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약속된 땅(1)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너는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며 그들의 주상을 부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네가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물리치고 네 모든 원수들이 네게 등을 돌려 도망하게 할 것이며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그러나 그 땅이 황폐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 내가 네 경계를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강까지 정하고 그 땅의 주민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네가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낼지라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지 말라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를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출23:20~33).”
가. 그 땅은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예표임
지난 시간에 여호와의 사자의 대해서 얘기했는데 여호와의 사자는 그리스도의 예표로 우리 앞서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열고 계신 것을 의미한다. 먼저 율법을 주시고 다음에 사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의 앞길을 열어 주셨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서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열고 계신 것이다.
오늘은 약속된 땅에 관한 말씀이다. 땅은 무엇인가? 땅도 역시 그리스도와 그 나라이다. 그리스도와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인데 이 땅에 관해서 지금 한계를 짓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여호와의 율례를 지키고 보내신 사자의 말을 청종하는 사람이라야 거기를 들어 갈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된 인격만이 그 땅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율법이 온 것과 사자가 온 것을 보면 율법이 사자가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율법을 먼저 주시고, 그 다음에 사자를 보내시고 그리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땅에 들어가게 하였다.
결국 이것이 각각 따로따로가 아니고 하나이다. 결국 이스라엘이 율법과 사자의 인도함을 받아서 가나안에 간다는 뜻이다. 율법과 여호와의 사자가 인격 안에서 하나가 되면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그 땅의 경계인 약속된 땅인데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강까지 정하고” 라고 되어 있다. 이 강은 유프라테스 강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나안 땅은 어떤 땅이냐? 바다에 둘러싸인 땅이다.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강까지 모두 물에 둘러싸인 땅이다. 사방이 부정적인 것이다. 바다는 성경에서 사망을 상징한다. 사망으로 둘러싸인 곳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 지대는 어떤 지대인가? 아주 높은 지대이다. 죽음에 둘러싸인 고지대란 뜻이다. 사망의 바다에 둘러싸인 곳이지만 그러나 그 땅은 높은 지대에 있는 곳이다. 고지대에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십자가는 절대적인 부정이다. 인간에게 많은 부정적인 것이 있지만 그러나 십자가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부정 지대이다.
사람이 잘못해서 잘못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를 들어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고도 정죄를 받았다. 선을 행하고 의를 행했지만 버림을 받았다. 하나님의 대해서 완전했지만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절대적인 부정이다. 그 이상의 부정은 없다.
나는 이것이 억울하다 나는 저것이 억울하다 아무리 해도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억울하다 해도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다. 아무리 분하다 해도 자기도 잘못한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그 죽으심은 완전하게 의롭고 완전하게 선하시고, 하나님의 대해서 절대적으로 복종하신 자리이다. 그것은 죽어서는 안 되는 자리이다.
구약 전체에 흐르는 기본적인 사상은 의인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하나님은 의인을 절대로 멸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에 달렸다는 것이다. 나무에 달렸다는 것은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부정이다.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자리이다.
그런데 부활은 어떤 것인가? 절대적인 부정 지대 안에서 살아남은 절대적인 긍정 지대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살렸기 때문에 어떤 부정적인 요소가 있었을지라도, 어떤 사망이 왔을지라도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그건 완전한 긍정 지대이다.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강까지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결국 이것이 같은 것이다. 가나안 땅,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 어디에 있는가? 사방으로 바다로 둘러싸이고 광야로 둘러싸인 땅이다. 사방이 부정적인 지대로 둘러싸인 곳이다. 그런데 이 땅만은 높은 지대에 속해 있다.
부정 속에서 높은 지대에 속해 있다. 부활은 이런 절대적인 부정지대에서 절대적인 긍정지대로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부활 지대이다. 그리스도는 이런 부정적인 운명을, 아무리 옳을지라도 아무리 선할지라도 죽는다, 아무리 하나님께 순종하고 아무리 옳다할지라도 인생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절대적인 부정의 의미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사용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리다.
흙으로 지어진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으로 표현했다.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리다. 승리할 자리에서 승리하는 것 같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두가 다 실패한 자리,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내려온 모든 사람이 다 실패한 자리, 부정적인 자리, 그런데 그 자리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썼다. 이것이 바로 다른 게 아니고 구원이다. 인간의 절대적인 부정을 절대적인 긍정으로 바꾼 것, 이것이 구원이다.
