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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립미술관】
고창 지역은 일찍이 선사 시대 령혼의 제단이자 집단 조형물인 고인돌을 축성하여 현재에 전하고 있으며, 고려 시대부터는 찬란하게 불교 文化를 꽃피워 국보급 사찰과 당우, 다수의 불교 미술품이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전한다. 찬란한 불교문화 뒤에는 뛰어난 고승들이 있었으며, 그중 백파대사의 지고한 도의 경지는 당대 석학의 大家인 秋史 金正喜가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의 글과 글씨를 씀으로서 至高한 예술적 경지로 소통 승화되었다.
대략 이 시기 이후와 근대에 들어 고창 지역에 念齋 宋泰會 [1872 ~ 1941], 普正 金正會[1903~1970], 石田 黃旭 [1898 ~ 1993], 西洋畫家 진환(陳瓛)[1913~1951] 등 걸출한 작가들이 出現하였다. 고창군립미술관은 이 같은 고창의 조형 미술 정신을 기념하고 공유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한편, 미술 애호가이자 수집가인 무초 진기풍 옹은 자신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普正, 石田, 念齋, 陳瓛 등 고향 작가들의 작품을 2001년 고창판소리박물관 설립과 함께 기증하였는데, 이것이 고창군립미술관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고창 지역의 이름난 현대 작가들이 작품을 내놓았으며, 고창군에서 이를 기증받아 고창군립미술관을 설립 개관하게 되었다.
소장품 기증자 무초 진기풍선생의 소개
본 무초회향미술관은 진기풍(1925 ~ 2017. 향년 93세) 先生과 婦人 朴修渶 女史가 기증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無初’는 선생의 호이며, ‘무초회양(無初懷讓)’은 선생이 고향을 품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초 진기풍 컬렉션’은 선생께서 평생 수집하여 2001년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기증한 작품 140여 점을 말합니다. 컬렉션의 분야는 서양와, 한국화, 서예, 도자기, 현판 등 70여 점에 달하며 小癡 許鍊, 米山 許瀅, 南農 許楗, 蒼巖 李三晩, 海剛 金奎鎭, 翠雲 陳學鐘, 특히 서양화가 陳瓛 등 서예·미술사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명품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후 지역 작가 전시작품 기증자로는 김치현, 김용귀, 김삼순, 김수현, 김숙, 김재삼, 김용백, 김종한, 박병준, 김문철, 방정순, 서제섭, 서주선, 송익규, 이종렬, 임병남, 조상현, 조병완, 최만규, 최덕호, 하관수, 홍순무 등 많은 작가분들께서 기증해 주셨습니다.
ⅰ. 중인 진우곤(重忍 陳宇坤1896~1966) 중인 진우곤은 화가 진환(陳瓛 1913~1951)의 아버지이고, 유학, 한문학을 두루 섭렵한 예문가이며, 1946년 무장 중학교(현 영선중고)를 설립한 바 있다. 이 작품은 초서체로 글자와 글자 사이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연결되어 있으며 글자의 배열에도 돌출적인 변화를 주어 조형적 미를 느끼게 한다. [一勤天下無難事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百忍堂中有泰和 백번 참은 집에는 큰 화목함이 있다.]
ⅱ.석전 황욱(石田 黃旭 1898년~ 1992년) 호는 석전(石田)·남고산인(南固山人)·칠봉거사(七峰居士)·백련산인(白蓮山人). 전라북도 고창 출신. 가학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1920 년 금강산 돈도암(頓道庵)에 들어가 서예에 정진하였는데,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의 법필을 중심으로 서예공부를 하였다. 1930년 32세 때 고향인 고창으로 돌아와 15년간 신위(申緯)를 사숙하며 서예에 정진하는 한편, 육예(六藝: 중국 교육의 여섯 가지 부문, 禮,樂,射,御,書,數)를 익혀 거문고와 글씨에 마음을 의지하는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이때 그는 행서(行書)에 탁월한 경지를 이루어 친교가 있던 정인보(鄭寅普)·김성수(金性洙) 등의 격찬을 받았다. 황욱이 서예가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3년 75세 때 전주에서 지방유지들의 초대로 회혼기념서예전을 열면서부터였다. 1960년경부터 오른손 수전증으로 붓을 잡기 어렵게 되자, 왼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엄지로 붓꼭지를 눌러 운필하는 악필법(握筆法)을 개발하였다. 이에 따라 중풍으로 오른손에 마비가 와서 좌수서예가로 유명했던 유희강(柳熙綱)과 쌍벽을 이룬다는 평을 들었다. 악필로 인하여 미세한 점획의 처리가 어렵게 되자 그는 행간의 운율과 운필의 단순화에 의하여 격을 유지하는 독특한 경지를 체득하였다.1999년 5월에 아들 황병근씨가 석전선생님의 유작 418점을 비롯한 문화재급 각종 유산 5,200여 점을 전주국립박물관에 기증하여 석전기념실이 상설되어 있고 2016년에 석전선생님의 흉상을 건립하였다.
