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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2월 후배인 오형국 목사(한국성서유니온 선교회 전국 총무)께서 목회자들과 함께
기독교 학문 및 교육사역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무크지를 만들었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잡지 제목은 <독타 피에타스docta pietas>라고 합니다.
독타 피에타스는 '지성적 경건(learned piety)'이란 뜻이고요.
한국기독교는 인문학텍스트의 불모지인가?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1. 이미지의 시대
현대인의 삶은 이미지에 의해 결정적 영향을 받는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 상품을 구매하는 경제 행위, 선거에서 투표를 하는 정치 행위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구체적 언행, 상품의 질과 가격, 후보자의 인품과 공약 등을 따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이미지가 선택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상품도, 기업도, 사회도, 정권도, 국가도 브랜드 이미지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그래서 세계 도처에서 기업이나 국가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선전의 시대, 광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온갖 종류의 상업적 프로파간다들이 일상적, 파상적으로 판을 치고 있는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다. 그것들이 노리는 목적은 같다. 그들이 떠벌리는 말을 사람들이 들어주기를, 믿어 주기를, 나부껴 주기를 하나같이 노리고 있다. 그들의 말을 의심해 보거나 스스로 고쳐 생각해 보거나 하지 않고 오직 어린애가 어른 말에 따르듯 나부껴 주기를 모든 프로파간다는 노리고 있다.
소비 산업, 레저 산업의 선전이 노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시민을 소아화(小兒化)하는데 있다. 그것이 원하는 이상적 소비자상은 딴 생각하지 않고 먹자판, 놀자판에서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내 펑펑 써 주는 사람들이다. 이미지 생산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방송 제작자들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들 때 시청자의 수준을 중학교 2학년생에게 맞춘다고 하지 않는가?
인문학 텍스트는 그래서 중요하다. 책을 읽는다는 것,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오늘의 어지러운 싸움판 시장판을 벗어나서 영원한 과거와 대화를 해보는 것이다. 사람은 책을 발명함으로써 목숨이 끝난 뒤에도 자기의 말을 백년 후, 천년 후의 미래에까지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먼 세계를 여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타임캡슐 속에 들어가 먼 과거를 여행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책이 있음으로 해서 사람은 비로소 시간․공간을 초월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전의 소리가 오직 ‘오늘’을 지향하는 소리인데 비해서 고전에서 듣는 소리는 시공을 초월한 ‘영원’의 소리일 수 있다. 선전의 소리가 이익을 노리는 소리라면, 고전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이성의 소리이다. 그리고 그 이성의 소리에 귀가 열릴 때 어린애는 어른이 된다. 시인 존 밀턴이 말한 것처럼 책은 ‘이성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2. 한국기독교의 좌표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는 온갖 종류의 상업적 이미지들이 판을 치고 있는 시대 풍조 속에서 인문학 텍스트 생산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 관심은커녕 오히려 시류에 대책 없이 쓸려 들어가는 상황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얄팍한 유희와 볼거리에 치중하면서 노골적인 반(反)지성주의를 드러내는 한국 기독교의 행태는 상업주의에 매몰된 소비사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어느 젊은 그리스도인이 보내준 이메일 한 편을 소개한다.
…… 제가 몸담고 있는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의식과 ‘복음전도’의 열정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강한 어조로 권면하고 글을 주어도 ‘지적 교만’이라는 말로 한순간에 순수한 마음을 묵사발로 만들기가 일수이지요. ‘지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하면 일단 교회 교역자들부터 사색이 되는 그러한 상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참으로 답답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깊게 알고자 하는 사람은 방대하고 어려운 신학을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고 좀더 알고자하는 열정 가운데 그 어려운 원서들을 독파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하여서 이것이 지적 교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일까요?
