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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비를 뚫고 여기까지 올라오신 우리 동력자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인사 한번 해볼까요?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른 지역은 맨날 비가 온다는 소식만 들었는데 우리는 안 와가지고 언제 오나 했더니 무섭게 오네요. 진짜 그러니까 이게 막상 닥쳐봐야 이게 남의 일같지만 여겨지다가 우리 일로 여겨지니까 지금 우리 지금 계속 문자 뜨는 거 보니까 산사태 주의보도 있는 것 같고 아무튼 여러분이 이 기간에 더욱더 함께 기도하고 또 가정 주변도 좀 돌아보실 필요가 있는 게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은 곳들이 문제가 생기는 경우들이 꼭 있어요. 하수구 같은 게 막혀 있는지 한번 보시고요. 이게 역류되면 또 이게 물바다가 되고 그러잖아요.
여러분들은 이번 기회에 한번 주변을 쭉 이렇게 돌아보시는 것도 참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이제 말씀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사도행전은 4개의 복음서 사복음서 그리고 이제 그 뒤에 나오는 서신서 서신서는 약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라고 하는 교리에 대한 이야기이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보여주신 주님의 삶이 이런 거야 그러니까 우리도 이렇게 살아가야 해 라고 하는 걸 보여주는 게 교리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이 사도행전은 이 두 가지에 딱 가운데 끼어 있어요.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그려준 복음서,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삶을 기록한 복음서와 그리고 이제 그 예수님의 행적을 이렇게 그 삶에 대한 해석을 적어놓은 또 알려주는 교리서 그 가운데 껴 있는 게 바로 사도행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이 사도행전이 이 위치에 있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냐면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서 행하셨고 또 그 행하신 일들이 해석됨으로 우리가 그 삶을 이제 따라가는 과정이잖아요. 근데 이 중간에 예수님이 진정으로 행하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도들의 행전이 없었다면 이것은 단절되고 맙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의 인격이나 그 사람의 소양을 파악하려면 언제 이 사람의 삶을 보면 될까요?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겠죠. 근데 뭐 즐거울 때 또 힘든 일이 있을 때 또 갑작스러운 어려움이 있을 때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겠지만 가장 그 사람을 어떤 인격이고 어떤 소양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언제냐면 일상입니다. 일상 그러니까 특별한 어떤 경우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이렇게 가지고 있는 DNA가 있어요.
특히 기독교인들은 박해가 일어난다든지 좀 뭔가 어려움이 있으면 무릎을 꿇게 되는 게 우리 기독교인들의 어떤 신앙의 또 훈련 과정이었기 때문에 힘든 일이 있다 기쁜 일이 있다. 물론 이런 때도 신앙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 신앙은 그 사람의 일상에서 보여줘. 그러니까 일상의 모습이 물론 그거는 자기만 알죠.
다른 사람이 모르는 나의 일상들이 있으니까요. 크리스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신앙을 가졌느냐 아니냐 그건 교회 안에서 예배드릴 때의 모습만으로는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 예배드리러 와서 여기서 믿음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물론 진짜 믿음이 없는 분들은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도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여기 온 것만으로도 고마운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예배당 우리 예배의 자리에 있어서는 모두가 다 경건해 보이고 또 신실해 보여요. 하지만 우리의 일상으로 우리가 돌아갔을 때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왜 이 말씀을 드리는 거냐면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주님을 쫓는 사도행전이라는 의미로 행실행 전기전 그러니까 행함을 기록했다고 해서 행전이라고 합니다.
