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1. 김춘수의 이미지론과 존재론적 사유
이미지즘의 철학적 기원: 베르그손의 이미지 사유 → 흄 → 에즈라 파운드
파운드의 ‘이미지’ 개념: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시공간의 해방을 뜻함
들뢰즈의 이미지 체계와 비교: 자연수·정수 = 유기적 이미지 체계 무리수 = 크리스털 체계 (이미지의 무질서, 다면성)
김춘수 시의 위치: 무의미시 = 이미지의 절대성, 의미의 박탈 이미지 간의 ‘소멸적 충돌’을 강조 초기엔 크리스털 체제, 현재는 유기적 체제와의 과도기 상태
2. 이미지 해체를 통한 사물의 발견
무의미시, 날이미지시, 비대상시는 공통적으로: 이미지의 고정된 의미 해체 존재 그 자체로의 진입을 목표
예시 1: 원구식 「비」 ‘비’의 기존 의미 해체 → 물의 증발·비의 오르가즘 등 새로운 사유 창출 사물의 내재적 진실을 추구하는 시적 태도
예시 2: 송승환 「제라늄」 색채 연속체(푸르름~붉으죽죽)를 통해 실재적 이미지 탐색 무리수 세계(완비된 실수체계)의 감각적 구현
3. 뇌의 감산작용과 이미지
들뢰즈의 영화-뇌 이미지론과 연결: 무리수적 단절 = 뇌의 불연속성과 감산 구조
김언 시의 특징: 비통사적 구조(형용사+‘있다’)를 통해 의식의 미분 포착 예시: 「중」, 「있다」 → 감정이나 상태의 고정 불가능성 표현 세계를 구성하는 미세한 감각 차이(미분적 차이)를 탐색
시란 무엇인가? 의식과 감정의 깜빡거림 사이, 이미지화되지 않은 것들의 지각
4. 이미지와 언어의 불일치
이승훈 인용: 언어가 대상을 명명하는 순간 실재는 소멸 언어=감산작용: 시는 우주적 지속에서 뇌가 추출한 제한된 정보 시의 언어는 실재의 표정만을 담아냄
‘무의미’도 결국 의미화됨: 파이(π)처럼 해석 가능한 무의미로 귀결됨
5. 이미지의 혁명과 시인의 운명
시인의 소명: 이미지 고정(제국화)을 거부 의미의 유목과 불가시성 탐색
이미지의 해방 = 시의 자유 = 인간의 해방
결론: 시는 고정된 이미지(이데아)를 전복하고 사유의 혁명을 추구함
-------------------------------------------------------- (본문) 시와 이미지‧2 - 이미지와 사유의 혁명
1. 김춘수 시의 이미지와 파이(π)의 존재론
근대 시학의 이미지즘의 기원에는 베르그손의 이미지에 대한 사유가 자리한다. 이미지즘의 창시자 에즈라 파운드에 영향을 주었던 흄의 이미지론은 베르그손의 이미지에 대한 강연에서 비롯된다. 흄에게 있어 이미지론의 핵심은 이미지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직관적 언어의 본질에 해당한다는 것이고, 에즈라 파운드는 이를 이어받아 이미지는 단순한 회화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한계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와 해방과 관계한다고 주장한다.(홍은택, 「영미 이미지즘 이론의 한국적 수용 양상」, 국제어문 27집, 2003, 159-161면.)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는 사상 이상의 것”이라는 진술에서 보듯, 근대 시학의 이미지론은 베르그손이 말했던 이미지의 사유 체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에즈라 파운드의 ‘보티시즘’(Vorticism, 소용돌이주의)은 이미지의 역동성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의미론적 질서에 충격을 가한다.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은 기성의 사상적 질서에 균열을 가할 수 있다는 위의(威儀)를 획득하며, 이는 베르그손 이미지론(이미지=물질=운동)의 자장 속에 있는 것이다. 베르그손이 강조한 이미지는 들뢰즈의 용어로는 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다. 크리스털이 다면체이듯 의미가 무질서하게 분산되는 체제. 지난 글(사이펀 2020년 여름호)에서 언급한 들뢰즈의 도식적 사유를 다시 인용해보자.