ⅲ. 보정 김정회(金正會1903~1970)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중립(中立), 호는 보정(普亭)이다. 1903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610-2번지에서 태어났다. 영모당(永慕堂) 김질(金質)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회천(晦泉) 김재종(金在鍾)이다. 김정회(金正會)는 어려서부터 종조할아버지 항재(恒齋) 김순묵(金純黙)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약관에 경사자집(經史子集)[중국의 옛 서적 가운데 경서(經書), 사서(史書), 제자(諸子), 문집(文集)의 네 부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에 두루 통달하였다. 1929년 27세 때 한갓 시골 선비로 옛 것만을 고수하고 새로운 학문을 배우지 않는 것은 시류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하여 29세 때 경학원(經學院), 즉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명륜전문학원에 입학하여 청나라에서 수입된 학문을 익히면서 국내의 석학들과 밤낮으로 학문을 연마했다. 또한 당시 서화로 이름난 海岡 김규진의 문하에서 글씨와 그림을 익혀 일가를 이루어 1938년 전일본문예전람회에서 입선을 하였으며, 1940년 전일본국전(全日本國展)에서 「풍죽(風竹)」이 특선으로 입선되었다. 1934년 고향집 만수당(晩睡堂)에서 도산보통학교를 개교하였고, 다음해인 1935년 아버지가 희사한 대지에 새로 학교를 지어 그 곳으로 옮겼다. 1941년 39세 때 경학원 강사로 선임되었다. 1945년 일제가 물러나고 광복이 되자 서울로 올라왔으나 혼란한 정치상을 보고 다시 귀향하였다. 이후 집안의 노비들을 불러 전답을 나누어 주고 왕등도로 들어가 艮齋 田愚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1946년 어머니의 상을 당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55년과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작품이 거듭 입선하였다. 1970년 68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ⅳ. 진환(陳瓛 : 1913-1951) 일제 강점기와 현대 무장 출신의 서양화가. 본관은 어양이고 본명은 진기용이다. 1913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에서 진우곤의 1남 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진환은 무장공립보통학교와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한 뒤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미술학교 3학년 때인 1936년 동경에서 열린 제1신자연합(협?)회전에 「설창」외 1점을 출품하여 장려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서독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국제올림픽 예술경기전에서 「군상」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이후 일본 도교에서 독립미술전․조선신미술가협회전․재동경미술협회전 등에 참가하고 1940년 동경미술공예학원 수료와 동시에 강사로 발탁되었다. 1941년에는 동경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는 조선 유학생들 중 김학준․이중섭․최재덕 등 유망한 학우들과 함께 조선신미술협회를 결성하고 창립전을 가져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ⅴ. 난계 임종수(1921 ~ 1992) 본관이 平澤이며 고려 말에 평성부원군 임언수의 후손이다. 1921년 고창 상평마을에서 출생했으며, 1939년 19세부터 현곡 류영선 문하에 들어 경전과 시문을 익혔다. 현곡 류영선의 수제자 중 한명으로 율곡 이이 → 우암 송시열 → 간재 전우 → 현곡 류영선 → 난계 임종수로 이어지는 유학의 학맥을 형성했으며, 일제 강점기와 근현대 고창의 마지막 전통유학자로 학문 활동을 벌였다. 현곡 문하에 서범 홍종호, 경당 신사범, 석계 류태석과 교우했고, 생선에 書, 記, 跋, 銘, 贊, 墓碣銘, 墓標, 遺事, 傳, 詩 등 440여편을 남겼으며, 특히 시에 능했다고 한다. 문집으로 ‘란계초고’4권2책을 남겼다. 특히, 평택림씨삼강실기는 씨족 내 충절의 모범이 되었던 선조에 관한 글을 엮은 책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분이 9대조 송호 임박이다. 정유왜란에 송호공은 남원성에 침범한 왜놈과 싸우다가 남원성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부인 이씨는 아버님의 시신을 수습하러간 아들 경발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해가 지나고 이듬해 봄이 다가도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아들도 죽었다고 생각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그 아들 경박은 부친의 시신을 찾으로 갔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가 8년만에 돌아와 부모상을 치르는데, 6년을 시묘하니 고을 사람들이 節孝居士라 칭송하였다. 한 집안에 아버지와 아들과 부인 등 三綱이 나니, 이의 기록을 삼강실기라 하였다. 송호공에게는 남대로 집의를 중직하고 旌門이 내려졌다.
