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대적 상황,배경및 경과 1.1840년대 과학의 발달,기계화등으로 실증적 과학적 사회 경향이 팽배.(예술영역까지 확산) 2.문학에서 자연주의,회화에서 사실주의 대두(꾸르베의 일상에서 모티브찾는것은 전통적태도) 3.1839년 다게르의 사진기술의 발명은 시각적인 사실성에 문제제기(화가들 새로운탐구와모색) 4.마네의 새로운 표현법(풀밭위의점심-그라데이션적 명암표현이 아닌 명암의콘트라스트,즉흥적터치,밝고눈부신토운) 5.인상주의의 빛에의한 회화의 원류는 사실주의적 바로크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색채의도시 베네치아의 거장들,영국의 터너,콘스터블의 화려한색채에의한 자연묘사까지 돌아볼수 있다. (빛효과 관련화가들:17C (프)클로드로랭,(네)로이스달,(영)콘스타블,터너,렘브란트,(스)벨라스케스,고야,용킨트,부댕등) 6.1873년의 살롱에 거부당한 피사로,모네,르노아르,세잔느,시슬리등이 1874년 '화가,조각가 및판화가무명협회 제1회展"을 연것을 (르 샤리바리)지에 루이 르로이Louis Leroy가 인상주의 자라고 조소한것이 명칭이됨. 7.1874년 1회 전시(모네,르노아르,피사로,,시슬레,드가,기요맹,세자느,베르트모리조등의 주역들과 인상주의 기법,비전과
거리 먼 다수의 작가 함께 참여)를 시작으로 1886년 8회 마지막 전시를 갖음.(회화활동은 계속)
3>표현형식및 작가,작품사이버미술대학 1.인상주의 화가들은 밝은 색채를 표현하기 위해 물감을 팔레트에서 석는것을 피하고 원색을 찍어가는 방법과 그림자 부분을 어두운 처리대신 보색의 원리를 사용하여 선명도를 높였다. 2.이당시 활발했던 색채연구의 과학적 방법론이 많이 적용되었으며 전통적인 실내작업에서 벗어나 야외의 태양광아래
순간순간 변하는 색채현상을 추적하며 기록하여 물체에 고유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반사와 주변색채에 영향받는
것을 깨달음.(외광파-Pleinairisme) 3.무엇을 그리느냐보다 그 무엇에 광선이 어떻게 작용하며 어떠한 반영을 일으키는가가 중요시 되어 "주제 즉 내용"은
2차적 구실이며 대신 "모티프의 연구"라는 새로운 제작 태도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인상파의 유일한 주제가 있다면 광선이며 여기서 색채분할법이 나온다) 4.주요작가및 작품 1)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23~1883) 오랭피아,풀밭위의 점심,에밀졸라의 초상,피리부는 소년,폴리베르제르의 술집등 2)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 해돋이-인상,낟가리,루앙 대성당,수련,생 라자르역,지베르니의 포플러등 3)제임스 애보트 맥닐 휘슬러(JAMES ABBOT McNEILL WHISTLER,1834~1903) 백색의 교향악No.II:흰색 옷의 작은 여자,검은색과 황금색의 야상곡:떨어지는불꽃등 4)오귀스트 르노아르(AUGUSTE RENOIR,1841~1919) 물랭 드 라 갈레트,테라스에서,부지발의 무도회,첫나들이,배에서의 점심,미역감는여인등 5)애드가 드가(EDGAR DEGAS,1834~1917) 오페라 관람석에서 본 발레,욕조,아라베스크의 끝남,무대 위에서의 발레연습등 6)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 눈 덮인 퐁트와즈 사육장,파리의 르 아브르 광장,빨간 지붕,카페 오 레등 7)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1834~1899) 세브르로 가는길,길모퉁이,모랫더미등
4>영향및 평가 1.인상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힘드나 대체적으로 아카데미의 전통교유과 낭만주의 기본 이념을 반대하고
자연이나 삶의 편린들을 가능한한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정신에서 기록하는 사실주의 교훈을 받아들임으로써
출발하였으나 꾸르베의 확고 부동한 실제에 있어서의 고정 된 자연,형태,선,색이 아닌 전혀 다른 회화세계
(유동적이며 변화하는 자연을 추구하는 시각 의 변화)에 귀착하였다. 2.19세기 후반에 널리 보급되었던 과학적 사실주의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으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달리 사회의 개혁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3.사실주의가 근대사회를 배경으로 확고한 신조를 가지고 시작했다면 인상주의는 특별한 미학적 이념이나 주장없이
거의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났으나 주도적 인물통하여 공통적인 태도를 읽을 수있는데 그것은 꾸르베가 외적 세계를
순전한 시각적 대상으로 설정한 점을 받아들이 면서도 거기서 더 나아가 외적 세계에서 찾아내야 할 유일한 진실은
어떤 선입견이나 기존관념에서도 벗어난 순수한 시각적 진실,즉 본연의 자연인 것이다.
