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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는 해 아래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한편, 삶을 기뻐하고 즐기라고도 말한다. 이것은 전도서가 허무주의나 쾌락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겸손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감사히 받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그를 경외하고 믿으라는 것이다. 전도서는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 슈라이너의 설명을 들어보자.
또 다른 중심 주제는 삶을 즐기라는 것으로 전도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해 아래에서의 삶이 허무하고, 불합리하고, 모순적이고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보았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삶이 해 아래에서 어떻게 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은 그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도자는 다음의 내용을 가르친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24~25). 전도자는 여기서 독자들에게 억압당하지 않은 쾌락주의적 인생을 살도록 조언하지 않는다. 전도자는 인간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며 그날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으로 하루하루를 누려야 한다고 말한다.(Waltke, Old Testament Theology, pp. 961~963는 옳게 주장한다. 또한 Fredericks, Coping with Transience, pp. 64~77; Whybray, "Qoheleth"을 보라. 와이브레이는 기쁨에 대한 강조를 옳게 지적하고 있지만 이 점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다음의 각 주를 보라.) 전도자는 이 주제를 3장 11~13절에서 다시 언급하기 때문에 이 주제는 홀로 떨어진 고립된 주제가 아니다:(기쁨의 주제가 과장될 수 있는데, 전도서의 다른 주제들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Garrett, Proverbs, Ecclesiastes, Song of Songs, p. 273). 그러나 머피는, 전도자는 오직 '체념해서 받아들이는 결론들'만 제공한다고 말하는 점에서, 다른 방향으로 너무 나간다(Murphy, “Qoheleth and Theology?" p. 32).)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삶을 계획하셨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에, 역사에는 분명한 패턴이나 계획이 없다. 헛됨과 허무와 모순이 삶의 특징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어떻게 함께 연결되는가를 알아내려고 하기 보다 하나님의 선물로 즐거움을 얻어야 한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하다.(전도자는 사람이 기쁨을 경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한다(Whybray, "Qoheleth," p. 88).)
이와 마찬가지로, 3장 16~22절은 전도서에서 가장 암울한 본문 중 하나이며, 삶의 헛됨을 강조한다. 그러나 전도자는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라고 말하면서 결론을 맺는다(3:22). 삶은 인간의 지력으로 영위되는 것이 아니며, 삶의 모든 미련한 것들에 일일이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은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시도를 그쳐야 한다. 우리는 일어나는 일을 매순간 받아들여야 하며, 만일 좋은 일이 생기면 인생을 즐겨야 한다. 같은 주제가 5장 18~20절에 등장한다. 삶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람의 수고에 대한 기쁨을 주신다면, 그때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의 이유와 원인을 풀려고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에게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루하루 주시는 것에서 기쁨을 얻어야 하고,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롱맨(Book of Ecclesiastes, 168~169)은 전도서에서 말하는 기쁨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는데, 기쁨에 대해 언급한 7:4와 2:1~2, 10이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롱맨의 생각과는 다르게, 2장과 7장에 나오는 기쁨에 대한 언급은 스스로 기쁨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겨냥한 것이며, 이것은 전도서가 5:18~20과 기쁨에 대한 다른 구절에서 가르치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기쁨을 권하는 본문은 해 아래 사는 누구도 세상을 관찰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음도 확언한다. 고통과 어리석음은 인간 존재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 타락하고 미친 세상 가운데 일과 음식과 결혼을 누릴 기쁨의 날들이 존재한다. 전도서는 "이와 같은 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 날들은 선물이지만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간단히 말한다. 이 주제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Fox, Qohelet and His Contradictions, 53~77을 보라.)
