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의 사람 기도
이사야 59장 21절
차명권 목사
창조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창조주의 말씀이니라
누가복음 11장에는 이른바 강청기도라고 알려진 비유가 나옵니다. 그러나 강청기도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강력하고 끈질기게 요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강청기도는 복음적이지 않은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만들고, 영적으로 연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깊은 밤중에 한 사람이 친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립니다. 문을 두드리며 떡 세 덩이리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행 중인 벗이 찾아왔지만 먹일 것이 없어서 비록 늦은 밤이지만 친구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떡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친구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누가복음 11장 8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아무리 벗이라고 하더라도 늦은 밤이기에 떡을 내어주지 않겠지만, 강하게 간청하기에 요구대로 주겠노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청기도라고 했고, 이처럼 하나님께 때를 쓰고 강하고 끈질기게 요청하면 요구대로 주신다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왔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는데, 복음이 아니죠. 사람의 지극정성이 아니라, 예수를 향한 믿음을 원하시죠. 강청기도는 일종의 무속적인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간청함을 인하여 주리라, 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번역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간청함은 원문으로 아나이데이아입니다. 신약에서 여기에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아나이데이아에 들어 있는 데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치면 it is necessary라는 뜻입니다. 필연성을 담고 있습니다. 즉, 아나이데이아는 끈질기게 간청한다는 의미보다는 무엇인가를 이제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11장 9절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주님의 약속입니다. 구하십시오. 주실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찾아낼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십시오. 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렸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언약이 성취가 됨으로 인해 예수의 이름으로 법적이고 언약적인 권리가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 여러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합니다. 잘못된 강청기도에 물든 사람은 인간의 땀의 기도가 됩니다. 열심히 그리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들어주신다는 비복음적인 믿음 때문에 기도가 속박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 때문에 치유가 왔고, 공급이 왔고, 변화가 이미 왔다는 안식의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는 기도 가운데 기쁨이 있고 평화가 있고 확신이 있고, 놀라운 생명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우리가 강청하는 것을 두고 보고서 찔끔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왔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여호수아 1장 4절입니다.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말씀인데, 광야와 레바논, 그리고 유브라데 강에서 헷 족속의 땅과 해 지는 쪽 대해까지를 선으로 연결하면 정확하게 십자가 모양이 그려집니다.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고 하신 그 모든 땅이 십자가 안에서 너희에게 이미 주어졌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안에 모든 것이 주어졌습니다. 인간의 강청과 끈질김과 인간의 땀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모든 것을 이루셨고, 십자가라는 법적인 근거를 통해 믿는 성도들에게 언약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다 이루심의 진리 위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루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다 이루셨다는 진리 안에 안식할 때, 그 생명을 흘려 받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말하지만, 치유를 인정하지 않는 그룹들도 있습니다. 죄사함을 믿지만 의롭게 하심을 믿지 않는 그룹입니다. 반쪽 복음입니다. 또한 치유를 인정하지만, 바른 기초 위에서 하는 것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방금 본 강청기도 같은 경우입니다.
다 이루심의 진리 위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비가 많으셔서, 혹은 아이가 조르면 아버지가 장남감을 사주는 것과 같은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치유를 바라는 바른 믿음의 기초가 아닙니다. 모르고 해 왔다면 이제 예수 십자가의 완성된 공로라는 견고하고 확실한 기초 위에 믿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의 완성된 공로를 기초로 예수의 이름으로 질병을 향해 떠나라고 말하십시오.
예수님의 다 이루심으로 인해 우리의 모든 죄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도 모두 용서함을 이미 받았습니다.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정죄가 떠나고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하니님과 화목하게 되고, 예수님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다 이루심으로 인해 믿는 자들의 질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완료형입니다.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결과는 여러분에게 평화가 왔습니다. 여러분에게 나음이 왔습니다. 이미 치유가 왔다는 것을 믿고 안식하며 기도할 때,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재정적인 것도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가난해지셨습니다. 로마 장병들이 예수님의 남은 옷마저 벗겨, 내기를 했을 정도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이렇게 가난하게 되심이 근거이며, 결과는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부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는 진리 안에 안식하십시오. 그리고 그 진리를 깊이 묵상하며, 모든 것을 감사하십시오. 감사의 기도는 모든 완성된 것이 흘러들어오는 생명의 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땅과 땀의 저주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땅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첫 동산, 에덴동산이죠. 첫 동산에서는 아담이 땀에 땀을 흘렸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이죠. 아담은 따의 저주를 받고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수고가 필요했습니다. 땀은 스트레스를 나타내고, 안식 없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짐으로 믿는 자들이 땅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땅의 저주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수고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땅의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믿는 자들은 이제 땅의 저주에서 풀려나 하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앞서 질병과 궁핍의 영역을 넘어 그리스도의 모든 성품과 생명을 소유한 부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영의 사람이기에 영으로 기도하면 땅의 모든 이름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빌립보서 2장 10절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이름이 무릎을 끓습니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신뢰하십시오. 두려움도 복종할 것입니다. 시기심도 복종할 것입니다. 분노와 조급함도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질병과 궁핍함도 무너질 것입니다.
