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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3819]張台子여사雅號(아호) - 草玎(초정)
張台子여사草玎作號記
張台子여사는 인동 장씨(仁同 張氏)로 대구 동인동(東仁洞)에서
출생하여 현재는 흥해읍 초곡리(草谷里)에 거주하고 있으니
신도시, 그야말로 아파트가 우후죽순(雨後竹筍)!
비가 온 뒤에 여기저기 돋아나는 죽순이라는 뜻으로,
어떤 일이 많이 생겨 발전함을 이르는 말이다.
우연의 일치인가요?
仁同이 본관인 張여사가 현재 살고 있는 동네 초곡(草谷)역시
고려말 인동장씨인 보승랑장(保勝郞將) 장표(張彪)라는 분이
이 마을 초막(草幕)골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았으므로 이로 인하여 세월이 경과하니
초곡(草谷)이 인동장씨 집성촌이 되었다고 전한다.
草谷의 草(초)는 풀 초로 많이 알지만,
처음, 시작하다라는 의미가 있으니
玎(정)의 옥 소리 라는 뜻과 함께 모으면
맨처음 시작하여 들리는 아름다운 소리라는 의미로
草玎(초정)이라고 作號(작호)하였다.
욕심없는 마음으로 매사 즐겁게 살아가자는 좌우명(座右銘)같이
빛나는 명문의 후손답게 仁을 널리 실천하시어
필생의 소망을 이루는 日常을 창조하시길 바라며
2024년 가을에 古方 謹識(근지)
識-기록할 지.
사랑이 부모에게 미치면 효(孝)가 되고,
형제에게 미치면 우(友)가 되며,
남의 부모에게 미치면 제(悌)가 되고,
나라에 미치면 충(忠)이 된다.
사랑이 또 자녀에게 이르면 자(慈),
남의 자녀에 이르면 관(寬)이 되고,
나아가 백성에까지 이르게 되면 혜(惠)가 된다.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이라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오직 인자(仁者)라야만 사람을 좋아할 줄 알고
사람을 미워할 줄 안다고도 하였다.
인하다는 것은 무차별 사랑이 아니라 차별적 사랑으로,
착한 사람은 사랑하고 악한 사람은 미워하는 것이 인의 참사랑이다.
인동 장씨(仁同 張氏)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한국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성씨 중 하나로,
본관은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仁同)입니다.
고려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동 장씨는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명문 가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가문은 고려의 건국부터 조선 시대 성리학의 발전,
독립운동과 현대 정치까지 걸쳐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며 존경받아 왔습니다. 아래는 인동 장씨의 시조, 가문의 유래와 발전, 주요 인물,
그리고 가문의 현대적 기여에 대해 풍부하게 다룬 내용입니다.
시조: 장금용(張金用)
인동 장씨의 시조는 고려 초기의 장군 장금용(張金用)입니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공을 세운 인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 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역임하며
군사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고려 개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한 장금용은 고려 조정에서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그의 공로를 바탕으로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권력과 명예를 이어받았습니다.
장금용은 무예와 전략에서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한 충성과
절의로도 유명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각자의 시대에 맞게 학문과 무예,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경북 옥산(玉山) 지역에 정착하였고,
후손들이 이 지역을 본관으로 삼아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본관의 유래와 발전
인동 장씨의 본관은 원래 경상북도 옥산이었으나,
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옥산이 인동으로 개칭되면서 자연스럽게
본관도 인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인동 지역은 인동 장씨 가문의
중요한 세거지로 자리 잡았으며,
가문은 대를 이어 이 지역에서 번성해 왔습니다.
인동 장씨 가문은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을 중심으로 세거하였고,
이곳은 "천년의 터전"이라 불리며 가문에 있어 정신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입니다.
대구, 동인동(東仁洞)
대구부 동상면 용덕리 신동 남성리 등 일부가
1911년경 일본에 의해 동운정(東雲町)으로 개칭되었으며
1946년경 동인동으로 개칭하였다.
1963년에 구제(區制) 실시로
지금의 중구 동인 1,2동으로 개편되었다.
