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며느리가 암을 잘 이겨내신 안사돈과 옆에서 힘드셨던 바깥사돈 그리고 방학중인 초등생 손녀와 함께 한 달 동안 크루즈 여행을 떠난단다. 세계 여행을 일년에 적어도 두세번씩 다녀온다는 여유로운 가족이다. 큰아들은 직장 때문에 가지 않지만 이틀간 출장이 잡혀있단다. 중학생인 손자 혼자 있게 되는데 아침에 학교에 갔다가 저녁은 사서 먹고 학원을 거쳐서 12시는 되어야 집으로 온단다. 다만 혼자 자는 것을 무서워한단다. 할머니인 셋째언니가 손자와 이틀 밤을 자야 한단다. 아들집인 반포에 와 계시단다. 놀러오란다.
날씨는 춥고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큰언니를 모시고 반포로 갔다. 큰조카 부부는 똑똑하고 매우 잘 살고 있으며 아이들 교육에 누구보다 열성적이라는 말은 들어왔다. 두 아이들은 공부에 두각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스키와 골프와 배구와 농구와 축구와 수영등 각종 운동을 가르쳐 누구를 만나도 어울려 놀 수 있는 자질을 길러준다고도 했다. 과자나 아이스크림이나 사탕등 달고 자극적인 음식을 절제시키고 우리나라 토속 음식을 골고루 먹게 하여, 아이들이 밥상에 무슨 반찬이든, 즐겨 먹는다고 했다. 며느리가 자식 교육을 똑소리나게 시킨다고 자랑스러워하시면서도 가끔 손자손녀가 언니집에 놀러오면 언니는 아이스크림을 몰래 준다고 했다. 애들이 이런 것을 먹고 커야지.
며느리의 열성만큼 손자와 손녀도 능력 발휘를 한다. 중학생인 손자가 고등학교 수학을 공부하고 영어는 원서를 읽는다고 했다. 손녀는 아직 어리지만 무엇을 하든 두각을 나타낸단다. 할아버지가 병환중이셨을 때나 할머니 생신에 쓴 편지를 보면 놀라울만큼 상대방 마음을 헤아리는 문장 실력이 탁월하다. 며느리는 어떠한가. 결혼한지 15년이 되었음에도 늘 높은 구두에 멋진 옷을 차려 입어 자신의 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단다. 여행중에도 높은 구두를 신는단다. 아즘마의 펑펑한 차림새를 본 적이 없단다. 삶의 방식이나 태도등 하나에서 열까지, 소시민으로 수수하고 소극적이고 얼렁뚱땅 살아온 나의 삶과는 비교의 대상이 아님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자랑거리를 웬만하면 잘 드러내지 않는 셋째언니, 자랑은 여기까지였는데.
현관문을 열어놓고 세째언니가 저만치서 기다리고 계셨다. 현관이 어찌나 길고 넓은지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양쪽 수납장이 천장까지 닿아있다. 저 안에 신발들이 가득! 와우! 궁금하여 열어보았다. 가득이다. 90평 아파트! 내 생애 처음 들어가 보는 공간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보기는 했다. 이렇게 넓고 좋은 집으로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농담처럼 내가 말했지만 진담이기도 했다. 복층으로 70평인 집은 들어가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넓은 아파트를 구경하게 될 줄이야. 아파트 맨 윗층에 자리잡은 팬트하우스 수준이란다. 위례 아파트 주변을 산책할 때 올려다보던 팬트하우스, 늘 궁금했었다. 어떤 사람이 사는지, 집안은 어떠한지. 집 구경 먼저 합시다요.
언니가 앞장섰다. 거실이 운동장이다. 디자인이 심플하면서 편안해 보이는 넓은 소파가 니은자로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대형 텔레비전이 보인다. 입이 딱 벌어진다. 품위있고 고급스런 회의장 수준이다. 영화관 같기도 하다. 방이 네 개인데 안방뿐만 아니라 손주들 방도 넓어도 너무 넓다. 옛 어른들 말씀으로 하자면, 100명이 잘 방이다. 욕실이 네 개란다 드레스룸이 두 개란다. 고가의 운동기구를 들여놓은 방도 있다.
36평 내집 주방과 거실을 합쳐놓은 크기의 주방은 또 어떤가. 대형냉장고와 보통 크기의 냉장고가 두 대다. 냉장고마다 먹을 것이 넘친다. 큰 며느리는 어디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를걸. 셋째언니 말씀이시다. 살림보다는 아이들 교육에 온 신경을 쓰고 있어서다. 광고쪽에 실력이 있어 그쪽에서 부르면 출근을 하기도 한단다. 식탁 위에 과자나 사탕 아니 주방에 소금이나 후추등까지도 외래어로 표기된 수입품들이다. 일하는 사람이 드나들며 밑반찬과 국을 끓이고 청소를 해준단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랴. 역시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가장 큰 욕실은 드라마에서 보던 화려한 바로 그 욕조가 확 눈에 뜨인다. 뜨거운 물을 넘치게 받아 장미향 거품을 풀어놓은 욕조에 내가 들어가 있는 상상?을 해본다. 근사하다. 셋째언니도 아직 이용해보지 못했단다. 저 커다란 욕조에 물을 받고 버리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청소를 하는데는 얼마나 걸릴까? 사람을 시켜본 적이 없는 나는 늘 스스로 해 왔으므로 어리석게도 그게 걱정이 된다. 어느 공간이든 창이 넓고 커튼 사이로 빛이 넘치도록 쏟아져 들어온다. 26층. 창가에 서 보니 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는 것처럼 아득하다.
