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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30).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
2021. 7. 23. 이현래 목사
로마서 9장에 왔다. 9장부터는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 문제이기도 하고 바울의 문제이기도 하다. 8장 마지막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그 말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서 방해할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된다. 천사까지라도 이것을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죽으심을 통해서, 죽으심의 자리로 이끌어서 우리와 하나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는 다 여유가 있었지만 거기서는 여유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구속이다.
예수님이 참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고 막연하게 아는 사람이 참 많다. 사실 알고 보면 예수님에게 사랑을 받은 일은 별로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구체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구속 안에서는 누구도 사랑이 있느니 없느니 할 필요가 없다. 근본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만유 위라는 말은 모든 것 위라는 것이니까 그 이전에 이러니저러니 했던, 사랑이고 아니고 했던 모든 문제, 이런 것보다 더 위에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 어려서 나서 크다 보면 그때그때 중요한 것이 많다. 어려서는 장난감이 중요하고, 친구가 중요하고, 선생이 중요하고 많이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것과 함께 간다. 또 그것을 통해서 성장한다.
모든 것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보다도 모든 것 위에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았어도 마지막에 열매가 열리지 않으면 헛일이다. 무화과나무가 잎은 무성했는데, 열매를 먹으려 했더니 열매가 없다면 허망한 것이다.
인생이 왜 허망한가? 열매가 없어서 허망하다. 오래 못 살아서 허망한 것도 아니고, 부자로 못 살아서 허망한 것도 아니다. 가 보면 열매가 없으니까 허망한 것이다. 사람이 왜 있는가? 그 이유가 없다. 천당에 가면 열매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요즘 아이들 말대로 하면 꼰대들 이야기지 그게 통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예수 믿은 것이 어디로 갈지 모르니까 허망하다.
전에도 한 번 이야기 했는데 여자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초대 집사님이다. 그 남편은 지금 같으면 목회자로 영수 노릇을 했는데 일찍 돌아가시고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분은 어떤 은사를 받아서 어디 가서 기도도 해주면서 열심히 사셨다. 한 번은 고민이 있어서 왔다. 자기는 이렇게 평생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살았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너무 불효자라는 것이다. 자기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나갔는지 들어갔는지 아무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자기가 죽으면 당연히 화장을 해서 갖다 버릴 것인데 그러면 나는 여태껏 예수를 믿어서 뭘 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80세가 넘은 이 노인네가 아주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이 군대에 가서 팔이 한쪽 잘렸는데 부활하면 팔이 그대로 나오겠는지, 아니면 잘린 채로 나오겠느냐고 물었다. 그야 성한 팔로 나올 것이라고 대답 했다. 그러니 무슨 걱정이겠느냐, 화장을 하든지 안 하든지 그게 관계가 있겠느냐고 했다. 이 할머니가 어떻게 이 말을 쑥떡같이 이야기 했는데 찰떡 같이 알아듣고 그 문제가 해결되어서 갔다. 그때는 그렇게 해결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우스운 일이지만 그렇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었는데 마지막에는 뭐가 오는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게 참 중요한 문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받았던 여러 가지 은혜가 있고 은사가 있고 약속이 있으니까 그것을 잡고 다 망해도 우리는 안 망한다. 모든 민족이 다 멸망해도 우리는 멸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은 그 모든 것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들로서는 안 되었던 것도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는 다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죽음에서 다시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문제가 다 없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지 다 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까지 왔는가? 모든 것이 다 준비가 되어서 거기에 참여만 하면 되도록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의 구속은 조상들에게 나타냈던 모든 것 보다도 더 위에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는 사탄까지도 더 이상 추적할 수가 없고, 틈을 타서 장난을 칠 여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만큼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은 온전하다는 말이다.
바울이 로마서 8장 마지막 절에서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우리를 갈라놓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동산에 있을 때 사탄이 와서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해서 선악과를 먹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그럴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어떻게 잘 하면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있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것은 소용이 없다. 그래서 어쩌면 동산에 있었던 사람보다 훨씬 업그레이드 된 사람이다. 동산에 있던 사람은 얼마든지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사람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류의 구속이 이 사람 안에 있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그리스도를 버린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자신들의 조상인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버렸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유대인들로서는 이게 큰 문제다. 우리로서는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유대인들로서는 굉장히 큰 문제다. 그러니까 예수를 죽이지 않았겠는가? 네가 아니면 우리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던 믿음이나 모든 것들이 다 헛것이 된단 말이냐? 이래서 죽인 것이다.
네가 죽든지 우리가 죽든지 둘 중의 하나가 죽으니까 해 보자, 이 말이다. 네가 살면 우리가 죽고, 네가 죽으면 우리가 산다는 이 말이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이런 뜻이다. 예수를 죽인 것이 간단하게 죽인 게 아니다. 얼마나 심사숙고 했겠는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소문이 난 사람을 버릴 때 그냥 버렸겠는가? 아주 심각한 문제로 사려 된다.
