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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같은 6.25 한국전쟁을 잊지 말자 시46:1-11
지난 5월 20일 미국을 공식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방미 첫 일정으로 미국의 순국선열이 잠들어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문 대통령의 워싱턴DC 방문은 이번이 네 번째이지만 알링턴 국립묘지를 찾는 것은 처음이다. 이곳은 6·25전쟁 참전용사를 비롯해 미군 전사자와 그 가족 약 40만명이 안장돼 있어 '미국의 성지'로도 불리며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취임 후 가장 먼저 참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은 의장대 구령에 따라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으며, 애국가와 미국 국가 연주 이후 무명용사의 묘 앞에 놓인 화환에 손을 얹고 묵념했다. 헌화를 마친 문 대통령은 국립묘지 기념관 전시실로 이동해 '무명용사와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며'라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패를 기증했다. 문대통령은 또 헌화에 동행한 미측 인사들에게 한국전쟁 당시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운 미군들에 대해 재차 경의를 표하고 "이렇게 피로 맺어진 한미동맹을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고 청와대가 전했다. 알링턴 국립묘지에 가면 그 무엇보다 방문객들의 시선을 끄는 문구가 있습니다. 'Our nations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유를 위해 달려갔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딸과 아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 아래 시선이 반드시 닿을법한 넓은 돌벽에는 은색 글씨로 선명하게 이렇게 쓰여져 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문대통령이 이런 문구를 읽고 왔다면 그동안 안보에 대해 불안감을 주었던 이미지를 다소나마 회복시켜주지 않았나 합니다. 미국은 한국이 가장 위기였을 때 이 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제일먼저 달려와 목숨을 바친 나라인데 요즘 젊은 세대가 이런 한미 동맹의 소중함을 알지못하는 것에 대해 정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70여년간 이어진 한미동맹은 오늘의 한국을 지탱해온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매년 5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을 메모리얼데이 라고 해서 우리의 현충일과 같은 날이다. 미국은 남북전쟁 때 희생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서 당시 수많은 봉사자들이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힌 2만 명이 넘는 남부군과 북부군의 묘지를 꽃으로 장식한 게 첫 번째 공식 행사였으며 1882년 `Memorial Day` 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6일 현충일, 10일 민주항쟁 기념일, 12일이 순교자 기념 주일이고 25일 6·25전쟁, 29일 제2 연평해전 등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날들이 많습니다. 오늘 6월 6일 현충일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목숨을 바치면서 국가를 지키신 순국선열의 숭고한 호국 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기념일로 6.25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6년 4월 19일 대통령령으로 제정되었으며 1982년 5월 15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정부기념일로 제정하면서 지금은 국가보훈처 주관 아래 현충일을 기념하고 있다. 나는 6월을 맞이할 때 마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을 생각할 때 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이셨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명언인 '역사를 잊은 민족은 다시 일어날 수 없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명언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신채호 선생이 아니라 영국의 수상 '윈스터 처칠'이 연설 중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명언으로부터 나온 말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이런 역사관이 절실히 느껴지는 때가 지금이 아닌가 한다. 2차 대전 종료와 함께 갑자기 찾아온 해방과 함께 1948년 8월 15날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이 시작된 것이 대한민국의 역사 시작이다. 그런데 주사파인 문재인 대통령은 이 마저 부인하고자 1919년 상해임시정부부터 대한민국이라고 하니 그저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인하는 자로 밖에 보여 질 뿐이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하에 세워진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우리나라 애국가에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전 국민이 부른다는 것은 대한민국 시작자체가 하나님의 섭리로 건국된 나라임을 알아야 한다. 시간이 없어 자세한 이야기는 못하지만 해방을 한 것에 대해 우리 힘은 단 1%도 없었다. 미국의 승리 곧 일본의 패망이 대한민국의 해방으로 이어진 것인데 물론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했지만 그 독립운동이 우리나라 해방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정확히 1%도 안된다는 것이니 우리의 해방은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부터 해야 한다. 나는 이 시간 이것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세워진 후 2년도 안되어 일어났던 6.25 한국전쟁에서 거의 다 망했던 대한민국을 다시 살려주신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다. 그러면 6.25 한국전쟁 중에 다 죽어가던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것부터 알아보자. 제2차 세계대전으로 참혹한 전화를 입은 인류는 더 이상 인류가 전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1945년 10월 24일 가맹국 51개국으로 발족한 사상 최대의 국제평화기구인 국제연합 UN이 창설 되었다. 만약 그렇게 창설된 UN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세상에 다시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6.25 한국전쟁의 역사를 알면 놀라운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게 된다.
