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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회주의의 변증법적 발전
김종욱 (청운대 베트남학과)
Ⅰ.베트남 사회주의 성격에 관한 논쟁
• 현재 베트남은 “사회주의의 시장경제체제의 활용이냐 국가자본주의로의 체제전환이냐?”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음. (이용환, 한반도선진화재단, “VN 자본주의체제전환”)
• 이 질문은 베트남 민족사 발전과정을 놓고 볼 때 적합하지 않음.
– 베트남은 자본주의를 겪지 않았으며사회구성측면에서 동남아시아 Big man Society 에 유사함.
– 역사발전단계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물적 토대의 변화에 따른 결과라기 보다는 19C말 20C초 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의 상부구조를 타파하려는 노력으로 사회주의를 채택하였음.
– 식민지반봉건시대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발전에서 분명히 자본주의적 맹아는 존재하였으나 이것이 수공업과 상업 수준에 머물렀을 뿐 서구와 같은 대규모 공장에서 잉여가치 발생하거나 노동 착취로 인한 노동자의 소외 수준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음.– 사적 소유, 경쟁적 분배관계는 낯설어 (14C 호뀌리, 18C 떠이썬농민혁명, 20C 타이빈소요사태).
– 전통 촌락사회의 토지소유관계에서 공전, 사전 그리고 촌락 집체소유(사전)의 토지소유가 공존하며 공전 또한 평균 20%에 불과한 점에 유의할 필요 (1804년 嘉龍帝 地簿).–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 羈縻제도 (소유, 분배의 중층적 구조).
–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잦은 외침과 자연재해로 인해 독립(안보)과 자유(계급적 평등사회)가 國是.
• 오히려 베트남 사회주의의 변증법적 발전 경험이란 차원에서 보는 것이 바람직.
Ⅱ. 베트남 사회주의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
1. 20C초 베트남 식민지 제도의 모순에 대한 호찌민의 이해
正) 마지막 봉건 응우옌왕조의 몰락과 인도차이나 연방의 출현
反) 식민지로 몰락한 이후 인두세, 주세, 아편세 등 특별세로 이중고
合) 식민지반봉건체제의 타파를 위한 유일한 길은 자유독립위한 애국투쟁
正) 마지막 봉건 응우옌왕조의 몰락과 인도차이나 연방의 출현
• 19C초 떠이썬(Tây Sơn 西山) 농민혁명(1771~1802)을 진압하고 출범한 응우옌왕조(1802~1945)는 전제군주제와 중농억상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서점동
세의 조류에 대응하지 못하고 내부 개혁을 등한시하면서 외세의 침략과 계속되는 민란으로 쇠퇴.
• 1858년 스페인과 프랑스 함대의 다낭 공격에 굴복을 시작으로 남부에서 아르망조약(1862), 중부에서 후에조약(1883) 그리고 북부에서 빠떼노뜨르(1874), 천진조약(1884) 등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므로써 국권을 상실.
• 1887년 10월 17일, 인도차이나연방을 설립한 프랑스 식민정부는 북부를 Tonkin(보호령), 중부를 Annam(보호령) 그리고 남부를 Cochin-china(직할령)으
로 분할 통치.
反) 식민지 몰락 이후 인두세, 주세, 아편세 등으로 이중고
• 프랑스군대의 초기 평정작업 이후 식민지통치를 영속화하기 위해 1897년부터 시작된 식민지개발사업 (khai thác thuộc địa 開拓屬地)과 농촌지역의 행정개혁(cải lương hương chính 改良鄕政)과 교육개혁(cải lương học chính 改良學政)등으로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세력에 의한 경제 수탈과 사회 변동.
• 전통 봉건적 생산양식의 중층적 조세 수취제(羈縻制)로부터 식민자본주의의 중앙집권적∙직접적 수취제로 전환.
• 인두세의 인상과 주세 및 아편세 등 전매세의 신설로 인해 베트남 토착민은 대월국 응우옌왕조와 프랑스 식민정부의 이중과세로 인해 생계 위협.
1908년 3월, 꽝남성 항세투쟁에 참가한 사대부와 농민
合) 식민지반봉건체제의 타파를 위한 유일한 길은 자유독립위한 애국투쟁
• 베트남 식민지반봉건사회의 주요 모순을 인민 대중의 자유와 독립으로 인식한 응우옌떳타인은 救國救民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투쟁방식이 필요함을
깨닫고, 자유, 평등, 박애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서양과 식민지 모국에서 해법을 모색하기로 결심.
