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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짐크루 백패킹 계획 http://cafe.naver.com/tripwithbackpack/67
설악산 최고 절경 울산바위 http://cafe.naver.com/themukja/609830
북설악 신선대는 금강산 줄기의 마직만 능선
미시령 옛길을 분기점으로 설악산과 금강산이 나뉘어짐
신선봉이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첫번째 봉우리,
화암사는 금강산 팔만구암자의 첫번째 암자
그래서 화암사 일주문현판에 금강산 화암사라고 적혀있음.
전국의 신선대는 여러 곳이 있음.
설악산 공룡능선, 부산, 도봉산, 거제도.... 공통점은 풍광이 아름답다.
신선대에서 바라보는 울산바위는 정말 절경임.
산행은 금강산 화암사 일주문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화암사 기념품 판매소 앞쪽 쉼터 의자가 있는데 수암 가는길 안내판이 보인다. 거기서 급경사길로 10여분 올라가면 능선마루에 커다랗게 솟아오른 수암을 만날수 있다.
수바위을 감상하고 다시 능선을 타고 40여분이면 최고의 명당 북설악 신선대가 나온다.
울산바위가 지척이고 발아래 과거와 현재의 미시령길이 굽이굽이 휘어져 보인다.
넓은바위가 고래등처럼 펄쳐지고 낙타바위와 기암괴석이 반긴다.
하산은 오던 길로 다시 선인대삼거리로 내려가 선인재로 올라서면 금강산 화암사숲길 안내도가
나오고 삼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 출입금지 안내표시가 서 있는 곳에서 화암사골 산림치유길로
하산 산행이 끝난다. 출입이 금지된 삼봉으로 오르면 우리나라 최북단 백두대간으로 이어진다.
진부령 쪽으로 신선봉, 마산봉으로 미시령 건너서는 황철봉, 마등령으로 이어진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769년(혜공왕 5)진표(眞表)가 창건하여 이름을 금강산 화엄사(華嚴寺)라고 하였다.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 금강산으로 들어온 진표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鉢淵寺)를, 서쪽에 장안사(長安寺)를, 남쪽에 이 절을 각각 창건했는데, 화엄사라고 한 까닭은 이곳에서 《화엄경》을 강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화엄경》을 배운 제자 100명 가운데 31명은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69인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았다고 한다. 또 진표는 이 곳에서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여 이 절의 부속 암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 뒤 941년(태조 24)월영암(月影庵)을 창건했으며, 1401년(태종 1)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彌陀庵)으로 이름을 바꿨다. 1623년(인조 1) 불에 타자 1625년 중건하였다.
1628년에는 광명(廣明)이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안양암(安養庵)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1635년 산불이 일어나 다시 불탔다. 이에 동쪽 20리 지점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1644년(인조 22)에야 옛터에 중건하였다.
1662년(현종 3)에도 화재가 있어 중건하였고, 1716년(숙종 42)에는 산적들이 불태워 버렸다. 이듬해 승려들은 동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무릉도(武陵島)에 초옥을 짓고 거주하다가, 1721년(경종 1) 옛 절터로 돌아와 중건하였으며, 해성(海城)은 안양암을 중수하였다.
1760년(영조 36) 대웅전과 향각(香閣), 승당이 불 타자 승려들이 협력하여 이듬해 승당을 세웠고, 1762년에 대웅전과 향각을 중건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화성 도한(華城 道閑)이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21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放光)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제조상궁(提調尙宮) 최(崔)씨를 이 절에 파견하여 도한을 궁궐로 데려 오도록 하여 경위를 듣고 크게 감격하여 이 절을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요사채 2동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미타암의 화응전(華應殿)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 병풍 6폭, 연(輦)을 하사하고, 절의 사방금표(四方禁標)를 정해 주었다. 이로써 이 절은 창건 이래 가장 큰 사역(寺域)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60년(철종 11) 산불로 암자까지 모조리 소실했으며, 춘담(春潭)이 중심이 되어 중건에 착수하였다.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며 시주를 모으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화엄사와 안양암을 중건했으며, 수봉(穗峰)은 탱화를 조성했다.
1864년(고종 1) 다시 산불로 소실하자 불타지 않은 승당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지내다가 이 해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현왕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그리고 화재를 면하고자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남쪽의 화기를 지닌 수암(秀巖)과 북쪽의 코끼리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여 100m 아래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1872년수봉이 새 터에 법당과 영각(影閣), 누각, 요사채를 중건했으며, 1882년(고종 19)자허(耔虛)와 선월(船月)이 철원 장구사(長久寺)에서 아미타여래좌상과 약사여래좌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1893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안양암이 붕괴되었고, 1894년축성(竺星)이 중수했으며, 1909년영운(影雲)이 안양암에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1912년에는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전국 31본산 중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된 뒤부터 화암사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다. 1915년 9월 다시 불타서 1917년 중건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때 크게 파손되어 건물 1동만 남게 되었다.
