스도의 인내 중에 보존하리라.

 

六. 만사에 있어서 그대의게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만으로써 족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더부러 고통을 받고 그리스도와 더부러 쉬라.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고통이던지 아무 휴식이던지 취하지 말라. 이러기 위하여서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내적으로 모든 애착을 끊허 버림으로써 외적으로 너를 온전히 없애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七. 아즉도 자기를 중히 녁이는 자는 자아포기를 모를뿐더러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지 않다.

 

八. 모든 재보를 초월하여 가난을 사랑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하찬은 것으로 녁이라. 그대를 위하야 생명까지 버리기를 주저치 않으신 그대의 영혼이 천상정배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九. 만일 그리스도를 소유코자 진실로 바란다면 결코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찾지 말라.

 

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아 않는 자는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찾지 않는 자이다. 마음으로 언행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받은 은사 각각 다르다. 자기 분수 생각고 모방하라. 천부의 뜻이 음식으로 녁여지나 예수를 닮으려고 힘쓰면 결코 닮어진다.

 

十一. 시련 중에 있을 때는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우리 천주任을 조곰치라도 닮고자 하는 원을 가지라. 이 세상 생활이 주를 닮기 위함이 아니라면 무슨 유익이 있으랴?

 

12.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받을 줄 모르는 자는 과연 무엇을 아는가? 주를 위하여 참는 고통이나 수고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것을 참아 견데는 이는 남이 부러워할 만한 자이다.

 

13. 천주任깨서 주시는 은혜와 총애를 바라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천주 성자와 더부러 노고와 간난을 받고자 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14. 예수 그리스도의 벗이라고 자칭하는 자도 가끔 극히 조곰 밖에는 주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주 안에서 쓴 맛이 아닌 위안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1956.3.13, 3.23)

 

이틀에 걸쳐 주신 이 말씀 가운데 귀일원과 동광원의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 - 그것은 기독교 전통에 나타난 모든 신앙과 수도의 내용이자 목표였습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이들의 신앙과 삶의 근본이고 본질입니다. 이 후에 나오는 겸비와 순종, 가난과 고난, 순결과 절제, 수도와 수련, 구제와 봉사 등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동광원과 귀일원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를 따르려는 이들의 모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3.2 겸비와 순종

그리스도를 따름에 고난과 가난, 겸비와 순종이 필연적으로 임합니다. 편안과 안일을 구하는 육체를 가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이 우리 힘으로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1956년 연초에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任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任이 우리를 영원히 섬기신다. 내가 깨끗지 못해도 사랑하시는 사랑에. 넓이나 높이나 기리를 앎기를 바람. 육체를 입히시는 이유? 육체가 속사람을 괴롭혀서 하나님의 사랑은 감촉함으로. 흠미함으로, 더욱 날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셔 우리의 키가 그리스도를 아는 분량이 정성한 안해로써 맛나기 위하야 날로 정화하고 거륵해지기 위해 육체를 두셨습니다. 선생이라고 하면 흠모만 해서는 안 되고 따라가며 모방해야 됨. 찬란한 심판주 따르는 것 아니고 낮은 자리 겸손하고 가난한 주를 따르려는 것이여야 함.”(1956.1.26)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은혜에 사로잡혀 그분을 모방하여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이 겸손과 순종입니다. 우선 겸손, 혹은 겸비는 그리스도를 따르려 마음먹은 사람에게 주시는 첫 번째 은총입니다. 그러면 낮아짐으로 의를 완성하신 예수님의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 완전한 존경은 그 교훈 완전히 직히는 데 있다. 예수는 나저지심으로 의를 완성식히셨습니다. 부활승천은 의의 결과. 고생당하시고 승천하셨음. 높은 자리에서 의를 이루는 것은 예수님의 방법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 지중히 높으시면서 가장 나저지심. 나저지고자 하는 마음은 회개하려는 마음이다. 낮어지려는 마음 없는 자는 회개하려는 마음조차 없는 자다. 대제사장 예수 보왓으나 낮어질 마음 없음으로 예수 보지 못했음.”(1956.1.19)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분에게 인도하는 암호(ID)라면 ‘겸손’은 우리를 그분께 연결시켜주는 비밀번호(password)입니다. 그러므로 잘못 입력하면 그분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교만으로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입니다. 선생님은 그 교훈을 예수님의 씨앗과 누룩 비유에서 찾았습니다.

 

“1. 종자는 땅 속에 겸손히 묻혀야 싹이 돋고 소망을 바라보고 참어 자라고 열심히 힘써 끝까지 참음으로 결실합니다. 부지런히 자기 찾고 남의 잘한 것만 보고 배우려 힘씀으로써 좋은 마음씨가 됩니다. 자긔 죄만 삿삿치 차자 그 죄에 대해 무슨 형벌 받을 줄 아는 자는 지혜 잇는 자이다. 벌바더 맛당한 자인데 예수께서 대신 져주심으로 살고 있는 줄 아는 자는 지혜잇는 자이다.

 

2. 자긔 생각이 옳은 줄 아는 순간에 교만이 자라서 마귀가 그 마음을 주장하게 됩니다. 선행할 때 내가 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벌써 그 마음에 마귀시험 임함이며 선한 일도 아닙니다. 하여간 자긔는 천군천사가 보호하심을 아라서 선한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있어야 합니다.

 

3. 누룩 비유. 다 되어 깨끗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마음에 음란의 생각이 드러오더니 잠간 동안에 음부에 떨어지고 마렀다. 의인이 죄인 되는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빠르다. 순결한 마음은 마귀가 제일 싫여한다. 내 몸 가지고 예수님 일 즉 선한 일 한다는 생각이 잘못이다. 피 한 방울을 악낌없이 ?으시고 사주신 몸인데 엄청난 해보다 빛나는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 큰 잘못이다. 우리의 몸은 아버지를 알리는(인자와 자비와 거룩) 빛의 몸이다. 내 몸을 주任이 사신 줄 알진덴 저만 먹을려고 땅만 뒤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역적은 이기주의다. 온 재산 다 드려 구제할지라도 햇빛 되게 가르치지 않으면 더 큰 일만 만드는 것뿐이다.”(1956.3.17)

 

이처럼 그리스도의 겸손을 몸에 익힌 자에게 순종은 아주 자연스런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겸비가 그분의 순종을 이끌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모시고 함께 살면서 서로 순종을 연습함으로 겸손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잘 하나 못 하나 뜻이나 상하지 않게 순종하면 너머저도 기뻐하시고 너머지지 않게 부뜨러 주신다. 겸손할려고 해도 예수님의 겸손 따를 수 없다. 사람끼리도 낮아지도록 힘쓸 것임. 내 고생 감당해 주시는 이가 계신 것을 앎면 덜 감당식힐 생각이라도 든다. 감정과 의지와 행함이 일치되여야 한다. 내가 주任을 잊어버리는 것이 죄며 잊어버리는 시간에 범죄하게 된다. 예수 따라갈려면 모방해야 함. 능력 주시는데 순종할 맘 없음으로 행치 못한다. 겸손과 사랑= 예수보다 더 낮어질려는 것이 예수 따르는 것이다.”(1956.1.28)

 

“차라리 예수님보다 더 낮아져야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는 순종과 겸비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일 힘든 것이 자기 고집, 자기 욕심, 자기 의지를 꺾는 것입니다. 그런데 길이 있습니다. 겸손과 사랑은 함께 다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실천함으로’ 교만을 이기고 겸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함으로 천국을 이루는 것이지 율법을 주장함으로 예수님 기쁘시게 못하고 마귀를 기쁘게 한다. 내 주장 내 고집을 주장함으로 의는 되나 하나님을 기쁘시게는 못한다. 예수님의 뜻을 차자 순종함으로써 천국의 사자가 될 것이다. 내 고집이 내 몸을 시달리게 만든다. 내 몸을 예수님께 바쳐서 자긔를 익이고 복종하고 삶으로 세상의 왕 되는 것보다 더욱 행복됩니다.”(1956.3.19)

 

겸손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복종시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기 위해서라도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 실천이 아니고는 천국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굶주린 고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하는 내게 겸손과 순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 실천대상으로 주님께서 고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받들어 섬겨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우리의 완덕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귀일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수련의 내용입니다.

