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김장하는 날이면 맨 먼저 아들에게 김치 맛을 보게 한다. 음식 맛을 특별히 잘 잡아내기 때문이다. 여태껏 실패한 적은 없었지만, 맛을 보는 그 순간만은 긴장된다. 엄지손가락을 척 올린다. 까다로운 아들 입맛에 맞는다면 올겨울 김장은 성공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딸네 집에서 일어났다.
결혼 9년 차인 딸이 올해는 직접 김장을 해보겠다고 한다. 해마다 엄마가 해주던 김치 맛에 길들여진 딸이다. 김장 법을 전수해 달란다. 이제는 일 앞에 몸이 사려지는 터다. 그런 엄마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일까. 언제까지나 엄마의 신세를 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나 보다. 배추가 도착하는 날에 딸내 집으로 갈 참이다.
나도 결혼하고 한참을 친정이나 큰집 형님들의 김치를 얻어먹었다. 의상실을 하다 보니 바쁘다는 이유로 김장김치를 담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히 큰형님이나 둘째 형님 김치와 친정 올케언니의 감칠맛이 나는 김장 솜씨는 까다로운 남편과 아들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런 세월도 흐르다 보니 내가 김치를 담아야 하는 시기가 왔다. 애들도 컸고 한 가정의 주부로서 언제까지나 얻어먹을 처지는 아니었다.
처음 김장할 때는 살림꾼으로만 살아온 언니의 도움을 받았다. 그때 눈여겨본 양념 배합법을 다음 해부터는 내 나름의 김장법을 터득했다. 큰형님과 외숙모 김치를 최고로 꼽던 남편과 아들딸의 입에서 감동을 쏟아내는 김치 맛을 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김장김치 맛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은 없다. 그렇다고 내 솜씨가 특별하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우리 가족의 입맛에는 그랬다. 이런 내 김치 맛을 전수받아 해마다 맛깔 나는 김치를 담아낼 딸의 모습을 그려보며 멸치 액젓과 새우젓을 챙겨 광주행 버스를 탔다.
광주에 도착한 날 오랜만에 딸과 김장 준비 재료를 사러 장으로 갔다. 굴, 쪽파, 무 미나리, 갓, 청각, 생강, 마늘도 빠짐없이 샀다. 모처럼 딸과 함께 장바구니를 채우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음날 절임 배추가 일찍 배달되었다. 배추에 물이 빠지는 동안 찹쌀풀을 끓이고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도 끓였다. 열다섯 포기 배추에 고춧가루 세 근 반으로 했다. 먼저 육수 물과 멸치 액젓으로 고춧가루를 불렸다. 매실청도 조금 넣었다. 다음 소에 들어갈 채소들은 기준은 없다. 내가 짐작하는 양만큼 넣었다. 너무 싱거워도 깊은 맛이 나지 않으니 소금으로 양념 간을 맞췄다. 소금물에 씻어놓은 굴도 챙겼다. 분명히 들어갈 재료는 다 챙겨 넣었지 싶다.
감탄할 김치 맛을 기대하면서 첫 번 배추에 양념을 발랐다. 속 배추 한 잎을 떼어먹었다. 짐작했던 맛이 아니다. 딸도 맛을 봤지만, 너무 맵고 짜단다. 나 역시 다시 먹어봤지만, 짠맛과 매운맛만 입안에 가득하다. 사위 입맛을 빌려본다. 약간은 짜지만, 맛은 괜찮다고 한다. 아마도 장모님의 수고로움에 실망을 주지 않으려는 말인 줄은 알지만 역시 마음은 안절부절못한다. 김치냉장고에서 푹 삭아지면 짠맛은 사라지고 깊은 맛이 날 거란 생각으로 찜찜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삼 분의 일 정도 양념을 발라갈 쯤이다. 빈 김치통을 가지러 가던 딸이 소리를 친다.
“엄마! 어째 이런 일이,”
싱크대 뒤쪽 그릇에 담겨있는 갈아놓은 마늘과 생강을 발견한 것이다. 너무 황당했다. 김치 양념에 제일로 중요한 마늘과 생강이 빠져버린 것이다. 버무린 김치가 제맛이 나지 않은 이유였다. 요즘 깜빡하는 건망증이 심해진 내 탓도 있지만, 아직 새파란 젊은 게. 딸에게 원망을 쏟아부었다. 황당한 딸도 애를 셋을 낳고 보니 기력이 빠져 깜빡하는 증세가 심하다는 변명을 한다. 어이없는 상황에 둘이서 마주 보고 웃을 수밖에.
기억해야 할 단순한 것들을 내 뇌는 저장하는 기능을 잃어가는 모양새다. 점점 심해져 가는 건망증 때문에 결국은, 이런 사단이 벌어졌다. 살아오면서 고통스러웠던 나쁜 기억들은 쉬 잊어버려도 좋으련만 시간이 더할수록 선명하고 뚜렷해지니 말이다. 내 건망증을 호소하면 들어주던 사람들의 황당했던 경험담을 들을 때면 나만이 당하는 일이 아니라는 동질감에 그런 때는 마음의 위로를 받기는 했다.
남은 양념에 갈아놓은 마늘과 생강을 섞었다. 먼저 발라놓은 배추 속을 털어내고 다시 양념소를 켜켜이 발랐다. 속잎을 떼어 맛을 본다. 마늘과 생강이 김치 맛에 조화를 부렸다. 짜고 맵던 김치 맛은 사라졌다. 입안에 부드러움이 감도는 감칠맛이 난다. 바로 이 맛이다. 딸과 마주 보며 안도의 웃음을 웃는다.
옛날 여인네들은 김치 맛을 과학적으로 연구했을 리가 만무하다. 김치에 마늘, 생강, 젓갈과 고춧가루로 양념해서 숙성시켜 오래 먹을 수 있는 먹거리로 만들어낸 옛 조상님들의 지혜가 혀를 차게 한다.
마침 배추와 양념이 딱 맞게 마무리가 되었다. 딸은 두 쪽씩 김치를 비닐 팩에 넣어 손자를 시켜 그동안 김장김치를 얻어먹었던 집으로 배달시켰다. 만드는 동안 황당한 사연도 있고 내 입에 맞는다고 다른 사람들의 입맛에 맞을까 하는 보장은 없다. 더구나 광주 사람들의 맛깔스러운 음식을 만드는 손맛을 이미 알고 있는 터다. 딸의 친한 지인들에게 체면을 세워줘야 하는데, 내색 못하는 마음만 죄불안석이다.
한참 뒤다. 걸려온 전화 통화 중 딸의 웃음소리가 경쾌하다. 김치 맛을 본 지인과의 통화로 딸이 환하게 웃는다. “광준이 엄마가 올해 먹어본 김장 중에 우리 김치가 제일 맛있다.”라고 한단다. 또 다른 분의 인사도 받았다. 물론 접대 인사겠지만 어렵게 만들어낸 김치라 말이라도 기분은 좋다. 무뎌져가는 뇌세포가 나를 황당하게 한 날이다.
그런데 딸이 양념 배합 비율을 알려 달랜다. 고춧가루만 알려주겠지만 다른 것은 몇 그램이라는 기준으로 말하기는 난감하다. 그동안 해온 노하우로 어림잡아서 한다 했더니 딸의 얼굴이 난처한 표정이다. 그런 설명으로는 김치를 담아낼 자신이 없단다. 내년에도 엄마가 직접 와서 도와줘야 한다니 언제쯤이면 딸이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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