1.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대결과 패권다툼이 벌어졌는데 그 현장이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가 임박한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연안 소련의 휴양도시 얄타에서 연합군(영국, 미국, 소련)의 수뇌부가 모여 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한 회담인데 사실은 영국은 더 이상 초강대국이 아니었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소련 수상인 스탈린간의 담판 회담이었다. 얄타회담결과로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는 계기를 마련한 회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는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기쁨도 잠시였고 얄타회담에 의해 38선을 기준으로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은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출범하였는데 문제는 북한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자리를 잡았지만 한국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이념논쟁이 각 진영에서 전염되듯이 일어났다. 남한에서 공산주의 발생은 1946년 9월4일 박헌영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남조선노동당 즉 남로당이 지금으로 말하면 공산당이 정당을 구성하면서 신생국가인 대한민국을 흔들어 댔다. 총선전에 발표한 남로당은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주요산업의 국유화를 강령으로 내세우면서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사건'을 주도해 나갔다. 남로당 지시로 1946년 9월 총파업 기간에 대구지역의 좌익세력들은 쌀획득 투쟁을 중심으로 대중시위를 전개했다. 전쟁나기 까지 정치는 좌·우 이념대결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으며 더욱이 국방은 1949년 미군 철수로 무방비 상태였다. 여기에 미국 국방장관인 에치슨은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시킨 세칭 [에치슨 라인]을 선포함으로서 미국이 한국을 적극적으로 방어할 의사가 없다는 빌미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건국 후 6.25 전쟁이 날 때 까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하였는가를 다음 사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1) 남로당이 주도한 제주 4.3사건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1948년 4월3일에 제주도에서 이른바 4·3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으로 인해 민심이 악화된 것을 이용해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정부 활동을 전개하면서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을 유도했다. 대규모 파업 주모자 검거작전을 벌여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면서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이런 민심을 대변하듯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에서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의 경찰지서와 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고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면서 전국에서 제주도가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정부는 당연히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에게 사면정책을 발표하면서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에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지령하고 남로당 전남도당과 남로당 중앙당이 지원한 사건이다. 그리고 무장반격전에 직접 참가하거나 적극 동조한 세력은 3,000여 명이고 희생자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20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문재인정부는 제주 4.3사건도 보상해 준다고 하는데 공산당에 사주를 받아 국가반역한 자들에게도 보상을 한다는 것인가? 문재인은 2019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북한의 정치인 김원봉의 독립운동을 추켜세우는 발언을 하면서 북한과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아 논란이 되었던 것은 북한의 6.25 남침을 부정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2020년 현충일 추념식에는 코로나 대응을 하다 순직한 공무원들의 유족을 추념식 초청객 명단에 넣고 천안함·연평도 생존자와 유족은 빼고 진행하려다 논란이 되기도 했다. 현충일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군인들을 추모하는 날인 것을 생각하면 천안함과 연평도 생존자들을 빼고 코로나 순직공무원 유족들을 넣은 것은 명백한 주객이 전도된 현충일을 기념하겠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2019년에도 북한건국유공자 김원봉을 찬사해서 논란을 빚었던 청와대가 2020년에도 비슷한 논란을 빚는 것을 보면 의도적으로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을 홀대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문재인이야 말로 반란세력에게 찬사 보내고 제주 4.3사건 추모사에서는 남로당의 반란폭동을 진압한 군경을 국가폭력집단으로 매도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헌법과 정체성을 부정한 자가 아니었던가? 문재인 대통령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과 제주 4.3사건에 대해 유별나게 집착한 나머지 2001년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전원일치로 제주 4.3사건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고 5.10총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 건설을 지지하는 공산무장세력이 주도한 반란사건이라고 판결을 내린 사건이었음에도 이를 뒤집기 위하여 지난 4.3사건 추모사에서 그 마각을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2) 남로당이 주도한 여순반란사건
1948년 정부수립 직후인 10월에는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좌익계 장병들이 지역민 일부의 지지를 받아 갓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남로당이 사주하던 좌익계 장병들이 주동한 사건이다. 이들은 무장폭동을 일으켜 전남 동부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하였다.그 후 이들은 지리산과 백운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삼아 한반도 남부지역의 이른바 빨치산투쟁을 선도하였다. 군대내에서 공산주의에 빠진 좌익계 사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당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던 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이처럼 일련의 사건들이 남로당을 중심으로 일어나면서 민족의 최대 비극으로 알려진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는 1948.4·3제주사건을 시작으로 1948.10.19.여순사건을 징검다리 같은 연결선상에서 1950. 6·25 한국전쟁은 발발했던 것이다.
