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최고경영자 예수”와 함께하는
신통한 다이어리의 신앙 이야기
로리 베스 존슨 저/송경근 등역
한언
<프롤로그.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오래 전에, 내가 구입했는지 누가 구입해서
선물해 주신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는 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 않았던 때이므로
내가 샀을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방 정리를 하다가 최고경영자 예수를 발견했다.
지금은 품절이 되어서, 구할 수도 없는 귀한 책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지금도 우리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나는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최고경영자일까?
"예수님은 리더로서 그의 사람들을 섬기셨다. 대부분의 종교는 우리가 신을 섬기기 위하여 이 세상에 살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들들 섬기기를 요청하고 계신다고 가르치신다." - 책 속에서
나는 최고경영자가 아니다.
그래서 최고경영자가 사람들을 섬기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최고경영자가 되기가 쉽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할 뿐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면,
언젠가는 나도 최고경영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최고경영자란 의미가 꼭 기업체의 사장인 것만은 아니다.
나 자신을 경영하여
나 자신이 세상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최고경영자가 아닐까.
예수님을 통해 처음 나는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았고
예수님을 통해 처음 나는 섬김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배웠다.
다만, 그 섬김이 실천에 이를 때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 인내를 해야겠지만.
요즘은,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리뷰를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중이다.
책을 다 읽지 않더라도
뭔가 느끼는 게 있으면 그때 그떄 리뷰를 쓰는 중이다.
책을 읽고 써야만 하는 서평과, 리뷰는 다르다고 생각하니까.
예전에는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이 있다.
그래서 지금은 두렵지 않다.
내가 이렇게 마음놓고 리뷰를 쓸 수 있는 것도
그래서 리뷰를 공개하는 것도
두렵지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 삶의 최고경영자가 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기도하며.
<01. 예수님은 ‘나는’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많은 고민을 하셨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
우리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짓고 살았든지간에,
지금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다면 천국에 갈 수 있다.
과거에 나는 전도도 못하고, 신앙생활도 엉망인데
천국은 어떻게 가?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전도를 못하는 것을 탓하지 않으신다.
신앙생활이 엉망이라고 탓하지 않으신다.
다만, 내가 지금 예수님이 마음의 중심에 있느냐고 물으신다.
최고경영자가 되기까지 예수님은
누구를 탓하지 않으셨으며,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40일간의 시험과 연단을 마친후 (이에 자세한 내용은 마태복음 4장 참조)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소명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인식한 '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그의 재능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라는 유혹을 받았으나 그러한 유혹들을 온전히 극복하셨다.
광야에서의 경험 이후에 비로소 예수님은 그 자신을 묘사할 때 '나는(I am)'이라고 표현하기 시작하셨다."
- 책 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부활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수도 없이 갈등하시고 연단하셨다.
'나는'이라고 하신 순간부터 비로소 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부터 매일, 혹은 이틀이나 삼일에 한번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자주
<최고경영자 예수>의 리뷰를 시리즈로 올릴 예정이다.
품절된 책이고 책도 오래되기 때문에 아마도 구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시리즈로 올리기에 딱 좋은 책이라 생각된다.
책의 내용은 최소한으로 올리되,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한, 나의 느낌에 중점을 둘 예정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하하지 않으셨다.
자신을 비하할 이유가 없다. 나는 능력자가 아니다. 나는 잘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사랑받지 못할 존재, 귀중하지 않은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도 "나는"이라고 말하면서, 나의 장점을 떠올린다.
어쩔 수 없어, 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래, 좋아, 라고 말할 수 있는 지금.
나는 나를 사랑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또 모든 이를 사랑하셨듯이,
"나 자신"을 사랑한다.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다.
사람에게서는 그 뜨거운 사랑을 체험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그 뜨거운 사랑을 주실 수 있다.
그 뜨거운 사랑은 단 1%의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나를 향한 기대, 그런 것조차 없다.
오직, 나를 향한 끝없는 사랑.
나는 예수님께 받기만 했다.
그 사랑을 전하는 통로, 그것이 이 리뷰를 쓰게 된 계기가 된다.
교회를 지금 꼭 다녀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이 리뷰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책들을 읽고 싶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에 대한 책들은 나와 있는 것도 있고 앞으로도 출판될 거라 믿는다.
최고경영자이신 예수님.
지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최고경영자란 증거가 아닐까.
성경을 통해서든 책을 통해서든
예수님을 자꾸 만나다 보면, 언젠가는 그분의 사랑을 느낄 날이 꼭 올 것이다.
과거에 교회를 욕하고, 예수님을 질투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내가
지금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니 말이다.
<02. 예수님은 자신을 믿으셨다>
때로는 내가 무언가를 할 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할 수 없지 않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할 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한 번 해보라"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
남자와 여자의 몸이 섞이지 않은 동정녀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하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온전한 사함을 받았다.
예수님은 태어나셨을 때부터 기적을 일으킨 몸이었고, 살아 계셨을 때도 기적을 일으키셨고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기적을 일으키신다.
돌이켜보면, 그분의 도움 없이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분이 계셨기에, 나는 아직 살아있고, 또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일으킨 기적을 믿기에, 나는 또 내게 일어날 기적을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모든 기적을 다 행하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이기도 하신 예수님.
살아서는 인간의 몸이시지만,
하늘에 오르셔서는 하나님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님
그분은 우리에게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 손짓하고 계신다.
또다른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 것이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살아있는 곳이 지옥 같이 느껴진다면,
죽음 이후에 갈 신세계인 천국을 소망으로 품을 것이다.
그 천국이 있다고 믿기에 나는 오늘 행복하다.
무언가를 할 때의 두려움은 천국에 대한 소망과 함께 사라진다.
"한번 해보라"
그리고 못해낼 것 같은 어떤 일을 어느 순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또 기적을 일으키셨구나, 라며 감사의 기도를 한다.
또, 승리했구나.
<03. 내면의 닻>
1.
사람들의 말에, 마음이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 하는 행동들 때문에, 나의 하루가 온전치 않은 적도 있었다.
모든 것이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의 영향으로, 나의 삶을 좌지우지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나의 순간적인 기분을 왔다갔다하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내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지는 않는다.
기분은 금방 회복되며, 내 마음은 평온해진다.
2.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 인간이 주는 영광을 더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2:42~43)
그는 내면의 닻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리더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외부적인 장치로부터 동의를 얻지 않았다. - p.43
내 마음이 평온해진 것이 언제였던가.
내 마음이 사람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음은 언제부터였던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게 되었고, 교회를 빠지지 않고 다니던 어느 순간부터였다.
언제나 불안에 시달렸던 나의 하루가
이제는 만족과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3.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마음엔 아직도 분노가 존재하며,
나는 아직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평온>이란 작은 변화가 내 삶에 일어났기에
언젠가 나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당장은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끊임없이 책을 읽고,
끊임없이 명상하며,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쉬임없이 기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곳>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이라 믿는다.