 

3.3 가난과 고난

그리스도를 모시고 따르는 이들에게 가난과 고난은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탄생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가난과 고난의 삶으로 일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가난과 고난을 회피하면 그것은 위선이고 죄가 됩니다.

 

“가난을 싫여하는 것은 예수를 싫여하는 죄가 됩니다. 무엇이 미련한 것인가요? 부자가 되려는 마음. 편할려는 마음. 말씀 듯는 것이 복이 아니라 마음 깨끗한 자체가 복이다. 온유, 겸손, 핍박, 그 가체가 복된 것이다. 있는 지혜 다 써봐야 미련함을 앎 수 있음. 정직하니 힘써보면 자기 약한 것을 앎아진다.”(1955.12.27)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가난은 본디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 누릴 수 있는 것을 자진해서 포기하고 폐기함으로 얻는 가난입니다. 그것은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온갖 부귀와 영광을 누리실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버리고’ 비천한 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따르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 만유의 왕 평화의 왕 권능을 가지신 왕으로 오셨음. 구유에 나신 예수는 가장 어려움을 무릅쓰고 보배를 가지고 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심. 원수를 대적치 않으시고 애굽으로 피난하심. 전능케 하시니 악한 자를 힘으로 권력으로 대항하지 않으셨음. 아는 것과 기분으로 삶지 말고 평화의 왕의 지도대로 사라야 함. 가장 비천한 곳에 나신 주任. 가장 가난하신 주任, 이름 없는 곳에 나신 주任을 믿고 기억해야 함. 믿을 것임. 비천한 곳 같이 하심으로 비천한 가온데 평화를 얻을 수 있음. 가장 귀한 보배 바치기에 합당하신 왕.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 바쳐서 섬길 수 있는 왕이심(가난한 곳에 나셨기 때문에).”(1956.1.19)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어찌 부귀와 사치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호의호식(好衣好食), 그것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신 주님을 따른다는 이들이 추구할 바가 아닙니다. 참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면 그런 환경이 오히려 벗어나고 싶은 감옥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 가운데 부자가 되고, 명예를 얻는 것을 교회 출석의 제일 목적으로 삼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 선생님 시절에도 그랬나 봅니다. 선생님은 “예수님을 바로 보자.”고 호소하셨습니다.

 

“바로 본 예수= 예수님을 안다. 고생의 예수. 죽어야 할 예수. 십자가의 렌즈로 통해 본 예수래야 참 예수다. 세상 눈 견해와는 아주 정반대다. 틀리지 말 것임(사 52:13-, 53:6- ) 베드로 왈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싸오매 내가 어데로 가오리까?= 속, 알맹이 없는 말이다(아버지 뜻 모른 말). 우리가 틀리기 쉬운 점= 영생하고 죽지 않는 예수만 알었다. 그리스도의 것이면= 간난하고 핍박받고 어려운 예수를 말 업시 따를 것임. 고생아? 너는 나를 괴롭게는 하나 해롭게는 못한다. 잘 믿는 것. 사나 죽으나 잘 순종하는 것. 성신님께 순종하는 것(벧전 1:3-, 2:21, 3;17. 4:1-12. 5:7-9).”

 

“십자가의 렌즈로 예수를 보자.” 십자가를 장식으로 걸고 다니면서 정작 십자가 예수는 거부하는 위선적인 교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옷까지 벗기우신 채, 십자가에 달려 채찍을 맞으신 예수님은 말 그대로 가난과 고난의 결정체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했으면 십자가까지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여기서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난과 고난을 기쁨으로 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육신의 그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부활의 생명, 그 생명을 향한 의지가 이 세상에서 고난과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든다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1956년 부활절에 주신 말씀입니다.

 

“고생과 간난이 예수님 나시기 전에는 수치엿으나 나신 후로는 영광이다. 날마다 의를 위해 큰 고생당할사록 더 큰 빛이 되며 헛되이 생명을 탕비치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짜내서 우리 속의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 부활에 대한 소망과 인식이 확실해야 어둠과 개와 싸와 이길 수 있음. 고생이라는 기름으로 참어서 충분히 인식하시기 바람. 인간의 정성이 예수님께 하등 필요 없지만 간절된(맛나고 십흔) 마음을 보시고 맛나 주신다. 공의대로 살면 부활하고 싶지 않어도 부활하게 된다. 그 생명은 누구의게 정복당할 생명이 아니고 죄와 악의게 이길 생명임으로 왕 될 생명이다.”(1956.4.1 부활절)

 

이런 부활생명의 주님을 모시는 순간, 이 세상 물질과 명예, 권력과 영화를 향한 욕심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겸비하여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모시면 어렵다고 생각되었던 이 모든 일들이 쉽게 해결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온갖 탐욕과 죄악으로부터의 구원 말입니다.

 

“믿으면 누구나 구원 있다. 믿게 해 주심으로 믿는 것이 은혜다. 아무리 큰 죄인일지로되 예수를 우러러 보며 죄임을 진정으로 깨닷고 회개와 동시 순종하면 구원 있다. 우에서 믿음 주심으로 믿어야 겸손해진다. 간난 핍박을 환영하는 것이 곧 예수 영접하는 것임, 참으로 믿으면 남의 부족이 보이지 않고 내 부족만 보인다. 내가 예수를 만드러서 믿으니까 남의 허물만 보인다.”(1955.12.27)

 

예수 믿고 탐욕에서 해방된 사람은 자기 허물만 보게 됩니다. 죄인들은 남의 허물만 찾아내지만 구원받은 의인은 자시 허물만 찾아냅니다. 참 예수 모시고, 참 성신 받으면 그렇게 됩니다. 선생님은 “참 성신을 구별하라.”고 충고하셨습니다.

 

“어떤 것이 성신이며 성신 아닌 것 분간하자. 참 성신= 속에 죄를 들춰내서 회개하고 애통하는 마음 주신다. 성신 받을수록 자신이 뚜럿이 나타나 죄가 자꾸 나오는 것이다. 거짓 성신= 성신을 받으면 불이 나타나서 죄가 소멸되는 줄 아는 것. 예수님 말씀 앎게 하는 것이 성신의 역사다(요 14:16- , 31- ).”(1955.12.26)

 

믿어도 바로 믿고, 알아도 바로 알고, 살아도 바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신도 참 성신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요즘 기독교계가 이다지도 소란스럽고, 실망스러운 것도 알고 보면 ‘너 못나고 나 잘났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생긴 것이 아닐까요? 참 성령이 임하시면 내 눈에 드러난 들보를 빼내는 것도 힘들 터인데 남의 눈 티끌이야 보이겠습니까? 참 믿음, 참 성신이 임하면 바깥은 보이지 않고 내 안만 보입니다. 회개 밖에 할 것이 없는 셈이지요.

