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갑이(金甲伊) 사업가. 해방직후 천일(天一)고무 공장장으로 있었으며, 이리중학교 재단(裡里中學校財團)에 약간의 토지를 희사하였고 또한 화성학원(華星學院) 설립 때 부지일부를 기증하여 이 지역사회의 교육발전에 기여한 공이 있다. ☞ 김경유(金慶裕, 1769∼1832) 조선후기 한학자·교육자. 자는 경여(敬汝), 호는 춘헌(春軒), 본관은 경주(慶州), 출생은 당시의 전주부 양양면이나 만년에는 익산군 황화면 화산에서 살았다. 명운(明韻)의 아들. 그는 평생동안 많은 제자를 길렀다. 『춘헌집(春軒集)』은 필사본으로 1책에는 시(詩)와 묘갈(墓碣)이 실려있다. ☞ 김규석(金圭錫, 1844∼1908) 조선후기 사관(仕官), 자는 구서( 瑞), 호는 국헌(菊軒), 본관은 광산(光山), 익산시 신동 (당시의 沃野縣 新里)에 거주. 늦게 등과(登科)하여 재랑(齋郞),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문필(文筆)이 뛰어났다. 문집으로『국헌시집(菊軒詩集)』인쇄본 1책이 전한다. ☞ 김근배(金根培, 1847∼1910) 조선후기 우국열사. 본관 김해로 유학자이며 애국자이다. 자는 광원(光元), 호는 매하(梅下)로 벼슬은 성균관 박사. 수하 조옥승(曺玉承)씨에게 사사하여 시문을 닦았다. 모현동 출신으로 한 때는 옥구군 수호에 은거하였다. 현교(縣敎)의 아들. 우국지사로 1866년 병인양요 때 동지를 규합하여 거의격문(擧義檄文)을 상소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관헌을 피하여 나주·김제·옥구 등에 은거하면서 청장년을 모아 항일투쟁을 획책하였다. 당시 일본정부에서 내리는 은사금(恩賜金)을 받지 않고 1910년 12월 13일 돌을 몸에 매고 샘에 빠져 자결하였다. 저서로는『매하유고(梅下遺稿』인쇄본 4권 2책이 전해지고 있다. 건국유공자로 기미독립선언기념회에서 준 표창장과 대통령표창장을 받은 바 있다. ☞ 김기곤(金琪坤, 1904∼1964) 독지가. 본관은 김해(金海)로 호는 우송(又松)이다. 부친의 막대한 재산을 쾌척(快擲)하여 동산국민학교(銅山國民學校)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헌신한 바 있다 ☞ 김기형(金箕亨) 조선후기의 효자. 본관은 김해(金海), 관직은 현감(縣監)을 역임했고, 아버지의 병에 상분(嘗糞)하였으며 아버지 사후 여묘를 극진히 하였으며 솔과 잣을 심어 산소를 정성껏 가꾸었다. 고종 때 정려(旌閭)를 하사 받아 익산군 함라면 함열리에 여각(閭閣)이 있다. ☞ 김득룡(金得龍) 명종∼선조대 조선중기 무관·공신. 자는 성서(聖瑞), 본관은 진주(晉州), 함열면 출신. 힘이 남달리 세고 용감하였다. 1584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수전(水戰)에 참가하여 적선을 쳐부수고 왜적을 격살하였다. 노량(露梁)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순국하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적을 수십명 참살하며 용전분투하다가 날아오는 적탄에 맞아 역시 전사했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녹하였다. ☞ 김만순(金萬順,1893-1966) 근대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김해. 익산군 오산면 출신. 부친은 구한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김내문(金乃文). 집안이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남전교회(南田敎會)에 다녔는데 1917년 최대진 목사가 부임하면서부터 독립에 대한 사상이 많이 고취되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난 이후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꽃처럼 퍼질 때, 이곳 익산(당시 이리)에서도 김만순의 집에 모여 여러 차례 숙의한 끝에 1919. 4. 4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3대로 나누어 행하여졌는데 제1대는 최대위 제2대는 문용기 제3대는 김만순이 이끌었다. 김만순이 이끄는 제3대동익산역(동이리)쪽에서 출발하여 시장 안쪽에 이르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이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김만순은 "우리나라를 영원히 잃느냐? 다시 찾느냐? 하는 이 위기 속에서 다같이 일어납시다" 하고 독려하던 중 일본헌병이 총을 쏘아 바로 뒤따라오던 자가 쓰러지면서 대열이 흩어졌다. 1947년 3월1일[기미독립선언기념익산군민대회]에서 표창장을 받았다. ☞ 김명운(金明韻, 1740∼1797) 조선후기 한학자. 호는 대성(大聲), 본관은 경주(慶州), 익산군 황화면 거주. 한학자로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 그의 문집『대성유고(大聲遺稿)』필사본 1책이 있다. ☞ 김병수(金炳洙, 1898∼1951) 의사. 본관은 김해(金海)로 호는 삼산(三山)이다.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 출생이나 이리시에서 살았다. 