시의 이미지는 자연수와 정수로부터의 이탈을 지향한다. 오늘날 시적 이미지의 본질적 양태는 무리수의 무한한 세계로의 진입이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이미지들(수학적 연속체의 경우 무리수)이 존재한다. 그 이미지의 존재들은,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내재성의 평면’(다른 말로는 잠재태virtuality)을 구성한다. 이미지에 관한 한 오늘날의 시인들은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내재성의 평면’을 펼치려 하는 과격함을 보이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시의 이미지가 고정점에 정박되어 있는 동안 시의 이미지가 제공하는 희열은 중화되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이전에 없던 시의 이미지를 찾아서 무리수의 세계(이미지의 크리스탈 체제)를 탐험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기존의 이미지 체계를 뒤흔드는 전복(subversion)을 감행한다. 이는 물론 기성 질서와 의미 체계에 교란을 초래한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김춘수, 「처용단장-제1부」 부분, 김춘수 시전집(현대문학,2004)
김춘수의 「처용단장」은 발표 당시 의미를 부여하기 힘든 이미지들의 결합이었다. 각각의 이미지는 의미를 가지지만, 이미지의 연결에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객관적 대상의 재현으로서의 이미지가 될 수 없었고,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이미지 자체가 목적이고 사물인 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김춘수는 이를 ‘무의미시’라고 명명한다. 그의 무의미시론의 핵심은 이미지로부터의 의미 박탈이다. 그는 말한다. “이미지를 지워버릴 것, 이미지의 소멸-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아니라(연결은 통일을 뜻한다)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뭉개 버리는 일, 그러니까 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하여금 소멸해 가게 하는 동시에 그 스스로도 다음의 제3의 그것에 의해 꺼져가야 한다.”(김춘수, 「이미지의 소멸」, 김춘수 전집2-시론, 문장사, 1982, 395면) 다시 말해, 이미지와 이미지의 의미 연결을 파괴하여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뭉개 버리”고 의미를 소거시켜나가는 것이 무의미시론의 방법적 핵심이다. 그의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역사=이데올로기=폭력’의 현실 부정과 도피에서 발현된 무의미시론은 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며, 이미지의 절대적 체제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여기서 지난 글에서 언급한 도식을 다시 한 번 환기해보자.
<표‧3>
그러나 김춘수의 시가 당대에 미쳤던 충격은 오늘날에는 거의 희석되다시피 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보다 더한 난해시들이 더욱 많이 생산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김춘수의 시는 한국 현대시에서 무리수 파이(π)의 존재 양상을 닮아 있다. <표‧1>과 <표‧2>에서 보듯, 무리수 파이(π)는 이미지의 체제에 대입할 때 크리스털 체제에 속한다. 그러나 무리수 파이(π)는 원의 둘레를 구하는 데 널리 쓰이는 원주율의 기호로 쓰인다. 무리수(irrational number)는 수의 체계 내에서는 합리성(rationality)이 부재하지만, 무리수 파이(π)의 경우 일상생활에서 이미 충분한 합리적 의미를 획득한 상태다. 무리수 파이(π)는 이미지 체제에 대입할 경우 크리스털 체제를 벗어나 유기적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한동안 김춘수의 무의미시가 무리수 계열에 해당하는 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에 속해 있었다면, 오늘날에 와서는 이미지의 유기적 체제, 혹은 유기적 체제와 크리스털 체제의 중간 지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무의미’라는 충격을 안겨준 시가 오늘날에 와서 의미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절대적 외부성의 텍스트 앞에서 독자는 경험맹(experimental blindness) 상태에 빠지게 된다.(리사 펠드먼 배럿, 최호영 역,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생각연구소, 2019, 70면) 동시에 모든 경험칙을 동원하여 텍스트를 해석하고자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정보가 주어질 때 두뇌 뉴런들의 점화방식이 바뀌어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은 발표 이후 수십 년이 지나 이제 그 의미가 쉽게 형성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김춘수의 시를 신학적‧성서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대표적인 글로 김정훈의 「<나의 하나님에 나타난 현대적 신관」(국제어문 21권, 1999), 남금희의 「시적 진술로서의 고통과 성서 인유-김춘수의 예수 소재 시편을 중심으로」(문학과종교 15권, 2010)이 있으나, 그 외의 많은 논문에서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일정한 의미론적 해석을 획득하는 양상을 보인다.) 예컨대 김춘수의 시는 하나님에 대한 관습적 인식 구도를 파괴함으로써 하나님의 실재를 드러내는 충격적인 시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이런 해석은 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를 유기적 체제로 변화시키는 과정에 해당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한때 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에 속해 있었으나, 오늘날의 시 해석 체계에서는 충분한 의미의 고정점을 확보한 유기적 체제로 진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무리수 파이(π)의 존재론과 흡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의 하나님」의 경우 처음부터 해석이 불가능한 시는 아니었다. 김춘수의 대부분의 시 역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김춘수의 무의미시와 무의미시론 자체가 처음부터 괴리를 보였다는 날카로운 지적도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시론이 시 창작을 통해 충분히 구현되었는지가 아니라, 그의 무의미시론이 지니고 있는 사유 그 자체다.
