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39. 일본의 근대불교학 형성
해외유학생 파견…西歐 불전연구 성과 수용
메이지 유신 직후 1871년, 일본 정부는 서구의 근대문명을 학습하기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이 무렵 불교계도 종단차원에서 스님들을 보내어 구미의 종교사정을 시찰하게 하였다. 이는 비록 당시 일본의 주류종단이었던 정토진종, 그 중에서도 특히 동서 양본원사 교단에 한정된 일이기는 하였지만, 이 종단의 지도자들이 일찍이 구미의 상황을 직접 목격하눼� 것은 이후 일본불교의 근대적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일은 서구의 불교문헌 연구 성과를 수용하기 위해 유학생을 파견한 것이었다. 당시 메이지 사회에서는 문명개화의 강력한 구호 속에서 서구학문을 적극 수입하기 위해, 유럽 특히 독일에 많은 유학생을 보내고 있었는데, 불교계의 구미유학생 파견도 이러한 조류의 일환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구미 중심 남방불교국가서 원전연구 ‘근대적 변화’
새문헌 확보 위한 해외탐사엔 제국 경쟁원리 작용
최초 유학생은 동본원사의 난죠 분유(南條文雄, 1849~1927)였다. 가장 먼저 구미시찰을 마쳤던 동본원사교단은 유학생 파견에 있어서도 가장 빠른 행동을 보여주었는데, 이 시찰단은 프랑스에서 범어불전을 보고 놀라 불교원전연구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다. 그 후 돌아와 1876년에 드디어 두 명의 유학생을 영국으로 보냈는데, 난죠 분유가 최초의 유학생이 된 것은 함께 유학길에 올랐던 동료, 가사하라 겐쥬우(笠原硏壽)가 도중에 병을 얻어 귀국한 뒤 곧 병사하였기 때문이었다.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의 주류종단이었던 정토진종, 그 중에서도 특히 동서 양본원사 교단의 지도자들은 종단차원에서 서구의 불교문헌 연구 성과를 수용하기 위해 유학승을 파견했다. 사진은 일본 교토의 서본원사의 모습. 사진제공=조승미
난죠 분유는 3년간의 영어학습 기간을 마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막스 뮐러(Max Mu..ller, 1823~ 1900)로부터 산스크리트어와 인도학을 배웠다. 막스 뮐러는 프랑스 대학의 산스크리트 담당교수였던 유진 부르누(Eugne Burnouf, 1801~1852)의 제자였는데, 부르누가 산스크리트 문헌 연구에 있어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네팔에 있던 인도불교문헌을 400종 이상 유럽의 도서관으로 보내준 동인도회사의 관리 브라이언 헛즈슨(Brian Hodgson) 같은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 최초 유학생 난죠가 근대 불교학을 배우기 위해 영국에 왔던 19세기 중엽에는 이와 같이 유럽에 이미 산스크리트어와 팔리문헌의 확보와 함께 그에 대한 연구 성과물이 상당히 축적되어 있었던 상태였다.
한편, 막스 뮐러는 그의 일본인 제자 난죠로 인해 그의 <동방성서(Sacred Books of the East)>편찬 작업에 대승불전을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난죠는 뮐러는 함께 <금강반야경> <무량수경> <아미타경> <반야심경> 등의 산스크리트본을 간행하기도 하였고,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도 인도불교학자 케른과 합동으로 <범문법화경>의 교판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국에서 만난 중국의 양문회 거사와 불전을 서로 교류했던 것은 많이 알려져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난죠 분유는 최초의 유학생이면서 유럽의 불교문헌연구에 적극 참여하였고, 양문회와의 교류를 통해 중국의 불전유통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 서본원사파에서도 많은 유학생을 구미에 파견하였다. 1875년에 이마다데 도스이(今立吐醉)를 미국에 보냈으며, 후지에 다꾸쭈으(藤枝澤通)는 프랑스에서 약 10년간 머물고, 그리고 스가료우 호우(菅了法)는 영국에서 2년 반을 머물면서 각각 산스크리트어를 익혔다.