적당히 대충대충 부활절, 성탄절 절기나 지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사명이 끝난 것일까요?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성서는 복음전도와 십자가의 멍에를 우리 어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구원의 사건’이 크고 ‘십자가의 신비’가 놀랍습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한국교회는 ‘교제’와 ‘선교’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유희’와 ‘놀이문화’ 중심으로 거품만 키워가고 있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과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참 지도자와 참다운 글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명료성’과 ‘분별력’ 그리고 생명에 대한 ‘진지성’을 상실해가는 한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위험수위가 극도에 달해있다고 저는 진단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러한 글 쓴다고 해서 달라질 것 하나도 없다는 것 알면서 하도 답답하고 기가 막혀서 이렇게 심정을 토로합니다. 제가 다시 한번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살리고 이 세계를 크게 뒤흔들기 위해서는 모든 학문의 통일성을 동일선상에서 논의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전인학문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의 말대로 신학은 시대마다 다르게 쓰일 수 있지만 보편학문격인 이러한 큰 그림은 시대를 초월하여서 보편성을 띨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분들이 사상이니 학문이니 하면 으레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저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하다 보면 정말 별거 아니다 싶은 것이 인간의 지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세대 그리고 우리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세계가 되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부여하신 타락한 이성으로 죽어라 공부하며 복음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저를 이상주의자라고 비판해도 좋습니다. 어차피 역사는 이상주의자들과 광인들에 의해서 조금씩 변화해 왔으니까요.
침묵만 하는 그리스도인, 아무런 행동도 고민도 없이 성금요일에 검은 옷만 입고 의자에 앉아있는 그리스도인, 생명을 위한 함성을 듣고서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지금 자신의 생명이 마모되어가고 있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오늘 저는 저를 비롯하여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께 이 한 장의 편지를 날려 보냅니다.
‘지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하면 일단 교회 교역자들부터 사색이 된다고 한다. ‘교제’와 ‘선교’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유희’와 ‘놀이문화’ 중심으로 거품만 키워가고 있다는 것이다. 천민적 자본주의에 물들어버린 한국 교회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에 이어, 그는 한국의 그리스도인을 “침묵만 하는 그리스도인, 아무런 행동도 고민도 없이 성금요일에 검은 옷만 입고 의자에 앉아있는 그리스도인, 생명을 위한 함성을 듣고서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지금 자신의 생명이 마모되어가고 있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짓는다.
이 청년의 지적이 잘못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몇이나 있을까? 그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숨어서 볼거리와 놀이문화에 몰두하는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질타하면서 기독교적인 전인학문, 보편학문을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간절히 외치고 있다. 교회 담장을 벗어나 보편의 장에서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현 단계에서 이것이 가능할까? 협소한 교파신학에 머물러 있는 한국 교회에 보편학문을 기대한다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달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늘의 시대정신을 특징짓는 ‘이미지’는 사실 로마제국 멸망 직후 중세초기 가톨릭의 전유물이었다. 초대 교회에서 설교 중심이었던 것이, 중세 초기 무지한 게르만족 또는 농민 사회를 개종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미사를 중심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아무리 무식한 사람일지라도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시각적 미사’를 통해 종교적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문자해독률이 1퍼센트를 넘지 않던 암흑시대에 그림과 조각이 아니면 종교를 가르칠 길이 없었던 것이다. 텍스트가 소외되고 있는 한국 기독교 또한 암흑시대의 초입에 들어선 것으로 판단된다.
3. 신앙과 학문의 합금
암울한 현실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인접한 인문학을 기독교 신앙과 접목시켜내려는 학제적 연구 자세를 확립하는 일이다. 이른바 기독교 인문학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인문학을 구축하는 한 방편으로서 시간의 시련을 극복한 위대한 고전 텍스트에 대한 번역 작업에 진지한 관심을 가져줄 것을 제안하고 싶다.
영화 <쇼생크 탈출>은 억울하게 무기징역을 살게 된 주인공이 온갖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감옥을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 박진감 넘치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교도소장은 지극히 이중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는 항상 성경을 옆에 두고 즐겨 읽는, 언뜻 보기에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교도소장이 근무하는 방에는 “심판의 때가 곧 오리라”는 계시록의 한 구절이 새겨진 액자가 벽에 걸려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죄수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가 하면, 죄수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사복(私腹)을 채우는 악랄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이 용의주도하게 자료를 준비하여 교도소장의 죄상을 언론에 폭로하자, 그는 경찰이 들이닥치기 직전에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심판의 때가 오리라”는 성경 말씀이 그에게 사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살해당했을 때 같은 장소에 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다. 당시 차지철은 교회의 장로 직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유신 말기에 박 대통령의 권력을 빙자하여 온갖 못된 짓을 일삼았던 인물이었다. 예컨대 그는 일개 경호실장 신분으로서 각부 장관들을 청와대에 불러 모아놓고 국기 하강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장관들을 마치 군대 졸병 다루듯이 기합을 주기도 했다니, 그 행패가 가히 폭력배 수준이었다. 깡패 중에서도 저질 양아치 수준이라고 하겠다.
