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산 길 따라 발 걸음 원문보기 글쓴이: 청산
산길따라 발걸음 금북정맥(錦北正脈) 제16구간 산행(北進)
◆ 일시 : 2015년 09월 06일 일요일
◆ 위치 :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죽산면에 있는 산 - 칠현산(七賢山/516m)
◆ 유래
▶ 배티고개(梨峙/313번 지방도/370m)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배티마을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상촌마을을 연결하는 고개인 배티고개는 조선시대 반역의 뜻을 품은 신천영(申天永)의 무리와 북병사를 지낸 이순곤(李順坤)의 의병이 싸운 고개인데, 신천영이 패하자 그 고개를 ‘패한 고개’라 하여 패티[敗티]라 하였고, 음이 변하여 배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은 믿을 수 없고, 배나무와 관련된 이름으로 여겨진다. 배티의 ‘배’를 이(梨)의 뜻으로 보고 한자화한 지명이 이티[梨티]이다. 전국적으로 배티 또는 배티가 전부 요소로 쓰인 지명이 더러 발견되는데, 이들 대부분은 배고개·뱃재와 함께 쓰인다. 따라서 배티나 배티고개는 ‘배나무가 있는 고개’로 풀이할 수 있다. 배티마을에 있는 배티고개도 마을 어귀에 돌배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배티나 이티에서 ‘티’는 고개를 뜻한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티 대신 재나 고개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고, 그에 따라 티의 뜻이 불분명해지자 유의어 고개를 중복하여 배티고개로 부른 것이다. 배티나 배티고개는 그 뜻은 같지만, 현재 배티는 마을 이름으로, 배티고개는 고개 이름으로 나누어 사용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명에 ‘영(嶺)’·‘현(峴)’계 지명이 여럿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고개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에 있는 배티마을은 원래 아랫말·중간말·꼭대기말로 이루어졌으나 현재 중간말은 없어졌다. 배티마을은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20~1830년대 무렵이다. 1857년 무렵에는 배티와 절골 주변의 양백리 삼박골, 용덕리 용진골·정삼이골, 백곡면 명암리 발래기·명심이, 백곡면 사송리 지구머리, 이월면 신계리 새울, 진천읍 지암리 지장골, 문백면 구곡리 굴티 등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배티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신도 30여 명이 관군에게 학살당한 곳으로 지금은 성역화하여 순례지가 되었다.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박해 소설 『은화(隱花)』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충청북도 진천군의 백곡면 양백리와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현재 325번 지방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조선 시대 지명은 대문령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서쪽 35리에 있으니 이곳이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택리지』에서 진천의 위치를 대문령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지도서』에는 "관아 서쪽 30리에 있으며, 심곡산에서 뻗어 나와 협탄령(脇呑嶺)으로 이어진다."라는 기록이 있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인근에 '백학령(白鶴岺)' 지명이 기재되어 있고, "경기 안성계 월하동 30리에 있다."는 내용이 있다.
▶ 장고개(성대리/410m)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성대리 두멍골마을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를 연결하는 고개인 장고개[場고개]는 장(場)과 고개로 나뉜다. 장은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여러 가지 물건을 사고파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장고개는 ‘정기적으로 장을 보러 다니던 고개’로 풀이된다. 장고개는 개미둑재로도 불리는데, 산이 높아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뒤에 오는 사람이 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인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개미둑재는 갬덕지고개로도 불린다.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명에 ‘영(嶺)’·‘현(峴)’계 지명이 여럿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고개’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장고개는 백곡면 성대리 두멍골마을에서 서북쪽으로 약 3㎞ 떨어진 다락골 골짜기에 위치한다. 다락골은 본래 달골에서 변화된 어형으로 ‘높은 골짜기’를 뜻한다. 따라서 이곳에 있는 장고개도 비교적 높은 곳에 있었으나 과거 안성을 오갈 때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길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개가 폐쇄되어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 고갯마루에는 장군이 죽어서 묻혔다는 전설이 전하는 서낭당도 있었다.두멍골마을은 모니마을 북쪽에 있던 마을로 몇 가구가 살았는데 두멍컨트리클럽의 부지로 흡수되면서 폐동되었다.
