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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7. 묵상글 들 ( 부활 7주 수요일-사랑의 가장 큰 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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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7.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7주 수요일-사랑의 가장 큰 적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작별하시며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데
당신 삼위가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어떻게 하면 성삼위 하느님처럼 하나가 될 수 있고,
하나가 되는 데 있어서 어떤 것들이 장애가 되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제일 먼저 성격이 다른 것을 봤습니다.
사랑해서 하나가 되었지만 성격이 달라 갈라졌다고
하도 많이들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바이지만 다르기로 치면 성격이 다른 것보다
성性이 더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남성과 여성이 더 다릅니다.
그런데도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기에 만난 것입니다.
사랑했을 때는 다른 것이 문제가 없거나 오히려 남녀가 다르기에
서로 끌리고 사랑했었는데 사랑에 문제가 생기니 다른 것을 문제 삼습니다.
제가 저의 육신의 누나들을 만나면 정말로 많이 부닥칩니다.
거의 모든 것이 다르고 그래서 저와 다른 식으로 저를 사랑해주시는데
그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랑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르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랑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지간에 갈라설 일이 없습니다.
만약 갈라진다면 재산 문제로 갈라서지
이런 것 때문에 갈라설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생각이 다르고, 주장과 이념이 다르고, 종교가 다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우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고, 심각하게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싸우거나 갈라질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것을 가지고 자기를 고집하기에 싸우고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상대가 왜 저런 생각이나 주장을 하는지 잘 들어보면
상대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이해하게도 되는데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싸우고 서로 갈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 저와 제가 존경하는 수사님과는 정치적으로 정반대였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논쟁을 참으로 많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제가 수사님께 대한
저의 존경이 줄어들지 않았고 그래서 갈라질 이유가 도무지 되지 못했지요.
그러므로 이런 다름은 사랑의 적이 아닙니다.
사랑의 진짜 적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얘기하는 '자기'란 너를 인정하거나 존중치 않는 자기입니다.
우선 자기 욕심이 사랑의 적입니다.
재물을 자기 소유로 하려는 욕심이 서로 다투게 하고 갈라지게도 하지만
너를 나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그 욕심이 더 사랑의 적입니다.
재물 소유보다 사람 소유가 더 사랑의 적이라는 얘기인데 사람 소유란
너를 나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그래서 서로 다투다 결국은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제일 문제가 되는 사랑의 적은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지독한 '자기중심' 또는 '자기집중'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최고이고 자기밖에는 없으며
그러므로 교만할수록 남에 대한 존중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거지만 저의 고질병이 바로 지독한 교만이지요.
형제가 잘못하는데 그는 괴로워하지도 고치려 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 괴로워하고 그래서 결국은 그 형제의 잘못을
제가 고쳐주려고 하고, 공동체의 분위기도 제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거나
공동체의 문제를 제가 다 해결하려는 것 등인데 이것이 다 교만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욕심과 교만을 경계하여 자기를 버릴 때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신
주님 말씀대로 사랑을 하고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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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7.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도 아름다운 고별사가 이어집니다.
먼저 복음 속 예수님의 기도에 머무릅니다. 아버지께 제자들을 위해 청하시는 하나 하나가 얼마나 사려 깊고 자애 넘치는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느껴집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청하시는 것 중 하나는 하나됨입니다. 이 하나됨의 모델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성삼위 하느님의 하나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들처럼 성삼위 하느님과 하나 되고, 그로써 이웃, 형제, 자매, 모든 피조물과 하나됨을 누리기를 기도하십니다. 통치의 편리를 위한 획일화가 아니라,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성삼위 안에서 당신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행복하시니 나누시고 참여시키시려는 것이지요.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요한 17,16).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또 다른 기도는 악으로부터 보호입니다. 우리가 늘 바치는 주님의 기도 마지막 청원과 일맥상통하지요.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들은 어둠의 세력이나 악의 권세에 노출되어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지만 세상의 우상숭배에 편승하지 않는 이를 세상은 이물질처럼 불편해하며 밀어내려 하고 제거하려 들기 마련이니 아버지의 보호가 절실합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예수님의 세 번째 바람은 제자들의 성화입니다. 거룩함! 이는 하느님의 속성이고, 그분 모상인 우리의 가능성이며, 본 모습이지요. 세상 순례길에서 죄와 약함에 물들어 잠시 잃기도 하고 퇴색될 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회복이 가능하지요. 바로 진리가, 곧 말씀께서 거룩하게 해 주시는 명약이니까요.
