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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514. [역경의 열매] 이장식 (1-30) 시련과 고난의 지난 100년 세월 주께서 살게 하셨다
지금껏 살아 신학 끝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주님 도움 없이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항상 누군가를 통해 부족한 날 도와주셔
100세 신학자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5일 경기도 화성 ‘광명의 집’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 명예교수는 자신이 한 세기를 살았다기보다 주께서 한 세기를 살게 하셨다고 했다. 인터뷰 며칠 전 계단에서 넘어져 얼굴을 많이 다쳤지만 웃음은 잃지 않았다. 신석현 인턴기자
100년을 회고해서 몇 마디로 말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시대의 변화도 많았으니 그리 간단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시종일관 생각하는 건 하나 있다. 지금껏 살아서 예수를 믿고 신학을 끝까지 할 수 있었던 건 내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한 일이란 것이다. 한 세기를 내가 살았다기보다 주께서 한 세기를 살게 하셨다가 맞는 말일 것이다.
지난 한 세기는 우리에게 민족의 존망이 걸렸던 시련과 고난의 세월이었다. 나 역시 그 세월의 한 증인이다. 나라 빼앗긴 백성으로서의 운명의 쓴맛,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아픔, 그리고 교수와 목사로 살면서 영욕 간에 많은 일들을 겪었다. 어떤 요행을 바랄 수도 없는 시대였다. 내가 폭탄을 피하거나 총알을 피해갈 수는 없다. 총탄이 나를 피해갔다고밖에 볼 수 없는데,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결론밖에 안 나온다.
건강이 비교적 좋아서 여태 견딜 수 있었고, 다소 이해력이 있어서 책을 읽고 또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삶을 보장해주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은 내게 없다. 결국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 생각한다.
80세 때 자서전을 썼는데 제목을 ‘창파에 배 띄우고’라고 지었다. 넓고 거친 고해 같은 인생길, 좌초의 위험이 언제든 도사리는 바다 한복판에서 나를 물가로 인도한 건 늘 하나님이었다는 고백의 의미를 담았다. 자서전을 쓴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감사할 수밖에 없다. 주님을 믿지 않았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내 인생은 참으로 행복했다. 행복이라는 것이 어떤 물질의 소유나 건강으로부터도 오겠으나, 내게 있어 행복은 마음이 즐겁고 바라는 것을 추구했다는 데 있다. 각 시대마다 시대가 주는 괴로움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엔 피신해야 살 수 있었고, 한국전쟁 때는 은신해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헤쳐 나갈 길을 열어주셨다.
원수보다는 은인이 많았다.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말은 어찌 보면 막연한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확신을 갖고 이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은 항상 누군가를 통해 부족한 나를 도우셨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믿음의 선배들, 지금껏 삶의 여정을 함께하고 있는 아내 등 그분들이 내겐 천사와 같았다.
지금도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돼서 악과 불의를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에 따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서 영생을 취하며, 부르심을 받은 대로 많은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라고. 그리고 하나님은 또 한 번 기회를 주셨다. 내 삶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지만, 아무쪼록 이번 역경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끊임없이 역사하신 하나님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약력=1921년 경남 진해 출생, 한신대 졸업, 캐나다 퀸즈신학대 졸업, 뉴욕 유니언신학교 신학석사, 아퀴나스신학대 신학박사, 예일대 신학부 연구 교수, 계명대 교목 실장, 케냐 동아프리카장로교신학대 교수, 한신대 명예교수.
* [역경의 열매] 이장식 (1) 시련과 고난의 지난 100년 세월 주께서 살게 하셨다
* [역경의 열매] 이장식 (2) 삶이 곧 신앙인 어머니의 모범과 감화로 믿음 키워
* [역경의 열매] 이장식 (3) 열다섯 나이에 주점 취직… 장학생에 뽑혀 학업 이어가
* [역경의 열매] 이장식 (4) 모든 중학생에 신사참배 강요… 행진 도중 숨어버려
* [역경의 열매] 이장식 (5) 학과시험 붙었으나 대답하기 곤란한 면접관 질문에…
* [역경의 열매] 이장식 (6) 징용돼온 야금 공장에 B-29 폭격 '온 도시가 화장터'
* [역경의 열매] 이장식 (7) 굶주림과 밤마다 폭격 있을 거란 소문에 공장서 탈출
* [역경의 열매] 이장식 (8) 징용 끌려가 사지를 헤매다 그리웠던 어머니 품으로
* [역경의 열매] 이장식 (9) 모교 계성학교서 배운 적도 없는 국어 가르치게 돼
* [역경의 열매] 이장식 (10) 신학에 대한 열망에… 교사생활 접고 조선신학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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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이장식 (29) 케냐서 15년 사역 마치고 안식처 '광명의 집'으로 귀국
* [역경의 열매] 이장식 (30·끝) 평생을 후학 위해 강단에 서… 이들 좋은 목회자 되길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장식 (2) 삶이 곧 신앙인 어머니의 모범과 감화로 믿음 키워
아버지 지병으로 살림 궁해져 채소 행상
어렵게 생계 이어가면서 집사 직분 다해
사경회 기간엔 장사 쉬고 종일 집회 참석
이장식 교수 어머니 박봉금(가운데) 여사가 아들 내외 및 손주들과 함께 1965년에 찍은 가족사진.
나는 1921년 경남 진해 동쪽 해안에 위치한 덕산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그만 마을이었다. 내가 다섯 살쯤 됐을 때 일본 군부는 우리 마을 대부분의 집을 철거시키고 거기다 비행장을 만들었다.
그런 우리 마을 옆으로 약 25리쯤 떨어진 곳에 경화동이라는 꽤 큰 동네가 있었다. 그곳엔 내가 다니던 경화교회가 있었다. 1905년에 설립된 진해에서 유일한 교회였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불신자 가정에 시집오면서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갖고 왔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머니가 교회 다니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조상 대대로 살던 의령에서 벗어나 삼대독자인 아버지를 데리고 홀로 진해 덕산으로 건너왔다. 친척도 없는 타지로 이사해서 살면 아들의 명이 길어진다는 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이따금 무당을 불러 속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굿을 하기도 했다.
그 시절 조선의 문화가 그러했지만, 아버지의 병은 낫지 않았다. 약값만 밀려갔고 우리 집 살림은 궁해 가기만 했다. 어머니는 마을 아주머니들과 함께 채소장사를 시작했다. 아침 일찍 진해 시가에 가서 채소 도매상에게 채소를 산 뒤 일본인 집을 찾아다니며 행상을 했다.
이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는 먼저 교회부터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조금씩 우리 가정을 변화시켰다. 어머니는 경화교회를 나가면서 아버지를 전도했다.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때 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했는데 이때 믿음의 싹을 틔웠다. 당시 사경회 강사는 이기선 목사님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세례를 받았고, 할머니도 이따금 교회에 나가게 됐다.
어머니는 채소 행상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면서 교회의 집사 직분을 충성스럽게 이행했다. 교회 사경회 기간이면 어머니는 장사를 쉬고 새벽기도회부터 종일 집회에 참석했다. 강사 목사님 식사 준비는 언제나 어머니 몫으로, 어머니 스스로 마르다의 직책을 자처했다.
어머니는 조용한 신앙인이었다. 기도할 때도 울거나 큰 소리 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장사 일이 고되다든지, 돈이 없다든지, 살아가기 힘들다든지 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 장래에 대한 당신의 희망 사항 같은 것도 말씀한 적이 없었다. 가끔 “의인이 버림받거나 그 자손이 걸식하는 일이 없다”는 시편 37장 25절 말씀을 읊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말로써 나에게 신앙을 가르쳐주거나 주입시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그분의 모습을 보며 믿음을 키웠다. 이때의 경험 때문인지 나는 종교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모범과 감화로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성미를 열심히 모아서 성경, 찬송책과 같이 책보에 싸서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이 어머니의 유일한 나들이였고 즐거움이었다. 내가 열 살 때 아버지가 마흔 살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교회는 어머니의 울타리가 되고 힘이 돼 줬다.
그 시절 교회는 조선총독부의 억압과 일본 경찰의 경계 아래서 실로 쫓긴 자들을 하나님이 모으신 곳이었다. 특히 우리 가족에게는 참새와 제비 새끼가 집을 지어 사는 보금자리와 같은 곳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3) 열다섯 나이에 주점 취직… 장학생에 뽑혀 학업 이어가
색약으로 취직시험에 떨어져 주점서 잡일
모교회의 목사님 권유로 장학생에 지원
선발시험 거쳐 기독재단 계성중학교 합격
이장식 교수의 모교회인 진해 경화교회. 가운데 한복 차림의 강상은 목사가 서 있다.
보통학교 졸업 동기생 120명 중 중학교에 진학한 사람은 단 셋뿐이었다. 나는 진해 일본해군공작소에 취직 시험을 치렀다. 학과 시험은 통과했으나 색약이 발견되면서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어머니의 실망이 크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태연하셨다. 어머닌 행상을 하며 알게 된 일본인 주점에 나를 소개해 취직시켰다. 내 나이 겨우 15세였다.
