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丁若銓) 흑산도 유배문학> 고영화(高永和)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이며, 정약용의 둘째형이다. ‘천주쟁이’로 몰려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기약 없는 유배생활을 하는 신세였지만 한양 선비는 섬사람과 어울려 막걸리 잔을 나누며 한시(漢詩)를 주고받았다. 16년간의 흑산도 유배 중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조선 실학자 손관(巽館,巽庵) 정약전(丁若銓)이었다. 그는 흑산도 유배된 뒤 손암(巽菴)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형을 받고 1801년 11월 5일 한성에서 출발한 뒤, 과천 공주를 지나 11월 21일 나주목 율정주점(現 나주시 대호동)에서 동생 정약용과 마지막 잠을 함께 자고 각각 유배지로 떠났다. 이후부터 정약전은 아마 최익현이 갔던 길로 갔을 것이다. 전남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 다경포(多慶浦) 수군 만호진에 도착하여, 현 신안군 암태도, 팔금도, 안좌(기좌)도, 비금도를 경유해 우이도에 도착 했을 것이다. 우이도에 도착했을 때 손암의 나이는 44세였다.
우이도에서는 흑산진이 설치되어 있었던 마을인 진리에 거주했다. 손암은 1806년 초겨울 무렵, 생활환경이 열악한 우이도에서 대흑산도로 거주지를 옮겼고, ‘사리마을‘ 사미촌(沙眉村)에 거주해 서당을 열고 마을 주민과 함께 어울리며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할 수 있었다. 손암은 1814년 자산어보 집필이 마무리 된 이후, 동생 다산이 사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좀 더 육지와 가까운 우이도로 다시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이후 3년 동안 동생의 소식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결국 두 사람은 생전에 다시 만나지 못하고 1816년 6월6일 5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우이도 주민들이 정성껏 손암의 장례를 치렀고, 강진에 있었던 약용에게 부의(賻儀)까지 보낸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 장례 후 시신을 운구해 오는 것도 당시 형편으로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묘지명에는 “그 뒤 3년 만에 나주의 율정(栗亭) 길로 운구(運柩)하여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흑산도에서 집필(執筆)한 글들을 살펴보면, ‘모래미’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사리마을에서 저술한 수산학 책 ‘자산어보(玆山魚譜)’, 조정의 소나무 정책을 비판한 ‘송정사의(松政私議)’, 우이도에서 문순득(文淳得)의 표류경험담을 바탕으로 지은 ‘표해시말(漂海始末)‘, 그리고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집(與猶堂集)’에 정약전의 시문 40여 편이 실려 있다. 그 중에는 유배시절 다산에게 보낸 편지14통, 주민의 관문서를 작성한 자료, 여러 주민과 친우와 주고받은 시문 등이 있다. 흑산도 유배문화공원에 있는 ‘손암정’은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이고 ‘사촌서당’은 선생의 ‘복성재(復性齋)’ 터를 복원한 것이다.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며 저술활동을 계속함으로써 국가를 위한 애국정신으로 산 올곧은 선비였다.”할 수 있다.
