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위험합니다.
말씀: 사무엘상 4:1-22
설교일: 2024. 10. 20(주일 낮 예배)
(우리 연세가족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실한 믿음으로,
항상, 복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방해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갑자기 닥치는 경제적 어려움, 육신의 질병, 가정 불화, 자녀들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들,
그리고 사업이나 직장에서 좋지 않은 일들이나 너무 바쁜 일들,
이런 것들이 다 우리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방해꾼들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방해꾼들이 있을 때,
성도들의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더 열심히 기도를 하고, 더 열심히 교회에 나와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반대로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도, 기도도, 교회생활도 다 소홀히 하며,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하는 신앙의 형식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형식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형식에 중요한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식주의에 빠지면 형식만 중요시 여기고 중요한 내용은 소홀히 합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매우 위험합니다.
어느 분은 형식적인 신앙에는 공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공식은
위장-가장-끝장입니다.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하면서도 스스로 진실하게 믿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위장하고 가장하다가 결국은 끝장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2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참패를 당합니다.
그 때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지금부터 3천년 전에 이스라엘 군사 4천명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4,000명이면 적지 않은 숫자인데 ~
아마 그 당시 이스라엘 군사 4,000명이 죽었다는 것은 나라가 거의 끝장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십시오
(삼상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전쟁에서 패한 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1) 하나는 하나님이 패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2) 또 하나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예를 들면 큰 사고가 났는데, 십자가를 목에 걸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십자가를 목에 걸고 그 십자가가 우리를 지켜 주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는 그 원인 분석을 잘해야 합니다.
승리하고 성공했을 때도, 어떻게 승리하고,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다음에도 계속해서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실수하거나 실패 했을 때에는 그 원인을 더 정확히 알아야 똑같은 실수나 실패를 거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장로들은 전쟁의 패인을 잘못 분석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대책도 잘못 세웠습니다.
그래서 4절을 보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언약궤를 전쟁터로 옮겨 옵니다.
언약궤를 가져오자 일시적인 효과는 있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삼상4: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 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이제 여호와의 언약궤를 옮겨왔으니 승리는 우리 것”이라고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다는 것입니다. 연약궤를 옮겨 놓고 나서 백성들의 사기가 올라갔습니다.
반면에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 온 것을 알고 이제는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사기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또 다시 이스라엘의 대 참패였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삼상4:10)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명이었으며
이스라엘 군사들이 일단 언약궤를 보고 사기는 올라갔지만, 이번에는 지난번 패배의
7배가 넘는 희생을 치르며 또 다시 대 참패를 당하고, 이제 정말 나라가 끝장 난 것입니다.
이 결과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다 놓는, 형식적인 신앙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영적으로 패하고 깨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하나는 자기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입니다.
3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우리가 전쟁에서 패한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패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자기가 탐욕으로, 하지 않아야 할 일은 다 해 놓고 나서,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또 잘못되었으면 도와 주어야지 왜 안 도와 주느냐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또 하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깨지고 패하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참패를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것이 아니라 그저 언약궤만 옮겨다 놓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언약궤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능력의 증거들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언약궤를 만들라고 하셨습니까?
- 그 증거들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게도 그 상징이요 형식인 언약궤, 상자를 믿었습니다.
이 형식적인 신앙이 그들의 결정적인 패인이요, 실수였습니다.
형식이 아주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형식이 전부인 줄 알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을 소홀히 하면
그 형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느 교단은 강단에 십자가를 거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합니다.
이유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거지요!
형식주의 빠지면 나무 십자가만 보고, 그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강단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중 누구도 예수님 대신 십자가만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보면서, 나를 위해 그 십자가에서 내 죄를 다 담당하시고
피를 흘려 주시고,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드리는 이 예배도 그렇습니다.
예배 순서에 나오는 형식과 순서는 다 필요하고, 다 해야 합니다.
신앙고백, 참회기도, 찬양, 기도, 헌금, 설교, 축도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순서들이 형식적인 절차가 되면 안됩니다.
그 모든 순서가 합해져서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그렇고, 찬송도 그렇습니다.
외워서 드리는 주기도라고 해서 형식적으로 입으로만 암송하면 안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내가 기도하고, 내가 찬송해야 합니다.
기도가 형식이 되면 믿고 구할 수 없습니다. 믿고 구하지 못하면 응답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아멘
마음으로 믿는 내용, 입으로 시인하는 형식,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선교 단체에서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선교사 시험을 새벽 3시에 본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있는날 많은 지원자들이 새벽3시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1시간 2시간, 3시간이 지나도 시험관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이 많은 지원자들이 머리를 갸우뚱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침내 시험관이 나타난 시간은 오전 9시였습니다.
시험관은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자 이제 시험을 봅시다”하더니 시험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지를 받아 본 지원자들은 다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시험 문제가 누구나 다 쓸 수 있는 “오늘은 몇 년 몇월 몇일입니까?” 였던 것입니다.
시험관이 답안지 제출을 재촉하자 많은 이들이 불평을 했습니다.
“새벽 3시에 시험을 본다고 한 것도 황당한데, 9시에 나타나서 사과 한마디 없고,
선교사 자격시험에 이런 문제를 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 때 답안지를 다 거둔 시험관이 지원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선교사의 자질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네 가지 시험을 치렀습니다.
첫째, 어떤 시간, 어떤 경우, 어떤 장소라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달려갈 수 있는가?
둘째, 하나님이 기다리라고 하시면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는가?
셋째, 하나님의 뜻이 이해가 안 되어도 “아멘”하고 순종할 수 있는가?
넷째, 어떠한 경우라도 오래 참고 절제하는 성령의 열매가 있는가?
선교사는 선교사 자격시험이라는 형식만 통과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부르시든지, 즉시 달려가는 사람,
하나님이 기다리라고 하면 언제까지 기다리고, 어떤 경우라도 오래 참고 절제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뜻이라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도 오직 “아멘”하고 순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선교사의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복잡하고 험한 세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세상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면 온갖 비난과 핍박이 쏟아지고,
온갖 신앙의 방해꾼이 즐비한 이 세상에서
언약궤만 옮겨는 것 같은 형식적인 신앙으로는 도저히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매년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기독교인의 수가 줄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중요한 원인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 형식적인 신앙으로는 아무 것도 안됩니다.
신앙이 형식주의에 빠지면 큰일 납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형식적인 신앙이라도 지키지만,
나중에는 그 형식을 감추기 위해 위장을 하고, 그 위장은 가장이 되고 ,
결국에는 공식대로, 위장 - 가장 - 그리고 마침내 신앙이 끝장나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그러면 마음이 조금 편안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돌이켜서
살아계신 하나님,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은혜, 은사,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을 통하여 엘리 가문이 공식대로 됩니다.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죽고, 며느리는 해산하다가 놀라서 죽습니다.
사무엘상 2장 25절을 보면 엘리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비극의 불씨는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은 것입니다.
형식주의 신앙에 빠지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두 남의 탓으로, 심지어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니 돌이키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잘못은 자기가 하고,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돌이키고 회개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이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늘 신앙의 형식주의에 빠지고,
나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렸던 것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 6장 1절에서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칩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서 돌아가자 ”
우리가 형식주의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우리를 찢으셨을지라도 도로 낫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치셨을지라도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언약의 상징이요, 언약의 형식인 언약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언약하신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진실하신 하나님께 돌아가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 누리고, 영원히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의 위험을 알고
1) 신자되기를 원하고
2) 사랑하기를 원하고
3) 거룩하기를 원하고
4) 예수님 닮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 463장을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