여기에 시각의 근본적인 혁신의 핵심이 있다. 4.주제 ,내용에서 모티프(주로 자연대상)의 연구로의 관심의 촛점의 이동과 인상파회화의 평면성은 회화의 내재적 자율성에
대한 사고를 갖게되는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출발시킨 것이다.
1>신인상주의 개요
1.인상주의의 본능적 경험주의에서 출발한 즉흥적인 색채사용의 회화기법의 반발에서 출발. 2.색채와 빛의 과학적 탐구와 지성적이론으로서의 색채분할법의선언-르네위그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색채에대한 인상주의의"우연성과 천재성"이란 통념에대한 반성으로의 논리적 실천. 3.색채와 빛의 탐구란 측면에서는 인상주의와 같은 맥락.(시냑-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논리적 실천) 4.신인상주의 출현-1886년 8회마지막 인상파전(쇠라 그림)에서-폴 시냑은 최초의 분할법이룬 창시자겸 완성자로 평가. 5.자연과학의 영향하에 색채탐구 뿐 아니라 형태의 명확성과 화면의 견고한 구성을 이룩 (고전주의(전통)와 연계성)-상징주의와 야수파 탄생을 예시. 6.점묘법에 의한 색채분할-인상파의 직감적 즉흥적 분할기법이 아닌 항구성을 추구한 과학적 수단-과학적 계산과
작업시간 필요, 화면의 광휘성. 7.신인상주의 작품제작의 이론적 바탕 요약 1.태양 스펙트럼색채에 가장 가까운 순색만을 팔래트에 사용. 2.색채의 대비,변조,발광의 법칙 사용.- (슈브렐의 `색채의 동시대비의 법칙,루드의`선도의 원리등의 색채이론 영향) 3.수직,수평선을 사용하여 건축적 화면구성. 4.리듬있는 선의 배치로 구성된 장식적인면 표현.-(상징주의 야수파에 영향) 5.빛의 반사만을 추구하여 잃어 버렸던 인상주의의 형태감과 구성의 짜임새 회복.(고전주의와 연관) 6.과학적,기하학적 구도와 계산된 안정감은 극도의 감정 배제.(5.6-인상주의의 극복)
2>시대적 상황,배경 및 경과 1.1870년대 결속가운데 풍성했던 인상주의는 1880년대 이후 40대에 들어선 작가들이 각자의 길을 모색 해 가면서 구심점을 잃고 다음세대(인상주의 극복)로 대체 되어 갔다. 2.인상주의 자체의 반성-고전적 훈련의 필요성 (모네는`세트`그림에,피사로는 형과면의 명확섬세함에 중점, 르느와르는`인상주의 궁극까지 갔으나 자신의 색채,데생의 기법 모름`,드가는`인사파는 무소속 의미로 전락`이라고 질타. 3.현대과학의 자각과 탐구정신의 도입-색채의 성질고찰(시각의 심리학적 생리학적 광학상의 문제 대두) 4.예술과 과학의 조화 천명-1880년`예술잡지`(L'Art)에 David Sutter는 예술과 과학 서로가 배척해서는 안됨을 단정 5.1886년 8회 인상파전의 쇠라 그림"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신인상주의의 태동.