손녀딸 방이 그 중 인상적이다. 방 바로 옆에 베란다가 있는데 꽤 넓었다. 소꿉놀이기구와 인형들과 책들이 가득하고 가운데는 낮은 테이블이 자리 잡고 한쪽에는 작고 예쁜 텐트도 있다. 환상적인 동화속 인양, 예쁜 동굴인양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이다. 자유로움이 가득한 공간이다. 방과 베란다 사이 커튼을 치면 완벽한 혼자만의 세상이다. 평소에는 엄격한 엄마의 말씀에 순종하지만, 저 방에 들어가면 마음대로 꾸미고 소꿉놀이도 하며 놀 수 있겠다. 정서적으로 안정과 균형을 찾을 수 있겠다. 이 나이에도 그곳에 들어가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 어릴적이 떠오른다. 뒷산에 올라 땅을 파서 방을 만들며 놀았다. 안방 건너방 사랑방이면 족했다. 지금도 그렇다.
점심을 나가서 먹기에는 너무 춥고 눈이 온 뒤라 그늘진 곳은 미끄러웠다. 음식을 배달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다 보니 모두들 음식 주문에 서툴다. 더구나 다른 동네이니 음식점을 고르는 일도 만만치 않다. 결국 외국 출장 중인 조카가 단골집에 배달 음식을 주문해 주었다. 참 놀랍고 좋은 세상이다. 외국에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세상. 택시를 불러줄 수 있는 세상이다. 언니가 상도동에서 반포 아들네로 온 것도 외국에 출장 중인 아들이 타다 택시를 불러주어 타고 왔다는 것이다.
나주 곰탕처럼 맑은 소고기 국물인데 얇게 저며 부드럽고 감칠맛이 도는 고기가 푸짐하게 들어있다. 요즈음처럼 높은 생활 물가를 따져보면 적어도 1인분이 이만오천냥이 넘을 듯 하다. 떡갈비와 부추전도 함께였다. 꽤 유명한 집이란다. 주문하면 보통은 오래 걸리는 집이라는데 조카가 특별 주문을 했단다. 따스하고 배려심이 많은 조카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감칠맛 도는 국물에 언니가 담근 총각무가 사각사각하게 딱 알맞게 익어, 금상첨화다.
반포. 고속터미널과 지하철 9호선과 4호선과 7호선, 그리고 백화점과 결혼식장과 꽃상가와 지하상가로 사람들 물결이 끊이지 않는 곳. 자동차들이 떠밀려 다니는 곳. 예전에 여고동창 모임을 이곳에서 했는데, 점심은 예약을 해 놓아 먹기는 먹었는데 커피집마다 사람들로 넘쳐나 여덟명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 학동에 살고 있는 친구네 동네가 한가하다고 하여 그쪽으로 이동해서 커피를 마셨다. 그 뒤로 다시는 이곳에 약속을 잡지 않는다.
그럼에도 직장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는 가족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만족할 지역임은 분명하다. 학군 좋고 교통 편리하고 쇼핑센터도 걸어다니는 거리에 두고 있지 않은가. 자녀 교육 때문에 강남으로 오고 싶어 기웃기웃 기회를 엿보는 젊은 부부들이 얼마나 많은가. 90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 조카네의 선택이 탁월하고 의젓하고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이만큼 오는동안 얼마만큼의 노력이 뒤따랐을까. 노력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보상이리라.
소시민으로 살아온 내게 90평 공간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명화들처럼 감탄을 자아내게 할 뿐,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잠시 부러움은 일었지만 나는 일찍이 철이 든 것인지, 아니면 욕심이 부족한 것인지, 비겁한 것인지, 도전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가진만큼으로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 건강을 되찾은 이후 더 그렇다.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 또한 나와 비슷하다. 언니들 역시 그렇다. 친정부모님은 늘그막에 대치동 오빠네 아파트에 오셔서 살다가 결국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내 집이 최고지. 허름하고 춥고 불편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허허허 웃으셨다.
내가 사는 곳이 최고야. 오순도순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공간이 최고지. 누구나 하는 말을 나도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여러번 반복했다. 차도 많지 않고 아파트 바로 뒤에 산이 있고 넓은 공원이 바로 옆에 있어 도로를 건너지 않고도 산책할 수 있는 곳.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살아 어디를 가도 아이들 소리로 생기가 넘치고, 걸어서 병원에 갈 수 있는 내 집이 최고지 최고구 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