▶ 옥정현(玉井峴/387지방도로/320m)
충청북도 진천군의 이월면 신계리와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지금은 387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옥정현은 안성시의 마을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지지자료』에 '근무치(小武峙)'로 나온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이곳에 '요순치(堯舜峙)'로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한편, '요순산(堯舜山)'은 인근 무이산의 이칭이다.
▶ 무이산(無夷山/462.3m)
충청북도 진천군의 북부에 있는 산이다(고도:463m). 진천군과 안성시와의 경계를 이루며, 산 아래에 무술(또는 무수) 마을이 있다. 이 지명과 관련되는 내용이 수록된 사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다른 이름으로 '요순산'이 있고, 『1872년지방지도』에 요순치(堯舜峙)가 기재된 위치로 추정하여 볼 때, 사료에 기재된 심곡산(深谷山)이 지금의 무이산일 가능성이 높다. 심곡산에 대한 기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여지도서』에는 "충주의 소속리산(小俗離山)에서 북쪽으로 죽산(竹山)의 주걸령(周傑嶺)을 거쳐 구불구불 뻗어 와서 대문령(大門嶺)이 된다."라는 내용이 있다. 『1872년지방지도』에서 백곡면 유곡점(楡谷店)에서 죽산현을 연결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고개의 동쪽에 무이산으로 추정되는 산지가 묘사되어 있다. 무이산은 오랑캐가 없는 섬, 혹은 속세의 번민을 잊는다고 하여 '무수산(無愁山)'이라 하였고, 산속에 있으면 중국의 요순시절 같이 편하다고 하여 '요순산(堯舜山)'이 되었다는 지명 유래가 전하기도 한다. 국어학계에서는 '무수산'이나 '무위산'은 '무술산'에서 변한 것으로 본다.
▶ 덕성산(德城山/521.8m)
경기도 안성시의 동남쪽 칠현산 아래 위치한 산이다(고도/522m). 금광면과 죽산면,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에 걸쳐 있다. 요순산(堯舜山) · 무위산(無爲山) · 무수산(無愁山) · 국사봉(國寺峰) 등으로도 불린다. 산의 남쪽 계곡에 있는 구암리(鳩岩里)와 무수리(無愁里)는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이 소년시절부터 낭도(郞徒)들과 무예를 연마하던 터라고 전해진다. 산 동쪽 기슭에 조선 선조의 4서녀 정인옹주와 부마 홍우경의 묘소가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519m이다. 요순산(堯舜山)·무위산(無爲山)·무수산(無愁山)·국사봉(國寺峰)으로도 불린다. 이 산은 진천군 북서부의 서운산(瑞雲山:547m)·무제봉(武帝峰:574m)·옥녀봉(玉女峰:457m)·백석봉(白石峰:468m)·장군산(將軍山:436m)·만뢰산(萬賴山: 612m)과 함께 차령산맥(車嶺山脈)의 연봉을 이루고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있다.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속리산 천황봉(天皇峰:1,058m)에서 충청북도 북부 내륙을 동서로 가르며 안성 칠장산(七長山:492m)에 와서 멈춘다. 이 산은 북동쪽 칠현산(七賢山:516m), 칠장산보다 약간 높지만 능선이 서남으로 이어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중생대 말의 습곡산맥으로 화강 편마암이 깔린 구릉산지이다. 세 산의 종주는 9시간 가까이 걸린다. 덕성산 남쪽 계곡에 구암리(鳩岩里) 무술리[無愁里]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은 진천 태생으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595∼673) 장군이 소년시절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라는 낭도(郞徒)들과 무예 등 화랑도(花郞徒) 정신을 연마하던 터이다. 북쪽 골짜기 비들목도 화랑들이 전서구(傳書鳩)를 길들이던 마을이며, 동쪽으로 내려오면 화랑의 연무대와 병기고 자리에 병무관(兵武館) 마을이 있다. 또 산기슭 화랑벌의 화랑도 수련관 자리가 궁전터라 전해오고 있다. 진천의 옛이름은 상산(常山)인데 상산팔경의 3경인 금계완사(錦溪浣紗)는 조선시대 충청도의 관찰사(觀察使)가 바뀔 때마다 신·구관이 인수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즐긴 곳으로 지금의 칠장천 일대라고 한다. 당시 과거 보러 가거나 안성장을 가려면 이 산의 무티고개라는 옥정리고개[玉井峴]나 사기막고개를 이용했다. 굴참나무·산벚나무·소나무 울창한 정상 부근에는 조릿대가 무성하다. 이 산에서 시작된 구암천이 남으로 흘러 미호천(美湖川)에 합류하고 17번국도가 진천읍으로 달리며 중부고속도로는 음성IC에서 5분 거리이다. 문화재로는 광혜원면 실원리 덕성산 기슭에 조선 선조의 부마 홍우경(1590∼1625), 정인옹주의 묘소(충북기념물 78)가 있다.