 

“내 물건 도적질할가 조심하는 것보다 내가 남의 물건을 탐하는 마음 없는가 검토할 것이다. 사랑과 덕을 상실할까 조심할 일이지 물건 도적마질가 염려는 금물입니다. 믿음은 든든한 소망과 점점 밝거저가는고로 하나님 계신 것을 완전히 의지하는 것임. 칭찬과 존경을 탐하지 말 것이다. 수양의 가치를 앎지 못하는 자는 동물과 같다. 빛 하나 없이 간간 궁핍하게 지내는 것은 참 평안인데 빗지고 배부르고 平하려 하니 수양의 가치를 모르는 자이다. 어둡게 오래 사는 것보다 밝게 가치있게 사는 것이 참 사는 것이다.”(1956.3.21)

 

이렇게 바른 믿음, 바른 앎, 바른 삶을 추구하고 노력할수록 마귀의 유혹과 시험은 더욱 거셉니다. 선생님도 그것을 알고 동광원 식구들에게 온전한 경건을 이루기 위해 부단한 훈련과 수련을 쌓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을 자발적 가난과 고난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장 ‘고결한’ 삶이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생활은 고결한 생활. 고통이 따르는 생활임. 고결한 생활을 원하는 자는 많은 어려움을 자원해야 합니다. 자립정신. 두 발로 서는 사람 되어야 함. 거륵한 생활은 가치 있는 생활임으로 고생스러웁고 멸시받고 가난하나 참된 생활 함으로써 부끄럼을 씻고 활발이 나아갈 수 있다.”(1956.1.14)

 

그런데 우리 안에 마귀 유혹이 있어 자꾸 평안과 부요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을 물리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의 위대한 ‘그리스도’ 고백이 나오고 고백 직후 주님께서 고난 받으실 것이란 비밀을 ‘비로소’ 알려주시는데, 고난에 대한 말씀이 나오자 방금 그 위대한 고백을 토해냈던 베드로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였지요. 그러자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책망하셨습니다. 이현필 선생님은 바로 이 본문을 가지고 수도생활에서 경계해야 할 ‘마귀의 유혹’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귀의 말. 영생만 믿을 것이 아니라 죽음도 믿을 것임. 죽음도 영생이다. 죽는 것이 사는 것. 천국은 고생이다. 걱정 많을수록 평안함 많다. 고생 끝에 평안함 오는 것이 아니라 고생 자체가 복이다. 믿엇으면 고생이 복으로 믿어진다, 참 죽음= 참 영생. 참 복. 인간의 근성= 북끄러운 죄 중에서도 오래 삶기를 원한다. 나를 따라 오려 하거든= 예수 따라오려 하거든 죽기 싫은 마음 ?이고 고생회피 하지 말고 자긔 당할 고생 달게 지라. 맛당히 당할 고생 회피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 행한 대로 갑흐리라= 고생하면서 즐거워하는 그것이 천국이다. 성신받기 원하면 고생 받을 줄 각오해야 합니다. 여긔 있는 것이 좋으니= 곳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장막 되기 원하라. 장막 짓는 생활은 고생스러운 생활임.”(1956.2.14)

 

편안과 안일은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성도들을 유인하는데 마귀가 제일 잘 쓰는 미끼입니다. 또 효과도 좋습니다. 거짓(삯군) 선지자들은 “교회 잘 다니면 부자 되고 환란을 면한다.”는 식으로 설교합니다. 대부분 교인들이 여기 넘어가고 맙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예수를 놓치고 맙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를 따르려면 고생과 죽음은 각오하고,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에서 베드로가 황홀경에 빠져 예수님께 장막을 지어 영원히 머물자고 하였을 때, 주님은 또다시 꾸중하셨습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장막을 지어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장막 삼아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살아야 합니다. 가난하고 고난 받는 예수님이 우리 장막이 되셨는데 어찌 우리가 가난과 고난을 싫어하고 피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그 안에서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선생님은 동광원과 귀일원이 그런 주님의 장막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몸으로 당하는 고난을 ‘성전세 봉헌’(마태 17:24-27)으로 풀이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썩지 않을 영생의 약을 쓰고 있음으로 세상 약을 안 쓰는 것이지 그냥 안 쓰고 있는 줄 아는 것은 무지한 자이다. 아버지께서 이 몸 가지고 빗 갑고 오라셨는데 그 책임 알지 못함으로 편하려만 꾀한다. 내 몸 아니니까 세 밧쳐야 한다. 성전세 밧치려 작정하면 잡념은 물러간다. 고난을 달게 밧는 것이 성전세 밧치는 것이다. 자기 죄 때문에 꼼짝 못하는 것이 성전세 밧치는 것이다. 죄 있게 사럿스니 썩지 않을 것으로 이 세상에 남겨두고 가야함니다.”(1956.4.8)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따라서 ‘성전세’ 드려야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3.4 순결과 정절

그리스도를 뫼시고, 그분을 본받아 살기를 바라는 모든 이들은 제일 먼저 그분의 본마음인 겸손을 품게 되어 자연스럽게 그분 뜻에 순종하게 되고, 그 결과 그분이 받으신 고난과 가난을 기쁨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오직 그분만 내 안에, 그분만 내 앞에 계심으로 그분 외의 것에 대한 욕심도, 의지도 사라집니다. 그 결과 그분에 대한 순결과 정절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이공님도 그랬고, 이현필 선생님도 그토록 제자들에게 순결과 정절을 강조한 것은 그것이 그분에 대한 우리 사랑의 완전한 표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절이 목적이 아니라 그분을 사모함이 목적입니다. 목표를 잃지 않으면 길도 잃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하날나라 덕만 존중히 역입시다. 맑음 맘. 즉 정절. 덕행 중에 제일은 정절이다. 덕행을 힘슬 것임. 죽음의 준비= 기쁨으로. 아버지의 뜻을 마음에 삭이는 시간이 예배다. 소리 없이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는 것을 더 기뻐하심. 진리만 올케 부뜰면 넓이 전파된다.”(1955.12.30)

 

그러므로 육신의 정절보다 마음의 순결이 먼저입니다. 육신의 간음보다 마음 속 음욕이 더 무서운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순결을 유지하도록 닦고 또 닦아야 합니다. 순결한 마음이면 정절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선생님은 마음의 순결을 오염시키려는 훼방꾼들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 닦는 일 곧은 마음 지키며 정조 직혀야 합니다. 선한 일이 좋키는 하나 정조 꺽길 일 같으면 무삼 일이고 집어치워도 좋다. 방해군은 이방사람 유대인 보담도 귀족 선지자들이다. 즉 내 속에 것이 원수다. 하나님 말씀 잘못 분간하는 선지자들이 방해함. 호기심으로 따라가지 말 것. 시간 시간이 깨다름으로 은혜의 줄에 매여 있어야 함.” (1956.1.7)

 

“착한 일을 많이 해야겠다.”는 의지도 때론 순결과 정절을 빼앗는 마귀 유혹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선행도 착한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야지 선행한다고 마음이 착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 마음의 청결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는데 선생님은 그 대목을 가지고 은혜를 구하지 않는 음란의 세대를 비유하여 가르치셨습니다.

 

“한편 손 마른 자. 음란으로 인한 병이다. 예수님은 의를 완성식히러 이 세상에 오셨다. 자기 상태가 어떠한지?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 소명감을 앎지 못함으로 남의 책만 잡는다. 지식(겨)들만 찾지, 은혜(알맹이)를 구하지를 않는다. 영혼이 육체보다 귀한 줄 앎지 못함으로 사람보다 양을 더 귀히 여긴다. 육체의 멸시 당하는 것은 아나 영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하나님 기쁘시게 하면 날마다 걱정이 주러가고 기쁨이 느러가 점점 차서 넘처 흘러야 함.”(1956.1.30)

 

이런 말씀도 주셨습니다.

 

“음란의 세대에 이적은 죽어 다시 하는 길 밖게는 없다. 잘 먹고 평안할려는 마음은 음란한 마음이다. 사람노릇 못한 것을 원통히 녁이고 내 예수님을 내 맘에 왕으로 뫼시지 안는 한 선한 일, 고생, 기도생활, 자복, 열심히 했으나 그 결과 더 악해진다.”(1956.3.5)

 

예수님의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은 의지는 그것이 철학이든, 종교든, 윤리든, 신학이든, 자선사업이든, 구제활동이든 그것의 결과는 그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되기에 그것을 음란이라, 죄악이라 한 것입니다. 그런 음란의 죄악에서 우리를 지키려면 우리 근본이신 하나님께 연결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음신(淫神)의게 둘려 그와 타협하느라고 진리를 분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세상과 구분받은 자니 음란의 생각은 말라는 듯이다. 마음의 음욕을 제거하는 방법= 근본되신 하나님을 아라 그 사랑에 옴빡 해결방책이 없다. 하나님 계심을 먼저 앎고 그의 거룩하심을 믿을지니라. 딤전 5;1-12. 성신을 의지않을진덴 정욕을 억제 못한다. 특별한 성신의 보호를 받기 전에는 육십세가 되기 전에 과부의 명부에 올리지 못합니다. 모태로부터 보호받기 전에는 할 수 없고 보혈로 닦음과 성신께서 보호치 않으시면 정절을 결심했어도 성취되는 것 아니기에 크게 영광이며 또한 예수의 영광이다.”(1957.10.24)

 

주님께 정조를 지키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道德과 律理를 직혔다 할지나 정절을 부인하면 허사요 저주가 됨니다. 정욕의 몸으로는 늙은이를 아비같이 젊은이를 누이같이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정욕을 정복하신 분이 시종여일하게 이루우셨음에 한평생 섬긴 자를 믿는 것이다. 내가 사랑할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심을 앎자고 믿는 것이다. 피와 물을 다 쏟고 목마르시기까지 참으신 그 사랑을 얼마나 가치있게 섬겼으며 추앙했는가를 성찰할지라. 남을 전도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생명까지 내놓으시고 사랑하신 그분을 믿는 것이 급선무입니다.”(1957.10.24)

 

그저 나를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을 배반할 수 없어 아무런 조건도, 요구도 걸지 않고 바치는 사랑. 그런 사랑에서 순결도 정절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조건과 욕심으로부터 자유한 어린 아이들이 천국에 가깝다고 한 것입니다.