군산 영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1년을 앞두고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익산에 전달하여 궐기대회에 선봉이 되어 행진하다가 왜경에 잡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3개월을 복역했다. 출옥 후 1921년에 의전을 졸업하고, 군산 야소교병원을 거쳐 다음해 익산에 삼산의원(三山醫院)을 개원하여 인술을 베풀고 사재를 털어 광희여숙을 설립하여 여성교육에 공헌하였다. 28세에 익산 제일교회 장로가 되어 교회에 유치원을 설치하고 익산 청년회관도 건립하였다. 1945년 수복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 동년 9월에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이에 항쟁하기 위하여 동년 12월에 이리,익산 독립촉성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전북지부 부위원장이 되고, 동년 9월에는 세브란스 재단법인 이사에 피선되었다. 1947년 3월 대한농민총연맹 전북위원장이 되고, 동년 4월 이리읍이 부(府)로 승격되자 초대부윤(初代府尹)에 취임하였고, 4월에는 대한농민총연맹 전국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동년 12월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이리시당 부위원장, 1949년 민주국민당의 전북당지부 최고위원이 되었다. 6·25사변을 당하여 부산에 피난 중 동래 제5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활약하다가 UN군의 진격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구국총력연맹(救國總力聯盟)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 김 봉(金 鳳) 조선중기 무신. 호는 학은(學隱), 본관은 김해(金海), 익산군 출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경력(經歷)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한 뒤 병사(兵使)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병으로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김봉문(金鳳文, 1906∼1978) 한학자. 원명은 진명(振明), 자는 봉문, 호는 담재(澹齋), 본관은 강릉(江陵), 고창군 아산면 출신이나 익산시에서 살았다. 20여세까지 고향에서 한문을 익히다가 전라도 유생대표로 뽑혀 서울 명륜학원(明倫學院; 성균관대학교 전신)을 나와 전주북중학교, 고창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이리여자고등학교에서 정년퇴임 후 원광대학교에서 강의을 맡았다. 편저에 『가례요해(家禮要解』『대학 한문교본(大學漢文敎本)』『동남해일지(東南海日誌)』선조들의 업적을 내용으로 한『창덕사지(彰德祠誌)』『한국의열록(韓國義烈錄)』, 전국에 산재해 있는『비갈문집(碑碣文集)』,『호남인물지(湖南人物誌)』등이 있고, 문집『담재유고(澹齋遺稿)』가 있다. ☞ 김석산(金碩山) 숙종∼영조대 조선후기 공신. 호는 잠헌(箴軒), 본관은 김녕(金寧), 익산 출신. 동지중추(同知中樞) 명환(命還)의 아들. 1728년에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켜 전주가 함락되자, 큰 아들 명한(明漢)외 10여 명과 함께 전주에 나아가 스스로 선봉을 자원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하였다. ☞ 김석종(金錫宗) 조선후기의 한학자. 자는 자서(滋瑞), 호는 열재(悅齋), 본관은 김해(金海), 함열면 출신. 기형(箕亨)의 아들. 1873년 식년 사마시(式年司馬試)에 진사가 되었고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 김성구(金成九) 조선후기의 효자. 본관은 김해(金海). 사복시정(司僕寺正) 만철(萬喆)의 아들, 아버지의 병을 혈지(血指)로 구하고 어머니의 병에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어 회생케 했으며 부모상에 6년간 여묘했다. 1864년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받고 1870년 정려(旌閭)를 하사받아 오산면 장신리 상아에 정려비(旌閭碑)가 있다. ☞ 김세량(金世良) 중종∼명종대 조선전기 문신. 자는 언숙(彦叔), 본관은 경주(慶州), 본시 경주사람이나 아들 득지(得地; 蘇世儉의 사위)를 따라 익산으로 옮겨 살았다. 다경(多慶)의 아들. 1535년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직강(直講), 군수(郡守)를 지냈다. ☞ 김수견(金守堅) 광해군∼숙종 조선후기 한학자.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함창(咸昌), 익산 출신. 감찰(監察) 익진(翊震)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현종 때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다. ☞ 김 쉬(金 , 1463∼1535) 조선초기의 충신. 