이 시절 일본인 상점주인들 중에는 조선인 점원들을 학대한 사람들이 많았다. 다행히 내가 만난 주인은 그러진 않았다. 다만 일은 고됐다. 주점에서 얼마 동안은 술병 씻는 일, 청소하는 일, 그리고 주인집 아이를 봐주는 정도의 일을 했다. 취직한 지 4~5개월 후엔 집집을 다니면서 새 고객을 구하는 일과 술 배달, 신문 배달 일도 했다. 집에는 한 달에 하룻밤만 갈 수 있었다. 주일날 교회 가는 일은 꿈도 못 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모교회인 경화교회 강상은 목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내게 세례를 주신 강 목사님은 1938년 조선장로회 총회가 일본 신사에 참배할 것을 결의했을 때 목사직을 사임하고 은거하실 만큼 믿음의 강단이 있는 분이었다. 강 목사님은 내게 당시 경남 지역 선교를 담당했던 호주장로교선교부 장학생에 지원하라고 했다.
나는 중학교 입학시험 두 달 전에 주점 주인에게 양해를 얻고 집으로 돌아와 수험준비를 시작했다. 호주장로교선교부는 경남의 여러 교회에서 온 장학 지원생들 대상으로 먼저 선발 시험을 치렀다. 나는 이 시험을 거쳐서 대구 계성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나를 비롯해 4명의 장학생이 선발됐다. 우리가 이 장학제도의 마지막 수혜자였다.
내가 이 마지막 열차를 타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별수 없이 주점으로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강 목사님의 연락이 없었더라면 난 장학금 제도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어머니의 믿음이 내 신앙의 초석이었다면, 강 목사님은 그 믿음을 살려서 키워갈 수 있는 길을 찾아주신 분이었다.
계성중학교는 기독교 학교로 영남 지역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이 지역에서 붉은 벽돌로 건축된 최초의 학교이기도 했다. 이곳 강당 건물 정면 처마 아래에는 한문으로 잠언 1장 7절 말씀(寅畏上帝 智之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이 쓰여 있었다. 이 성구는 내가 주일학교 시절 암송했던 많은 성구 중 하나였다. 즐겨 외우던 말씀이 교훈인 학교에 입학하게 되다니. 실로 하나님의 큰 섭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시절 조선의 모든 학교 교실에선 일본말을 써야 했다. 교정에서도 일본말을 쓰도록 강요되던 때였다. 그러나 나는 졸업할 때까지 우리말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계성중학교는 내가 졸업할 때까지 계속 우리말로 예배를 드렸고 교정에서도 마음껏 우리말을 사용하도록 했다.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사립학교인데다 교장 역시 해럴드 헨더슨이라는 미국인 선교사였기 때문에 일본 당국에서도 우리 학교의 이런 분위기를 어느 정도 용인한 것 같다.
듣기론 헨더슨 교장이 미국으로 쫓겨난 뒤에 후임으로 조선인 교장이 들어선 때부터 학교 분위기가 아주 달라졌다고 한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4) 모든 중학생에 신사참배 강요… 행진 도중 숨어버려
교장 설교 통해 자유의 소중함 교훈 얻고
신앙동지회 결성, 주일마다 기도회 가져
국가의식으로 위장한 종교 행위에 울분
계성중학교 시절 이장식 교수가 결성한 신앙동지회. 맨 앞줄 가운데가 이 교수다.
계성중학교 해럴드 헨더슨 교장은 인격자이며 교육자였다. 가끔 교목을 대신해 설교 말씀을 전할 때도 있었다. 미국 록키산 기슭에 살던 어느 부부가 야생 독수리 새끼 한 마리를 집안에서 키우다 날려 보낸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독수리가 어느 정도 크자 산에 올라가 몇 번이고 날려 보냈지만, 새장에서 커서 자유할 줄 모르고 공중을 날다 다시 새장으로 돌아오더라는 얘기였다. 그러면서도 늘 끝은 부부가 독수리를 날려 보내는 데 성공하는 이야기로 맺었다.
헨더슨 교장은 이 설교를 통해 자유를 잃은 조선인 학생들에게 교훈을 주려 했던 것 같다. 실제 내겐 일제 강점기의 억압된 현실 속에서 자유함을 갈구하라는 어떤 메시지 같았다.
나는 믿는 친구들 10여명과 신앙동지회를 조직했다. 주일날 새벽이면 헨더슨 교장 집에서 기도회를 가졌다. 헨더슨 교장 집은 학교 맞은 편 동산에 있었다. 선교사들의 사택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주일 이른 새벽 동산을 오르내릴 때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성경 속 겟세마네 동산과 감람산이 상상됐다. 그만큼 이 동산이 좋았다.
이 시절 일본당국은 매월 일정한 날에 대구의 모든 중학생을 달성공원에 있던 일본신사로 불러 신사참배를 시켰다.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1938년 조선장로교총회의 신사참배 수용 결의로 교단 산하 기독교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폐교하거나 신사참배를 용인하고 폐교를 피하거나 이렇게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헨더슨 교장은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다른 기독교 학교와는 달리 후자를 택했다. 이 때문에 헨더슨 교장은 다른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미움을 많이 받았다.
헨더슨 교장이 이같이 결단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당시에 난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헨더슨 교장이 그렇게 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수많은 재학생을 보호하려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신사참배를 하는 날이면 행진 도중 골목길로 빠져 숨어버리곤 했다. 그러다 한번은 담임선생님에게 들켜서 “너희만 예수 잘 믿느냐”고 책망을 듣기도 했다. 부득이하게 신사참배 마당까지 가게 되면 1000명 넘는 학생들이 경례라는 호령에 맞춰 일제히 절을 할 때 나는 그냥 주저앉아 버리기도 했다. 일본 당국자는 신사참배를 종교 행위가 아닌 일본 정부 내무성에서 관장하는 국가의식이라는 말로 조선교회를 납득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다.
중학교 생활이 참으로 즐겁고 재밌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엔 일종의 비애가 있었다. 나라 망한 백성의 신세가 서러웠다. 우리나라 땅에 일본인들은 주육을 즐기는 반면, 우리 동족이 굶주려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것이 슬펐다. 태극기가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보지도 못했다. 무궁화가 조선의 국화라는 말은 들었으나 어찌해서 조선 민족이 그 꽃을 좋아해서 국화로 삼았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5) 학과시험 붙었으나 대답하기 곤란한 면접관 질문에…
중학 시절 신앙수양회서 목사의 꿈 갖고
신학 배우기 전 대학서 공부하려 일본행
입시 떨어져 막노동·신문 배달하며 재수
일제강점기 말엽 소나무에 V자형 상처를 내 송진을 채집하는 모습. 산림청 제공
5년의 중학교 시절은 내게 있어 축복의 시간이었다. 매년 한 번씩 열린 신앙수양회에서 송창근 박사, 김재준 목사, 한경직 목사 등 당대 유명했던 믿음의 선배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분들을 보며 목사가 되겠단 꿈을 키웠다.
나는 1941년 4월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갔다. 바로 신학교로 가기보다 대학에서 좀 더 공부를 한 뒤 신학을 배우고 싶었다. 당시 조선엔 대학이 많지 않았다. 난 여비만 마련해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가며 계속 개가를 부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일종의 대학 예과에 해당하는 구제(舊制) 도쿄제일고등학교 입시에 응했으나 떨어졌다. 재수를 결정하고 고학 생활을 시작했다. 먼저 일본으로 건너와 야간전문학교를 다니던 형을 만났지만 형 역시 내게 도움을 줄 형편은 되지 못했다. 형도 막노동 일을 하며 겨우 자기 학비를 마련하고 있었다.
난 형 소개로 막노동, 신문배달 일을 하며 입시학원 등록금을 벌었다. 신문 배달 구역이 큰 곳은 아침에 300가호 이상 배달해야 했다. 신문을 배달하면서 놓치고 지나가 버린 집으로부터는 주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일본인들은 자기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 보도를 몹시 기다렸다. 특히 41년 12월 8일 새벽 미명에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하와이 섬의 진주만을 폭격한 뒤에는 그 관심이 더했다.
나는 이듬해 입시 때 센다이에 있는 제2고등학교에 응시했다. 학과시험엔 붙었으나 면접에서 떨어졌다. 면접관들은 두 가지 질문을 했다. 하나는 ‘계성중학교 미국인 교장이 평소에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이었느냐’는 거였다. 이 당시 일본인이 가장 미워한 사람은 미국인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평소 우리에게 인격자가 되라고 가르쳤다”고 답했다.
다른 질문은 ‘조선총독의 내선일체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였다. 난 아직 나이가 어려서 정치 문제를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들이 내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나는 1년만 더 고생할 각오를 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도 또다시 낙방했다.
결국 43년 초여름 일본에서의 재수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내가 일본에 있는 동안 어머니는 진해에서 밀양으로 이사해 농사일을 하고 계셨다. 난 어머니 일을 거들며 시간을 보냈다.