(3) 6.25 한국전쟁 발발을 예상 못한 남한 정부
소련 수상 흐루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남침공격을 위한 완벽한 계획서를 가지고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다. 그리고 1950년 1월 김일성은 두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군지원 요청과 남침 승인에 대한 확답을 받는다. 전쟁 발발하기 1950년 6월 10일 북한은 느닷없이 자신들이 억류하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 부자와 그해 남한에서 체포된 거물간첩 김삼룡·이주하를 맞교환하자는 평화를 띄우는 평화공세를 폈다. 우리는 조만식 선생과 북한 간첩을 맞교환을 긍정 검토했으나 북한은 열흘간 시간을 끌다 무산시켰다. 인민군은 6월 12일부터 훈련을 가장해 38선 인근으로 이동하면서 6월 23일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고 24일에는 해병대 병력을 실은 인민군 수송선이 동해안으로 출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정부에 평화통일안을 제의하며 연막작전을 펼쳤다. 한편 남한은 북한의 평화공세에도 불구하고 6월11일부터 6월23일 까지 비상경계령을 내렸다가 북한 김일성이가 남침 준비를 완료하고 전투병력을 38선 부근에 대기하도록 준비완료한 후 전쟁발발하기 이틀전 이런 위기상황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국방부는 오히려 6월 24일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으니 전방 부대 장병 절반 이상이 텅 비었다. 고위 장교들 역시 연회 등에 참석하였다. 국군은 이 해이안 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38선을 넘어 북한군 포병대가 일제 포격을 개시했다. 국군은 처음에는 일상적인 포격으로 생각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으나 인민군의 남침이 가속화되자 비상동원령을 내린다. 그러나 외박중인 병사들의 귀환은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최전방의 국군 진지는 인민군의 공격으로 궤멸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북한 공군이 서울상공에 나타나 역과 통신소등에 공격을 가하였다. 인민군 해병대 역시 동해안에 상륙하여 공격을 가했다. 11시경에 북한은 “남측이 우리의 평화제안을 거부하고 우리를 공격하여 아군(인민군)이 반격에 나섰다.”라는 거짓방송을 내보낸다. 1953년 7월 27일 까지 3년 1개월간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2. 6.25 한국전쟁 미스터리
북한군은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거 총병력 19만 8천 380명, 탱크 242 대, 해군함정 약 30척, 대포 2천 500문,120밀리 포 56문, 82밀리 포 1천503문의 강력한 무력으로 남침을 감행했는데 북한군은 장단반도, 문산, 동두천, 춘천 그리고 강릉의 5개 방향으로 38선을 일거에 돌파하여 남으로 내려왔다.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6월 26일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방문,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현지시각 6월 25일 1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
(1) 수도 서울이 적에게 3일 만에 점령당하다
북한군은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거 장단반도, 문산, 동두천, 춘천 그리고 강릉의 5개 방향으로 38선을 일거에 돌파하여 남으로 내려왔다. 2개 군단으로 구성된 20만의 북한군 선두에는 잘 훈련되고 준비도 완벽하게 마친 7개 사단과 더불어 제105전차 여단 예하의 전차부대와 이들 바로 뒤에는 후속 진군할 6개 사단(서에서 동으로 제7,10,13,9,15,8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와 맞서는 우리 국군은 8개 사단과 1개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10만이었는데, 이중 4개 사단과 1개연대가 38선 일대를 경계하고 있었고 나머지 사단들은 후방에서 공비 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이러한 전력차이 중에서도 가장 위협을 주었던 것은 242대의 소련제 T-34탱크였다. 소련이 북한에게 공급한 T-34탱크는 85밀리미터 포를 장착하여 화력이 강화된 최신형인데 이를 막기 위해 국군이 보유했던 장비는 전무했다. 이런 막강한 북한군 전력 앞에 의정부를 지키던 제7사단은 개전 하루 만에 무너지고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북한군에 점령당하였다.
