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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산(袁樹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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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出生):(陰閏) 1881년(光緖七年)윤달(閏月) 7월 15일 寅時
출생(出生):(陽曆) 1881년 09월 08일
사망(死亡):1952년(72세, 壬辰)에 사망설(李植中)을 기준.
사령(司令):酉中庚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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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 乙 丁 辛
寅 巳 酉 巳
70 60 50 40 30 20 10 00
己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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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出典):원수산(袁樹珊) 저(著) 명리탐원(命理探原) 4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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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산(袁樹珊)하면 명리학자(命理學者)로 『명리탐원(命理探原)』을 저(著)한 것을 알려져 있습니다. 무릉출판유한공사(武陵出版有限公司) 가 발행(發行)한 명리탐원(命理探原) 7p 자서(自序)에서 “民國四年歲次 乙卯十一月壬申朔越十有一日壬午鎭江袁樹珊識於鐵甕城西之潤德堂” 즉 ‘민국(民國) 4년이면 서기(西紀) 1915년, 세차(歲次)는 을묘(乙卯)이며 11월, 음력 초하루(朔) 임신(壬申)을 지나(越) 11일(十有一日) 임오(壬午)일에 진강(鎭江) 원수산(袁樹珊) 철옹성(鐵甕城)의 서쪽(西)의 윤덕당(潤德堂)에서 기록(識)하였다.’라고 적고 있어 그의 35세(乙卯)에 집필(執筆)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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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산(袁樹珊)의 『명리탐원(命理探原)』423p〜427p에 원수산(袁樹珊) 자신(自身) 명조(命造)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說明)하고 있습니다.
袁樹珊 命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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賤造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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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命造) 앞에 “賤造附” 즉 ‘천한 명조를 덧붙인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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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목(乙木)이 가을에 태어나면(秋生), 초목이 시들어 떨어지듯, 세력 따위가 차차 쇠하여 보잘것없는 모양으로 나타나고, 천간(幹)과 지지(枝)에 금(金)이 중(重)한데, 다시 심한 손상을 주는 것(摧残)에 속함으로 천간(幹)의 화(火)로 천간(幹)의 금(金)을 눌러 억제하는 것을 찾아 가지게(取)되고, 지지(枝)의 화(火)도 지지(枝)의 금(金)을 눌러 억제해야 하는데 네 개의 금(四金)은 네 개의 화(四火)를 만나야 적당하게 알맞게 되는데 목(木)이 느끼는 것(覺)은 금(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팔자(命宮)에 비겁(比劫), 장생(長生)의 돕고 돕는 것(資助)이 없으면, 목(木)은 쇠(衰)하고 화(火)는 성(盛)하게 되므로 훔치어 새어나가는 것(盗洩)의 근심걱정(患)이 아닐 수 있겠는가(能無). 이와 같이 그것을 보아야 한다. 용신(用神)은 월간(月幹)의 정화(丁火)를 찾아 가지게(取)되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의 실제(實)는 명궁(命宮)에 있는데 갑목(甲木)과 오화(午火)이다. 팔자(八字)에 수(水)가 이지러져(缺) 있는 것이 애석하게 여기게 된다. 과거급제(科第)에 결실을 맺는 것(登)이 어렵다.
