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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8일 토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죽는 게 두렵습니다.
아주 가끔 등산을 가면 산을 오르며 묵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다가 흔하게 뱀을 만나기도 합니다. 꽃뱀은 화려하고 아주 빨라서 풀잎을 헤치는 스르르 소리가 더 무섭고 까치 독사는 정말 겁이 납니다. 가을의 무성한 갈대밭에서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달려오면 급히 몸을 피해야만 합니다. 한 번은 사정을 두지 않고 쫓아오는 바람에 험한 산길을 얼마나 달려 내려왔는지 모릅니다. 어릴 적 어느 날엔 낫을 들고 꼴을 벨 때인데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돼지들이 좋아하는 풀을 부지런히 베고 있는데 물뱀 한 마리가 비를 피해서 풀 섶에 웅크리고 똬리를 틀고 있다가 그만 낫질에 놀라서 느닷없이 내게 달려들어 내 다리 정강이 위를 타고 기어오르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겁을 하였는지 낫으로 물뱀을 떼버린다는 것이 왼손 검지와 정강이를 찍어서 무척 고생 했습니다 그때는 파상풍과 같은 병을 ‘쇳독’이 걸렸다고 다들 무서워하였지만 뱀독은 더 무서웠습니다. 사실 내 다리를 타고 오른 물뱀은 독이 없는 것인데도 나는 그 후로 뱀은 아주 무섭게 느껴져서 발견즉시 쫓아버리고 때리고 쉽게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뱀을 무서워하며 두려워하는 것은 뱀이 독을 가지고 있어서, 독이 온 몸에 퍼지면 곧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지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건물을 신축하거나 다리를 신축할 때나 모든 토목 건축공사에서는 내진(耐震)설계와 시설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죽음을 위협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죽을 수 있는 환경과 처지를 더 두려워합니다. 불치의 병이나 갑작스런 육체적인 고통을 두려워하고, 체면이나 내 환경에 닥쳐오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기도 합니다. 요즘도 병원에 가서 암 검진을 받으면 간이 콩알만 해집니다. 의사선생님께서 전이된 것이 없다는 판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걱정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병원 문을 나서면서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자유로운지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순사들이나 헌병들이 강제로 고문을 하거나 사람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한 것 등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칠 일이며, 그런 일을 자행한 사람들의 잔인성에 대해서 더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렷을 때 '순사가 온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칠 정도였습니다.
혈액검사를 하고 암 수치가 조금이라도 높게 나오면 태연한 척 하면서도 걱정이 가득합니다. 3년 전에는 췌장암 수치가 너무 높게 나와서 3년간 치료도 받고 다른 요인으로 암수치가 높았다고 판정을 받을 때까지 마음 고생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또 다른 데에 암수치가 높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병원을 다니면서 관찰하고 검사를 받으며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아닌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지만 사실은 지금 죽는 게 두렵습니다. 그래서 병원문턱이 닳도록 찾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사실 일을 별반 두려워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무슨 일이든 자신감을 가지고 일했는데 요즘은 일에 대한 두려움과, 나의 낡고 진부한 지식이나 슬기롭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일이 잘 안 풀릴 때를 염려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그 두려움이 일보다 먼저 앞서기도 합니다. 아파도 병원에 잘 안 가려고 하는 것도 아주 큰 병이 생겨서 고치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그게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와 어지간한 병은 점점 키우고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자신감도 없어지고 두려움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이를 먹어서 생기는 증상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동안 크든 작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것들에 대해 두려움도 가지고 있어서 오늘 복음 말씀이 더욱 가슴에 와 닿습니다.
흔히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은 아주 험난한 항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멀쩡하던 호수에 풍랑이 왜 갑자기 밀려왔을까? 일기예보가 없었던 시기여서 풍랑이 올 것을 몰랐다면 제자들은 어부 출신들이었는데 그만한 풍랑을 이길 수는 없었을까? 나는 그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처럼 나름대로 추측하고 상상해봅니다. 그날 바람과 풍랑과 물이 배에 가득히 쳐들어온 사건은 사탄의 도전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예수님께서 쉴 틈을 주지 않으려고 심술을 부리고, 제자들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여서 흩어놓으려고 작전을 세워 이웃에 복음을 전하려는 주님의 의도를 주님께서 주무시는 틈을 타서 작전을 전개 한 것이라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탄의 장난이니까 주님의 꾸짖으심으로 잔잔해지고 사탄은 물러갔을 것입니다.