1) 막강한 북한군의 질주
북한군은 무슨 이유인지 의정부에서 이틀을 지체하고 개전 3일째인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 하면서 서울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졌다.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시청앞에는 북한 인공기가 게양되면서 서울 시내전역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는 치욕을 맛보게 되었다. 전쟁역사상 3일 만에 수도가 적에게 점령당하였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말이 전쟁이지 북한군의 전력 앞에는 우리나라 군은 맨주먹으로 싸울 준비가 전혀 안 되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정치범들을 석방하였고 국유재산과 자본가들의 재산을 압류했다. 또 한번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서울시청에 김일성-스탈린 초상화를 내걸고 인공기를 게양했다. 6.25전쟁의 최대 미스터리는 6월 28일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이 왜 3일 동안이나 진격을 멈추고 '노닥거렸느냐' 이 점이 또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마음만 먹었으면 6월 25일 서울이 점령당할 수도 있었는데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였고 또 서울에서 3일 동안 남쪽으로 진격을 멈추었다는 사실이 국군이 후퇴할 여유를 갖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놀라운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 소련이 불참한 안전보장회의
대한민국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한국대사 장면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서 6월 26일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방문,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열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현지시각 6월 25일 1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 이 때 소련이 안보리 회의에 참여치 못한 이유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유엔군의 한국 전쟁 참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했다. 당시 소련은 거부권을 행사하게 되면 유엔은 한국에 군대를 파견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회의 당일 소련 대표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유엔안전보장 이사회는 한국전쟁에의 참전을 만장일치로 가결했고, 한국은 유엔군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련의 대표가 타고 오던 승용차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켜 그 대표는 회의 시간을 지나 모든 결정이 끝난 뒤에 도착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것역시 하나님의 은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최근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것은 기도의 힘이었다. 당시 안전보장 이사회의 투표함을 만든 사람이 투표함을 완성하고는 안쪽에 이런 기도문을 쓰고 서명을 했던 것이다. "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결정이 되어 인류 역사에 하나님의 올바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1997년 투표함이 낡아서 바꾸기 전까지 아무도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기도를 들으셨고 역사를 주관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이다.
이때까지 소련은 그해 1월 13일 이래 중국 대표권 문제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을 거부하면서 유엔군의 한국 파견 문제를 비난해 왔으나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다수 국가의 ‘고귀한 집단적 양심의 표현 앞에 소련은 여지없이 패배당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의 이와 같은 결의는 세계 역사상 국제정의에 입각한 최초의 유엔군을 탄생시킨 것으로서 국제평화의 수호를 위한 획기적인 거사였다. 7월 7일의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국은 도쿄에 유엔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하면서 유엔군의 한국참전을 허락한 것이다. 이에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으로 맥아더 전투사령부를 한국에 설치하고 해군과 공군을 우선 한국 전선에 파견할 것을 명했다. 미국이 해외파병을 이렇게 신속히 결정한 것도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람앞에 등불이라고 보신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2) 6.25 한국전쟁 미스터리
