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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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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역사 스크랩 [펌] DMZ 넘어간 6명의 미 탈영병들 / 이야기 N.A.R.A/울프독의 War History
마이피 추천 0 조회 205 14.12.18 03: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0여 년 전 북한으로 탈영했던 찰스 로버트 젠킨스라는 미군이 일본인 처 사가 히토미와 딸 둘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2005년 40년만에 미국으로 돌아와서 91세 된 엄마을 만나는 젠킨스 - 몇몇 동네 사람들은 도망병 출신 젠킨스의 귀향을 별로 반기지 않았다.


그가 일본에서 출판했던 ‘고백’이라는 책은 한국과 미국에도 번역되어 출판된바 있었다. 젠킨스로 인해서 그간 역사의 잿 속에 묻어 두었던 월북 주한 미군들의 존재가 수면에 떠올라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 부국인 미국 군인으로서 못 사는 아시아 공산국가 행을 택했던 예는 한국전쟁 이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 중 중공군이 압록강변에 설치했던 벽동과 창성 등의 포로 수용소에서 일부 미군들이 세뇌 당했었다. 본국 송환을 거절하고 중국으로 갔던 미군이 무려 21명이나 되었고 영국군도 1명 있었다.

 

중국의 세뇌라는 것은 제갈량이 맹획에게 썼던 온정주의의 설득이나 감화 포섭으로서 왕도(王道)를 주장한 맹자의 가르침에서 유래한다. 현대에서는 저항이나 도주 불능의 인질상황에서는 인질이 인질범에게 매달리는 심정이 되어 인질범에게 호감을 갖거나 동조하는 심리가 생성되는데 이 현상이 두드려졌던 인질 사건인 스톡홀름이 인질 사건을 따서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70년대 미국에서 발생했던 신문왕 허스트의 딸 패트리시아 허스트의 유괴사건이 이 증후군의 극단적인 경우다. 그녀는 자신을 납치한 납치범들과 어울려 은행 강도질을 하기도 했는데 체포된 뒤에야  제정신이 들었다.]


월북 탈영병 드레스녹이 김일성에게 받은 선물을 들고 찍은 사진. 왼쪽 가슴에 김일성 배지가 이색스럽다.


중공군은 이런 포로 상황을 교묘히 노린 동양 고래의 심리전술로 일시적으로 어린 미군들의 마음을 샀던 것이다. 이들은 중국으로 간 뒤에야 제 정신이 들어서 한 두 명 씩 미국으로 귀국했다. - 영국군 해병 앤드류 콘드론 하사도 영국으로 돌아갔다- 동구권 국가인 폴랜드나 체코 여자와 결혼해서 동구권으로 간 미군들도 있었고 미국 이민자였던 알버트 베롬 [Belhomme] 하사처럼 원래의 고향이었던 벨기에로 돌아간 미군도있었다. 한 명만 빼고 모두 미국으로 모두 돌아왔다. 


남침해 오는 북한군 - 이 사진에서 오래간만에 소련제 군용 트럭을 구경해 본다.


미국은 이들이 중국으로 간 뒤 모두 불명예 제대 처분을 했지만 제정신 들어서 돌아오는 미군들을 특별히 처벌 하지는 않았다. 단지 제임스 베네리스 일병만은 중국에서 결혼도 하고 교육도 받고 직장을 잡아 중국에서 일생을 마치고 2005년 중국에서 사망했다.


중국에서 끝까지 남아 살다가 일생을 마친제임스 베네리스와 중국인 부인

 

그는 문화 혁명때는 홍위병의 눈치를 보느라 거리에 대자보를 붙이고 돌아 다니기도 했다. 중국명 온납(溫納). 주은래는 베네리스를 진정한 국제주의 자유투사라고 격찬했었다. 생전 미국에 두 번 다녀갔다.


그런데 공산권으로 넘어간 미군이 한국전쟁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어져서 총 6명의 주한 미군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탈영했다. 대부분 군대에서 버티기 힘든 개인적인 이유가 있어서 탈영한 것이지만 이들 면면을 소개 해본다. 



