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정원_ 한련
어스름새 외 11편
안정옥
화사한 입술이다 사월은 누구도 휘둘린다 꽃도 물살이다 나무와 나무가 맞댈 때까지 새들은 빠져나가려는 화사함을 놓지 않는다 새의 날개 짓이 가시덤불의 찔레꽃을 쏟아냈다 거처를 산밑으로 바꾸니 눈뜨면 뜰 안, 온종일이다 새처럼 번잡한 날을 벌써 버렸을까 밥 한 술 입에 넣고 그런 생각들을 삼키면 새가 미쳐, 미쳐, 식물처럼 움직이지 않는 날은 여보세요, 여보세요, 도시에 두고 온 사람들이 손을 내밀 듯 뭐하니, 뭐하니, 새가 묻는다 새들은 닿소리와 혀끝소리를 모아 지저귐을 지어낼 줄 알았다 꽃과 같은 어조로 사람들에게 흩뿌려주었다 아직도 새에게서조차 귀기울이고 싶은 날 있다 그러나 따라 할 수 없는 새의 울음소리는 깊은 산맥들 같다 선뜻 다가가지 못한 사람 있었다 두어 마디만 주고받았다면 검은가슴물떼새처럼 시베리아 벌판으로 날아갔겠느냐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슴푸레할 때 나는 걷는다 새의 날개 짓이 허공에 나를 놓아줄 때까지
마지막 남자
팔당대교 전후, 모든 차들이 뒤얽혔습니다 그러면 여섯번째의 가로등에 한 남자 기대서서 어딘가 맞이합니다 흐르는 강을 동여맬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겨우 몇 번 입을 열었습니다 아무도 감지하지 않는데 나만 형연할 수 없을 만큼입니다 남자는 가로등에 묶여 있습니다 슬픔도 큰 위력이 됩니다 그는 내게 이야기조차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안개를 풀어냅니다 안개는 세상에 구속된 수상한 층운입니다 그가 가로등에 기댈 이유 있었겠지요 거듭 말하지요 내게 소란 피우지 않는 것, 그것이 당신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지요 곧 공사하는 도로 한 귀퉁이에서 사람 대신 야광 불빛을 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나에게 신호를 보낼 것입니다
비단
비단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없다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는 직물이다 누에게 뽕잎을 야금야금 먹는다고 잠식蠶食, 궁형에 처할 사람을 가두는 곳도 잠실, 사마천이 잠실에 유폐되어 누에 실 토해내듯 사기史記 토했을까 비단은 동서양의 소통이다 피륙 하나로 세상이 잠식당했다 9600킬로미터의 길이 뚫렸다 왕들이 걸쳤던 옷, 어릴 적 누에를 봤다 내 몸무게만큼 뽕잎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릴 들었다 그림자 아직은 거기에 있을 터, 비단을 위해 죽어간 몸도 먹었다 뽕잎 몇 개 던져 주었으니 그 살갗을 만져볼 수는 있겠다 비단은 빛을 반사한다 물들이기 쉽다 영원히 가져갈 색상이다 비단은 매우 간단한 분자이다 이중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흉내를 낸다는 것은 어렵다, 해서 추켜주었다 비단은 우리의 예속이 아니다 중국 밖으로 가져가면 죽음이었을, 수도사들이 속 빈 지팡이에 누에알과 뽕나무 씨를 숨겨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평생 비단을 걸치지 않을 것임에도, 겨우 인조비단인 비스코스가 생기면서 왕의 호화로움은, 그 유연함은 그 부드러움은 패하고 말았다
