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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네(關根正雄) 氏와의 만남 - 氏의 著作集(저작집) 月報(월보)에 썼던 글임
저는 한국서 중학 시대에 있었던 1929년의 항일 광주학생사건에 관계되어 1년간 투옥되었습니다. 출옥 후 학업의 길이 끊겨 서울의 어느 빈민촌에 들어가 수년간 이 마을의 수천 주민을 대상으로 사회사업에 투신했습니다. 주로 무산 아동 교육을 담당했는데, 당시 저로서는 유물론의 마르크스주의와 또 일본인의 모가지 자르는 소위 국수적인 민족주의에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대결한다는 비장한 대결 의식도 있어 상당히 열심히 일했던 것입니다.
300 명 정도의 아동들을 아침, 오후, 밤으로 세 반에 나눠 매일 가르쳐야 했던 것입니다. 애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철저히 깨달은 것은, 사람 자체의 문제는 사회사업 같은 것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나는 또 이때 자신의 도덕적인 自意識(자의식)에 눈뜨기 시작해서 죄의 문제로 심한 고민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시 간접 독자였던 무교회 잡지인 ‘聖書朝鮮(성서조선)’의 주필인 김교신(金敎臣) 선생을 하룻밤 찾아 심중의 고민을 호소했던 것입니다. 선생은 양심 문제, 죄의 문제 같은 것은 신앙 이외에는 해결의 길이 없다고 하시며, 일본에 가서 우치무라(內村) 계통의 성서연구회에서 성서를 배워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선생은 아제카미(畔上) 선생과 쓰카모토(塚本) 선생 성서 집회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곧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동경에 도착한 것은 바로 1936년에 있었던 일본의 2·26 군사반란 사건 직후의 금요일이었습니다. 간다(神田)에 숙소를 잡고 다음 토요일에 간다의 유명한 書店街(서점가)를 기웃거리다가, 구단사카(九段坂) 위의 向山堂(고잔도) 書店에 들어가 생전 처음 우치무라 선생과 쓰카모토 선생 책에 집했던 것입니다. 나는 가게에 앉았던 아오야마(靑山) 부인과 이야기했는데, 부인은 쓰카모토 선생 모임에 나간다고 해서 나도 장소를 물어 다음날 마루노우치(丸之內) 선생 성서연구희에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곧 사쿠라 신마치(櫻新町)로 쓰카모토 선생을 찾았습니다. 바로 나보다 먼저 와서 선생과 이야기하는 젊은 분이 있어, 나는 뒤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그분이 돌아간 다음 선생은 나에게, 저 청년은 작년에 동경대학 법과를 나와 미쓰비시(三菱)에서 1년간 일해 왔으나 인생 문제에 심한 공허를 느끼고 이번에 다시 동경대학에 들어가 히브리어를 공부하고 장래 구약성서를 연구하려고 하는 세키네 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처음 세키네 씨를 만난 것은 이날 아침이었습니다. 선생 댁 뜰에는 흰 눈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그때의 세키네 씨는 몸집이 작고 그리고 얼굴이 뾰족한 才士型(재사형)의 타입이었습니다. 그랬던 씨가 그 후 루터 같은 투사형으로 변한 것이 저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역시 구약 연구로 예언자같이 투사가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 후 씨가 독일로 떠날 때까지 꽤 오래 마루노우치 집회에서 함께했습니다만, 씨에게 한 마디도 이야기를 건넨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한 번 씨가 강단에서 생생한 회심의 체험을 이야기했을 때는 나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쓰카모토 선생 하기 집회에서 하나님께 아주 목을 졸려 죽는 무서운 죽음 그것이었던 회심의 경험을 했던 나와는 정반대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세키네 씨의 그것은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져서 길 가는 사람이 다 형제같이 보였다는 기쁨에 넘친 회심의 보고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종전 후에도 씨와 만난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종전 다음 해 봄 서울에서 일본인 신앙의 선배가 권하는 대로, 그 분이 귀국하는 배를 함께 타고 그분의 고향인 와카야마(和歌山) 고보(御芳)에 가서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며칠 놀다가 동경의 쓰카모토 선생을 찾았습니다. 사쿠라 신마치의 벗나무 길에서 토요일이라 이발소에 가시는 선생을 대했는데, 선생님은 저의 손을 잡고 울면서 반가워하셨으나 저는 눈물 없는 不肖(불초)의 非情(비정)의 제 자였습니다. 수일간 선생 집에서 머물고 동경을 떠나기 전날 밤 저녁 때 선생님은 세키네가 독일서 돌아왔으니 만나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곧, 확실치는 않으나 스기나미(杉並) 區로 기억합니다만, 세키네 씨를 찾아갔습니다.