<04. 절제>
"예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모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추종하도록 결코 애걸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조종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 - p.46
때로는 어떤 일에 지나치게 신경쓸 때가 있다. 절제를 해야 하는데, 라는 마음뿐, 실제로는 절제를 못해 도를 지나칠 때, 그럴 때 예수님을 생각한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예수님 스스로의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서 사람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였다.
"말들, 미혹들, 혹은 우리 자신의 일은 소홀히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할 때 우리의 에너지는 새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 p.47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의 삶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잘못이든, 잘못하지 않든, 그것은 그의 삶이다. 마찬가지로, 내 삶도 간섭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누군가의 간섭이 진정한 관심인 적은 별로 없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간섭은 그냥 간섭일 뿐이다. 대신,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그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이 반드시 관심인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하시는 데에 에너지를 소비하셨다. 예수님을 바라는 자들에게만 관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지 않는 자들에게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사랑"을 주셨다. 그렇게 함으로서 관심없던 사람들까지 관심을 가지게 하셨고, 그것이 위대한 탄생이었다.
역사에서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보일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예수님과 닮은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참견이나 간섭이 아닌 인류애를 지닌 사랑을 보이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힘들다. 우선, 나부터 그렇게 되기 어렵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에너지 원천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 - p.48
나의 에너지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예수님이다.
나를 여태까지 먹여 살리시고, 나를 여태까지 돌봐주신 예수님이 내 에너지의 원천이다.
"아니다. 나는 물러서지 않겠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겠다 (요한복음 18:11-아버지께서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 p.51
고난의 잔을 마신 예수님의 힘으로 나는 지금껏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진 못했지만, 나의 고난에 예수님이 함께 헀으며
또 앞으로 있을 고난의 잔에 에수님이 함께함으로 내가 평안해짐을 감사할 것이다.
<05. 예수님의 축제상태>
"언젠가 열살배기 어린이가 나에게,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온 후 최초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모르는데"라고 대답하며 되물었다. "그것이 무엇인데?" 아이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고 손을 벌려서 앞으로 뛰어오르며 "-짠!(ta-dah)"하고 외쳤다. 예수님은 항상 축제상태에 계셨다." - p.56
매일 불평을 늘어놓는 어떤 사람이 있다. 때로 그의 말은 나를 불쾌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그는 교회에 불만이 생겨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하겠지만,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감사할 것이다. 그가 나를 불쾌하게 해서 내가 더 단련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결국은 그렇게 불만을 쏟아내던 그 사람도 언젠가는 다시 예수님 품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다. 아픔은 나를 더 성장시킨다. 항상, 축제상태에 놓인 예수님께서는 내가 언제나 예수님의 품에서 축제상태에 있길 바라신다.
예수님은 항상 감사해 하셨다.
"죽은 나자로에게 일어나라고 명하기 바로 전에 예수님은 항상 자신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요한복음 11:42~42)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중의 하나도, 그에게 베드로, 요한, 야고보, 마리아, 마르다와 다른 제자들을 허럭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였다. (요한복음 17:6~7)" - p.52
오늘은 비록 힘들지만, 내일을 향한 꿈이 있기에, 오늘 행복했고, 감사했다.
꿈은 계속해서 꾸어야 하기에, 절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은 꿈을 이룬 다음의 일이다. 목표 자체에 목표를 둔다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목표로 향해 가는 과정, 그 과정의 즐거움에 초점을 맞춘다면 꿈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그리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도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 하루의 소중한 경험을 해준 그들에게 감사하며,
내일 만날, 그리고 주일에 만날, 그리고 앞으로 만날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06. 주인의식>
예수님은 "아버지가 소유한 모든 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은하계, 새로 태어난 모든 양들, 그물에 걸리는 모든 고기 등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예수님의 것이었으며,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알고 계셨다. 에수님은 '그것을 주인으로서 소유하셨다' - p.59
지금 교회를 다니기 전에는, 교회에 정착해서 다녀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몰랐다. 왜, 한군데만 다니는 게 좋은 것인지, 왜 교회에 등록을 하고 다녀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가끔 심심하거나, 너무 힘들 때만 한번씩 가긴 했지만, 꾸준히 다니지는 않았었다. 그 방황들이 의미없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 마음의 안정은 찾을 수 없었다. 늘, 신경질적이었고, 늘 마음 속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영화를 봐도 불안하고, 밥을 먹어도 불안하고, 책을 봐도 불안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지금 교회를 몇 년째 꾸준히 다니면서 나는 비로소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을 찾았고, 신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고, 성경을 꾸준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 지금 다니는 교회가 내 집보다 편하고 성경을 매일 읽는 게 즐거우며 교회를 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기쁠 수가 없다. 아니, 기쁠 수가 없는 게아니고 너무 기쁘다라고 말해야 하나. 아뭏든.
예수님이 주인의식을 가지셨듯, 나, 그리고 우리는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주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소중히 아끼고 다뤄야 하며, 진정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런데, 그 진정한 사랑을 베푼다는 것이 쉽지 않다. 어떤 게 진정한 사랑일까? 그것은 아마, 책을 계속해서 읽어가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그 해답을 찾아가기 위해, 오늘도 책 속에 파묻힌다. 내가 주인의식을 가질 때, 비로소 행복이 찾아온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듯 하다.
<07. 정죄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예수님은 정죄하러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도와주러 왔다고 여러 차례 선언하셨다."- p.61
간단히 말해, 나는 누군가에게 죄가 있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므로.
논리는 간단하다.
예수님이 누군가를 정죄하지 않으셨으므로,
나도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정죄한다는 것,
그것처럼 무섭고 끔찍한 일이 있는가.
때로는, TV에서 나오는 범죄자들이
알고 보면, 어이없이, 오보인 경우로 밝혀지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그런 오보들이 사회의 이슈에 편승되어 밝혀지지 않고 묻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보를 진짜로 믿고 그를 정죄하기 시작한다.
과연, 진실이 무엇일까.
정죄하는 사람들을 정죄할 이유도,
범죄자들을 정죄할 이유도 내게는 없다.
예수님의 뜻대로,
언젠가 이루어질 예수님의 천국에
내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의 차이는
정죄를 하느냐 정죄를 하지 않느냐에 있을지도 모른다.
정죄를 하는 것과 정죄를 하는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은 다르다.
정죄를 하는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은 혹시 상처받을지도 모를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지키는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죄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일이다.
내게 피해를 주는, 또는 피해를 줄지도 모를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
그것 자체가 예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정죄하지 않는 것.
언젠가는 그들도 예수님의 품으로 안기길 기대하는 것.