말씀께서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비록 성경 전문가나 석학이 아니어도 매일 말씀을 만나 머무르고 품고 되뇌이면서 사랑하는 동안 가랑비에 옷 젖듯 우리 영혼은 거룩해집니다. 지식이 아니라 진리가, 소리가 아니라 말씀이, 숫자가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성화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에페소 원로들을 향한 사도 바오로의 고별사가 이어집니다.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사도 20,31)
이는 공치사가 아니라 실제 바오로의 선교 태도 그대로이고, 또 우리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시던 모습이기도 하지요. 제자들은 이렇게 스승의 눈물과 한숨, 헌신을 먹고 성장합니다.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사도 20,32).
그들 곁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는 바오로는 그들을 하느님과 말씀에 맡겨드립니다. 말씀은 뒤에 남겨질 신생 교회 공동체에게 바오로를 대신해 등대도 되고 이정표도 되고 정화의 물, 성화의 불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진리를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이론에서 찾는 것은 흐르는 물을 움켜 쥐듯 속절 없는 일입니다. 누가 진리를 맛보았다면, 그건 그가 배워서라기보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마련이니까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진리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말씀이 늘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우리 입술과 마음에 있으니까요. 그러니 진리이신 말씀께서 우리를 정화하시도록 내어맡깁시다. 우리는 진리로, 말씀으로 거룩해질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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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7.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활 제7주간 수요일>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17,11)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딩신 제자들이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보호받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당신 제자들도 이 하나 됨을 체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 세상을 이겨내신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이 주는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 악의 유혹으로부터 당신 제자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인 아버지의 말씀 안에서, 곧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써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제자들도 말씀 안에서, 말씀의 순종을 통해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서로의 다름을 틀렸다고 말하는 우리들!
생각과 입으로만 믿고 따르면서, 삶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너무나도 쉽게 세상 유혹에 빠져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들!
진리인 말씀 안에 머물기 보다는 세상의 말에 머물러 있는 우리들!
때문에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이 기도는 또한 부족한 우리를 위한 간절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사도20,28-38)는 사도 바오로가 투옥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말한 고별사입니다.
이 고별사에서 사도 바오로는 녹록지 않은 세상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사도20,29-30)
그래서 우리에게는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 성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성찰해 보고, 성령을 받기에 합당한 몸과 마음이 되게 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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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7.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20,28-38
요한 17,11ㄷ-19
저 위에서 기쁜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고난의 여정이었지만 동시에 기쁨의 여정이었던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행이 오늘도 계속됩니다.
대축제인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냈으면 하는 바오로 사도의 바람 때문이었는지,
발걸음을 재촉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에페소에서의 냉대와 박해 속에 겨우 목숨을 건진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로 갔습니다.
그리스에서 석달 가량 머문 뒤에 시리아로 가려했으나, 유다인들이 바오로 사도를 해칠 계략을 짜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할수 없이 바오로 사도는 마케도니아를 거쳐 돌아갑니다.
그야말로 기약없는 고난의 행군입니다.
필리피에서 트로아스로, 트로아스에서 또 다시 배를 타고 아쏘스로, 아쏘스에서 미틸레네로, 미텔레네에서 사모스 섬으로, 그 다음 날에는 밀레토스로 넘어갔습니다.
오랜 여독과 박해와 매질로 온 몸이 병든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 참으로 혹독한 여행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도를 횡단하는 먼거리를 도보로 걸은 후에는 하루 쉴만한데, 바오로 사도는 그 다음 날 이른 아침 또 다시 배에 오릅니다.
기도로 꼬박 밤을 지새운 후,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행장을 꾸리곤 했습니다.
밀레토스에 도착한 바오로 사도는 64 Km나 떨어진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감동 깊기로 유명한 ‘고별 연설’을 행합니다.