의미의 해체를 지향하는 모든 시들은 결국 해석의 영역에 놓이게 된다. 의미의 공백을 드러내는 어떤 이미지라도, 결국에는 의미의 침습(浸濕)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가 드러내는 절대성의 강도는 새로운 사유 체계 속에서 서서히 약해져간다. 모든 무의미시는 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에서 유기적 체제로 진입하는 과정 중에 있다. 김춘수의 시가 발표 당시에는 경험맹으로 인한 미적 충격을 주기도 했겠으나, 두뇌의 뉴런 체계는 새로운 연합체를 형성함으로써 그 의미망을 갖추어나갈 수밖에 없다. 이미지의 절대성은 영속될 수 없고, 결국은 이미지의 상대성 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미지 체계에 있어서 상대성과 절대성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이미지 체계의 양 극단 사이에 무한히 다양한 이미지들이 존재할 뿐이다. 시인은 그 무한히 다양한 이미지들의, 그 펼쳐지지 않은 주름들의 잠재태를 탐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이미지의 해체와 사물의 발견
김춘수의 무의미시론이 “시를 의미(관념) 차원에서 존재 차원으로 회전시키는 운동”(김춘수, 시의 위상, 둥지, 1991, 13면.)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그의 시론은 의미의 고정점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시적 운동에 해당한다. 즉, 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이런 흐름은 오규원의 날이미지론, 이승훈의 비대상시론으로 이어진다. 이론적 디테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날이미지’가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전 두두물물(頭頭物物)의 현상”, 즉 “‘나’의 의지”가 아닌 “세계의 의지”를 드러내는 “‘존재 그 자체!’를 시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오규원, 날이미지와 시, 문학과지성사, 2005, 79, 86면) 비대상시가 “대상의 세계는 언어로 명명될 때 죽거나 이미 부재”하며 “비대상의 세계”가 되고 만다는 사실(이승훈, 시적인 것도 없고 시도 없다, 집문당, 2003, 67면.)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모두 이미지의 유기적 체제를 벗어나는 공통의 시론적 좌표를 지닌다. 의미의 고정점을 벗어난 이미지가 중요한 이유는 기존의 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김준오가 김춘수의 무의미시와 이승훈의 비대상시를 무의미의 예술로 간주했을 때,(김준오, 시론, 삼지원, 2000, 185면.) 이때의 무의미는 의미의 고정점을 벗어나게 하는 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로의 진입을 암시한다. 무의미의 세계는 기존의 의미론적 질서로 이해하기 힘든 세계다. 사유의 새로운 공리(公理) 체계를 요구하는 만큼 필연적으로 사유의 잠재태를 소환하는 세계다.
현대시의 이미지는 유기적 체제에 대하여 정신적 사투를 벌인다. 이미지의 유기적 체제를 파괴함으로써 크리스털 체제로 진입하고자 한다. 한 사물에 부착된 의미론적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세계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사유 체계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따라서 현대시의 이미지는 궁극적으로 들뢰즈가 말한 ‘사유 이미지’를 지향한다.
높은 곳에 물이 있다. 그러니까,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은 겸손하지도 않으며 특별히 거만하지도 않다. 물은 물이다. 모든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네게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너와 내가 ‘비’라고 부르는 이 물속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자전거를 타고 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리는 이 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이 비가 오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절박한 사정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어디론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인데, 어느 날 두 개의 개울이 합쳐지는 하수종말처리장 근처 다리 밑에서 벌거벗은 채 그만 번개를 맞고 말았다. 아, 그 밋밋한 전기의 맛. 코피가 터지고 석회처럼 머리가 허옇게 굳어질 때의 단순명료함, 그 멍한 상태에서 번쩍하며 찾아온 찰나의 깨달음. 물속에 불이 있다! 그러니까, 그날 나는 다리 밑에서 전기뱀장어가 되어 대책 없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만 것이다.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증발시켜 하늘에 이르렀는데 그 이유가 순전히 허공을 날기 위해서였음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이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이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이유, 비로소 모든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늘에서 물이 온다. 우리가 비라고 부르는 이것은 물의 사정, 물의 오르가즘. 아, 쏟아지는 빗속에서 번개가 일러준 한 마디의 말. 모든 사물은 날기를 원하는 것이다.