ⅵ. 경당 신사범(絅堂 愼思範1925 ~ 2010) 1925년 고창군 부안면 조양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수십여 권의 “경당사고”集을 남길 정도로 활발한 享祀(향사: 제사)와 興學 활동을 펼쳤다. 南大熙(흥덕향교 전교 역임) 선생의 권유로 1970년 흥덕향교 전교를 역임하였으며, 흥덕향교를 중심으로 서원과 향교에 제관을 봉행하면서 비문·행장·행록·상량문·시문 등 수 많은 글을 남겼다. 남대희 선생과 함께 ‘흥덕향교지’, ‘흥성읍지’, ‘흥성문헌록’등을 정리 출간하기도 했다. 성균관대학교 등 몇몇 대학에 초청받아 한달에 1 ~ 2회 씩 강연을 나갔으며, 화강서원(현곡정사)에서 한학을 배우고자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하여 많은 제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 중 나종선, 이점수 등은 선생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전시된 ‘八老病畸人悳泉書(팔로병기인덕천서)’ 초본 8곡 병풍은 바로 덕천 성기운 선생의 글과 글씨를 모은 것으로 스승을 기념하고 귀감으로 삼기 위해서 순수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글씨 ‘신독여현’과 병풍 ‘상제림여무이’는 자신의 삶을 지탱해 온 평생의 화두와 같은 것으로 그의 아들에게 남긴 것이다. 선생은 타계할 때까지 도학을 몸소 실천하고 수련하며 2010년 세상을 떠났다.
ⅶ. 취운 진학종(翠雲 陳學鍾, 1923년~) 취운(翠雲) 진학종(陳學鐘) 선생은 1924년 전북 고창군 무장면에서 출생하였고, 陳懿鍾 전 국무총리의 친동생이다. 그는 60여 년 동안 고집스럽게 초서에 몰두해왔으며 병풍과 전각 액자 등 1백 여 점을 모아 대형작품집 『翠雲 草書 屛風帖』을 발간하기도 했다. 수십 차례에 걸쳐 국내 개인전을 가진 것을 포함, 중국 상하이 한중 합동전, 일본 신문협회 초대전, 홍콩 초청작가전 등 해외작품전(개인전 등)에 참가하기도 했다. 범태평양 미술대전 초대작가상과 싱가포르 공익부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취운 선생은 올해 84세로 60여년 동안 소멸해가는 초서 문화를 재현시키기 위해 힘써 왔으며, 어려운 악필(握筆) 솜씨로 천의무봉한 초서의 진수를 구현하여 사계에 명성이 자자, '동양 3국 최후의 초서 대가"란 말을 듣고 있다. 취운선생은 “초서를 쓰기 위해선 붓을 한 번 먹에 적시면 한 번에 써내려 가야 하기 때문에 모든 내용이 머리 속에 훤히 암기돼 있어야 하는 것은 필수”라며 “수만 번 연습한 결과, 2백10자나 되는 굴언의 ‘어부사’를 단 25분 만에 써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ⅷ. 김 치 현(1950 ~ 2009) 1950년 2월 26일 고창읍 죽림리 214번지에서 출생하여 고창읍 화평동에서 성장하였다. 고창초(48회), 고창중(14회), 고창고(44회)를 거쳐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 후 1977년 신림중학교에서 1년을 근무, 1983년까지 모교인 고창고등학교에서 근무하였다. 모교에 재직 시 ‘고창중·고 60년사’ 발간 편집위원으로, 또한 고창중·고 미술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조선대 미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이래 줄 곳 서양화를 그렸다. 작품 활동 경력으로는 색채의 연금술사와도 같은 색조와 서정적인 시각으로 자연의 일상을 화폭에 담아내어 9번의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2008년 한국전통문화고등학교를 떠난 후에는 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 전라미술상 운영위원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3번의 대장암 수술에도 암이 폐로 전이되어 투석을 받다가 한참 피어오르는 예술혼을 뒤로하고, 향년 60 세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ⅸ. 수사공 강응환(水使公 姜膺煥 1735 ~ 1795년) 본관이 진주이고, 자는 命瑞이며, 호는 勿欺劑이다. 전라도 무장현(현재 성송면 암치리)에서 1735년(영조 11년) 출생하였다. 수사공 강응환은 언제나 우국충정의 성심으로, 신하로서 그리고 관리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했다. 