◯ <자산어보(玆山魚譜)>
정약전은 정조 때 병조좌랑 등을 지냈으나 천주교에 입교한 후 이승훈과 더불어 포교 활동에 가담했다. 정씨 형제를 아꼈던 정조가 죽고 순조 1년(1801년) 신유박해에 연루돼 다산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각각 유배됐다. 정약용이 강진에서 ‘목민심서’ 등을 집필하는 동안, 정약전은 흑산도 연안 어류를 관찰·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겼다. 여기서 ‘자산’은 손암선생이 유배왔던 이곳, 흑산도를 말한다. 그는 신유사화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만 15년간 우이도와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 기간 동안 근해에 있는 물고기와 해산물 등 227종을 채집하고 연구해 <자산어보>를 저술했다. 당시 보기 드문 자연과학서적으로, 세밀한 관찰과 묘사와 추론은 200년 전 책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특별한 장비도 없이 해양생물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듯 묘사한 것을 보면 공들인 시간과 노력이 느껴진다. 원래는 <자산어보>를 해양생물도감 형태, 즉 그림으로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자산문화도서관에 가보면 손암 선생이 그림에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진에 유배 중이었던 동생 정약용이 ‘필사가 어려운 그림보다는 글로 쓰면 좋겠다’는 편지를 썼다. 손암 선생은 그 충고를 받아 글로 저술했다. 덕분에 총 3권의 필사본 네 질이 전해온다. 선생은 서당을 짓고 글공부까지 가르쳤으니 존경받을 만하다. 따라서 손암 선생은 지역 주민들과 친분관계가 두터웠고 흑산도 주민 나무꾼·어부 등과 벗을 삼았다한다. 덕분에 <자산어보>를 완성하는 데 주민 장창대(張昌大) 등의 도움을 받았다. 비슷한 예로 면암 최익현 선생 또한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해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1) 가을 장마 3수[秋霖 三首]
良怪翻沙浪 참으로 이상하다! 모래물결 뒤집더니
無風十日喧 바람도 없이 열흘 동안 소란하네.
皺眉山不定 눈썹 찌푸린 듯 산이 흔들리고
瞬目電常奔 눈 깜짝할 새 번개가 달려간다.
一雨曾當霰 비 한번 내리려면 싸락눈이 먼저 오고
層溟浩發源 발원한 물이 넓은 바다에 넘실대네.
何時淸月下 어느 때에 맑은 달 아래에서
醉共爾開門 술 취한 그대와 함께 문 열어 젖힐까
= = = =
2) 고기잡이 등불을 두보 시의 운을 짚어서[漁火拈杜韻]
今夜嗚濤息 오늘 밤엔 울부짖던 파도 소리도 그치고
漁燈照宿雲 고기잡이 등불이 잠든 구름을 비추네.
空靑一天面 하늘은 온통 푸른빛으로 덮혀 있고
錯落衆星文 뭇 별자리들 여기저기 흩어 있네.
隔葉時明滅 나뭇잎 너머로 이따금 깜빡이다가
憑虛任聚分 공중에 떠서 모였다 흩어지네.
不眠環數島 빙 둘러 있는 몇몇 섬 보다가 잠 못 들었는데
號噪曙紛紛 날 밝아 떠들썩하니 어지러이 흩날리네.
3) 추석날 계고 선생과 사포 길가에 노닐며 두시의 운을 뽑아[仲秋同稽古先生遊沙浦路上拈杜韻]
逕細斜行壁 가느다란 길 비스듬히 절벽에 나있고
山環峭作城 둘러싼 산은 높다랗게 성을 이루었네.
層層深木合 층층히 깊은 나무가 우거지고
步步遠洲生 걸음걸음 먼 모래톱 생겨있네
仄嶺樵兒響 기울어진 봉오리에선 나무꾼 소리 울리고
孤花野蝶情 외로운 꽃에 들나비 마음을 붙이네.
民風有吉意 백성들 풍속에서 옛 뜻 남아 있으니
隨處臥凉楹 가는 곳마다 시원한 들보 아래 누웠구나.
4) 사포에 몇 명이 모여 두보의 시에 차운하여[沙浦小集次杜韻]
三兩客將秋色來 서너 나그네가 가을빛 따라와
詩因遣興未論才 시 지으며 흥 돋우니 재주는 따지지 않네.
凉飇在樹蟬猶響 서늘한 바람 나무에 있건만 매미는 아직 울고
淸月盈沙雁欲回 맑은 달빛 모래에 가득하자 기러기 돌아오려네.
小屋靑山侵席冷 푸른 산 오막 집에 추위가 스며들자
四隣白酒捧杯催 사방 이웃들이 막걸리 잔을 건네네.
樵兒釣臾懽成友 나무꾼에 고기잡이까지 기쁘게 친구 되니
恣意家家笑語開 집집마다 마음껏 웃음꽃 피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