• 1911년 6월 5일, 응우옌떳타인은 반바(Van Ba)라는 가명으로 사이공 龍宮항에서 Latouche-Tréville 제독號 를 타고 프랑스(베르사유) 향발.
• 인도를 거쳐 프랑스 도착후 아프리카, 미국, 영국 등을 돌면서 식민지 문제에 대한 실상과 해결책을 모색후 1917년 다시 프랑스로 귀환.
2. 20C초 유럽식 사회주의의 모순에 대한 호찌민의 이해
正) 프랑스 사회당의 집권과 식민지 독립의 가능성
反) 사회주의 연대와 식민-피식민관계에 대한 차별적 인식
合) 영국과 프랑스식 프롤레타리아 혁명주의로부터 러시아 레닌혁명주의로 전환
正) 프랑스 사회당의 집권과 식민지 독립의 가능성
• ”당시 나는 정당이 무엇인지, 노조가 무엇인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프랑스인 동지들이 피압박 민족들의 투쟁
에 동조했기에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했다.” (호찌민)
• 1919년, 응우옌아이꾸옥은 “안남인민의 요구서”를 베르사이유회의로 제출하고 프랑스 정부에게 식민지 베트남 인민의 자유, 민주, 평등권을 인정하라고 요구.
• 1920년 12월 사회당 회의에서 제3인터내셔널 가입에 찬성표를 던지고 프랑스 공산당원의 자격을 취득.
1920년 12월 25일, 응우옌아이꾸옥(호찌민)이 프랑스 사회당 제18차 전당대회에 참가.
反) 사회주의 연대와 식민-피식민관계에 대한 차별적 인식
• 1920년 당시 프랑스 사회당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와해된 제2인터내셔널에 잔류해야하는지 혹은 1919년 레닌에 의해 창립된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할
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
• “안남 인민의 요구“를 베르사이유 회의에 제출하려 했으나 실패후, 파리의 각종 신문에 기고하거나 6만여장의 유인물을 인쇄후 배포.
• 프랑스 사회당 동지들이 식민지 베트남에서 노동자 농민간의 연대와 자유 및 독립의 보장에 대해 거부 입장을 보임에 따라 응우옌아이꾸옥은 제3인터
내셔널 입장에 따라 과거 애국주의에서 레니주의로, 민족 의식에서 계급의식으로, 애국운동가에서 공산주의운동가로 변신.
“세계 각국의 프롤레타리아는 연대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코민테른을 지원하는 행진을 하는 프랑스 사회당 당원들.
合) 영국과 프랑스식 프롤레타리아 혁명주의로부터 러시아 레닌 혁명주의로
• 20C초 베트남 新유학자(neo-confucian)들에 의한 동유운동, 유신회, 동경의숙, 항세투쟁 등 각 유형의 반불항쟁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호찌민은 안남 인
민의 구국운동을 성공시기기 위해서는 새로운 노선이 필요함을 피력.
• 응우옌아이꾸옥은 『뤼마니떼』 통해 레닌의 「식민지 피압박 민족에 관한 테제」를 접함.
• 이후 뛰르 대회이후 코멘테른에 가입한 호찌민은 “처음에 공산주의가 아니었으나 레닌이 자신의 백성을 해방시킨 위대한 애국자이기 때문에 그를 경
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공부한 뒤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만이 피압박 인민과 노동자들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해방될 수 있
음을 깨달게 되었다”라고 역설.
3. 1920년대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의 모순에 대한 호찌민의 이해
正) 코민테른 아시아국의 동남아시아 선전활동과 베트남 공산주의 태동
反) 인도차이나공산당, 안남공산당, 인도차이나공산연맹의 난립
合) 홍콩 통합 회의와 베트남 공산당의 창당 (1930)
正) 코민테른 아시아국의 동남아시아 선전활동과 베트남 공산주의 태동
• 1925년 6월, 중국 꽝저우에서 호찌민은 공산조직인 떰떰사(Tâm tâm xã 心心社)를 바탕으로 애국 청년들을 중심으로 베트남청년혁명동지회(靑年)을 조직.
• 프랑스 제국주의와 베트남 봉건제도 및 자본주의를 타도하여 노동자, 농민, 병사(勞農兵)의 정권 수립을 목표.