바울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왔다. 그 사람을 버렸는데 어찌 되겠는가? 이게 자기 조상들의 문제가 아닌가? 친족의 문제고 골육의 문제다. 그래서 9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일이 바울의 고민이었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고 하였다. 그만큼 바울에게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이 말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내가 끊어질지라도’라는 뜻이다. 그럴지라도 나는 내 동족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심각한 말인가!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롬9“4.5)라는 것이다. 이런 백성이라는 말이다. 이런 백성이 예수 한 사람을 부인하였기 때문에 멸망 받을 것이냐는 말이다.
잘 생각해 보자. 이게 그때 그 사람만의 고민인지 오늘 우리들의 고민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상 때부터 예수를 믿었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나는 정통 중의 정통으로 신앙을 해 왔다. 그래도 이 사람의 구속을 안 받아 들이면 멸망이란 말이냐? 이런 말이 되는 것이다.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해당이 안 되겠지만 지금 우리나라에도 4대째 5대째 신앙하는 집안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의 전통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 하던 대로 잘 하면, 아버지가 목사면 아들도 목사되고, 아버지가 장로면 아들도 장로된다. 교회 안에서는 목사나 장로가 되는 것을 굉장한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되는 것을 굉장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예수라는 사람, 십자가에 매달려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이러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나도 마지막 고민이 이것이었다. 내가 정말 죽을 자리에서 살림을 받았고, 정말 헤어나지 못할 자리에서 놓임을 받았다. 이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세상 사람이 다 아니라고 해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마지막에 예수는 나에게 누군가? 예수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잘 살 수 있다.
시골의 작은 교회였지만 나는 열심히 봉사했다. 열심히 하라고 해서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좋았다. 나는 그때 일이 기울어져서 밥을 먹느냐 마느냐 이런 지경에 있었는데도 교회 전도사님이 너무 불쌍했다. 해남에서 오신 분인데 사례비가 제대로 안 주니까 자기 고향에 가서 쌀을 가져다가 먹어도 돈이 모자랐다. 그것을 빤히 보고 있으려니까 참 안 됐다. 내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내가 어지간히 일이 되었더라면 혼자 해도 될 것 같았다. 큰돈이 아니다. 시골 전도사들이 그렇다. 요즘에는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시골에서는 얼마 안 된다. 또 시골에서는 얼마 안 되도 생활한다. 어지간하면 내가 하겠는데 내가 너무 어려운 처지에 있으니까 안 되었다.
내 위에 있는 집사들이 세 명이 있었다.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다. 내가 얼마를 낼 테니까 여러분들도 얼마씩 해서 생활비는 해 드려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제일 어린 내가, 그리고 자기들도 내 형편을 다 알고 있으니까 아니라는 말은 못하고 그렇게 했다. 내가 나오는 날까지 했다. 나는 잘 할 사람이다. 교회에 나 같은 사람이 장로가 되었으면 그 목사님은 정말로 땡 잡는 것이다. 지금 내가 생각해 봐도 그럴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이 교회에 있고 조금만 내가 돈을 벌었더라면 누구에게 헌금하라는 소리도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런 소리 하기 싫은 사람이었다.
그분은 재주가 별로 없었다. 그분이 못하는 것은 내가 다 했다. 주일 학교도 내가 열심히 하고 청년부도 열심히 했다. 전도사님도 나를 아주 좋아했다.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그렇게 하는데 외로운데 좋아하지 않겠는가? 내가 돈을 벌었더라면 나는 훌륭한 장로로 영광스러운 장로로 그렇게 살 사람이었다. 내가 무슨 자랑을 해서가 아니다. 옛날에 나를 알던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 신학교를 가서 그때서야 예수 문제가 생겼다. 내 죄를 위해서 피를 흘려 죽었다는 문제가 생겼다. 예수님과 내가 관계가 안 된다.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람이 대신 죽어 주어야 하는가? 그것도 모르겠다. 부흥회만 가면 죄를 회개하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회개할 것이 별로 없었다. 그게 참 답답했다. 옆에서는 가슴을 치고 통곡하는데 나는 통곡할 일이 없어서 민망했다. 같이 앉았으면 민망했다.
그래서 밤에 산에 아무도 없는데 올라가서 기도도 해 보고 했는데 기도라고 해야 몇 마디 할 것도 없었다. 부스럭 소리가 나면 오싹오싹 했다. 아무 것도 안 됐다. 산에는 밤에 앉아 있으면 무슨 소리가 난다. 돌 구르는 소리도 나고 무슨 소리가 난다. 혼자 앉아 있어 보니까 못 앉아 있겠다.