그림자 밟기
소도시는 그림자놀이하기 좋은 화면이지요 밤엔 불빛보다 달빛 촉수가 높지요 집과 나무들은 거무스름하게 달빛아래 잠겨 눈에 걸리는 시름 같지요 정전이 되는 벽엔 손으로 오리나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냈지요 개가 짖을 때나 오리 뒤뚱대면 가슴 벅찼지요 그후엔 앉아서 화면으로 보지요 때로는 그림자밟기에 빠지지요 내 그림자 안 밟히려 뛰어다녔지요 어릴 적 놀이들은 거친 세상을 살아남으려는 예습이었겠지요 입도 없이 그림자 몸은 바짝 마르고 키만 커요 내 뒤를 따라오지만 추울 땐 내 앞으로도 오고 어느 땐 꺾여지기도 하지요 골목길을 같이 나선다는 건 무서웠어요 나무 뒤로 숨으면 그도 잠깐 숨어요 나도 아니면서 오랫동안 내 뒤의 나였을 흑백이 있었지요 그의 부재는 시름없이 내리는 봄비지요 흑백화면엔 늘 봄비가 구겨져 내렸지요 누구도 그림자는 없지요 밤새 가로등이 켜지고 다리 난간의 불빛도 휘황해요 불빛아래 걷지 달빛아래를 걸어가진 않아요 죽으면 그림자는 끊어진 달빛이겠지요 이제 와서 그림자가 나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늦었지만 그림자의 삶 역시 획일적인 삶 아니었을까요
살구나무 아래 비스듬히
강하江下에 누가 처음 살구나무를 내렸을까 만발한 살구꽃을 흠뻑 보고 간 이, 하던 일 멈추고 조용히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삶의 한쪽만 봤기 때문이다 떠날 땐 남게되는 이도 생각해야 한다 하찮은 것도 나를 위해 있다고 믿었다 대신 아파하는 한 그루, 세상 모든 나무는 그런 끈적임을 갖는다 미미했거나 지루했거나 하루를 지는 해처럼 여겼다 다시 뜨는 태양을 빛나게 하였기에 우리들을 밤과 낮으로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잠시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쉬었다 해도 행복해질 수는 없었다 당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는 숨 속에 또는 발자국의 흠에 흘렸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기다린다 무성한 살구나무 사이로 버스 정류장이 아직은, 아직은 있을 것이다 아주 드문드문 오는 버스지만 퇴촌退村으로도 가고 강상江上으로도 간다
버드나무 농법
몇 번이나 헌 의자를 버린 뒤 나는 새 의자에 앉을 수가 있었다 수천 번 사람을 버린 뒤에 나는 한 사람 곁을 겨우 지나왔음을 알았다 더 보낼 사람 없는 기나긴 식탁에 앉아 차 내린다 한 잔 더 놓았다 누가 앉아 마주하듯이, 그렇게 바람은 적요寂寥해 여름 가면 가을이 맞잡는다 돌아온다는 것은 송진 같은 슬픔을 재차 한 번 더 하라는 명분, 이제는 혼자서 숲으로 들어설 수 있다 낮은 데서 버드나무는 늘어진다 저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느릿느릿한 뒷면, 바람 일으켜 흩어지는 버들개지, 저렇게 날리고서 한 그루가 되었으리 이젠 힘센 나무를 내려놓아라 붉은 장미도 내려놓아라 뛰어남을 들어 내 신神에 가까워지려 하면 그의 큰손이 당신 머릿속을 뒤적거린다 집도 잊어버리고 자신도 버렸다 쯧쯧,
까치