근데 이게 복음서와 교리서 이 사이에 기록됐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한마디로 주님의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면 주님이 앞에서 보여주신 삶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주님을 쫓아가야 되는 사람이고 그 토대는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 없을까요? 바로 우리가 거울입니다. 거울 우리가 대형 모니터입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이 바로 대형 모니터, 대형 거울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요즘 제가 이렇게 양육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분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요즘 전도하기가 힘들다라는 말 속에 그런 말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인들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거예요. 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내가 더 힘든 일이 있었어. 나는 그 사람 때문에 나는 교회 못 가 막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거죠.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은 무언가를 본다는 겁니다. 복음서와 교리서 사이에 유다서나 요한계시록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한 행함의 기록인 사도행전이 자리 잡은 이후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삶의 원동력이 바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것을 해석하며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행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절과 2절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볼 텐데요. 먼저 사도행전은 의사이면서 누가 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데오빌로라고 하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내가 먼저 쓴 글이라고 말을 하고 있죠. 여러분 누가 복음을 보면 데오빌로를 위해서 이 누가 복음을 기록했다고 또 기록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누가 복음을 지금 지칭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첫 번째 썼던 누가 복음에 대한 걸 상기시키면서 이 누가 복음의 핵심을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읽은 말씀에서 보면 누가 복음의 핵심은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 누가복음은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보여주신 삶의 기록에 대한 책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좀 관심 있게 볼 내용이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보면 그냥 쭉 흐름으로 읽는 성경이 있지만 또 이렇게 분석을 하면서 읽는 성경이 있거든요. 근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려면 원어를 같이 보면서 읽으면 조금 더 이렇게 이게 풍성해지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게 언어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놓치는 부분들이 생기거든요. 그런데 오늘 이 내용 가운데 예수님의 삶 가운데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고 하는 말에 지금 동사가 세 가지가 시작 세 가지가 있는데 행하시다 가르치시다 시작하시다가 있죠. 제일 먼저 쓰인 동사가 뭐예요? 행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통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하면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치유하시고 이렇게 보통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이 누가는 좀 다른 관점에서 지금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행하셨다고 하는 걸 앞에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행함으로 보여주셨다는 걸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가르침이 더 소중하고 영향력이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의 삶 자체가 그 말씀대로 살아오신 삶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행하심이 만약에 선행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준 그 가르침은요. 영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우리 tv에 나오는 기라송 같은 정치인들 교수님들 그런 사람들 이야기 막 이렇게 대단한 말들 듣다가 간혹 그 사람들의 비리나 어떤 일들이 탁 터지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말했던 모든 걸 그냥 다 무시해버리잖아요. 그 사람이 그대로 안 살았다는 걸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렇게 되는 것이죠. 행함이 결여된 가르침은요. 그건 그냥 코미디와 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심으로 이 땅에 그 마국 간에 정말 초라한 모습으로 태어나셨고 그리고 이 인간 세상에 더럽혀진 인간과 부딪히며 30년을 그 생활 생활을 해오셨습니다. 친구로서 그리고 구원자로서 세례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세례 요한 앞에 친히 무릎을 꿇고 먼저 세례를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하나 가르치는 그 과정 앞서서 먼저 자신이 행함을 보여주는 분이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의 행하심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로 나 때문에 우리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아웃사이더가 돼서 완전히 세상 나라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다시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 사람으로 우리를 끄집어 올려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전생을 그 일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2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적으로 말씀을 통해 드러내주고 있는 거예요. 왜 그랬는지 어떤 분이신지 여러분 사도행전이라는 말을 제가 아까 원어적으로도 좀 보면 좋다고 그랬잖아요. 이 사도행전이라는 말 자체가 프랑세이 세이스 아포 스톨론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나라 말로 직역한 거라고 하는데 이 말이 어떤 말이냐면 프락시스라고 하는 단수형의 그러니까 행함 행실 또는 행위 이런 말을 단수형으로 쓰고 있는 단어의 복수형입니다.
말이 좀 복잡하죠. 영어로 보면 사도행전에 이 말을 acts를 붙입니다. 그러니까 act는 단수고 s를 붙이면 복수가 되는데 무슨 차이가 있는 거냐면요. 이게 어떤 큰 차이가 있는 거냐면 믿음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단수형이다 그러면 믿음은 어떤 일시적인 현상에 일시적으로 반응하고 또 그렇게 감정에 따라서 한 번 아멘 하는 그런 것도 다 믿음의 범주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단수라고 표현한다면 복수는 일상의 삶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삶이 지속되는 것 그러니까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것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이 s라고 하는 글자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차이를 일으키는 걸 보게 되죠. 에클레시아가 우리 말로 교회로 번역이 됐습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 교회가 한자로는 가르칠 교 모일회라고 하는 말을 쓴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교회에 하면 뭔가를 배워야 하는 곳 가르쳐야 하는 곳 이런 인식이 있습니다. 그렇죠 근데 여러분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가르치기에 앞서서 뭘 하셨다라는 걸 먼저 지금 발견하자고요. 행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설명하면서 누가는 예수님은 행하신 분이야 말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먼저 본을 보이신 분이예요.
우리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 누군가에게 뭔가를 가르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주님을 쫓는 무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신앙인은 주님을 따라가는 거라고요. 복음서 뒤에 우리 사도행전이 사도행전은 지금 계속 기록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8장으로 마감되었지만 29장은 우리가 기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사도행전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살아간 삶을 따라 본받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을 해석함으로 계속적으로 일상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그런 삶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모두가 다 교회라고 하는 사실이에요.