나 같은 사람은 예수만 안 믿었으면 잘 살 사람이다. 시골에서는 그렇게 강조하지 않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다 보니까 예수가 자꾸 등장하고, 더군다나 서대문 순복음 교회가 옆에 있었다. 가 보면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다. 뜨겁고 후끈후끈하다. 나는 냉랭하고 설교는 잘한다고 하는데, 사람이 안 모이는데 잘 하면 뭘 하는가? 그래서 산으로 어디로 쫓아다녔다.
쫓아 다녀 보니까 그랬다. 무슨 은사라도 받아야 하나님과 내가 가깝고 예수님과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내가 받은 은혜는 많은데 이분과 구체적인 관계가 안 된다. 물론 그분이 행하는 이적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인생의 갈 길을 찾았다. 안 한 게 아니다. 이적을 행한 것을 부인해 보지 않았다. 내가 모르기는 모르지만, 내가 이적을 행하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깊이 상고했으니까 문제는 없었다. 그런 문제는 없는데 뭔가가 안 맞는 것이다. 무엇인가 하나가 비켜가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본다면 그대로 죽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대로 죽었더라면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뭐가 다른가? 내가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과 하겠는가? 이삭만 하겠는가? 야곱만 하겠는가? 구약시대에도 순교자도 많다. 톱으로 켜서 죽였다는 말도 나온다. 기독교 안에만 순교자가 있는 게 아니다. 그들도 많은 순교를 했다. 안식일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목숨을 바친 사람도 수 없이 많다. 한 조문이라도 어지기 않으려는 사람이 적은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되는가?’ 이 말이다. 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가? 우리나라도 벌써 기독교가 들어 온지 얼마인가? 천주교까지 합하면 200년이 넘는다. 서양만 못하지만 상당한 종교적 전통이 세워져 있는 나라다. 어느 정도 세워져 있는 나라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이 유일하다.’고 나설 때, 당연히 반발이 생기지 않겠는가? 옳게 말한다면 분명히 반발이 생기게 되고, 그래도 우리가 자신이 있어야 되는데 안 그러면 우리는 좌절할 것이다. 우리가 이래야 되는가? 잘 믿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러해야만 되는가? 이 생각이 당연히 들지 않겠는가? 이 문제다.
바울이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에 고민한 것처럼 알고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라는 사람이 이렇게 아주 어려운 사람이다. 너무 쉬운 사람이지만 이렇게 어려운 사람이다. 그래도 세상에 나가 보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더 낫다. 그냥 생자인 사람보다 훨씬 낫다. 우리에게 이러니저러니 해도 만나면 가깝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사람 앞에 가서, 니고데모에게처럼 그 많은 뭐가 쌓인 사람에게 가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하는 말은 ‘그럴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는 이 말이다. 당신이 그렇게 많은 뭐가 쌓였다고 하더라도 거듭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는 못 본다는 것이다. 봐 주기로 한다면 봐 줘야 될 사람들이다. 그런데 봐 줄 일이 못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않으면 그 세계가 없으니까 그 세계를 모르니까 못 들어간다는 말이다. 니고데모는 근심하게 되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3:4)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말을 바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는 이런 소리를 했다.
니고데모가 그 말을 알아듣겠는가? 어떻게 하면 된다고 했으면 그 사람은 했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기도를 다섯 시간 했는데 열 시간 하면 된다고 했으면 쉬운 게 아니겠는가? 당신이 구제를 했어도 지금보다 더 하면 된다고 했으면 쉽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바람이 임의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누가 알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주 난처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 말했는지 니고데모가 떠난 뒤에 말했는지 모르지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라는 말을 요한복음 3장14절에서 그 말을 했다. 그 말을 니고데모가 듣고 갔는지 못 듣고 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말을 예수님이 직접 하신 것인지, 아니면 요한이 한 말인지도 잘 모르겠다. 좌우간 그게 맞는 말이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독으로 죽게 되었는데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보고 살아났다. 이 고사를 자기 자신으로 인용했다. 그게 나라는 말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나로 말미암아서 다시 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노골적으로 그 말을 하겠는가? 한다 해도 듣지도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제시하신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구속의 길이 세상에서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길이다.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요12:40) 그런 것이다. 어떻게 니고데모 같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못 본다고 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지금까지 어떤 사람들이 유대민족을 인도해 왔는가? 니고데모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인도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못 본다니까, 니고데모가 못 본다면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다 못 보는 것이다. 니고데모만 못 보겠는가? 심각한 문제다. 우리도 나가서 누구에게 말을 잘 못 해버리면 당장에 맞아죽지 않으면 다행이다. 당장 저놈 끌어 내리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런 놀라운 축복이 있는 백성인데, 약속이 있는 백성인데 그래도 그렇게 하겠는가? 이런 이야기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에 대한 책임이 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는 후회함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롬9:6)라고 말했다. 그러면 이대로 되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로 안 되어 버리면 하나님은 실없는 분이 된다. 그래서 너희가 그리스도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람의 생각대로 되지 않고 오직 부르신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였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로, 야곱은 택하심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것 위에, 이미 약속된 것 위에 또 다른 은혜가 있었다는 것이다. 순전히 약속의 자녀다. 또 야곱은 택해서 사람을 만들었다. 나무를 잘라 다듬는 것처럼 이 사람을 선택해서 인간을 만든 그런 사람이다. 하나님의 종을 만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롬9:6) 폐해질 말씀이 없다. 이런 말이 딱 맞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9:15)고 한다. 18절에는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9:18)는 말이 나온다. 이런 말을 기독교에서는 잘못 사용해서 사람들을 버리게 된다. 멸망한다는 소리를 하거나 지옥 간다는 소리를 많이 해서 사람들을 버리게 되었다.