밤나무 꼭대기에 걸린 보름달 집을 쪼아대며
몇 마리씩 들락거렸다 까치의 행동반경 안엔
옥수수 밭에서 내 집까지, 나도 들어 있었다
마을 주변을 벗어나지도 않으며 늘 기웃댄다
사람들이 심은 미루나무 느티나무에 기거하며
이른 아침부터 깍, 깍, 깍, 쏟아 놓는다
오래 전부터 반가운 소식쯤으로 걸러 왔음을
알고 있는 듯했다 깊은 산으론 들지 않으면서
새란 다가가기 전에 뿌루퉁하며 날아가야
하리 그런 날개만이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유령 같은 겨울, 간밤에 내린 눈은 길도 없애
버렸다 창백하게 울어대는 소리에 잠이 깬다
놈은 꼿꼿이 서서 날개를 비볐다 음식을 주면
넘실거렸다 몇 놈을 더 불러 들인다
사는 건 더 불러모아 저리 넘실거리는 것인가
집으로 돌아올 때 차의 불빛을 가로질러 가는
들고양이들을 본다 숨는다고 풀섶에
웅크린 어린 고양이를 보았다 멈춰서면
쩔룩거리며 걷다 쳐다보고 걷다 쳐다보았다
내 마음도 한 밤중 자주 풀섶에 잠기었기에
짐승처럼 들킬 것 같았다 내 행동반경 안은
누구와도 연결할 수 있는 거리를 갖고는 있는 걸까
꽃에 대하여
꽃이 한 시절의 숨결을 지녔다는 그녀, 꽃들이 흠이 없음을 누군가는 입으로 꽃의 지문을 새겨 세월을 억누르지요 비비추 속 뜨겁네요 폭우를 불러들여 폭우가 그칠 무렵 활, 피웠어요 물 비릿함 질척댑니다 상사화 꽃대 쏙, 올라오면 폭우는 이미 끝났습니다 무더위가 우리 것이라 하네요 움직임이 다른 꽃도 있습니다 어떤 꽃은 힘을 두 볼 속에 집중시켜 울부짖는 비를 끄려 합니다 꽃들에게 발자국 소리가 풀어지듯 오래 들려주질 못했네요 내 몸이 꽃대 속에 전해지기도 했을 텐데 어느 날은 생기 있더니 하루 중 어떤 땐 침체된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안개 깔린 것처럼 별의 바스락거림에도 온통 엉키어 있네요 여기저기 아픈 내게 꽃은 진통제였어요 오래 전부터 한 웅큼씩 삼켰지요
페루하는 이별
눈은 나와 묵은 잎에 앉은 더러움도 희게 가려줬다 조심스레 눈길을 건너가는 건 뒤에 오는 흔적을 보려 함이다 고래 뒷다리는 이젠 난파한 배의 흔적이기도 하다 네 거리엔 차와 사람의 발자국이 눈 진창 만들듯 누가 어디에서 내려와 혹은 종종걸음 치며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사람 다니는 호젓한 산길을 짐승도 다닌다 그들 통로 다르리라 믿었는데 내가 걷는 길 질러 개울가에서 지웠다 새들이 쓰다 말고 간 글씨 지지러진다 큰 새는 눈 위에 날개를 펴고 앉았다 날개 안의 누런 볏단 같은 쓸쓸함을 보고 말았다 찍어낸 정교한 돌기 사이, 내 손이 앉았다 새는 어디 날아갔겠지만 돌아와야 할 사람은 막막하다 그 흔적에서 페루의 강가에 직선으로 앉아 있는 새들을 지상화地上畵에 담았다
허구일지라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무수한 직선은 활주로 같다 그 옛날에도 나처럼 떠나야 할 사람 있었던가 떠난 새들은 페루에 무사히 당도했을까
흑흑