▶ 칠현산(七賢山/516m)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죽산면에 있는 산으로, 높이 516m로, 산기슭에 칠장사가 있다. 고려 때 혜소국사가 일곱 도적을 제도하여 도를 깨치게 했다 하여 칠현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경기도 안성시의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고도/516m). 금광면과 죽산면에 걸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칠현산은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라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죽산군읍지』에는 "아미산(峨嵋山)은 남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는데 칠현산이라 불리기도 한다."고 하여 칠현산의 다른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칠현이란 지명은 고려 시대 혜소국사가 신라 때 창건된 칠장사라는 사찰에서 수도를 하던 중 일곱 도적을 제도하여 도를 깨우치게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산기슭에는 칠장사(七長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칠장사의 현판 · 당간에는 '칠현산'이라는 산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 칠장산(七長山/492.4m)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금광면·삼죽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가 492.4m이다. 산기슭에 있는 칠장사와 칠장사 주변의 울창한 숲으로 유명하다. 덕성산(519m)·칠현산(516.2m)과 능선으로 이어진다. 예전에는 칠현산의 일부였으나 조선 후기에 세도가의 사유지가 되면서 독립된 산이 되었다.
▶ 칠장사 당간
우리나라에 세개가 있는 철당간 지주로 사찰에서 부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각색 깃발을 게양하던 곳으로 대개 절 입구에 세워져 있다. 공주 갑사에 있는 것과 청주의 한곳에 있다. 칠장사 철 당간 지주는 제조연대가 확실치 않아 유형 문화재 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장사는 유난히 도둑과 인연이 깊다. 임꺽정이 나라를 훔치는 데 실패한 도적이었다면 후고구려(태봉)를 건국한 궁예는 나라의 절반은 훔친 도적쯤 되겠다. 궁예는 열살 때까지 여기서 활을 배웠다. 경부선이 들어앉은 20세기부터 역사의 외곽으로 밀렸지만 죽산은 장호원 음성 문경새재 문경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강원도와 충청도, 경상도를 가려면 여기를 통해야 했다. 돈이 오가는 길목에서 고을은 번성했고 빈부의 양극화도 활발했을 것이다. 마을에서 한 건 한 뒤 한달음으로 달리면 반나절 만에 닿을 법한 거리에 칠장사가 있다. 잠깐 숨을 은신처로는 제격인 셈이다. 나한전에 봉안된 7인의 아라한 역시 본래 산적이었다. 사찰을 중수한 혜소(慧炤) 국사의 교화로 도를 깨쳤다. 스님은 고려 제9대 임금 덕종의 왕사(王師)였다. 어느 날 이들의 산채 인근인 칠장사에 스님이 부임했다.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을 염려한 도둑들은 스님의 동정을 살필 요량으로 한 사람씩 뽑아 칠장사로 올려 보냈다. 절에 당도한 첩자들에게 염탐은 뒷전이었다. 약수터에 놓인 금바가지에 혹해 물을 마시는 척하고는 바가지를 훔쳐 돌아왔다. 이상한 것은 빼돌린 바가지를 아지트에 갖다놓기만 하면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도둑 중 한 사람이 이 일을 고백하니 나머지 여섯도 괴이한 현상에 관해 실토했다. 스님이 신통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여긴 패거리는 그 날로 머리를 깎고 국사의 제자가 됐다. 스님이 입적하자 이들도 사람의 형상을 한 7개의 돌만 남기고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는 후문이다. 칠장사(七長寺)와 칠현산(七賢山)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 총산행거리 : 19.2km(GPS : 21.25km)
◆ 산행시간 : 약 9시간 31분
◆ 총인원 : 2명
◆ 산행코스 :
◆ 산행파일
◆ 산행지도
(수정본 지도)
배티고개(梨峙/313번 지방도/370m) - 에머슨골프클럽을 끼고 정맥길을 산행한다.