이 무렵 일본은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전쟁 수행에 필요하다며 인적 물적 할 것 없이 모든 걸 공출해 갔다. 밀양은 알아주는 곡창지대였지만, 농민들은 열심히 일해서 거둬들인 대부분의 곡식을 일본정부에 내놔야 했다.
이들은 가정에서 쓰는 놋그릇, 제기, 놋쇠 요강까지 가져갔다. 심지어 교회 종까지도 가져갔다. 이렇게 가져간 놋쇠를 녹여 총탄을 비롯한 무기 생산에 사용했다. 일본이 저장한 기름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뒷산 소나무 마디를 따는데 동원됐다. 소나무 마디에서 진을 채취하기 위해서 였다. 일제는 소나무 진을 휘발유 대용 기름으로 짜서 썼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6) 징용돼온 야금 공장에 B-29 폭격 ‘온 도시가 화장터’
마을 내 24세 동갑내기들과 일본에 징용
군수공장서 적응 준비 중 미군의 대공습
타오르는 열기·화염에 몸 피할 곳 없어…
미군이 1945년 3월 도쿄대공습 때 사용했던 B-29.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도 사용됐다. 출처 미국육군항공대(USAAF)
대학에 재학한 조선인 학생들은 학병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군대 지원을 강요당했다. 어떤 사람은 중국 땅으로, 또 어떤 사람은 동남아로 끌려갔다. 내가 만일 일본에서 어느 학교에 입학했더라면 학병으로 어느 곳인가로 끌려갔을 것이고, 또 어떻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나 역시 징용을 피하지 못했다. 1945년 1월 징용명령서를 받았다. 마을 내 24세 남자들을 모조리 잡아가는 소위 횡단 징용이었다. 피할 길이 없었다. 우리 마을 동갑내기들이 밀양 군청 청사 앞에 소집됐다. 군청 관리자는 나를 대장으로 임명했다. 내 대원은 50명에 가까웠다. 나는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됐다.
우리는 일본에 가기 전 황해도 겸이포에 있는 한 군수공장에서 2주간 예비훈련을 받았다. 이때 북한식 밥을 처음 먹었다. 이후 우리 일행은 겸이포를 떠나서 일본 가와사키 군수공장으로 이송됐다. 이송 중간에 우리가 탄 열차가 밀양역에 머물렀다.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일행 부모와 가족, 친구들이 역까지 나왔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만남이었다. 어머니도 나와 계셨다. 할 말이 막혀 나오지 않는 말로 작별 인사를 했다.
우리가 가와사키 야금 공장에 당도한 때는 3월 초순이었다. 여기서 우리보다 앞서 이 공장에 징용돼온 밀양 출신 젊은이들을 만났다. 이들의 근로 성적이 우수해 다시 밀양 청년들을 붙들어 왔단 말을 들었다.
한 달 정도의 적응 준비기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 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인 3월 중순 어느 날 저녁 미군 비행기가 가와사키와 인접한 도쿄의 시나가와 일대 공장 지대를 맹렬히 폭격하고 사라졌다. 도쿄대공습이었다.
폭격에 사용된 미군기는 B29라는 최신 비행기였다. B29는 유유히 떠다니면서 여기저기 소이탄과 폭탄을 던지고는 사라졌다. 이 지역 일본인 가옥들은 거의 다 목재로 지어진 것이어서 소이탄만으로도 불태울 수 있었다. 폭탄은 땅에 큰 웅덩이를 파 놨다. 일본 군인들은 공장 부근해 비치해 뒀던 고사포를 이용해 전투기를 떨어뜨리려 했으나 B29가 너무 높이 떠 있어서 그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온 도시가 마치 화장터 같았다. 불타오르는 화염과 그 열기를 피할 길이 없었다. 나와 동료들은 기숙사 옆에 파놓은 방공호에 들어갔으나 너무 뜨거워서 바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열기를 피해 인근 강으로 뛰어들려 했으나 그곳도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강물도 차지 않았다.
우린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어디로 피해야 할지 몰랐던 난 길가에 있던 토관 속에 들어가 있었다. 고막을 찢을듯한 굉음과 지축을 울리는 진동이 한동안 계속됐다. 얼마나 지났을까. 폭격이 그쳐서 나와 보니 집들을 태우면서 타오르는 불꽃이 어두운 시가를 밝히고 있었다. 불탄 사람의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고 곳곳에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악취 또한 심해서 코를 막지 않고는 있을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7) 굶주림과 밤마다 폭격 있을 거란 소문에 공장서 탈출
폭격 후 돌아간 공장엔 불안·고난의 연속
재수 시절 막노동 하던 곳으로 도망쳐
형에게 안부만 전하고 깊은 산골로 피신
일본 도쿄 시민들이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선언을 라디오를 통해 듣고 있다. 출처 Japan’s Longest Day
가와사키와 시나가와는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됐다. 폭격으로 공장의 변전소가 불탔고 식당도 반파돼 공장 기능이 마비됐다. 난 공장으로 돌아갔다. 흩어졌던 동료들도 며칠 지나자 하나 둘 공장으로 돌아왔다.
폭격 이후 공장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루 식량은 주먹밥 한 덩이가 다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B29 폭격이 밤마다 있을 거란 소문이었다. 우린 밤이면 가까운 산으로 가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면 공장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이것도 안심되는 일은 아니었다.
결국 난 여기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10명 가까운 밀양 친구들이 나를 따라오겠다고 했다. 우린 몰래 요코하마행 전차를 탔다. 그리고 도츠카라는 곳으로 갔다. 이곳은 내가 일본에서 재수 생활을 할 때 형을 따라 막노동 일을 했던 곳이었다. 아직 내가 알 만한 조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 여기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조선으로 간 줄 알았던 내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했다.
도츠카에서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지내는데 형의 친구 한 분을 만났다. 미군 공습을 피해 도쿄에서 가족을 데리고 피난 온 것이었다. 도쿄시는 주민들이 어디든지 무료로 승차해서 떠날 수 있도록 이재민 여행증명서를 발급했는데 이분은 그걸 넉넉히 갖고 있었다. 이 증명서는 백지 증명서로 동회장의 직인만 찍혀 있었다. 나와 함께 온 밀양 친구들은 그 백지 증명서에 이름을 적어 넣고 밀양까지 무료로 갔다.
그러나 난 집으로 가지 않았다. 징용에서 도망친 사실이 언제 밝혀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집에 폐만 끼칠 것 같았다. 난 도츠카 우체국에 가서 형에게 내가 이곳에 왔다고만 전보를 쳤다. 그리고 다시 야마가다현 어느 산골 마을로 피신했다. 도츠카 역시 안전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약 저장소가 있었고 인근 지역이 다 공업지대였기 때문에 공습 위험이 언제든 도사리고 있었다.
난 깊은 산골짜기 농가에 일꾼으로 들어가 4개월 넘게 숨어 지냈다. 8월 중순이 가까워졌을 때 마을에 소문이 돌았다. 머지않아 정부의 중대한 방송이 있을 거란 내용이었다. 마침내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떨리는 목소리로 라디오를 통해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집집에서 이 방송을 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 주인집 가족들의 태도는 태연해 보였다. 아마 이미 일본의 패전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소식을 그들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태도 변화 없이 계속 일을 해나갔다. 물론 조만간 이 산골짜기를 떠날 생각이었다. 깊은 산이라 그런지 10월 말이 되니 벌써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떠나야 하는데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려 마음먹었을 때 조선인연맹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일본의 조선인 거류민들은 종전 후 조선인들의 신변 안전과 권익 보호를 위해 조선인연맹을 각 지방 단위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재수생 시절 알고 지내던 분이 내가 여기 있음을 알고 요네자와시 조선인연맹 사무소에 소개해 준 것이다. 난 여기서 사무를 봤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8) 징용 끌려가 사지를 헤매다 그리웠던 어머니 품으로
해방 후 조선인연맹서 교민들 명부 관리
독립하고도 좌·우익 다투는 모습에 애석
친북파가 연맹 장악한 후 미련 없이 귀국
해방직후 일본 야마가다현의 조선인 아이들. 이장식 교수는 야마가다현 조선인연맹본부에 취직해 이들의 명부 작성하는 일을 했다. 출처 블로그(gen4n) 캡처
초기 조선인연맹은 좌우 색깔 없이 순수하게 일본 내 거주하는 조선인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뒀다. 나는 요네자와 지부에서 야마가다현 조선인연맹본부로 전근됐다. 교포들의 명부를 작성해 그들의 실정을 살피는 게 내 일이었다.
이때 일본 사회는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부르짖고 자랑하던 ‘야마도 다마사이’(일본 혼)라는 말도 쏙 들어갔다. 조선과 만주, 대만에서 높은 벼슬을 갖고 식민지 백성을 부리던 고위 관리를 비롯해 많은 재산을 갖고 살던 이들이 빈손으로 귀환했다. 일본 정치는 맥아더 장군의 군정에 맡겨졌다. 처참한 패전국 일본에 살고 있던 많은 조선 교민은 반대로 힘이 나서 가슴을 펴고 다녔다. 더러는 큰소리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
일본 전국 지방마다 조직된 조선인연맹은 1945년 12월 마지막 날 전국적인 총연맹의 창립총회를 도쿄 조선총독부 출장소 건물에서 열었다. 나는 야마가다 지부 총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 총회에 참석했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총대들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노동이나 사업을 한 사람들이어서 서로가 잘 알았다.