 

“어린 아해의게 나타내시는 아버지. 믿으면 행함을 따른다. 감사함으로 불평 없이 삶면 육체의 짐 가벼워지고 영의 짐 무거워진다. 않믿고 말씀 드르면 미신이 된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어린 아해의 가치를 앎 수 있다. 어린이들은 천국생활이다(음란한 마음이 없음으로). 음란한 마음 없으면 (어린이) 천사와 동등임. 걱정, 근심, 의식, 욕심, 정욕, 죽엄 등에 흔들리지 않는가? 욕심에 흔들리는 교회는 주任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1956.2.5)

 

선생님은 어른들의 욕심에 휘둘리는 교회 말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정절을 지키며 사는 천국 공동체를 꿈꾸셨습니다. 거기에 ‘내 것’은 없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올바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광원과 귀일원이 그런 ‘천국 동산(園)’이기를 바라셨습니다. 선생님은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통해 무욕(無慾)의 정절을 설명하셨습니다.

 

“내 것이 없어야 예수를 따르며 빛을 보게 됩니다. 범죄 후 사정할 곳은 예수 밖에 없다. 불상히 측은히 녁이시고 부끄럼을 씨서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죄를 용서하시는 선생이시다. 어려운 일 당할수록 예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사내= 사람. 딸= 딸렸다. 여자는 남자의게 딸린 것으로 아렀으나 예수 오심으로 개성을 살려 동정도 직힐 수 있는 유권을 주신 것이다(눅 21:1-4). 연보궤 옆에서 보셨다. 물질쓰는 것. 그 마음과 정성을 보신 것이다. 상대자의 영혼과 자긔의 영혼을 무시하지 않을진덴 범죄할 수 없다.”(1957.8.25)

 

예수님 이전에 여성은 남성의 종속물로 남성에게 정절을 바쳤으나 예수님 오신 후 여성은 남성에게서 독립되어 정절을 지킬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아니, 예수님께 정절을 바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육신의 남자를 주인으로 섬기던 여인이 영적인 주님을 섬기며 그 정절을 지켜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결이든, 정절이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오직 참 주인에 대한 사랑과 충성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지조가 흐려져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상태가 됩니다. 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는 몇이던지 책망하야 경계하노니 그런고로 네가 열심을 내여 회개하라. 묵 3;19- 미지근= 未知根 근본문제를 몰랐다. 차던지 더웁던지 하라= 예수께서는 불타기를 바라신다. 탈것 타야 함. 聽= 드를 청 耳王十四一心= 聽. 이왕耳王= 임금의 귀, 즉 성신의 귀. 십사일심十死一心= 십자가에 죽어야 한 마음이 된다는 뜻이다. 예수 안에 다른 것 들면 갈리고 만다. 정절을 빼놓고 다른 것 다 잘 했을지라도 쓸 대 없다. 근본문제(정절)에 타협했으면 힘이 없다. 정욕이 십자가에 정복을 당해서 힘을 못 써야 말할 자격이 있다.”(1957.10.14)

 

선생님은 ‘미지근’을 ‘未知根’으로 표기하며 “뿌리를 알지 못함”, 즉 “근본에 이르지 못한 상태”로 풀이하였습니다. 신앙과 수도의 근본인 예수님만 제대로 알았더라면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상태는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내여 회개하라.”는 말은 “근본을 확실하게 알고 거기 귀의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自己否定)의 삶입니다. 선생님은 본문 마지막 구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계 3:22)에 나오는 ‘들을’ 청(聽) 자를 파자(破字)하여(耳王十四一心) “성신의 가르치심대로 자기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그분과 한 마음이 된다.”고 풀이하셨습니다. 그래야 예수님께 정절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광원은 이처럼 '예수 정절'을 지키며 살기 원하는 이들이 모여 사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동광원의 순결과 정절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바깥’에서 “동광원은 가정을 파괴하고 결혼을 부인한다.”며 이단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동광원 정신과 사역에 대해 동감하는 많은 기성교회 목회자와 교인들도 ‘동정과 순결’ 대목에서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거리를 유지하며 지켜보았습니다. 선생님도 그 점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2장에 나오는 두아디라교회의 예를 들면서, 경계해야 할 ‘이세벨의 교훈’에 대해 이렇게 풀이하였습니다.

 

“이세벨의 교훈= 행음과 우상섬기기다. 성경의 원리가 이세벨의 교훈을 제하라는 것인데 원리를 안 동광원을 이단이라 칭한다. 그러나 원리를 안 자로서는 어느 경지에서라도 직힐 것 뿐입니다(정절도 법이다). 법을 통하지 않고는 사랑이 보장 안 됨으로 정절을 고조하는 것이다. 연락의 근원(정욕) 男女가 아니고는 안 됨으로 정절을 생명시하라고 고조하는 것이다. 양심이 ?여야 사랑이 성립된다. 양심을 짚밥고는 정신이 깨나지를 안는다. 성신이 이끄는대로 순종만 하면 양심이 깨난다. 하나任께서는 각자의게 높은 理想을 주셨다. 그러나 육체의 쾌락과 안목의 정욕에 못 ?여 짐승과 같이 되었다. 男女는 시금석이다. 試金石= 금을 시험하는 돌. 내 남을 드려다 보구서는 락심않을 자 없다. 그러나 자비하심을 의지해야 꾸준히 인내로써 소망삼고 나아가면 이뤄주심에 락심치 말지라.”(1957.10.12)

 

성경에 의하면 결혼도 법이고 동정(童貞)도 법입니다. 가정도 법이고 독신도 법입니다. 어떤 경우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이상을 실현하여 주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광원은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일반적인’ 길보다, 동정과 순결을 지키며 끊임없이 육체의 정욕과 싸워야 하는 ‘좁은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공님이나 이현필 선생님이 결혼도 해보고 가정도 꾸려보았으나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께 완전한 충성을 바치는데 순결과 정절보다 나은 길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결혼을 파(破)하고 독신으로 사셨으며, 독신으로 들어온 제자들에겐 정절을 지키도록 권면, 또 권면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염되지 않은 몸과 마음을 지켜 온전한 형태로 주님께 드리고 싶은 신앙 열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순진무구(純眞無垢)하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시기 위해서라도 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해야만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한번은 흰 눈 덮인 자연에 쏟아지는 햇살을 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지구는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주任 계심으로 참 빛이신 주任은 지구 우에 발을 디디였습니다. 저는 어두운 일, 빛을 등진 일을 합니다. 참 빛이신 주任 앞에서 무엄하게도 어두운 짓을 범한 자입니다. 제 마음은 낮고 천하고 더러웠습니다. 개보다 못하고 도야지보다 못했습니다. 햇빛보다 밝으신 주任이시여. 제 맘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나 주여 제 맘 속 청결히 하옵시고 좌정하옵소서. 마음의 주인이 되시오며 왕이 되시옵소서. 오- 제 마음의 하나님 임금이시여. 주任 계심으로 마음은 빛을 보고 찰란해 질 것이며 가장 맑고 거륵해지며 깨끗하고 순결해 질 것입니다.”(1956.2.1)

 

‘순결 유지’- 그것은 선생님의 평생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 기도를 잊지 말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3.5 경건과 수련

선생님은 당신 자신을 ‘의로운 자’, ‘완전한 자’, ‘거룩한 자’로 여기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언제나 ‘죄인’이었고 ‘탕자’였으며 ‘부족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은총에 사로잡혀 살기를, 한없이 낮아지고 낮아지기를 원하셨습니다. 1956년 2월에 드리신 기도입니다.