이런 말은 안 믿는 사람들이 굉장히 싫어한다. 지금은 믿는 사람들이라도 좀 깨어 있다는 사람들, 좀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은 굉장히 싫어한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풀 자를 베풀고 안 베풀 자를 안 베푸신다. 심지어는 완악하게까지 했다고 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있다. 보통 말을 해서 안 듣는다든지 아니면 더 심각한 사람이 있다면 저것은 하나님이 악한 역으로 쓰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아무리 해도 안 될 사람이고 악역으로 쓰려고 부른 사람이다.
가룟 유다에 대해서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안 됐다. 너는 네가 할 일을 하라고 말했다. 너는 그런 일에 쓰려고 택함을 받은 자다.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들 속에도 그런 생각이 은연중에 있다. 없는 게 아니다. 저건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왜 왔을까? 악역으로 쓰려고 왔는가? 이런 생각이 은연중에 있다. 없는 게 아니다.
예수님만 그런 말씀을 한 것도 아니다. 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마음 놓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악역 배우로 쓰려고 택한 모양이다. 가룟 유다를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그렇게 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 사람들은 모두 가룟 유다가 배신할 줄 모르고 선택했는가? 그것도 모르면 아무 것도 아니네, 관상만 제대로 봤더라도 배신할 놈인지 아닌지 알 것인데, 예수님은 관상도 제대로 못 본다는 이런 말을 직접 한다. 담대하게 그런 말을 한다. 가룟 유다를 왜 선택했느냐고 한다. 그 말은 하나님이 마귀를 왜 그냥 두었느냐고 한 말과 똑 같은 말이다. 그래서 잘못하면 기독교인들이 굉장히 완악해진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다 보면 완악해질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이 왜 완악해졌는가? 이런 좋은 것 때문에 완악해진 것이다. 오늘날 기도교인들도 잘못하다 보면 그렇게 되기가 쉽다. 교회에 아주 열심이 있는 사람인데, 세상에 나오면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완악한 마음을 가지기가 쉽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더 잘하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교회에서 정말 모범적으로 잘 하고 세상에 나가서도 잘해서 저 사람은 참 교회 다니는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드물다. 많지 않다. 이율배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럴지라도 그것을 보완해서 이삭은 약속으로, 야곱은 택하심으로 세웠다. 그 사람들에게 무슨 가능성이 좋아서가 아니고, 순전히 은혜로 순전히 택하심으로 세웠다. 야곱을 택하지 않고 나 같은 사람을 택했더라면 하나님은 그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인데 그렇지 않은가? 나는 하나님 고생을 못 시킨다. 내가 고생을 못한다. 야곱은 원체 똑똑하고 강해서 하나님을 고생 시켰다. 밤새 씨름하느라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나 같은 사람은 그냥 한 대 때리면 넘어져 버리는데 야곱은 해도 해도 안 되니까 마지막에 환도 뼈를 꺾은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사람을 택했는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택했다고 한다.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롬9:12)고 했다. 어머니 마음속에 그것을 딱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저놈이 개구쟁이고 문제가 좀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이 배속에 있을 때부터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삭이 축복하려는 것을 가로채서 야곱에게 준 게 아니겠는가? 그냥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롬9:6) 점점 이렇다.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롬(9:4)라고 했는데, 그래도 안 되는가? 그래서 이것들을 보강하는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5,16)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반대로 해석하면 너희가 그럴지라도 다른 길이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바울은 다른 길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어찌하면 마음을 열까 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말이라고 생각해야 될 것이다. 비판하려고 한다면, 너희가 아무리 그런 것이 있어도 너희는 그리스도를 버렸기 때문에 멸망이라고 했을 것인데 바울은 지금 그런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다. 어찌하면 조금이라도 이 사람들이 마음을 열어서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인가 하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선택하시고 그것뿐만이 아니고 긍휼이 여기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사람의 생각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못 박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9:5) 만유 위에 계셔서 모든 이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 이 구절이 해석하기 굉장히 어렵다. 내 생각대로 해석한 것이니까 여러분도 생각해보시고 받으려면 받고, 안 받으려면 안 받고 마음대로 해도 좋다.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9:5)고 했다. 그는 누구냐? 그리스도라고 해석을 한다. 영문 판으로 해석하면 그렇다고 한다. 이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지금 어떻게 하면 유대인들을 이 그리스도의 구속 안으로 끌어들일까 하는 판에 여기서 이런 소리를 하면 되겠는가? 당장에 안 될 말이다. 이것을 ‘Who’라는 관계 대명사를 썼다. 그래서 그렇게 얘기한 것 같다.