6.쇠라의 예술(점묘법에 의한 색채 분할법)-1859~1891/프랑스 파리출생 1.앵그르의 제자 앙리 레망(Henri Lehmann)에 사사받으며 아카데미즘 수학. 2.샤를르 블랑의 `뎃생의 법칙' 에서`색채는 확고한 법칙에 따르는 것이며 이해된다면 음악처럼 가르칠 수 있다'는 구절을 읽고 신인상주의의 특징인 체계화의 인식을 가제되고 명암도 가르치고 이해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3.방법적 예슬을 재 탐구-수평,수직선의 대비와 명암의 균형에서의 감동을 자연 속에서 발견.기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슈브렐의 저서`Atlas`,`동시대비의 법칙`에 나오는 색환과 보색이론을 파악.David Sutterd의 `시각의현상`이나, 맥스웰의`광선에 대한 전자기의 성질`에 관한 이론탐구,David나Helmholtz의 전문지식을 받아들이고,시각의 생리등을
철저연구. 4.루브르를 자주 찾아 대가 작품에 감명-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르네상스이전 작품,홀바인의 초상화,
푸생의성화, (베로네즈나 드라크로아의 작품에서 보이는 시각효과와 앵그르에의해 전해진 그림의 엄격한 원리들을 융화시키는 일을전개)
-먼저 명,암의 조화문제를 생각하여1882~3년간 흑,백의 데생에 주력 선보다 대비를 주장하여 색가의 침투와 반사의 문제를규명. -톤의 대비에익숙해진 후 같은 정신으로 색채를 다루어 1882년부터 대비의 법칙을 색채에 적용시켜 분할된 요소로 칠하였다.
7.시냐크의 예술-1863~1935/프랑스 파리태생 1.누구에게 사사 받은것 없이 인상주의의 감화로 화가 입문. 2.1884년 쇠라를 알게되면서원리와 양식을 받아들여 회화운동의 동반자가 됨. 3.`들라크르와에서 인상주의까지`(1899)라는 책을 펴 냄으로 신인상주의 이론을 체계화,살롱 데 앙데팡당의 창립에 공헌 4.수 많은 색점의 배치로 보색대비의 원리를 바탕으로 스케치 풍의 맑고 깨끗한 바다풍경등의 그림을 남김.
3>표현양식및 특성사이버미술대학.
1.신인상주의 방법론
1.논리적 출발을 뎃생에서부터 시작하고 사실주의 화가인 밀레의 견고성과 라투르의 부드러움을 결합하여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었다. 2.시각상을 구성하는 색채는 적어도 5가지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 빛을 정확히 관찰하여 그에 대응하는 색채를 화면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3.이론가이자 신인상주의자인 시냑은 색채와 함께 구성의 문제 제기-필연적으로 색채의 조화에있어 리듬있는 배치와 균형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흰 화지 앞에서 할 일은 어떤 곡선 어떤 아라베스크 무늬로 표면을 분할하고 어떤 색채 와 톤으로
그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4.쇠라의 구성에 대한 정의-구성한다는 것은 빛과 그림자를 분산시키고 색채를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그림의 표면을 선 중에서 확립하여 조화된 선들을 통해 분할하는 것이다. 5.과학적 분석과 여러 이론의 거듭된 연구의 결과로 기법상의 독특한 방법론에 이르렀다.
2.신인상주의 색광이론사이버미술대학
1.쇠라의 색광이론-화가로서는 드물게 이론가이며 체계적인 그의 작품의 우월성은 고전적 감성과 방법적 지성에서
생겨 난 것이다. 그는 과학을 통한 색채의 해독으로서의 차가운 야심속에서 색채미의 규범을 발견 하였다. 1)화학자슈브렐의`동시대비의법칙`(1839)에서`보색의원리`와`색채의병치법`을 발견하고 드라크로아,베로네즈,코로,모네 피사로등의 작품을 관찰,연구사는 가운데 그들의 작품에 나타난 구성,색채,명암,선을 지배하는 것이 유사한 법칙임을 깨달았으며 슈브렐의 이론에 자신의 표현기준을 세울 수 있음을 느껴 색채사용 이전에 데생 공부를 시작 하였다. 2)캔바스위의 독립 색채들은 망막위에서 재 조직된다는 이해 가운데 고유색(백색광및에서),반사광(근접물에서),광원색 주위의 보색등의 모든 요소를 구별하여 팔레트위의 혼합대신 화면에 그대로 분할하여 점묘로 배치했다. 3)물리학자 루드의 `근대 색채학`(1879)의 鮮度의 原理에서 첫째 `시각혼합의 선도`는 항상 `안료혼합의 선도`보다 우월 함을 깨달음.그리고 두번째 대비 법칙에 의하면 색채는 그 보색이 결합될때 최대 명도를 얻는다는 것이었다. 4)샤를르 앙리의 연구 결과에 감명을 받아 그의 지성과 정신의 영향으로 쇠라는 수학,물리학,생물학,화학뿐 아니라 시, 음악,문학,철학,미학,심리학의 문제를 깊이 연구하는 기반을 마련한다.-상징주의 미학에 영향.
