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의 삶김구 선생과 사돈지간 된 안중근 家
안중근평화신문 기사입력시간 : 2008/07/19 [18:28:00]
한국문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가족적 유대가 남달리 강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부계(父系) 혈족을 중심으로 해서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가족 내지는 가까운 친족들은 하나의 혈연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그 공동체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던 과정에서 일정한 경향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일제시대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을 지냈던 이상룡(李相龍) 가문이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시영(李始榮)의 집안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이와 함께 안중근의 집안도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투쟁한 대표적 가문으로 평가될 수 있다. 안중근의 독립의지는 그의 두 동생들과 조카들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동생 정근, 공근
안정근과 그 자녀들
“식민주의는 민족주의의 학교”라고 누군가 말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주의의 형성은 민족주의에 대한 각성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안중근의 동생들에게 딱 들어 맞았다. 안중근에게는 안정근(安定根, 시릴로)과 안공근(安恭根, 요한) 두 동생이 있었다. 이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과 함께 안중근의 죽음을 통해 민족주의의 학교에 입학해서 민족 모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직접 독립운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던 그 동생들과 그 소생들은 남북한 사회에서 각기 높이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우선, 안중근의 손아래 동생인 안정근(시릴로, 1885-1949)은 안중근의 의거 이전에 이미 한씨 부인과 결혼했었고, 그들 사이에는 안원생(安原生) ‧ 안진생(安珍生) 두 아들과 안미생(安美生) 등 네 딸이 있었다. 안중근의 순국 후 안정근은 자신의 가족 및 모친과 안중근의 유족 등과 함께 우선 러시아령 연해주 꼬르지포에 정착했다. 이들의 연해주 정착에는 그 곳의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하여 도산 안창호(1878-1938) 등의 도움이 컸다.
안정근은 3‧1운동 이전부터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다. 그는 1914년 ‘권업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동생 안공근과 함께 러시아에 귀화했지만, 1915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노령(露領) 총감을 맡고 있었다. 1918년 11월 중국의 길림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무오독립선언문’의 발표에도 공동으로 참여했다. 3‧1운동 후 1919년 10월 경 그는 가족들과 함께 샹하이로 이주했다. 이들의 이주는 안중근의 맏아들 분도가 독살된 이후 안전한 활동근거지를 찾으려던 자신들의 소망과, 이미 샹하이에 집결해 있던 백범 김구(1876-1949)나 도산 안창호 등의 초청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샹하이에서 그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참여하여 백범 김구와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이후에는 여기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했다. 김구와 함께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그 후 간도와 연해주 지방을 넘나들면서 샹하이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에 진력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대한적십자회 부회장, <독립신문>의 발행인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간도 교민단(僑民團) 설립, 청산리 전투 보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1925년경부터 신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었고, 1939년 이후에는 중국 각지를 옮겨 다니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샹하이에서 1949년에 죽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안정근의 자식들도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2남 4녀를 두었다. 그들 가운데 두 아들 안원생(安原生)은 샹하이 교통대학에 다닐 때 중국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활동한 바도 있었다. 그는 1943년 한독당 계의 청년조직인 한인청년회의 총간사가 되었고, 한국광복군 인지(印支) 파견책임자를 역임했다. 둘째 아들 안진생(安珍生)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건국훈장 흥인장을 수여받았다. 한편, 그의 차녀 안미생(安美生)은 중국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임정 주석 김구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김구의 맏아들 김인과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으로 백범 김구와 안중근의 가문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안공근과 그 자녀들
안중근의 두 번째 동생은 안공근(安恭根, 요한, 1889-1940?)이다. 그는 원래 서울교육대학교의 전신인 한성사범학교를 마치고 진남포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안중근 의거를 계기로 하여 교사로서의 생활을 접고, 중형 안정근 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살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뻬쩨르부르크 및 모스크바에 머물며 러시아어를 연구했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안창호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특사로 임명되어 샹하이로 오게 되었다. 샹하이에 도착한 다음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외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외교관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 등을 상대로 하여 독립자금의 확보를 위해 활동한 바 있었다. 안공근은 샹하이로 귀임한 1925년 이후부터 모친 조마리아와 안중근의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실질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1928년경 정화암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샹하이에서 빙과점을 운영한 바도 있었지만, 그 생활의 곤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는 1925년 샹하이로 귀환한 직후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이 서거했을 때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적 통일’을 강조했던 그의 유언을 필기한 바 있다. 이처럼 그는 임시정부의 핵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1926년 여운형의 후임으로 샹하이 한인(韓人) 교민단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파생된 좌우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1927년에는 유일당 운동에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전민족 유일당 운동이 실패하자 안창호, 조소앙, 김구 등과 함께 우파계열의 통일체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이사직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유지‧옹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한독당의 별동대로서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한인애국단’이 김구의 주도로 결성되자 안공근은 그 단장이 되었다. 한인애국단은 이봉창 및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획한 조직이었다. 이 시기 일제의 정보보고서에는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로서 그의 신임이 가장 두텁고 김구가 범한 불법행동은 안공근의 보좌에 의해서 된다”고 평한 바 있었다. 1930년대 그는 이처럼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최측근인으로 활동했다.