그가 평안도 창성부사로 재직할 당시 압록강 연변일대의 세밀한 군략지도를 만들었고, 대구영장 및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재직시에는 영남해안 일대의 군략지도를 만들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케 한데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는 이 지도를 각각 3부씩 작성 1부는 국왕에게 올리고, 1부는 관아에 비치케 하였는데 그 일부인 청북변성도 와 고려중요처도가 현재 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가. 청북변성도는 압록강 연안 일대의 국경지대를 그린 것으로, 군사적 목적을 위해 제작된 군략 지도임을 알 수 있다. 12폭으로 되어 있으며 각 폭의 크기는 가로 18.4㎝, 세로 44㎝로, 윗부분에는 지도에 수록된 각 고을의 지리를 설명하는 글을 적어 놓았다. 이른바 江邊七邑 즉 義州, 朔州(삭주), 昌城, 碧潼, 礎山, 渭源, 및 江界가 수록되어 있다. ‘淸北’이라는 명칭은 물론 ‘淸州江’에서 유래된 것이다. 나. 고려중요처도 역시 군사적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그 이름과는 달리 영남지역의 연안 일대와 그 해안 일대에 산재한 섬들을 그린 16폭의 지도이다. 즉 강원도와 접하고 있는 동해안 寧海로부터 전라도와의 접경인 河東에 이르기가지의 연안 전역과 그 해안 일대에 산재한 섬들을 그린 지도이다.
ⅹ. 강암 송성용( 剛菴 宋成鏞 1913∼1999.) 한국서예의 독자적 경지를 이룬 호남을 대표하는 서예가이자 유학자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호는 강암으로 간재 전우의 제자인 유재 송기면의 3남 1녀중 셋째로 1913년 7월9일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전, 예, 해, 행, 초 5체는 물론이고 대나무, 난초, 매화, 국화, 소나무, 파초, 괴석 등 다양한 소재의 文人畵에 일가를 이루었으나, 1956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외부의 권고에 못 이겨 대한민국서예대전에 출품해 행서와 화죽 2점을 출품해 입선하면서 유명해졌다. 서예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이 강한 유학자로 일제강점기 창씨 계명을 하지 않고 죽기 직전까지 보발과 한복을 지키며 살았는데, 사람들이 "시대가 달라졌는데 왜 불편하게 사느냐”고 하는 질문에 늘 "나를 평생 지켜준 게 갓과 상투요”라고 대답하며 한평생 선비로서의 강직함을 지키면서 보냈다고 한다. 강암 선생의 작품은 호남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비문 현판 등 수천여 점이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호남제일문, 내장산내장사, 토함산석굴암, 두륜산대둔사, 불국사자하문, 불국사불국선원, 원각성존소태산대종사비명, 연지문, 금산사보제루, 백양사화엄전, 화엄사적멸당, 금오산향일암, 동춘송선생유허비, 신도비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ⅺ. 간제 전우(艮濟 田愚1841~1922) 전라북도 전주 출신. 본관은 담양(潭陽). 초명은 경륜(慶倫)·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 아버지는 전재성(田在聖)이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이다. 1882년(고종 19)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선공감감역·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강원도도사, 1894년 사헌부장령, 이듬해 순흥부사·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 박영효(朴泳孝) 등이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전우는 의리정신을 숭상하고자 조선조의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동방의 오현(五賢)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문집 가운데서 좋은 말을 뽑아 『근사록(近思錄)』의 체재를 모방하여 『오현수언(五賢粹言)』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학문적 업적에 대해 곽종석(郭鍾錫)은 그의 저서 『면우집(俛宇集)』 권111의 「홍성길(洪成吉)에게 답하는 글」에서 “나 스스로는 간옹(艮翁)에게서 평소에 그 청절(淸節)을 흠앙(欽仰)했던 것이요, 성존심비(性尊心卑)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미치지 못했던 바이니 간옹이야말로 나의 의혹된 바를 풀어줄 수 있는 분이다”라고 하였다.