자는 경숙(慶淑), 본관은 강릉(江陵), 익산 출신. 호는 신암(愼菴), 시호는 충순(忠順), 부는 예조판서 득지(得智), 혁혁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사성 송정(松亭) 김양(金洋)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성종 때에 성균진사가 되어 후릉참봉(厚陵參奉)과 종묘령(宗廟令)에 제수되었다. 1485년에 문과에 합격하고 대교(待敎)를 역임, 해평현감(海平縣監)을 지냈다. 도원수 허종(許琮)이 야인(野人)을 토벌할 때 임금께 아뢰어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청도군수(淸道郡守)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상장의 예를 지극히 하였고 그 후로는 벼슬에서 물러나 산수를 즐기다가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 충순(忠順)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효행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 김영원(金永源) 조선후기의 효자. 본관은 광산(光山), 김국광(金國光)의 후손, 김광현(金光鉉)의 아들, 출생 2개월에 모친을 여의고 17세에 부친을 여의였다. 아버지와 계모에게 효도하고 돌아 가신 후 각각 3년간 여묘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감찰(監察)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하사하여 웅포면 송천리 진소에 정려가 있다. |
☞ 김용국(金容國)
독립운동가·의병·승려. 법명은 경봉(鏡峰), 익산군 출신. 1908년 무주군 적상면에 있는 적상산에서 의병장 노원섭(盧元燮)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여명을 거느리고 수치의 전투에서 일본군 수백명을 사살했다. 후에 패전하여 피신하던 중, 그 해 11월에 인천 오산리에서 노원섭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 때 노원섭은 영동에 압송되어 총살당했으나 김용국은 탈출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
☞ 김용덕(金容德, 1864∼?)
조선후기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여산면 출신. 서포 만중(萬重)의 후손, 참봉 종수(宗洙)의 아들. 1888년(고종 25)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를 지냈다.
☞ 김용태(金溶泰, 1858∼1934)
근대의 문장가. 호는 가석(可石), 본관은 경주(慶州), 전주시 동문밖 출신. 서예가, 기독교 장로, 계문학교(啓文學校)설립자, 이리중학교장 하정(荷汀) 김한규(金翰圭)의 아버지. 정치·경제·문화에 해박했고, 시문과 글씨로 당대를 풍미했다. 경성대동시사(京城大東詩社) 주최 현상시에 응모해 수상하였다. 부모 생전에 곁을 떠나지 않았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식음을 전폐한 채 45일간을 슬피 울었다. 만년에는 나라 잃은 통한을 술로 달래며 살았다. 유고로『가석시문집(可石詩文集)』이 있다.
☞ 김운룡(金雲龍)
조선후기 우국열사,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 익산군 출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선응(善膺)의 아들.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 1583∼1661)와 함께 창의하여 광주, 검천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뒤에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내렸다.
☞ 김원룡(金元龍, 1909∼1950)
교육자. 본관은 김해(金海), 여산면 출신. 유헌(悠軒) 김종원(金鐘遠)의 아들. 여산공립보통학교 졸업, 1922년 전주공립농업학교 중퇴, 1923년 전주도립사범학교 입학, 1926년 김제군 월촌공립보통학교 훈도, 1930년 순창공립보통학교 근무, 1933년 사상문제로 피검 2년간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출옥 후 전북일보 순창지국장.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순창군 위원장으로 일시 정계에 투신하였다가 곧 교육계에 복귀 순창농임고등학교 교사, 1947년 이리공업고등학교, 1948년 군산중학교에서 봉직하였으며, 1948년 동명중학과 이리중학교를 합병한 재단법인 이리학원의 초대 이사장으로, 교육과 육영사업에 헌신하였다.
☞ 김원중(金元中, 1904∼1998)
정치가. 서울 양정중학교 졸업.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이리지부장. 전북수리조합장(全北水利組合長). 자유당 중앙위원으로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전북대학교 재단이사와 이리국악원 초대 원장을 역임했다.