6.25 한국전쟁의 최대 미스터리는 막강한 북한군에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지키던 제7사단은 개전 당일에 무너져 점령당하였는데 북한군은 무슨 이유인지 의정부에서 이틀을 지체한 것이 미스터리하고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시내전역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이 왜 3일 동안이나 진격을 멈추었다가 7월 2일 남쪽으로 내렸갔는가? 라는 의문점이 참으로 이는 정말 미스터리한 일로 갈팡질팡하는 군에 다소 후퇴할 시간여유를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최태환씨의 주장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국회 간선으로 당선이 됐으니 서울을 점령한 후에 가장 주력한 것이 바로 제2대 국회의원을 찾아내어 야성이 강한 2대 국회의원을 조종하면 이승만 대통령을 퇴진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실제로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에 곧 제2대 국회의원 소집을 공고 하였지만 이곳에 찾아오는 의원이 거의 없었다. 결국 인민군은 3일동안 국회의원 색출 작업을 하였지만 개원에 필요한 과반수 이상의 의원을 찾을 수 없어 남한을 통합할 수 없다고 보고 7월2일 결국 군사력으로 전 한반도를 석권한다며 한강 이남으로 공격을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6.25전쟁의 발발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달려온 미군이 최초로 전투를 벌인 날은 7월 5일 오산전투이었는데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군이 북한 인민군에게 패하였던 것을 참작한다면 서울에 입성했을 당시 인민군이 지체하지 않고 계속해서 국군을 밀어붙였다면 7월 5일쯤엔 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충분히 도달하였을 것이며,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석권했을 수도 있었다면 미국은 지상군 파병을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는 3일 만에 전쟁을 끝낼려고 작전을 짰다는 것이지만 결과는 3년이라는 기나긴 전쟁을 보낸 것이다. 결국 인민군은 3일을 제외한 전 기간은 예상에도 없던 전쟁을 치룬 것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민군이 의정부에서 이틀을 지체한 것이나 서울을 점령한 이후 3일간 지체한 것이 6.25전쟁의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3) UN군 참전
한국에서의 전쟁 발발은 6월 25일 9시 30분에 미국에 보고되면서 UN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8일 개최되었고,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를 한국에 제공한다.‘는 안건이 가결되었고. 미국은 이 결의안에 따라 7월 1일에 미 지상군을 한국전쟁에 참전시킨다는 뒤를 이어 16개국이 파병을 결정하고 의료지원 5개국도 참전한다.
1945년 10월 24일 UN이 창설되면서 당시 51개국 중 21국가가 한국 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을 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는가? 세계 역사상 국제정의에 입각한 최초의 유엔군을 탄생시킨 것으로서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 ·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 프랑스 · 그리스 왕국 · 에티오피아 제국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 뉴질랜드 · 필리핀 · 태국 ·터키 · 영국 · 남아프리카 연방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이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6월 30일)에 따라, 맥아더는 주일 미 제8군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라는 명령을 하달(6월 30일)하였다.
3. 기적같은 6.25 전쟁 상황
6.25 한국전쟁은 북한 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탱크로 진격해서 6월 28일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은 점령당하고 전쟁발생한지 40일만인 7월말에는 북한은 낙동강을 제외한 전 지역을 손아귀에 넣었다.
김일성은 적화통일을 눈앞에 두었는데 미군과 우리 국군은 낙동강 방어전투에서 승리하고 인천상륙작전과 그 여세로 9.28서울 수복을 한 기적과도 같은 전쟁이었다. 서울이 수복한 후에는 계속되는 반격으로 우리는 압록강을 접수하면 통일을 눈앞에 두었지만 110만명의 엄청난 중공군이 개입되어 후퇴하고 말았다. 이렇게 일어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서명함으로써 지금까지 휴전한 상태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간 지속된 6.25전쟁에서 기적 같은 전쟁스토리를 들어보자.