그들과 거리를 두되, 다만, 마음 속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나는 그들을 이 땅에서가 아닌, 저 아름다운 천국에서 만나길 바라본다
<08. 자신을 표현하기>
“예수님은 주변환경이나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에 관하여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셨다. 에수님은 느끼는 방법을 알고 계셨으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셨다." - p.65
그러고 보면, 요즘 나오는 인문서들은 자기표현에 대한 것이 참 많다. 주로,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라는 내용이며, 나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또 남의 마음도 다치지 않게, 그런 표현법을 알려주는 책이 많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창시자는 예수님이라는 이 메시지. 그러니까, 예수님은 느끼는 방법을 알고 계셨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셨다는 이 말씀. 그리고 남들도 똑같이 하도록 도우셨다는 이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보다보면 그런 표현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성경을 속독으로 두번 읽고 지금 정독으로 세번째 읽는 중인데,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다가온다. 너무 내용이 많아서 그런가. 이런 게 전에 읽을 때 있었던가 하는 내용도 보이고, 또 때로는 전에는 무심코 흘렸던 말이 내게 가슴 깊이 박힐 때도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이렇게 리뷰를 쓰고 시를 올릴 수 있는 용기를 낸 것도 성경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아마, 성경을 안 읽었으면 이런 도전을 할 생각도 못 했겠지. 나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 비록, 아직까진 서툴지만, 예수님에게서 이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예수님이 이끄셔서 지금의 교회에 혼자서 우연히 갔다가 눌러앉게 되었다. 마음만은 편안하다.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널리 펼쳐질 날을 기대해본다.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09. 어리석게 보이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게 아니다>
한 젊은 남자가 원탁에 둘러앉은 일단의 은행원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생쥐와 요정 그리고 일곱 난장이로 10억 달러의 제국을 구축하겠습니다. 도와 주시겠습니까?"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는 빌딩 밖에서는 아마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당신도 짐작을 하였겠지만 그 진지한 젊은이는 바로 월트 디즈니였다. 그러나 오늘날 디즈니 팀들은 바로 이 '어리석은 만화가'에 의해 창조된 아이디어와 등장인물들을 관리하고 배치하면서 엄청난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 P.68
예수님은 기꺼이 어리석게 보이셨다. 이 점이 바로 예수님의 성공의 열쇠였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시거나 세금을 내기 위하여 물고기를 낚으시던 것, 포도주를 가져오는 것을 잊으신 것 등은 언뜻 성공요인으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한 버림받은 연인처럼 울부짖는 것, 대부분이 응하지 않은 잔치의 초대장을 내미는 것, 현관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려야만 하는 것 등도 왕이 담당해야 할 직무기술서의 내용은 아닌 것 같다. 이 모든 행위는 아마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오메가 리더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어렴풋하게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은 보실 수 있는 계획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예수님은 기꺼이 어리석게 보이셨다. - PP. 69~70
예배 중에 이런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나만"이라고 불평하지 말라고. 왜 나만 이래야 돼. 그러지 말라고. 내가 조금 양보하고 내가 더 노력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라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는 기꺼이 쓰여질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내게 갈 길을 마련해 주시고 축복해주시길 기다리고 있노라고.
어느 날부터 내 앞날에 대해 걱정하지 않게 된 것은 그 이유였다. 왜 나만 열심히 일해야 돼, 라고 불평하지 않고, 어떤 일에서든지 주어진 그 곳에서 열심히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앞길을 예비하셔 놓으시고 이미 준비된 그 길을 나는 그냥 걷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래서, 나는 그냥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길은 내가 지금까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증명이 된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거나, 불안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교회를 다니기 전, 항상 고통에 시달리고 불안에 시달리고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하냐며, 세상에 불평불만을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분명, 많이 발전했다. 그리고 내 앞길엔 예수님 동행하시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무엇이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면 되고, 다시 걸어가면 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내가 좀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묵묵히, 주어진 길을 걷다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란 사람이 꼭 필요한 곳이 있겠지. 그곳에 사랑이 있든, 그곳에 안정된 직장이 있든, 그곳에 실현된 꿈이 있든. 월트 디즈니의 어리석은 호언장담처럼, 예수님의 어리석은 행보처럼.
<10. 예수님의 길>
(참고 : 이 글을 처음 올렸을 당시의 상황을 토대로 작성된 글이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문 작성날자: 2018년 5월 1일)
1. 블로그를 새로 꾸몄다. 5월을 맞이하면서 봄단장도 할 겸, 새롭게 새로운 마음으로 글도 쓰고 싶었다. 2월보다는 3월이 3월보다는 4월이, 또 4월보다는 5월이 더 나은 삶, 더 나은 리뷰를 쓰기 위하여 다짐하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5월의 첫 타임부터 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한달을 살아가자는 의미로 예수님의 얘기를 먼저 쓴다. 벌써 열번째 올리는 리뷰다. 책을 잘근잘근 씹어 먹듯이 조금씩 읽고 많이 묵상하고 많이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쓰고 있다. 한밤중에 리뷰를 쓰는 것과 같이, 실천은 힘든 일이지만, 그러나 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2.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디에선가 천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떄 당신은 나귀를 때리지 말아야 한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꽃향내를 맡고 당신의 행로와 사명을 다시 생각해 보라"- p.72 (민수시 22:30 참고)
몇 년 동안 백수로 지낸 적이 있다. 미래는 보이지 않고, 당장 밥 한끼 먹을 것이 걱정이던 시절. 가지고 있는 돈은 점점 떨어져 가는데, 취직은 되지 않았다. 면접은 점점 자신 없어지고, 그나마 서류전형조차 토과되기 힘들었던 시절. 그때는 하나님을 몹시도 원망했었다. 나를 왜 세상에 태어나게 해가지고 이렇게 불행하게 하느냐고. 그때는 교회도 싫었다. 누군가의 권유로 억지로 나간 교회는 정말 나를 미치게 했다. 그래도 가끔 한번씩은 교회에 나갔다. 대신, 한 교회로 계속 간 것이 아니라, 이 교회 저 교회를 번갈아서 나갔다. 교회는 싫은데, 교회를 나가지 않는 건 더 불안했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세월이 지난 뒤의 깨달음. 교회는 그대로이고 하나님도 거기 그대로 계셨다. 내가 교회를 배척한다고 해서 교회는 나를 배척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내 마음을 돌보아 주셨다. 원망할 상대가 있었다는 것. 오히려 그것이 내가 버텨온 힘이었다. 나를 나로서 온전히 받아준 교회가 생겼을 때, 나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교회로 나를 인도사힘을 알았다. 그리고 내게 소망을 갖게 하고 꿈을 꾸게 하셨다. 그 소망은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가게 해 주신다. 그것을 알았을 때, 나에게서 원망이 사라졌다.