과연 <쇼생크 탈출>의 교도소장과 차지철 장로에게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신앙은 그들의 ‘삶’과 무슨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인가? ‘신앙 따로, 인생 따로’의 ‘따로 국밥 신앙이 그들의 경우에 해당하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자신들의 삶과 철저히 유리된, 장식용 액세서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의 기독교 신앙은, 경박한 언동으로 손가락질을 받곤 하는 미국의 팝 가수 마돈나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와도 다를 바 없는, 한낱 천박한 장신구에 지나지 않았다.
따로 국밥 신앙은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흔히 미션 스쿨이라고 하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설립된 몇몇 교육 기관들을 보라. 기독교 간판을 건 일부 대학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라리 기독교의 간판을 걸지나 말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들의 추악한 부정부패와 범법 행위, 비민주적 학교 경영은 신앙 없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학교보다도 오히려 한술 더 뜨는 수준이다. 아예 기독교를 망신 주고 모독하기로 작정을 하고 나선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이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비리나 범법 행위들에서만 이러한 따로 국밥 신앙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의 인문학 전공자들(대학원생, 대학 교수) 중에는, 모태 신앙을 자랑하는 사람마저도 막상 자신의 세부 전공이나 논문 주제를 정할 때, 신앙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은 다른 것이므로 자연과학 분야는 별도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 분들을 보면 “아, 저 분의 삶에서 신앙이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일생을 건 학문에서 저렇듯 신앙과는 하등 관계없는 주제를 전공으로 정하고 논문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기독교 신앙이 하찮은 비중밖에 차지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의 모태 신앙이 그의 삶과 과연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경우 ‘모태신앙’은 ‘못해 신앙’과 동의어로 새겨진다.
서양 세계에는 전공 학문 분야에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다. 가령 역사학의 경우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영국 성공회 소속으로서 그의 역사 연구는 전체적으로 기독교 사관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의 유명한 ‘도전과 응전’ 이론도 구약의 <욥기>와 괴테의 <파우스트>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밖에 가톨릭 역사가로서 크리스토퍼 도슨(Christopher Dawson)이 있고, 감리교 계통 역사가로는 허버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 같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신앙을 통해 전공 분야를 바라보려고 노력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들은 학문적으로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 영문학 교수였던 루이스(C. S. Lewis)는 밀턴 연구자인 동시에,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호교론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쓴 동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에는 기독교의 속죄 개념이 잘 녹아있으며,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섀도우 랜드>에는 그가 대학 채플 시간에 ‘고통’의 신앙적 의미를 설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하는 학문도 결국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다. 언필칭 인문학을 한다고 하면서 일요일 교회 출석하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의 전부로 삼는다면, 그 학문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진정한 예배는 삶 자체를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지식 정보 사회가 된 이 시대에, 학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전공 학문이란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전공과 종교 사이에 아무런 합치점을 찾지 못하는 인문학자의 신앙이란, 삶과 유리된 따로 국밥 신앙이라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이다. 그 진리가 자신의 전공 학문을 통해 드러날 수 없다면, 진리이신 하나님은 그의 인생에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4. 텍스트의 힘: 12세기의 르네상스
고대 로마에서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전 100년 사이에는 문자해독자의 수가 비교적 많았지만 제국 말기에 접어들어 서기 200년부터 400년 사이에는 글을 읽고 쓰는 계층이 심각하게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위기의 세기로 불리는 서기 3세기를 지나면서 로마의 문맹률은 급격히 높아졌고, 급기야 6세기말 무렵에는 투르 지방의 대주교였던 성 그레고리우스(538/539-594/595) 같은 최고의 지성인들마저도 조리 있는 문장으로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저술에는 철자법의 오류가 발견되는가 하면 문장 구성이 엉성했고 논리적인 면도 초보적 수준이었다.