2.분할주의와 그 기법으로서의 점묘주의 1)신인상파 화가의 점묘주의(Pointillism)는 분할주의(Divisionism)의 기법적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점묘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점묘주의대신 분할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시냑은 점묘가 그들의 미학및분할주의와 무관함을 강조 2)시냑의 분할에대한 정의-1.분할은 단지 순수한 안료만의 혼합(프리즘의 모든 색조,색상)
2.여러요소의 분할(고유색,조명색,반사등) 3.이 요소들과 그 비율의 균형(대비법,변조법,발광법에 따른것 4.작품 크기에 어울리는 텃치의 선택 위의 네가지에 의해 명도,채색,조화의 모든 효과를 확보 하는것.
3.드라크로아의 견해-색채를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구별하여 정열적 화면을 표출 하였는다.그는 모든 회화의 적은
회색이다라고 선언하고 사물의 고유색과 빛으로서의 색조(색)을 구별하였고 텃치의 분할법도 말하였다. 4)드라크로아의 이론을 실천에 옮긴자가 쇠라이며 작은 터치의 색상 재구성이 최대의 광채를 얻는다고 보았다. 5)시냑은 분할기법 자체가 광채와 색채의 최대치를 보장할 수 없다고 보고 대비,변조, 광채의 법칙을 따라서 요소를
배분하고 균형을 취해야 작품의 전체적인 조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3>후기인상주의 後期 印象主義 Post-Impressionism(영)
1>후기인상주의 개요
1.영국의 미술평론가`로저 프라이`Roger Fry가 1910~1911년 겨울에 런던의 그래프론 화랑에서 가획한 `마네의
후기인상주의전`이란 표제에서 유래한 명칭. 2.특정한 예술운동,단일한 경향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모네,피사로등의 인상주의와 단순한 점묘주의로서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된 보다 견고한 화면구성을 강조한 경향과 표현 내용을 중요시 하려했던 경향의 작가들을 말한다. 3.순간적,감각적 자연의 인상과 빛의 변화를 순수하고 생생하게 포착,밝고 동적인 화면을 창조해 사실주의를 완성한
인상주의에 반해 후기인상주의는 사물의 내면적 정신성과 본질을 근원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4.사물을 확고 부동한 견고한 형태로 만들어 그 안에서 질서를 찾았고,강렬한 원색 평면적 넓은 면들의 형태로 꿈 사상을
상징적으로 현존시켰으며,타오르는 정열적인 형태의 율동과 격렬한 색조로 인간의 심상을 형상화 시킴으로써 결국
고호,고갱의 영향으로 야수주의와 표현주의가 성립되었고 세잔느의 조형의지의 발전으로 입체주의가 태동되어
현대회화로 이어진다.
2>후기인상주의의 발생과 배경사이버미술대학
1.사진기의 발명으로 회화에서 재현이라는 목적을 잃고 회화만의 표현이 있음을 눈뜨게 되자 사진이 표현할 수 없는
정신적인 것이나 과거나 미래의 여러가지 것들이 있음을 인식하게 됨. 2.인상주의 감각적 특성과 무정형성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양상들은 다양한 동시에 뚜렷한 차이를 갖고 있기에 포괄적으로
말하기 힘들며 비평가`로저 프라이`도 양상의 본질적 개념 정의 보다는 후기 인상주의라는 두리뭉실한 용어로 한정시켰다.
이 용어가 그러한 작업들이 시작된지 25년이 지난 후에야 사용되었다는 점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 한다. 3.그러나 1910년에 만들어진 `후기인상주의`라는 신조어는 지각 경험을 수동적으로 기록하는 수준을 넘어선 작업과 사고와
직관의 관념적 영역에 비교적 구체적인 표현을 부여하고자 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4.1886년 8회 마지막 인상주의전 이후 나타난 두가지 경향은 신인상주의 경향과 상징주의 경향인데 신인상주의가 직관적
빛의 탐구에서 과학적 탐구로 논리적 계승의 측면이 있다면 상징 주의적 경향은 인상주의 이념과 방법의 극복으로 나타났다. 5.후기인상주의는 뚜렷한 형성 시점이 없는데 고갱,고호는 얼마동안 신인상주의를 따른적이 있었고 세잔느는 신인상주의 형성
이전부터 작품을 해왔기 때문이다. 6.니체가 `신은 죽었다`라며 진리를 이성적인 것이 아닌 비합리적인 것에서 찾았던 것처럼 진보적인 화가들은
계몽주의에서 야기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시대(1789~1815)이후 서구 문명을 주도해 왔던 낙관적 공리주의에 회의를
갖고 인상주의에서 절정을 이룬 사실주의 전통을 포기하고 감각의 외부세계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포함한 새롭고
완전한 본질을 추구했다 7.현실을 넘어 이상적인것,낭만적인것에 보는것을 넘어 상징적인 것에 그리고 감각을 넘어 사고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 하였고
점증하는 지각과 그것을 미술로 옮겨 넣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려는 내용에 조응하는 형식을
파악하는 수단 이었다. 8.아카데믹한 원리와 사실주의 전통을 파괴한 새로운 미술가들은 인상주의 보다도 훨씬 충격적인 그림을 산출했고
미술의 세계와 실제사회를 대폭 분리시키는 간극을 만들어 냈다.