여기서 바람과 풍랑은 사고(思考)와 사조(思潮)의 흐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행처럼 우리의 생활에 비집고 들어오는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독소요인들을 사탄이 뿌리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황금만능주의도, 이기주의, 불신풍조, 정치적 기류와 전쟁도 그렇습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것, 사랑의 감정을 없애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시기와 질투로 자신과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등 모든 것들이 오늘 사탄이 만들어 낸 장애이며, 두려움이며, 유혹들일 것입니다. 주님과 같이 있어도 서슴없이 쳐들어오는 사탄의 간교함과 끈질긴 도전으로 우리는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지만 그런 바람과 풍랑과 물이 쳐들어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배가 빠질 지경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겨우 깨닫습니다. 죽음의 직전에서야 겨우 눈치를 채고서 미리부터 사탄이 발붙일 곳을 차단하는 지혜가 부족하고 그런 도전에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갈팡질팡하는 것이 우리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주님과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탄 앞에 굴복하여 질질 끌려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때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오늘 제자들보다도 더 호들갑을 떨면서 난리를 쳤을 것입니다. 너는‘믿음이 약하다.’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 아프게 들립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2.8-19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축일1월 28일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신분 : 신부, 신학자, 교회학자
활동 연도 : 1224/1225-1274년
같은 이름 : 도마, 아퀴노, 토마스아퀴나스, 토머스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 로마(Rome)와 나폴리(Napoli)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Roccasecca)의 가족성(城)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퀴노의 백작 란둘프(Landulph)와 신심 깊은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불과 다섯 살의 나이에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보내져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1239년경에는 더 좋은 교육을 받아 훌륭한 지도자가 되길 바라는 가족의 뜻에 따라 나폴리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도미니코회의 스승을 만나 큰 영향을 받으면서 가족의 뜻과는 달리 수도자가 되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는 1244년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결국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이때 가족들은 그를 설득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강제로 데려다가 15개월 동안이나 로카세카 성에 감금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성 토마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1245년에 다시 수도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1245년부터 3년 동안을 파리(Paris)에서 수학하고, 1248년부터 쾰른(Koln)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프랑스 파리와 독일 쾰른에서 당시 저명한 신학자로 이름난 성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1월 15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125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250년과 1251년 사이의 어느 때에 사제품을 받았다. 성 토마스의 스승이었던 성 대 알베르투스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이 말 없는 황소는 그의 울부짖음으로 전 세계를 가득 채울 것이다.” 1252년부터 그는 주로 파리와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아나니(Anagni), 오르비에토(Orvieto), 로마(Roma), 비테르보(Viterbo) 등지에서 강의했고, 1259-1264년 사이에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Summa Contra Gentiles)을 마무리 지으면서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의 집필에 착수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1269년에는 수도사제와 교구사제 간의 논쟁에 말려들었고,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의 시게르(Siger)와 요한 페캄(John Pecham) 그리고 파리의 주교 에티엔느 탕피에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1274년 리옹(Lyon) 공의회에 참석하여 동방과 서방 교회의 재일치 가능성을 논의하라는 복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1월 10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리옹으로 가는 도중 테라치나(Terracina) 교외 포사 누오바(Fossa Nuova)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7일 선종하였다. 1369년 1월 28일 에스파냐의 툴루즈(Toulouse)로 그의 유해가 옮겨졌고, 그때부터 이날을 성인의 축일로 기념하게 되었다.
그의 미완성 대표작인 “신학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들여질 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로마에서 시작한 집필은 파리로 옮겨서도 계속되었다. 하루는 하느님께서 성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렇듯 하느님의 축복 속에 그의 집필 작업이 계속되었으나,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 축일 미사 중에 강렬한 하느님 체험을 한 후부터 돌연 모든 집필 작업을 중단했다. 당시 “신학대전” 제3부 ‘속죄’에 대한 부분을 집필 중이던 그에게 왜 더는 글을 쓰지 않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느님의 발현 시에 형언키 어려운 신비를 보았다. 그동안 내가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은 이 신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신학대전” 미완의 대작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탐구하고 철저히 섬긴 대학자였다. 동시에 그는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환시와 탈혼,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를 체험했다. 1261년 교황 우르바누스 4세(Urbanus Ⅳ)는 당시 몇몇 나라에서 지키던 성체 축일을 보편교회 전례력에 포함하기 위해 미사 전례문과 성무일도(시간 전례)에 들어갈 성체 찬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당대 석학인 성 토마스와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7월 15일)에게 그 일을 맡겼다. 어느 날 우연히 성 토마스의 찬미가를 본 성 보나벤투라는 그 완벽함에 감탄해 자신이 작성한 찬미가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교황은 성 토마스가 작성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성무일도와 미사 전례문을 정했다. 그는 이외에도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많은 찬미가를 지었고, 주님의 기도(Pater Noster),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 그리고 성경 일부에 대한 주해서도 썼다.
그는 1323년 7월 21일에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567년에는 교황 비오 5세(Pius V)에 의하여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1880년에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에게 붙여진 칭호는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 또는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이다.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에서 모든 신학생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자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징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