서기 600년경부터 1000년경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 읽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심지어 자신들이 이런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진실로 학문적 가치를 지닌 토론과 이해, 논리적 의견 교환이 가능해진 것은 11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중세 유럽의 역사는 편의상 ‘중세 초기’(600년경-1050년경), ‘중세 전성기’(1050년경-1300년경), ‘중세 말기’(1300년경-1500년경)의 세 시기로 나뉜다. 11세기에 접어들어 중세 초기의 기나긴 암흑시대가 끝나고 비로소 중세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유의해야 할 것은, 중세전성기에 서유럽이 달성한 사상적․학문적 업적이 ‘번역 작업’ 없이는 결코 등장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12세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고전 저작들이 라틴어로 처음 번역되어 서유럽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번역 작업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저작이 서양 사상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13세기에 형성된 스콜라 철학의 내용과 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교리 체계에 융합시키려는 시도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문명권에서 아랍어로 번역되었던 것을 다시 라틴어로 옮겼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중세 서유럽인은 그리스 고전 사상을 아랍어에서 중역(重譯)된 라틴어 텍스트를 통해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활짝 피어난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이 그리스의 쇠퇴와 함께 로마에 수용될 때, 로마 지식층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따라서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은 서유럽 라틴 문명에 곧바로 계승되지 못했다. 라틴어를 사용한 중세 서유럽인에게 그리스의 학문 전통이 단절되고 만 것이다. 한편 아랍 세계는 8, 9세기에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일을 출발점으로 하여 자신들의 과학 및 철학을 발달시켰다. 그 후 서유럽 라틴 문명의 그리스 사상 재수입은, 아랍어로 번역되었던 그리스 고전을 중역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서양중세사에 등장하는 이른바 ‘12세기의 르네상스(12th Century Renaissance)’는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가 ‘번역의 시대(Age of Translation)’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지적 번영이 전적으로 번역에 의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몰락한 후 서유럽에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보이티우스(Boethius, 470/475?-?524)가 번역한 초보적인 논리학 논문 몇 편뿐이었다. 물론 비잔티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어 사본들이 남아 있었지만, 비잔티움은 이 사본들을 바탕으로 어떠한 독창적인 철학적 사고의 전통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는 사정이 달랐다. 아랍인들이 정복한 헬레니즘 세계에는 그리스 철학의 여러 학파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아랍인들은 그 학파들의 사상을 소화하여 자기들 것으로 만들었다. 750년에서 900년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이 일부는 그리스어에서 직접, 일부는 시리아어판(版)을 경유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아랍인들은 이것을 이슬람교 교리와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슬람 철학자들을 아랍어로는 ‘파일라수프’(faylasuf)라고 한다. 이 말은 그리스어의 ‘필로소포스’(philosophos)를 음역(音譯)한 것이다. 아랍어의 ‘철학자’란 말 자체가 그리스어에서 왔다는 것은 그리스어 철학저술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이슬람 사상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명백히 드러내는 더할 나위 없는 증거이다. 이슬람 문화가 개화하는 데는 이처럼 번역 작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철학의 모든 유산은 이슬람 세계와 접촉한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 의해 새롭게 부활했다.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비잔티움이 아니라 이슬람문명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아랍인들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생생한 전통을 발견했던 것이다. 12세기에 이루어진 아리스토텔레스 번역 작업은 거의 모두가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이웃하여 함께 살고 있던 지역에서 수행되었다.
서유럽 라틴 세계에서 재발견된 그리스의 저술들은, 변방의 한 지역에 불과했던 서유럽을 광대한 세계문명의 중심지로 바꿔놓는 발전의 실마리가 되었다. 중세초기의 아랍인들이 고대 그리스 문헌의 아랍어 번역을 통해 그리스 사상을 수용했듯이, 12세기 서유럽인들이 그리스 학문을 받아들이기 위해 맨 먼저 열정적으로 수행한 과제는 번역 작업이었다. 아랍인과 서유럽인은 이런 의미에서 닮은꼴이었다.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유리 세공 일을 하는 니콜라는 윌리엄 수사(修士)에게, 당시보다 2세기 전에 만들어진 유리창과 같은 것을 자신들은 만들 수가 없다고 했다.
겨우 고치는 정도인데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옛날의 그 색깔을 낼 수 없거든요. ‥‥‥ 맥이 빠집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옛날 사람들 같은 재주가 없는 모양입니다. 거인의 시대는 가 버린 것이지요.
그러자 윌리엄 수사가 이렇게 응수한다.