씨는, 자기는 이제부터 일본에서 일할 터인데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냐고 저에게 의견을 구했습니다. 저는 당시 방대한 舊版(구판) 마이어 신약 주해를 열심히 읽고 있을 때였는데, 구약의 중요한 책, 예를 들면 창세기·이사야·예레미야·욥기 등에 대해 마이어같이 자세하고 방대한 훌륭한 주해서를 많이 써 주면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대해 씨도 대체로 같은 생각이라고 해서 저도 기쁨으로 작별했던 것입니다.
그 후 씨는 서양보다는 동양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두 번이나 한국에 와서 아모스·엘리야·욥기 등에 대해 훌륭한 강연을 해 주어 우리로서는 정말 감사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첫 번째 방한(訪韓) 때―그것은 1974년으로 기억되는데―이곳 연세대학 신학부에서의 강연에 저도 차로 함께 갔는데, 별안간 전날 동경에서의 일이 생각나서 내키는 대로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의 지금까지의 시편이나 예레미야 같은 간단한 주해에는 만족할 수 없다고. 성서의 어느 한두 책으로 동서양 모든 고전과 사상, 철학, 종교 등과 대결하는 식의 더 큰 주해가 아니면 일본의 기독교의 개종은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점 우치무라도 어디선가, ‘회심은 성서 본문에서 온다, 성서의 傍系的(방계적) 연구보다는 본문의 주해 쪽이 더 오래 남는다, 신학은 서양의 방법이고 동양인은 직관으로 신앙과 진리의 본질에 육박하는 방법이 좋다’고 했다고. 대체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여기대해 씨는 “성서 개역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 일을 못 했다. 개역이 끝나 시간이 나면 그것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다시 “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허락되면 아모스와 호세아를 이 선에서 각각 1, 2천 페이지 이상 가는 큰 책으로 써 주면 좋겠다.” 고 주문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씨가 생애를 건 구약 개역 사업을 잊고 한 나의 천만 실례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제가 평소에 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치무라 선생과 2代(대)째까지의 선생들은 주로 성서 본문의 연구 혹은 주해 사업으로 일본적 혹은 동양적인 기독교 진리 또는 신앙의 자주적인 이해와 그 발견에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무교회 전도 자체에 대해서도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과거 일본 혹은 한국의 불교·유교 등의 진리의 이해, 토착화, 더욱 민족적인 이에의 개종도 주로 이 선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처음부터 무교회의 2대째까지의 선생들이 본격적으로 손을 못 댔던 구약성서의 연구와 주해의, 그야말로 루터나 칼빈 등에 필적하는 대사업을 씨에게 기대했던 것입니다.
저는 또 서양 세계의 기독교 2천 년에 뻗은 신학·사상·철학·제도·문물(文物) 기타 일체의 문화 현상에는 무엇보다도 카논―經典(경전)으로서 성서 자체의 깊은 주해적인 진리 탐구의 결과로서 신앙적인 개종이 깊고 근본적인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씨는 구약 개역 사업과 함께 신학적·사상적 측면에서 일본 내지 무교회 신앙에, 소중한 기여를 할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그러나 역시 저로서는 일본 민족의 개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적인 사상이나 그 우상·미신 종교와 대결적인 신앙진리의 발굴과 천명이 본질적인 일이라고 믿고, 한 가닥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이제 끝으로 저로서는 금후 무교회의 성서신앙에 의한 종교개혁적인 高揚(고양), 深化(심화), 확대로 일본 민족의 개종이 이루어지고, 여기서 나아가 일본의 기독교가, 특히 무교회 신앙이 우치무라의 토대 위에서 진정 세계적으로 인류의 신앙에 기여할 수 있기를 빌어 마지않는 바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은 금후 경제대국으로서 오로지 물질 문명, 기계 문명에 或種(혹종)의 기여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치무라가 꿈꾼 일본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사람의 동양인으로서도 이에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한국은 과거 불교·유교 등 동양 문명의 일본에의 전달자로서의 최소한도의 책임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일본은 서양 문명의 동양에의 전달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일본은 현재 2천 년 서양 기독교 문명 발전의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는 것 아닌가 해서, 저는 적이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저 한 사람의 祀憂(기우)이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입니다. 이상 저는 세키네 씨와 두세 번 만났던 일을 생각하고, 이 보잘것없는 글을 썼습니다. 양해 있으시기를 빕니다.
(1982년 6월 세키네 저작집 월보 제1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