 

“죄를 지어도 주님은 버리시지 않으심은 아버지를 위하사 죄인을 사셧기 때문으로 소이다.

죄 많은 곳에 은혜 풍성하심은 죄 지으면 주님의 마음이 더 괴로워 하심으로 소이다.

죄 지은 자식 탕자의 목을 껴안으신 주님, 주여 그 사랑을 기억케 하소서.

성신이시여. 항상 깨닷게 인도하신 주님. 그 사랑 잊지 않도록 늘 인도 합소서.

이적에 믿는 약한 자로 소이다. 늘 잊고 않 믿는 죄에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

굳게 믿음 주옵소서.“(1956.2.3)

 

탕자인 줄 알면서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 죄인인 줄 알면서 의를 구하는 것, 부족한 줄 알면서 완전을 사모하는 것, 약한 줄 알면서 강한 능력에 사로잡히길 원하는 것. 이것이 그분을 모시고 따르는 신앙의 근본이고 그것을 좀 더 철저하게 해보려고 동광원에 들어온 수도자들의 변할 수 없는 소원입니다. 동광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분명한 목표를 세워야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행선에는 목표가 있듯이 우리의게는 동정의 목표가 있다. 태평양을 행선하는 배가 북극성을 목표하듯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 같이 거륵케 되기를 목표하는 것이다. 진실을 힘쓰라, 진실만 위주하면 굶어죽어도 하나任께서 기뻐하신다. 거짓으로 태산을 쌓으나 천사가 와서 그 거짓부터 뽀부고 태산을 무너뜨린다. 참 그리스챤이면 목숨을 더하기 위해 그 시간에 할 일 미루지 말지라. 배운 바를 실행치 않으면 교만만 더해갈 뿐이다. 선이 심해갈수록 악도 심하다. 악한 자를 선대하는 것이 악을 사랑하는 것이다. 재산이 사람의게 행복을 주지는 못한다. 오직 환난과 한탄뿐이다. 행복되다고 생각하는 자는 행복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 좋은 의식 안는 것이 우리 집의 자랑이오 名利를 웃보는 게 내 버릇인데 여지긋 바람 물 주렸으니 죄받는 듯하여라. 배의게, 淫亂의게, 사람의게 둘려서는 안 된다. 犯罪치 않으려고 항시 염려하고 사러야 한다. 情操(喜怒哀樂)를 잘 가저야 자유할 수 있다. 自己를 다스리는 것.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는 것이 참 자유다. 내 몸에 맑은 알짬, 신을 기르는 물이 있는데 몸 밖에 나가면 더러워짐니다. 농사 질 줄 모르면 범죄치 안코 삶 수 없다.”(1956.8.13)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마다 一生一死는 반다시 있는 것인즉 최후까지 예수님 계명을 직히다가 죽게 되는 것은 큰 영광이요 자랑이다. 최후까지 온유한 맘으로 대할 것이며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 같이 사랑하심을 아는 것이 곧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 계명을 직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앎기 위해 사는 것이며 그 사랑에 감격해서 사라야 합니다. 내 영혼이 믿음에 몰려왓으니 동기는 믿음, 방법은 사랑, 목적은 예수의 계명 때문에 죽기 위해서 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따뜹하고 목적이 빛나는 일이랴(정절).”(1957.7.28)

 

“사랑하라.”는 예수님 계명을 몸에 모시고 살기 위해 따라 나선 구도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떠나온 것을 더 이상 연연해하거나 그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육신의 몸을 갖고 동광원에 들어와 겸손과 순종, 가난과 고난의 공동체생활을 하다보면 편안하고 안일했던 과거생활이 그리워지고 자기선택을 후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들어 동광원 생활을 설명하였습니다.

 

“나사로= 사사로운 길에서 떠났다는 뜻이다. 잘 믿는 절정의 최고 목표를 나사로의 생활로 나타낸 것이다. 또 연락을 부자의게 양보한 기록을 나사로의 비유로써 나타낸 것이다. 엡 4:9-10. 생활이 저급할수록 심령은 맑어진다. 저급한 생활 속에서마니 참 만족이 있는 것이다. 부자의 요청= ‘나가서 전도하겠다고 물 한 방울을 혀에 대 달라.’ 드러줄 법도 십지마는 그 사이는 음란과 연락[宴樂]과 착취의 구렁이가 있는 고로 용납이 안 된다. 남을 착취하지 안코는 연락을 못한다. 사치도 음란에서 시작됨에 사치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를 위해 낮은 생활 한 것만큼 평안과 위안이 옴으로 간난을 푯대로 하는 것이다. 겸손한 자일수록 저급한 생활을 하게 된다. 성인들의 생애를 회고하라.“(1957.10.24)

 

사사로운 길, 사로(私路)를 떠난 나, 그것이 나사로란 말입니다. 부귀와 영화, 평안과 안일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이 수도생활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버린 그것에 대한 연민입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사도들에게 자기 재산을 모두 바치기로 결심을 한 후,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재산 일부를 빼돌렸다가 들통이 나 비참한 최후를 맞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행 5:1-11)를 들어 경고하였습니다.

 

“자긔 위해 바친 재물 성신의 감동으로 거절하신 것이다. 자긔의 행위 성신께 드러나매 심령이 놀래여 혼이 떠났다. 성신께서 숨쉬지 안케 하시면 살 수 없다. 초대교회 출발은 이와 같이 깨끗했든 것이다. 직분 받기 위해 받치는 재물은 받어서는 안 되며 삼가야 합니다. 돈 가지고 구원의 꿈도 못 꾼다. 사람을 속임이 아니오 성신을 속임으로 거사리면 죽음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고 새 술은 새 가죽 부대에 넣어라. 새 정신에 새로운 형식 있어야 함. 새롭고 깨끗한 정신을 새 가죽 부대에 넣으라는 것이다. 예전 것은 까마득하게 잊으라는 것이 아니요 예전에 귀한 것은 본 삼어 이행해야 합니다. 거짓 없이 깨끗하니 지내온 초대교회인의 마음과 정성으로 떡을 뗀 것 본 삼어야 함.”(1957.8.4)

 

선생님은 사심과 사욕 없이 주님의 계명만 수행했던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 동광원에서 부활되기를 바랐습니다. 그 전통은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 ‘성인’(聖人)들의 사적으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동광원에서는 말씀 공부와 함께 성인들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은 ‘나병환자들의 아버지’ 성 다미엔을 종종 언급하였습니다.