3. <최고경영자 예수>를 읽으면서 나는 나의 이야기를 주로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인생을 경영하신 예수를 만난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전도를 하기 위한 것도, 교회를 다니라고 강요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먼 훗날에, 내가 죽을 때에, 내가 행복했던 이유, 내가 행복한 이유, 또 내가 행복할 이유를 설명할 마땅한 이유가 예수님 아니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 그 행복함을 내려놓고 죽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아 있을 때에도, 죽기 직전에도,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행복할 권리가 있다. 나는 그 행복을 오늘을 살아갈 것이고, 살아가고 있다.
2018년 8월 18일 덧붙이는 글 : 이제 블로그의 꾸밈새도 어느 정도 정착이 되어 보인다. 대문에 걸린 저 사진들은 나중에 손을 좀 심각하게 봐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일단, <최고경영자 예수>의 리뷰란에 올렸던 글을 삭제하고 포스팅으로 다시 올리고 있으니, 이게 01까지가 아니라, 00까지다. 그러니까, 00까지 다 올린 다음에 다음에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 중이다. 내가 할 얘기는 이미 다 한 것 같아서. 다 올리면, 또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그래서 겸사겸사 포스팅을 한다고 한다면, 조금 성의없다고 욕 좀 들을라나. 다행인 건, 예스 24에서는 욕하시는 분을 못 봤다는 거다. 욕 대신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예스24인 듯 하다. 그리고 거기엔 내 블로그도 포함되어서. ㅎㅎ.. 내맘이다~!
<11. 고상한 예수님>
*고상하다 : 품위나 몸가짐의 수준이 높고 훌륭하다
(리뷰란에 올려져 있던 최고경영자 예수님의 포스팅을 지우고 1부터 11까지 다시 올린다. 11부터 시작해서 1까지로 거꾸로 올릴 예정이다. 약간의 수정과 또 첨부할 건 첨부해서 올린다. 그동안 내가 저질러야만 했던 어쩔 수 없는 죄와 알고도 그래야만 했던 죄들을 낱낱이 회개하면서)
나는 그다지 고상한 사람은 아니다. 세속적이며, 욕심도 있고, 때로는 이기적이까지 하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 입히지 읺기만 하면 된다는 아주 최소한의 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다지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다. 나 자신을 돌보다가 지쳐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이전에는, 내게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났는데,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부활하신 사건은 내게 그런 평화를 선물하시려고 일어난 사건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평화스러울 때, 나를 더 단련하고 그리고 더 단단해지기 위한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다시 또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을 극복함 힘을 기르라는 뜻이라고, 그렇게 알고 준비하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읽고 있는 최고경영자 예수. 한 장 한장 넘길 때마다 새로운 의미들이 다가오고, 그것들을 묵상하면서 리뷰를 올린다. 내가 고상해지고 싶어서.
성경에 나오는 고상한 요구들이 이 책에 나온다.
- 아브라함의 요구 : 당신을 따르도록 도와 주십시오.
- 모세의 요구 : 당신의 백성들을 자유롭게 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 다윗의 요구 : 나로 하여금 우리 백성들을 위협하는 골리앗을 쓰러뜨리도록 도와주십시오.
- 에스더 : 나로 하여금 이 백성들을 구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 솔로몬 : 저에게 이 백성들을 통치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 이사야 : 당신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정결한 입술을 주십시오.
- 베드로 : 당신의 양들을 먹일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 예수 : 저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도록 도와 주십시오.
공통점이 하나 보인다. 모두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달라 하지 않았다는 것. 백성을 위하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다는 것. 고상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누군가를 위하는 척 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을 보여주느 것. 그게 고상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도 고상한 삶을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나의 결심을 도와 줄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는다. 나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내게는 조금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나의 고백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하겠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으니 그건 뭔가 할 일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것이 나만을 위한 삶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하나님께서 이루어가는 세상에, 나도 동참할 것읻. 고상한 것을 구하신 예수님처럼, 나도 고상한 것을 구해 본다.
당신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초심을 잃어간다는 건, 슬픈 일이고, 애초에 다짐했던 많은 것들이, 퇴색되어 가는 것들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글을 다시 교정을 보면서,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애초에 내가 "신통한 다이어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이름을 짓게 된 이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
<12. 두려움을 무릅쓴 사역>
1.
리뷰로 쓰던 내용을 포스트에서 쓰기로 했다. 아무래도, 리뷰로는 성격이 안 맞는 것 같아서이다. 아직 블로그를 운영한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시행착오가 많다. 블로그도 며칠만에 확 바뀌었고, 이제 좀 자리를 잡아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예수님을 얘기하면서, 내 경험도 얘기하는데, 쉽지가 않다. 쉽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음 소망 사랑>카테고리에서는 예수님에 관련된 책을 읽고 리뷰보다는 묵상한 내용을 주로 할 예정이다. 그리고 <시작과 끝> 카테고리에서는 성경구절을 올려볼 생각이다. 흐흐흐. 나 뭐 하는 거니?
2.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도 이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담대하게 그의 사형집행관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창자를 끓는 듯한 아픔을 느꼈으며 땀이 피가 될 떄까지 우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상황을 돌파하셨다. 비록 예수님은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것을 대면하셨다. " - p.87
블로그를 꾸미는 것도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정성을 많이 들여야 하고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고, 책을 읽고 리뷰를 쓸 때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건, 목표가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엔 약간의 두려움도 동반된다. 삶에는 항상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굳이 애써서 맞닥뜨리지 않는 건,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사역처럼 나도 무언가 감당할 사역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역이 꼭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역을 행하는 길은 행복한 길이고, 행복을 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내가 꾸는 꿈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고 내가 바라보는 목표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어떤 지점이 되는.
그 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하리라“
<13. 가지고 있는 자원>
"예수님의 창조적인 능력은, 믿음의 에너지와 자신이 실질적으로 소유한 자언들에 대한 예리한 파악에서 기인된 것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우주먼지의 구름 속에서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도 신앙을 가진 육신인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탄생하혔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원들을 알고 계신다." - p.90
"어떤 젊은 의사가 스포츠의료기술을 요하는 환자를 대상으로 병원을 개업했다. 그는 수천 달러를 들여서 2주에 걸쳐 신문에 광고를 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따. 어느 날 그가 접수계원에게 자신이 수완이 없음을 하소연하자 그녀는 당장 "나의 남편이 이 지역 조깅협회 회장이에요. 다음 주에 그들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지 않으실래요?" 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바로 그것을 찾공 ㅣㅆ었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의 병원은 그가 아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그들이 아는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의 자원들을 속속들이 알고 계셨다" - p.91
내가 갖고 있는 자원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이 자원이 사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큰 자산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무엇보다, 나는 너무 건강하다. 비실비실 댄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픈 곳이 거의 없다. 하나도 안 아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건강한 편이다. 그래서 책을 읽을 수 있고 리뷰를 쓸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다. 그것만큼 큰 자산이 있을까. 그럼으로 인해, 나의 강점들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가 있다. 시간이 내게 주어지면, 리뷰를 쓰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쓴다. 예수님에 대해 쓰는 이유. 잘 모르겠다. 그냥 쓰고 싶다. 엔도르핀이 마구 돌아서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쓰고 싶다.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쓰고 싶어지면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쓰고 쓰고 싶어지면 밤에 좀더 늦게 자더라도 쓰게 된다. 책을 읽고 싶어지면, 잠을 일찍 깨게 되고, 책을 읽다보면, 벌써 잘 시간이 지난다. 건강이 나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찬송을 부른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그것 뿐예요.