배티고개(梨峙/313번 지방도/370m)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배티마을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상촌마을을 연결하는 고개인 배티고개는 조선시대 반역의 뜻을 품은 신천영(申天永)의 무리와 북병사를 지낸 이순곤(李順坤)의 의병이 싸운 고개인데, 신천영이 패하자 그 고개를 ‘패한 고개’라 하여 패티[敗티]라 하였고, 음이 변하여 배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은 믿을 수 없고, 배나무와 관련된 이름으로 여겨진다. 배티의 ‘배’를 이(梨)의 뜻으로 보고 한자화한 지명이 이티[梨티]이다. 전국적으로 배티 또는 배티가 전부 요소로 쓰인 지명이 더러 발견되는데, 이들 대부분은 배고개·뱃재와 함께 쓰인다. 따라서 배티나 배티고개는 ‘배나무가 있는 고개’로 풀이할 수 있다. 배티마을에 있는 배티고개도 마을 어귀에 돌배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배티나 이티에서 ‘티’는 고개를 뜻한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티 대신 재나 고개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고, 그에 따라 티의 뜻이 불분명해지자 유의어 고개를 중복하여 배티고개로 부른 것이다. 배티나 배티고개는 그 뜻은 같지만, 현재 배티는 마을 이름으로, 배티고개는 고개 이름으로 나누어 사용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명에 ‘영(嶺)’·‘현(峴)’계 지명이 여럿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고개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에 있는 배티마을은 원래 아랫말·중간말·꼭대기말로 이루어졌으나 현재 중간말은 없어졌다. 배티마을은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20~1830년대 무렵이다. 1857년 무렵에는 배티와 절골 주변의 양백리 삼박골, 용덕리 용진골·정삼이골, 백곡면 명암리 발래기·명심이, 백곡면 사송리 지구머리, 이월면 신계리 새울, 진천읍 지암리 지장골, 문백면 구곡리 굴티 등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배티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신도 30여 명이 관군에게 학살당한 곳으로 지금은 성역화하여 순례지가 되었다.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박해 소설 『은화(隱花)』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충청북도 진천군의 백곡면 양백리와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현재 325번 지방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조선 시대 지명은 대문령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서쪽 35리에 있으니 이곳이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택리지』에서 진천의 위치를 대문령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지도서』에는 "관아 서쪽 30리에 있으며, 심곡산에서 뻗어 나와 협탄령(脇呑嶺)으로 이어진다."라는 기록이 있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인근에 '백학령(白鶴岺)' 지명이 기재되어 있고, "경기 안성계 월하동 30리에 있다."는 내용이 있다.
장고개(성대리/410m) - 충청북도 방향으로 에머슨골프크럽이 있다.