-원구식, 「비」 전문, 비(문학과지성사,2015)
이 시는 ‘비’라는 관념을 해체한다. ‘비’의 유기적 이미지를 해체함으로써 ‘물’의 본래적 이미지로 되돌리고 있다. “높은 곳에 물이 있다”는 문장으로써, ‘비’를 둘러싼 유기적 이미지는 분해되고 만다.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지상의 고정관념도 분해된다. 물은 증발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시인은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비’라는 의미의 고정점을 벗어난다. ‘비’를 “높은 곳”에 있는 “물”이라고 하거나,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진술함으로써 ‘비’의 이미지를 해체시켜버린다. 시인이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유다. 즉, 시인은 기성의 사유에 갇혀 있는 세계의 사물들을 해방시키는 데 집중한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이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이유”는 “모든 존재의 이유”와 통한다. 그것은 “모든 사물은 날기를 원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바위’는 ‘바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고, ‘모래’는 ‘모래’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시인은 낡은 의미를 벗겨냄으로써 세계에 주름 접힌 내재성의 평면을 열어보인다. 날기를 원하는 사물의 욕망은 시인의 욕망이다. 의미의 고정점에 정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내재성의 평면을 펼쳐보이고자 하는 욕망. 세계의 사물은 이미지의 유기적 체제를 벗어나고자 하며, 시인은 세계의 실재에 접근하고자 한다. 인간 중심의 유기적 이미지는 이 세계를 감금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결국 인간의 사유를 정체시킨다. 모든 사물이 날기 원하듯, 시인 또한 자유롭게 사유하기를 욕망한다. 이 시는 ‘비’의 유기적 이미지를 벗어남으로써 이미지의 해방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세계 속에 주름 접힌 내재성의 평면을 열어보이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원구식의 「비」가 ‘비’라는 인간의 관념에 묶인 ‘비’의 유기적 이미지를 해체하고자 했다면, 송승환의 시집 클로로포름은 유기적 이미지를 해체함으로써 사물의 ‘지속’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것 역시 사물에 내속된 내재성의 평면을 드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원구식이 사변적으로 사물(‘비’)의 관념을 해체하고자 했다면, 송승환의 클로로포름은 관념의 해체가 이루어진 세계로 이미 넘어가 있으며, 따라서 사물의 실재를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푸름 푸름 붉음 푸름 푸름 붉음 푸르름 푸르름 붉음 푸르스르 붉음 푸르스르 붉음 푸름 푸름 붉음 붉음
푸르르 푸르르 붉음 붉음 푸르르 푸르르 붉으스름 푸른 붉음 雨雨 푸른 붉음 雨雨 붉으죽죽 붉으죽죽 雨雨 붉은 푸름 붉은 푸름 붉음 붉음 붉음 푸름 푸름 푸름
붉으죽죽 붉으죽죽 雪雪 붉으죽죽 雪雪 붉음 붉음 붉음 푸름 푸름 푸름 붉음 붉음 붉음 푸름 푸름 푸름 푸르스름 붉으스름 붉음 붉음 붉음 초록 초록 초록
초록 위
-송승환, 「제라늄」 전문, 클로로포름(문학과지성,2011)
이 시는 제라늄의 빛깔에 속한 내재성의 평면을 열어 보인다. 푸름과 붉음에 정박하지 않고 그 사이에 내속된 색채의 무한한 세계를 소환해낸다. <표‧1>과 <표‧2>의 도식에 근거해 말하자면, 이 시는 푸름과 붉음이라는 자연수 또는 정수의 수 체계에서 벗어나 유리수와 무리수의 세계로 진입한 상태를 보여준다. 푸름과 붉음 사이에 있는 “푸르르”, “붉으스름”, “붉으죽죽” 등의 색의 연속체는 실수(實數)의 ‘완비성’(completeness)에 비견된다. 실직선 위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수는 무리수다. 실직선 위에서 임의로 한 수를 선택할 때, 정수(유리수조차도)를 선택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애머 액젤, 신현용‧승영조 역, 무한의 신비, 승산, 2002, 106면.) 실수의 세계에서 무리수의 밀도는 정수의 밀도보다 무한 배(倍)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실수의 실재는 정수가 아니라 무리수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진실, 즉 제라늄의 색채적 실재는 ‘푸름’과 ‘붉음’으로 파악되서는 안 되며, ‘푸름’과 ‘붉음’이라는 의미의 고정점을 벗어나는 무리수의 체계를 통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제라늄의 무한한 색채를 통해 이 세계의 실재를 암시한다. 우리는 놀랍게도 이 시를 통해, 무한한 색채의 변주 속에 존재하고 때로는 비(‘雨’)와 눈(‘雪’)을 맞는 제라늄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 아름다움은 제라늄의 정지된 모습이 아니라, 제라늄의 ‘지속’과 ‘운동’을 통해 드러난다. 이 시는 시간의 축을 따라 지속하고 생성되는 제라늄의 이미지(물질, 운동)에 대한 발견이자 그 자체인 것이다.