북한이 좋아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모두 북한을 경유해서 소련으로 가고 싶은 계획이 있었지만 북한이 어떤 나라라는 것을 전혀 모른 무지에서 만든 계획과 실천이었다. 북한은 이들의 의사에 반해서 북한에 억류하고 이용해먹었다. 북한으로 탈영한 미군들의 면면과 사연을 알아보자.

 

1. 래리 알렌 앱셔 일병 [1943-1983]

전후 최초로 월북한 미군인이다.1962년 5월 월북했다.일리노이 주 어바나 샴페인 출신이다. 북한은 1978년 앱셔에게 아노샤라는 납치 태국여자를 붙여주고 결혼을 유도했다. 그녀는 마카오의 마사지실에서 윤락녀로 일하다가 납치되어 왔었다. 1983년 7월 11일 앱셔는 40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사망했다. 결혼 후 부인 아노샤는 북한 당국에 의해 끌려가 독일인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 일병[1940- ]

버지니아 리치몬드 출신. 지금도 평양에 살아 남아 있는 미군이다. 드레스녹은 부모가 헤어진 결손가정에서태어난 불운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들의 문제로 그는 남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가정 환경이 그래서 그랬는지 술도 잘 마셨고성격이 과격했다.


 드레스녹의 입대 사진. 이때만 해도 어린티가 남아있다.


그는 입대 후 독일에서 2년간 복무하고 귀국해보니 본처가 이혼을 요구하며 이미 그를 떠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시 입대하여 한국 휴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휴전선 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위조한 외출증으로무단 외출을 했다가 미귀 사건을 일으켰다. 중대에서는 이를 보고했고 그는 탈영병으로 분류되었다.

 

그는 뒤늦게 귀대했지만 가짜 외출증에 위조한 지휘관사인이 위조한 것임이 들통 나서 처벌 받게 되자 월북을 결심했다. 드레스녹은 앱셔보다 넉 달 뒤인 1962년 8월 15일, 백주 대낮에 동료들이 점심을 먹는 사이 지뢰밭을 가로 질러 북한으로 넘어갔다. (이 때에는 미군 부대 지역에도 철책선이 없었다.)

 

젠킨스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북한에 아주 협력적이었고 대단히 폭력적인 성격으로서 어린 앱셔를 자주 구타했었다. 젠킨스가 이를 말리자 그는 젠킨스에게 증오심을 품고 대신 그를 30여회나 구타했었다. 그는 북한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북한 당국에 적극 협력해서 여러 가지 일로 동료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북한에서 결혼을 세 번했다. 첫 번째 부인은 한국 여자였는데 헤어졌다. 두 번째 와이프는 북한이 루마니아에서 납치해온 도이나 부메아였다. 결혼 후 드레스녹과의 도이나 사이에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완전 백인 얼굴의 첫 아들 제임스는 북한 국적으로 평양 외국어 대학을 졸업했다. 제임스는 미국식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북한 억양이 강한 영어를 구사했다.

 

도이나가 폐암으로 죽자 드레스녹은 2001년 만난 북한 여자와 아프리카 토고 외교관 사이에 태어난 혼혈 여인과 세 번째 결혼했다. 몇 년 전 영국 영화 '경계선을 넘어서'라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해서 잘 알려져 있다.


3 .제리 웨인 파리쉬 병장 [1944 -1996]

켄터키 주 모간휠드 출신. 휴전선을 넘어간 탈영병으로 자세한 것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젠킨스의 책에 그가 다른 미군 즉 앱셔, 드레스녹 그리고 그와 같이 장기간 합숙 세뇌 교육을 받았다. 후에 다른 세 명의 여자와 함께 레바논에서 납치 되어온 시암이라는 여자와 함께 결혼을 해서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고 되어있다.