이 연설은 바오로 사도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신 유일한 연설입니다.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고별 연설은 사도행전 20장 17~38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지상에서는 더 이상 만날 기약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음성은
비장함으로 가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과 박해를 받게될 남아있는 제자들과 양 떼를 생각하니 깊은 슬픔과 측은함이 밀려와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립니다.
“나는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2~35절)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살았던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 전도 여행길에 겪었던 고초들, 남겨질 양 떼를 향한 사랑에서 우려나온 바오로 사도의 염려가 아무런 가감없이 잘 소개되고 있는 명설교입니다.
고별 연설이 끝나자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에페소 교회 원로들은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그런 모습을 본 바오로 사도는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지상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다들 흐느껴 울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바오로 사도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습니다.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 불찰을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부디 건강하십시오.
저 위에서 기쁜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고통과 시련, 그러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정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잘 갖춰진 여건 속에서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에 임하지 못했던가 하는
자책감이 밀려왔습니다.
지칠줄 모르는 선교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바오로 사도와 쥐꼬리만큼 일하고도 ‘피곤해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가 입에 붙은 제 모습이 크게 대조되어 많이 서글펐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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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7.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20,28-38
요한 17,11ㄷ-19
부모는 자녀 때문에 거룩해진다
영화 ‘비투스’(2006)는 아이큐 180의 천재 소년 비투스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 아이의 천재성을 자랑하며 만족해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천재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15세도 안 되었는데도 대학 수업이 재미없어 강제졸업을 해버려야 하는 처지이기에, 친구가 하나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비투스는 평범한 삶이 늘 그립기만 합니다.
아버지는 비투스가 이젠 공대에 재입학하기를 원합니다.
비투스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할아버지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비투스에게 날개를 만들어줍니다.
만들어진 새의 날개를 어깨에 끼고 비투스는 2층에서 뛰어내립니다.
그 사고로 다친 곳은 전혀 없지만 비투스는 평범한 아이큐의 아이가 된 척합니다.
건강하고 평범한 아이로 되돌아온 비투스에 부모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러나 친구들과 같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비투스는 매우 신이 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하여 가정이 어렵게 됩니다.
비투스는 평범해진 척 하며 부모를 속이는 것을 그만두고 천재적인 머리를 이용하여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주식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름 모를 투자의 귀재가 되어 아버지 전 회사를 인수하고 아버지를 사장으로 앉혀 줍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기대가 컸던 엄마를 위해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여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부모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이 모든 사실을 기록해 놓은 편지를 받습니다.
아이가 평범하지 않은 삶을 힘들어했음에도 부모가 아이를 다시 본인이 싫어하는 천재의 삶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했던 사실을 알고는 부모도 크게 뉘우칩니다.
사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더 성숙해지는 사람이 상대의 부모가 됩니다.
비투스는 어렸지만, 부모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수 있었던 부모의 부모였던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 때문에 거룩해지게 됩니다.
자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음이 곧 거룩함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먹힘으로써 자신의 거룩함을 자녀도 지니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름’은 ‘본성’을 의미하고,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시는 본성은 곧 ‘신성’, 즉 성령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시는 성령으로 제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들어서
서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을 받은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룩해지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비투스가 부모를 위해 다시 특별해진다면 이제 보통 사람들로부터는 외면당하고
미움과 질투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녀들을 이렇게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배웁니다. 부모를 먹고 자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가 거룩하지 못하면 자녀들도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위해 거룩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채변봉투를 가져오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온 교실에 화장실 냄새로 가득 찹니다.
개똥을 퍼간 아이들은 구충제를 한 움큼 받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그런 시절이었는데, 우리 집도 재래식 화장실이었기 때문에 채변 봉투에 변을 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뭇가지로 변을 채취하다가 그만 비닐봉지를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나뭇가지로 해 보려고 했으나 채변봉투가 더러워지기만 했습니다.