전도서 전체를 고려할 때, 전도자는 하루하루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날이라고 거의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7장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도자의 주장은 좋은 날이 오면 그날의 삶을 기뻐하고 즐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경과 고생의 날들도 있다. 하나님은 기쁨과 고난의 배후에서 주권적으로 일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일어나는 모든 것을 주관하는 왕이시지만, 사람들이 존재의 비밀을 풀 수 없도록 역사와 인생의 구조를 세우셨다. "전도자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에 대해 계속 무지하게 하신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조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데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의미하는 것의 본질, 곧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하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제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Farmer, Who Knows What Is Good?, p. 177을 보라.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본질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의미 중 일부라고 말해야 한다.) 파머는 우리가 여기서 은혜의 신학을 보게 된다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앞의 책.)
전도자가 독자들에게 삶을 누리도록 요청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가를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이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8:15~17).
아무도 "해 아래에서” 삶을 관찰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내거나 캐낼 수 없다. 인생의 한정된 시간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을 누려야 한다. 앞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것은 쾌락주의를 추구하라는 조언이 아니다. 이것은 겸손과 감사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의 태도를 말한다. 어떤 사람이 좋은 날로 복을 받게 될 때는, 인간의 불의를 해결하려고 애씀으로써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분명 우리는 삶의 허무를 모르는 체하지 말아야 하며, 전도자는 우리에게 슬픔으로 울지 말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좋은 선물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참고, 9:7~9), 인생이 좋아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인생을 즐겨야 한다. 전도자는 이 땅에서의 좋은 날들이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젊은 사람들은 노쇠한 날들이 이르기 전에 그들의 창조자를 기억해야 한다(11:7~8, 12:1~8). 젊고 혈기왕성한 때를 가능한대로 누려야 한다. 그러나 지혜 있는 사람은 인생이 짧다는 사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기서 전도서의 주제들이 다 함께 적절하게 연결된다.
삶은 헛됨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만, 좋은 날이 오면 그날을 즐겨야 한다.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을 보상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욥기와 잠언이 확신하는 것처럼 지혜의 길이다.
결론
전도서는 이스라엘의 지혜 전통에 속한다. 전도서는 삶의 헛됨과 모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욥기와 비슷하다. 삶의 불합리성, 불공정성, 불규칙성이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피조 세계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 차 있다(창 3:17~19). 세상은 허무함에 굴복한다(롬 8:18~25). 전도자는 해 아래 최종적으로 만족을 주는 쾌락이 없으며, 인생의 모든 비밀을 풀어 줄 지혜도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지만, 인간의 눈에는 이것이 거의 숨겨져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전도자의 마지막 충고를 보면, 전도서는 욥기와 잠언의 지혜 전통과 들어맞는다. 인간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려고 애쓰며 인간 존재의 퍼즐을 풀어 보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드려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 되심 아래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기쁨과 음식을 주시면, 그때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의 선물을 즐겨야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전도서는 오늘을 생각하고 내일에 대해 염려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참고, 마 6:25~34). 그러나 11~12장은 오해를 경고한다. 전도자는 쾌락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심판의 날이 임박해 있고, 따라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신약 성경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신약 성경은 우리가 타락하고 절망적인 세상에 살고 있음을 인정한다(롬 8:18~25을 보라). 피조물은 허무함에 굴복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완전하게 도래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그 나라를 시작하셨다. 새 창조는 시작되었고, 완성을 이룰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보여 준다(고후 5:11~21을 보라). 그리스도를 통해 새 창조가 도래했다(고후 5:17; 갈 6:15). 그리고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벧후 3:13).
토머스 슈라이너 지음, 강대훈 옮김, 『성경신학』(부흥과개혁사, 2016), pp. 315~318.

첫댓글 슈라이너의 말대로 전도서를 신약성경에서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번역)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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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18-25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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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2:24-25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호크마 주석>
=====2:24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 인생의 참다운 삶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는 신본주의적 신앙을 암시한다. 이러한 신앙에 확고한 기반을 둘 때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이 보람과 기쁨이 된다(상반절)는 것이 저자의 결론적 깨달음이다. 이는 전도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육신적 쾌락의 삶을 추구하려 했던 것과는 (4-10절)대조를 이룬다.