 

“예수 가신 한적한 곳 그 뜻대로 가야 합니다. 평안하기를 구하지 말지라. 예수님 가진 멸시와 조롱과 고생 속에서 사셨음에 그 본을 받아 그 제자와 같이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평안을 구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울 왕은 자긔 뜻대로 삶으로 물리침을 당했다. 방종은 원욕이요 자유는 진리다. 성 다미엔. 다미엔의 자아혁명을 성취한 원인은 성경과 십자가만 잡고 기구로써 이루었다. 그는 광고주의자가 아니였고 하나任과 문둥병자를 섬기기에만 치중했다. 다미엔의 생애는 불행 속에 뭍었으나 참 기쁜 속에서 깨끗하게 무명소자로 승리했든 것이다. 자긔 개조 외에 더 큰 혁명은 업나니라.”(1957.10.24)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을까봐 조바심이 나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를 알리는 ‘광고주의자’(廣告主義者)들이 많은 세상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사라지는 무명소자(無名小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예가 다미엔인데 다미엔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개조(自己改造)와 자아 혁명(自我革命)에 성공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기개조와 자아혁명을 이루기 위한 훈련장으로 동광원은 존재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꿈을 지닌 제자들에게 ‘마음공부’부터 먼저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선생님은 마음공부의 필요성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공부의 목적= 마음 맑어지기 위해. 풍성히 삶을 얻기 위해. 생의 향상을 위해 공부합니다. 마음 맑음은 지혜 얻는 일이다. 하나任의 지혜는 선함으로 하나任 앞과 사람 앞에 고임을 받는다. 고임= 높임 받는다는 뜻. 자긔가 자긔의게 당한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할 줄 아라야 고임을 받습니다. 눈으로 볼 줄 앎고 귀로 드를 줄 앎면 이해를 잘할 수 있습니다. 과학= 실지사실을 토대로 하여 잘 아러감으로 하는 공부. 신학= 신학의 필요는 지식의 근본이니 공부할 필요를 느껴야 합니다. 과학은 물질향상에 쓰임받습니다. 철학= 추상(짐작)에서 시작해서 아러가는 것을 철학이라고 합니다. 참 삶을 앎지 못함으로 참 죽음도 앎 수 없다. 허망하게 삶으로 허망하게 죽나니 정신생활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철학공부 하는 것이다. 종교는 구원(힘 주심과 지혜 주심과 살려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정신과 육체가 건실함으로 풍성하니 삶 수 있다. 영혼이 정신을 쓰고 정신이 몸을 써서 일을 합니다. 힘만 가지고 해결하는 것은 소나 말과 같다.”(1956.4.20)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선문(禪問)을 던지셨습니다.

“마음 그대로 그린 그림 마음에 그린 행동인가?

마음 그대로 글을 쓰면 마음에 글은 사랑인가?

마음 그대로 말을 하면 마음에 말은 올음인가?“(1956.2.28)

 

마음을 다스려야 마음으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잘 다스린 마음엔 평화가 솟아나지만 다스리지 못하면 불안과 불평만 살아납니다.

“내 고집 세움으로 즉석에서는 좋을지언정 후회뿐일 것이며 불안뿐이다. 순종의 결과는 불안이다. 자긔 믿으라는 예수인데 남만 보고 권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나에게 거역하는 자는 내게 큰 공부과정이 된다. 내 맘속에 평화를 원하면 잘 참는 연습하라. 선에 둘리지 말라. 욕심 있는 자가 큰일을 해도 나라를 망칠 수가 있다.”(1956.3.20)

 

이런 마음의 평화를 연습하고, 지키는 것이 수도와 수련 생활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선생님도 그 점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입니다.

“동광원 드러오기 전에는 불안과 공포에 떨든 마음이엿는데 하나任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어 평안함을 얻어 깁쁨으로 사라오는 도중에 그 평안을 보존 못하여 은혜를 망각하고 교만함으로 모두 파라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다. 평안할수록 한층 더 경외하고 믿음이 든든해야 할 터인데 교만과 사치로 다 판 결과는 수치와 멸망이 뒤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무명베와 고무신도 제대로 못 신을 때는 오히려 불평이 없었다. 그러나 사치의 맘을 채워준 결과는 사람의 힘으로는 헤여날 수 없는 끄나풀에 매여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도 회개는커녕 달리 평안한 길을 택하려 하나 구해지는 것도 아니요 불안과 죽음만 자초하는 것이다.”(1957.8.18)

 

수도생활을 하다가 불평과 불만, 불안이 생기는 것은 먹고, 입을 것이 없어서도,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평화와 만족의 근원이신 주님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任만 의뢰해야 하겠는데 사람 中心으로 모이니 힘이 없다. 거륵을 이루고저 하는 자는 범죄 후 자복과 동시 회개치 않을 수 없다. 아부라함= 하나님 계신 줄 않믿엇을진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지도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약속도 않으셨을 것이다. 신실하심과 참되심을 믿는 자의게 쌍방계획이 있는 것이다. 약속을 믿고 오래 기다리는 자의게 약속하시며 믿음이 굳어지며 의롭다 하심을 입는다. 의롭다 하심을 입은 증거는 선한 행실이다.”(1957.8.30)

 

세상 단체들은 사람 중심으로 모인 것이지만 교회와 수도원은 하나님 중심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였다 하면서도 점점 사람 중심으로 운영되고 일을 하다보면 갈등도 생기고 불평도 생깁니다. 그러면 뛰쳐나가려는 사람도 생기고 그를 붙들어 앉히려는 사람도 생깁니다. 그래서 법도 규정도 필요하고 그걸 수행하는 직원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 곳에는 법도, 규정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법이고 규정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와도 막을 사람 없고, 나가는 사람 막는 일도 없습니다. 그저 자유만 있을 뿐입니다. 선생님이 1957년 광복절에 주신 말씀입니다.

 

“심령에 자유라야 참 자유지 정치나 국가적이나 경제적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안 후부터는 자유가 없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안 후부터는 그 뒤에는 비난과 곤고, 모욕, 능멸이 따르기를 장미꽃에 가시찌르 듯 했으나 그의 심령은 참 자유가 있었다. 모든 사람의 종 될 수 있는 자는 참 자유자이다. 체조선수 되기 전에는 자유가 없다. 기축에 의해 순종함으로 선수가 되듯 하나님의 법도에서 버서나면 참 자유자가 아니라 죄의 종이 된다. 신의 법도 안에서 사는 것이 참 자유자다. 예수를 섬기는 것은 예수에 종 된 것이요 예수에 종 되면 심령에 참 자유한다. 신께서 주신 자유는 빼아슬 자가 없다.”(1957.8.15)

 

그런 ‘자유의 나라’에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가둘 사람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광원과 귀일원에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계명산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울타리치여벌리고 鬱他理致予罰理苦 롬 7:22-25, 엡 2:11-18, 마 6:24

방애안자 防哀安自 마 6:19-20, 히 4:10. 마 6:6 고후 6장

비지먹지마시고 非志勢旨魔視苦 마 4:9-10. 마 16:22-23

진지자시요 眞志自示要 살전 4:1-5, 요 4:34, 벳전 3:117. 4:1-2. 히 11:24-27, 35- 히 4:1-5

하로고생 賀勞苦生 벳전 3:13=16, 히 12:4-9, 마 20:1-16, 잠 3:11-12

하로만족 下路滿足 눅 16:25-26, 요 2:9, 요 13;14-17, 엡 4:9-10. 마 6:34. 11:28-30 딤후 2:3-23.”(1957.10.18)

 

“울타리 치워 버리고 방에 앉아, 비지 먹지 마시고 진지 자시오. 하루 고생, 하루 만족입니다.” 언뜻 들으면 “무소유의 삶으로 하루하루 만족하며 살자.”는 원론적인 말씀처럼 들리나 한자로 바꾸어 쓰신 문장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잡한 다른 이치를 좇아 살면 벌과 고통이지만(鬱他理致予罰理苦) 그걸 버리고 애통하며 살면 평안이 찾아옵니다(防哀安自). 옳지 못한 생각과 세력은 마귀가 보여주는 고통이니(非志勢旨魔視苦) 참다운 뜻을 이제 펴 보이시오(眞志自示要). 축하받으며 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賀勞苦生) 낮은 곳으로 가는 길은 만족이 됩니다(下路滿足).”

 

복잡하기만 한 세상 이치와 만족을 모르는 세상 욕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단순한 삶과 의지. 그것이 동광원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경옥 교수가 이공은 만난 후 터득한 지혜, “복잡에서 단순으로!”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또 이런 말씀도 주셨습니다.