ⅻ. 소치 허련 (小癡1 許鍊1809 ~ 1892) 김정희 화파의 한사람으로, 조선 말기 화단에 남종화풍을 토착화하는 데 기여했다. 허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의 후손이며 어려서부터 전통화풍을 익혔다. 1839년 김정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수업을 받았다. 허련은 산수·모란·사군자·괴석·연꽃·노송·파초 등 다방면의 소재를 능숙하고도 대담한 농묵을 구사하여 표현했는데,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다. 그의 산수화는 김정희로부터 배운 중국 북송의 미불, 원말의 황공망과 예찬, 청나라 석도 등의 화풍과 남종문인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이룩했다. 김정희가 죽은 1856년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하면서 그림에 몰두했다.
Ⅰ.미산 허형(米山 許瀅1862~1938) 본관은 陽川, 本名은 潔(개끗할 결, 맑을 결), 전주 출신이다. 호남 남종화의 실질적 宗祖라 일컬어지는 小癡 許鍊 의 넷째 아들로 진도, 강진, 목포에서 활동하였고 근현대 호남 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아들 南農 許楗과 족손 毅劑 許白鍊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小癡 → 米山 → 南農 → 林田 등 4대에 걸친 전통 남종화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Ⅱ. 남농 허건(南農 許楗1907년 ~ 1987년)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남농(南農). 전라남도 진도에서 출생하였다. 19세기 남종화의 대가인 허련(許鍊)의 손자이며, 직업 화가였던 허형(許瀅)의 아들이다. 화가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나타냈다. 그러나 생활의 빈궁함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목포상업전수학원에 들어가 상업을 공부하였다. 그런 가운데에도 타고난 그림 자질이 발휘되어,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동양화부에 수묵 담채(水墨淡彩)의 사실적인 풍경화로 입선하였다. 1944년까지 연달아 입선과 특선에 오르면서 전통 화단에 진출하였다. 1940년에 제작된 수묵 채색화 「금강산 보덕굴(普德窟)」과 같은 무렵의 「산촌(山村)」은 광복 전의 대표작이다.
Ⅲ. 林田 남종화는 남종화가로 분류되는 여러 화가들이 구사했던 수묵산수화의 복합적 양식을 일컫는다. 남종화라는 용어는 중국 명나라 만력연간에 막시룡(莫是龍)[1537~1587], 진계유(陳繼儒)[1588~1639], 동기창(董其昌)[1555~1636] 등 문인 서화가에 의해 주창된 남북종론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남종화는 17세기에 청나라와의 빈번한 교류로 중국화가들의 문인화 작품이 직접 유입되기도 하였고, 청초에 발간된 『고씨화보(顧氏畵譜)』나 『당시화보(唐詩畵譜)』,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의 화보를 통해 형식화된 모습으로 유입되어 그 전파가 가속화되었다.호남남종화의 본고장인 진도에서는 허련과 허형의 뒤를 이어 많은 화가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허련의 집안에서만 해도 허형의 아들인 南農 許楗과 임인(林人) 허림(許林)[1917~1942]을 비롯하여 허림의 아들 임전(林田) 허문(許文), 허건의 장손자인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허진을 비롯한 여러 후손들이 화업을 잇고 있다.
