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KTSM 대표 최승호 묵상
열째 재앙 - 처음 난 것들의 죽음 (출 12:29-36)
◆ 열째 재앙 - 처음 난 것들의 죽음
(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애굽에 열째 재앙이 임했다. 출애굽을 위한 마지막 재앙이다. 사람이고 가축이고 가릴 것 없이 처음 난 것들이 다 죽었다. 처음 난 것들의 죽음은, 이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알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죽이신들, 우리는 왜 그렇게 하시느냐, 그러면 안 된다는 등의 말을 할 수 없다. 창조주의 고유 권리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질문하려거든, 일단 그분을 창조주와 만유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경외하는 마음부터 가져라. 외계인 대하듯이, 세상의 왕 대하듯이 대한다면, 어떤 질문도 항의도 할 자격이 없다. 그냥 건방진 것 뿐이다.
천사가 장자들을 칠 때, 기준은 애굽 사람이냐, 이스라엘 사람이냐가 아니었다. 가난하냐, 부자냐도 아니고, 선한 자냐 악한 자냐도 기준이 아니었다. 그의 신분도, 그의 외모도, 그의 행위도 기준이 아니고, 오직 딱 하나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느냐의 여부였다.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은 그 안에 애굽인이 들었건, 희대의 사기꾼이 들었건 관계없이 살았다. 추가 조건이 없었다. 그러나 피가 발라져 있지 않은 집은 예외 없이 처음 난 것들이 죽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오늘날 복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서 오직 하나만 보신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가? 추가 조건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다(계 7:14).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복음을 싫어한다. 그들은 이런 복음이 사람들의 윤리의식을 낮춘다고 염려한다. 그들은 돌아온 탕자의 형 노릇을 하려고 하며(눅 15:28), 죄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의 자리에 앉아 있다(마 9:11).
그러나 내가 주님을 알고 보니, 감옥에 간 희대의 악인이나, 나 자신이나 차이가 없었다. 나무에 사과가 많이 맺혔냐, 적게 맺혔냐의 차이일 뿐, 사과나무라는 사실은 똑같았다. 사과가 적게 맺혔다고, 애초에 근본이 다른 감나무인 척 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 바로가 굴복하다
(31)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바로의 장자마저 죽자, 공포가 바로를 비롯한 애굽 전역에 몰려왔다. 바로는 즉시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애굽에서 나갈 것을 허락했다. 그가 복수심은커녕, 오히려 모세와 아론에게 자기를 위해 축복해 줄 것을 요청했다(32). 하나님의 권능에 압도된 모습이다. 신처럼 행동했던 바로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는 파리 목숨보다 하찮은 존재임을 실감했다.
무교병을 만들기 위한 반죽을 미처 굽지도 못하고 옷을 보자기 삼아, 반죽을 싸서 어깨에 메었다. 그리고 남은 양식도 짐승과 수레에 실었다. 이들이 가진 양식은 한 달이면 다 떨어질 것이다(출 16 :1). 그리고 애굽 사람에게서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했는데, 공포에 압도된 애굽인들은 구하는 대로 내주었다. 애굽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공포고 두려운 존재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은총이며, 감사 제목이었다.
이들이 얻은 은금 패물은 후에 성막을 만들 때 크게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얻은 의복과 신발들은 무려 40년 동안 외부의 공급 없이 유지될 것이다. 40년 동안 옷이 해어지지 않고, 신발이 떨어지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기적이었다(신 8:4).
바로에게 쫓기듯이 애굽을 떠나게 된 이날이 히브리력으로 1월 15일 새벽이다. 무교절 첫날인 셈이다. 출애굽 첫날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은 첫날과 같다. 예수님의 보혈이 발라져 있는 우리를 마귀가 뜨거운 것을 잡은 듯 부랴부랴 손에서 놓고, 하나님께서 나를 채가신 날이다.
악한 영에게 시달리던 여중생이 있었다. 우리가 기도해도 쉽게 놓아 주질 않았다. 청년 시절에 이런 것을 처음 접한 나로서는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동(動)해서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석가모니를 아니?’ ‘그래’
‘친구냐?’ ‘그래’
‘예수님을 아니?’
그러자 갑자기 악한 영이 긴장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와 아무 상관 없어.’
이것은 성경에서 나온 것과 너무나 똑같았다.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3,24)
나는 이것을 녹음해서 들려주려고, 기도실 밖에 나가서 녹음기를 들고 단추를 눌렀다. 당시에 테이프가 돌아가는 거대한 녹음기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예수님이 너와 무슨 관계냐?’
그런데 그 여중생이 나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의 구주이십니다.’
순간 악한 영이 속이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아이가 흘리는 눈물을 보면서 나는 그 고백이 아이의 진심임을 알았다. 나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악한 영이 떠났다. 그 아이는 치유되었다. 예수님이 구주이신데, 감히 악한 영이 어떻게 그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주 예수님, 주님은 저의 구주이십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