(1) 낙동강 방어 전투
6.25 전쟁이 발생한지 거의 한달이 되어가는데 승세는 대구 경북과 부산을 제외한 전 지역이 북한군 수중에 있었다. 1950년 7월20일 김일성은 북한군에게 8월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하였다. 북한군은 수안보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와 ‘9월 공세(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대구방어전투·영천전투·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되어 지역에 따라서는 방어선이 돌파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처음에 있었던 하동전투와 낙동강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전투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1) 하동전투
하동은 서울을 함락하고 남진하면서 섬진강을 건넌 북한군이 진주를 거쳐 한국전쟁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하동전투는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만인 1950년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속칭 계동마을 인근에서 국군과 미군이 호남을 거쳐 하동을 공격하는 북한군에 맞서 싸운 전투다. 영남지구 편성 관구 사령부가 미 제24사단의 일부 병력과 협동하여, 호남의 남안선을 거쳐 하동을 우회 침공하는 북한군 제6사단을 요격하는 전투였는데 진주를 잃기까지의 7일간의 지연전을 일컫는다. 하동 전투에서 전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이 전사하고 미군 313명, 국군 100여 명이 순국했지만 이 전투로 인민군 낙동강 진출이 저지되었으며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다부동전투
북한 인민군은 7월 말에 이르러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서쪽은 낙동강을 이용한 방어선과 그리고 낙동강 상류를 포함해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이 담당하였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이라고도 부른다. 다부동은 대구 북방과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도로가 합쳐지고 왜관에까지 이르는 지방도로의 필수적인 요충지였다. 다부동이 북괴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다부동에서 25km떨어진 대구가 북한군 공격의 사정권 내에 들어가게 되므로 다부동 방어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었다. 북한군도 이를 아는지라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과 함께 2만2천여명의 병력, 전차 20여대 각종 화기 700여기로 중무장하여 공격을 감행해 왔다. 이곳을 지키는 국군은 북괴군에 비해 전력이 매우 열악했다. 병력은 학도병의 보충을 받았으며 화기는 북한군의 5분의1 수준 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다부동이 북괴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동안 북한군과 대결하였지만 워낙 강력한 북한군에게 계속 밀림으로써 전투다운 전투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방어태세에 임하였고 북한군은 마지막 남은 총력을 기울여 낙동강 도하 공격을 개시하여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공세 작전을 감행하였다.
한반도의 10%밖에 남지 않은 경상도 일부지역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무차별 공세에 힘겹게 맞서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였다. 이에 미8군 사령관 겸 유엔지상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해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며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지시하였는데 이는 낙동강 전선을 죽음으로 지키라는 명령이었다. 낙동강 전선 이곳 저곳에서 다부동전투, 영천전투 등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한 결전이 벌어졌다. 낙동강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따라 영덕-청송-의성-낙동리-왜관-남지-마산을잇는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바로 낙동강 1차 방어선이었는데 전력이 부족한 국군으로는 이 방어선을 지킬 수 없어서 8월 11일에는 왜관-다부동-신령-기계-포항을 잇는 80km 가량의 선으로 전선을 축소하여 2차방어선을 지키지 못하면 더 이상 반격의 희망이 없다고 여긴 국군과 유엔군은 배수진의 각오로 싸웠다. 이미 초기에 국군과 유엔군이 밀렸으므로 8월 13일 북괴의 3사단 병력이 328고지를 공격하고 북괴 15사단이 국군 제 12연대보다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다. 북괴 제 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국군 제 11연대를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아군이 미처 점령하지 못한 674고지를 먼저 점령하였다. 국군은 이미 빼았긴 328고지를 뺏고 뺏기는 피의 쟁탈전을 펼쳤고, 국군 제 12연대와 11연대는 유학산 837고지와 674고지의 탈환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특히 8월 15일 북한군 제 15사단에게 점령된 수암산 탈환을 위해 연대장까지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공격작전을 전개 하였지만 무려 349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낼 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유학산 일대의 싸움은 매우 처절하였으며 말 그대로 돌산 하나를 두고 서로 수류탄을 던져대는 근접 전투가 지속되어 양측은 하루동안에만 3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런 전투가 지속되면서 대구 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미 제8군 사령부는 적의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폭격기 편대의 공격을 퍼부었다. 무려 총 960톤의 폭탄을 쏟아부었으며 북한군의 병력과 장비에 매우 큰 피해를 주었다. 