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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에 대하여
오늘 나라야마 부시코 (楢山節考) 영화를 보았습니다.
나라야마 부시코는 일본의 영화감독인 이마무라 쇼헤이의 작품으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줄거리
산으로 둘러 싸인 작은 산이 있다.
그 산에 사는 사람들은 자급자족 생활을 하며,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엄연한 규칙으로
‘결혼은 장남만 할 수 있다’,
‘다른 집의 식량을 훔치는 것은 중죄이다’,
‘70세를 넘은 노인은 의식에 따라 버려야 한다’가 있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 나라야마행을 준비하는 69세의 오린과
어머니를 버려야 하는 맏아들 다츠헤이의 갈등을
수려한 자연 풍광 속에 담아내고 있다.
자연과 함께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일본 북부 지역의 수려한 사계절의 변화를 통해 보여주며
인간의 삶도 자연의 생존 법칙에 따라 죽음을 맞는다는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끌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우바스테야마나 오바스테 산같은 전설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에 순응하는 일가의 비극적 운명과 끈질인 인간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우바스테야마(姥捨て山)는 '할머니를 갖다 버리는 산'이란 뜻으로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노인 유기 설화이다.
크게 〈시오리형〉(枝折り型) 설화와 〈난제형〉(難題型) 설화로 나눌 수 있으며,
그 사이 복합형 설화들이 있다.
법령 또는 흉년으로 인해 식구의 입을 줄이기 위해
고령의 부모를 산에 버리게 된 아들과 그 부모의 이야기다.
난제형(難題型) 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 신슈(信州:나가노현)에 있는 어떤 번국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많은 군사들을 에미시로 보내야 했다.
이 전쟁이 오래갈 것임을 직감한 번주는
무사들의 식량을 비축하기로 결정한 후
즉시 영지 곳곳에 포고령을 내려 이렇게 알렸다.
“오늘부터 60세가 넘은 노인이 집에 거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노인을 산속에 버려야 한다”
이후 모든 촌락에서는 비극적인 이별 장면이 연이어 연출되었다.
어제는 강건너 사효에(左兵衛)네가 울면서 노모를 업고 산으로 들어갔고,
오늘은 이웃동네 우효에(右兵衛)네가 늙은 아비의 손을 끌고
고개를 푹 떨 군 채 산길로 접어들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노인들을 버린 그 산을 오바스테산이라고 불렀다.
가쿠타로란 사내에게는 늙은 노모가 있었고
곧이어 자신의 노모를 오바스테산에 버려야 할 차례가 왔다.
그의 가족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모두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비록 노모가 계단처럼 된 논밭을 오랜기간 오르내리느라
등이 일찌감치 굽어있었지만,
그런 노모의 행동이 굼뜨다고 싫어하는 식구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노모는 가족들에게 포근함을 안겨주는 그런 존재였다.
가쿠타로의 노모를 오바스테산에 버리는 날,
그 날 며느리는 새벽일찍 일어나 주먹밥을 만들고 물통을 준비했다.
그리고 가쿠타로는 노모를 업고 오바스테山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에 업힌 노모는 줄곧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꺾어놓았다.)
산 위로 올라온 가쿠타로는 샘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노모를 내려놓았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있어 서두르지 않으면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지 못할 수 있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가쿠타로를 보며
노모는 아무일 없다는 듯 말했다.
“가쿠타로야 고생이 많았구나.
날이 저물기 전에 어서 돌아가거라.
오는 동안 내가 나뭇가지들을 꺾어 표시해놓았으니,
그 표시를 따라가면 산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게야.”
노모의 이 말을 들은 가쿠타로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지엄한 번주의 명령이라지만 자신을 낳아준 노모를 산 속에 버릴 수 없었다.
가쿠타로는 노모를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집으로 돌아온 모자를 본 며느리는 아무 말 없이 집 뒷켠에 구덩이를 팠고
그 안에 노모를 숨기며 봉양했다.
하지만 이 일은 곧 발각되었고,
이 사실을 안 마을 촌장은 마을에 해가 올까 두려워
관청에 이 사실을 고발했다.
번주는 가쿠타로를 불렀고,
이미 죽음을 가고한 가쿠타로는 사실대로 고했다.
“너는 네 어미를 버릴 수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네 어미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뭐냐?
좋다. 내 너에게 문제를 낼테니,
만일 너와 네 어미가 문제를 푼다면 너희들의 목숨을 살려주마”
번주가 낸 문제는 이러했다.
‘재를 꼬아 밧줄을 만들어라’
가쿠타로는 머리를 쥐어짰으나,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와 노모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노모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간단하지. 밧줄을 태우면 될게 아니냐”
번주는 밧줄 모양의 재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어서 두 번째 문제가 제시되었다.
‘소라로 실을 꿰어라’
카쿠타로가 집으로 돌아와 노모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노모는 웃으며 말했다.
“개미 허리에 실을 묶어 소라 안으로 들여보내라.