일찍이 듣건대(嘗聞), 돌아가신 아버지(先父) 창령공(昌齡公, 字)이 이르기를(云), 너(汝) 생시(生時)가 아니다. 달도 밝고 별도 밝은데(月明星朗), 장차(將) 생시(生時)에, 구름이 잔뜩 끼고 큰 비(密雲大雨)가 되어야 되는데 이미(旣) 생시(生時)에 구름과 비(雲雨)가 갑자기 흩뜨려지고(忽散), 별과 달(星月)만 아직 남아 있는데(猶存), 곧(而) 하늘 방위가 동이 트고 날이 새게(破曉) 될 것이다. 비록 오행(五行)에 수(水)가 이지러졌다고(缺) 할지라도, 하늘의 도움이 있는 시기(天時)에 수(水)를 얻어(得) 그것을 돕게 되어도 결국(究)은 이기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因此), 사람(人)이 비록(雖) 우둔하고 바보스럽고 어리석어도(愚魯), 배움은 조금 이룰 수 있었지만 명예(名)는 비록 보잘것없었다(不揚). 인품(品)은 오히려(尙) 이지러짐이 없었다. 만약 (果能) 책을 읽으며, 천명에 따라 분수에 맞게 살기(安命)만 한다면, 좋은 벗을 골라 사귀고(擇交), 생계를 유지(治生)하면 반드시 가문의 명성이 떨어짐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고, 곧(而) 굶어 죽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므로 효과가 나타나도록 이미 지나간 일을 다스리며, 아직 오지 않는 내일을 살피며, 이로움이 더하도록 선인(先人)의 훈계(訓誡)를 믿으며, 지극한 도리가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6세(歲) 전(前)에는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이 편안한 모양(坦然)이였으며, 7세(歲)에, 신금(申金) 대운, 정해년(丁亥年, 1887)에는 사맹(四孟, 寅申巳亥)이 질서정연하게 가지런하여 충(衝)을 만나 극(尅)에 이르렀다. 이 년(是年, 1887) 8월(八月)에 돌아가신 어머니(先母) 전태부인(田太夫人, 첫째 지위의 一位夫人)이 세상을 등지었다(見背). 20세(前) 을미(乙未) 이순(二旬, 二運) 운(運)은 과거 시험 합격의 명예(科名)에 다투고 다투어서 겨루었고(競争), 의학(醫學)을 연구(硏究)하면서도 기술(小道)에 스스로 만족(自甘)할 가치가 없다고 하찮게 생각(不屑)하였다. 그리하여(然)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마감 지었다. 다만 공연히 쓸데없이 불러 외쳤지만 어찌하겠는가(徒唤奈何).
자연히 21세(歲, 1901, 辛丑)에 갑목(甲木)대운으로 바뀌자 비겁(比劫)이 일간을 돕게 되므로 학술(學術)이 조금 나아가면서, 명예(名譽)가 점차 아름답게 되었다. 혼인을 완성한 후에, 연이어 2 아들(二男)을 낳았다. 가히 가정의 아버지로 위로 받으면서 자리를 까는 것이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어찌 병오년(丙午年, 26세 1906)을 예측하여 짐작이나 했겠는가? 기사(기巳)에 한(限)하여, 병신(丙辛)이 수(水)로 화(化)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곧(而) 이미 겹쳐서 금(金)이 모여 목(木)을 극(尅)하니, 이 해(是年), 사월(四月)에 돌아가신 아버지(先君)가 마침내(竟) 부모를 여의었다(棄養). 아아, 슬프고 원통하다(嗚呼痛哉). 윤달(閏) 4월(四月)에 둘째 아들(次子)이 덕(德)이 밝았지만(明) 운명이 기박하고 불운하여(命薄) 젊어서 요절하여 매우 크게 탄식한 것(浩歎)은 이와 같다. 이 해(是年) 9월(九月) 5일(五日)을 시작으로 오화(午) 대운으로 바뀌자, 일주(日主)가 장생(長生)을 얻었다. 정화(丁火)는 임관(臨官)을 얻었다. 비록(雖) 무신년(戊申年, 28세, 1908)에 삼형(三刑)이 지나갔지만, 또한(亦) 한때(一時) 재앙으로 소모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가 가지런하니 맞이하여 대하여(應接) 겨를이 없었다. 31세(三十一歲, 1911) 계수(癸水) 대운으로 바뀌자, 신해년(辛亥年), 갑자(甲子)에 한(限)하여 충(衝)한 가운데(中)에 합(合)을 만나니 극(尅)한 곳(處)에 생(生)이 있었다. 