이 창립총회에서는 먼저 임원 선출을 해야 했는데, 좌·우익으로 나눠진 대의원들 사이에서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졌다. 발언 소리가 높아지고 양 측이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회의는 진전이 없었다. 총대들은 밤늦도록 싸워댔다. 그것도 모자라 숙소에 가서도 계속 싸웠다. 난 어떤 싸움인지 모르기도 했지만 흥미도 없었다. 그저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이루고도 한민족이 이렇게 다투는 게 애석하기도 하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창립총회에서 또 하나 신기했던 건 총회 둘째 날 열린 공연이었다. 그날은 새해 정월 초하루였는데 북한에서 파견된 교포 위문 공연단이 도쿄의 시부야 극장에서 공연하기로 돼 있었다. 총대들은 언제 싸웠냐는 듯 모두 공연을 보러 갔다. 나도 그 공연을 봤다. 이처럼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남한에 앞서서 재일교포 포섭을 시작했다. 그 결과 재일교포 중에 많은 지도 인사와 재력가들이 친북파가 됐다. 결국엔 조선인연맹을 친북파가 장악하게 됐다.
난 징용으로 끌려와 사지를 헤매다 살아남은 터라 일본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날 애타게 기다리는 어머니 곁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조선인연맹 초창기 일을 도운 것은 내게 귀중한 경험이었지만 그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 우편 통신이 없었던 때라 나는 귀국 날을 미리 알리지도 못하고 3월 초순 밀양 집으로 돌아왔다. 조국에 돌아와 보니 광복의 기쁨과 감격이 방방곡곡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간 아들의 소식을 듣지 못한 어머니는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해방된 날부터 내 귀가를 기다리셨다고 한다. 해거름 때가 되면 집밖에 나오셔서 아들이 오는지 보다가 그저 집으로 돌아가길 반복하셨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포로가 돼 원수의 나라에 잡혀갔던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어머니 품으로 돌아오게 된 건 꿈 같은 일이었다. 나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9) 모교 계성학교서 배운 적도 없는 국어 가르치게 돼
일제에 뺏긴 학교 다시 찾아온 신태식 교장
국어교사 제안하며 “맞춤법 공부하고 오라”
동료 박목월 선생에게 우리말 많이 배워
계성학교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1936년 10월 16일 열린 체육대회 모습. 당시 계성중 학생이었던 이장식 교수는 10년 뒤인 1946년 9월 계성학교 국어교사로 다시 체육대회에 참가했다. 계성고 제공
밀양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세력을 부리던 일본인들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미소나 수리조합, 면사무소 등 기관이 다 한국인들 손으로 넘어와 있었다.
다만 치안은 어수선했다. 지방별로 자치적인 민간단체가 생겨서 치안을 챙겼지만, 교육도 훈련도 받지 않은 마을 청년이 치안대원이랍시고 모인 게 다였다. 이들이 총을 들고 행인들을 검문할 때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총칼에 의지한 채 으스댈 뿐이었다. 그들이 잡으려는 게 도둑인지 좌익인지 분간이 안 갔다. 일본에서의 좌·우익 대립이 남한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귀국 후 나는 먼저 대구로 가서 계성학교의 신태식 선생님을 만났다. 신 선생님은 일제에 빼앗긴 계성학교를 다시 찾아온 당사자로 당시 계성학교 교장이 돼서 학교의 면목과 위상을 새롭게 하고 있었다. 신 선생님은 아무런 계획이 없던 내게 계성학교에 와서 국어를 가르치라고 했다.
나는 국어를 배워본 적이 없었다. 계성학교 시절 우리말을 사용하긴 했지만 쓸 줄은 몰랐다. 신 선생님은 그런 내게 “어려울 것 없으니 밀양 집에 가서 한글 맞춤법을 2주간 공부하고 오라”고 했다. 맞춤법 책 한 권도 선물로 받았다.
1946년 9월 나는 모교 계성의 국어교사가 됐다. 이때 계성학교에는 나를 포함해 국어교사가 3명이었다. 한 분은 계성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이미 시인으로 이름나 있던 박목월 선생님이었다. 박 선생님은 나에게 우리말을 가르쳐주기도 한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다른 한분도 국어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 아무튼 나는 국어를 배우면서 가르쳤고 또 가르치면서 배웠다. 이때 배운 우리말 철자법과 문법은 후일 내 저술 생활에 큰 도움을 줬다.
영남 일대에서도 좌·우익 세력의 충돌이 심상치 않게 일어났다. 대구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계성학교는 우익세력의 보루처럼 알려졌는데, 이 때문에 변도 많이 당했다. 한번은 계성학교가 대구 지역 체육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해 시내 행진을 하는데 좌익세력으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나도 머리를 다쳐서 인근 동산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이튿날부터 환자가 계속 들어왔다. 중상을 입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이날 대구에서 10·1사건이 일어났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좌익들이 밤에 경북지방 시골에서 경찰서와 군청, 면사무소 등을 습격해 경관을 비롯한 기관원, 우익 인사들을 죽이고 방화한 처참한 사건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에 대한 조직적인 진압 작업이 시작되자 좌익들은 지리산을 비롯해 각처의 심산으로 들어갔다. 낮에는 산속에 은신해 있다가 밤이면 마을에 나타나 경찰서를 습격하거나 민가에 가서 식량과 기타 필수품을 빼앗아갔다. 산악지대 민가 사람들은 낮에는 경찰에 협력하고, 밤에는 좌익에 협력할 수밖에 없는 난처한 생활을 하면서 곤욕을 치렀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10) 신학에 대한 열망에… 교사생활 접고 조선신학교로
교장 배려로 학기 중에 무시험으로 입학
교무과 근로 장학생 돼 수업료도 면제받아
신학책 번역 과제 제출 후 2학년으로 월반
1950년 4월 6일에 찍은 조선신학대학 학부 1회 졸업생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장식 교수.
1년간의 계성중학교 교사생활은 보람도 있고 즐거웠다. 그러나 신학공부에 대한 열망이 계속 내 마음 속에 피어올랐다. 해방 직후였던 1947년에 대학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남한에서 신학을 할 수 있는 곳은 연세대 신학과와 조선신학교, 감리교신학교, 성결교신학교 정도였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데 밀양에서 알고 지내던 윤술용 목사님이 나를 서울역전 동자동에 있던 조선신학교 교장 송창근 박사님께 소개해 줬다. 입학시험이 이미 끝난 시점이었다. 9월 학기 수업도 진행 중이었으나 난 무시험으로 조선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신학교는 남한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유일한 교단 신학교였다. 그러나 경영은 대단히 어려웠다. 해방 된 때였지만 미국장로교 선교부로부터나 교단으로부터도 원조가 없었다. 다만 캐나다연합교회가 약간의 원조를 했을 뿐이었다. 신학교 건물 역시 일제강점기 때 천리교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로 상당히 낡아 있었다. 신학교로 쓰기에 공간 자체도 협소했다.
조선신학교에는 4년제 학부와 3년제 전문부, 그리고 3년제 사회사업부가 있었다. 신학교 인근 저동에 부설 여자신학교도 있었다. 여자신학교 옆 건물에 영락교회를 세워 목회를 하셨던 한경직 목사님께서 여자신학교를 맡아 운영하셨다. 한 목사님은 조선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시기도 했다.
난 입학하자마자 교무과 근로 장학생이 돼 수업료도 면제 받았다. 수업을 마치면 교무실로 와 학적부 정리하는 일을 했다. 일이 꽤 복잡했지만 이곳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김재준 목사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학교 도서 정리도 내 몫이었다. 교무실 작은 책장에 100권이 채 안 되는 신학서적이 꽂혀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분류해서 번호를 매기고 도서대장을 장만해서 책 목록을 만들었다. 신학교 도서대장 제 1권이었다. 도서 분실을 막기 위해 모든 책 51쪽 안에 ‘조선신학교 도서’라는 큰 도장을 찍었는데, 오늘날 한신대 도서관 안의 모든 책 51쪽에도 이런 도장이 찍혀 있다.
한번은 송 박사님이 내게 영어로 된 신학서적 두 권을 주면서 번역해 오라고 했다. 한 권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였던 헨리 S. 코핀이 쓴 설교학 서적이었고, 다른 한 권은 영국성공회 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이 쓴 교회학 서적이었다. 겨울방학을 앞둔 때였는데 나는 밀양 본가로 가서 3개월간의 방학기간 동안 두문불출하며 번역을 끝냈다.
