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각하, 제가 나세르입니까” 처음으로 박정희에 대들었다 (47)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관심
1968년 5월 있었던 이른바 ‘국민복지회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세력인 6인방이 나를 무력화하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
김형욱을 앞세운 그들은 내가 차기 대통령 자리를 노리고 전국 조직을 결성하고 있다고 모함했다. 박 대통령은 나를 의심했다. (‘박정희 “임자, 나 제친다며?” JP 손발 자른 김형욱의 보고’ 44회 참조)
6인방(김성곤·백남억·김진만·길재호·이후락·김형욱)의 행보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예견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나 자신에게도 염증이 났다. 나를 정계에서 몰아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구사한 6인방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박 대통령까지 솔직히 싫어졌다.
정치가 이런 것이었나, 아무리 정치가 기복이 심하다고 해도 신의(信義)만큼은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과 함께 ‘그래, 그럼 내가 아예 물러나 주마’라는 오기가 났다. 내가 사라져버리면 그만 아닌가. 68년 5월 30일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아내 박영옥과 함께 부산 해운대로 내려가버렸다.
사실 나는 67년 양대 선거가 끝나면 정계를 떠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68년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향토예비군 창설 등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일 때문에 정계은퇴를 미루다가 국민복지회 사건이 터져 이 기회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죽자고 혁명했잖아, 도와줘” 3선개헌 호소한 박정희 눈물 (48)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관심
1969년 초반 정국은 3선 개헌(三選改憲) 논의로 시끌시끌했다. 모든 공직을 던지고 정계를 떠나 있었지만 3선 개헌에 대한 나의 입장은 분명했다. 장기 집권에 항거한 4·19의 교훈과 자유민주주의 국가 재건을 위해 궐기한 5·16혁명의 순수성을 지키고 박정희 대통령을 구국 혁명의 지도자로 영원히 존경받을 수 있도록 하려면 3선개헌은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1971년 7월 1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제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종필 국무총리가 식사(式辭)를 하고 있다. 69년 3선 개헌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세 번째 출마해 성공한 것이다. 김 총리는 “박 대통령을 거듭 선출한 것은 민족 중흥과 근대화, 통일 과업을 성취하려는 염원의 발로”라고 말했다. 사진 왼쪽부터 김 총리와 부인 박영옥 여사, 민복기 대법원장 부부, 박정희 대통령, 큰딸 박근혜, 육영수 여사. 사진 국가기록원
민주공화당 안에서 개헌을 추진하는 당 지도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양순직·예춘호·박종태·신윤창 의원은 69년 2월 초 의원총회에서 개헌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박 대통령의 업적을 역사에 새기기 위해서라도 개헌은 안 된다. 민주적인 정치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월 하순 양순직·김택수·박종태 의원과 한남동에서 만났다. 저녁식사 자리는 개헌 성토장이 됐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이 나라의 민주정치와 박 대통령을 위해서도 3선 개헌은 반대한다”는 강한 소신을 밝혔다. 당적 없는 야인(野人)이라 해도 나의 이러한 입장 표시에 당내 개헌 반대 세력들은 힘을 얻었다.
정구영 의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당 구주류계 의원들은 개헌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4인 체제(김성곤·백남억·김진만·길재호)와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이들을 돌려놓기 위한 설득과 회유, 협박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