3>후기인상주의의 양식적특성과 전개사이버미술대학
1.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에서 보여졌던 분할주의의 `분석`대신에 외면보다 내면에 관심이 고조 되면서 `종합`으로 향하게된다. 2.인상주의가 외면했던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태도는 인상주의가 부정한 사물의 고유색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3.후기 인상주의의 인물별 특성
1.폴 세잔느(PAUL CEZANNE,1839~1906)
*엑상프로방스 지방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0세기 미술의 실험적 작업의 개척자로 간주될 수 있다. *사물의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을 추구한 그의 조형관의 특성은 자연의 내부구조를 파악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성이나 기하학적 방법은 과거 그리이스, 르네상스 미술로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순간의 분석이 아닌 견고하고 완전한 실제 즉 영원한 색채, 영원한 구축을 제시했다. *표현상의 특이점은 인상주의적 감각공간과 전통적 입체공간의 조정을 성립시킨 것인데 시각적 공간과 이지적 공간의 종합을 시도 하였다는 점은 새로운 조형공간의 언어가 있게 하였다. *세잔느는 이미 1870년대말에 회화의 기본적인 요소인 형태와 구성을 무시한것으로 보여진 인상주의에 대해 회의를 갖고 있었고 물체의 입체감과 색채와의 관계,균형잡힌 화면 구성,사물의 형태들간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그는 색채와 형태의 관계에 있어서도 색채가 풍부할 때 형태도 충만하게 되며,색채를 중심으로한 종합적 회화를 구상 한다는 것이 그의 특론이었다.윤곽선에 의해 볼륨이 나타난다는 것에 반대하여 색채에 의해서만 표현된다고 주장하였다. *확고부동한 질서와 공간을 찾으려 하여 구,원추,원통으로 자연 대상을 환원시켜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보았다. *그의 화면구성의 기본은 항상 고전적인 균형에 두면서도 대담한 데포르마숑이 나타나며 부피와 질량감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과 동시에 깊은공간은 그 부산물로서 얻어질 수 있게하였다. *이지적인 방법론을 택한 세잔느는 그의 작품속에 공존해왔던 여러경향 즉 바로크주의, 인상주의, 고전주의 및
초기 입체 주의등의 경향등을 조화있게 종합시키는 데 성공하고 추상예술등의 20세기 미술의 방향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
*상선의 선원에서 해군으로 나중에는파리에서 주식중개인으로서 비교적 안정된생활을 누리는 가운데 취미로서의 미술이 1876년 살롱전에 내는등 점차 전문화되어 1883년에는 완전히 그림에만 몰두하여 직장도 포기하고 카미유 피사로 소개로 인상주의 소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그는 인상주의에 반발하기보다 이탈하려 했다.대담하고 장식적인 구도법과 평면적으로 칠하는 강하고 산뜻한 색채효과, 관념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현존시키려는 지향등을 완전히 그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인상주의의 분석적 방법이나 시각적 진실 대신에 종합적 방법과 꿈,이상,상상력을 폈다.분할된 필촉,점묘에의한 뉘앙스 대신에 크게 구획된 원색의 단일한 색면,
평면적 구성형태를 굵직한 윤곽선으로 테두리 짓고 화면은 평면적,장식적이며 그것에 상징성을 부여?다. *그는 인상주의에서의 서로 상반되는 강렬한 색을 대비시킨 것이 아니라 서로 이웃하고 있는 색채들의 울림을 좋아 했다. 평평한 색채들을 윤곽선으로 돌렸으며 아라베스크를 사용했고 인상주의의 기교를 자신의 새로운 방법과 섞었다. *`인상주의자들은 눈 주위에서 미를 찾으려하고 사상의 내부까지는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라고 비판하고 그에게 테마와 형상을 제공한 것은 그의 상상력이지 자연이 아님을 주장하여 외부의 재현 보다도 심리적인 내용을 담은 표현을 탐구했다 *사물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통하여 현존시키는 지향성을 나타낸 그는 공간구성에 있어서 구심 원근법 대신 평행 원근법을 사용했으며 공기 원근법도 무시하여 전,후경의 밝음을 역류시켜 날카로움을 더 했다.