나. 그 땅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임
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은 진실이었다. 이 진실 안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사람을 불렀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자리는 이 진실 밖에는 없다. 거기서 밖에는 만날 수가 없다. 어떤 방법으로도 만나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종교적인 방법이 있어서 이런 방법 저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지대가 따로 있다. 거기에서 밖에는 만날 수가 없다. 그 자리가 바로 진실이다. 십자가는 바로 진실이다. 인생의 진실이다. 이 진실 안으로 하나님도 부르고 사람도 불렀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만나게 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만날 수가 없다. 내가 무슨 노력을 해도 노력으로는 만날 수 없다. 내가 기도를 하고 별 것을 다해도 만날 수가 없다. 진실이 없으면 만나질 수가 없다. 진실 지대에서만 만나질 수 있다.
물고기는 물에서만 살 수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살 방법이 없다. 물고기들은 물에서 밖에는 만날 수가 없다. 물 밖에서는 만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도 이 한자리에서만 만날 수 있다. 이 자리 외에는 만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 한 자리를 마련한 분이다.
그래서 그는 높이 오르셨다. 하늘로 높이 올리셨다는 말은 그 이름이 뛰어난 이름이 됐다는 말이다. 진실의 자리를 만들어서 하나님과 사람을 만나게 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뛰어난 이름이다. 만유 위에 뛰어난 이름이다.
이것을 성경에서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산위에 섰다고도 표현하고 하늘에 오르셨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는 산 위에서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가 부활하신 후에는 산 위에서 승천하셨다는 말이 나온다. 변화하셨을 때도 산 위에 올라가서 변화하셨다. 그리고 모세를 만날 때도 산 위에서 만났다. 율법을 받을 때도 산 위에서 받았다. 전부 산 위이다. 이것은 높은 지대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로 가셨는가? 하늘 위에 오르셨다.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높이 되셨다. 모두 그런 의미다. 뛰어난 이름이 되었다.
뛰어난 이름이 된 실재가 바로 약속된 땅이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은 어디냐? 바로 이 자리를 약속했다. 우리 인생에 무엇을 약속해 주셨느냐? 하늘에 오르는 것을 약속해 주셨다. 하늘에 오른다는 말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다는 말이다.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을 것을 약속해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나안 땅을 약속했다. 그 가나안 땅의 실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실재는 무엇인가? 하나님 보좌 우편이다. 그리스도 위치가 그렇다.
사실상 하나님은 인류에게 태초에 창조 때부터 무엇을 약속 했는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약속했다는 말이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신 후에 동산에 두었다. 그 동산은 인간의 동산이 아니고 하나님의 동산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동산에 앉게 한다는 말이다. 그 동산이 신약에 오면 하나님 보좌우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약속하신 첫 열매이다. 이 첫 열매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약속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먼저 정탐꾼이 가나안에 가보고 그 다음에 백성이 들어갔다. 예수님은 정탐꾼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먼저 가나안 땅에 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뒤를 따라 간 것이다. 약속된 땅은 어디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했는데 그 가나안 땅은 실제로 가보면 별거 아닌 땅이다. 육신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 약속된 땅이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그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건국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했지만 그 나라는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지금은 팔레스타인 땅인데 그 땅이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겠는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실재는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이다. 하나님 보좌 우편이라는 그 위치가 약속된 땅이다. 이 약속된 땅을 주었다는 것이 온 인류에게 주어진 최대의 축복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된 땅을 향해서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지나서 가게 되었다. 야곱도 죽을 때 그 땅으로 나를 데려가라고 말했고 요셉도 죽을 때 그 땅으로 나의 해골을 가져가라고 유언을 했다. 그 땅, 그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확실히 몰랐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보면 하나님 보좌 우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그 땅이 우리에게 약속된 땅이다. 흙으로 지어진 인생에게 약속된 위치가 바로 이 위치이다. 하나님 보좌 우편, 그것이 흙으로 지어진 인생에게 약속된 위치이다. 아담이 이것을 버리고 지금 세상으로 흩어져 나간 것이다. 이렇게 떨어져 나간 것을 타락이라고 한다.