하늘 소망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느냐 안 되느냐 전적으로 이것은 우리 개개인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노효철 목사에게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우리에게 우리 각 개인에게 하나님이 붙여주신 거예요. 하늘 소망 교회로 우리를 불러주신 은혜. 그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단수로 그냥 한 번 어떤 은혜를 경험함으로 여기에 모이게 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 계속 하나님의 놀라운 그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사도행전을 일구어 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이 모르실까요? 아셔요? 그렇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연약한 우리들을 이렇게 모아주신 이유가 뭘까요? 그리고 우리를 하나 된 공동체로 주어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만약에 더 강한 사람들이 많이 있고 부한 사람들이 많이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면 아마 처음부터 우리의 힘을 의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할수록 우리는 더 겸손하게 낮은 모습으로 주님을 더욱더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을 주어 삼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사로서의 삶을 사는 거예요.
우리의 일상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 사도행전적인 삶을 사는 것, 즉 행함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첫 번째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길 원합니다. 두 번째가 가르치셨다고 하는 말을 썼습니다. 여러분 여러들 자녀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 이해하나요? 그러면 참 아주 얼마나 기쁠지 모르겠어요. 그렇죠 우리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100%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수준의 차이가 있어요. 사랑의 수준의 차이가 있고 인생의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식들은 부모가 얼마나 희생하고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렇게 지금 뭔가를 해주고 그렇게 그 역할을 하는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 차이입니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자식이 부모와의 차이가 커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온전히 우리 스스로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냥 행하고만 가셨다면 지금 우리는 그 예수님이 행한 어떤 행동 어떤 그 결과물을 보면서 그걸 따라하느라고 아마 더 힘들게 신앙생활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금식하셨어 언제 몇 시에 몇 시에 금식하셨어? 우리도 그때 해야 돼. 예수님이 언제 어디 가셔서 누구를 살리셨어 그러면 뭘 해야 돼 이런 식으로 행위적인 부분을 따라갔을지도 몰라요.
근데 예수님은 행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행하심의 의미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다는 사실 가르치는 것이 그래서 예수님의 주된 사역 중에 하나였습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셨다라고 하는 이 누가의 기록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입장으로 본다면 우리를 가르치시는 주님께 먼저 철저하게 배우고 그리고 그 배우려고 하는 자리가 먼저 우선되고 난 이후에 우리도 가르치는 자리에 가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하시죠.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런데 이 말씀을 언제쯤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막바지에 하셨어요. 처음부터 제자들 만나자마자 니네들 빨리 가서 가르쳐 너희들 빨리 가서 해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들과 3년 동안 숙식을 같이 하고 밤낮으로 그들을 가르치시면서 승천하기 직전에서야 그들에게 이 명령을 내리십니다.
뭐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가르치기 앞서서 먼저 배우는 자가 돼야 된다는 거 신앙은 그냥 선포하고 결단하고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니라고요. 계속 배워가는 겁니다. 인생도 여러분들 다 벌써 알고 계시나요?
여러분들 인생을 인생도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인생을 계속 배워가는 것 같아요. 신앙도 더더욱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고 배워야 또 우리도 나눌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 배워가는 과정 속에 두 가지 유념 사항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배움의 과정 속에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 굉장히 심각한 상황에 있다는 걸 우리가 여러 가지 데이터상으로 알고 있잖아요.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혹시 대략 아시는 분 계시나요? 피크를 찍은 게 88올림픽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가 막 폭발적으로 부응했어요.
근데 이미 88올림픽 전에 그게 점점 둔화되기 시작했고 88 올림픽이 딱 정점을 찍고 그때부터 하얀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그게 뭐라고 지금은 이제 그걸 정리하냐면 세속주의 물질주의가 한국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막 뭔가 이렇게 우리가 올림픽을 하면서 세계화 막 하고 막 화려하게 하고 뭔가 크게 하고 막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들어오다 보니까 교회들도 막 건축을 해도 크게 건축하고 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게 부응하는 거라고 하고 이런 식으로 세속화 물질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사람의 숫자 또 헌금의 양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그 순간부터 말씀의 선포가 위로 격려 또 복 이런 쪽에 포커스가 맺혀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실수죠. 이건 회개해야 될 부분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참 어려운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위로가 필요해요. 위로가 필요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에 대한 이야기들도 충분히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너무 그쪽으로만 쏠려버린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말씀으로 뭔가 내게 도전이 되거나 내 안에 상처가 일어나면 그걸 잘 받아들이지 못해요.