그래요, 우리는 난쟁이들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세요. 우리는 난쟁이는 난쟁이이되, 거인의 무등을 탄 난쟁이랍니다. 우리는 작지만, 그래도 때로는 거인들보다 더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답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라는 표현은 움베르토 에코가 처음 쓴 것은 아니다. 번역의 시대인 12세기에 실존했던 프랑스의 수도사 베르나르 드 사르트르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와 같아서, 그 어깨로부터 거인들보다 더 멀리 많은 사물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우리의 시력이 예민하거나 우리의 재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거인다운 위대함에 의해 지탱되고 고양되기 때문이다.
독자적인 고유의 철학체계를 갖지 못한 처지에서 그리스 철학을 수입하여 이슬람 신학을 구축한 중세초기 아랍인들이 난쟁이였듯이, 12세기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 역시 난쟁이에 불과했다. 아랍인 난쟁이들이 그리스인의 어깨를 이용했던 것처럼, 12세기 서유럽의 난쟁이들은 ‘더 멀리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이슬람문명권의 어깨를 이용하려 했다.
5. 인문학과 번역
인문학과 번역에 대한 에피소드를 각각 하나씩 들겠다. 먼저 인문학 이야기. 냉전체제가 고착되어 있던 1970년대 초 상당한 수의 소련 지식인들이 ‘영적인 거듭남’을 경험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왔다. 서방 세계에서는 무척 놀라워했다. 당시 서방 세계로 망명 온 한 소련 지식인은, 소련의 작가, 화가, 음악가들 중에서 영적인 문제에 매달려보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서방측에서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소련에선 전 인민을 대상으로 종교에 반대하는 세뇌 교육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테고, 복음이나 그 밖의 성경은 물론이고, 기독교에 관련된 서적이라곤 거의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러자 그 망명 지식인은 이렇게 말했다. “소련 당국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금하는 것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체주의의 극단을 달리던 소련의 공산당 정부마저도 러시아 근대사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가장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 이 두 작가의 책을 미처 금서 조치하지 못했다. ‘문학’이었기 때문이다. 철권통치를 일삼은 공산 국가에도 문학은 인정되고 있었고, 소련은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전 세계에 자랑할만한 두 러시아 작가의 위대한 문학 작품을 금서로 만들 생각은 미처 못 했다. 성경은 물론 기독교 관련 서적을 일체 읽을 수 없었던 소련에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두 작가의 작품을 읽고 기독교 신앙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사실 파급효과와 영향력이란 점에서 볼 때 종교개혁자인 루터, 칼뱅보다 단테, 밀턴 같은 문인들이 더 위대하다는 평가도 있다. 루터 같은 인물의 저작은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 또는 이미 기독교 신자인 사람들이 주로 읽기 마련이다. 그러나 단테나 밀턴은 경우가 다르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전혀 모르거나 기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그 문학성 때문에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 작품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에 눈을 뜨고 신앙에 들어갈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소련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인문학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러시아를 포함한 서양 사회에 기독교의 전통이 얼마나 속속들이 배어들어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자.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 모든 분야에 뿌리를 깊숙이 내릴 때까지, 그렇다, 그런 날이 올 때까지 한국의 기독교는 아직 수박이 못 된, 이를테면 호박에 줄그은 수준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다음은 번역에 대한 이야기다. 이스라엘과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한 어느 목회자로부터 일본의 번역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목회자는 1992년에 이스라엘의 어느 대학 대학원에서 성서고고학 과목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학기말에 엄청난 과제물로 허덕이는데, 같이 공부하던 일본 친구가 도서관에서 뒤적이던 책을 보니 모두 일본어로 된 책이더라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된 성서고고학 분야의 주된 텍스트들이 그 당시 일본어로 이미 번역되어 있었고, 이스라엘의 대학 도서관에까지 비치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 친구는 이스라엘에 오기 이전에 벌써 성서고고학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 알다시피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런 전문적인 성서고고학 분야의 책들뿐만 아니라, 고대어에 관한 주요 텍스트들도 이미 모두 일본어로 번역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기독교 인구가 전 국민의 20퍼센트를 상회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야기 아닌가?
6. 사막의 지하수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가 석유고갈 및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비, 사하라사막 지하 500미터에서 지하수원을 개발, 국토의 90퍼센트가 넘는 사막지역을 옥토로 바꾼다는 야심 하에 70년대 초부터 추진된 공사로 공식명칭은 ‘위대한 인공강계획(Great Man-Made River Project)’이다. 한국의 동아건설이 시공하여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이 공사는 ‘세계 제8대 불가사의’로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 공사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사하라 사막 아래 어마어마한 지하수원이 숨어있다는 사실이다. 사하라라는 말은 아라비아 어로 ‘황량한 땅’이라는 뜻이다. 불리한 자연 환경 때문에 사하라 사막은 오랜 동안 버려진 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메마른 땅 지하에 나일강에서 200년간 흐르는 유수량에 해당하는 무려 35조톤의 물이 잠겨 있다는 것이다.