나는 송 박사님으로부터 번역이 어떻다는 말씀은 듣지 못했다. 다만 어느 날 교수회에서 나를 학부 2학년으로 월반하도록 결정했다고 알려주셨다. 당시 조선신학교 학부 2학년에는 7명의 재학생이 있었다. 문교부로부터 신학교가 정규대학으로 승격을 허가 받은 건 47년도였지만 학부생은 그 전년부터 모집했었다. 월반으로 인해 나는 이들과 함께 50년 4월 조선신학대학(문교부 인가 후 개편) 학부 제1회 졸업생이 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11) 송창근·김재준·한경직… 신학대서 세 분의 참스승 만나
예배 의식 혁신을 가져온 송 박사와
김재준·한경직 목사, 강의뿐 아니라
목회 통해서도 학생들의 귀감이 돼
1947년 당시 서울 동자동에 있던 조선신학교 전경. 국민일보DB
조선신학대학(이후 한국신학대학, 현 한신대)을 다니면서 송창근 박사님과 김재준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을 만난 건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 세 분은 교실에서 강의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목회를 통해서도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송 박사님은 성바울교회(현 서울성남교회)를 신학교 교정에 세웠다. 그는 재래의 한국교회 예배 의식을 혁신했는데 목회기도를 장로들이 맡아 드리던 통례를 버리고 목사가 드리게 했다. 설교와 기도 시간 길이도 제한했다. 예배가 1시간 정도면 끝났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찬양대 역할 또한 크게 활성화 시켰다.
김 목사님은 장충동에 성야고보교회(현 경동교회)를 세웠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든 회중은 주로 대학생과 청년들이었다. 김 목사님의 설교는 강의 같았다. 조용하게 진리를 풀어나가며 재래신앙과 경건의 폐단, 특히 보수신학과 보수신앙을 시정하는 진보적인 설교였다. 난 이 교회에 자주 나갔다. 한동안은 찬양대원을 하기도 했다.
한 목사님은 저동에 베다니교회(현 영락교회)를 설립했다. 과거 목회했던 신의주교회의 월남 신자들이 많았다. 한 목사님의 대중적 설교는 우리 신학생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다. 그의 목회자적 경건성이 주는 감화력도 매우 컸다.
내가 이 신학대학에 입학(9월 말)하기 전인 1947년 4월 한국교회사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다. 조선신학대학 학생 51명이 김 교수님의 구약학 강의에 이의를 표명하고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다. 교단에서는 김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는 장로교단 신학 논쟁의 분화구가 됐다.
사실 이런 논쟁은 예견된 일이었다. 조선신학교와 신학적인 면과 파벌적인 면 모두에서 반대되던 평양신학교가 이북에 위치해 벌어진 일이었다. 남북분단 와중에 장로교 총회에서 정식으로 인가받은 신학교육기관은 조선신학교가 유일했고, 이로 인해 목회자 교육내용을 둘러싸고 신학적·교리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진정서를 제출했던 학생들은 역시 대부분 평양신학교에 다니다가 해방 뒤 월남한 신학생들이었다. 이들은 그해 5월 결국 제적됐는데, 이듬해인 48년 6월 조선신학교에 대항해 세워진 서울 남산 장로회신학교로 전학했다. 장로회신학교 교장은 박형룡 박사님으로 김 교수님이 총회에 제출한 진술서에 대해 장로교 교리에 어긋난다며 부정적 결론을 내린 분이었다.
장로교계가 김 교수님 신학사상 문제로 몹시 시끄러워졌을 때 송 박사님은 물론이고 다른 교수들도 되도록 평화스럽게 이 문제가 해결되길 바랐다. 나는 교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지방에서 김 교수님에 대해 흥분해 송 박사님을 찾아온 목사들을 여럿 봤다. 그때마다 송 박사님은 커피를 끓여 대접하면서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곤 했다. 한 목사님도 48년 총회 때 발언권을 얻어 김 교수님의 신학적 입장을 변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 정치꾼들은 문제를 확대하려고만 애썼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12) 두 신학교 사이 깊어진 골 결국 메우지 못하고 갈라서
조선신학대학과 장로회신학교 입장 차
총회서 여러 방안 절충 시도에도 실패
교파·교단 파벌 문제 갈등에 안타까워
한국전쟁 직전 조선신학대학 이사장 함태영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모습. 왼쪽부터 이장식 교수, 김재준 목사, 최윤관 목사, 송창근 목사.
내가 조선신학대학(현 한신대) 4학년이던 1949년 장로교 총회는 우리 학교와 장로회신학교 사이 깊어진 골을 메우려 애를 썼다. 두 신학교 합동 위원회를 조직해 절충을 시도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차는 확연히 달랐다. 조선신학대학 측은 양교의 무조건적인 합동을 내세웠다. 반면 장로회신학교 측은 김재준 교수님의 사퇴와 중요 신학 과목을 선교사들에게 맡기자는 조건을 고집했다. 결국 양교 합동은 좌초됐다. 6·25 전란이 목전에 임박해 있었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사람이었다.
장로교 총회는 51년 서로 교육하는 신학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신학교로 인해 발생하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새로운 제안을 한다. 두 신학교 직영을 전부 취소하고 대신 총회 직영의 새로운 신학교 총신대를 대구에 만들자고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총회에서 내놓은 안이 조선신학대학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이즈음 조선신학대학은 한국신학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 교단 내 두 학교의 아슬아슬한 동거는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 끝이 났다. 당시 장로교 총회는 총대들의 투표를 통해 김 교수님의 목사 면직 처분을 확정했다. 또한 한국신학대학 졸업생들에게 교역자 자격부여 금지 결정을 내려 목사가 될 수 없도록 했다.
처참한 결과에 한국신학대학 측 총대들은 일제히 퇴장했다. 이후 한국신학대학 측은 별도의 장로교 총회 소집을 준비했고, 바로 그해 한국장로교회 개혁을 기치로 내건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출범시켰다.
난 이때 한국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총회에 참석한 총대들의 얘길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은 종교적 인해전술에 따른 것이었다.
1951년 1·4후퇴 당시 북한에 남아 있던 많은 장로교 목사가 월남했는데, 이들 중 67명이 정식 총대로 영입돼 38회 총회에 투표권자로 앉아 있었다. 이는 소위 근본주의 신학을 따르는 이들의 꼼수였다. 월남한 목사들은 노회가 이북에 있었다. 고로 남한 장로교 총회 총대 자격이 없는 분들이었다. 만일 이 목사들의 투표가 없었더라면 그 결의는 통과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 표 차이는 8표에 불과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이때를 되돌아보니 안타까운 마음만 들뿐이다. 장로교에 뿌리를 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이 2016년 9월 63년 만에 김 교수님께 내려진 목사 제명 결의를 철회하는 걸 보면서 무엇이 우리를 갈라지게 했나 회의감도 들었다.
한국의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다님에 있어 교파나 교단을 따지지 않는다. 부모가 다니는 교회를 계속해 다니거나 친구 따라, 혹은 집 근처 가까운 교회를 간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에 들어가서는 자기네 교파가, 자기네 교단이 제일이라 주장하며 싸운다. 교회가 세상 나라처럼 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13) 졸업 후 모교서 강사 재직… 2개월 만에 한국전쟁
교수로 키우기 위해 교수회서 미리 결정
교무과 일하며 영어·서양문화사 가르쳐
군인교회 설교 때 이미 서울 가까이 남침
1950년 6월 28일 폭파로 파괴되지 않은 한강교를 그해 7월 8일 미 공군이 폭격하는 장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950년 4월 조선신학대학(현 한신대)을 졸업한 난 계속해서 학교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교수회 결정이었는데 교수님들은 나를 교수로 키우고자 하셨다. 난 교무과 일을 하면서 신학부에서 영어 고등문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저동에 있는 여자신학교에서 서양문화사를 가르쳤다.
당시 신학교는 교수 직급이 제도적으로 제정된 때가 아니었다. 때문에 내 직책이나 직급이 따로 있진 않았지만, 오늘날 제도에 비춰볼 때 전임강사에 해당했다. 아무튼 내 한신대 재직 경력은 이때부터 계산돼야 할 것이다.
그해 신입생들이 입학해서 겨우 두 달 정도 공부했을 무렵인 6월 25일 주일 아침, 나는 조선호텔 앞에 있던 상공회의소 건물에 있었다. 당시 이곳에선 군인교회가 예배를 드렸는데 이날 설교를 내가 맡았다.
그런데 예배시간이 다 됐는데도 그날 사회를 맡은 장교가 나타나지 않았다. 교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거기 모인 장병들과 사병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30분 정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다른 분이 대신해 사회를 보고 예배를 드렸다.
내가 설교하고 있었을 때 북한 공산군은 이미 동두천 근처까지 탱크를 몰고 들어와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군데군데 서있는 헌병들을 봤다. 이들은 휴가를 얻어 서울 시내를 오가던 군인들에게 빨리 귀대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난 그들이 저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학교 근처 하숙집에 도착해서야 주인 아주머니가 공산군의 남침을 알려줬다.