 

“어덕혜삼리가 그락저락삼리다 於德惠參理可 其樂底落參離多 창 1:6-8, 엡 2:1-10. 창 1:4-5, 요 1:4-5, 3:19, 마 6:22-23

조각조각주은 의복입고 彫刻彫刻主恩 義服入苦 롬 7:22-25, 엡 2:11-18. 마 6:24, 롬 5:3,4 벳전 2:21 히 12:10-13. 히 5:7,8

지극히 자근자로 처하자 志極喜子近者路 處下者 마 25:38-40.”(1957.10.16)

 

이것도, “어떻게 삽니까? 그럭저럭 삽니다. 조각 조각 주은 의복 입고 지극히 작은 자로 처하자.”로 읽을 수 있지만 한자 풀이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리의 은혜 덕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於德惠參理可). 그 낙원에서 떨어지니 빛과 생명과 자유와 목적을 잃고 인격을 상실한 것이다(其樂底落參離多). 조각된 조각품이 주님의 의로운 온유하고 겸손한 옷을 입고 쌍십자가[苦]를 지고((彫刻彫刻主恩義服入苦)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예수께 가까이 나아가 아래 길로 내려가서(志極喜子近者路) 남을 받들어 섬기자(處下者)”

 

이제 동광원 사람들이 사모하며, 추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현필 선생님이 그러했고, 그의 스승 이공님이 그러했듯 오직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살며, 나누려는 사람들입니다. 환갑을 맞는 동광원과 귀일원의 존재 이유입니다.

 

3.6 구제와 봉사

사랑은 받으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은총은 받으면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그 받은 사랑과 은총이 크면 클수록 나눔과 섬김의 봉사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동광원과 귀일원 사람들의 구제와 봉사 사역은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사람의 숨에 비유하였습니다.

 

“사랑은 호흡과 같다. 드러마시는 숨이 받는 사랑이라면 내쉬는 숨은 남을 사랑하라는 숨일 것이다. 숨은 쉬고 내쉬지 않으면 송장과 같듯 받은 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면 송장과 같다.”(1956.3.11)

 

들숨이 받는 은총이라면 날숨은 나누는 사랑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 이여 쉰다. 숨을 안 쉬면 송장이다, 그럼으로 숨 쉬는 동안은 예수 같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숨을 쉬려니 늘 탄식이다. 고통만 더해갈 뿐이다. 예수는 예술로 속화되는 길이요 몸으로 정신으로 지혜로 도라가면 참 예술이다. 殉敎= 순교. 따라 죽는다. 따라 죽음이 있어야 성신 받을 터인데 따라 죽을려고는(진리로) 안하고 입으로만 구하니 성신은 불가능하다.”(1957.10.17)

 

예수의 ‘예’를 ‘이여’(곧바로), ‘수’를 ‘숨’(ruach)으로 풀이하여 받는 즉시, 그대로 베풀면서 사는 것을 ‘예수 호흡’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호흡을 하며 사는 사람의 삶을 ‘예술’이라 하였습니다. 예수 정신, 예수 마음으로 들고나며 사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 매일 매일 나를 죽이는 순교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 순교 생활을 하는 ‘예수 사람’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고 사랑할 대상으로서 이웃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을 자기 부모와 형제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믿지 안은 증거= 내 부모 형제자매로 보여지지 안는 것. 부모자매로 보여지기 전 사랑한다는 것은 간사한 편벽된 사랑. 사랑도 아니다. 아버지 얼골 뵈올려고 노력할 것. 상한 갈대도 꺾지 안으시고 꺼저가는 등불도 끄지 안으시는 마음 얼골 뵈올려고 노력해야 하며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시거나 불평이나 들래지 안으신 예수님 마음씨 뵈옵고자 힘쓸 것입니다.”(1956.3.6)

 

사람뿐 아닙니다. 천지 만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중한 뜻을 머금은 ‘피조물’로 보이면서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만물은 아버지를 알게 하기 위해 지으셨으니 만물을 볼 때에 아버지 성품 보듯 느끼지 않을진덴 편벽, 미혹, 죄로 보여진 것이다. 모든 만물과 사람 본바탕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소생이다, 그럼으로 아버지 성품 기억 안음으로 짐승같이 되어짐으로 짐승 같은 행동과 습관을 하게 된다. 악한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고처지기 전에는 구원은 없다, 그럼으로 먼저 마음이 말가저야 성품과 습관은 고쳐지나니 우에를 바라보는 마음 늘 있고 땅을 보는 마음 제함으로써 성품이 고처저서 구원있는 만물과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 성품 깨다르면 참 인격을 보는 자요 바른 견해다. 아버지의 성품을 보고야 어찌써 초목도 함부로 못할 것이며 더구나 형제는 멸시치 못할 것이다.”(1956.3.6)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품고 있는 자연을 어찌 함부로 대할 수 있으며,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이웃을 어찌 멸시하겠습니까? 참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렇게는 못합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마련해 주신 자연이고, 보내주신 이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보살피되 상대방의 수준과 능력을 감안하여 어린아이처럼 보듬어주어야 합니다.

 

“음식을 주되 상대자의 소화능력을 생각지 안코 주는 것은 맹목적인 사랑이다. 밝은 정성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고는 손해도 되려니와 허망해진다. 음식을 분간 못해 병해를 방지못하며 머리가 아둔해 집니다. 의식침(衣食寢)을 함부로 하고는 바르게 못 삶며 정신이 맑어지지 않는다. 생활 단정하게 하는 것은 곧 예배다.”(1957.8.10)

 

구제나 봉사도 자기중심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눔과 섬김도 철저하게 그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행동과 생활을 통해 그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양심으로 증거하고 몸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입으로 증거하고 또 해석해야 아라드름. 생명의 말씀은 아는 사람부터 실행해야 함.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심령의 양식이다. 힘이다. 밝히 아렀다는 것은 내 마음 드려다 볼 줄 아는 것임. 양심 바르지 않고 성경 보는 것은 말씀을 능갈려 버림과 같음. 내 행위는 사랑의 율법을 집밟는 것 아닌가 반성하라. 생명의 말씀임을 앎고 원하는 마음 있으면 직힐 수 있는 능력 주 허락하심.”(1956.1.10)

 

결국 의지가 문제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알고 원하는 마음 있으면 지킬 수 있는 능력 주신다.” 바로 이처럼 ‘주시는 능력’으로 형제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말씀이 내 안에 있음을 증명하는 길입니다. 선생님은 동광원 식구들에게 봉사를 하든, 구제를 하든 철저하게 그분 안에서, 그분이 주시는 능력으로 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자기를 내세우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를 포도나무 가지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즉접 아버지의게서 진액을 받을 것. 곁가지에서 매치면 괭이가 된다. 구제할 때 외인의게 ?기나지 않게 하기 위하야 오른 손이 하는 것 왼 손이 모르게 할 것임니다. 곁가지= 사람의게 엉키어서 열매 맺을라 말고 원가지에 붙어서 열매 맺을 것. 내 아버지가 포도원 농부라. 사람은 사람을 껍질은 만들 수 있으나 마음까지 변화식힐 수 없다. 우리가 이상한 일 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살려고 할 것이 아니고 아버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깨다라 순종할 것이다. 큰 일 할랴고 말고 예수 안에 있을려고 힘쓸 것이다. 예수 안에 있으면 자신은 감촤지나 예수를 통한 향내가 난다. 東光園이라 나타내지 말고 이름 없는 소자가 됩시다(無名小子). 하나님의 자녀로만 앎게 이름 없는 자 될 것(대가를 구하지 말 것).”(1956.2.14)

 

“동광원 이름 드러내지 말고 이름 없는 작은 자가 됩시다.”- ‘무명 소자’가 된다는 것은 곧 대가와 평가를 기대하지 않고 일하는 것입니다. 누가 한 줄도 모르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의 실천입니다. 세상 눈치를 보아야 하는 어른들은 그렇게 하기 힘들지만 천국 주인공인 어린 아이들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린 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눅 18:15-17)는 말씀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어린 아해는 큰일은 못하나 하나任 섬기는데는 보수를 바라는 맘이 없다. 복 받기 위해 섬기는 것 아니기에 어린 아해를 금치 말라 하신 것이다. 사랑을 하되 도리여서 해야 하며 일을 해도 ? 받기 위해 일하지 말 것은 자신의게 손해가 많음이라. 천국은 이해타산 모르는 자의 것입니다.”(1957.10.24)]

 

천국은 자기가 받을 몫을 계산하고 따지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받을 것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저 일하는 것 자체에 의미와 가치를 두며 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선생님은 예수님의 포도원 일꾼 비유(마 20:1-16)를 들어 그것을 설명하였습니다.