이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적의 대구 공격은 다부동 축선으로 집중되어 8월 16일 다부동 바로 서쪽 방어선이 돌파될 큰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미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공격작전중에 순식간에 퇴로가 차단될 위험에 빠졌다. 그는 다부동 전투 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에게 "한국군 부대는 전의를 잃어 후퇴하게 되었다.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으로 퇴각을 하여 배후에 약 1,000여명의 북한군이 침입했다.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있어 이대로의 방어는 불가능하다며 퇴각을 해야할 것 같다"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위기상황임을 인식하고 후퇴하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장병 여러분, 여기서 물러나면 대구가 점령되고, 대구가 점령되면 부산이 점령되면 우리는 전부 죽던지 아니면 포로가 된다. 부산에서 죽을 바에는 여기에서 죽는 것이 낫다. 지금부터 사단장인 내가 선두에 서서 저 산을 돌격할 것이다. 귀관들은 내 뒤를 따르라! 내가 선두에서 물러나면 나를 쏘아라! 그러나 귀관들이 후퇴하면 나는 가차없이 귀관들을 쏠 것이다. 가자!!'라고 하며 백선엽 장군이 앞장을 서자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들이 뒤를 따라 나서 국군은 다시 488고지를 점령하고 방심해 있던 북한군은 국군의 공격을 받고 전투 시작 30분 만에 다시 퇴각하였다. 마침내 8월 23일 새벽2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유학산 837고지까지 점령하면서 적의 8월 공세를 꺽는데 큰 역할을 했다. 국군 1사단은 장교 부사관 병사들이 투혼을 발휘하여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아직도 백선엽 장군이 후대에도 많이 거론이 되는 이유이다. 다부동전투는 매우 치열했던 탓에 사장자의 수도 매일 600~700명이 사망하였다. 김일성은 8월15일까지 부산을 함락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수정하고 8월15일을 ‘대구해방의 날’로 정하고 총공세를 걸었다. 다부동 전투는 부산교두보 방어전의 클라이맥스였고, 8월15일은 위기의 절정이었다. 어떻든 유학산 등을 중심으로 한 다부동의 처절한 고지 쟁탈전이 밤낮없이 벌어졌다. 최대 결전은 최초의 전차 對 전차의 격투로 전개되었다. 18일 밤부터 북한군은 맹렬한 공격준비포격에 이어 T34 전차를 선두로 해서 공격 하였고 이에 대해 미 제27연대는 전차포와 무반동포로써 적 전차를 사격하고, 국군은 파상공격을 되풀이하는 적 보병부대에 대해 양측의 산지로부터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이러한 전투가 일곱 밤이나 계속되었다. 개전 이래 최초의 전차 대 전차의 포격전이 전개되어 미군은 적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차량 수대를 파괴했다. 미군들은 좁은 협곡에서 불덩이가 수없이 교차되는 모습에 빗대 이 전투를 ‘볼링장의 격투’라고 명명했다. 다부동전투에서 국군의 사상자 1만여 명, 적군 사상자 1만 7500여 명을 기록했다. 만약 단 한 차례만 방어선이 뚫려도 대한민국의 국운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이었던 것이 다부동전투였는데 낙동강전투의 총사령관인 워커장군의 한국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과연 존재하였을까? 다부동전투에서 우리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의 집요한 공격을 막았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성과는 낙동강 전투의 사령관 해리스 워커장군의 수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워커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2) 6.25 전쟁 영웅 배선엽 장군을 무시하는 현 정부인사들
625전쟁 영웅’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죽음이 임박해오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다는 국가보훈처의 공식 입장이 나왔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은 국회에서 “백선엽 장군은 현충원 안장 대상인데 다만 서울현충원은 장군 묘역이 꽉 차 대전현충원으로 모실 수 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대에서 장교로 일한 백선엽 장군의 ‘친일’ 경력이 이유가 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더불어민주당 등 여권과 사회일각에는 백 장군의 국립묘지 안장 불가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 육군 사단장으로서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 부대가 미군과 힘을 합쳐 북한군의 남진을 막아냈다는 공으로 한국군 최초의 별 넷, 대장까지 진급했으며 육군참모총장도 지냈다. 이들은 6.25를 일으켜 600만명이나 살인한 김일성에 대해서는 무조건 머리 숙이면서 6.25한국전쟁의 영웅이신 백선엽 장군을 모독하는 일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이게 나라인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4. 미8군사령관 월튼해리스 워커(WaltonHarrisWalker)이야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8군 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년 12월 3일~1950년 12월 23일)는 한국으로 향했다. 그는 2차 대전 때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장군이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니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이 땅에 미8군 사령관으로 사명 받고 왔다. 