 

납치 되어온 네 명의 여자 중 한 사람이 부모와 연락이 되고 집단 납치 사실을 알게 된 레바논 정부가 항의하자 북한은 네 명을 모두 레바논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시암은 임신한 것이 알려지자 부모는 그녀를 다시 북한의 패리쉬에게 돌려보냈는다. 그는 20년간이나 앓아온 신부전증으로 1996년 사망했고 그의 처와 자식들은 아직 북한에서 살고 있다.

 

4.찰스 로버트 젠킨스 하사 [1940- ]

노스캐롤라이나 리치 스퀘어 출신이다. 월북 미군 중에서 가장 유명해진 사람이다. 1955년 미군에 입대해서 월북시 군 생활 10년차였던 고참으로서 분대장이었다. 그는 그의 부대가 월남으로 이동한다는 소문에 겁을 먹고 1965년 1월 4일 새벽 분대 야간 순찰 중 월북했다.

 

그는 월북 시 맥주를 열 캔 정도 마시고 충동적으로 월북했다고 했는데 술이 깨자마자 자기의 행위를 대단히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월북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주체사상을 교육받았고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1980년 북한이 납치해온 일본인 21살의 일본인 간호원 소가 히토미와 만나서 사랑에 빠져 결혼하였다.


납치전 어린 소가 히토미 사진.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납치되어 왔으나, 어머니의 행방에대해서는 그 후 알려진바가 없다.


그녀는 동해에 있는 사도 섬 출신으로 1978년, 북한 공작선에 의해서 어머니와 함께 납치되어 왔다. 그녀는 북한 당국에 의해 젠킨스의 짝으로 주어졌다. 부자연스러운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만난지 38일 만에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 로베르타[1983년 출생]와 브린다[1985년 출생]라는 두 딸을 두고 있다.

 

젠킨스는 2004년 일본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김정일의 의도와 납치 일본인들을 찾아오겠다는 일본의 의지가 결합되어2004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미군의 관용으로 6일 만에 불명예 제대의 처분만 받고 히토미의 고향 일본 사도 섬으로 이주, 현재도 살고 있다.

 

5. 로이 정 (한국계이고 부분적으로 정보가 비밀해재되었다. 납치일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퍼온이 주)

월북 미군으로만 알려졌지만 신상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1979년 월북했다. 성[chung]으로 보아 한국계인듯하나 중국계일 가능성도 있다.

 

6. 조셉 화이트 일병 [1961- 1985년]

미주리 주 세인트 루이 출신. 이 사람은 가장 늦게 월북한 미군이다. 1982년 8월 28일 탈영, 월북했다. 그는 비무장지대 통문의 열쇄를 쏴서 파괴하고 북으로 넘어갔다. (이 무렵에도 판문점 부근은 미군들이 철책선에서 주둔했었다.) 그가 북한군의 영접을 받는 것을 동료 미군들은 보았다. 월북 뒤 그는 북한의 방송에 나와서 불안한 표정으로 미군의 타락과 부패등에 대해서 맹비난했다.

 

그러고 그의 행방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는데 1983년 그의 어머니는 그가 북한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고 영어 선생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그의 편지를 받았다. 1985년 11월 5일 어머니는 북한 정부로부터 그가 월북후 청천강에서 수영을 즐기다가 익사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이에 자세한 죽음의 설명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북한 정부로부터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젠킨스는 그가 월북 뒤 북한 TV에서 기자 회견을 하는 것을 보았을 뿐 만나 본 일은 없다고 자기 자서전에서 밝혔다. 그러나 그 뒤에 이미 월북한 네 명의 미군 중 한 명과 같이 살도록 주선이 되었으나 실행이 안 되어서 의아하게 생각이 되었었다. 그러나 젠킨스가 북한 정부 관리로 부터 화이트는 간질이 있었고 자주 발작을 해 독신으로 살도록 놔두었다는 말을 들었다.


청년으로 월북했다가 노인이 다 되어서 돌아 온 젠킨스


월북한 미군들은 모두 북한이 아니라 소련행을 희망했었다. 그러나 기대치 않게 북한에 억류되자 60년대에 월북한 미군 탈영병 4명은 1965년 평양의 소련 대사관을 찾아가 정치적 망명처를 요청했지만 소련은 이들을 모두 북한 당국으로 넘겼다.

