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나의 본업과는관계없이 거의 평생을 부동산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중학 교 2학년 때 광주로 온 이후 틈만 나면 어머니께"엄마 집사요.집을 사야 돈을 벌 수 있어요"했다.그렇지만 하숙 치고 계로 살아가는 여자로서는 집을 사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국은 나의 등쌀에 못이겨 무리해서 대학1학년때 집을 샀는데 2년도 못돼서 빚만 지고 몽땅 날려버렸다.
그후 50여년이 지난지금에 오피스텔이 20여개 되는데 언듯보면 많은것 같은데 별 보잘 것 없는 빛좋은 개살구다.평생을 부동산에 관심을가진데 비하면 그야말로 미미하다는 뜻이다.그렇지만 스물여섯살에 결혼할 때 집사람 결혼비용을 그냥 돈으로 가져오게 해서 1975년 가을 서대문구 홍은동 달동네에 160만원 짜리 집을 샀다가 3개월후에 190만원에 팔아서 30만원을 남긴 것을 생각하면 지금 금액으로 환산하면 6,000만원정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어떻든 50여년간 부동산을 부업으로 매매하면서 얽힌 여인들에 대한 뒷이야기도 많이 있다.
그 첫번째가 신당동 달동네 딱지집이다.1980년경 동아건설로 사우디에 갔을 때 휴가차 귀국하기 전에 시간을 벌기 위해 집사람에게 서울 몇곳 달동네의 딱지집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다.
휴가차 귀국했을 때,나는 잠깐 아이들과 아내와 보내고 내가 가진 돈은 기껏 500만원밖에 없었는데,곧장 신당동 달동네에 가서 1,000만원 짜리 딱지집을 계약했다.나머지 500만원은 그집을 전부 세내준 보증금으로 충당했다.당시 달동네 딱지집은 등기자체가 되어 있지 않고 다만 동사무소에 비치된 "무허가 주택대장"이 유일한 등기부등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모르는사람에게는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그것을 근거로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다.
그집이 시간이 지나면서 보증금은 그대로 두고 월세만 20만원으로 올랐다.방은 2개였는데 그 당시만 해도 월세를 통장으로 보내지 않고 직접 주는 것이 관례였다.세를 받기 위해 아주머니를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월세를 밀린 경우가 자주 있었다.그래서 그이유를 물어보니 남편이 관광버스' 기사인데 생활비는 제때 주지 않고 퇴근하면 술을 먹고 심하게 구타한다는 것이었다.그래도 이 여인은 어떻게 대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맞는다고 했다. 들어보니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그녀는 김 ㅇㅇ였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면 안된다.맞아 죽더라도 끝까지 싸워라."이 여인은 내가 시킨는 대로 남편과 싸웠다.처음에는 남편이 놀라더니 이내 때리는 것을 멈췼다.
그녀는 나에게 고마와 하면서 내품에 안겼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만남은 지속되었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저 관찮은 여자죠?착한 여자에요"내가 풀무원에서 나와 청호에 있을 때도 우리의 만남은 계속 되었다.청호에서는 새벽 6시반에 출근해서 9시쯤이면 다들 일하러 나갔다.직원들이 나간 후 우리는 아침에 부근 모텔에 가서 애욕을 즐겼다.그녀는 사고가 아주 긍정적이어서 주위 아는 사람에게도 몇대를 팔았다.세칭 명문대 나온 사람들도 한대도 팔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평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어는' 날 내가 동창회 모임에 갔을 때 옆에 앉은 Y원장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서 "물사업,청호 정수기 사업을 하고 있디"고 하자 .마침 자기병원에도 정수기 한 대가 필요하다고 해서 이 여'성을 시켜 계약하고 설치한 적이 있다.그가 지금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었다.
그 후 신당동의 재개발사업이 완료되어 2000년에 내가 신당동 삼성아파트로 이사갔을 때 그녀는 임대아파트를 분양받아 당시 그녀로서는 기초 재산형성에 큰 기여가 되었다.이사간 후 그녀에게 전화했는데 전화번호를 바꿔버렸다.
첫댓글 부동산과여인들!
제일자신있는전공분야시네요!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