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수산 외 4편
이소연
천국은 죽도시장처럼 생겼지요
은빛 아가미를 칼로 내리치는 선량한 사람처럼요
피가 빠지면 활처럼 당겨진 수평선이 가지런히 누워요
열일곱에 칼을 잡았더니 왼팔이 짧아졌네요
포항에서 눈을 본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
아가미 달린 것들이 눈을 본다는 것은 좋은 징조
이건 꿈이 아니예요
하얗게 바래가는 도시를 떠올리세요
떨어지면 살 수 있다고 읊조리며
떨어지는 풍경은 당신 안에 있어요
혓바닥을 내어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아 먹어요
우럭 맛이 나네요
물에서 나는 것들이 수산이라면
눈은 수산이예요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요
몸 안에 사는 죽음
뼈
죽지 않고
다음을 사는 것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요
죽고 나서도 죽지 않는 것들에게 피의 이야기를 해줄래요?
목숨에게 쫓겨났는데 반백을 지났어요
죽도시장에 내리는 눈의 목소리로
눈은 수산
눈에서 뼈를 발라요
시간이 존재를 찌르죠
수조 안에선 아무도 나를 믿지 않아요
장작 패는 사람
어제 새벽엔 시를 쓰다가 창문을 내다봤는데
술을 깨려고 장작을 팬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의 마당엔 쓰러진 나무들이 가득했다
쓰러진 마당에 나무를 심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은 어떻게 가질까
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싶다
팬다는 말을 가져 본적 없는 내가
팬다는 말을 가장 아름답게 배우는 새벽이었다
그는 언 손으로 나무를 패려고 겨울을 데려오고 싶다고 했다
이 새파란 여름에
이 지독한 여름에
언 손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떻게 가질까
더 차고 혹독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
프랑스에서도 장작을 패고 과테말라에서도 장작을 패지만
장작을 패지 않는 나라가 있다면 거기선 아무 것도 쪼개지지 않을 것 같고
쪼개지지 않는 건 가짜라는 생각
있는 힘껏 세상을 쪼개는 남자가 들고 있는 것이
도끼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팰 것이라곤 나무 밖에 없다는 듯
이대로 끝나도 좋을 것처럼 땀을 흘리는 사람 옆에서
무엇을 위해 장작을 패느냐고 묻기 위해 나는 나이를 먹는구나
날마다 마당에 쓰러진 나무를 쪼개면 거기서
새벽이 태어나는 걸까?
도끼라는 걸 믿을 수 없는 도끼로 나무를 내려쳐서
새벽 창문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그는 고백했다
새벽 창문이 내 옆으로 와서 눕는다
새벽 창문은 다시 오지 않을 창문
내가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창문이었다
타인의 삶
조용한 가스불, 차분한 음악
침묵의 행렬을 지나 동그랗게 웅크린 말들
내가 홍차를 우려낼 물을 끓이고 있었을 때는
첫눈이 십 센티쯤 쌓인 아침 아홉시였다
채광은 속과 겉이 같아지려 하고
우리는 납작한 사람이 되려 하지
나는 말 하는 것을 믿고
말 하지 않는 것도 믿고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잘못을 빌고 있다
가스검침원이 여러 차례 방문 중인데도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건 계획된 누출인가?
당신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눈송이처럼 사뿐한 걸음
이리 오렴 아이야
나는 당신의 말을 믿기 위해서 말 잘 듣는 아이를 키우지
오늘 아침의 홍차는 상처를 씻어낸 물 같아
속눈썹 같은 중력을 본다
찻잔 속에서 가라앉고 있는 것들
여길 나가야 살 것 같은데
침은 입 밖으로 나가면서 더러워지고
내 그림자는 집 밖을 나서자마자 악착같이 끌려다니네
빨레집게체*
보통 젖어 있잖아요
우리가 만지던 생각들은
실패한 휴지로 쓰레기통이 넘칠 때
난 왜 그게 욕조 같죠?
내가 사는 동네는
걸핏하면 대야에 담가져 있고
그래도 숨이 멎지 않는 것들을 너무 많이 봐왔어요
실험실의 쥐들이 죽는 장면보다 가까스로 살아나는 악마를 보는 게 힘들어요.
누구도 쉽게 죽지 못합니다
엄마 뱃속을 돌다 느닷없이 젖은 빨래처럼 세상 밖으로 꺼내진 나도
그냥 덮어 둘 수는 없어서 페이지를 넘기며 살아갑니다
가끔 귀여운 것들을 안으며 꾸역꾸역
작고 알록달록한 양말들을 집게로 집으며
버리고 갈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해요
쓰레기통 앞에서 고꾸라지며 들어요
주워, 네 거잖아.
그러면 한 번쯤은 뒤집어 말리고 싶은 것들이 생겨요
탁탁 턴 질투의 어깻죽지를 집어 넌다든가
지체되는 밤을 소매부터 뒤집어 본다든가
밤을 널었더니 새벽 첫차를 기다리고 있다든가
걱정 말아요
방학동에서 시를 쓰는 사람은 아마 지겹도록 살 거예요
*한글 폰트 중 줄에 글씨를 빨래집게로 고정한 모양의 폰트
고사목
손찌검이 잦았지
다시 돌아오지 않더군
서서 죽기로 결심했어
죽음은 아직 살아 있더라
좌판 위에 뒤집힌 꽃게 한 무더기
가슴팍을 맞고 다리를 허우적대
너는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려
죽음에 손을 댄다
이 쪽 죽음은 조금 비싸고 싱싱하다
다리를 움직였으므로
갑각류의 방식으로
나는 죽어가고 있다
가끔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팔을 저으며
이 뜬금없는 좌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누가 내 가슴을 치나
누가 내 죽음을 탐내나
‘남의 말을 믿지 마시오’
이건 참 믿고 싶게 만드는 말이야
인간의 진화에는 배신이 필요하대*
아무도 붙잡아 주지 않아서
목숨이구나
힘이 센 것들은 다 나무 밖에 있고
내 몸은 허물기 좋게 비어 간다
우리의 죽음은 진화하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다시 오는
서서 죽어가는 정오가 우리를 위해 서 있다
우리는, 우리의 피를 빠는 것들과 곤란한 사랑에 빠지고 만다
*스티븐 핑거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켬’ 동인. 시집으로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