“Who is over all, God Blessed forever.”라고 번역이 되었다. 어떻게 번역하면 그리스도가 그렇다는 이 말도 되고, 또 우리 성경에 보면‘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 세세토록 찬양이 있으리로다.’라고 번역해 놓았다. 나는 밑에 것이 더 맞는 것 같다. 희랍어를 잘 아는 분들은 연구해보시기 바란다.
그런데 9장 19절에 가면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롬9:19) 이렇게 하느냐는 것인데 이 말은 아니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버렸든지 안 버렸든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 민족을 이렇게 사랑하셨는데 무슨 문제가 있다고 문제를 만드느냐는 이 말이다. 왜 하필이면 이 문제를 만드느냐는 뜻이다. 왜 평지풍파를 만드느냐? 우리는 이렇게 잘 나가는 백성인데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 예수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 왜 평지풍파를 만드느냐? 이 말이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
그래서 바울은 화가 나서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롬9:20)고 한다. 약속도 되어 있고, 구원의 신뢰도 있고, 그 위에 긍휼하신 하나님까지 얘기해서 우리 조상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그 하나님,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예수, 예수 하느냐는 것이다. 왜 예수의 구원이 꼭 필요 하느냐는 이 말이다. 우리가 예수를 버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긍휼로 우리를 받았지 않느냐? 그의 긍휼하심으로 우리가 지금 그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냐? 무슨 문제가 있느냐? 바울은 이 사람의 속을 알아차리고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롬9:20)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만 있으면 되는데 왜 그 사람, 하필이면 십자가의 예수가 필요 하느냐? 이 말이다. 하필이면,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이 사람인데, 왜 하필 이 사람이 필요 하느냐? 이 말이다. 바울이 만날 예수 얘기밖에 안 하니까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문제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어느 종교의 문제가 아니고,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이고 근원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기독교 안에 있으니까 기독교 문제이지만 나가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모든 것이 다 있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종교는 모든 것을 다 통합해서 유불선 삼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통합해서 가장 좋은 종교를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어떤 자매와 같이 사는 형제는 바하이교다. 그것은 유대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다. 동양은 잘 모를 것인데 자기가 아는 종교를 다 합해서 믿는 그런 신앙이 또 있다고 한다. 그 신학을 한 사람인데 그 자매 집에 세를 들어 살다가 지금은 그 자매와 같이 살게 되었다. 그런 사람도 있다. 어느 말도 거부를 하지 않는다. 다 수용하고 다 좋다 하고 좋은 것은 다 취하면 된다는 종교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불교, 유교, 기독교, 마호메트를 다 합해서 최선의 것을 뽑아내서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 보려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문제가 해결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어느 종교 문제가 아니고 인생 문제다. 근본적인 문제이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는 하나님만 믿어야 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거부하고 죽인 동족들을 위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죽였는가? 하나님만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쉽게 생각하지만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를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천주교나 기독교도 그럴 수 있다.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 때문에 진짜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하고 죽으면 남을 사람이 있겠는가? 알고 보면 이것이 같은 문제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 사람을 거부하고 죽인 이 동족들을 구원하려고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이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내 동족을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간절한 말인가? 얼마나 심각한 말인가? 나는 만일 우리 조상들의 전통이나 우리 가정의 전통을 구원하려면 차라리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면 좋겠다. 끊어져도 좋겠다. 끊어진다는 말은 파문 당한다는 그런 뜻이다.
그래도, 그럴지라도 내가 지금까지 해오던 좋은 것을 다 버릴 수 있느냐? 이 말이다. 우리 집안은 이 예수를 믿고 잘 살아왔다. 그리스도라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면,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참 영광스럽고 교황까지 만들 분이라면, 교황 덕을 보고 있는 그런 분이라면, 그 사람을 택하겠는가? 아니면 지금까지 잘 살아오던 그것을 택하겠는가? 잘 생각해봐라. 이것이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이 바울의 고뇌가 보통 고뇌가 아니다. 자기들 유대인들의 전통이 있다. 나쁜 것이 아니고 다 좋은 것들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그리고 바울이 지금 믿고 있기는 그 사람 안에서 나타난 구속이 완전하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다 이것을 보고 왔다. 우리 조상들이 다 무엇 때문에 살았는가? 이것 때문에 산 것이라는 그 얘기이다. 바울이 볼 때는 이것이 열매다. 그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해주던 모든 일의 열매가 바로 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끊어지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다. 나의 전부인데 이것을 내가 저주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동족을 위해서 하고 싶다는 말이다. 끊어진다는 말이 버림받는다, 파문 당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사람한테 하는 말이다. 그러면 무슨 문제가 있느냐? 우리도 다 구원 받을 것이 아니냐? 이런 사람에게 지금 하는 얘기이다. 왜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롬9:20) 하나님에 대해서 네가 반대말을 하고 있느냐? 네가 누구이기에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느냐? 토기장의 비유는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자기 마음대로 만들지 그릇 마음대로 만드느냐? 이 말이다.