안공근은 6개 국어에 능통했다 한다. 그는 샹하이에서 미국 혹은 영국대사관에 통역으로 근무한 바 있었고, 소련 영사관 및 독일 영사관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는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아서 국민정부의 정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와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임정을 중국을 비롯한 외국정부기관 및 조선인 좌파 세력이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결시켜주던 인물이었다.
안공근은 일제의 샹하이 침공과 윤봉길의 의거로 인해 1932년 샹하이를 탈출할 때 자신의 어머니와 처자식 및 안중근의 자녀를 남겨둔 채 김구의 모친만을 모셔왔다. 이 때문에 그는 김구에게서 심한 질책을 당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안공근은 1934년 중국 낙양에 중앙군관학교 분교에 한인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했고, 남경에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도 관여하였으며, 남경에서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명예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안공근은 1936년 김구가 주도해서 결성한 한국국민당에 함께 참여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여전히 임시정부의 핵심요인 가운데 하나였고, 김구 주석의 정보책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7년부터 행방불명이 되던 1940년까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말 중경(重慶) 시절 김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안공근은 중경에서 샹하이 동제대학 출신 의사 유진동(劉振東)의 집을 내왕하면서 지내다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에서 안공근과 경쟁관계에 있던 기호파 계열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안공근에게는 안우생(安偶生) 등 두 아들과 네 딸이 있었다. 안우생은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를 거쳐 중국 광뚱에 있던 국립 중산대학(中山大學)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이때 광뚱에서 발발했던 하룡(賀龍)과 섭정(葉挺)이 주도했던 공산폭동이 발생했다. 이 폭동에는 님 웰즈가 지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金山)을 비롯해서 40여명의 조선인 청년학생들이 참여한 바 있었다. 이 폭동에 참여했던 조선인 대부분은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안우생은 이에 참여하지 않고 몸을 피해 살아남게 되었다. 그는 후일 김구의 영문비서가 되어 해방 조국에서 봉사하다가 김구가 암살된 직후 김구의 주치의였던 유진동과 함께 홍콩으로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안공근의 둘째 아들은 안낙생(安樂生)이었다. 그는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활동한 결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안공근의 사위 가운데 하나가 한지성(韓志成)이었다. 한지성은 장인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했고, 1943년 쯍찡에서 사촌 매부인 안원생이 총간사로 있던 한국청년회의 간사장에 취임한 바 있다. 그는 해방이 되자 북쪽으로 가서 활동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로 내려와서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다가 9‧28때 다시 북으로 올라갔다.
한편, 안중근의 일족 가운데는 북한에서 활동했던 경우도 확인된다. 즉, 안공근(安恭根)의 맏아들인 안우생(安偶生)은 김구가 암살된 이후 홍콩을 거쳐 북으로 들어가 살다가 1992년 평양에서 사망하여 평양의 통일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안우생은 장녀 안기애와 기철, 기호, 기영의 세 아들을 두었다. 안우생의 장녀 안기애는 1965년경 북한 과학원 출판사 편집부에 수학전문가로 배치되어 일했다. 그의 장남 안기철은 제주도 유격대장이었던 김달삼의 딸과 결혼하여 장모와 함께 평양에서 살고 있으며, 차남 기호는 전쟁 중 홀로 된 고모와 함께 부친을 모시고 평양 신원동 간부 사택에서 살았다. 셋째 동생 기영은 평양 정권의 부주석을 역임한 김병식의 사위가 되었다.
남은 말
안중근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우들은 안중근의 뜻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 민족이 걸어온 신고의 길 위에서 땀과 피를 아끼지 않으며 해방의 그날을 위해 분투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신병을 얻었거나 암살의 비운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한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좌우로 대립되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엮어나가고자 했다. 그들의 염원은 좌나 우가 아닌 대한독립에 있었다.
안중근 가문이 없었다면 일제하 천주교도의 독립운동은 매우 미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의 훈도를 받은 그의 동생들의 독립운동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해방이후 조선 천주교 신자들은 민족과 교회 문제를 생각할 때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범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안중근 형제들의 독립운동은 우리 교회사의 귀중한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