서울 시민들은 북한의 남침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또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전쟁이 될지도 몰랐기에 조금 지켜보자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오후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역전에서 한강으로 가는 전찻길을 따라 피란을 떠났다. 궂은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이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이들 대부분은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북한 공산주의 정치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튿날 학교에 갔더니 등교한 학생들의 불안감이 상당했다. 수업 진행이 안 될 정도였다. 학교를 나와서 서울역전 거리를 내다봤더니 북쪽에서 수많은 탱크 행렬이 노도처럼 무섭게 밀려오고 있었다. 서울 거리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탱크 주변 인민군 곁에서 만세를 부르며 기뻐 걸어가는 무리가 있긴 했다. 자세히 보니 죄수복 차림이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인민군에 의해 풀려 나온 사람들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다. 대한민국 군대는 서울시 파괴 및 인명 피해 방지를 이유로 시가전 없이 한강 저쪽에서 저항을 시도한다 했지만, 실은 서울을 수호할 힘이 없었다. 국군이 예고도 없이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인민군의 진격 저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저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새벽 미명에 자동차를 몰고 한강을 넘으려던 수많은 시민들이 그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14) 기독교를 정적으로 여긴 공산당… 목회자들 박해
피란 않고 교수·동료와 함께 학교 지켜
인민군, 학교 접수 교수들 쫓아내고
서울 입성 환영 기독교집회 열도록 강요
한국전쟁 발발 다음 날 서울의 모습. 거리에 인적이 드물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세를 관망하며 학교에 나오던 학생들도 점점 모습을 감췄다. 고향이 먼 학생들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귀향길이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들 몇몇은 내게 같이 남하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학교에 남았다. 피란 갈 노자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연로한 교수님과 동료들이 학교를 지키고 있는데 최연소자인 내가 살겠다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남침해 내려온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진격해 가는 동안 교회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반공주의자들로 치부하고 심하게 박해했다. 김일성은 기독교 세력을 정적으로 여겼다. 교회를 일종의 인민 착취 집단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정적을 살려두지 않았다. 이들은 혁명 단계에서는 더욱더 무자비한 정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번은 인근 중학교 교사들 중에 공산주의 민청회원이 된 사람들이 우리 학교로 몰려 왔다. 신학교를 접수하란 명령을 받았다며 큼직한 김일성 사진을 교무실 벽에 걸었다. 그러고는 학교의 모든 열쇠를 빼앗고, 교수들을 쫓아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렇게 무법천지가 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린 어디에 호소할 곳도, 또 힘도 없었다. 다만 송창근 박사님은 이런 일을 당하고만 계실 분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셨는지 우린 그의 노력으로 학교를 도로 찾고 열쇠 뭉치도 돌려받게 됐다. 벽에 걸려 있던 김일성 사진도 떼어버렸다.
서울시 행정을 장악한 인민군 정치보위국은 날이 갈수록 목사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그들은 모든 목사가 자백서를 써서 공산주의와 인민군의 남침에 대해 소견을 피력하도록 했다. 인민군 서울 입성을 환영하는 기독교 집회를 열도록 하기도 했다.
말세적인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공산주의 이념의 종이 된 사람들에게는 인륜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 신변 보호를 위해 좌익으로 분장한 사람도 있었고, 인민군 남침을 호기로 삼고 평소 원한이 있던 사람에게 보복 행위를 감행한 이들도 많았다. 좌익사상을 가졌던 사람들은 인민군에 협력해 동민들을 괴롭혔다. 인민재판에 부쳐 죽게 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게 한 사례도 많았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서울은 공포와 적막의 죽은 도시가 돼 갔다. 식량난은 갈수록 심해져갔고 남쪽으로 피란 가는 사람들 또한 점점 늘어갔다.
서울 상공에 이따금 유엔군(미군) 비행기가 날아와 북한군 비행기와 공중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전쟁이 남한과 북한의 싸움인지, 미군과 북한군의 싸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한 정부는 국군이 수일 내로 서울을 탈환해서 올 것이니 안심하라는 무책임한 방송만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를 믿었다. 사람들은 날로 심해가는 미군 폭격만 잠시 피해 있으면 곧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서울 청운동에 있는 창의문 밖 세검정 계곡으로 몰려갔다. 나도 학교 가까이에 있던 하숙집이 불에 타 뛰쳐나와서 그리로 갔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15) 총성 들려 나가보니 “반동분자 쏴 죽여야…” 위협
젊은 남자들 전투 동원하려 모두 잡아가
인민군 피해 삼각산 꼭대기까지 피신
식량 떨어져 도토리·산도라지로 연명
완장을 찬 청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민들이 줄을 서서 배급을 받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세검정 그 좁은 계곡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서울 수복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갖고 온 식량이 다 떨어지게 되자 사람들은 시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갈 곳 없는 이들은 삼각산 산록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피란생활을 계속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인민군이 전투에 동원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을 보는 대로 잡아가던 때였다.
나도 삼각산 기도원 자리에서 많은 사람과 며칠을 지냈다. 인민군이 턱밑까지 보이자 나는 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두 자매와 함께 삼각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피신할 곳을 찾았다. 마침 창의문 밖 감리교회에 다니던 한 청년이 우리와 합류해서 적합한 곳을 찾아냈다. 커다란 바위가 지붕처럼 덮인 곳이었다.
이 산중에서 우리가 매일 하던 일은 언제 유엔군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나타날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토리 열매를 줍거나 산도라지를 바위틈에서 캐기도 했다. 가져온 약간의 식량이 떨어져 가면 두 자매가 하산해서 식량을 조금씩 얻어오곤 했다. 남자는 붙들릴 염려가 있어서 내려갈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자매들의 수고로 연명해갔다.
자매들은 하산하면 조선신학대학으로 가서 송창근 박사님과 김재준 목사님을 뵙고 오곤 했다. 이들이 8월 말 무렵 송 박사님을 찾았을 때 송 박사님은 “날씨도 점점 추워져 그 산꼭대기에서 더 배겨내기 어려울 테니 하산하는 게 좋겠다”는 말과 함께 내 신분증명서를 자필로 써서 보내주셨다. ‘조선신학대학 전임 강사 이장식’이라고 적힌 자그마한 종이였다. 나는 이 신분증명서를 갖고 하산하려 했다. 그러나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날이 흘러 9월 첫 주일 오후가 됐다. 그날도 어김없이 은신하고 있는데 근처에서 총성이 들렸다. 조금 있으니 바위 밖에서 손들고 나오라는 고함이 들렸다. 영문을 모르고 나와 보니 4~5명의 청년이 우릴 노려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내게 총을 들이대면서 “네놈 같은 반동분자는 쏴 죽여야 한다”고 위협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얼른 그 신분증명서를 꺼내 보여줬다. 그러나 그 청년은 보지도 않고 빼앗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때 그들에게 끌려온 한 청년이 두 손이 묶인 채 숲속으로 뛰어들더니 산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그를 붙들어온 사람이 그곳을 향해 권총을 쏴 댔다. 총성이 어찌나 컸던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상황에 적응되자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약 한 주 전에 우리가 있는 바위 집으로 찾아와 자기도 피란민이라며 동정을 구한 청년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3~4일 정도 지내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인민군이 보낸 정탐꾼이었다. 삼각산에 대한민국 국군 패잔병들이 무기를 소지한 채 숨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피란민으로 가장해 살피러 온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인민군 동료들에게 길을 안내해 우리를 잡은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16)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기 직전 가까스로 풀려나
함께 풀려난 일행과 신학교로 돌아오자
김재준 목사는 어느 시골로 피신하고
송창근 박사는 납북됐다는 소식 들려
서울 용산구 서울성남교회(옛 성바울전도교회)에 세워진 만우 송창근 목사 추모비. 성바울전도교회를 세운 송 목사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됐다. 서울성남교회 제공
그날 해 질 무렵 우리는 팔이 묶인 채 인민군에 이끌려 산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서대문형무소 옆을 지나 안국동 로터리에 있는 한 2층 건물 지하실이었다. 인민군 무리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릴 구둣발로 차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보다 먼저 산에서 잡혀온 청년이 있었는데 너무 많이 맞아서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참을 맞은 우리는 어디론가 다시 끌려갔다. 거기엔 점잖은 남자들 수십 명이 갇혀 있었다. 잡혀온 지 한 주 된 사람도 있었고, 한 달 된 사람도 있었다. 그 이상 여기에 갇혀 있다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동장이나 반장, 아니면 동네에서 명망 있는 신사들이었다.
이들 말에 따르면 이곳에서의 성분조사 결과에 따라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거나, 풀려나거나 한다고 했다.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면 죽임을 당하거나 납북된다고도 했다. 이때가 9월 초·중순쯤이었는데, 9·28 서울수복 직전이라 인민군이 한창 밀릴 때였다. 우릴 붙잡아 온 이들 역시 서울 퇴각의 마지막 작업을 서둘러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중간 형무소에 갇혀서 엿새 동안 끼니마다 보리 주먹밥 한 덩어리와 반찬으로 소금을 받아먹었다. 아무것도 없이 산에 은신해 있을 때가 더 잘 먹은 셈이었다. 나는 꼭 한밤중인 새벽 1시경에 불려나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약 1시간 동안 온갖 질문을 해댔다. 이렇게 3~4일을 계속했다.