이것도 잘못 들으면 굉장히 강퍅해지는 말이다. 토기장이는 자기 마음대로 만드는 것 같은데 쓸데가 다 다르다는 그 말이다. 귀히 쓸 그릇도 있고, 천히 쓸 그릇도 있고, 다 알아서 하고 있는데, 사람이 볼 때는 저것이 토기장이의 독재 아니냐고 생각한다는 그 말이다. 자기 멋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그분은 쓸데가 있어서 한다는 것이다.
또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롬9:25)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유대인의 상식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내가 너만 알았다고 했다. 내가 너만 알았다고 했던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겠는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롬11:4)고 했다. 이 남은 자가 있지 않느냐? 이 남은 자도 있다. 다 무릎을 꿇어도 무릎을 안 꿇은 남은 자가 있다.
의를 따르지 않았던 백성이 의를 얻는 예를 제시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고 율법을 따랐다. 그래서 너희는 너희 의를, 자기 의를 찾았지만 이 사람들은 자기 의를 찾지 않은 사람들인데 의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아닌데 이 사람들이 의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롬9:30,31)
이것은 종교적인 노력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은 그런 혈통이나 계통이 아니라는 말이다. 줄기가 그것이 아니다. 그래야 의를 얻지 그렇지 않고 얻겠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은 종교적인 혈맥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죽음 안에 모든 사람을 포함시켜서 도매 급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러면 지금까지 온 그 모든 전통이 어디로 가겠는가? 다 그냥 무산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는데, 거기에 만유가 구원된다고 하면 지금까지 유대인에게 해온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다. 그것은 다 헛일 아니냐? 쓸 데 없는 일을 괜히 하지 않았느냐? 이것이다.
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 하나면 간단한데 그동안 무슨 수고를 그렇게 많이 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문둥병 환자가 먹으면 대번에 낫는 약이 있다. 지금은 그 약만 먹으면 백발백중이다. 결핵약은 먹어서 효과가 없는 사람도 있지만 문둥병 약은 100% 온전하다. 그런데 이 약을 개발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했다. 그러나 그 약이 나오고 나니까 다 소용이 없어진다. 사실 알고 보면 그 많은 노력 끝에 그 약이 개발이 된 것이지만 소용이 없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이 그것을 연구하려고 노력 했겠는가? 그래서 결국 나왔다.
하나님의 동산을 떠나서 바벨로 가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꼭 아브라함만 불렀겠는가? 다 불렀지만 오지 않고 어쩌다 눈먼 고기가 걸려서 온 것이다. 알고 보면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정말 될 사람이라고 생각됐던 사람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라서 간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비웃지 않았겠는가? 쨍쨍 햇빛이 나는 날 방주를 짓겠다고 나간 노아에게 누가 잘한다고 생각했겠는가? 그 길이 맞는다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전혀 다른 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얻어지는 이 결과가 전혀 다른 일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면 왜 다 떠나겠는가? 아! 알았다. 바로 저것이었다. 이런 사람이 한 사람만 있었어도 그렇게 썰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중에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본 사람이 없었겠는가? 신학을 많이 해 본 사람이 없었겠는가? 거기는 그런 사람들이 다 있다는 뜻이다.
다 떠났다는 말은 그 속에 모든 인간이 다 있다는 뜻이다. 말은 같은 말을 했다. 뛰어내려 봐라. 그러면 내가 믿겠다. 같은 말을 했다. 같은 말을 했지만 속은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 왔다는 말이다.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가버렸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이렇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통이니까 이렇게 된다든지 이러니까 이렇게 된다든지 이런 이유를 달수가 없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너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그때그때 내가 받아야지 그것을 이래저래 연결을 시켜서 받을 수 없다.
여러분의 부르심을 생각해봐라. 나는 그렇다. 나는 한 번도 그런 부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은혜를 입을 것을 상상도 못해 보았다. 갑자기 부름을 받고 20일 만에 서울로 올라왔다. 생각해봐라. 내가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나는 한 번이라도 생각할 수 없는 그 일을 하신 분이 좋았던 것이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100살에 아들을 주었다는데, 100살에 아들을 낳겠는가? 못 낳겠는가? 그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이 나한테 부딪혔다. 내가 그래야 사는 사람이고, 내가 그렇게 해야 구원을 받을 사람이니까 부름 받은 사람이니까 그 하나님이라는 그것이 좋았다.