사람이 원래 이 위치로 가도록 정해졌다. 흙으로 지을 때 이미 이위치가 정해져서 지어졌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할 때 이미 이 위치가 정해졌다. 자동차를 만들 때는 그 용도를 먼저 생각하고 만든다. 집을 지을 때도 먼저 그 용도를 생각하고 만들어 놓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만들 때도 이미 이 땅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 지대를 약속하고 사람을 만들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니고 그 땅을 약속하고 부르셨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이미 그 땅을 약속하고 부르셨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인생을 이 땅에 낼 때 그냥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한 위치를 약속하고 냈다는 말이다.
사람은 이미 이 위치를 부여받고 태어난 것이다. 내가 내 위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내 위치를 부여받고 태어난 존재이다. 십자가를 통과한 부활 생명, 이것은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다. 이 위치가 타락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만약 타락이 아니라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타락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해서 부활생명에 이르도록 되었다. 결국 부활생명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른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단지 우리는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지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창세전에 이미 예정하신 것이다.
유월절 양이나 누룩 없는 떡, 쓴 나물, 제물들, 만나, 생수가 흐르는 반석, 성막의 기구들과 성막은 전부 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땅 역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애굽에서는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광야에 와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서 하늘에서 양식을 얻어먹었다. 만나와 메추라기 밖에 없었다.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었으니 너무나 단조롭고 풍요롭지 못하다.
다. 약속의 땅의 실재는 그리스도임
가나안 땅에서는 농사를 지어서 온갖 곡식을 다 거둘 수 있다. 양을 키워서 제물을 드릴 수도 있고 하나님께 필요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생산되어질 수 있는 땅이다. 그래서 이 땅을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를 예표한 땅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모든 재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가나안 땅과 같다. 가나안 땅에는 곡식도 있고, 양도 있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도 풍족하게 먹을 수 있고, 하나님에게도 공급을 드릴 수 있는 그런 땅이다. 애굽 땅은 남의 땅이어서 못하고 광야에 있을 때는 생산이 없어서 할 수가 없었다.
애굽 땅에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세가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출5:3).”라고 했다. 제사을 드리려고 한다. 애굽 땅에서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남의 땅이고, 종 된 땅이다. 그래서 광야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가나안 땅, 거기는 풍성한 곳이다. 사람을 위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도, 그 모든 것이 생산되는 곳이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서 온전한 양식, 온전한 제물이 풍성하게 생산되는 곳이 어디인가? 물질적인 땅은 가나안이었지만 그 실재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 인격 안에 이 풍성함이 있다. 가나안 땅은 결국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이 땅에는 방해자들이 있다. 방해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가나안 족속들이다. 가나안 칠족들인데 이 사람들은 우리 인간의 천연적인 생명의 여러 방면들을 상징한다. 이것들이 그것들을 점령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충분한 공급을 드릴 수 있는, 풍성한 곡물을 드릴 수 있는 밭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먹고 충분하게 감사할 수 있는 양식이 나오는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다른 것이 점령하고 있어서 감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이 점령하고 있는가? 우리 천연적인 생명이,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타고 난 그 생명이 그것을 점령하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도 제물을 드리지 못하게 하고, 제물에게도 감사가 넘치지 못하게 막고 있다. 이것이 가나안 칠족이다.
이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인데 우상이라는 것은 탐심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우상을 섬긴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면 내 탐심이 없어지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건 내 탐심을 취한다는 뜻이다. 내가 내 탐심을 취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그러면 나는 자연히 우상을 숭배하게 마련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했는데 다른 신들은 허구이다. 이것은 영적 세력이고 허구심 뒤에 숨어 있는 세력들이다. 이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이것들을 숭배하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고, 그 소유를 본받지도 말고, 그들과 언약하지도 말라고 했다.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지 말라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를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출23:32~33)”왜냐하면 이것들이 그리스도의 풍성을 방해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탐심과 다른 신들, 이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풍성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결정적으로 말하면 인격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은 인격 안에 있는 것들이다. 이 인격 안에 있는 풍성을 방해하는 것이 탐심과 다른 신들이다. 세상은 탐심이고 종교는 다른 신들이다.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 신들을 경배하는 사람들은 모두 인격을 방해한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절하고 경견하게 하고 엄숙하게 하는 것들이 좋은 것 같은데 그 안에는 인격이 없다. 인격에 방해가 된다. 하나님은 경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격을 필요로 하신다.