• 세계 공산화를 위해 피압박 민중과 프롤레타리아간의 연대를 통한 혁명 추구.
• 20개 항의 활동 지침: 프랑스 제국주의와 관료주의 타파, 노농병 혁명정권 수립, 은행 기업 광산 교통수단 등 식민당국에 속한 기관의 공유화, 지주계급의 소유토지 몰수(100畝 이상), 몰수토지의 분배, 舊채무 파기, 노동법 제정, 남녀평등권 실현, 수입에 따른 조세 제정 등
反) 안남공산당, 인도차이나공산당, 인도차이나공산연맹의 난립
• 1925년 이후 ‘청년’내 각 공산지부가 국내 지역별 혁명세력과 결탁하면서 노선 갈등 발생
• 북부 급진 공산세력은 ‘청년’을 대체할 정식 공산당의 국내 설립의 주장
• 1929년 5월, 홍콩서 개최한 ‘청년’ 대회에서 이를 해체하고 공산당 신설을 주창하였고 이를 프랑스 밀정 럼득투(Lâm Đức Thụ)가 반대하자 북부 회원
들은 귀국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설립, 북부 지역 지부를 규합.
• 1929년 8월, ‘청년’ 본부와 남부 세력들은 안남공산당을 설립. 11월 임시중앙 집행부를 설립하고 쩌우반리엠(Châu Văn Liêm)를 비서로 추대. 사이공에서
안남공산당은 기업협회, 수공업협회 등을 포함한 남부총연합회를 결성.
• 1930년 1월 1일, 중부 좌파세력은 인도차이나공산연맹을 창설.
合) 홍콩 통합 회의와 베트남 공산당의 창당 (1930)
• 1929년10월 27일,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에 당황한 코민테른은 각 당에 서신을 보내 통합할 것을 촉구하고 태국에 머물던 阮愛國에게 통합 임무를 부여.
• 1930년 2월 3일, 阮愛國은 홍콩에서 안남 공산당과 인도차이나공산당 대표들과 회합을 갖고 3개 조직을 ‘베트남 공산당’으로 통일하고 정강, 책략, 조례 등을 확정.– 프랑스와 응우옌왕조를 타도하여 자유와 독립이 보장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 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선봉장이 될 것– 개인 자격으로 당에 가입할 수 있음
• 베트남 공산당원은 총 211명:– 인도차이나공산당(85명), 안남공산당(61명), 인도차이나공산연맹(11명), 소련지부(40명), 중국지부(14명)
• 1930년 10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세 민족 혁명 세력의 통일과 단결을 고려한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개명
상단 왼쪽부터 호찌민, 레홍썬(청년 본부), 쩐푸(초대 인도차이나공산당 서기장), 호뚱머무(청년 본부)
4. 1941년 비엣민의 결성과 8월 혁명의 달성 (1차)
正) 프롤레타이라트 독재와 반식민반봉건혁명의 수행
反) 응예띤소비에뜨운동의 실패(1930)와 백색 테러
合)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해체와 비엣민전선(1941)의 8월 혁명 완수(1945)
正) 프롤레타이라트 독재와 반식민반봉건혁명의 수행
• 인도차이나공산당의 정치 강령: “세계는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를 확보하려는 제국주의자들의 전쟁터이다. 식민지 인도차이나는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있는 까닭에 독자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 노동자 농민 기타 대중과 제국주의 봉건주의 부르주아계급간의 계급적 모순이 점차 첨예화되고 있는 상황으로 인해 인도차이나에서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영도되는 민족∙민주 혁명이어야 한다. 혁명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독립을 이룩하며 봉건제도를 일소하여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민족∙민주혁명 단계와 이후에는 ‘노동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해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거치지 않은 사회주의혁명 단계를 거쳐야 한다. 혁명의 주도세력은 노동자와 농민이고 투쟁 방법은 폭력, 교육, 조직, 그리고 동원이다. 인도차이나혁명과 세계 혁명과는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쩐푸)
反) 응예띤소비에뜨운동의 실패(1930)와 백색 테러
• 세계 대공황의 한파가 식민지 베트남에도 불어닥치자 1930년초부터 전국적으로 광산과 플랜테이션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는 생계 위협과 일반세, 소비세, 유통세, 전매세 등 과중한 조세정책의 부담외에도 연이어 발생한 가문과 홍수로 기아난에 빠짐.