로마제국 멸망과 더불어 시작된 암흑시대는 6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고대에 분수처럼 뿜어 나오며 황금시대를 일궈낸 텍스트의 물줄기는 이슬람 세계로 우회로를 찾아 흘러 새로운 물줄기를 형성했다. 아랍인들은 그리스인의 업적을 번역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인이 해내지 못했던 부족한 부분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공언할 정도로 야심만만했다. 그들은 750년에서 900년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을 아랍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한글로 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이 없다!)
야만인의 수준에 전락해있던 서유럽인들은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아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렇게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다시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중세 가톨릭신학을 집대성한 인물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서유럽인의 입장에서 볼 때 아랍인이 번역한 그리스 텍스트들은 사막의 지하에 잠겨 있는 거대한 지하수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지하수가 없었다면 필경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도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05년 다국적 미디어조사기관인 ‘NOP월드’가 세계 30개국을 대상으로 주당 독서시간을 조사한 결과 세계 평균 독서시간은 6.5시간이며 인도인이 주 평균 10.7시간으로 1위를, 그중 한국인의 독서시간은 3.1시간으로 평균시간의 절반에도 못 미치며 30개국 중에서 최하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심각한 텍스트소외 현상은 우리가 이미 암흑시대의 문턱에 들어서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추세가 짧은 시일 안에 개선될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위기의식을 공유한 크리스천 인문학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마치 중세 아랍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텍스트들을 번역하고 소화해낸 것처럼, 우리 또한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위대한 고전들을 연구하고 번역해서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먼 훗날의 ‘르네상스’를 대비해 사막의 땅속 깊은 곳에 ‘지하수’를 저장해둬야 한다. 후대를 위해 ‘거인의 어깨’를 예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물론 이 일은 남의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인 보상도 미미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 인문학자라면 이 길을 회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진정한 역사의식이란 이를 두고 말하는 것 아닐까?
첫댓글 교수님께서 우리 교회의 양화진 목요강좌에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합정동에 있는 100주년기념교회(이재철 목사 담임)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목요강좌가 궁금하시면 일루 들어가심 돼요.
http://yanghwajin.re.kr/
좋은 교회 나가시는군요. 이재철목사님 훌륭하시죠. 근데 교회 사람들은 '성경'과 '신학' 말고는 통 관심이 없어서(심하게 말하면 무식을 자랑거리로 삼는 분들이라)...인문학은 무너지는데ㅠㅠ...제가 아는 크리스천 영문학자들 미국가서 박사도 하고 유명 대학 교수도 하지만 전공학문의 사회적 기여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이 꽝!이더군요. 목사보다 훨씬 더 많이 배웠으면서도 정신은 미성년자죠. 실은 제가 지난 5월 영문학회에 초청받아서 교수들한테 특강을 하고 왔어요. 초청 강사는 저 말고 진중권씨가 왔더군요. 한국의 크리스천 인문학자들...참 딱합니다. ㅠㅠ
그러니까 일단 교회홈피에 들어가셔서 목요강좌를 둘러보시라니깐요. 주제가 다양하다구요. 글구 교회 사람들이라고 다 무식을 자랑거리로 삼진 않아요. 교수님이 아는 크리스천 인문학자들이 딱한 사람들인 거죠. 경북대에 재직하셨던 양승훈 교수(물리학) 아시나요? 한때 그분 책을 즐겨읽다가 기독학술교육동역회(DEW)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는데 거기 회원 교수들은 교수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도 기독학술교육동역회(DEW)에서 활동하는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소식지도 받아보고 있구요. 허접한 개신교 인구 1천만명 중 참 보석 같은 분들이죠. 위 본문에 나온 오형국 목사도 기독교인문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서양사로 박사도 했구요.(제 후배입니다.) 다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생각에 차이가 있더군요.
2009년 1학기에는 양현혜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과)께서 "김교신과 조선산기독교" 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네요. 지난 6월에는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선생께서 '역사에 비춰 본 거창고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