아무 공로 없이 이삭은 그냥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에 모든 것을 받았다. 자기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 후에도 한 것이 없다. 살면서도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물 하나도 자기가 직접 판 것이 없고, 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판 것을 다시 열어서 수리해서 쓴 사람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그 중요한 축복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주지 못했다. 목소리는 들어보니까 야곱의 소리인데 손은 만져보니까 에서라고 하면서 축복했다. 멍청해도 이만큼 멍청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바보 중에 이렇게 바보가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하셨다. 이것이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야곱같이 그렇게 간사한 사람을 선택해서 그 고생고생하면서 인간 만들 필요가 없다. 나같이 좋은 사람 불렀으면 쉽게 되는 것인데, 나는 그렇게 연단할 필요가 없다. 나는 어려서 아버지한테도 회초리 딱 한 번 맞아보고 한 번도 꾸지람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가면 당연히 그럴 것이 아니겠는가? 야곱이니까 그렇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은 다 망해서 부르시고, 야곱은 생생할 때 불러서 하나님도 고생하셨다. 그런 인간을 다루려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런데 그런 인간을 다뤄놓으면 쓸데가 있다.
명마는 보통 사람은 조련을 못하고 특별한 사람이라야 조련할 수 있다고 하는데 꼭 그와 마찬가지이다. 우리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알렉산더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아무도 그 말을 타지 못했다. 그 말이 사람을 태워주지 않는다. 말이 사람을 태워주어야 사람이 말을 탈 수 있지 태워주지 않으면 못 탄다. 그런데 그 어린 알렉산더가 그것을 보고 있다가 자기가 타겠다는 것이다. 자기 아버지도 장수고 무사다. 알렉산더가 말고삐를 돌리더니 타더라는 것이다. 햇빛이 뒤에서 오니까 말이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란 것이다. 말을 돌려놓으니까 그림자가 안 보이니까 타고 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범한 놈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천하통일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도 그런 재주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야곱을 선택했지 그렇지 않으면 선택하지 못한다. 안 되는 사람은 골치 아프다. 안되면 정말 골치 아프다. 능력은 없고 어찌할 수도 없고, 힘이 있으면 주먹으로 패서 바로 잡는다고 하지 그것도 안 되지 정말 어렵다. 사람 키우는 것이 참 어렵다.
그래서 이런 예를 들었다. 내가 생각할 때 전혀 안 될 것이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 10장 11장에서 장황한 말을 계속 한다. 그런데 마지막 결과는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를 믿어라. 이 말을 하려고 오랜 얘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전도를 하려면 마지막 말은 한 말 뿐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게 하려고 많은 얘기를 한다. 똑같다. 듣다 보면 헷갈린다. 읽다보면 9장 이후에 10장 11장을 읽다보면 이 말 했다 저 말 했다 하니까 헷갈린다.
나도 누구를 만나면 할 말은 한가지뿐이다. 한가지뿐인데 딱 한 가지만 하면 안 들으니까 이것저것 섞어서 얘기를 하게 된다. 나에게 어떤 사람은 야당이라는 사람도 있고, 여당이라는 사람도 있고, 진보니 꼰대라고도 한다. 나는 진보도 아니고 꼰대도 아니다. 그런데 때로는 꼰대도 사용하고, 때로는 진보도 사용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말을 유도하고 듣게 하려는 것이다.
진보인 사람에게 반대하는 말을 하니까 아예 고개를 젓고 듣지 않아서 놀랬다. 아기 때부터 아는 아이인데 물드니까 말을 해 보니 대번에 튀었다. 나는 그것을 모르고 어려서 너무나 잘 아는 아이니까 얘기하면 될 줄 알았다. 안 된다. 어떻게 되어버린 인간인지 절대로 안 된다. 한의대를 다니다가 졸업을 하지 않고 보류해놓고 그 일을 하고 있다. 못 말린다. 도저히 말릴 수가 없다. 이념이나 종교에 잡히면 사람이 요지부동이다.
바울이 이렇게 여러 가지 말을 했다. 여러 말을 해서 여러 말 여러 말 하다가 마지막에 가니까 결국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 말이다. 우리가 결국은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을 하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호감을 사서 얘기를 듣게 하려고 이것저것 말을 한다. 나도 사람을 만나면 한 시간씩 얘기를 한다. 진이 다 빠진다. 그래도 할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서 한방에 될 수 있는 말이 없는가를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안 된다.