단지 집안일에 노력하였지만 어지러웠으나 나머지 임자년(壬子年, 32세, 1912)은 다른 근심걱정은 없었던 것은 몸(身)은 쇠(衰)하였지만 인성을 만나, 9월(九月)에 덕을 겸(謙)한 셋째 아들(三男)이 태어났다. 계축년(癸丑年, 33세, 1913)은 정화(丁)를 계수(癸)가 손상하게 된다. 투합(妒合)으로 포위를 헤치고 곤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유축(巳酉丑)이 금(金)으로 화(化)하니, 가을 목(秋木)이 그것의 극(尅)을 이기지 못하고, 칠월(七月)에 맏아들(長子)을 즐거움으로 얻었지만 요절(殤)하였다. 마치 이 해에 봄의 한가운데와 같았다. 서쪽 손님에게 술을 베풀 듯이 가로막히고 차단되니 자리가 흐트러졌다. 나(余)가 그것을 일컫어 말하기를 주객(賓主)이 마시는 것을 함께하며, 아이를 마주 대하여 이르기를, 스승이 논문을 생(生)하며, 아우(家弟)에게 과거 급제자의 명부를 희롱하는 삶이 되도록 그것을 일러 말하기를 덕(德)이 있고, 수명이 있다. 아이를 마주 대하여 이르기를(曰), 무(武)에도 능하고 또 문(文)에도 능하므로 지금(而今)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게 되니(不禁), 눈물(淚)이 다음(下)에 괴롭고 번민하고 피로한 모양이 되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릴 것(涔涔)이다. 스스로 이것 이후(以後)에 온갖 생각이 모두 먼지(灰)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갑인(甲寅, 34세, 1914) 봄(春)에, 응대하고 접대하는(應酬) 관사의 일(館事)은 나른하거나 노곤하였다(懒). 초산(焦山, 鎭江三山)에서 작은 것을 보내 주어(小往), 자료를 모아 정리하여 저술하는 것(纂述)에 종사(從事)하였다. 을묘(乙卯, 35세, 1915)년 겨울(冬)에, 명리탐원(探原) 원고 쓰기를 마쳤다(脫稿). 비록 보고 들은 것이 넓지 않아(雖見聞不廣), 말이나 글이 꾸밈이 없으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言之無文). 그러나(然) 속마음(私心)은 스스로 행복에 겨워 기뻐하였다(自幸). 일원(日元)이 건록(祿)을 얻은 까닭에서 빚어진 일로 생각하여 여기었다(以爲).
36세(三十六歲, 丙辰, 1916) 사화(巳) 대운으로 바뀌자, 이미 훔치어 새나가는(盗洩) 근심걱정(虞)이 있었고, 또한 일간(身)을 극(尅)하는 근심걱정(患)이 있었다. 이 때문에(是以) 입고 먹는 것을 아끼고 절약하였다(節衣縮食). 민첩하게 일하고 말을 삼가 하였다(敏事愼言). 41세(四十一歲, 辛酉, 1921)에 임수(壬) 대운으로 바뀌자, 진(辰) 대운에 가까이 가서 접근(接)함으로 목(木)이 수(水)가 기르고 성장시키는 것(養)을 얻게 되고, 생활의 재미와 삶의 흥취(生趣)가 넘쳐흐르는 모양(盎然)이 되니, 어긋나는(差) 한 집안의 족보(家譜)를 편집(編輯)하니 행복에 겨워 즐거워하였다(幸). 일족의 조상을 함께 모시는 사당(宗祠)을 건축(建築)하고, 선조(先君)의 사후에 간행된 저서(遺書)를 인쇄(印)하여 책을 펴냈다. 더불어 그 밖의(其他) 새로 저작(新著)한 것도 하였다. 자신의 능력으로 힘써 애쓴 것이 완성을 알리었다. 재앙이나 좋지 아니한 일 등을 잘 피하여 면함으로써(得免) 초월하여 굴러 떨어졌다(隕越). 51세(五十一歲, 辛未, 1931)에 신금(辛) 대운으로 바뀌자, 금(金)이 강(剛)하여 목(木)이 떨어져서 쇠퇴(落)하니, 쌓이고 쌓여 지쳐서 초라한 모양(纍纍)으로 부채나 세금을 연체하거나 체납하였다(逋負纍纍). 살을 도려내어 상처에 붙이듯 나쁜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발등의 불을 끄는 데 급급해하였다(剜肉醫瘡). 고난(苦難)을 아쉬운 대로 참고 견디었다(應付).