이때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긴 손으로 그 냄새를 다 맡으며 봉투를 건져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구토가 쏠리는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녀를 위해 그렇게 더러운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부모는 자녀 때문에 힘들지만, 그 자녀 때문에 또한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녀를 많이 낳지 않으려는 이때,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대상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 자녀들일 수 있음도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저도 이번 코로나 이후에 만약 유튜브를 하지 않았다면 몸은 편했을지라도 훨씬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글을 읽고 동영상을 보시는 분들에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나를 고생시키는 그 자녀가 바로 나를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나중에 주님 앞에서 봉헌할 수 있는 열매는 나를 먹고 거룩해진 자녀들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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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7. 이영근 신부님.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에 이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곧 제자들과 세상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부분과 당신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청원기도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 절절한 순간에 제자들이 “하나”되기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구원의 사명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를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적 일치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본성적 일치요, 다른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랑의 일치, 성령의 일치입니다. 곧 그리스도는 본성상 아버지와 같으시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리스도의 주입된 사랑으로 말미암아 일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치는 제자들에게로 번져갑니다. 곧 다음의 두 가지로 번져갑니다. 하나는 <사도행전>에서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사도 4,32)라고 말할 때처럼, 그리스도인들 간의 하나 됨이요, 또 하나는 <코린토서>에서 “우리는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라고 말할 때처럼,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는 단순히 혼합되어 짭뽕이 된 것도 아니요, 혹은 깡패의리로 뭉친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 된 것임을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룬 것을 말합니다.
그리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곧 일치가 그들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기쁨 없는 채로 버려두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셨고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지만, 세상은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청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십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나는 진리이다”(요한 14,6)라고 스스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진리 안에서 기쁨을 얻고,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니, 진리이신 말씀을 행함으로서 우리 안에 거룩함은 더욱 자라게 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
주님!
깨끗하기보다, 진실 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기보다,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단지 함께 있기보다,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 안에서 사랑하되, 행동하게 하소서.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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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7. 새벽을 열며. 부활 제7주간 수요일. 빠다킹 신부님
사람들은 평균 수명과 장수에 집착하고, 장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이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좋은 나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평균 수명이 늘어서 예전에는 성대하게 치루던 환갑잔치나 고희연을 하지 않는 경우도 참 많다고 합니다. 또 어느 시골에서는 50대인데 청년회장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점점 고령화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은 늘어나면서 장수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서른에 취직해서 쉰 전에 정리해고 당하는 게 일상인 나라에서 100세 시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일 것입니다. 전보다 넉넉한 삶을 산다고 해도 할 일이 없고, 또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면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행동을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세상에서는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최고로 여기는데, 주님께서는 단 한 번도 돈 많이 벌라고도, 높은 자리에 오르라고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바로 사랑의 길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의미 없는 장수보다 의미 있는 사랑의 길이 우리를 분명히 행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영혼은 육체 안에 살아도 육체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살지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당신께서 성체를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머무르게 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십사고 청하십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이 세상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을 채우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따라서 이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 역시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아버지 하느님의 보호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보호를 우리는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인 만족에서 멈추고 마는 삶이 아닌,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영원한 삶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역시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겠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사랑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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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이 없다는 것은 축복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에드거 앨런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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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리는 길
사람들이 아플 때 필요한 것은 약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환자가 약을 통해 건강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 약이 무분별하게 나온다면 어떨까요? 검증되지 않은 약은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독약이 될 것입니다.
미국식품의약국(Food and Drug Administration)이 있습니다. 모든 식품과 의약품의 통제, 관리, 승인의 일을 담당합니다. 현재 이곳에서는 1년에 1조 달러 이상의 상업용 상품을 규제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규제를 통해서 목숨을 건진 사람의 숫자가 페니실린이 살린 사람의 수와 맞먹는다고 하더군요. 규제를 통해 약이 시중에 돌지 못하게 해서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지 않으시고 너무 엄격한 사랑의 계명을 주신다는 점을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규제 없이 약이 나오면 오히려 생명을 잃을 수 있는 것처럼, 주님 사랑의 계명이라는 규제를 지키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단순히 규제와 억압으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진정으로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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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7. 부활 제7주간 수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애잔한 갈라짐을 묵상합니다. 굳이 사회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가족과 이웃 안의 갈라짐도 가슴 한편에 쓰라린 상처로 남아 있음을 고백합니다. 상처를 헤집는 또 다른 갈라짐으로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힘겹게 살아갈 테지요.
