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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레위 사람들
성경본문 : 느헤미야 8: 1-12
오늘은 신년주일이고, 당회헌신예배입니다. 한 영상을 보신 후에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한계를 넘게 하는 관계"
작년에 읽은 책 중에 아주 중요한 책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짐 콜린스라는 사람이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 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입니다. 짐이 모교인 스탠퍼드 대학에서 강의할 때는 전체 학생의 절반정도가 수강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첫 장에서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파격적인 말입니다. “좋은 것은 큰 것, 거대하고 위대한 것의 적이다. 그리고 거대하고 위대해지는 것이 그토록 드문 이유는 대개는 바로 그 때문이다. 거대하고 위대한 학교는 없다. 대개의 경우 좋은 학교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위대한 정부는 없다. 대개의 경우 좋은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대개의 경우 좋은 삶을 사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회사들은 위대해지지 않는다. 바로 대부분의 회사들이 제법 좋기 때문이다.”저자 짐 콜린스는 이것이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즈니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문제입니다. 좋은 학교가 위대한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신문이 위대한 신문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좋은 교회이지만, 위대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조직을 위대한 조직으로 바꿔야 합니다. 좋은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꿈을 더 크게 하고, 더 높은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60주년에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100주년에 위대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 사람들이 달라져야 합니다.
오늘은 당회 헌신예배입니다. 당회는 목사, 부목사, 장로 2인 이상으로 조직해야 하는데, 반드시 세례교인 30명 이상이 있어야 당회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당회의 직무는 “당회는 교인의 신앙과 행위를 통찰하며 세례, 입교할 자를 문답하며 세례식과 성찬식을 관장한다”고 했습니다.
“당회는 예배를 주관하고 소속 기관과 단체를 감독하고 신령적 유익을 도모한다”고 했습니다.
당회는 목사와 장로로 조직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그 직무를 잘 이해하고 잘 감당해야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며, 성례를 거행하고, 교인을 축복하며, 장로와 협력하여 치리권을 행사한다.”고 했습니다. 장로와 협력하라고 했습니다.
목사는 30세 이상으로 교단신학대학을 나오고 2년 이상의 목회경험을 쌓고, 목사고시를 보고 합격하여 노회에서 안수 받아 임직하고, 개교회 청빙을 받아 담임목사가 됩니다.
장로는 그 직무와 자격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장로의 자격은 상당한 식견과 통솔의 능력이 있는 자로 무흠 세례교인(입교인)으로 7년을 경과하고 40세 이상 된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장로의 직무는 “장로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치리회의 회원이 되어 목사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장한다. 장로는 교회의 신령상 관계를 살핀다. 장로는 교인들이 교리를 오해하거나 도덕적으로 부패하지 않도록 교인을 권면한다. 장로는 권면하였으나 회개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당회에 보고한다.”고 했습니다.
장로는 두 가지 있습니다.
설교와 치리를 겸한 사람을 목사라 하고,
치리만 하는 사람을 장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장로의 직무를 보면 교회의 신령상의 문제를 살피고, 교인들이 교리를 오해하거나 부패하지 않도록 교인을 권면하고 회개하지 않는 교인들이 있으면 당회에 보고하여 바로 잡아주려고 하면, 단순히 치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깊이가 있어야 하고, 성경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어야 하고, 신령한 문제에 항상 앞장서고 지도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와 장로는 개신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두 기둥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이 굳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역대하3:17에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고 했습니다.
성전에 올라갈 때면 두 기둥이 보였습니다. 그 기둥의 하나는 ‘야긴’인데, 그 뜻은 ‘그가 세우리라’,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의 기둥 이름은 ‘보아스’입니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 곧 ‘하나님은 능력이시다’는 뜻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그 두 기둥을 보면서 성전에 세워진 두 기둥을 통하여 하나님은 능력이시고 하나님이 세워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교회에는 기둥과 같은 일꾼을 두셨습니다.
갈2:10입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기둥 같은 일꾼들이 있었는데, 야고보, 게바(베드로) 요한, 바울 바나바 이런 분들은 초대교회를 세우신 기둥같은 일꾼들입니다.