이처럼 초기에 동서 양본원사 교단은 구미를 중심으로 산스크리트불전을 연구하기 위한 유학생을 파견했는데, 반면에 그 다음 세대에는 팔리문헌을 연구하기 위해 스리랑카나 샴(태국) 등 남방불교국가로 유학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 경우 진언종이나 임제종, 정토종, 천태종 그리고 정토진종 불광사파 등이 유학생 파견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동서 본원사교단에서 파견한 유학생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메이지 말기에는 독일유학생이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정토종의 오기와라 운라이(荻原雲來), 아네자키 마사하루(姉崎正治), 와타나베 가이교꾸(渡海旭)등이 있었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스즈끼 다이세쯔(鈴木大拙)를 비롯하여, 조동종의 누카리야 가이텐(忽滑谷快天) 등이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메이지 시대 일본 불교의 주요 종단은 구미를 중심으로 남방불교국가 등에도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의 불교학에 있어서 주류가 된 산스크리트 및 팔리어 등의 불교문헌연구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또한 일본불교계는 서구의 불교학이 산스크리트 불전의 수집을 계기로 급속하게 발전한 것을 보고 새로운 문헌자료의 확보를 위해 해외탐사여행을 파견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일본 내에서 서구를 이기는 동양의 주자로서의 정체성이 강조된 국수주의의 경향이 불교학에도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대표적인 탐사지역은 티베트와 서역이었다. 티베트 탐사에는 가와구찌 에카이(河口慧海 1866~ 1945)가 유명하며, 서역탐사는 서본원사파 법주 오오타니 코오즈이(大谷光瑞)가 직접 지휘하였던 것으로, 교단의 막대한 자금이 투여되는 대사업이었다. 이처럼 문헌자료를 확보하고자 하는 탐사는 순수한 학술탐사라기 보다는 제국의 경쟁원리로 이루어진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불교학은 산스크리트나 팔리어 불전의 연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구에서 불교 원전어를 익힌 유학생들이 돌아오면서부터 이 원전에 근거한 불교연구가 불교학의 주류가 되기도 하였지만, 이것만으로 근대불교학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난죠 분유를 비롯한 유학생들이 서구에서 불교문헌학을 익히고 있을 무렵, 일본 국내에서는 주로 대학의 불교학 강사들에 의해서 새로운 불교해석의 시도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내용은 크게 과학적인 접근과 철학적인 접근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사적인 접근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근대불교학은 이와 같이 과학, 철학, 역사적 접근의 도입으로서 시도되고 또 구성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다.
국내선 과학.철학.역사적 ‘새로운’ 불교해석 시도
대승불교 비과학적 비난 ‘대승비불설’ 뜨거운 논쟁
먼저, 동경대학 최초의 불교학 강사였던 하라탄잔(原坦山, 1819~1892)은 과학적인 접근법으로 불교를 새롭게 해석하였다. 그는 한적(漢籍)에 근거한 대승불교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의학연구의 경력도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불교의 심성론을 의학과 연관시켜 설명하였으며 불교가 합리적인 실험주의에 기반하지 않으면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불교해석은 기존의 전통적인 불교 이해와 충돌하여 불교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철학적인 접근법이었는데, 대표적인 학자는 이노우에 엔뇨(井上圓了, 1858~ 1919)이다. 그는 진종대곡파의 스님으로서 동경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887년에 동양대학의 전신인 철학관(哲學館)을 설립하였다. 이곳은 ‘호국애리(護國愛理)’의 모토를 가지고서, 신유불(神儒佛)의 동양학을 교육하는 학교였다. 또한 그는 불교사상을 철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재해석하였다.
그 목적은 불교의 국가적 역할을 분명히 하고, 또한 기독교의 반철학성과 반국가성을 논증하여 배척하고자 하는 국수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불교의 철학성에 대해 인식하게 된 계기가 서양의 불교강의에서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근대불교학이 서양의 불교관에 근본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역사적인 접근은 가장 논란이 많은 것이다. 또한 그만큼 전통적인 불교관을 가장 많이 뒤흔들었던 근대불교학의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메이지 일본불교에 있어서 가장 뜨거웠던 주제는 대승비불설 논쟁이었다.
무라카미 센쇼우(村上專精, 1851~1929)는 진종 대곡파 출신으로서 하라탄잔의 뒤를 이어 동경대학 강사를 역임하였고, 대곡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그가 <불교통일론> <대승불설론비판> 등을 저술하여 대승비불설론에 기울어지자, 승적이 반환되기도 할 정도로 교단 내에서 저항은 거세었다.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일본에서 근대불교학이 보수적인 불교 교단의 영향력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었는가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게 한다.
보다 강력한 대승비불설론은 아네자키 마사하루(姉崎正治)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동경제국대학 철학과 출신으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그 대학의 종교학 교수에 취임하였는데, 불설이 아닌 경전을 불설로서 이용하는 대승불교를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고, 역사적 비평에서 불교학이 출발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904년에 발표한 저술 <현신불과 법신불>에서는 팔리어불전과 한역의 4아함경에서 고증적으로 가려 뽑은 불타론만을 전개하고, 대승경론의 교설을 제외하였다. 그런데 1910년 저술인 <근본불교>에서는 “동방의 대승불교와 남방의 상좌부불교가 모두 근본을 잊은 지엽적인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아네자키의 견해는 역사학적 사료고증만 중시하여 현실의 불교를 모두 타락하고 오염된 불교로만 바라보게 만든 전형적인 근대의 불교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서구에서 고도로 발달된 불교문헌학이 근대의 이름으로 아시아불교학에 던진 그림자이기도 한 것이었다.
조 승 미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출처 : 불교신문]
☞'불교사 명장면'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