<14. 비가 그치지 않는다면>
1.
내가 가는 지금 이 길이 과연 맞는 것일까.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운명이라고 느껴지는가.
"예수님은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8:14) 예수님은 비록 그의 여정의 모든 상세한 내역을 다 알지는 못하셨으나 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감지하셨다. 폭풍이 일어나 그의 배가 물에 잠기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주무시고 계셨다. 심지어는 권세있는 자들에게 넘겨졌을 때에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가 하늘에서 권한을 받지 않았다면 나를 어떻게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9:11). 그러한 일도 이미 계획의 일부분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 p.92
나는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는다. 처음부터 그것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아주 "불행"하다고 느꼈던 순간에는 그것이 계획의 일부라고 믿지 않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했다. 정말, 당신이 있는 것이냐고. 있으면, 증거를 대보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쳐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퇴근시간은 2시간 남짓 남은 시간인데, 비가 오다니. 그때 난, 무슨 이유에서인지 만약 이 비를 그치지 않는다면, 당신이 있는 걸 믿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폭탄선언을 했다. 당신을 다시는 절대 믿지 않겠다는, 그야말로 굳은 결심이었다.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아 보였던 그때, 퇴근하니 비가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아 그때. 만약 비가 내리고 있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작 비 가지고 그런 서원을 한다는 것이 우스워 보이기도 하겠지만, 가끔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힘이 하나님께로 이끌기도 한다. 만약 그때 그 서원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교회를 다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세상은 불행한 것이라며, 왜 나같은 놈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냐며 여전히 세상에 대한 원망을 뿜어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어려움에 처한 나를 버려두지 않으셨고, 그렇게 믿음을 가지게 된 이후에, 지금까지, 아주 조금씩이지만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오늘 나는 운명처럼, 리뷰를 쓰고 글을 쓰며, 늦은 공부도 조금씩 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 써 놓았던 글들을 다시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며, 그리고 내가 쓸 글들, 내가 써나갈 미래에 희망을 본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이 길을 가게 하신다. 나는 이 길을 걸어갈 용기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길을 걷게 할 용기를 주신다. 예수님께서 베푼 사랑이 오늘날의 나에게 희망을 준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절망에 빠져 있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는, 그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희망을 가지게 되기를 바라면서
<15. 사소한 것들이일지라도 무시하지 않는 예수님>
'비록 사소한 일들로 이루어진 하루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 누가 감히 그 하루를 무시할 수 있는가?' - 구약성경 어딘가
"창의적인 사람은 결코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첫번째의 붓놀림, 종이에 쓴 첫 단어, 예상되는 고객이나 친구에게 하는 첫번째 전화......
예수님은 수백 만의 사람들이 복제하고 총판권을 가질 수 있는 운영매뉴얼을 만들기 위하여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셨다. 그는 서둘러서 앓아 누워 있는 어린 소녀를 찾아가셨다. 단지 그 소녀를 낫게 하겠다는 일념에서.
예수님은 어린 소년이 가진 떡 한 덩어리가 수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아셨다.
예수님은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p.102
2018년 전에 우리에게로 오신 예수님. 사소한 것 하나로 시작된 예수님의 섬세함은 오늘날, 우리에게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가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사소한 것 하나가 예수님을 찾게 만들며, 사소한 것 하나가, 새로운 인생을 살게도 한다. 사소한 어떤 것에서 비로소 시작이 되며, 사소한 어떤 것으로 비로소 마무리가 된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 사소한 것 하나를 놓치면 엉뚱한 오해를 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자세하게 꼼꼼하게 천천히 읽을 필요가 있다. 속독으로 읽으면 내용이 별로 들어오는 것이 없다. 좀, 천천히 읽더라도 천천히 읽는 것이 좋다. 천천히 읽기에, 구약은 조금 부담스럽다. 신약성경의 예수님을 먼저 읽어나가는 것이 좋다. 적어도 나는 그랬으니. 신약성경을 읽다보니, 벌써 이렇게 많이 읽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부분을 읽은 적이 많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그냥, 그날 그날 아무데나 펼쳐서 읽어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성경을 전체적으로 꼼꼼히 읽으니, 아, 이건 이런 얘기였구나, 하는 부분이 보인다. 사소한 것들을 놓치면 성경을 곡해할 수도 있구나, 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성경을 읽는 재미는 사소한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행적,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베드로의 회개,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들어 쓰시는지를 볼 수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뜻깊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성경을 온전히 읽으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성경을 본다.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 내가 아닌 아무것도 아니었던 삶이, 내가 있으므로 이제는 의미있는 삶이 되어버린 지금, 나는 오늘 또 하루,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16. WOWSE>
WOWSE : With or Without Someone Else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간에)
- 사실, 내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별다른 목적은 없다. 다만, 내가 적적할 때 예수님을 얘기함으로서 내가 위로받고,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간에 예수님은 헌신적이었으며, 눈치를 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하셨다. 그 삶을 내게 적용시키니, 일하는 게 행복하고, 책 보는 게 행복하고, 공부하는 게 행복하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억지로 일을 할 때는, 항상 불행하다고 느끼고, 집에 와서도, 그 불행의 여파가 계속되었지만, 이제는 삶 자체를 즐기면서,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고, 어디에 가서든, 항상, 즐겁게 뭔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다리가 아프기도 하고, 팔이 아플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잠시 잠깐! 일 뿐. 아픔도 오래지 않아 지나가곤 한다.
최고경영자 예수를 계속해서 가끔 들쳐보고 볼 때마다 포스팅을 남긴다. 한꺼번에 많이 읽는 것보다는, 하나씩 음미하면서 그 뜻을 나에게 적용시키고,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음미해보는 이 시간이 정말 보람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간에, 이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시는 방식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습 그대로 우리 모두가 볼 수 있게 오신다고 하셨다. 이미 예수님은 태어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서 그 사명을 다하셨기 때문에,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의 모습을 살아서는 못 만날 수도 있다.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시는 순간은 불행한 종말이 아니라, 행복한 축복의 시간이다.
"예수님은 축복하러 오셨지 저주하러 오지 않으셨다. 치유기하기위하여, 생명을 가져오기 위하여 그리고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가져오기 위하여 오셨다. 굽은 곳들을 곧게 펴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들의 눈물과 두려움을 씻어 주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은 축복이 되기 위하여 오셨다."