언제 상처가 아물까 늘 기다리고 매달리고 기도하지만 아물기 전에 짓물러 터져 버리는 상처로 오늘 또 울먹거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되고 쓰린 일상을 십자가에 빗대어 생각해 봅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듯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서로 힘들어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삶의 고통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 고통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견디는 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이러한 가르침은 흔히 스스로 깨달았다고 가르치는 대중 설교가의 무책임한 현실 도피적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지금의 고통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시 살펴보고 희망을 가지라는 터무니없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현실의 고통과 처절히 ‘하나’가 되는 것이 십자가이고, 십자가의 고통을 기꺼이 짊어지는 것이 십자가의 가르침입니다.
고통을 긍정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고통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힘든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는 것이 고통스러우신가요? 아니면 힘겨우신가요? 고통스럽고 힘들면 그렇다고 크게 외치고 도와 달라 손을 내밀어 보세요.
그 외침을 듣고 그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이가 바로 옆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저 혼자 고통을 이겨 내겠다고, 마음의 생채기를 치료하겠다고 허둥대지 말고, 조용히 용기를 내어 손을 내미세요. 부족하지만 함께 맞잡은 손에서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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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7.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활 제7주간
신문사에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어르신이 있습니다. 70이 훌쩍 넘으신 분입니다. 작년 9월부터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늘 무엇인가를 하고 계십니다. 찬밥은 누룽지로 만들어서 나중에 끊여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김치가 남으면 모아서 국을 끊여서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간장도 직접 만드시고, 막걸리도 직접 만드십니다. 봄이 오니 뒤뜰에 채소를 심었습니다. 사무실에는 화초를 갖다 놓았습니다. 사무실이 따뜻해졌습니다. 마트에 가면 원하는 것을 모두 구할 수 있고, 아마존에서는 손가락 하나로 원하는 물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르신은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습니다. 어르신이 건강하기에 늘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늘 무엇인가를 하시니 건강하신 것 같습니다.
짜파구리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끊는 물에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같이 넣습니다. 소시지와 양파를 잘라놓습니다. 계속 젓가락으로 저으면서 스프를 넣고 잘라놓은 소시지와 양파를 넣습니다. 취향에 따라서 고춧가루와 올리브유를 적당이 넣습니다. 저만의 짜파구리를 만들어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볶음밥도 만들어 보았습니다. 양파와 소시지를 잘라놓고, 김치를 잘라놓습니다. 중불에 적당이 익힌 다음 밥을 올려놓고 주걱으로 볶아 줍니다. 김치는 물에 한번 헹궈주는 것도 좋습니다. 다 볶은 후에 계란 프라이를 올려놓습니다. 저만의 볶음밥을 만들어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직은 기초적인 것을 하지만 언제가 시간이 나면 더 고급단계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신앙은 근본적으로 받은 것을 나누는 겁니다.
저는 성격이 급하고, 일을 시작하면 바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 저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저의 뜻대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제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직원들은 저와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정확하게 보고 있으며, 제게 부족한 것들을 많이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새로 시작된 국회도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도를 지켜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밥은 뜸이 들어야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당의 의석수는 바뀌지만 국가는 바뀌지 않는 것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정책을 펼치면 국민들이 알아줄 것입니다. 국민들이 함께한다면 못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지혜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서로의 입장, 서로의 이익만 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부부도 서로를 바라보면 갈등과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자라온 환경, 성격, 취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기 보다는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정의 행복, 자녀의 교육, 앞날에 대한 희망입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각 단체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때로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각 단체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곳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문제들을 풀어갈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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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7.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진리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삶 -악惡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성聖-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감동적인 고별사가 계속됩니다. 삶이 거룩하고 아름다우니 고별사도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제자들을 위한 고별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삶과 마음이, 에페소 교회 원로들을 위한 고별사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삶과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떼들을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적은 안팎에 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유혹도 있지만 내부로부터의 분열도 있습니다. 참으로 책임자뿐 아니라 각자, 주님의 양떼들은 물론 자신을 깨어 잘 보살펴야 합니다. 예나 이제나 악의 유혹에 직면한 인간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작별인사도 감동적입니다.