56세(五十六歲, 56세 丙子, 1936) 묘(卯) 대운으로 바뀌자, 유금(酉)을 충(衝)하니 한 두 마디로 진상이나 감추어진 일을 폭로하였다(破提, 点破). 갑자기(猝) 나라가 위태로운 고비(國難)를 만나니, 이리저리 떠다니며 객지에서 세상의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風塵僕僕). 힘이 진력이 나서 근육이 지친(力倦筋疲), 61세(六十一歲, 辛巳, 1941)에 경금(庚) 대운으로 바뀌자, 금(金)이 와서 함부로 거리낌 없이 잔학한 짓을 하였다. 을(乙)이 합(合)하지만 공이 없으니, 겹쳐져 포개어 보게 되니 손실되어 손해를 보았고, 근심하고 고민하는 것(憂惱)이 자주 왔다. 비록 집 안에만 틀어박혀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고(杜門) 책 읽는 것을 하고 싶었지만, 또한 걸리는 것이 필요(得)하여 불가(不可)하였다. 66세(六十六歲, 丙戌, 1946) 인목(寅) 대운으로 바뀌자, 바로 을목(乙木)이 제왕(帝旺)의 방향(鄕)이므로 저녁 해가 서쪽의 뽕나무와 느릅나무 위에 걸려 있는 것처럼 해질 무렵의 황혼(暮景桑榆)이니, 빠르게 응하면서(亟應)도 진귀하게 여겨 아끼었다(珍惜). 또한 아이 무리(兒辈)를 위한 것을 이미(業經) 조직하여 창립하여 설치(成立)하였다(成立). 가히 거칠게 참아내면(粗堪) 자력으로 생활(自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而) 도의 형(道兄)인 마군(馬君)과 운정(雲程)이 또한 다시 여러 방면으로 격려하고 북돋우게(鼓勵)되니, 다시 옛날에 익힌 솜씨를 발휘하게(再爲馮婦)되었다. 벼루를 농사짓는 논에 비유하여, 문인들이 생계를 위해 글을 쓰는 문필 생활(硯田)이 붓 쟁기(筆耒)가 되니, 대략(略) 이익이 있어 흑자가 되었다(盈餘).
시작(始)은 곧(則) 처음으로 세운 복희(伏羲) 성인의 사당(聖廟), 한(漢)나라에서 시작하여 송(宋)나라 일곱 명의 현인(七賢)을 덧붙이어 제사를 올리다. 〘사마계주(司馬季主, 楚国人)〙, 〘원천강(袁天罡, 573∼645)〙, 〘엄군평(嚴君平, BC 86∼AD 10)〙, 〘이순풍(李淳風, 602∼670)〙, 〘관공명(管公明, 管輅, 209∼256)〙, 〘곽경순(郭景純, 郭璞, 276〜324, 字景纯)〙, 〘사첩산(謝疊山, 谢枋得, 1226〜1289, 字君直, 号叠山)〙계속 이어서(繼) 학교(學校)를 다투어서 열고, 쓸쓸하고 가난한(孤寒) 자제(子弟)를 인재가 되도록 양성하여 키우고, 감히 덕을 중시하여(崇德) 알리고, 공훈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고(報功), 그 인물에 맞게 교육하니(因材施教), 점점 힘닿는 대로 하였지만 재주나 힘이 미약함에 불과(不過)하였다. 비워서 나는 것을 면하도록 자리를 깔았다. 삼가 종형(宗兄. 적장자 형) 어울리게 적합하였다(稱). 증연청(贈聯廳)의 오른쪽에 있는 것에 이르기를(云) 광동성(粤, 廣東省)에 스스로 천지가 열리기 전의 혼돈의 기운(洪濛)을 개벽(開闢)하는 것이다.
시작은 하나(一)로 말미암아 양의(兩儀)로 기록(一書)되고, 사상(四象), 팔괘(八卦)가 우주(宇宙)의 헤아릴 수 없이 비밀을 지키며 수장되거나 밀장된 것들이 들어났다. 앞선(先) 문왕과 무왕(文武) 공자(周孔) 성인(聖)에 이르기 까지 천지자연이 만물을 생성하여 발육시키고 백성의 생계를 세워 주게 되니, 공적이 오랜 세월, 위에서 아래에 베풀어 드리우게 되었다. 다만 고대의 지방 학교(庠序)에서 삼가며 닦고 익힌 것이 무성해지고,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성스러워야(父慈子孝)하는 것을 펼치니, 형제끼리 우애가 깊고(兄友弟恭), 국가(國家)는 넓고 성대한 모양이 되도록 타고난 기운을 가꾸어 기르게 되며, 예절(禮)과 의리(義)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치거나 할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상태(廉恥)를 유지하도록 베풀고, 군주가 백성이 뒤지거나 뒤떨어진 것을 교화하고(甄陶後進), 덕(德)으로 향리의 제후로 봉하여 퍼뜨리게 되니, 식견이 있는 사람은 이것이 서로 이어져 맞닿도록 이르게 된다. 당당하게 기세가 드높고(大氣磅礴)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말을 하고 글씨가 세밀하고 정제되었다(立言工整). 그러나(而) 나는(余) 곧(則) 대단히 부끄러움이 불어나게 될 것이다.