사람에게 기대어선 채우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사람에게 기대는 순간, 실망하는 부분이 생길 것이고, 그 실망은 나를 힘겹게 한다. 애인이든, 부부이든, 친구든,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채워주신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간에 나는 언제나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우울해질 때, 내가 불행해질 때, 예수님을 찾는다.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을 언제나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17.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하셨다>
"자신이 하나님과 이어져 있다고 천명하신 예수님은 창기, 도둑 그리고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어울리셨다. 당신은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들이 성직자계급을 무척 당황하게 만들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체성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의 주체성과 힘의 기반도 위협을 받았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하셨다. 예수님은 산들을 움직일 수 있었으며, 죽은 자들을 살릴 수 있으셨으며, 병든 자들을 고칠 수 있으셨으며, 앉은뱅이를 걷게 할 수 있으셨으며,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부들과 창기들을 그의 형제요 자매들이라고 부르셨다. 에수님은 그러한 '거룩하지 못한' 자들을 용납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너무 많은 사랑의 빛을 발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예수님께로 몰렸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그들 자신에 대하여 안심할 수 있었다." - p.224-225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오해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늘 친절할 것이고, 인성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성이 뛰어나지 않으며, 그닥 친절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유가 행복하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교회에서 위안을 얻고 싶었다. 내가 친절해야 할 필요도 없었고, 내가 못 났다고 탓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좋았다. 예수님을 알아가게 되면 될수록, 예수님은 못나고 어리석은 나를 철저하게 돌보신다. 사람들에게 기대고,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찾았던 때에는, 항상 뭔가가 부족했다. 그 부족함을 채우지 못했고, 결국은 불행한 삶 속으로 나를 내몰았었다.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들은 항상 친절한 사람들도 때론 있다. 하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이 되기까지는 아마도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친절하다. 그 친절한 예수님은 성경에 있고, 내 마음 속에도 있다. 그리고 떄로는 예수님을 얘기하는 많은 책들에도 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알수록 예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지금 이 글을 보고, 너 한번 당해 봐라, 하고, 어떤 이상한 계획을 세우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그들의 이상한 계획에 휘말려서 당할지도 모르고, 만약 그래서 뭔가의 계획에 당한다면, 당한 뒤에는 그들을 욕하고 미워하고 저주할지도 모른다. 나는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도 사랑하지만, 그렇게 이상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 나쁜 짓을 저지르는 범죄자들도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랑이 언젠가는 그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라 믿는다. 예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동등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왜 범죄하는 사람들을 벌하지 않느냐고 따질 이유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저주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아주기 위해 오셨다. 그 사랑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내가 어떤 사람이든, 예수님은 사랑하신다. 지금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과, 또 보지 않는 그들도. 나는 사랑을 잘 모르는 하나의 사람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하셨다.
<18. 예수님은 사람들을 섬기셨다>
"섬김의 원칙에 따라 진정한 리더와, 단지 영예를 추구하는 자가 구별된다. 예수님은 리더로서 그의 사람들을 섬기셨다. 대부분의 종교는 우리가 신을 섬기기 위하여 이 세상에 살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섬기기를 요청하고 계신다고 가르치신다." - p.267
나는 조그만 교회에 다닌다. 내가 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이 교회에선,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봉사활동을 강요하지 않으며, 내가 예배를 참석하도록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예배를 참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준다. 내가 무언가를 해 주지 않는데도, 늘 따뜻하게 맞아 주시는 분들이 있고, 내가 뭘 해주지 않는다고 따지는 분도 없다. 그러면서, 진정한 섬김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나 자신이 성실한 신자는 아니기 때문에, 사실 이 공간에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다만, 내가 아는 한도에서, 최대한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라 믿고 글을 써 나가고 있을 뿐이다. 나 자신이 누군가를 섬기려 애써본 적은 없으며, 섬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의 교회를 다니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섬김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큰 교회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섬김의 마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김을 하려 오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즉 바로 나를 섬기시는 것이다. 그 섬김의 마음이 내게 전해져 온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난 듯 하다. 내가 교회에서 멀어지려 할 때마다 예수님은 나를 "섬김"의 마음으로 돌보아 주셨음을 느낀다. 섬김을 받을 때, 나도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으니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섬김의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그 소망이 내일의 나를 이끌어갈 힘이 될 것이라, 나는 굳게 믿으며, 성경의 한 페이지를 또 펼치고 있다.
<19. 예수님은 망가지기 쉬운 물건들을 만지셨다>
"예수님은 항상 밖에서 표적을 찾으면서도 조그맣게 이는 미풍은 놓쳐 버리는 세대들에게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이 씻겨질 때와 장소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곳에서는 사자가 양들과 함께 뛰놀게 된다.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망가지기 쉬운 것들을 알고 그 진가를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적인 기계 - 권력이라는 기계, 굶주림이라는 기계, 법칙으로 되돌아가자는 기계, 손익을 따지는 기계 - 들은 틀림없이 계속 돌아가면서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훌륭한 리더라면 그러한 유형의 기계들과 그러한 기계에 연료를 공급하는 사상을 존중할 것이다. 그러나 리더들은 또한 항상 망가지기 쉬운 것들을 찾고 만져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망가지기 쉬운 것들을 만지셨다."
- p.242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항상 예수님을 찾게 된다. 성경을 읽게 되고, 예수님께 마음으로 질문을 한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다. 어떤 마음이라도 예수님은 다 받아주시기에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마음 속의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성경을 보거나, 찬양을 듣게 된다. 마음이 평온해질 때까지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덧 내 마음의 풍랑이 잠잠해진다. 나는 망가지기 쉬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한다. 예수님을 찾지 않으면, 나는 쉽게 무너지기 쉬운 사람이다. 무너진 마음, 무너진 감정이 두려웠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암담한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럴 때 ,예수님은 언제나 손짓하며 내게 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웃음이 마음속에 떠오르면 나는 비로소 웃음을 다시 찾는다. 성경을 읽거나, 찬양을 듣다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자주 나온다. 그 구절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 삶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오늘 하루 행복했으면 되었다. 내일 일은 예수님께 맡기자. 그래서 나의 불안도, 행복한 불안이 되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예수님은 항상 우리를 돌보고 계시니까. 망가지기 쉬운 나의 마음도, 예수님이 만져주신다.
<20. 나의 여린 마음, 단단하게 붙잡아주시니>
"우리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대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왜 하필이면 나죠? 주님?"이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연극에서 늙은 테비가 불평하는 것처럼,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임을 압니다. 그러나 일정 기간 동안만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선택하실 수는 없나요?"라고 절규한다.