• 농업, 상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베트남 노동자(19만명)들은 광산, 고무농장, 성냥공장, 시멘트공장, 조선소 등지에서 파업을 진행.
•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5월1일 노동절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전국 봉기를 지시하고 시위대는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노동자 구타금지, 각종 세금 면제 등을 요구.
• 1930년 9월 ICP는 전통적인 저항지인 응예안()성과 하띤()성에 농민소비에뜨 수립하고 지주 토지를 몰수해 빈농에게 분배, 소작료 인하, 세금 경감 정책을 수행.
• ICP 중앙당과 연락 두절, 심한 기근, 프랑스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실패. 백색테러로 ICP에 큰 타격과 지도부 체포 구금.
응예띤소비에트(1930-1931) 성숙기의 응예안성 동써현 화꿘사 민병자위대.
合)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해체와 비엣민전선(1941)의 8월 혁명 완수(1945)
• 베트남 민족∙민주 혁명에서 노농병 혁명세력에 의한 타 사회계층에 대한 배척과 편협한 정치노선이 문제로 지적.
• 응예띤 소비에뜨 실패와 식민당국의 백색테러로 인한 타격은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의 도움으로 조직 재건.
• 1935년 3월, 인도차이나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마카오)의 개최로 국내외 당조직 연결과 교류 재개.
• 1941년 일본이 프랑스와의 협정으로 베트남 진주하려는 의도가 포착되자 ICP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1941년 5월 제8차 중앙당 집행위 회의를 개최하여 일본과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집단과 계급의 이익을 민족문제에 종속시켜 인도차이나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회복을 위해 모든 종족, 계급, 당파, 종교단체, 애국 조직 등을 규합한” 베트남독립동맹(약자로 비엣민)을 결성.
• 계급투쟁을 유보하고 민족해방투쟁을 위해 민족주의성향의 지주자본가도 유도.
비엣민훈련(상)과 미국 OSS와 호찌민(아래)
5. 베트남민주공화국(DRV)의 탄생과 임시정부활동 (2차)
正) 민족해방혁명의 완수와 각 정파간의 제휴
反) 중국 국민당과 베트남혁명동맹회-베트남국민당 진영의 도전
合) 임시혁명정부의 3차 개혁을 통한 반민족행위자의 청산(1946)
正) 민족해방혁명의 완수와 각 정파간의 제휴
• “베트남은 자유(사회주의)와 독립(민족)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실제로 우리는 자유와 독립을 누리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호찌민, 1945.9.2 독립선언문 낭독時)
•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후 승전연합국들은 포츠담회의를 통해 베트남 북부는 중화민국군(장개석)과 남부는 영국군이 일본군 철수와 치안유지를 위
해 주둔하기로 함.
• 특히 북부에서는 중국 국민당이 베트남 국민당 추종세력을 동원해 청불전쟁시 빼앗긴 실제 지배권의 회복의 꾀함.
• 신월혁명당, 베트남혁명동지회 등은 부르주아계급 정당으로 이들의 영향력 확대는 비엣민 집권세력에게 큰 위협 요인이 됨.
1945년 8월 혁명 기념식
反) 중국 국민당과 베트남 혁명동맹회(Việt Cách 越革)- 베트남 국민당(Việt Quốc 越國) 진영의 도전
• 제2차 세계대전이후 서구 강국의 옛 식민지 재분할과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재침략의 의도가 노골화.
• 중화민국 장개석 군대의 주둔과 국민당세력이 호찌민 정부와 비엣민에 대한 도발을 증강.
• 비엣민의 민족∙민주혁명 달성이후 독립을 위한 정당간의 통일전선의 해산
•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해산과 비공산 정파간의 대립.
• 민족주의 세력과 反민족세력간의 갈등
• 대월국민당 : 1939년에 쯔엉뜨아인(Trương Tử Anh)에 의해 창당되어 1946년까지 민족생존주의를 표방함.
• 베트남혁명동맹회 : 親장개석 국민당 정치조직으로 1942년 10월 1일 창당하였으나 비엣민의 대표단을 거절함.