Ⅳ. 추사 김정희의 유배길 행로(行路)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제주도 유배 길을 떠나는 행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남원을 경유하여 해남 대흥사를 거쳐 제주도로 간 길과 다른 하나는 고창을 거쳐서 해남 대흥사에서 제주도로 가는 두 가지 길이다. 대부분은 남원을 경유 대흥사를 거쳐 제주도로 갔다는 것이 정설인양 알고 있지만, 고창사람들이 말하는 추사선생의 유배 길은 전주에서 고창, 나주, 해남을 경유해서 제주도로 가는 직선 귀양길이라고 주장하는 바가 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추사가 귀양 가는 그때만 해도 선비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귀양을 가면 대접하고자 하는 풍조가 있었다. 추사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전라관찰사의 배려에 의해 전주에서 태인, 흥덕을 경유하여 부안면 하오산 마을에 살고 있는 전주이씨 이문술씨 집에서 귀양 가는 추사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뜻으로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해 온다. 그런 인연으로 추사는 이문술씨에게 한 질(열 폭)의 병풍글씨도 써주고 잔치에 참여한 선비들과 정담을 나누며 좋은 글귀도 한 점씩 써 주었다고 전해온다.
그 근거가 바로 당시 무장현으로 가는 길초인 반암마을에 하서 김인후(1510-1560)의 후손과 제자 (변성진, 변성온)가 터를 잡아 살고 있던 선비 집에 들려 인천 강가에 높이 솟아 있는 병바위를 보고 도영벽류(倒影碧流:파란 강물에 비치는 그림자)란 편액을 남겼는데, 그 편액은 1983년에 반암마을에서 발견하였다. 또한 반암마을 인촌 김성수 선생의 조모님 제실에서 아홉 편의 주련도 2015년도에 발견하였다. 이는 추사의 칠언 절구 시를 주련으로 각자(刻字)해서 걸어 둔 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진품 글귀인 것이다.
아홉 편의 주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첨문장세희유(子瞻文章世希有)(자첨[소동파의 호])의 문장은 희귀한데) 적향강파동성두(謫向江波動星斗)(귀양길은 강 물결이 하늘과 맞닿은 먼 곳이네) 행행로전봉회처(行行路轉峯廻處)(걷고 또 걷는 길 굽이굽이 산봉우리 돌아드는 곳) 일도청천천상래(一道淸泉天上來)(한 가닥 맑은 물 저 높은 곳으로부터 흘러오네) 부용만타자산호(芙蓉萬朶自珊瑚)(수만 송이 연꽃은 산호 같지만) 약비인간범초목(若比人間凡草木)(인간 세상에 비한다면 평범한 초목이라네) 하인유필필무진(何人有筆筆無塵)(어느 누구의 붓인들 흠이 없으랴만) 아계일폭위사진(鵞溪一幅爲寫眞)(거위 노는 시냇물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인데) 전가패리유란유분(田家敗籬幽蘭逾芬)(농가의 낡은 울타리 넘어 난향 그윽하네)
당시 칠언절구 시를 지어 지역 선비들과 귀양 가는 심정을 토로할 때, 추사의 마음인들 어떠하였을까 만은 그 때 추사의 시가 아홉 줄의 주련으로 고창 반암마을의 인촌 선생 조모님 제실에 남아 오롯이 추사의 심정을 전하고 있으니 후학들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뒤 아홉 줄의 주련은 군립미술관에 기증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추사가 인천강가에서 남긴 도영벽류 편액이 주련과 함께 군립미술관에 전시된다면 고창을 다녀간 자취를 확실하게 증빙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본인이 군립미술관에서 추사의 주련 아홉 편을 해설하는 기회를 얻었으니 이 아니 영광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
첫댓글 저도 자주 갔었지요
부모님이 인암병원에 6년간 계셨거든요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