그러나 풍부한 리더십과 성숙의 열쇠는 "왜 내가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는 의지이다. 내 친구 캐서린은 끔찍한 비행기 폭발이나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누군가 죽어가는 현장을 텔레비전에서 방송할 때면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께서는 사고를 당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셨단 말인가?"라고 묻곤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만 축복을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린다'는 생각이 "그러면 에수님은 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왜 그렇게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나?"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과 악에 대해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우리 가운데 아무도 파악할 수 없는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고 동참하겠다는 의지가 영적 리더십의 한 상징이 된다. - pp.172~173
나는 아주 여린 사람이다. 그렇기에,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무너지곤 한다. 무너지려는 나를 붙드는 건, 예수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 그 한 마디는 물론, 성경 속에 있고,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서적에 있다. 하나님의 계획을 나는 알 수 없다. 세상에 일어나는 끔찍한 사고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긴 하지만, 그 속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른다. 모르기에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뭔가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뭔가가 느껴지지 않을까.
아마도 예수님의 궁극적 행동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을 떠나신 것일 듯하다. 30평생의 준비와 단지 3년 동안의 공생애(실천과 제자 훈련) 후에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고찰하고서 숨을 내쉬면서 말씀하셨다. 그러고 난 후 그는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 두셨다.
어떤 기획을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관계를 맺을 때 당신이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면, 남은 유일한 것은 그냥 놓아 두는 것이다.
- p.176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보고 나서, 란 말이 포인트인 듯하다. 때로는,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안 해 놓고, 최선을 다했다고 합리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엔,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되겠지. 그러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면, 이제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때. 그건, 나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놓아두는 연습을 한다. 나의 마음을 놓아두고, 나의 결정을 놓아두고, 나의 삶을 놓아두는 연습.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므로, 나머지는 기다리는 일. 하나님의 놀라운 뜻은, 내가 모른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누군가는 좋아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싫어하겠지. 댓글도 거의 달리지 않는 이러한 포스팅을 계속하는 건, 어쩌면 시간낭비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팅을 계속해 나가는 건, 반드시 어딘가엔 이 글을 보고, 삶의 희망을 다시 찾는 이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역할에 대해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일 뿐이고, 그 이후의 결정은 하나님의 몫. 나의 여린 마음도 단단하게 붙잡아주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누군가의 마음도 단단하게 붙잡아 줄 것이라고,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게 해 줄 것이라고 나는 단단하게 믿는다.
<21. 예수님은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라는 구절을 최대한 성실하게 지키는 부부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어느 한 쪽이 먼저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간의 욕구와 잠재력이 변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
- p.299
아주 오래 전부터, 수술 후유증으로 시작된 등의 통증은 요즘 들어 부쩍 심해졌다. 일할 때는 괜찮다가도 집에만 오면 다시 도지곤 한다. 조금 움직이면 나아지는 듯 하지만, 잠이 조금 오래 되면, 또 다시 통증은 시작된다. 예전에, 등이 아파서 엑스레이를 찍어 본 적이 있지만, 별 다른 이상 소견은 없었다. 그래서 별 다른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조금 스트레스를 받거나 약간 무리를 하면 아픈 걸로 보아 과로가 원인이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별다른 약은 없다. 아프면 조금 쉬고, 그러면 나아지니까. 쉬는 게 최고다. 때로는, 운동을 하면 나아지기도 한다. 아마, 이 통증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떠나지 않을 것 같다. 나를 지독히 사랑하는 예수님처럼.
어떤 진실에 도달한다는 것이 때로는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것일 때가 있다. 진실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 받는 충격과 허탈함이 견딜 수 없었기에, 오히려 진실을 부정하고 외면해 왔다. 에수님께서는 이미, 나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셨는지, 그 충격들을 조금씩 완화시켜 가면서, 지금의 나로 성장하게 만드셨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어디까지 파악하고 계시는 걸까. 사실, 따지고 보니, 삶은 놀라움의 연속으로 가득 차 있다. 기적같은 삶은 우연이라는 명목으로 내게 다가와, 내가 어려울 때, 내가 힘들 때, 내가 곤란할 때는, 늘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다. 내 곁에 아무도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 곁이라는 게, 조금 멀리 떨어진 곁이긴 하지만, 곁의 마음은 늘 나의 가끼이에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 예수님을 욕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신다. 나는 그러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랑을 실천하셨고, 실천하고 계신다. 지금도 에수님은 하늘 나라에서 나를 지켜보시면서, 내 가는 길을 밝혀놓고 계신다. 내가 아파도 웃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언젠가 나의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치유해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가끔, 힘들 때도 있고,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의 고통에 몸부림치기도 한다. 그럴 때, 치유의 글을 쓴다. 역시, 예수님에 대한 글이다. 예수님만이 내 마음의 고통을 온전히 알아주며, 내 마음을 완전하게 어루만져 줄 수 있다.
조금은 다른 추억, 조금은 다른 만남, 조금은 다른 시간으로 오늘을 견뎌낸 나에게, 에수님의 마음이 전해져온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듯, 나도 끝까지 사랑해 주실 것을 믿는다. 그 믿음이 사랑이 되어, 아주 멀리까지 퍼질 것을 또한 바라고 소망한다.
<22. 한번에 한 계단씩 – 그 끝은 천국>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확실하셨던 예수님조차도 하루에 한 차례씩 훈령을 받아야만 하셨다. "내가 예루살렘에 가느냐 마느냐?" 예수님은 어ㄸ너 때는 기다리라는 훈령을 받으셨고, 또 어떤 때는 가라는 훈령을 받으셨다.
- p.153
내가 예수님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 그러니까, 조건이 단 하나였다. 처음에 나도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아마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나는 착하게 사니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착하게 산다 해도, 언제 어느 때 사악한 마음이 생겨날지 모른다. 그럴 때, 예수님을 떠올리면, 죄를 짓게 되는 그 순간이 몹시도 후회스러울 때가 많다. 이 쯤은 괜찮겠지, 이건 아무도 안 보는 거니까 괜찮아, 하고 알게 모르게 지은 죄는 나에게도 많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그다지 없을 때에는 그것이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은 작은 죄를 지어도, 곧 후회를 하게 된다. 마음 속에서 그것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최대한 죄를 짓지 않고 살려 노력하지만, 살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럴 때, 예수님은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려고 이끄신다. 후회하고, 곧 잘못했다, 하면, 받아주시곤 한다. 그러면서, 죄 짓는 숫자는 점점 더 줄어만 간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였던 것이다. 내가 지을 수 있는 큰 죄를 미리 막아주시는 예수님. 그렇게 함으로서 천국으로 나를 이끄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아니라면, 나는 아마 이미 수많은 유혹 속에서 흔들렸을 것이다. 쉬운 길, 편한 길만 가도록, 나를 내버려 두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 이 글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고, 아주 큰 불행에서 지금 허덕이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에 들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어떤 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살면서, 나는 또 어떤 죄를 짓게 될지 모른다. 그것이 순간적인 욕심일 수도 있고, 순간적인 충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예수님을 떠올린다면, 적어도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예수님은 나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내가 되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살 길이다.