사람을 기둥으로 표현합니다. 목사와 장로는 교회의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두 기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을 든든히 세워야 하고, 능력이 있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기둥이란 두 기둥이 건재해야 합니다. 한 기둥이라도 부실하면 다 공멸합니다. 목사 기둥이 부실해지면, 장로 기둥도 부실해집니다.
장로라는 기둥이 부실해지면, 목회가 흔들리고 말게 됩니다. 목회가 건실해지고, 목사가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장로님들이 잘 협력해주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장로님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분명히 장로님들을 알아주고 존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에스라, 느혜미야 그리고 레위 사람들”이란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요는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이 위대한 역사를 씁니다.
우리는 학사요, 제사장이신 에스라에와 총독 느헤미야라는 분과 그리고 에스라를 도와 백성들을 가르친 레위 사람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도자를 인정하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여들어야 합니다.
먼저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학자로 제사장 출신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유대인으로 바벨론 포로 시대에 바벨론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제사장 아론의 16대 손의 제사장 출신이었습니다.
에스라7:6에서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는 결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7:10에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에스라 7:10의 말씀을 정말 소중한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오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면서, 온 성도들에게 잘 가르치려고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유대교는 에스라가 새로 세운 종교라고 할 정도로 에스라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는 대단한 학자였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돌아와서는 영적인 부흥을 일으키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안식일 제도를 확립하고 율법으로 돌아가도록 유대교를 재건한 사람입니다.
에스라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나왔고, 경건한 유대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바르게 살지 못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야만 다시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제2의 모세라고 그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있었는데, 페르시아 황제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유대 총독으로 임명받아 세 번째로 백성들을 인솔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그는 돌아온 날부터 오로지 성벽을 재건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는데 역사상 최 단 시일에 완성한 사례라고 보이는데 52일 만에 중건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성을 중건하는 일도 중요하였지만, 영적인 부흥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습니다. 성전을 건축하였고, 이제는 성벽을 중건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성안에 안주할 수 있었고, 이제부터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거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육신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다 잘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제는 영혼의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살길이었습니다.
육신적인 일을 잠시 내려놓고,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유대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하여 돌아왔습니다. 바벨론이란 지역이 유대지역보다 더 살기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문명도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국에 돌아온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가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더 잘 믿기 위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먼저 성전을 짓고, 회당을 지어 후세를 가르치고, 그리고 나서 자기들 집을 짓겠다고 다짐하면서 돌아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사는 성읍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전체 인구의 십분의 일만 거주하였고, 제비를 뽑아서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백성들은 아직 많지 않았지만, 전국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이들이 일곱째 달에 초하루에 일제히 수문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일제히 모였습니다. “일제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케이쉬 에하드”라고 하여 “한 사람처럼”이란 말입니다. 이들에게 무슨 동원령이 내려져 모인 것이 아니요, 성벽을 쌓고 보니 이제야 말로 영적인 갈급함을 채울 때라고 생각하여 이심전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이 모인 날은 유대인의 종교력으로 일곱째 달 ‘티쉬리월’ 초하루였는데, 민간력으로는 정월 초하루였습니다. 초하루는 ‘로쉬 하샤나’라고 하여 나팔절이었으며, 유대인들의 설날이었습니다. 우리의 달력으로는 9-10월에 걸쳐 있는 달이었습니다. 이 칠월의 초하루는 나팔절이 있고, 10일에는 ‘욤키프르’라고 하여 백성의 대속죄일이 있어, 금식하는 날이며, “수코드”라는 초막절이 있었습니다. 이 초막절은 장막절, 수장절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곡식을 추수하고 감사절로 지키며, 출애굽한 이후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신 것을 기념하여, 집 주변이나 옥상, 베란다에 초막을 짓고 한 주간 15일부터 21일까지 지냈습니다.
에스라는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영적 부흥은 말씀에 있습니다.