☞ 김윤창(金允昌, 1913∼1990)
사업가. 만세주조장 경영. 민주당 소속으로 제3대 전북 도의원(道議員)으로 진출햇고, 1953∼60년 이리상공회의소 부회장. 지방 유지로 예술가들과 체육 활동에 많은 후원을 했다.
☞ 김자완(金自琓, 1425∼1457)
조선초기의 문신. 이명은 자완(自琬). 본관은 안동(安東), 익산군 출신, 호조참의 김중서(金仲舒)의 아들, 음직(蔭職)으로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공조(工曹)·형조좌랑(刑曹佐郞), 임피현령을 역임하였다. 33세로 작고하자 나라에서는 전라감영(全羅監營)을 통해 다수의 장례부의(葬禮賻儀)를 내렸다.
☞ 김정익(金廷益, 1561∼?)
조선중기 사관(仕官). 자는 사겸(士謙), 본관은 경주(慶州), 금마면 출신. 김득지(金得地)의 아들, 1613년(광해군 5)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다.
☞ 김정진(金廷進)
조선후기 무신·공신. 자는 진숙(晋叔), 호는 간송재(澗松齋), 본관은 경주(慶州), 익산군 출신. 인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병자호란에 정예 병사를 거느리고 적과 격전하여 두 적장을 죽여 공을 세우고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음모 때 심기원을 사로잡고, 1646년 유 탁(柳 濯)의 모반 때에도 공을 세워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이 되었다. 1646년부터 1647년 12월까지 고산현감(高山縣監)에 재직하였다.
☞ 김종호(金鍾昊, 1874∼1949)
유학자. 자는 윤청(允淸), 호는 패현(佩弦), 본관은 경주(慶州), 고현동 출신. 성균관 박사로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후 투신 순사한 매하 김근배(金根培)의 아들, 부친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약재 송병화(宋炳華), 간재 전 우(田 愚) 문하에서 성리학을 닦았고, 시와 글에도 뛰어난 저술을 하였으며, 많은 후학을 가르쳤고, 서예에도 능하였다. 공의 유고는 다섯권이 전해지고 이 가운데 『성학십도설집(聖學十圖說集註)』1권과 『금강산유람기(金剛山遊覽記)』1권이 포함되어 있다.
☞ 김중서(金仲舒)
조선전기 한학자. 호는 척약재( 若齋), 본관은 안동(安東), 익산군 거주. 구용(九容)의 손자.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음사(陰仕)로 집의(執義),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이르렀다. 말년에 익산에 와서 살다가 89세에 죽었다.
☞ 김진유(金振酉) 광종대
고려전기의 문신, 자는 봉준(鳳俊), 호는 지지노(知止老), 퇴휴재(退休齋). 본관은 김해(金海), 삼중대광 도첨의우정승 (都僉議右政承)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화제(華齊)의 아들, 등제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수문각 대제학(修文閣 大提學)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를 역임했다. 광종(光宗) 때에 과거제도를 설치하여 승(僧) 혜거(惠居)에게 시험의 행사를 관리하게 하니 왕에게 극간하여 잘못됨을 논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금마에 내려와 살았다.
☞ 김춘호(金春鎬, 1916∼ ?)
현대 정치가. 삼례읍 출신. 전주신흥고교 졸업. 대한기독교 청년동맹(靑年同盟) 회장. 이리시의원. 이리선양직물회사 대표. 1954년 자유당 소속으로 37세의 약관으로 국회의원에 당선. 국회 운영위원장 역임하였다.
☞ 김취장(金就章)
조선후기 유학자, 자는 수경(粹卿), 호는 양한당(養閒堂), 본관은 강릉(江陵), 여산면 출신. 현종조의 학자로 동몽교관에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숙종 때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 김치옥(金致玉, 1889∼1927)
독립운동가. 오산면 출신. 1918년 배은희(裵恩希)목사와 협의하여 종교인과 일반인을 규합 지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3월 10일 익산에서 이정(李挺)·이병석(李秉釋)·박사국(朴士國)·정영모(鄭永模)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대한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이날 "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쓴 대형 깃발을 만들어 선두에 세우고 2백 여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분견소로 시위 행진을 전개하다가,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이 해 5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사람으로서 독립운동에 대하여 기뻐서 축하의 만세를 부르는 것이 어찌 보안법 위반이 되느냐고 반박하며 고등법원까지 상고 항쟁하였으나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인해 사경에 처하게 되자 가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반신불수와 정신이상으로 고생하다가 1927년에 죽었다. 1968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 김학순(金學純, 1876∼1949)
근대 한학자. 호는 후송(後松), 본관은 경주(慶州), 팔봉면 출신. 문집으로『후송유고(後松遺稿)』필사본 1책이 전한다. 내용은 시·서·서·잡저이다.