장고개(성대리/410m)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성대리 두멍골마을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를 연결하는 고개인 장고개[場고개]는 장(場)과 고개로 나뉜다. 장은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여러 가지 물건을 사고파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장고개는 ‘정기적으로 장을 보러 다니던 고개’로 풀이된다. 장고개는 개미둑재로도 불리는데, 산이 높아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뒤에 오는 사람이 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인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개미둑재는 갬덕지고개로도 불린다.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명에 ‘영(嶺)’·‘현(峴)’계 지명이 여럿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고개’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장고개는 백곡면 성대리 두멍골마을에서 서북쪽으로 약 3㎞ 떨어진 다락골 골짜기에 위치한다. 다락골은 본래 달골에서 변화된 어형으로 ‘높은 골짜기’를 뜻한다. 따라서 이곳에 있는 장고개도 비교적 높은 곳에 있었으나 과거 안성을 오갈 때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길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개가 폐쇄되어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 고갯마루에는 장군이 죽어서 묻혔다는 전설이 전하는 서낭당도 있었다.두멍골마을은 모니마을 북쪽에 있던 마을로 몇 가구가 살았는데 두멍컨트리클럽의 부지로 흡수되면서 폐동되었다.
장고개(성대리/410m)
470.8봉 헬기장 - 안성시가 한눈에 조망된다.
409.9m 삼각점
409.9m 삼각점
옥정고개(玉井峴/387지방도로/320m)
옥정고개(玉井峴/387지방도로/320m)
충청북도 진천군의 이월면 신계리와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지금은 387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옥정현은 안성시의 마을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지지자료』에 '근무치(小武峙)'로 나온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이곳에 '요순치(堯舜峙)'로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한편, '요순산(堯舜山)'은 인근 무이산의 이칭이다.
옥정고개(玉井峴/387지방도로/320m)
옥정고개(玉井峴/387지방도로/320m)
옥정고개(玉井峴/387지방도로/320m)
옥정고개(玉井峴/387지방도로/320m)
고라니봉(411m)
고라니봉(411m)
만디고개(平澤 - 陰城間高速國道/424m)
만디고개
경기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와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죽현리를 잇는 고개로 평택제천간 40번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부부돌탑(平澤 - 陰城間高速國道/424m)
무이산(無夷山/462.3m)
무이산(無夷山/462.3m)
충청북도 진천군의 북부에 있는 산이다(고도:463m). 진천군과 안성시와의 경계를 이루며, 산 아래에 무술(또는 무수) 마을이 있다. 이 지명과 관련되는 내용이 수록된 사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다른 이름으로 '요순산'이 있고, 『1872년지방지도』에 요순치(堯舜峙)가 기재된 위치로 추정하여 볼 때, 사료에 기재된 심곡산(深谷山)이 지금의 무이산일 가능성이 높다. 심곡산에 대한 기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여지도서』에는 "충주의 소속리산(小俗離山)에서 북쪽으로 죽산(竹山)의 주걸령(周傑嶺)을 거쳐 구불구불 뻗어 와서 대문령(大門嶺)이 된다."라는 내용이 있다. 『1872년지방지도』에서 백곡면 유곡점(楡谷店)에서 죽산현을 연결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고개의 동쪽에 무이산으로 추정되는 산지가 묘사되어 있다. 무이산은 오랑캐가 없는 섬, 혹은 속세의 번민을 잊는다고 하여 '무수산(無愁山)'이라 하였고, 산속에 있으면 중국의 요순시절 같이 편하다고 하여 '요순산(堯舜山)'이 되었다는 지명 유래가 전하기도 한다. 국어학계에서는 '무수산'이나 '무위산'은 '무술산'에서 변한 것으로 본다.