<23.예수님은 마음 속에 오로지 호의만을 지니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양들이나 자녀들이라고 부르셨지 결코 벌레들이라고 부르지 않으셨다. 나는 한때 우리를 죄 짓는 벌레들이라고 말하는 설교자 때문에 그 교회를 나온 적이 있다. 나는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벌레가 어떻게 죄를 짓는가? 게다가,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감히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나 가치가 없다고 말한 그 설교자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은 우리들 속에 있는 최선의 부분만을 추정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미래의 왕이나 여왕으로 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들이 보다 더 잘하게 될 것을 알고서 우리들의 부족한 행동들에 대해 재빨리 변명해 주고 용서해 주셨다. "그래, 베드로야. 네가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 그러나 너는 나의 반석이 될 것이다. 그래, 마리아야. 너는 너의 남편이 아닌 남자들과 살아 왔지. 그렇지만 너는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우리들 속에 있는 최선의 부분만을 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들 속에 있는 최악의 부분을 처리할 수 있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우리들 편에서 기꺼이 하고자 하는 의욕만 가진다면, 모든 것이 올바르게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아셨다. 예수님의 손에 난 상처도 치유되었을 것이다.
- pp.286~287
가끔, 교회를 다니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봉사활동을 전혀 안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주려고 하는 순간을 마주할 때이다. 어쩌다, 한번이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데, 지속적으로 뭔가를 주려 하니,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교회를 빠질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주일예배라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니는 것. 그것을 열심의 기준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만이라도 하지 않으면 왠지 불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끔, 전도를 하는 사람을 마주할 때, 무서운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집착을 전도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다. 마치, 안 믿으면, 넌 죽어! 하고 협박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협박과 전도란 다를 텐데.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대형 교회의 목사를 마주한 적이 있다. 마치, 내가 못 올 데를 왔다는 듯이, 내게 뭐라 했는데, 그게 나의 가슴에 박혀 목사를 불신한 적이 있다. 그 목사에게 나는 어쩌면, 벌레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나는 그 교회를 떠났다.
교회를 아예 다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를 가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 이 교회 저 교회를 나가 보았다. 어디에서도 안정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늘 불안했고, 늘 아팠다. 그러다가 우연히 가게 된 지금의 교회. 오전예배를 다른 곳에서 드렸지만, 뭔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 오는 길에 지금 다니는 교회에 우연히 오후예배가 있는 걸 보았고, 그렇게 처음으로 오후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다. 재미있었고, 만족했었다.
그렇게 한 교회를 꾸준히 나가게 되었다. 한 교회를 이렇게 오래 다니긴 처음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마음의 안정은 찾았는데, 머리 속은 오히려 혼란스럽다. 계속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건지, 앞으로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회를 다니면서 얻은 게 있다면, 나는 벌레같은 존재가 아니란 건 확실히 알게 되었다. 가족같이 소중한 사람이야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지금의 교회에서만큼은 벌레 같은 존재가 아니란 걸 느낀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이미 밝혔듯이, 교회를 열심히 잘 다니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처럼, 교회를 다니면서, 계속 다녀도 되나, 교회를 다니면 정말 좋은 걸까, 하는 고민을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건 알겠는데, 교회는 왜 다녀야 하냐고! 이런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교회를 다니면서 느낀 것들을 [최고경영자 예수]를 통해서 밝혀본다.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는 나는 모른다. 그저 지금처럼 주일예배 꼬박꼬박 참석하고 또 주면 주는대로 받고, 그냥 성경 열심히 읽고 그게 다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 속의 혼란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나 스스로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배를 통해서, 내가 가야할 길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예수님은 고민하는 나를 이쁘게 보실 것이며,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람을 벌레처럼 보는 사람도 있고, 받들어 모시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어느 누구도 벌레로 보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결코 교회에 가는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을 것 같다.
나도 역시, 내일 교회에 가게 되겠지. 가끔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무거운 마음으로 가는 때도 있지만, 그것 역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마음의 무게이기에 기꺼이 지고 간다. 그러나 대부분은 가벼운 발걸음이다. 내일도 그 발걸음이 가볍길 바라며,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오늘 약간의 고개를 숙인다. 내 삶의 무게가 가볍든 무겁든,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은 결코 가볍지 않으므로.
<에필로그 최고경영자 예수 포스팅 후기>
리뷰에 올렸던 글을 폭풍같이 포스팅란에 다시 올렸다. 갑자기 팍팍 올린 이유는 새롭게 새로운 책으로 포스팅을 [믿음 소망 사랑] 카테고리에 올리고 싶기 때문이다. 아마도, 9월부터 올릴 것 같다. 어떤 얘기를 어떻게 풀어갈지는 아직 고민 중이다.
최고 경영자 예수를 다시 올리면서 느낀 점은, 나의 블로그도, 나의 글도 참 많이 발전했구나, 하는 걸 나 스스로 느꼈다는 것이다. 풋풋한 나의 글들을 보면서, 부끄러운 마음 한가득이지만, 이 포스팅을 보고 누군가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해 부끄러운 글이라도 다시 올려보았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또 누군가가 만나 같은 천국에서 만난다면, 무척이나 반가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주 신앙생활을 잘 하거나, 정말로 교회를 열심히 나가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런 수준의 나같은, 그러니까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예수님께서는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싪었을 뿐이다. 그 이유는, 내가 과거에 어떤 교회를 나가면서 절망했던 것이 마치 교회를 아주 열심히 나가지 않으면, 넌 지옥행이야, 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주일예배, 주일 오후 예배, 주일 저녁 예배까지. 그리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해야하고 모임도 열심히 해야 하고....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이 모든 걸 빠지지 않고 나가는 사람도 물론 있다. 하지만, 주일예배만 드리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서 주일예배를 빠지는 사람도 있다. 모임을 못할 수도 있고, 봉사활동을 하기 싫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안 하면 "죄책감"을 심어주고 또 아주 안좋게 보기도 하기 때문에 교회 가기가 싫어지는 것이다. 물론, 교회는 열심히 나가는 것이 좋다. 그러나 교회를 열심히 안 나고 열심히 활동 안 하는 것이 천국에 가지 못하는 "지옥행"의 진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예수님께 도와달라고외치는 나에게 사랑을 부어주셨다. 예배를 열심히 참여한 것도 아니고,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인격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베풀지도 못하는 나에게도 예수님은 충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실 사랑은 얼마나 클까를 짐작해 보시기 바란다. 예수님께서 베푸는 사랑의 크기는 그 어떤 것도 담을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글을 많이 보아 주셔서 감사하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직접적 증명은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