흥해읍 초곡리(草谷里)
윗사일과 아랫사일, 베다니아, 새마을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 윗사일 사일(士逸)이라 부른 것은 여말의 보승랑장(保勝郞將) 장표(張彪)가 이 마을 동북쪽 초막(草幕)골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았으므로 초곡(草谷), 혹은 사일(士逸)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하며, 또는 옛날 아랫사일 마을 어귀에 큰 숲이 있어서 왜구들의 눈에 잘 띄지 않고 선비들이 사는 안일한 마을이어서 사일(士逸)이라 했다 전한다. 인동장씨 집성촌으로 칠인정(七印亭)이 있는데, 나라에 우환이 닥칠 때면 소리내어 운다는 쌍간(雙幹)의 느티나무(가슴둘레 3m, 300여 년생)가 정자 앞에 있어 쌍규정(雙槻亭) 혹은 쌍괴정(雙槐亭)이라 부르기도 한다. 칠인정 앞에 작은 연못주 위에 300여 년생의 백일홍이 2그루 있다. 초막골에는 이 마을 입향조 장표의 묘와 재실이 있다. ○ 아랫사일 주로 인동장씨가 집성 세거하고 있다. 동제사를 지내왔다. 1965년 3월 1일에 개교하여 196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달전초등학교 초곡분교가 있었으나, 1994년 3월 1일 달전초등학교로 통합되었으며, 터는 매각되었다. 마을 입구에 사립 선린대학(善隣大學)과 연일정씨 재실 경모정(景慕亭)이 있다. ○ 새마을 월남전 참전해병 상이용사 정착마을로 야산을 개간하여 농업단지를 형성했던 곳이다. 아파트 단지가 건설 중이다. ○ 배다니아 음성나병환자 수용마을로서 70여 호가 양계를 주업으로 하며 살았으나, 주택단지 개발지구로 지정 되어서 1994년에 성곡리로 이주하였다. 죽도천주교회 공원묘지가 있다. |
仁
공자(孔子)의 중심 사상. 인은 ‘어질다’는 뜻으로,
선(善)의 근원이 되고 행(行)의 기본이 되는 것을 이른다.
≪설문 說文≫에 따르면, 인은 ‘인(人)’과 ‘이(二)’의 두 글자가 합해서 된 것이며,
‘친(親)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공자가 인을 실천 윤리의 기본 이념으로 삼으면서부터
그 의미는 일체의 덕목을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공자는 인을 설명할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인하는 것이라고 그 방법론을 주로 했을 뿐,
인이란 무엇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후세 학자들이 공자의 인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서
견해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공자가 인을 논할 때 다양한 용어들이 그에 대응된다.
그 중에서 주요한 것들을 간추려 보면,
효(孝)·제(悌)·예(禮)·충(忠)·서(恕)·경(敬)·공(恭)·관(寬)·신(信)·민(敏)·혜(惠)
·온량(溫良)·애인(愛人)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덕목들은 인을 형성하는 일부분일 뿐, 인 자체는 아니다.
공자가 구상하는 인의 개념은 이것들보다 더 근원적이요,
공자가 추구하는 인의 이상은 이것들을 초월하고 있다.
공자는 어느 제자도 인하다고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도 인하다고 자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후대 학자들은 인을 전덕(全德)이니 달덕(達德)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중선(衆善)의 근원이니 백행(百行)의 근본이라고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을 구성하는 여러 덕목 중에서 핵심은 사랑이다. 사랑이 부모에게 미치면 효가 되고, 형제에게 미치면 우(友)가 되며, 남의 부모에게 미치면 제가 되고, 나라에 미치면 충이 된다.
사랑이 또 자녀에게 이르면 자(慈), 남의 자녀에 이르면 관이 되고, 나아가 백성에까지 이르게 되면 혜가 된다. 효우제충(孝友悌忠)과 자관혜(慈寬惠)를 성실하게 실천하면 공·경·신·민·서는 자연히 그들 속에서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한유(韓愈)는 박애(博愛)를 일러서 인이라 하였다.
이처럼 한·당(漢唐) 이전의 사조는 실천상의 덕행에서 공자의 인 사상을 파악하려 하였다. 그런데 송대의 정주학에 이르면 관념상의 심성(心性)에서 인의 본질을 파악하게 된다. 정자(程子)는 “사람은 천지의 제정(儲精)에서 오행(五行)의 제일 우수한 것을 얻어 그 마음이 된 것이므로, 본래 진(眞)하고 정(靜)해 인·의·예·지·신·의 오성이 갖추어져 있다.”며, 애는 인에서 발한 정이라 하였다.
또한, 주희(朱熹)는 “인은 마음의 덕(心之德), 사랑의 이(愛之理)”라고 하면서, 성(性)의 견지에서 말하면 인이 사덕(四德 : 仁·義·禮·智)을 통섭(統攝)하고 있으며, 정의 견지에서 말하면 측은(惻隱)이 사단(四端 : 惻隱·羞惡·辭讓·是非)을 관통하고 있으므로, 따라서 인은 체(體)요, 애는 용(用)이라 하였다.
인이 발현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을 인이라 함은 불가하다는 견해다. 그리하여 한유가 박애를 인이라 한 것은 용을 들어 체라 한 것이라며 이를 배척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인을 ‘어질다’고 하는데, 어질다는 ‘얼이 짙다’에서 온 말로서 심성의 착함, 행위의 아름다움을 뜻한다. 어질다의 이론적 근거는 주자의 <인설 仁說>에 두고 있다. 이황(李滉)이 주희의 인설을 ≪성학십도 聖學十圖≫에 수록한 이후로 학자들 사이에 인에 대한 이론은 없는 편이었다.