에스라가 강단에 서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6시간 정도 말씀을 읽고 해석하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남자나 여자라고 구별하지 않고 말씀을 알아들을 사람은 다 모여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앉을 자리도 없었고, 말씀이 들려질 때에 일어서서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한 해를 시작하였고, 성벽을 재건한 후에 영적인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기도드릴 때는 일어서고, 찬송할 때는 일어서지만, 말씀을 들을 때는 앉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결단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일어섰습니다. 정말 오늘 주시는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일어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때, 그 곳, 그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러시아정교회는 예배당에 본래 의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서 6시간 정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에스라의 전통에 나온 것입니다. 오랫동안 서 있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벽에 기댈 수 있게 하였고, 팔걸이를 하고 지팡이를 짚고 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타쉬켄트의 러시아 정교회 교회당에 가서 예배드린 한 성도의 글이 인터넷에 있었습니다. 예배당 안에는 일요일이 아닌데도 미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엄숙한 예배당 안을 울리는 무반주 합창 목소리가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예배당 안을 울리는 성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천천히 성당 입구 쪽에 가서 이방인의 눈으로 성당 안을 살펴보았습니다. 의자가 없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은 에스라의 전통에 따라 서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롬10:17에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히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율법책을 펴서 읽었는데,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사용하던 아람어를 쓰고 있었고, 제사장 에스라는 히브리어 성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레위인들이 다시 아람어로 다시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 레위사람들의 이름이 나오고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에스라를 도와 백성들에게 쉽게 알려주고 가르치던 랍비들이었습니다.
우리교회 장로님들은 교회학교에 가든지 찬양대에 가든지 남녀선교회에 가든지, 사회에 나가든지 모두다 레위사람 랍비들처럼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우리 교회 원로장로님들이 일 년에 성경을 10독 이상하시고, 14독하시는 장로님이 여러분 계시는데, 금년에는 15독 이상이 나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읽은 성경만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꿀송이처럼 달게 느껴지면서 성경을 펴야 합니다. 성경은 펼칠 때에 성경입니다.
금년은 60주년입니다. 60주년에 성경을 일독하겠습니다. 4독까지 할 수 있도록 1독은 스티카를 달리하였습니다. 1독할 때는 1독 스티커를 붙이시기를 바랍니다.
유명한 전도자 요한 웨슬리의 집에 청년 강도가 들었습니다.
웨슬리는 자기 지갑에 있었던 돈을 모두 끄집어내어 그에게 주면서 “형제여, 이렇게 합시다. 이것은 당신이 강제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합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강도는 “그것이 무슨 차이란 말이요”라
고 대꾸하면서 돈을 받아들고 돌아서서 집을 나가는 강도를 요한 웨슬리는 다시 불렀습니다.
“잠간만 내가 당신에게 줄 선물이 하나 더 있어요. 이 책을 가져가시오.”
강도는 황급하게 그 책을 빼앗듯이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책은 웨슬리가 귀한 손님들에게 전달할 용도로 준비된 잘 포장된 성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년 후 어느 집회에서 웨슬리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 웨슬리에게 이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해 전 목사님의 집을 방문해서 선물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 때 돈과 함께 선물로 주신 성경을 읽고 저는 회개하고 예수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저도 오늘 목사님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때 받았던 돈의 갑절입니다. 이 돈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써 주시고 저를 목사님의 동역자로 받아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아멘이란 뜻은 “진실로”, “확실히”, “과연 그렇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면 백성들은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면서,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임하였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울었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식탁에서 빵을 먹고 있었는데 개가 그 빵을 먹고 싶어서 주인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도 이 개처럼 주님을 사모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라 했답니다. 우리도 루터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 날이 나팔절이요, 여호와의 성일이었습니다. 사실 그 날은 즐거운 날이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기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성일을 성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힘들다고 하여도 주일을 성수하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으로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성일이 되었는데도 울기만 하고, 울어야 좋은 신앙인줄 아는 이들이 있다면 전체를 보지 못하는 신앙이 됩니다. 울어야 할 때에 울지 못하는 신앙도 잘못되었지만, 울지 말고 즐거워하라고 하면 하나님에게 다 맡기고 이제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아버지의 품안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만 신뢰하는 신앙이요, 겸손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는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독생성자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인정하고, 기뻐하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력이 있어, 어떠한 어려운 역경도 뚫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어가던 중에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는 말씀 때문에 감격한 적이 있습니다. 억지나 마지못한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기뻐해야 합니다.
이제 조금 잘 살고 못 사는 것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중에 임재하시고 충만하셔서 날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나를 지배하시고, 성령의 감동이 넘칠 때만이 승리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영적 부흥은 말씀에 있습니다. 영적 부흥은 아멘의 응답입니다. 영적 부흥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시면서 아멘으로 응답하시고, 그 말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그 분을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