“내가 삼 년 반 동안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 두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삶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그리고 에페소 교회 신자들을 사랑한 바오로의 삶인지 그대로 드러납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은총의 말씀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산 바오로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진리에 의한 거룩한 삶은 그의 자급자족적 삶을 통해 그대로 입증됩니다. 얼마나 신자들과 혼연일체의 삶을 살았는지 작별인사후의 장면에서 잘 드러납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들을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 과연 이런 작별의 체험이 있으신지요? 예전 졸업식 때 엉엉울던 초등학교 제자들이, 또 학년을 마쳤을 때 제 고별사에 눈물 짓던 제자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또 예전 마인라도 수사님이 장례식때 울었던 수많은 분들도 생각납니다.
매일 작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을 앞뒀다 생각하고 고별기도를, 고별사를 미리 작성하여 써 붙여 놓고 매일 읽어보며 삶을 추스르는 것도 영적 삶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과연 지금 고별기도를 바친다면 어떤 고별기도를, 고별사를 쓴다면 어떤 고별사를 쓸 수 있을런지요. 아주 예전 써놨던 ‘하늘길’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참 많이도 굽었다
하늘빛 찾아 가는 길 순탄대로 곧은 길만은 아니다
첩첩의 장애물 나무들옆 좁은 틈바구니
하늘빛 찾아 이리저리 빠져나가보니 참 많이도 굽었다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
거룩한 아름다움이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하늘빛 가득 담은 소나무야!”-2001.4.21
치열한 영적 삶을 살았던 바오로 사도의 내면도 이와 흡사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참으로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희구하며 써놨던 '들꽃같은 삶'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살아있음이 기쁨이요 행복이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
물주지 않아도 거름주지 않아도 가난한 땅에서들 무리이루어 잘도 자란다
작고 수수하나 한결같이 맑고 곱다
탈속의 아름다움이다
최소한의 자리, 양분, 소비의 가난이지만 하늘 바람에 유유히 휘날리는
샛노란 별무리 고들빼기꽃들 참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가난한 부자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2001.5.20
참으로 무소유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삶이 이러하셨을 것입니다.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를 향할 때 이런 내적가난과 자유의 삶이요 온전히 이웃과 하나된 사랑의 삶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는 구구절절 감동이요 진리입니다. 이런 고별기도에 제자들은 물론 바오로 사도 역시 결정적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들도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세상에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금과옥조의 살아있는 진리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원이 환히 드러납니다. 은총의 말씀에 교회 원로들을 맡긴 바오로처럼 진리 말씀에 제자들을 맡기는 예수님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의 아름다움, 진리의 기쁨입니다. 아름다운 진리가 충만한 기쁨을 살게 합니다. 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진리의 연인’이 될 것을 희구했고,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진리의 협력자’로 살기를 소망했으며 두분 다 진리를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참으로 진리에 대한 사랑이 그들 삶의 전부였습니다.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진리로 거룩해지는 삶 하나뿐입니다. 말씀이 진리입니다. 진리 말씀의 부단한 실천으로 날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새삼 렉시오 디비나의 부단한 수행을 통한 진리 말씀과의 일치가 영적 삶에 얼마나 본질적이요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요한복음 로고스 찬가중 다음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1,14)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해져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은총과 영광 충만한 삶이 됩니다. 사면초가 악에 포위된 상황속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출구’는 진리의 예수님뿐이요, 악을 무력화無力化할 수 있는 것도 진리로 거룩해져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악에서 지켜 주십시오”에 대한 답은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뿐입니다. 진리로 거룩해지는 삶만이 악으로부터의 보호는 물론 세상에 속화俗化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성화聖化시킬 수 있습니다. ‘착한 신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거룩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함의 불꽃만이 악을 태울 수 있으니 바로 거룩한 전례 은총입니다.
그러니 ‘악惡’에 대한 처방은 거룩할 ‘성聖’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라 하셨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으로 날로 당신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요한17,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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