비엣까익(위), 대월국민당(아래)
合) 임시혁명정부의 3차 개각을 통한 반민족행위자의 청산
• 호찌민이 국가주석을 맡은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8월혁명 직후부터 프랑스와의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1954)에 돌입하기 전까지 세차례의 개각을 단행
• 임시혁명정부 (1945.8.30~12.31) :– 일본 군정체제 와해 이후 정치 공백 상황을 채울 혁명적 정부 역할이 요구되고 비엣까익, 비엣꾸옥, 다이비엣의 친중화노선을 견제할 필요가 제기된 상태에서 비엣민과 연대를 유지한 민주당과 무소속 정치인 발탁
• 임시연합정부 (1946.1.1~3.2) :– 중화민국의 중재로 국민당파와의 임시 제휴가 이뤄졌으나 여전히 ICP와 비엣민을 타도하고 친중화정권을 수립하려는 음모에 대응하고 특히 비엣꾸옥과 다이비엣의 친중화반민족행위에 대한 견제필요
• 항전연합정부 (1946.3.2~11.3) :– 프랑스와의 무력 충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국내 각 정파간의 민족화합과 단결이 요구되었고 임시연합 정부내 내각 구성의 확장이 필요
1946년 7월 온뉴허우 거리 사건
6. 사회주의 개조작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완성 (3차)
정) 1차 인도차이나전쟁의 승리와 제네바협약의 체결 (1954)
반) 소련과 중국 공산당의 수정주의 채택과 베트남 노동당내 反黨기류
합) 토지개혁(54-58), 문예인사상개조(55-58), 공상업개조(58-60)와 PT독재 실현
정) 1차 인도차이나전쟁의 승리와 제네바협약 체결 (1954)
• 1946년 12월에 시작된 DRV와 프랑스 간의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서북부 고산지대 디엔비엔푸 전투(1954년 3월 13일~5월 7일)를 베트남이 승리하며
종식됨.
• 1953년 11월, 라오스로부터 하노이를 비롯한 홍 강 삼각주 일대에서 지원되는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프랑스가 서북부 산간지역에 설치한 주둔지를
쟁취하고자 베트남인민해방군 보응우옌잡 장군은 인민전쟁을 통해 승리함.
• 1954년 7월 20일 밤과 21일 사이에 진행된 제네바 협상에서 프랑스는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을 남북 두 지역으로 나누는 임시분할에 합의함.
• 이로써, DRV는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배를 종식하고 반제반봉건 민족∙민주 혁명의 완수함.
반) 소련과 중국 공산당의 수정주의 채택과 베트남 노동당내 反黨기류
• 1956년 2월 24일 소련의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1894~1971)는 제 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과거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
• 1956년 5월 26일, 중국의 모택동은‘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운동을 시도하였으나 공산당 독재에 대한 대중의 불평불만과 비판이 격렬해지자 태도를 바꿔 1957년 6월 8일, 부르주아 우파에 대한 탄압과 대대적인 정풍운동을 전개.
• 스탈린 격하운동이후 폴란드에서 1956년 6월 28일 공산 지도자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봉기가 발생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헝가리에서 반공 유혈 폭동이 발생.
• 1954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종결되자 베트남 비공산계 지식인들과 집권 공산 지도층간의 30년간 쌓여온 정치 대립이 나타날 조짐.
합) 토지개혁(54-58), 문예인사상개조(55-58), 공상업개조(58-60)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의 상흔과 경제 회복을 위해 사회주의 개조에 착수.
• 1955년 3월 국회는 토지개혁안에 대한 정부 수정안을 통과시킴. 46개월간의 감세(8단계)와 토지개혁(5단계)이 진행되어 22省 3,653社에서 2,435,518戶
1,070만명 대상으로 150만 ha 에서 시행되어 81만 ha, 10만마리 물소와 황소, 180만개 농기구가 몰수, 징수, 강매되어 220만 농민에게 분배됨.
• 1958년 11월, 중앙당 집행위 제14차 회의는 경제∙문화 발전을 위한 3개년 계획(1958~1960)과 사회주의 개조를 주장해 집단 경제와 합작사 경제로의
전향을 발표.
• 1958년 농업합작화가 시행되어 134개 합작사가 조직되고 1960년 11월까지 41,401개(전체 농가의 86%, 경작지의 76%)가 집산화됨.
합) 토지개혁(54-58), 문예인사상개조(55-58), 공상업개조(58-60)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 베트남 노동당은 문예인에 대한 사상개조운동(1955~58)도 수행.