울산 황*연 형제가 종교적으로 열심 있는 형제들을 만났다. 이*식, 정*호는 중공업 지하실에 방을 마련해 놓고 사랑의 형제 선교단이라고 해서 맨날 통성 기도하고 울던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주일이면 인천까지 예배를 보러 다니던 그런 사람들이다. 이*식이 전도하러 온 것을 가지고 ‘당신은 어둠이요.’라고 했다. 당신은 어둠이라고 하니까 이*식 형제가 거기서 확 넘어졌다. 내가 어둠인가? 그것은 아무나 흉내를 못 낸다.
나는 그렇게 한방에 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래도 열심히 설명해서 알아듣게 하려고 하고 있는데 황*연은 성경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데 저기 울진 집회에 와서 그때 어떻게 뭐가 비춰져서 하는 말이 그것밖에 없다. ‘어둠이요.’ 이 말밖에 없다. 그런데 아주 골통분자들이 따라왔다. 아무것도 모른다. 창세기가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둠이요.’ 그 한마디에 꼬꾸라져서 따라왔다. 그래서 울산교회가 된 것이다. 아무나 그렇게 못한다. 그것도 타고나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은혜를 받아야 되는가 모르겠는데, 그렇게 되었다.
바울도 그렇게는 못하고 장황하게 3장이나 써서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바가 많이 있다. 오늘 우리의 현실과 다른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의 현실과도 같다. 많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음 주까지 숙제다. 9장 10장 11장을 몇 번씩 읽어보라. 한번 읽어서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 말 했다 저 말 했다 하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이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읽다보니까 나대로 이렇게 정리가 되었다.
결국은 그리스도를 믿어라! 이 말을 하려고 하는데 아는 게 많은 사람들, 전통이 많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말을 하려니까 복잡하다. 그것을 알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되는데 너무 무엇이 많다. 스펙이 많은 사람들이다. 조상 때부터 자료가 잔뜩 쌓인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를 다 해야 된다.
기독교인도 그렇다. 우리도 많이 쌓였다. 이것은 지금 서구화된 종교이다. 순수하게 동양적인 입장에서 보면 좀 어이없는 것이 많다. 바탕이 다르니까 폐쇄된 자리니까 서로 교통이 잘 안 되었다. 순수하게 예수냐? 이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대로 전달이 되었는가? 아니면 서구화되어서 유럽 사람들, 성경으로 말하면 헬라인들을 통해서 각색되어서 나왔는가? 이것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충돌이 일어났다. 왜 충돌이 일어나겠는가? 문화적인 충돌이다. 중요한 것이 문화적인 충돌이다. 우리나라에 와서도 이 충돌이 가장 심각하게 많았다. 조상 제사 문제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을 지키려는 사람과 이것을 파괴하려는 사람 사이에 수많은 문제가 생겼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고 문화적인 문제이다. 사람이 가장 먼저 부딪힌 것이 문화적인 문제이다.
불교는 가는 데마다 그 문화에 적응한다. 인도불교 다르고, 중국불교 다르고, 일본불교 다르고, 다 다르다. 그 문화에 적응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가지고 있는 문화를 그대로 전하려고 한다. 이것도 무리한 일이다. 소화해서 해야 하는데 미개한 민족이니까 연구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아프리카에 가면 그 민족의 기질을 다 연구해서 선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미국과 유럽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봤을 때, 그때 당시는 정말 미개한 사람들이었다. 더군다나 식자층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일반 평민들에게 들어왔으니까 오죽 했겠는가? 그때도 만일 사대부 쪽으로 들어갔다면 조금 생각을 달리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는데, 그것도 그렇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당나라에 들어간 기독교가 경교가 되었는데 얼마가지 못하고 없어져버렸다. 평민 속에 들어갔던 그것이 그래도 살아났다. 왜냐하면 외국의 전통이 들어와서 그것으로 지배를 했기 때문에 오래 간 것이다.
본질의 문제는 다른 문제이다. 이것도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초창기에는 문화적으로 압도가 되었다. 신부들이 왔을 때, 우리의 형편과는 너무 달랐다. 사정이 너무 달랐다. 소위 지금 말하는 문화인과 야만인처럼 그렇게 달랐다. 그것 자체에 압도가 되는 것이다. 그때 누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겠는가? 천주교 신부들이 아니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사람이 없다. 그 집에 가면 오디오니 별것이 다 있다. 가면 휘둥그레진다. 이런 사람들이 믿는 종교니까 무조건하고 믿게 되는 것이다.
하여간 문화적인 문제와 본질의 문제와는 아주 다른 문제인데, 우리는 섞어져있고 기독교도 그렇게 전파를 했다. 그 힘이 강하고, 그 힘이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신선한 충격을 받을 필요가 있다.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로 돌아가 볼 필요가 생겼다. 이제는 더군다나 그렇다. 앞으로 기독교가 계속 궁지에 몰릴 것인데 근본적인 자리를 못 찾으면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바울의 간절한 심정과 오늘날의 문제와 우리들의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