심신이 지쳐 겨우겨우 버티고 있을 때 날 심문했던 이가 불러냈다. “단순히 인민군에 협력하기 싫어서 산에 숨어 있었던 것이니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가서 잘 협력하라고 했다. 우리 일행 4명 모두 풀려났다. 어쨌든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풀려난 기쁨도 잠시 우린 청천벽력 같은 소식 앞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두 자매와 함께 신학교로 돌아와 송창근 박사님을 찾았는데, 이북으로 납치됐단 얘길 들었다. 송 박사님의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그동안 송 박사님이 혹시나 도피할까 봐 사택을 주야로 감시하던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송 박사님이 납치되기 전에 신학교 근처에 있는 도동 파출소를 점령하고 있던 정치보위국원들이 김재준 목사님과 송 박사님을 불러 심문한 적이 있다.
이때 김 목사님은 무사히 풀려나왔지만, 송 박사님은 그들에게 수모를 당했다. 인민군이 송 박사님을 심문실 밖으로 밀어붙이면서 쫓아냈을 때 그가 입은 저고리 옷고름이 떨어지고 앞가슴이 찢어져 있는 것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 목사님이 봤다고 했다. 심문자들은 송 박사님을 종교광이라고 했다고 한다.
송 박사님을 잃은 신학교는 텅 빈 공간이 됐다. 김 목사님은 경기도 어느 시골로 피신 가셨고, 신학교 내에는 몇몇 교수들만이 사택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돈 한 푼 없고 우거할 집도 없어서 신학교 기숙사 방을 하나 얻어 머물렀다. 그러나 서울에서 살아갈 일이 막연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17) 전쟁의 화마 속 어려움 같이 이겨낸 아내와 결혼
다시 잡으려 혈안 된 인민군 피해 도주 중
은신 생활에 도움 준 한 여인과 가까워져
결혼 후 일맥원서 수업하다 한신대 복직
1952년 부산 동구 초량동 피란민 마을 모습. 이장식 교수는 그해 부산으로 피란 와 남부민동에 터를 잡았다. 출처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안국동 수용소에서 풀려나왔지만, 그렇다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한국신학대학 기숙사에 있는데 한 남자가 들이닥쳤다. 그러더니 나에게 빨리 밖으로 나가 기다리라고 했다. 인민군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또 붙들렸구나 생각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머뭇거리며 신발을 신는데, 근처에 있던 성바울교회(현 서울성남교회) 김응락 장로가 내게 도망치라는 사인을 줬다.
나는 신학교 마당을 가로질러 사택들이 있는 골목길을 빠져 나와 전찻길 쪽으로 갔다. 거기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데 길 저편에서 한 남자가 행인 2~3명을 붙들고 조사하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 중 한 명이 나를 불렀다. 못 본 체하다가 마침 온 전차를 타고 장충동을 거쳐 묵정동 정류장에서 내렸다.
묵정동엔 자그마한 교회가 있었다. 신학교 제자가 만일 위급한 일이 생기면 오라고 했던 곳이었다. 난 이곳에 몸을 숨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신학교에서 날 놓친 사람들이 권총을 든 채 눈에 불을 켜고 날 찾아다녔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준 이는 정채봉씨였다. 그는 내가 삼각산에서 은신 생활을 할 때 여러모로 도움을 줬던 이였다. 우리는 본래 결혼을 약속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이 우릴 더 끈끈하게 했다.
9·28 서울수복이 가까워져 올수록 서울은 아수라장이 돼 갔다. 서울역전을 비롯해 용산 일대가 불바다가 됐고, 9월 27일 아침부터는 박격포가 사방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채봉씨는 신학교 마당 언덕 위에 있는 기숙사에 몇 명의 신학생과 함께 숨었다. 그래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언덕 아래 묻힌 토관 속으로 몸을 피했다. 이미 여러 명의 사람이 이곳에 숨어있었다.
계속된 포격에 우린 몸을 웅크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는데 내 옆에 앉았던 남자가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이튿날 목숨을 잃었다. 신학교 마당에 있던 신학생 일가족도 박격포에 맞아 몰사했다.
날이 새어 토관 속에서 나와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유엔군이 탱크를 몰고 와서 큰길가에 있는 높은 건물 창 안으로 화염을 뿜어대고 있었다. 뒤로 국군 해병대가 의기양양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만세”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3달 동안 내가 살아남은 건 나의 명철이나 기지나 또는 요행으로 된 게 아니었다. 전능자의 구원의 은혜였다.
나는 학교로 돌아온 교수 및 학생들과 함께 부서지고 어지럽혀진 신학교 시설들을 손봤다. 또한 채봉씨와 함께 김재준 목사님을 찾아가 그간의 안부를 여쭙고 우리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린 채봉씨 고향인 남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채봉씨와 결혼하고 나는 거제도로 갔다. 그곳에서 신애균 여사가 세운 일맥원에 가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다. 일맥원은 1·4후퇴 때 함경도 지방에서 피난 온 여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다. 그러다가 1952년 3월 부산 남부민동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한국신학대학이 인민군을 피해 부산에 내려와 개강했는데, 난 이곳의 부름을 받고 복직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18) 휴전으로 서울 복귀… 학급 담임 맡다 캐나다로 유학
먼저 유학 중이던 김정준목사님 도움으로
퀸즈신학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돼
뉴욕 유니언신학교 석사과정 거친 후 귀국
캐나다 퀸즈신학대 유학 시절 동문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장식 교수.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멈추게 됐다. 1953년 8월 신학교가 부산에서 서울로 복귀했다. 나 역시 함께 올라와 개강 준비를 했다. 신학교는 그 이듬해 4월 신입생 30여명을 모집했다. 나는 그들의 학급 담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들 신입생과 사귈 시간적 여유도 없이 난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내가 간 곳은 캐나다 옛 수도 킹스턴에 있는 퀸즈신학대였다. 이 학교 학생회가 내 학비를 부담했는데, 내가 이렇게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당시 토론토 임마누엘 신학대에서 유학하던 김정준 목사님의 도움이 컸다. 아내와 세 살 된 아이 정이를 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캐나다 토론토역에 닿았을 때 캐나다연합교회 해외선교부 총무 갈라가 목사와 한국에서 선교했던 스코트(서고도) 박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을 만났다. 김 목사님은 송창근 박사님의 총애를 받던 제자로 송 박사님의 순교와 그의 생애를 다룬 책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저자기도 했다. 김 목사님은 나를 나이아가라 폭포로 데리고 가서 구경시켜 줬다. 가는 길에 코카콜라를 한 병 사줘서 마셨는데 코와 목을 콕 쏴서 첫 모금을 겨우 마셨다. 멋모르고 마셨다가 혼이 났다.
토론토에서 약 한 주간을 지내고 나는 킹스턴으로 왔다. 퀸즈신학대 학생 수는 불과 40~50명 정도였다. 나는 퀸즈신학대에선 물론이고 킹스턴에서도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나는 그렇게 퀸즈신학대에서 기초 신학의 모든 과목을 배우게 됐다. 한국에서 신학을 어느 정도 배우고 왔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건 기초가 약한 교육이었다. 처음엔 영어 실력이 모자라서 강의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점차 따라갈 수 있게 됐다.
56년 4월 나는 동급생 8명과 함께 퀸즈신학대를 졸업했다. 이곳에서의 경험과 교육은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됐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가서 학생들을 가르치기엔 신학교수로서 자격이 모자랄 것 같았다.
나는 뉴욕에 있는 유니언신학교 문을 두드렸다. 이 학교는 미국에서 가장 좋은 신학교로서 학력이 가장 높았다.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교수들도 많았다. 당시 내 상황으론 도저히 입학이 불가능한 곳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1년간 석사과정을 할 수 있었다.
학문의 욕심은 끝이 없다. 미국에서 좀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하버드대학 신학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공부를 더 할 순 없었다. 속히 귀국하라는 아내의 간곡한 권고 때문에 적극적으로 진학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3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당시 한국은 박태선씨의 신앙촌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돼 한국 교계 많은 목사, 장로, 평신도가 현혹될 때였다. 그는 소사에 신앙촌을 만들고 예수의 재림이 그곳에 불원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신앙촌에 입주하는 신도들이 선착순으로 14만4000명이 찰 때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많은 이가 신앙촌으로 들어가기 위해 가산을 처분했다. 부부나 가족을 버려두고 들어간 이도 많았다. 아내와 장모님도 여기 빠져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19) 전도관 신앙에 빠진 아내와 장모, 아이 아픈데 기도만
재림 예언으로 신도들 현혹하는 박태선
장모 요청으로 만난 자리서 따끔히 충고
아내는 제왕절개로 둘째 아이 낳다 숨져
전도관 앞에 늘어선 생수통들. 전도관 신도들은 박태선씨가 축복한 이 물을 만병통치약으로 믿었다. 현대종교 제공
아내는 박태선씨의 말만 믿고 나를 속히 귀국시켜 같이 신앙촌에 들어가고자 했다. 여의도 미군 비행장에 마중 나온 아내 얼굴은 무척 수척해 있었다. 그런 그를 보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따라 마포 한 언덕 위의 천막집으로 갔다. 그곳엔 여섯 살 정이가 독감으로 열이 심한 채 누워 있었다.