• ‘베트남식 문화혁명’또는‘가을의 사상혁명’로 불리는 人文佳品(Nhân Văn Giai Phẩm)운동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 건설에 대항하는 문인, 법률가, 예술인,
학생들의 사상과 창작의 자유,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탄압.
•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호찌민의 노동당 일당체제의 관료주의, 분파주의, 개인 숭배주의의 폐지를 요구하는 지식인에 대한 비공산계열의 문제 제기에 대한
통제였음.
• 공상업 개조(1955~58)도 진행되어 1960년말까지 97%의 자영업자가 합영 공사에 가입하고 87.9%의 수공업자와 45%의 소상인이 합작사에 가입.
7. 사회주의 건설과 민족해방전쟁의 병진
정) 2차 인도차이나전쟁의 수행과 反帝혁명 (경제사회개발 5개년계획)
반) 응오딘디엠과 베트남공화국 매판착취세력의 형성 (1955)
합) 계급투쟁과 민족해방투쟁의 병진
8.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RV)의 출범과 사회주의경제의 시련
正) 사회주의 통합경제와 남부에 대한 사회주의 이식
反) 舊 자본주의 세력의 저항과 新 경제정책의 실패
合) 결의안 100호(1981)와 도이머이(Doi Moi) 노선의 채택 (1986)
正) 사회주의 통합경제와 남부에 대한 사회주의 이식
• 통일이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RV)는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남부에 사회주의 이념을 도입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하여 새로운 통일사회의 형성한다는 목표를 제시.
• 남부에 적용된 사회주의의 주요내용은 1959년 북베트남의 헌법에 명시된 중산층의 제거, 기업의 국유화, 개인의 재산소유 금지 등.
• 1980년 12월 제정된 신헌법에서는 구헌법의 사회주의 체제에 관한 내용외에도 반외세투쟁역사를 추가하여 민족민주혁명과 사회주의혁명간의 연계성을 밝힘.
• 사회주의 경제통합정책을 추진하여 계획경제제도의 도입, 생산수단의 국유화 조치, 농민의 집단화정책 등을 수행.
• 집단화 정책은 농업합작사와 신경제지역(NEZ)의 건설로 추진되었는데 북부의 대규모경영방식을 남부에 이식해 생산구조의 개혁을 꾀하기 위함.
• 신경제지역으로 1975~80기간중 130만명, 1981~85기간중 100만명이 강제이주.
• 그러나 통일이후 운영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이식은 1979년 6월 제4차 당중앙상임위원회에서 실패한 사업으로 평가.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6~1980) 기간중 사회총생산 1.4%, 농업생산 1.9%, 공업생산 0.6% 등의 낮은 성장율을 보였고 1인당 사회총생산은 0.8% 감소.
• 실패원인으로는 조속한 통합을 목표로 생산시설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무리하게 추진해 농업 등 경제 부문에 비효율성 가중 및 생산성 저하 초래.
• 1978년 캄보디아 침공과 1979년 중월국경분쟁 등 군사행동으로 지속적인 군사비 지출 증가.
• 캄보디아 침공으로 서방의 엠바고, 중국 및 사회주의권의 원조중단, 국제금융기구들의 지원중단으로 사회주의 경제통합 재원확보 곤란.
• 잦은 자연재해 발생과 오랜 전쟁으로 인한 사회 간접자본의 파괴 및 노후화 등도 장애로 작용.
反) 舊 자본주의 세력의 저항과 新 경제정책의 실패
• 통일후 제2차 5개년계획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남부지역내 열악한 경제기반과 주민들의 비협조적인 태도.
• 남베트남의 열악한 경제기반은 악화된 경제사정으로 인하여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자체 조달할 능력이 없었던 점과 통일베트남 관료들의 자질부족 및 경직된 관료주의에 의해 초래.
• 주민들의 비협조적 태도는 생산활동에 있어서 동기유발제도가 없었고, 토지보유 농민들이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려 하였기 때문임.
• 남부 농민의 농업 집단화에 대한 거센 반발로 전체 쌀 생산량의 70%이상을 차지하는 메콩델타의 경우 1980년 집단화 비율은 10%에 불과.
• 사회주의 통합경제가 실패하게 되자, 1979년 제4차 중앙상임위원회 6기 회의와 1980년 9기 회의는 계획경제체제를 수정해 새로운 경제정책을 채택.