몇 만 번 울고서야 눈의 수명 다하겠다는 건가, 수도꼭지 바로 위쯤에 눈물 고여 있다 수도꼭지가 낡아 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물이 내뿜는 침울한 소리, 깊은 밤 곡哭소릴 듣고만 있었다 파수꾼으로 남겨 놓고 때론 깊은 잠 빠졌다 울부짖음은 누구나 꾹 잠겨 두는 게 맞는다 물 앞에선 떠난 뒤 부슬부슬 따위 하지 않기를, 태어나서 눈물 쓰였고 하직할 때 눈물 쓰였다 눈물 대부분이 물이듯 몸에 흘러 다니는 물과 함께 산다 빛깔도 없이 어찌 수십 리 길의 웅크린 산맥을 넘고 넘었나 물과 흙만으로 수많은 꽃들이 피어났다 물과 기름만으로 뭉크는 절규를 그려냈다 눈물은 눈물만이 낫게 할 수 있다 꼭지엔 간절히 틀어 주기 기다리는 물살도 있을 터, 마음이 멈추면 몸은 썩는다 이곳만큼 물을 가두어 두기 좋은 곳은 없다 물 속에 사는 난폭한 악어게도 약점 있을까 생각했었다 말랑말랑한 코에 있었다니, 내 약점은 남이 흘리는 눈물이었다 수없이 물어준 그 물 무늬
헤로인
아편은 붉은 양귀비꽃의 상처였다 덜 익은 열매에 흠欠을 낸 즙액이다 독이 독을 다독인다 열매의 이지러짐에서 모르핀을, 모르핀의 이지러짐에서 헤로인을 뽑아냈다 누군가 말한 치유의 힘센 이는 헤로인, 힘센 상처는 강렬하다 술값이 비싸서 가난한 사람들이 마셨던 아편, 작가나 시인들 아픈 아기와 여자들에게 흔히 권했던 시절, 얼마 전까진 그랬다 이천 개가 넘는 영국의 커피하우스에 여자들은 들어가질 못했다 얼만 전까진, 우리 몸은 얼마 전까지를 가장 잘 받아들이는 물질이다 그런 물질들이 한꺼번에 등장한 것은 상처들이 포효했기 때문인가 취한 이들의 시간은 거나하다 흘린 듯 산마루 위에 둥둥 떠다니는 나를 잊음이 거나하다 마음을 들어 올려준다 제 몸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이젠 마지막이라 말했다 내 성하지 않음을 중얼거려본다 홀랑 들이키라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 붉은 양귀비꽃의 흠欠이 당신에게서 안착한다 성하지 못한 당신 마음에 양귀비꽃의 그런 마음이 당겨졌다
호주머니 그해엔 다녔다 헤로인을 자주 겉옷의 넣고 깊숙이 그해엔 넣고 호주머니 자주 깊숙이 헤로인을 다녔다 겉옷의
어제 내린 소나기로 차를 끓인다
누구라면 휘몰아치던 한때와 차를 마셨을까요 별 말도 없이 바깥을 내다보며, 흐르나요 서로 말문을 트지 못한 걸 주위의 부근, 사람들과의 언저리뿐이라고 말하지요 떠난 사람의 입김이 남은 찻잔은 아직 남겨 두었어요 그걸 유령처럼 바라보는 건 내 생에 터지는 몇 번의 폭발음 같았지요 사랑이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어요 그 부근, 언저리가 많았기에 자주 가라앉지요 그래서 어제 내린 소나기로 차를 끓입니다
누구라면 처음 채울 땐 작설차雀舌茶지요 오래도록 내다 본 저 바깥이 내 세상이 된 적은 별로 없었어요 바깥도 안에 매여 있나 봐요 한 번도 차 잎을 따는 검은 손, 바람과 햇볕까지도 생각 없앴지요 차를 훌쩍이며 입 속으로 뜨겁게 내려가면 차 잎, 차 뿌리나 말하려 했지요 사흘이면, 가버린 사람의 찻잔을 고요히 바라볼 수도 있네요 사흘만 머물라 하네요
그러면 거문고 소리 다시 들려줄 수 있다하네요
- 시집 『헤로인』(지혜, 2011)
* 안정옥 : 1949년 서울 출생. 1990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붉은 구두를 신고 어디로 갈까요』,『나는 독을 가졌네』,『웃는 산』,『나는 걸어다니는 그림자인가』,『아마도』,『헤로인』이 있음.
첫댓글 안정옥 선생님의 좋은 시편들 잘 보았습니다....파릇한 감각들이 여름나무처럼 싱그럽습니다.
작가의 숨결과 올리신 님의 수고 저릿하게 느끼며 건너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