한국전쟁 시작 후 8월초에는 이미 전 국토의 90%가 모두 북한의 수중에 들어 갔던터라 미국 정부는 정말 낙동강 전투가 뚫리면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다고 한 사실은 비문 내용에 나온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병들이 매일 엄청난 숫자가 죽어가니 미의회와 정부에서 조차 전면 철수가 거론되는 시점이었으니 당시 파죽지세로 북한군에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당한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국전에서의 승산이 불가능해 보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도 New Korea Plan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유엔군 전면철수는 무조건 안된다고 버텨보겠다고 말한 사람이 워커 중장이다. 미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총사령관인 맥아더에게 남한 사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맥아더는 일본에 있었고 워커 중장은 한국에 있었다. 최전선에서 직접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 입장이었던 워커 중장은 한국 장병들을 만나서 이런 말을 전한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그리고 미국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은 명령을 내린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워커장군에게 한국을 지키겠다는 믿음을 갖도록 역사하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이 미군 장병들에게 내질렀던 전설적인 명언은 "Stand or die." 사수 혹은 죽음뿐. 이 명령이 낙동강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 월튼 워커의 무조건 한국사랑
갑작스런 사고로 순직했기에 자서전 등의 사료가 없기 때문에 사실 워커 중장의 무자비한 한국 사랑에 대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워커 중장은 인상적이고 무자비한 명령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에서 미국 국민이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미국 장병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게 마땅한가? Stand or die." 사수 혹은 죽음뿐. 조국도 아닌 이국전선에서 많은 희생을 내면서 이러는 건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미국 정부도 워커 중장에게 사령관 집어 치우고 집에 가라고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발벗고 나섰다. Stand or die(버티지 못하면 죽어라)란 발언 덕에 본국 의회에서 논란을 일으켜서 한참을 욕 먹어가면서도 한국을 꼭 지켜야 한다고 전쟁을 반쯤 포기한 미국 정부와 맥아더 사령관을 설득하면서 낙동강 전투를 지휘한 분이 바로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다. 결국 낙동강 방어에 성공한 이후에 맥아더의 낙동강 전선 시찰이 이루어진다. 이 시찰 덕분에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 상륙작전 구상이 가능해졌고, 워커 중장은 맥아더 사령관을 도와서 인천 상륙작전까지 성공시키는 공을 세웠다. 성공 확률 1/5000이라는 전쟁영웅의 업적인 인천 상륙작전도 워커 중장이 낙동강을 지켜내지 않았다면 시작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맥아더의 선택은 탁월했지만 그 선택이 가능케 만들어 주고 절망적인 병력부족 상황을 오기로 견뎌낸 것은 워커의 공이다. 사실 인천 상륙 전에 방어선이 뚫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나빴기에 인천 상륙으로 인한 공을 따지자면 7 대 3 정도로 워커의 공적이 맥아더의 공적보다 크다 하겠다.
(2) 안타까운 사고
해리스 워커장군은 1950. 12. 23 아들인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러 가는 중, 맞은편에서 한국군 사병이 운전하던 탄약 운반 삼륜차 트럭과 충돌로 즉사하였다. 2차대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잠시 쉬지도 못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망해가는 우리나라를 구원하고 한국에 온지 6개월만에 그리 빨리 가다니 우리는 너무 안타깝지만 하나님의 섭리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하찮은 참새 한마리도 하나님 허락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워커 장군이야 말로 다 망하여가는 한국을 살려놓았던 너무나 큰 일을 하셨던 분이다. 무너져 떠내려가는 낙동강전선을 회복시킨 워커장군이야 말로 그에게 주어진 일을 100% 다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 이제 현충일을 기억하는 한국인으로서는 워커장군을 정말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쉐라톤 워커힐 본관 정문 산자락에 세워진 비문 **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던 미국 조야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장군만이 홀로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46편10절 모든 재난이 일어난 뒤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6.25 한국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기적을 국내에서와 국외에서 역사하셨기에 김일성이가 거의 다 잡았던 대한민국을 붙들어 주신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그 많은 기적현장의 6.25 한국전쟁을 회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세상 살아가면서 돈이 정말 필요하다는것 알고 계시고 돈이 있어야 그것을 갖고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는데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원칙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하는 이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에 있어서 최대 관심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며 이 교훈을 그리스도인의 대헌장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시간 우리의 삶속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인생의 중심이 되시기를 기원하면서 오늘 현충일의 역사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