1953년 휴전 뒤에 건봉사 극락암에 있던 한 비구니가 정착하여 머물렀다. 1986년에는 주지로 부임한 양설(良說)이 중창하여 다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 인법당(因法堂), 금강루(金剛樓), 일주문, 미타암(彌陀庵), 요사채 등이 있다. 특별한 문화재는 없다.
수암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수암에는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끼니 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2인분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욕심 많은 한 객승이 이를 보고 ‘3번 흔들어 2인분의 쌀이 나오면, 300번 흔들면 200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팡이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구멍에서는 피가 나왔고, 이후 쌀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 산, 바다, 호수 삼박자를 갖춘 속초 - 인용: 백두대간 가는 길(민병준)
내설악ㅇ에 백담사가 깃들어 있다면 외설악엔 신흥사가 버티고 있다. 외설악의 주찰인 신흐아는 652년 에 자장이 향성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집이다. 앞뜰에 9층 석탑을 세우고 석가의 사리를 봉안하면서 제법 큰 사찰로 성장했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적이나 유물은 그리 많지 않다. 1,400여 년 간 이어 오며 만난 몇 번의 화재 때문인데, 특히 한국전쟁 당시 설악산 일대에서 피아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소중한 문화유산도 거의 불에 타 버렸다.
눈에 띄는 유적은 속초에서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설악동 어귀인 켄싱턴 호텔 앞에 세워져 있는 향성사지 3층석탑(보물 제443호)이다. 통일신라 말기에 쌓은 이 탑은 동해안에서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신라시대 석탑이어서 그 보전의 가치가 매우 크다고 전문가들은 진다한다. 그러나 불에 타 버린 향서사의 그림자 때문일까. 아쉽게도 그 가치에 비해 반쯤 잊힌 유적이 되고 말아다. 도로변에 자리한 까닭에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외설악에 보물급 석탑이 있다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한다. 다만 관심있는 사람들만 이따금 호텔 진입로 한쪽에 차를 세워놓고 석탑을 들여다볼 뿐이다.
설악 동쪽에 자리잡은 속초는 산과 호수와 바다의 고을이다. 산은 설악이요, 호수는 청초호와 영랑호요, 바다는 동해다. 자연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속초는 첫 대면에 누구라도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드는 힘을 지니게 되었으니 속초의 머리에 '남한 최고의 관광도시'라는 왕관을 씌워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1950년대 이전만 해도 속초는 영동지방의 아주 한적한 어촌이었다. 설악 기숡이라 옥토는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청초, 영랑 두 개의 호수와 바닷가에는 온갖 물고기와 해산물이 철마다 넘쳐 났다. 풍광 좋고 먹을거리 풍부하니 정말로 살 만한 곳이었을 것이다. 청초호 남쪽의 조양동에서 발견된 선사유적지는 이곳이 오래전부터 인류가 터전을 삼았을 정도로 거주 조건이 아주 좋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청초호 바깥에 수군만호영을 두면서 속초는 비로소 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군사적 효용성이 떨어지면서 다시 조용한 포구로 돌아갔으나, 1905년 동해 연안항로가 개설되자 청초호가 선박의 기항지로 이용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1937년경부터는 양양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을 청초항에서 실어나르면서 고을의 규모가 점차 커지기 시작하다가 한국전쟁으로 북한 피난민이 대거 남하하여 청초호 모래 언덕에 정착하면서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하였다. 이후 1963년에 시로 승격하면서 인근은 양양 중심의 생활권에서 속초가 생활의 중심권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양양 등 이웃 고을의 주민들이 기억하는 속초의 행정단위는 '시'가 아니라 '리'다. 현이 있었던 게 아닌 속초는 행정구역 개편 때마다 북쪽의 간성과 남쪽의 양양에 끼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작았으며, 그 대부분은 양양을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삼은 변두리 지역이었다. '속초리'라는 지명은 1914년에 처음 등장한다. 이는 항구로 쓰이는 속진과 청초호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 한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속초리는 속새과의 상록양치식물인 속새라는 풀이 많아 속새울, 속새골이라고도 했는데 여기서 속초라는 지명이 나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먼저 영랑호로 가보자. 삼국 통일의 위엄을 이룬 신라에는 화랑도라는 무리가 있었다. 영랑호라는 명칭은 화랑이었던 영랑이 오랫동안 머물면서 즐겼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읳해 붙여졌다. 울산의 천전리 각석에도 영랑이 화랑으로서 수련을 마친 것을 기념하는 글귀가 남아 있고, 금강산 삼일포에도 당시에 썼다는 '영랑도 남석행'이라는 글귀가 있다 하니 영랑은 꽤 유능하고 활동적이던 화랑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시인묵객들 사이에는 영랑의 족적을 좇아 여행하는 게 한때 유행이기도 했다고 한다.
영랑은 술랑, 남랑, 안상과 더불어 사선으로 꼽혔다. 당시도 그들은 나라 제일의 명산인 금강산에서 무예를 연마하던 중 무술 대회에 나가기 위ㅐ 삼일포에서 3일동안 쉬다가 경주로 가는 길에 영랑호를 지나게 되었다. 그러다 영랑은 이 호반의 풍취에 매료되어 무술 대회에 나가는 일조차 잊었던 것이다.