그 다음에 소라 안으로 연기를 불어 넣으면 될게 아니냐”
그러나 번주는 여전히 흡족해 하지 않았고, 다시 세 번째 문제를 냈다.
‘6척 길이의 방망이가 있는데, 어디가 머리쪽이고 어디가 꼬리쪽인가?’
노모는 역시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방망이를 물에 띄워 가라앉는 쪽이 머리이지”
가쿠타로는 이번에야말로 번주가 크게 탄복하리라 여겼지만,
뜻밖에 번주는 또 다른 문제를 냈다.
‘종이로 불을 싸보아라’
종이로 어떻게 불을 싼단 말인가?
번주가 우리 모자를 죽이려하는 구나 하며 낙담한 가쿠타로에게
노모가 이렇게 말했다.
“등롱 안에 불을 켜면 될게 아니냐”
이윽고 번주는 등롱(燈籠:대오리나 쇠로 살을 만들고
겉에 종이나 헝겊을 씌워 안에 촛불을 넣어서 불을 켜는 등)을 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가쿠타로, 내 이제야 깨달았네
자네 어머니는 노인의 지혜라는 것을 가지고 계시네.
그것은 인생의 오랜 경험을 통해서만 비로서 가질 수 있는 것이지.
난 여태껏 노인들을 밥벌레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내 앞서 내린 포고령을 거두어들이도록 하겠네”
이리하여 가쿠타로와 그의 노모 뿐만 아니라
온 번국의 남녀노소 모두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이것이 오바스테스산의 전설이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고려장 전설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런데 이런 오사스테의 전설은
나가노현 치쿠마시의 오바스테산 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고루 퍼져있다고 한다.
어쩌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자신들의 지역에 전해지는 오바스테산의 전설을 우리나라로 들여와
우리민족이 옛날에는 노인을 버리는 풍속이 있었다고
날조한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모로미야, 『전설일본』, 일빛, 2010
시오리형(枝折り型) 설화는 다음과 같다.
입을 줄이기 위해 늙은 부모를 업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데,
올라가는 동안 부모는 계속해서 시오리
(산이나 숲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통과한 길을 표하는 일)를 만들거나,
혹은 쌀겨를 땅바닥에 뿌린다.
그 모양을 본 아들이 궁금하여 왜 그러냐고 물으면
부모는 “네가 산을 내려갈 때 헤메지 않게 하기 위해”라고 대답한다.
자신이 버려지는 상황에서도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에게 가책을 느낀 아들은
부모를 데리고 산을 내려간다는 이야기다.
이 외에도 부모를 망태기에 담아서 버리러 가는데, 따라 온 자식이
“아버지가 늙으면 그 망태기에 아버지를 담아서 나도 버릴 것이다”라고 말해서
정신을 차린 아들이 부모를 데리고 산을 내려온다는 설화와
시오리형 설화 뒤에 난제형 설화가 이어지는 복합형 설화가 있다.
또 며느리가 아들을 부추겨 부모를 버리게 하지만,
결국 부모는 집으로 돌아오고 며느리는 죽임을 당하는,
고부 갈등과 연계시킨 설화도 있다.
이런 노인 유기 설화는 일본 뿐 아니라
우바스테야마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뚜렷하게는 알 수 없어도 고대 ~ 근세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노인 유기를 강제하는 법령이 있었던 기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바스테 산(일본어: 姨捨山 오바스테야마) 또는 우바스테 산(일본어: 姨捨山 우바스테야마)은
일본 나가노현 지쿠마시와 히가시치쿠마군 지쿠호쿠촌에 걸쳐 있는 산이다.
정식 명칭은 가무리키 산(일본어: 冠着山 가무리키야마)이다.
높이는 표고 약 1,252m로, 나가노 분지 남서단에 있다.
과거에는 오바쓰세 산(일본어: 小長谷山)이라 불렸다.
민속학자인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의 기록에 따르면,
한자가 "노인을 버린다"는 뜻으로 바뀐 것은
《야마토모노가타리》 등에 등장하는 일본 곳곳의 기로(棄老) 설화 중,
지쿠마 지역의 젊은이들이 가난을 견디다 못해
나이들고 병든 부모를 오바스테 산에 버렸다가 크게 후회를 느끼고
다음날 부모를 다시 모시러 온다는 설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동일본 여객철도(JR 동일본) 시노노이 선의
오바스테 역과 가무리키 역은 이 산의 이름들에서 따 온 것이다.
高麗葬(고려장)
高麗葬은 늙은 부모를 산속 구덩이나 바위굴 속에 버려두었다가
죽은 뒤에 장례를 지냈다는 고려시대의 풍습이라고 전해지는데,
고려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장례 풍습이라고 일반인들이 믿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시대부터라고 생각한다.
삼국시대 이후로 조선시대까지의 여러 문헌 어디에도
노인을 산 채로 내다 버리는 고려장에 관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대 1919년 평양고보 교사를 지낸 적이 있는
일본인 미와 다마끼三輪環의 <전설의 조선>이란 책에
‘不孝息子(불효자식)’이란 제목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이것이 문헌에 있는 최초의 고려장 이야기이다.