여러분 크리스천들의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면 상처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상처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더더욱 상처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말에도 조그마한 상처에도 몸살을 찌르고 또 특별히 교회 안에서 관계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근데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요. 가르침을 받는 과정 속에 성장하는 과정 속에 어떠한 상처나 어떠한 아픔의 과정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는 걸 인식해야 됩니다. 아이들도 성장통이 있어야 애들이 쑥 자라잖아요. 제일 빨리 자라는 그 순간이 성장통을 경험합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몸이 막 아파요. 근데 그게 성장통이라고 말을 하는데 그때 잘 먹이고 잘 관리해주면 쑥쑥 자라는 걸 보게 됩니다. 히브리서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신 이에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아멘 여러분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마치 확대견같이 나를 자세히 들여다봐버리는 거예요. 아까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솔직히 내 일상이 민낯이 낱낱하게 탁 드러나는 순간 부끄러운 일들이 우리에게 전혀 없을까요? 확대경으로 나의 삶을 이렇게 탁 주관한다면 여러분들의 집을 압수수색하고 여러분들 계좌 핸드폰 압수수색해가지고 여러분들을 털어내면 어떨까요?
근데 오히려 성경은 지금 말한 그런 것들보다 더 자세하게 우리를 현미경처럼 드러내 보인다는 거,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감추어진 것까지도 찌꺼기까지도 여지없이 드러나게 하신다는 겁니다. 어떤 수술 메스보다 더 예리하게 우리 안에 있는 썩어진 것들을 돌려내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우리에게 진실되게 받아들여지는 순간 우리 안에 아픔이 있을 때도 있고 또 때로는 돌려내는 그 고통이 우리에게 경험될 때가 있다는 거 여러분 예레미야는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근데 말씀을 선포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사람들이 아멘하고 회개하고 돌이키고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그러면 참 좋을 텐데 오히려 예레미야를 향해서 핍박이 일어나죠. 예레미야도 그 핍박이 너무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선포하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결단합니다. 근데 그 결심은 번번히 무너집니다. 그 이유를 예레미야 20장 9절에 보면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때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까지 타들어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행복하고 맙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선포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사람들이 자기를 비난하고 그렇게 핍박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 이제 말씀 안 전할 거야라고 다짐까지 했는데 결단까지 했는데 중요한 건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심장과 뼛속까지 불태워버리는 거 능력이 그 가운데 임하니까 그가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절교합니다.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으면서도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러한 고백을 했던 것이죠.
여러분 성경 속의 위대한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냥 우연히 어쩌다가 생겨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그 말씀 가운데 상처가 생기기도 하고 핍박을 받기도 하고 그런 과정을 이겨내는 과정 속에 그런 존재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바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 말씀의 배움이 그 안에 일어났다는 사실이죠.
우리가 말씀 속에 살아가기 위해 두 번째 언제나 겸손하게 우리는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겸손하다고 하는 것은 내 연약함을 안다고 하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내가 형편없이 연약한 존재임을 자각한 사람은요. 하나님이 뭘 말해도 아멘 하나님 제가 그렇게 하기를 노력하겠습니다. 그 가르침에 쫓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죠 사도바울도 역설적으로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가장 약할 때가 가장 강함이라 왜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때니까요. 내 약함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더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더 강력해질 수 있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오늘 저녁 우리가 정말 이 시대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정말 위기 가운데 있는 게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 서로 당리당략을 위해서만 싸우고 있습니다. 나라와 국민들을 눈꽃만이 여기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럴 때 오히려 하나님께 더 기도하며 붙들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정치인들을 우리가 아무리 우리가 찾아가서 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뭐라고 질책을 할 수 있겠어요? 물론 필요한 일들을 감독 우리가 해야 되겠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될 때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과정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가르치는 자가 되기 위하여 배우는 과정 속에 내 심령이 찢어지는 상처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또 그럴 때 밤이나 낮이나 우리 안에 더욱더 겸손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그 말씀에 귀 기울이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온전히 나를 그 가르침에 맡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삶의 일상을 통해서 믿지 않는 누군가를 또 가르칠 대상으로 우리를 삼아주실 것입니다. 나를 가르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 그 주님께서 수술의 메스보다 더 예리한 것들로 우리를 때로는 수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 안에 있는 것들, 더러운 것들이 온전히 드러내지고 온전히 주님께서 나의 안에 있는 교만함을 빼주시고, 또 내 일상 자체가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주님의 뜻 가운데 성령행전, 사도행전을 계속 이어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