3. 뇌의 감산작용과 세계의 이미지
김언의 시에는 독특하게도,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뇌-이미지’에 관한 시들이 존재한다. 주지하듯이 들뢰즈에게 영화는 곧 뇌이며 영화-이미지 또한 뇌-이미지가 된다. 영화‧뇌-이미지들의 공통점은 무리수적 절단이 함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리수적 절단으로 인한 이미지들의 불연속성은 ‘뇌=영화’라는 공식의 토대를 이룬다. 뇌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진화하고 재배치가 단행된 결과 뇌의 연속적 조직망에 존재하는 단절들과 미시적인 틈들이 발견되고 뇌는 불확실한 시스템의 탈중심적인 체계로 정의된다. 앙토냉 아르토의 뇌에 대한 진술을 보라.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뇌의 안테나”, “죽음으로부터 거듭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뇌의 능력.(질 들뢰즈, 이정하 역, 시네마‧Ⅱ: 시간-이미지, 시각과언어, 2005, 412-413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지속’ 내에 잠재된 미분들을 지시하며, 죽음의 상태와도 같은 미분들(보이지 않는 것들)이 혁명적인 현실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영화와 뇌의 역량이다. 보다 부드럽게 말한다면, 들뢰즈에게 영화와 뇌의 이미지는 그 배후에서 이미지화되지 않은 것들을 ‘성찰’하게 하는 역량 자체다.(최영송, 질 들뢰즈, 시네마, 커뮤니케이션북스(주), 2017, 116면) 김언 시의 특이성은 이미지화되지 않은 것들을 응시하는 데 있다.
어떤 슬픔도 없는 중이다. 슬픔이 많아서 없는 중이다. 없는 중에도 슬퍼하는 중이다. 슬퍼하는 중을 외면하는 중이다. 다 어디로 가는 중인가. 다 어디서 오는 중인가. 아무도 가로막지 않는 중이다.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는 중이고 오고 있다. 슬픈 중에도 슬픈 중과 함께 더 슬픈 중이 돌아가고 있다. 돌려주고 싶은 중이다. 되돌리고 싶은 중이고 중은 간다. 슬픈 중에도 고개 한 번 끄덕이고 고개 한 번 돌려보고 가는 중이다. 오지 말라는 중이다. 가지 말라고도 못 한 중이다. 너는 가는 중이다. 없는 중이다.