또 1924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에서 발간한 동화집 <조선동화집>에
우리나라의 전설이나 민담을 모아 놓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어머니를 버린 남자’ 가 바로 고려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동화집은 편찬 동기와 의도가 식민통치와 결부되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장례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주로 화장을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절에서 스님의 인도 아래 화장하여 유골을 절에 모셔두었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 항아리나 작은 돌관에 담아 땅에 묻기도 하고,
산이나 강에 뿌리기도 하였다.
화장이 아닌 매장을 하기도 했는데, 특히 왕들은 매장을 주로 하였다.
제대로 장례를 치를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은 구덩이를 파고 묻거나
풀 등으로 덮어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고려시대 법률에는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있는데
그 자손이 호적와 재산을 달리하여 공양을 하지 않거나,
부모나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슬퍼하지 않고 잡된 놀이를 하는 자는
법으로 엄격히 처벌하는 등 효孝를 매우 강조하였다.
실제로 고려장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장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의 이야기는<耆老傳說>이라는 설화에,
70살이 된 늙은 아버지를 아들이 지게에 지고 산중에 버리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함께 갔던 손자가 나중에 아버지가 늙으면 지고 온다며 그 지게를 다시 가져오려고 하자,
아들은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셔 지성으로 봉양했다.
그 이후로 이런 풍습이 없어졌다.
<노모의 지혜>라고 불리는 설화는,
한 관리가 늙은 어머니를 풍습대로 산에 버리려 했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가는 길을 잃을까봐 가지를 꺾어 표시를 했고,
관리는 차마 어머니를 버리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리고 어느 날 중국의 사신이 노새 두 마리를 가져와
어미와 새끼를 알아 맞히라고 하여 모두 풀지 못했는데,
관리의 어머니가 노새를 굶긴 뒤에 다시 여물을 주어
먼저 먹는 것이 새끼라고 알려 주었다.
그 뒤로는 늙은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없어졌다.
장사익의 노래 중에 <꽃구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려장에 대한<노모의 지혜>라는 설화를 바탕으로 쓴
시인 김형영의 시집 [다른 하늘이 열릴 때]에 실린
<따뜻한 봄날>이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덴데라>에 나오는 '나이 70살 때 산에다 버린다'는 내용이
설화 <기로전설>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의 이야기를 우리나라의 이야기로 꾸며
우리 민족을 비하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박은봉 /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장사익 '꽃구경' 노래를 실감나게 부릅니다.
[고려장(高麗葬)이란 장제(葬祭)가 없어지게 된 유래를 설명하는 설화.]
고려장은 사람이 늙어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산 채로 산이나 들에 내버리는 장제를 말하는데,
이러한 장제가 없어지게 된 유래에 대해 두 가지 내용의 설화가 구전되고 있다.
이를 편의상 지게형과 문제형이라 나누기로 한다.
지게형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사람이 예순 살이 넘으면 산 채로 갖다 버리는 고려장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비(어미)가 늙자 산 채로 지게에 지고 가 산에 내버렸는데 따라 갔던 아들이
그 지게를 도로 가져오려 하니 아버지가 말렸다.
아들이 자기도 후일 아버지가 늙으면 그 지게에 져다 버려야 하니까 지게를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이에 아버지가 자신의 불효를 깨닫고 다시 늙은 아비를 모시고 집으로 왔다. 후에 고려장이 없어졌다.
문제형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에 국법으로 사람이 늙으면 산 채로 내버리는 고려장이 있었다.
어떤 대신이 어머니가 늙어 고려장을 해야만 했지만 차마 노모를 버릴 수 없어 고려장을 한다는 소문을 낸 후
몰래 벽장 속에 숨기고 모셨다. 중국에서 고려에 인재가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두 마리 말 중 어미와 새끼를 구별하기,
나무토막의 상하 구별하기, 코끼리 무게 알기 등 어려운 문제 3개를 내고 해답을 요구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가 어려워 풀지 못해 애를 쓰는데, 벽장 속의 어머니가 간단하게 그 답을 알려 주었다.
말은 먹이를 주어 먼저 먹는 것이 새끼이고, 나무토막은 물에 담그면 윗부분이 위로 뜬다.
그리고 물 위의 배에다 코끼리를 태워 금이 진 곳을 표시하고, 코끼리를 내린 후 금이 진 곳까지 돌을 실은 후
돌의 무게를 달면 코끼리의 무게를 알 수 있다. 임금이 국난을 물리친 대신에게 큰 상을 주며 소원을 말하라 했다.
대신이 이실직고하며 자신의 불충을 사죄하고 고려장의 폐지를 소원하니, 임금이 고려장을 폐지했다.
그 이후 고려장이 없어졌다. [출처 : 한국민속문학사전]
세잎 클로버님의 글과 체칠리아님의 댓글 잘 읽어 봅니다.
많은 것을 알게 하고 느끼게 하는 글 이네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