☞ 김한규(金翰圭, 1891∼1981)
교육자, 서예가. 호는 하정(荷汀), 본관은 경주(慶州), 전주출생이나 익산시에서 오래 살았다. 용태(溶泰)의 아들. 17세까지 한문학을 배웠다. 1920년 익산군 북일면에서 북신서당(北新書堂)을 세워 교육에 힘쓰다가 다음 해 서당을 사립 계문학교(啓文學校)로 승격시켜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1948년 이원용과 함께 이리동명중학교(현재의 裡里中學校)를 세워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1년에는 유지들과 더불어 북창교회 내에 대성학원(大成學院)을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 해 이리 농과대학(현 전북대 농과대학)설립위원회 회장직도 맡았다. 한문과 서예에 능하여 다섯 차례나 서예전을 가졌다. 저서에『하정설교집(荷汀說敎集)』이 있다.
☞ 김현기(金顯基, 1929∼1979)
정치인. 익산군 팔봉면 출신.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 이리농림학교 교사로 근무. 1967년 6월 8일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新民黨) 전국구 19번으로 추천을 받아 처음에는 당선권에서 벗어났으나 앞 순위인 김도연(金度演)후보의 돌연한 사망으로 인해 결국 원내에 진출하게 되었다. 1971년 5월 1일에 실시한 제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1972년 국회를 해산하고 유신헌법에 따라 1973년 2월 27일에 제4공화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1978년 12월 12일에 실시한 제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원내 체신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특히 재정경제 분야의 의정활동에 두각을 드러냈다.
☞ 김형섭(金炯燮)
정치인. 익산군 출신. 1958년 8월에 실시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익산 갑구에 자유당(自由黨)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청년단 전라북도 단장, 자유당 익산군 당위원장, 전라북도 교육위원회 부의장, 국민회와 농민회의 전라북도지부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 김형재(金亨在, 1909∼1988)
현대 유학자. 본관은 김해(金海). 전남 나주 출신. 호는 일청(一靑), 일찍이 우리나라 6대 성리학자의 한 사람인 노사 기정진(奇正鎭)의 학맥을 이은 율계 정 기(鄭 琦)의 문하에서 공부한 대표적인 유학자다. 그는 나라안의 거유들과 교유하면서 조선유교회 중앙선교사로 피선되어 유교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홍명희. 변영만. 정인보 등 대학자들을 사귀면서 전고(典故)의 지식을 넓혔고, 여운형. 송기식. 성순영 등 당대의 민족지도자들과 깊이 인연을 맺었다. 그는 70년대에 이리시로 집을 옮겨 동산서원을 짓고 이 고장의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다. 저서로서 <中國短篇史> <大東小學>이 있고 이 분야의 고전이 될 <典故文獻> 15권은 영구히 남을 역저이다.
☞ 김화곤(金華坤, 1899∼1944)
독립운동가. 금마면 출신. 일본 동경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재학 중에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중퇴 귀국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서울과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군자금 모금운동을 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 6개월 형을 받았다. 1980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이 내려졌다.
☞ 김씨(김해김씨)
효부. 김씨는 옥구의 김장호(金張浩)의 딸로 20세 때 남평문씨 일권(一權)에게 시집을 와서 가산의 융성을 도모하고 부도(婦道)를 다하여 시부모를 섬겼다. 매일 혼정신성(昏定晨省)과 지체의 봉양을 극진히 했으며 구고(舅姑)의 병이 위급하였을 때에 열지주혈(裂指注血)을 한 효부로 유림의 천상(薦狀)과 서울 대성학원(大聖學院) 등의 표려상(表閭狀)이 있다. 그녀의 효부정려(孝婦旌閭)가 익산시 주현동에 있고 그 효행의 행적이 비(碑)에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