무이산(無夷山/462.3m)
무이산(無夷山/462.3m)
사장골정상(400m)
무티고개(388m)
무티고개(388m) - 돌탑/안부
454.6봉 삼각점
덕성산(德城山/521.8m)
덕성산(德城山/521.8m)
덕성산(德城山/521.8m)
경기도 안성시의 동남쪽 칠현산 아래 위치한 산이다(고도/522m). 금광면과 죽산면,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에 걸쳐 있다. 요순산(堯舜山) · 무위산(無爲山) · 무수산(無愁山) · 국사봉(國寺峰) 등으로도 불린다. 산의 남쪽 계곡에 있는 구암리(鳩岩里)와 무수리(無愁里)는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이 소년시절부터 낭도(郞徒)들과 무예를 연마하던 터라고 전해진다. 산 동쪽 기슭에 조선 선조의 4서녀 정인옹주와 부마 홍우경의 묘소가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519m이다. 요순산(堯舜山)·무위산(無爲山)·무수산(無愁山)·국사봉(國寺峰)으로도 불린다. 이 산은 진천군 북서부의 서운산(瑞雲山:547m)·무제봉(武帝峰:574m)·옥녀봉(玉女峰:457m)·백석봉(白石峰:468m)·장군산(將軍山:436m)·만뢰산(萬賴山: 612m)과 함께 차령산맥(車嶺山脈)의 연봉을 이루고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있다.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속리산 천황봉(天皇峰:1,058m)에서 충청북도 북부 내륙을 동서로 가르며 안성 칠장산(七長山:492m)에 와서 멈춘다. 이 산은 북동쪽 칠현산(七賢山:516m), 칠장산보다 약간 높지만 능선이 서남으로 이어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중생대 말의 습곡산맥으로 화강 편마암이 깔린 구릉산지이다. 세 산의 종주는 9시간 가까이 걸린다. 덕성산 남쪽 계곡에 구암리(鳩岩里) 무술리[無愁里]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은 진천 태생으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595∼673) 장군이 소년시절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라는 낭도(郞徒)들과 무예 등 화랑도(花郞徒) 정신을 연마하던 터이다. 북쪽 골짜기 비들목도 화랑들이 전서구(傳書鳩)를 길들이던 마을이며, 동쪽으로 내려오면 화랑의 연무대와 병기고 자리에 병무관(兵武館) 마을이 있다. 또 산기슭 화랑벌의 화랑도 수련관 자리가 궁전터라 전해오고 있다. 진천의 옛이름은 상산(常山)인데 상산팔경의 3경인 금계완사(錦溪浣紗)는 조선시대 충청도의 관찰사(觀察使)가 바뀔 때마다 신·구관이 인수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즐긴 곳으로 지금의 칠장천 일대라고 한다. 당시 과거 보러 가거나 안성장을 가려면 이 산의 무티고개라는 옥정리고개[玉井峴]나 사기막고개를 이용했다. 굴참나무·산벚나무·소나무 울창한 정상 부근에는 조릿대가 무성하다. 이 산에서 시작된 구암천이 남으로 흘러 미호천(美湖川)에 합류하고 17번국도가 진천읍으로 달리며 중부고속도로는 음성IC에서 5분 거리이다. 문화재로는 광혜원면 실원리 덕성산 기슭에 조선 선조의 부마 홍우경(1590∼1625), 정인옹주의 묘소(충북기념물 78)가 있다.
덕성산(德城山/521.8m) 정상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葬龍仁)
옛날에 충북 진천에 살던 처녀가 경기도 용인으로 시집을 갔다. 그곳에서 아들을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다시 진천으로 돌아와 살다 재혼을 해서 아들을 낳고 살게 되었다. 어느 날 장성한 용인의 아들이 자기가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하고 진천의 아들도 자기가 모셔야 된다고 하며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용인의 아들이 원님께 소장을 제출했다. 원님은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느 날 원님의 손자가 "할아버지, 무슨 고민 있으세요, 진지도 못 드시고." "네가 알아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래도 말씀해 보세요." 용인 아들, 진천 아들 이야기를 들은 손자가 "할아버지,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동안에는 진천 아들이 모시고, 돌아가시면 용인 아들이 (제사를) 모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원님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래서 어머니 생전에는 진천 아들이 모시고, 돌아가신 후에는 용인에 묘를 만들고 용인 아들이 잘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말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다. '살아서는 진천에 거하고, 사후에는 용인에 거한다'는 말이다.