색채의 대비 효과를 집요 하게 시도하면서 평면성과 장식성의 회화로 몰고 갔다.장식성의 회화는 양탄자그림에서 평면적회화는 공간적 형상을 없앤 벽화풍의 평면성에서 느껴지는것과 유사하다. *자신의 구원과 현대 미술가들의 구제가 근대문명및 서구 고전 문화에서 벗어나 보다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삶의 유형으로 회기 하는데 있다는 신념 속에서 너무 오염된 서구 문명을 떠나 타이티섬등의 원주민의 삶 속에 들어가 인간의 원초적 미지의 세계에를 찾아갔고 원주민의 순수 소박한 강렬함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유럽미술의 수법과 문제를 초월했다 *고갱은 야수파를 예고했고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에영향을 끼쳤으며 부조 디자인 채색꽃병등에도 관심을 가져 목판화등에서 의 새로운 방법은(강하고 대조적이며 원시적인) 독일표현주의의 그래픽 미술 전개에 영향을 미친다.
3.빈센트 반 고호(VINCENT VAN GOGH,1853~1890)
*네델란드의 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화방점원으로서의 얼마간의 체험과 신학 수업후 광산촌의 전도사 생활에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는데 1880년 브뤼셀,헤이그,앤트워프에서 공부한 후 1886년 인상주의 화가들과 만난다. *1888년 타오르는 태양을 그리기위해 아를르로 옮겨 제작에 전념했고 1889년 한때 고갱과 고동생활을 했으나 곧 헤어졌다.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요양중에도 제작은 계속되었고 1890년에는 건강의 회복기미가 보여 오베르 쉬르 오와즈로 옮겨와 작품을 계속 하였으나 끝내 권총 자살로 생애를 마쳤다. *고호미술의 구심점은 자연과 인간이라는 두가지 실체의 진리를 어떻게 연결 시키느냐에 있었고`자연 자체에 부각된 인간` 이
무엇인가를 밝히려는 입장에서 그는 예술자체 보다도 인간자체에 관심을 두었다.따라서 인간적 측면을 부각시킨 밀레 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고 화가가 되기를 결신한 고호는 에술을 선을 행하는 다른 방법(예를 들면 목사로서의 삶이 그에게 거부되었을때 인간적 구원의 다른 방법)으로 택하였다.-그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어떤 순수한 예술적 정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개혁에 대한 자신의 설교를 구체화 시키기 위하여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고호는 정직하게,정신적으로 살기를 원했으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기보다 이기적 목적을 버리고 저속을 초월하여 성실하게
인류를 위해 사는 숭고한 인간애가 있었다.그러나 그는 인생을 작품을 위해 내걸었고 그것에 의해서 그의 이성은 침몰해갔다.그는 보잘것없는 사물들에 주목했으며 하나의 필촉 하나의 색채까지도 그의 정신상태를 이야기 하고,
그의 생애를 말하고 있다.그의 그림은 결코 전시된 적도 없고 팔아본적도 없었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욕구의 분출이 아니라 자아가 지니는 보편적 심정의 표출까지 도달하고 그가 창조한 색과 형은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것으로 자연형상세계를 자신의 시각세계로 바꾸어 자신의 심리적 내용을 담았다. *그의 그림은 필촉은 다이나믹해지고 수평 수직 구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율동적 필치의 종합체로서의 방식이 완성되고 있다.
고호의 데포르마숑은 형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비젼의 심리적 요청이다.굴절,동요,요철등에 의해 세계를 보는 방식은 바로크적이며 평면적인 색면없이 장식적 체계마저 거부한 화면은 굴절,동요,곡선으로 자유로운 발전을통해
구도가 만들어짐을 볼 수 있다. *어떤 원리나 원칙에따라 작품활동을 하고자 의도를 가진 바 없으나 야수주의와 표현주의의 기원이 되었고 세잔느 고갱과 함께 현대미술의 터전을 닦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