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저 문장은 대대로 전해지며 썩지 않으니, 옛말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모두 그것이 정련되어 흠이 없어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는 또한 효성스런 자손들이 대대로 집안에 전하며 진기하게 여겨 보존한 것도 있다.
마치 제기로 쓰이는 옛 그릇들이 깨지고 이지러져 일상의 그릇으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아 남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지만 그 집안에서는 열 겹으로 싸서 백세토록 전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
나의 표제(表弟:이종아우) 민응시(閔應時)가 내게 와서 주머니 속의 종이 몇 장을 보여 주었다. 그의 현왕조고(玄王祖考 :오대 고조)인 민효열(閔孝悅)과 고왕조고(高王祖考:고조)인 민반(閔泮)이 지은 시문이었다. 그 자손이 비록 문학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천성이 순수하고 효성스러워 여러 대에 걸쳐 집에서 간직해 온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차례 병란을 겪고도 수백 년 동안 유실되지 않았으니, 또한 세상에 드문 일이다.
나 또한 그분들의 외손의 후예가 되기에 그 시문들을 보니, 전아(典雅)하여 세상에 전할 만하므로 아래에 기록해 둔다.
민효열은 문과에 급제했고, 민반은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이른 나이에 음직으로 나아갔는데, 정과에는 급제하지 않았다. 두 분 모두 관직이 현달하였다.
<신루북헌기(新樓北軒記)>
신사년 여름 내가 새로 부임해 연정(蓮亭)과 관아 건물이 퇴락한 것을 보고 개연히 중건하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 그런데 마침 국가에서 경장(更張)에 힘써 양전(量田). 호적(戶籍). 호패(號牌) 등의 일이 많이 위임되었다.
조정의 관리들이 주와 군에서 앞다투어 모여 일하게 하면서 밤낮으로 재촉하고 독려하며 성화를 부리니, 조정 안팎의 관리들은 근심에 싸여 오직 기한에 늦어 허물을 얻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니 무슨 겨를에 관아 건물을 중건할 수 있으리오? 부임한지 몇 개월이 지나 아전과 백성들을 모아 일을 하기에 편안한가 물으니 아전과 백성들은 모두 꺼리며 응답이 없었고, 간혹 흉보며 비웃는 자들도 있었다.
나는 여러 방편으로 반복해서 깨우쳐 이해 가을에 비로소 역사를 시작하였다.
이곳의 땅은 평평하고 넓었는데, 시골 마을이라 물산이 없었다. 서울 밖으로 나누어 파견해 조금씩 취해 오도록 하고, 또 백성들의 힘을 소중히 여겨 다만 관속들에게 역사를 시켰다. 실낱같이 작은 힘이 끊기지 아니하여 해를 넘겨서야 집채가 완성되었다. 이에 전에 꺼리고 비웃었던 사람들도 모두 기뻐하며 달려와 역사에 참여했다.
이로부터 '서헌(書軒). '향교재(鄕校賷)'. '공수청(公須廳)' 등 퇴락함이 매우 심했던 곳들이 점차 중건되어 3년이 지나자, 관아 건물이 대략 갖추어졌다. 나 또한 임기가 다 되어 떠나게 되어 공사를 완결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누대와 못의 짜임새를 뛰어나게 장려하게 짓지는 못했지만, 탁 트여 맑고 상쾌해 번잡하고 답답함을 씨어주어 공무를 편안히 보기에는 충분했다.
아! 나의 마음도 고갈팠고 역사의 어려움 또한 심했다. 그러나 옛 누정의 퇴락함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오늘날의 공력을 모를 것이고, 역사의 어려움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전날의 수고로움을 모를 것이다. 이제부터 내 뒤를 이어 다스리는 이들이 이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고, 이곳에서 잔치를 벌이고 즐기면서 내가 수고롭게 마음썼던 것과 어렵사리 경영했던 것을 과연 생각이나 할까?
아직 완성하지 못한 공사와 진척시키지 못했던 일을 끝내 완성시킬 수는 있을까? 만약 관아의 장부나 문서에 피곤하고, 혹은 술에 빠져 기울어져 무너지는 것을 좌시한 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아홉 길을 쌓은 공이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무너질 것이니, 이 어찌 내가 오늘 기대하고 바라는 뜻이겠는가!
천순(天順) 7년 계미년(1463, 세조9년) 9월 초길일에 부사 여강(驪江)민효열(閔孝悅)이 기록한다.
동지 민반의 시다
*구정단(九鼎丹)--- 먹으면 선골(仙骨)이 된다고 하는 도가(道家)의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