영랑호의 분위기가 고즈넉한 반면에 속초 시가지와 붙어 있는 청초호 안에는 언제나 어선들이 빼곡하다. 어디까지가 호수고 어디부터 바다인지 잘 구분이 안된다. 조선시대에는 청초호에 수군만호영을 두고 병선을 정박시킨 일도 있었다. 지금도 속초항의 내항으로 쓰이고 있으니 어쩌면 청초호는 호수라기 보다는 항구의 운명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흔히 항구인지 호수인지 정체 모호한 청초호를 보고 실망하기도 한다. 또 단어가 풍기는 청초함은 느끼기 힘들고 오히려 기름때와 오물로 혼탁해진 바닷물 때문에 여행객들은 서둘러 호수를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울산바위와 그 너머의 설악산이 비치는 청초호의 풍광은 영랑호의 그것보다 아름답다. 그래서일까?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낙산사 대신 청초호를 관동팔경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청초호 곁에 있는 마을인 청호동은 한국전쟁 당시의 애달픈 사연이 전한다. 1-4후퇴때 흥남철수작전으로 함경도 원산, 함흥, 청진 등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휴전이 되자, 고향 가는 길목이면서 ㄱ자ㅏㅇ 가가운 속초로 하나둘 몰려들었다. 그들ㅇ른 바다와 호수 사시의 청초호 모래톱 위에 아쉬운 대로 움막 같은 쪽방을 짓고 모여 살았다. 당시 청초호를 낀 속초항으 ㄴ오징어, 명태, 양미리 같은 바닷고기들이 넘치도록 잡혔다. 그래서 남정네들은 고깃배 타고 바다로 나갔고, 아낙네들은 포구에서 잡아 온 고기를 털어 내는 허드렛일을 하며 낯선 타향에서의 삶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어황이 한창 좋을 때인 1960-1970년 대는 청호동 주민은 7000명이 넘었다.
물론 이들 중 대부분이 월남민들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어획량이 급격히 줄자 어업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진 주민들은 하나둘 타지로 떠나버렸다. 현재 청호동에 남아 있는 월남 1세대는 700여명이고 3세대까지 합쳐봤자 모두 2000여 명을 넘지 않는다.
흔히 이곳ㅇ르 할아버지 노인의 함경도 사투리인 아바이 마을로 불리는 까닭은 1세대들이 대부분 노인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1960년대 도시 변두리 풍경의 야외 세트장 같은 분위기 넘치는 골목길, 허름하고 낮은 지분ㅇ의 서너 평짜리 성냥갑 같은 집들이 들어선 청호동 골목 풍경은 속초 시내와 다르다. 관광의 천국 속초 속에 이런 마을이 있나 싶게 도시 속의 오지이다.
이따그 ㅁ남북이산가족문제가 불거질 때 외에는 속초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주목 받을 이유가 전혀 없던 이 마을에도 21세기 벽두에 관심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2000년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젼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방문객들이 쏟아져 들어왔기 뗘문이다. 청호동 마을이 생기고 가장 많은 외지인이 탖아온다는 귀띰인데, 성수기엔 하루에도 수백 명의 관람객들이 은서와 준서의 애틋한 정을 느끼기 위해 청호동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대만, 중국, 일본 등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이들은 드라마에서 은서 엄마가 장사하던 허름한 슈퍼마켓에서 기념 사진을 찍어간 다. 이들이 더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갯배'다.
갯배는 긴 철선 두 가닥을 호수 양안에 느슨하게 매어놓고 철선 하나에 각각 배를 한 대씩 고정시킨 다음, 갈고리를 철선에 걸어 당기면서 배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방법으로 운항하고 있다. 현재는 뱃사공이라 할 수있는 사람들이 한ㅁ ㅕㅇ씩 타고 있으나 승선한 사람이 직접 갈고리로 배를 끌어야 한다. 이 갯배를 타고 1-2분만 줄을 잡아당기면 건터편 선착장에 ㅏㄷㅎ을 수 있다. 이는 청호동 주민들의 교통수단이다. 청초호 동쪽의 모래 언덕에 자리한 청호동 주민들은 갯배를 타고 청초호를 건너가 신에서 볼일을 본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장을 보러 나가는 아주머니도, 마실 나가는 할아버지도 모두 이 배를 이용한다. 만약 이 배가 없다면 수많은 청호동 주민들은 10리나 되는 먼길을 돌아나가야 될 것이다.
휴전 후 이곳에 정착한 조막손 영감이라고 불리던 김씨 노인이 20명쯤 탈 수 있는 뗏목을 만들어 뱃삯을 받은 것이 갯배의 효시라고 한다. 당시에도 뱃삯으느 매우 적었지만, 김 노인은 갯배 일로 아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이후 몇 번의 주인이 바뀌면서 지금은 공개 입찰로 정하고 있다. 갯배의 가격은 편도 200원인데, 청호동 주민들은 공짜다. 그러나 뱃삯 받는 노인은 청호동 주민의 가족사를 줄줄이 꿰고 있으니 재미로라도 무임승선하려는 생각은 거두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