공림정상(513m)
공림정상(513m)
칠현산(七賢山/516m)
칠현산(七賢山/516m)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죽산면에 있는 산으로, 높이 516m로, 산기슭에 칠장사가 있다. 고려 때 혜소국사가 일곱 도적을 제도하여 도를 깨치게 했다 하여 칠현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경기도 안성시의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고도/516m). 금광면과 죽산면에 걸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칠현산은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라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죽산군읍지』에는 "아미산(峨嵋山)은 남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는데 칠현산이라 불리기도 한다."고 하여 칠현산의 다른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칠현이란 지명은 고려 시대 혜소국사가 신라 때 창건된 칠장사라는 사찰에서 수도를 하던 중 일곱 도적을 제도하여 도를 깨우치게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산기슭에는 칠장사(七長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칠장사의 현판 · 당간에는 '칠현산'이라는 산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칠현산(七賢山/516m)
칠현산(七賢山/516m)
칠현산(七賢山/516m)
부부탑칠순비(427m)
3정맥 분기점(500m)
3정맥 분기점(500m)
3정맥 분기점(500m)
금북정맥
칠현산에서 시작하여 천안 예산을 거쳐 서산을 들어가 태안반도 안흥에 가서 끝난 산맥을 말한다,(역순으로 진행하였다.)
칠장산(七長山/492.4m)
칠장산(七長山/492.4m)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금광면·삼죽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가 492.4m이다. 산기슭에 있는 칠장사와 칠장사 주변의 울창한 숲으로 유명하다. 덕성산(519m)·칠현산(516.2m)과 능선으로 이어진다. 예전에는 칠현산의 일부였으나 조선 후기에 세도가의 사유지가 되면서 독립된 산이 되었다.
칠장산(七長山/492.4m)
칠장산(七長山/492.4m)
칠장사(七長寺)
칠장사(七長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636년(선덕여왕 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그 뒤 고려 초기에 혜소국사(慧炤國師)가 현재의 비각(碑閣) 자리인 백련암(白蓮庵)에서 수도할 때 찾아왔던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7인 모두가 도를 깨달아 칠현(七賢)이 되었으므로 산이름을 칠현산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혜소국사는 왕명으로 1014년(현종 5)에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그 뒤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여 내려오다가, 1674년 세도가에게 산을 빼앗겨 승려들이 모두 흩어져서 잠시 빈 절이 되었던 것을 거사(居士) 초견(楚堅)이 다시 찾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원통전(圓通殿)·명부전·응향각(凝香閣)·천왕문(天王門)·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웅장한 규모, 우아한 조각미와 채색미가 괄목할 만하다. 또한, 천왕문 내의 소조사천왕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비각 내에 보존되어 있는 보물 제488호의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가 있다. 1060년(문종 14)에 건립된 이 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적장인 가토(加藤淸正)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크게 꾸짖자, 화가 치민 가토가 칼을 빼서 베니 홀연히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렸으므로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쳤다고 한다.
현재 국사의 비신(碑身)은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이 밖에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인목대비의 친필 족자를 비롯하여 당간지주(깃발을 걸기 위해 세운 기둥 초석), 수많은 부도군(浮屠群:승려의 유골을 모신 부도들)이 있다. 이 중 족자는 인목대비가 이 절에 와서 수양할 때 쓴 것이다. 또한, 절 입구에 있는 14기의 부도와 절 뒤편의 수많은 부도탑은 이 절의 유구한 역사를 일깨워 준다.
특히, 절 입구에 있는 철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청주 용두사지(龍頭寺址)와 갑사(甲寺)에서만 볼 수 있는 극히 드문 문화재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칠장사의 풍수적 형국이 행주형(行舟形)이므로 이 당간으로 배의 돛대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그 밖에도 고려 말에 왜구의 피해가 극심할 때 충주 개천사(開天寺)에 있던 사서(寺書)를 이 절로 옮겨서 보관하여 소실을 면한 일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명적암(明寂庵)·극락암(極樂庵)·백련암 등이 있다. 절 일원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장사(七長寺)
산행 트랙
산행 결과물
|
출처: 산 길 따라 발 걸음 원문보기 글쓴이: 청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