대대로 이어 내려온 그 여러 대(歷代)에 점을 치는 사람(卜人)이 전(傳)하는 것이 40권(四十卷) 정도에 이른다. 상고(上古)시대의 태호복희(羲農)씨에서부터 민국(民國) 초(初) 선현(先賢)이르기 까지, 무릇(凡) 3,800(三千八百)여분의 사람(餘人)을 곧(乃) 20년(二十年)남짓(余)을 소리를 내어 읽거나 외우고(目誦) 손으로 눈물을 훔쳐 닦으면서 마음먹은 대로 유창하게 문장을 짓게(手揮)되니, 조금씩 조금씩 모여(積銖累寸) 곧(而) 이루게 되었다. 운정(雲程) 형(兄)이 보고서, 곧(而) 그것을 좋아했다. 시원시원하게 흔쾌히(慨然) 돈을 버리고(捐資) 책을 펴냈다(刋行). 또한 다행히(幸) 경금(庚) 대운에 책을 인쇄하여 세상에 내보내게(出版) 되었다. 하나를 인용하고도 만 개를 빠뜨리는 것처럼 갖추어지지 아니하고 비거나 빠짐이 대단히 많았다(挂一漏萬). 당연히(固) 대단히 고상하니(大雅) 비웃고 비난하고 규탄하는 것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벗이 숨은 것을 밝혀내었다(闡幽). 이제 마침내 좋은 벗(良朋)이 지지하고 도왔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曰)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誠哉斯言).
71세(七十一歲, 辛卯, 1951) 기토 대운(己運)으로 바뀌자, 토(土)가 또 금(金)을 생(生)하므로, 목(木)을 치고 때리는 것(打擊)을 받게 되니, 방패 구름(翳雲)으로 해를 가리게(蔽日)되어, 골치를 앓은 일로 가슴 아파야 하며, 잠시(姑且) 은퇴하여 한거하게(息影)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게(安貧)되면서, 오랫동안 서서(竚) 황허가 맑고 바다가 잔잔하니 태평세월(河清海晏)을 기다리게 된다. 하물며(而况), 처(荆妻, 자기의 처를 겸손하게 부르는 말)가 건강하게 여전히 잘 있고(建在), 손자(蘭孫)가 초목이 떼 지어서 자라나듯이 자라나고(叢生), 희망(希望)이 끝이 없이 무궁하며(無窮), 자못(颇) 적적하거나 고요하지(寂寞) 않고, 온 천하(海内)에 소식을 알리게 되니(知音), 다행히 그것의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게(幸垂教之)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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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고증(生卒考證)
원수산(袁樹珊)의 사망(死亡)에 관한 여러 가지 설(說)이 있는데 정리(整理)하면 다음과 같다. (百度百科 基準)
1). 이식중(李植中)선생의 저(著)한 원문(原文) 사근총고(史勤丛稿)를 보면, 1952년(72세, 壬辰)에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2000年 9月 第1版, 第299页,야설원수산(也说袁树珊) 一文.
2). 협상정(叶尚鼎) 1962년(82세, 壬寅) 사망설.
3). 고일평(顾一平) 1968년(88세, 戊申) 사망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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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命書)
1).명리탐원(命理探原) 袁樹珊 著 民國4년 乙卯(1915년, 35세)
2).적천수천미(滴天髓天微)袁樹珊撰輯, 民國22년 癸酉(1933년, 53세)
3).명보(命譜) 袁樹珊 編著 中華民國 28년 己卯(1939년, 5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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