-김언, 「중」 전문, 한 문장, 문학과지성사, 2018(이하 같은 시집)
이 시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중’에 대한 것이다. 슬픔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시인은 “어떤 슬픔도 없는 중”이며, “슬픔이 많아서 없는 중”이라고 쓰고 있다. 슬픔이 없고 슬픔이 많다는 진술의 모순은 ‘중’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 이 시를 이해하는 핵심은 이별의 슬픔이 아니다. ‘중’이다. “중”은 뇌의 의식작용을 이루는 이미지들이다. 다시 말해, “중”은 이별의 슬픔을 느끼고 있는 자신의 의식을 미분하려는 순간이다. 시인은 의식 작용의 단면(이미지)을 지각하고자 한다. 뇌라는 물질의 운동, 즉 의식 작용의 단면들에 대한 포착 순간이 바로 “중”으로 표현된다. ‘중’은 의식의 단위 ‘파이’(Ф)(그리스 문자 Ф의 세로선은 ‘정보’를 나타내고 동그라미는 통합을 나타낸다. 의식의 단위 Ф는 정보통합을 통해 구성된 의식의 최소단위다. 그것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최대 정보를 통합한 핵으로서의 의식이다. 마르첼로 마시미니‧줄리오 토노니, 박인용 역, 의식은 언제 탄생하는가, 한언출판사, 2019, 126,135면.)를 넘어서서 의식에 포함되지 않은 신경학적 흐름까지 투시하고자 하는 욕망의 단어다. ‘중’은 이별의 슬픔을 느끼는 의식을 미분(微分)한다. 의식의 단위 ‘파이’(Ф)를 이루는 시간 길이는 정확하진 않지만 시각적 감각의 경우 대략 0.25초, 청각적 감각의 경우 0.3-0.5초 정도다.(크리스토프 코흐, 김미선 역, 의식의 탐구, 시그마프레스, 2006, 289면; 마르첼로 마시미니‧줄리오 토노니, 앞의 책, 161면.) ‘의식’에 대한 감각의 경우, 다시 말해 의식에 대한 의식(메타의식)의 경우는, 시각적‧청각적 감각과는 달리 신경과학적 포착이 불가능하므로 아직 그런 자료가 있을 리 없다. 그 정확한 시간조차 파악되지 않는 (메타)의식의 단위를 시인은 미분하고자 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작업이다. 따라서 이 시는 슬픔을 느끼는 자신의 의식에 대한 불가능한 탐구다. 이별의 슬픔을 느끼는 시인의 의식 아래로, 다시 말해 슬픔에 대한 의식의 ‘깜빡거림’(인간은 특정 이미지를 의식화하는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이미지들은 모두 놓치고 만다. 다시 말해, 특정 이미지를 의식화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미지들은 모두 뇌에는 들어오지만 의식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의식화 과정에서 많은 이미지들을 놓친다는 뜻이다. 스타니슬라스 데하네, 박인용 역, 뇌의식의 탄생, 한언, 2017, 68-87면.) 아래로 미끄러져 간 수많은 정동의 감각들. 김언 시인은 슬픔의 고정된 좌표를 의뭉스럽게 빗겨나가면서 의식의 미분(微分) 목전에 도달하고 있는 ‘중’이다.
김언의 다른 시 「있다」는 「중」과 같은 뇌-이미지의 탐구를 드러낸다. “나는 슬퍼하고 있고 슬퍼지고 있고 슬프고 있고 그래서 슬프다. 사이사이 다른 감정이 끼어든다.”(「있다」 부분) 형용사는 대상의 상태와 속성을 드러낸다. 김언은 형용사적 용법을 벗어난다. 그의 시는 뇌의 감산작용으로 인해 불연속적인 이미지를 탐구한다. 형용사 ‘슬프다’에 보조용언 ‘있다’를 결합하는 비통사적 용법은 뇌-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뇌의 활동이 우주적 지속의 일부이듯이 김언의 시는 뇌라는 주관적 의식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중심적 한계를 벗어나 객관 세계의 이미지를 탐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동명(同名)의 다른 시 「있다」를 보도록 하자.
나뭇잎이 푸르고 있다. 짙푸르고 있다. 진푸르고도 있다. 간혹 연푸르고도 있는 나뭇잎이 올라가면서 더 푸르고 있다. 올라가면서 가늘고 있는 나뭇가지가 더 올라가면서 가늘고 있다. 여름 한창을 가늘고 있다. 여름이 가늘고 있다. 낮이 가늘고 있다. 한낮이 사라져 있다. 온데간데없이 있다. 부지런히 도착해 있다.