• 신경제정책의 기본방향은 정부의 간섭을 완화하고 사영업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었는 바, 1979년 이후 1981년까지 추진된 신경제 정책은 그 긍정적 효과에 따라 제3차 5개년 계획의 골격을 이룸.
• 3차 5개년 경제계획에서는 사영업 역할과 인센티브제도 및 기업관리의 자율성을 인정하였으며, 정부보조금제도는 영업이익과 손실을 인정하는 새로운 기업관리방식으로 전환되었고, 또한 농업생산에서는 국가와의 계약생산제가 도입
• 그러나 베트남 경제는 오랜 전쟁으로 인한 산업기반의 낙후와 경제하부구조의 미비, 서방국가들의 경제제재 조치와 이로 인한 외환부족, 사회주의체제의 비효율 등 장애요인으로 인하여 다시 어려움에 봉착.
• 물가의 폭등과 일부상인의 매점매석 등 경제혼란이 가중되자 이러한 부정적 현상들이 사회주의 질서를 와해 시킬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 베트남 지도자들은 1983년부터 사회주의 통제경제체제로 환원을 결정.
合) 결의안 100호(1981)와 도이머이(Doi Moi) 노선의 채택
빈푹성 당서기 故 낌응옥 (결의안10의 아버지)
• 3차 5개년 경제계획 중 농업생산방식에서 국가와의 계약생산제는 Khoán 100 (결의안 100호)로 불리는데 이는 1968년 Khoán hộ또는 Khoán chui로 시작하였고 1988년에는 Khoán 10 로 불림.
• “합작사원이 농지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열심히 일하지 않으므로 농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땅의 주인이 되도록 해야한다” (낌응옥)
• 1983년 사회주의 통제체제로 환원으로 경제침체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86년 물가상승 775%) 베트남 공산당은 1986년 12월 제6차
당대회에서 도이머이(Đổi mới쇄신) 정책을 채택.
• 도이머이는 이론적으로 경제, 정치, 사회, 외교 등 전영역에서의 쇄신을 뜻하나 우선적으로는 국가재정 확충을 위한 것으로 초점은 투자구조의 조정과 투자우선순위를 부여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에 둠.
• 이는 경제체제의 대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과거에 추진했던 경제개혁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 즉 통일후 베트남이 시도하였던 신경제정책은 사회주의 노선의 부분적인 궤도수정인데 비하여 1986년의 쇄신정책은 경제운영체계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대폭적인 개혁임.
合) 결의안 100호(1981)와 도이머이(Doi Moi) 노선의 채택
• 베트남 국가지도자와 정부가 대폭적인 개혁정책인 ‘도이머이’ 정책을 채택한 이유.- 사회주의 체제유지를 위한 대안으로 베트남 지도부가 국내 경제의 침체와 이로 인한 국민생활의 어려움이 곧 정치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면서 획기적인 정책대안의 필요성 인식.
- 1980년대에 들어와 베트남경제가 초인플레이션, 대규모 재정적자 및 국제수지적자 등의 문제로 위기상황에 몰리면서 고위 정책당국자들은 그 동안의 거시
경제정책과 경제운용체제에 대해 회의를 갖게됨
- 아시아 주변국과의 경제력 차이가 확대됨에 따라 중국을 위시한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주변국들이 시장개방과 외자도입 등의 경제개혁을
통하여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어 왔다는 사실이 베트남 지도자들을 자극
• 그러나 도이머이 노선 채택은 베트남 지도자들이 침체된 국내경제를 살리고 국민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을 통한 근로자와 농민의 생산성향상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만 결코 사회주의의 포기나 국가자본주의로의 전환은 아님.
도이머이 정책의 특징
• 정부는 도이머이 정책을 도입하면서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를 중공업 육성에서 농업과 경공업 육성으로 전환하였음. 이는 정책목표를 농산물과 소비재의 생산증대를 통한 국민의 생활안정에 두겠다는 의지의 표명.
• 수출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한다는 것으로 이는 자국의 공업화를 세계시장과 연계하여 추진하며, 공업화에 소요되는 자본은 수출확대를 통하여 조달하는 전략.
• 경제운용체계를 계획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고 정부개입을 축소.
• 대외정책의 전환으로 舊소련 및 동구권 일변도였던 기존의 대외관계로부터 벗어나 이웃 아세안 및 서방선진국과의 관계개선을 적극 추진하는 등 대외정책의 대전환을 시도.