=====2:25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 승하랴 - 본절의 '나보다'를 '밈멘니'( )로 보느냐 '밈멘누'( )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르나, 영역본 KJV는 전자를 위하여 한글 개역 성경처럼 '나보다 더'(more than I)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NIV, RSV, NASB등은 후자를 취하여 '그를(하나님을)떠나서는'(without him, NIV, NASB;apart from him, RSV)으로 번역하여 본절 전체를 '누가 그를 떠나서 먹을 수 있으며 기쁨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70인역(LXX)도 본절을 '파레크스 아우토'( , 그를 떠나서)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주석가들 중 많은 사람들도 이를 지지하고 있다(Delitzsch, M.A. Eaton, Lange). 만약 후자가 옳다면 본절은 24절 후반부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참된 축복과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만 말미암음을 나타낸다.
참된 축복과 기쁨의 근원은 오직 주님께만 있름에 동의하고 고백합니다. 아멘!
@노베 아멘!
전3:11-13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호크마 주석>
=====3:11
하나님이 ... 아름답게 하셨고 -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보실 때 '좋았더라'(창 1:31)고 하신 말씀을 생각케 한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문맥상 하나님이 2-8절에 암시되어지는 모든 일들을 당신의 뜻과, 섭리대로 하실 때 아름답고 흠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에게 ... 주셨느니라( , 하올람 나탄 벧리밤) - 이는 '그가 그들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다'(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 heart of men, NIV; 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ir heart, NASB)의 뜻이다. 이는 죄악된 인생의 유한성과 연약성 및
그로 말미암는 허무 의식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서 전체의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사(창 1:27) 당신과 더불어 영원히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이다. 한편 혹자는 여기서 '영원'이란 말을 '세상'(the world, KJV)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Luther), 다른 사람은 '무지'를 뜻하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하나(G.A. Barton) 그 근거는 불분명하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주석가들은 이를 한글 개역 성경처럼 '영원' 또는 '영원을 나타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Nowack, Ginsburg, Wangeman, Wright).
그러나 ...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두셨으되, 인간은 제한적인 피조물인 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더더욱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마음과 생각이 부패되고 왜곡된 바(렘 17:9;롬 1:21) 그런 상태에서는 하는 일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3:12
선을 행하는 것( , 라아소트 토브) -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2:24;3:22;5:17;8:15;9:7 등에 암시되어진 것처럼 인생 여정 가운데서 삶을 즐기는 것을 뜻한다(Ginsburg, G.A.Barton, D.R. Glenn, M.A. Eaton). 영역본 RSV도 이를 '즐기는 것'(enjoy)으로 번역하고 있다. (2) 7:20에서처럼 하나님의 의를 행하며 도의적,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Hengstenberg, Wright, Ewald, Plumtre). 이중에서 70인역(LXX), 탈굼역(Targum), 시리아역(Syriac), 제롬역(Jerome) 등은 (2)를 지지한다.
=====3:13
여기서 '먹고 마시는 것'이란 안락하고 행복한 삶의 표시로서 언급되고 있다. 또한 매일의 수고가 이전에는 즐거운 것 혹은 헛된 것이라는 두 가지 대조적인 측면에서 언급되었으나(2:10,11), 여기서는 오직 즐거움이란 측면에서만 언급된다. 이러한 전환의 결정적인 요인은 본절 하반절에서 암시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인 것이다.
허무 의식을 극복하는 길이 하나님께서 삶을 누리는 은혜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베 아멘!
전도서의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고 무거운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어주고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도 인생을 이와 같이 정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달려 가야 제대로 된 해답을 얻을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되네요.
네, 맞아요.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좋운 포스팅입니다. 삶의 누림은 다른 저자인 시편 1편과도 통한다고 봅니다.
시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아멘!
아멘22
전도서를 큰 그림으로 개관하면 포스팅 본문이 말한 부분처럼 은혜의 신학을 가르치는 지혜서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나눔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전도서에 관한 좋은 내용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전도서 중 아래 말씀이 특히 와닿습니다.
전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