-김언 「있다」 전문
위 시도 형용사와 보조용언 ‘있다’의 비통사적 결합으로 구성된다. 나뭇잎, 나뭇가지, 여름, 낮 등에 대한 감각적 지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푸르다, 짙푸르다, 진푸르다, 가늘다 등의 고정된 좌표는 보조용언 ‘있다’와의 결합을 통해 객관세계의 실재적 운동에 접근하고자 한다. ‘푸르다’라는 속성은 단일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뭇잎의 푸름은 변화의 운동 상태에 있으므로 무한히 다양한 상태의 ‘푸르다’를 내재한다. ‘나뭇잎이 푸르다’라는 진술은 객관세계에 대해 이루어진 감산 작용의 결과다. 시인은 감산작용 이전의 객관세계를 이루는 운동으로서의 ‘지속’에 접근한다. 나뭇잎이 푸르고(진푸르고, 연푸르고) ‘있고’, 나뭇가지가 가늘고 ‘있고’, 여름조차 가늘고, 낮마저 가늘고 ‘있는’ 세계는 미분적 차이에 해당하는 이미지들을 내속한다. ‘푸르다, 가늘다’는 이미지의 고정점에 정박하는 순간, 미분적 차이의 세계는 사라지고 만다. 반대로 시인이 미분적 차이에 주목하는 순간, 의미의 고정점에 정박한 ‘한낮’은 “사라져 있다.”(이때의 ‘있다’의 용법이 완료상임에 주의하자.) 그렇다면 한낮이 사라진 후, “온데간데없이 있”고 “부지런히 도착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객관세계에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는 않는 미시적인 틈들, 즉 내재성의 평면을 이루는 잠재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시는 질문의 내용을 포함하는 형식이다. “저것이 가을인가 묻는다. 파랗고 있는 것을. 싸늘하고 있는 것을. 두 귀가 아프고 있는 것을”(「저것이 가을인가?」 부분) 여기서도 ‘있는’은 의미화된 질서의 미분적 차이 속에 내재된 잠재태를 암시한다. 그리고 이 잠재태는 우주적 지속의 한 단면에 해당하는 불가시성의 이미지가 아닐 수 없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어서 상자가 있다. 이미지가 있어야 할 자리가 상자가 있다. 조심해야 할 상자.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어서 이 꽃병은 금이 갔다. 아무도 모르게 간신히 부딪혔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어서 내 나이 스물한 살이었고 곧 마흔이다. 차근차근 물방울이 맺혔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어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그 아래 사람이 있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어서 안개 속에 있고 한 번 더 말한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어서 어제는 생일이었고 돌아가는 친구들에게 일일이 당부했다. 언제 올 거냐고.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어서
새빨간 장미가 있고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어서 수수방관에도 철학이 있고 할 말이 있고 대체로 알아서 온다.
알아서들 간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어서 골짜기와 언덕에 처음 와보는 무덤이 있고 자유가 있고 그곳은 지하다.
지하에서 온다. 이미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작은 상자가 있다.
- 김언, 「이미지」 전문
이 시는 ‘작은 상자’에 관한 시이면서 ‘작은 상자’ 자리에 있어야 할 이미지에 관한 시다. 육면체의 상자는 견고한 의미 체계를 상징한다. 시인은 그 상자에 심리적 거리를 최대한 둔다. 따라서 상자는 구체적이지도 않고 그냥 ‘작은 상자’다. 시인을 기만하는 상자이므로 “조심해야 할 상자”다. 이미지를 불러낼 수 없는 이 세계는 불완전한 세계다. “꽃병”에 “금이 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스물한 살”과 “마흔” 살이라는 규정에 고정된 바 있고 “철학”과 “할말”이 있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일상은 이미지의 부재로 말미암아 그지없이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그저 ‘작은 상자’만이 있을 뿐이다. “이미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말이다. 결국 ‘작은 상자’는 이미지의 부재를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정체는 뭔가? 시인은 인간의 뇌가 놓쳐버린 이미지를 불러내고자 한다. 그것은 쉽지 않다. 시인의 의식은 이미지와 일상의 빈틈 속에 끼어 있다. 이미지의 유기적 체제는 시인을 둘러싼 일상이지만, 시인은 이미 그것들과 무연고의 상태에 있다. 일상은 ‘작은 상자’라는 규격화된 형태로 존재할 뿐이다. 이유는?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어서”다.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은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어서” 지루하게 유지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은 “작은 상자”다. 왜 작은 상자인가? 실수의 세계에서 무리수의 밀도가 정수의 밀도보다 무한하게 높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이미지의 유기적 체제가 정수의 세계라면 크리스털 체제는 무리수의 세계다. 이미지(크리스털 체제)를 불러올 수 없는 고정된 의미체계의 일상이 ‘작은 상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4. 이미지의 혁명과 시인의 운명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 즉 불가시성의 실재하는 이미지를 욕망하고 사유한다. 그러나 세계의 실재적 이미지가 시인의 언어로 드러나는 순간, 곧바로 사라지고 만다. 언어의 한계에 대한 통찰은 현대 시인들의 운명이다. 이승훈의 문장을 보라.