정주학 이전의 인 사상이 형이하학적으로 실천하려는 동태 지향(動態指向)이었다면, 정주학 이후의 인 사상은 형이상학적으로 궁리하려는 정태 지향(靜態指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주학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한 뒤에 독행존덕(篤行尊德)라는 것을 학문의 정도로 삼기 때문에 인의 근원을 궁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을 실천면에서 살펴보면, 공자는 남을 사랑하는 것을 인 실천의 기점으로 삼고, 백성에게 널리 베풀어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인 실천의 종점으로 보았다. 이 인은 불교의 자비나 기독교의 박애와 다를 바가 없겠지만, 그 실천 방법상에 현저한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다.
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하려고 하면 인은 이르게 마련이며(仁遠乎哉 我欲仁 期仁至矣), 의·예·지와 함께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 인이란 사람이면 지·우(愚)·현(賢)·불초(不肖)를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주학에서는 인을 성이라고도 하였다.
다만, 사욕에 가리고 기질에 구애되어 이따금 정신이 혼미해져 망각하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인의 본성은 결코 마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을 실천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덕적 의무인 동시에 누구나 할 수 있는 가능한 심정인 것이다.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이라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오직 인자(仁者)라야만 사람을 좋아할 줄 알고 사람을 미워할 줄 안다고도 하였다. 인하다는 것은 무차별 사랑이 아니라 차별적 사랑으로, 착한 사람은 사랑하고 악한 사람은 미워하는 것이 인의 참사랑이다.
그렇다면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어떻게 규정하는 것이 보편 타당한가가 문제로 된다. 내가 좋아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실은 증오를 받아야 마땅할 사람이며, 내가 미워서 멀리하는 사람이 사실은 착한 사람으로 사랑해야 할 사람이라면, 인하지 못한 것은 오직 나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이지 남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안연(顔淵)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하는 것(爲仁)”이라고 하였다. 극기는 사욕을 극복, 제거하는 일이요, 복례는 천리(天理)를 회복, 보존하는 일이다. 극기와 복례는 두 가지 일이 아니라 극기가 곧 복례이다.
표현은 비록 다르지만 내용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정주학에서는 이것을 공(公)이라 표현하였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는 말은 공을 뜻한다. 정자는 인을 천하의 공이라 하고, 주희는 공하면 인하고 인하면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효제(孝悌)는 인의 활용[用]이요, 충서(忠恕)는 인의 베풂[施]이라 하였다.
정일집중(精一執中)이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전하는 가르침의 요지라면, 극기복례는 공자·안자(顔子)가 서로 전하는 가르침의 요지라 하겠다. 공자의 이른바 기(己)는 곧 순의 인심(人心)이요, 공자의 예는 곧 순의 도심(道心)이다. 극과 복은, 즉 정일(精一)의 공효(功効)다.
인과 중(中)도 명칭은 서로 다르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개 의리에 부합해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것이 중이고, 의리에 순수해 사욕에 잡히지 않는 것이 인이다. 중하면서 인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또한 인하면서 중하지 않은 것도 없으니, 이로 미루어볼 때 성현의 상전심법(相傳心法)은 모두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 있다 하겠다.
사욕을 극복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일은 곧 마음의 공평을 유지하는 일이다. 마음의 공평을 유지하려면 사사물물(事事物物)의 원리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마음의 지각으로서 지가 요청된다. 공자가 인과 지를 병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로써 인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으로 지키지 못하면 상실하고 말 것이요, 인을 좋아할지라도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폐단을 낳게 된다. 그러므로 순자는 지(智)하고 불인(不仁)한 것도 불가하지만, 인하고 부지(不智)한 것도 불가하다고 하였다. 인과 지는 봄·겨울과 같아 서로 종시(終始)가 되어 순환하게 되는 것이다.
공자는 인의 개념보다 인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은 이 점에 관심을 두고 성경현전(聖經賢傳)에서 기록된 천언만어(千言萬語)가 오직 인을 구하는 데 있다면서, ≪구인록 求仁錄≫을 편찬, 뒤에 배우는 이의 길잡이가 되게 하였다. 또한, 거실을 ‘구인당(求仁堂)’이라 이름을 짓고 인을 실천하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한 가정이 인하면 나라가 흥인(興仁)하고, 위에 있는 자가 인을 좋아하는데 아래에 있는 자가 의를 좋아하지 않는 일이 없으며(大學), 인하면서 부모를 버리는 일은 없고 의하면서 임금을 버리는 일은 없다(孟子). 인은 마음의 덕이요, 가정의 보배요, 위정의 근본이요, 만물과 일체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먼저 인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仁江[인강]=어질인, 물강.
사랑의 강.
仁- 인을 구성하는 여러 덕목 중에서 핵심은 사랑이다.
사랑이 부모에게 미치면 효가 되고, 형제에게 미치면 우(友)가 되며,
남의 부모에게 미치면 제가 되고, 나라에 미치면 충이 된다.
사랑이 또 자녀에게 이르면 자(慈), 남의 자녀에 이르면 관이 되고,
나아가 백성에까지 이르게 되면 혜가 된다.
仙草[선초]=신선 선, 풀 초.
먹으면 신선(神仙)이 된다는 상상의 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