 

이후 미국인들은 소련행의 희망을 포기하고 북한에서 사는 길을 찾았다. 북한은 네 명을 수도도 없는 한 가옥의 큰 방에 공동 구금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주체사상을 교육했다. 이들은 엄청난 양의 학습 내용을 암기해야 했다. 북한 당군은 미군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자주 구타하는 등 야만적으로 대접했다.


이 생활은 10년이 넘는 1972년까지 계속 되었다. 북한이 소련 행을 희망하는 이들을 모두 억류해놓고 북한에서 강제로 생활하게 했던 것은 이들의 선전가치에 주목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미군이 주둔했던 서부전선에서 선전용으로 쓰기 위해서 대남 방송에 수도 없이 동원되었었다. 선전가치로서 약발이 떨어지자 이들을 영어강사로 활용하였다.

 

북한인들이 네이티브 스피커로부터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우기가 힘든 상황에서 이들의 이용가치는 높았다. 대상은 평양 외국어 대학생이나 해외 파견 외교관 공작원들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재주가 없었던 이들의 영어 교습은 신통치 않았다.젠킨스는 발음이 좋지 않다고 영어 선생직에서 해고 되었다.

 

북한 당국이 이들을 활용한 것은 반미 선전영화에서였다. 물론 악당 미국인 역으로서였다. 불량스럽게 생긴 드레스녹은 그의 얼굴 생김이 악당 미국인 역에 맞아서였는지 1978년 부터 20회 TV 연작에 최다 출연을 하였고 북한인들에게 극중의 인물명이었던 아더로서 많이 알려지기도 했다.


젠킨스와 드레스녹의 체구 비교. 젠킨스이 이 무지막지한 인간에게 자주 구타 당할 만도 하다. 드레스녹은 현재 평양에서 낚시질로 소일하는 은퇴 노인이되어서 살고 있다.


영화 출연은 이들의 생사를 모르고 있던 미 정보당국에 이들이 북한에 아직 생존하고 있음을 확인 시켜주는 결과를 가져 오기도 했다. 젠킨스는 운이 좋아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일본인 부인 소가 히토미와 함께 그 녀의 고향 사도 섬으로 돌아오기라도 했지만 미국인들이 타민족인 북한인들 사이에서 폭력적인 북한 관리들 비위를 맞추며 살기가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내막은 젠킨스의 자전 회고록 ‘고백’에서 여실히 증명해준다.



(중국으로 갔다가 비교적 늦은 1965년에 미국으로 중국인 부인과 자식을 데리고 돌아온 클로렌스 아담스. 그는 월남 참전 흑인 미군들에게 전쟁을 거부하라는 녹음 선전 방송을 하기도 하였다. 귀국후 고향 멤피스에서 중국집을 열었다. 그의 귀향은 타임지에 보도되었었다. 아담스뿐만 아니라 다른 미군들도 귀국하겠다고 했을 때 중국은 선선히 다 허락했었다. 1999년 사망.)


젠킨스와 두 딸


(일본 정부는 김정일이 임시 일본 방문을 허락한 일본인 피납자들의 북한 귀환을 막았었다. 이 때 김정일은 50억 달러 무상 원조를 기대하고 북한 고이즈미 내각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느라 피납 일본인들의 일시귀국을 허락했었는데 일본 여론만 엄청 나쁘게 자극했었다. 젠킨스와 두 딸은 일본 방문이 허락되지 않고 히토미만 먼저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의 집중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먼저 일본에 다니러 간 히토미와 가족 결합을 하는데 21개월이 걸렸다. 중국이 변심 미군 포로들의 귀국 청원을 허락한 것과  너무 대조된다.)


지금도 주한 미군 중에 탈영병(AWOL,DESERTER)이 왕왕 발생해서 부대 게시판에 현상 수배가 붙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휴전선 배치 미군이 없어서인지 현재는 아무도 북한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없다.


 [이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한국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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