대상의 세계는 언어로 명명될 때 죽거나 이미 부재한다. 블랑쇼가 본 것이 바로 그 점이다. 대상의 세계에 언어가 작동할 때 이미 그것은 비대상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꽃을 꽃이라고 했을 때 이미 나는 그 꽃의 빛깔, 모양, 크기, 운도, 아름다움 같은 구체적인 현실을 그 꽃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이다.(이승훈, 시적인 것도 없고 시도 없다, 집문당, 2003, 67면.)
언어와 세계에 가로놓인 균열은 언어의 명백한 한계다. 이 한계는 실수의 ‘완비성’에도 해당한다. 직선을 그어두고 그 직선을 무한소의 공백조차 없이 실수(實數)로 표현낼 수 있다는 수학자의 욕망이 실수의 ‘완비성’이라는 개념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분수로 표현할 수 없는 실수인 무리수는 무한하게 많으며, 이것을 모두 표기할 수는 없다. 직선 위의 모든 점을 실수로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은 실현될 수 없는 관념에 불과하다. 세계의 실재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만큼이나 허황된 것이다. 수학 또한 언어이므로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수학적 언어의 경우, 다만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극한’(limit) 개념으로써 세계와의 균열을 수학적 계산 과정에서 제거할 수 있을 뿐이다.(예컨대, 순환소수 0.9가 1과 동일하다는 수학적 발상이 가능한 것이 극한 개념 때문이다. 0.9와 1 사이에 있는 0.00000000……1이라는 무한소infinitesimal가 ‘극한’ 개념을 통해 제거된다.) 반면, 시인의 언어는 세계와의 균열이라는 한계를 숙명처럼 안은 채로 세계의 ‘표정’을 탐구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지닌 의미의 고정점(자연수와 정수)을 벗어남으로써 무리수의 세계로 진입하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에 ‘표정’은 있는가? 세계의 이미지를 ‘감산’할 때 세계의 ‘표정’이 발생한다. 세계의 ‘표정’은 인간 두뇌 속에서 이루어진 감산작용의 결과다. 그렇다면 세계의 ‘표정’ 너머에 있는 세계의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가? 표정을 제거한 세계는 그냥 무심히 마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굳이 언어로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선(禪)의 세계다. 더 이상 시가 필요하지 않은 세계.
시의 정신은 의미의 고정점을 벗어나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탐구한다. 의미를 벗어나 ‘무의미’의 세계로 진입할지라도 그것은 다시 의미화되고 만다. 무리수 파이(π)처럼 말이다. 무의미를 벗어나 다시 의미를 획득하게 되지만,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세계다. 이처럼 시의 정신은 세계의 이미지를 탐구함으로써 사유의 혁명을 추구한다. 시의 정신은 세계의 실재에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그러나 시의 언어가 세계의 실재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이는 모든 언어의 한계다. 시적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세계의 이미지는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감산되고 만다. 인간의 뇌는 언어적 매개로써 우주적 지속으로부터 제한된 정보(감산작용의 결과)를 획득하며, 이 제한된 정보로써 통합된 의미체계를 만들어 낸다. 시 역시 감산작용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시를 통해 형상화된 이미지와 객관적 실재로서의 이미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시적 혁명의 출발이다.
시의 혁명은 이미지의 혁명에서 시작된다. 이미지의 혁명은 감산의 방식을 달리하고 해체할 때 가능해진다. 감산의 방식을 해체할 때, 세계의 표정은 달라지며 이로써 새로운 세계관의 도래가 발생하게 된다. 즉, 이미지의 유기적 체제에서 크리스털 체제로의 유목(遊牧). 유목민이 경계해야 할 것은 세계의 영원한 표정이다. 그것은 이데아의 형상이다. 의미의 고정점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기 폐색(閉塞)의 세계. 이는 자기 육체의 영원성에 결박당한 나르시시즘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제국’의 세계다. 시의 정신은 자기 폐색의 이데아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의 정신은 인간의 뇌 속에 들어앉은 고정화된 이미지, 특히 인간의 삶에 억압과 고통을 야기하는 ‘제국’의 이미지를 부정한다. 시의 언어는 부정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고 빨려 들어가야 한다.
이미지와 의미의 제국에 정박하고자 하는 욕망을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시의 정신이 탄생하고 이미지와 사유의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지의 해방이고 시의 자유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시적 사유의 유목이다.
*문학평론가. 헤르메스의 악몽, 우울한 것의 추락, 혁명과 죽음, 황홀한 아파니시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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