 

“오후 다섯 시에 부름을 받은 자는 일하고 싶엇든 그만큼 마음 준비가 되어 있음에 불러준 것이 고마워서 있는 정성을 다 했을 것이며 대가를(삯을) 구하는 것보다 일?여 준 것만 감사했을 것이다, 그것이 즉 일삯이다. 일하는 것은 도리로 해야지 삯을 바라는 맘은 자신이 비루해집니다. 그 마음과 정성만 보시는 것이다. 먼저 부름 받은 자의 심리상태. 욕심. ?기. 교만. 원망 등. 작정한 그대로만 받어야 할 터인데 주인을 책망하는 교만된 맘이다.”(1957.10.20)

 

이른 새벽, 제일 처음 포도원에 들어왔던 일꾼은 받은 ‘일당’에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죄에다, 주님의 결정과 행위를 평가하고 책망하는 교만의 죄까지 지었습니다. 세속에서 봉사하고 구제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보수도 많이 주기 때문에 돈 욕심, 일 욕심에 사로잡혀 자기를 잃어버리고 일만하다 자기도 망하고 일도 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구제와 봉사 활동을 하면서도 수시로 자기를 돌아보며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약 1:27) 경계하고, 경책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도시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동광원 식구들을 종종 산 속으로 불러들여 말씀 읽고, 기도하도록 지시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진리의 공부는= 자기 ?이는 극기심을 양성하는 것임. 자긔를 못 ?이고 일만할려고 힘쓰는 것은 헛세월 보내는 것뿐이다. 거짓된 세상에서 참을 차저야 사는 참 가치가 있다. 나는 일선장병이라는 것, 또는 진리의 용사임을 망각치 말 것입니다.”(1956.3.3)

 

귀일원에서 일하다 지치고 힘들면 동광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동광원에 들어가 말씀공부와 기도생활로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면 다시 귀일원에 나와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동광원과 귀일원 관계는 들숨과 날숨처럼, ‘주고받는’ 자동제어(feedback) 장치라 하겠습니다.

 

 

4. 맺음 글: 다시 자기를 돌아볼 뿐

미국 신학자 틸리히(P. Tillich)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 “문화의 종교의 형식이고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다.”(culture is the form of religion and religion the substance of culture)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종교든 종교는 문화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문화는 종교를 담지 않으면 그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종교와 문화의 이러한 관계를 동광원과 귀일원에 적용시켜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동광원과 귀일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고, 등잔의 불과 빛 같으며, 달팽이의 속살과 껍질 같고, 자동차로 치면 엔진과 바퀴 같습니다. 동광원 없이 귀일원을 설명할 수 없고 귀일원 사역이 아니고는 동광원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동광원과 귀일원의 이런 불가분(不可分), 상생상보(相生相補) 관계는 1949년 동광원을 처음 시작할 때 내려 주신 말씀에 이미 계시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라.”(약 1:27)

이 말씀에 근거하여 그동안 귀일원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보는 일”에, 동광원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에 매진해 왔습니다. 그동안 귀일원의 사회복지 사역과 동광원의 수도생활은 비교적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며 나름대로 ‘아름다운’ 결실을 맺어왔습니다. 그런 6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육십 평생의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처음 ‘출발점’으로 돌아와 ‘환갑’을 맞은 귀일원과 동광원 식구들과 함께 동광원과 귀일원을 시작하신 이현필 선생님의 ‘50년 전’ 말씀을 <강의 노트>를 통해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비추어 동광원과 귀일원의 지나온 역사 흔적을 정리하는 내내 떠오른 말씀이 있습니다. 밧모섬에 유배된 주님의 시도 요한이 환상 중에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아시아의 ‘모교회’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2-5)

 

수 십 가지 잘한 것이 있더라도 치명적인 한 가지 실수 때문에 책망 받은 교회. 그것이 어찌 에베소교회뿐이겠습니까? 오늘 한국교회가 이런 책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과연 한국교회는 에베소교회처럼 ‘자랑거리’가 많습니다. 고난과 수난의 역사 속에서 자랑스런 순교자의 전통을 간직한 교회, 한 세기 남짓한 짧은 세월에 국민의 25%를 교인으로 만들어 세계 선교의 기적을 이룩한 교회, 마을마다 예배당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교회도 많고 목회자도 많아 미국교회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가장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는 교회. 과연 자랑거리가 많습니다. 정통 교리를 수호한다는 명분에서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과 사이비를 또 얼마나 많이 만들어 냈습니까?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 현실을 들여다보면 자랑만 하기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구석이 너무나 많은 것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윤리적 타락으로 떨어질 대로 떨어진 목회자의 권위는 둘째 치고, 자기 치장과 교세 확장에만 눈이 어두운 교회는 일반사회에서 그 지도력을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모두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에서 비롯된 오류요, 타락입니다. 그러니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처음 행위’를 다시 하는 것 외에 병든 오늘의 교회를 치유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남 탓할 여유는 없습니다. 남을 판단할 만큼 내 자신이 깨끗지 못한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강의 노트>를 보면, 선생님은 1957년 10월, 집중적으로 요한계시록을 가르치셨는데 미리 내다보신 듯, 에베소교회에 대한 책망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일곱 촉대= 우리에게도 일곱 지혜가 있다. 일곱 지혜를 바르게 쓰면 (양심) 만사가 바르고 빛이 난다. 엡에소교회= 예리한 비판으로 니골나당을 미워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은 잘 했으나 처음 사랑을 바린 것을 책망하심. 남의 비판만 힘쓰다가 사랑까지 잊을까 조심하라는 책망이다.”(1957.10.7)

 

남을 비판하다 사랑을 잊을까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고 자기를 판단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의인(義人) 의식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죄인(罪人) 의식이라야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맥락에서 회개에 철저했던 서머나교회가 받은 칭찬을 설명하였습니다.

 

“서머나교회= 죄인 됨을 깨다라 기구함을 드르심니다, 정신 속알 양심 바러야 유대인이지 행동여하를 살펴 론단치 말 것이다. 죽엇다 사러나신 예수의 생애= 죽을 것이 죽음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슬 것이 서야 교회다. 양심 직히는 것이 바른 교회임으로 곧 자신이 교회이다. 희생이 있어야 생명이 확대합니다. 자긔 버리고 가릴 것 가릴 것이지 남의 허물 찻다가 사랑까지 상실할가 경고하신 것이다. 즉 자긔에게서만 사색할 것이다.”(1957.10.7)

 

“자기만 돌아볼 뿐이다.” - 세상이 아무리 시끄럽고 혼탁해도,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실망적인 행동을 보일지라도, 교회가 교회 구실을 못하고 추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거기 마음을 빼앗기거나 동요하지 말고 우리는 우리 길을 갈 뿐입니다. 보다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쳐서 ‘본디’를 잊어버리지나 않았는지, ‘본질’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본바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살펴볼 뿐입니다. 그것이 환갑과 회갑을 맞은 귀일원과 동광원이 다시 찾아야 할 ‘甲’이고 회복해야 할 ‘甲’입니다. 곧 만물의 시작, 만물의 근원, 만물의 본질이신 ‘하나任’을 회복하고 모시는 일입니다. 복잡한 사업과 행사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사업과 행사의 근원이 되시는 ‘한 알’이신 분, 단순한 진리의 알갱이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처음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 하나(一)로 돌아가라고(歸) 오늘 우리에게 환갑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선생님이 1955년 성탄절에 주신 말씀입니다.

 

“ 1. 하날은 하나를 얻어야 맑습니다.

2. 따는 하나를 얻어야 평안합니다.

3. 신은 하나를 얻어야 신령합니다.

4. 골짝은 하나를 얻어야 참니다.

5. 만물은 하나를 얻어야 삶니다.”(195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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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1.23 00:19

    첫댓글 신앙을 믿지 않는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버린다는 생각은.... 괜찮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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