교회의 자리에 대해 깨어 있으십시오.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영적인 권세를 가지고 전하고 기도하며 축복하십시오. 다 이루심의 권세를 여러분이 사용할 수 있는 기도의 영역이 바로 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영으로 하는 기도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그것은 방언으로 하는 기도를 주로 나타냅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는 크게 두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데, 첫째는 방언으로 하는 기도가 영의 기도입니다. 둘째, 새 언약의 영으로 하는 기도가 영의 기도입니다.
지금은 신약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신약시대에 새로운 기도를 약속하셨는데, 바로 영으로 하는 기도이고, 방언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영으로 하는 기도의 근본기초가 바로 새 언약의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9장 2절입니다.
“창조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창조주의 말씀이니라”
새 언약이 무엇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까? 네 위에 있는 나의 영, 그리고 네 입에 둔 나의 말입니다. 즉 영으로 하는 기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영으로 기도할 때 새 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와 마음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는 방언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넓은 범주에서 신약의 기도는 모두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는 기도, 즉 알아들을 수 있는 기도의 경우에도 영으로 하는 기도의 근본 진리 위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방언으로 하든, 아니면 알아들 수 있는 기도로 하든, 그 중심은 바로 새 언약의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중심내용은 무엇인가요? 목사님?
히브리서 8장 12-13절입니다.
“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새 언약의 내용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여러분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진리입니다. 복음의 내용과 사실상 같습니다. 왜 여러분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시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며 기억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죄에 대한 모든 형벌과 심판을 받으시고 여러분과 함께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미 방언을 받았는데도, 입을 열지 않아 방언의 유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아직 방언을 받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구원 받으면 반드시 방언을 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듭난 영의 사람인 성도들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 주시기로 약속한 능력과 지혜가 너무나 풍성합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뭔가 땅의 사람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가 여러분의 영을 성령의 사람으로 깨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방언이라고 모두 새언약에 기초한 것은 아닙니다. 사라진 율법적인 옛언약으로도 방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방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말하는 방언이 아니죠. 또한 성령께서 방언을 통해서만 지혜를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묵상을 하면서, 새 언약의 진리 위에 임재 속에 있다면 하나님은 지혜와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하는 기도의 유익과 명령을 무시하지 마시고, 오늘날 방언을 사라진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하나님의 큰 비밀을 알리시고 이 땅에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을 막아서는 사단의 전략에 동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은 비밀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무스테리온. 영어의 미스테리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무스테리온, 즉 비밀은 구약에서 감추어졌으나 신약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것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기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선포하게 하시고, 그 비밀이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이 되게 하십니다. 영으로 기도할 때, 여러분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큰 비밀이 선포되고 이루어집니다. 이 비밀이 디모데전서에도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얼마나 큰 경건의 비밀입니까? 그 비밀이 뭐라구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비밀의 본체입니다. 우리는 앞서 여호수아에게 약속한 모든 땅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신약에 와서 주님의 다 이루심의 새 언약으로 인해 그 생명이 성도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영으로 기도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비밀들을 말하는 것이고, 그 비밀이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임재묵상을 합니다.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고 시편 1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주일에 설교 한 번 듣고 많은 사람들은 묵상하지 않습니다.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과 보내는 시간이 없습니다. 임재묵상은 그리스도의 임재에 늘 머물게 하여,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행복한 성도가 되게 합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는 임재묵상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여러 설교를 통해 임재 묵상을 전했는데, 그 묵상의 어느 시점이건, 성령께서 여러분을 영으로 하는 기도로 인도하시면 어느 때곤 영으로 하는 기도를 하시면 됩니다. 임재 묵상 자체가 주님과 호흡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새 언약의 일꾼 되기를 원하십니다. 일꾼이라고 하니까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새 언약의 일꾼은 다 이루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못 받던 모든 것에 예수를 힘입어 의롭게 여겨지게 된 이 은혜의 복음의 진리를 묵상하고, 살고, 출산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입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을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사십시오. 율법에 갇혀 있지 마십시오. 죽고 죽는 신앙생활하지 마십시오. 자꾸 땅의 사람처럼 느껴지게 하는 신앙을 버리십시오. 새 언약의 진리로 사십시오. 자유케 되십시오. 땅의 벌레를 먹이 삼아 돌아다니는 닭처럼 살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서, 제공권을 장악하고 높이 나는 독수리처럼 사삽시오. 작은 문제 하나에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주눅들고 하는, 그저 눈 앞의 어둠만 보는 인생에서 벗어나십시오. 여러분은 더 이상 죄로 인해 괴로워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제 생명으로 자라고 성숙하여, 남들을 먹이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는 여러분이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큰 유익을 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