결국 풍성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인격에서 나온다. 그런데 인격을 방해해 버리고 계속 경배만하면 풍성함이 나오지 않는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능력을 행하고 별것을 다해도 인격적 풍성함은 안 나온다는 것이다. 가보면 별 것이 다 나온다.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고 사업이 번창하고 선교 사업을 하고 놀라운 능력들이 행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격이냐 하면 인격이 아니다. 인격이 아니고 모두 기능들이다. 영적인 기능, 육신적인 기능, 그 기능들이 모두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의 풍성함은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가나안 칠족은 결국 천연적인 것들을 대표하고 있다. 세상과 종교는 인격을 방해한다. 그 땅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출23:22)”이 말은 무슨 말인가?
그렇게 한다는 말은 결국 인격이라는 말이다. 인격으로만 그 위치를 점령할 수 있다. 내가 큰 능력이 있다고 점령하는 것도 아니고, 재주가 있다고 점령하는 것이 아니다. 인격으로만 그 땅을 점령할 수 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출23:30)”한꺼번에 몰아내지 않고 조금씩 점차적으로 몰아내겠다. 이 말은 인격이 성장하지 않았는데, 생명이 성장하지 않았는데 땅만 얻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격의 성장과 동시에 적이 물러난다. 빛이 오는 것과 동시에 어둠이 물러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출23:25)”인생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면 부정이 없어지고 약함이 없어지고 풍부해진다는 뜻이다. 부정은 무엇인가? 왜 부족하고 약하고 풍성하지 못하는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를 섬기려 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해 살려하기 때문에 부족하고 약하고 풍성하지 못하다. 누구든지 그렇다. 자기를 위하려고 하고 더 위하려 하는 사람일수록 더 부족하다. 더욱 자기중심적인 사람,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 자기를 위하여 애쓰는 사람일수록 더욱 약하고 더욱 빈약하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 부족함이 없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부족함이 있다 하는 사람은 거짓말이고 잘못된 말이다.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약함이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풍성함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자기를 위하려고 하면 부족함과 연약함과 빈약함이 가득 차 있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려하면 풍족하고, 강하고, 부족함이 없게 된다.
인생에게 창세전부터 영원히 약속된 땅,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위치이다. 땅은 위치이다. 가나안 땅은 위치이다. 내가 어떤 위치로 너를 부르겠다, 어떤 위치를 너에게 약속하겠다는 말이다. 내가 그 땅을 너에게 유업으로 주겠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계속 약속을 했다.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26:3).” 이것의 실재는 무엇이었는가? 어떤 위치를 주겠다는 뜻이다. 그 위치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그 위치이다. 그 위치가 우리 인생에게 창세 이전부터 주어진 그런 위치이다. 우리는 그 위치를 위해서 지음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무엇을 새로 얻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땅을 우리가 발견해 가는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은 이렇게 존귀한 위치를 위해서 지어졌다. 이 위치를 주시기 위해서 지어졌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구원을 얻는 것이고, 복음을 듣는 것이고 얻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이 위치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한 땅을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편은 엉망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백성에게 이 땅이 약속되었다. 아브라함 자손들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이 땅은 약속되었다.
오늘 모든 인류에게 이 땅은 약속되어 있다. 다만 누가 땅을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것만 남았다. 다시 말해 누가 이 땅을 발견하느냐 발견하지 못하느냐 그것만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든지 이 땅이 약속되어 있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흙으로 지어진 이 보잘 것 없는 인생에게 하나님 보좌우편의 위치를 미리 예정하시고 미리 작정하시고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를 창조하신 걸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이 부름 받았을 때 그 땅을 약속 받았고, 이삭이 태어났을 때 그 땅을 약속 받았으며, 야곱이 방황할 때 이 땅을 약속 받았고, 오늘 우리가 또한 이 땅을 약속 받았습니다. 주님 우리의 지혜와 계시의 영이 열려져서 하나님이 하늘에 간직하신 이 비밀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예비하신 이 고귀한 위치를 탁월하고도 놀라운 이 위치를 우리가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