9. 다원제의 요구와 제10차 공산당 전당대회
正) 사회주의 시장경제(혼합경제)로의 체제 전환
反) 정치적 다원주의(다당제)의 요구와 분배(계층분화)문제의 출현
合) 제10차 전당대회(2006)와 先경제 後정치요구 수용
正) 사회주의 시장경제(혼합경제)로의 체제 전환
• 도이머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적극적 추진이후 자본주의적 혁신 진행.
• 시장경제 요소의 도입– 농업부문의 단계 개혁 (1993 신 농지사용업: 50년 사용기한동안 사용권 양도, 임대, 상속, 저당설정 권리 인정)– 국영기업의 민영화– 상품가격의 자유화– 외국인투자법 시행– ADB, IMF, WB 등 국제기구의 지원 유치– 미국과 무역협정체결(2000)
• 새로운 시스템의 성과– 외국 자본 유치를 통한 경제 발전 성공– 수출산업 위주의 고도 성장 (연평균 6.6%)– 대외개발을 통한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탈피– 경제성장을 통한 베트남 공산당 일당체제 및 사회주의체제의 공고화 (국영경제, 집단경제, 개인경제, 자본주의경제, 국가자본주의경제 등 5개 경제성분의 정착)– 사회주의 과도기의 초기단계 (1991, 제7차 전당대회) 의 완성– “국가에 의해 관리된 시장기구하 사회주의를 지향을 가진 다성분 상품경제를 발전시킨다” (1992년 헌법)
反) 정치적 다원주의(다당제)의 요구와 분배문제의 출현
• 경제 부문에서의 부정적 결과– 당과 정부의 만연한 부패– 국영기업의 비효율성 (만성적자 부실기업)– 국영기업의 저항과 사회주의 지향적인 사회경
제발전 기본노선으로 인한 전략상 모순
• 정치 부문에서의 요구– 정치적 다원주의– 공산당 일당체제의 완화– 도이머이 개혁개방정책으로 인한 사회내 소외 계층(농민, 소수민족, 지식층)의 저항
(1997년 타이빈소요사태, 2001년 자라이족 저항사태)
合) 제10차 전당대회(2006)와 先경제 後정치요구 수용
• 사회주의 시장경제시스템의 강화– 국영기업의 주식화 및 부실기업 감축– 기업집단의 경영을 강화하고 중앙 및 지방의 당정기관의 경영을 폐지– 2007년 세계무역기구(WTO)가입 결의
• 사회주의 체제의 공고화를 위한 당내 민주화 및 정치개혁 (민주집중제)–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허용– 공산당원의 자본활동 허용– 당서기장 선출시 복수 후보 추대
10. 도이머이의 새로운 변곡점과 제12차 공산당 전당대회(2016)
正)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경제적 성장의 지속 발전
反) 국가 자본과 산업사회를 고도화할 필요성의 대두
合) 양적인 성장에서 질적인 발전으로 전략 변화
Ⅲ. 베트남 사회주의의 변증법적 발전의 동력
1. 베트남 사회주의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
1) 正에 대한 통시적 비교
2) 反에 대한 통시적 비교
3) 合에 대한 통시적 비교
• 과학적사회주의는 구국구민을 위한도구에불과 : 마르크스 레닌주의 철학이 현실에 맞지 않는부분있다면 이를 과감히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베트남 민족을 단결시켜 독립과 통일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다.
• ‘국가는 경제 기초를 닦고 인민이 사회발전을결정한다’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국가가배라면인민은 물과같아서 물이 움직이면 배가 뒤집힌다’는 베트남인의 전통 정치사상과도 부합한다.
2. 베트남에서 사회주의의 변증법적 발전은 합당하며 끊임없이 발전
1) “ DĨ BẤT BIẾN, ỨNG VẠN BIỀN” (以不變應萬變) (호찌민)
2) Đổi mới 는 사상, 정치, 경제 등 전체영역에서 끊임없이 변화
3)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로의 체제 전환. “우리는 ‘부유한 인민, 강한 국가, 민주, 공평, 문명’이라는 사회주의 이상을 위해 시장경제를 도입한 것이다.”
3. 4차산업혁명시대와 체제 논의
1) 마르크스 엥겔스 정치경제학의 효용
2) 소유의 개념 변화
3) AI 로봇의 시민사회와 사회계급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