아내는 이 작은 천막 단칸방에서 모친과 여동생과 함께 살면서 ‘마포 오만 제단’이라 이름 붙인 전도관 건축 공사장에 매일 나가서 벽돌을 나르고 있었다. 열이 높은 아이에게 약을 사 먹이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었다. 이것이 전도관의 신앙이었다. 나는 속에서 터져 나오는 화를 억누르면서 약을 사서 먹여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있을 곳이 없어 2~3일을 천막집에서 머물렀다. 그동안 이들의 저녁집회에 한 번 나가 봤다. 신도들은 마치 벌겋게 달아오른 대장간의 쇠붙이 같았다. 박씨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아멘’으로 받아들였다.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난 한국신학대학 재정을 맡아보던 조선출 목사님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돈암동 아리랑 고개에 셋방을 얻어 천막집에서 나왔다.
장모님은 전도관 운동에 깊이 빠져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나오면 박씨와 협력해 일할 수 있도록 특청도 해뒀다. 장모님은 계속해서 날을 잡아놨으니 내게 박씨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박씨 만나기가 대통령 만나기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결국 나는 장모님 청을 못 이기고 원효로에 있는 그의 사택으로 갔다. 마당에 들어서니 부녀들 수십 명이 물병을 들고 와서 박씨가 축복한 ‘생수’를 얻으려고 야단법석이었다. 이들은 이를 만병통치약으로 믿었다.
나는 박씨와 그의 측근들이 기다리고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서로 인사를 나눴다. 검은 머리는 포마드 머릿기름을 발라 반질반질 윤이 나고 있었다. 그는 먼저 자기의 부흥운동 성과에 대해 한참 설명하더니 사진 몇 장을 보여줬다. 설교할 때 하늘에서 내린 성령의 불을 찍은 것이라 했다.
그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가다가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인양 말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더 들을 수가 없었다. 난 그의 말을 끊고 충고했다. 내가 그에게 한 말은 “자기를 그리스도처럼 치부하지 말고 재림 예언도 하지 말라”였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전도관에 나가지 말라고 타일렀다. 한동안 전도관 신도들이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지만 다행히 아내는 전도관에 발을 끊었다. 그러나 장모님은 소사 신앙촌에 입주해 돌아가실 때까지 그곳에 계셨다.
1958년 3월 동자동에 있던 한국신학대학이 수유리로 옮겨왔다. 새 교정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생각에 신이 났다. 학교가 수유리로 온 지 1년 후 아내가 둘째를 가졌고, 우린 둘째를 기다리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부인병으로 수술을 받았던 적이 있던 아내는 부득이 제왕절개로 둘째를 낳았다.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지만, 아내는 수술 직후 숨지고 말았다. 그동안 암담하고 고생스러운 세월을 살다가 이렇게 떠난 아내가 너무도 가련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20) 상처 후 평생의 조력자 된 지금의 아내 만나 재혼
주위서 아이들 어릴 때 재혼하길 권해
한 목사님 소개로 교회 교사 만나게 돼
서로의 마음 확인한 후 부모 허락받아
이장식 교수와 박동근 사모의 1960년 3월 7일 결혼식 당일 사진.
채봉씨와의 사별 후 어머니와 여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첫째와 미숙아로 태어난 둘째를 돌봤다. 1년이 지나자 여러 분이 재혼을 권했다. 난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 재혼을 하는 게 좋다는 여럿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이 둘 가진 홀아비가 재혼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원장로교회 이주원 목사님의 소개로 그 교회 중등부 교사였던 박동근씨와 만나게 됐다. 동근씨는 재원이었다. 당시 수원 농업진흥청 청소년 지도과에 재직하면서 4H운동(농업구조와 농촌생활 개선을 목적으로 시작된 운동) 지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동근씨의 삶도 역경이 참 많았다. 그가 부산 경남여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한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때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해 인민군 병원에 끌려가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 인민군이 후퇴할 때 끌려가서 철원을 거쳐 평양을 지나 신의주 가까이에 있는 수안까지 갔었다고 했다.
동근씨는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이 심했던 11월 어느 날 혼란 중에 무리에서 빠져나와 매서운 추위 속을 뚫고 걸어서 남하했다고 한다. 황해도 흥수원에서 한 교회를 발견하곤 그곳으로 들어가 그 교회 전도사 댁에서 1주일 정도 머물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곤 서울 육군병원으로 향하는 트럭 사과상자 틈에 몸을 숨겨 그야말로 사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왔다.
동근씨는 그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해 주신 것을 확신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동근씨는 연세대 신학과에 복교했다. 그리고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했다. 미국 유학을 위해 준비도 마쳤으나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한국에 남았다고 했다.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자 동근씨는 큰 아이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동근씨는 첫째를 보고 아주 귀엽다고 했다.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다.
서로의 마음은 확인했지만 동근씨 부모님의 승낙을 받는 일이 걱정스러웠다. 누구보다도 동근씨 아버님이 반대를 많이 한다는 말을 들었던 터였다. 그러나 나 역시 물러설 곳이 없었다. 동근씨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서 그의 부모님을 뵀다. 아버님은 엄격한 분 같았으나, 말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몇 가지 질문이 오갔고 이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면서 허락을 받아냈다.
우리는 1960년 3월 7일 부산 항서교회 김길창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재혼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물건도 없었고 또 가진 돈도 없었다. 다만 결혼반지만을 건넬 수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가난한 살림살이지만 운영을 잘 해나갔다. 집 곁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동산을 바비큐 하기 적당한 곳이라며 손질하기도 했다. 나는 바비큐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올해로 아내와 결혼한 지 61년이 됐다. 아내는 내 평생의 조력자이자 격려자였다. 교수 생활을 할 때도, 일흔 넘은 나이에 케냐로 선교사로 나가자 할 때도 아내는 늘 걱정보다 응원을 했다. 이는 아흔이 넘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심한 성격 탓에 많은 표현은 못했지만, 참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21)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설립… 교파 간 교류의 물꼬 터
신학 교육 수준의 향상 절실해진 신학교
대학으로 승격했으나 교수·도서 태부족
신학 대학 간 협력의 필요성 깨닫게 돼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 사택 앞에서 찍은 이장식 교수 가족사진.
1964년 우리 가족은 학교 정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 사택 2층집으로 이사했다. 아내와의 사이에 진, 현, 영이가 태어났다. 앞서 태어났던 정이와 철이까지 하면 2남3녀 대가족이 됐다. 한신대 캠퍼스는 공부하기 좋은 곳이었고, 교수 자녀들에게는 꽃동산이었다.
초등학교에 아직 다니지 않던 교수 자녀들이 많았는데 저녁마다 TV를 보려고 우리 집 마루에 모여 앉았다. 이 TV는 손아래 동서 되는 김운용(전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씨가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대사관 한국 참사로 부임해가면서 주고 간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캠퍼스에서는 우리 집이 제일 먼저 TV를 갖게 됐다.
이즈음 한국에선 신학 교육 수준 향상의 필요성을 깨달은 교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교단 신학교들 역시 앞다퉈 대학으로 승격해갔다. 그러나 아직 자격을 갖춘 교수가 부족했고, 또 신학 도서도 빈곤한 상태였다. 때문에 신학대학 학장들과 교수들이 신학대학 간 협력의 필요성을 깨닫게 됐고, 신학대학들의 협의체 조직을 구상하게 됐다. 한국 교파들 사이에선 친교와 교류가 잘되지 않던 때로, 신학교 교수들이 솔선해서 본을 보인 셈이었다.
당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장인 김정준 박사와 내가 그 조직의 헌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65년 4월 온양관광호텔에서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 창립총회를 열었다. 김 박사가 초대 회장, 내가 초대 총무, 정진경 목사가 서기, 그리고 박창환 목사가 회계로 선출됐다.
한편 나는 교회사 교수로서 과거 교회사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살아 움직이는 교회를 가르쳐줄 책임을 느꼈다. 마침 한국교회협의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를 저술해달라는 청을 받고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자그마한 책을 발행하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68년 ‘현대 교회학’이란 책을 썼다.
이 무렵 한신대 교수와 학생들은 현대신학 사상이 편중적으로 강조되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교단 신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의 칼뱅 신학이 등한시됐다. 한신대에선 칼뱅의 ‘기독교 강요’와 같은 고전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었고,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도 중요시하지 않았다. 반면 한국 보수계 장로교 신학교들은 칼뱅 신학을 표방하고 가르치는 데 주력하면서 한신대와 기장 교단은 칼뱅주의가 아니라고까지 비평하고 있었다.
신학적 대화를 강조하는 한신대와 기장 교단이 자기 입장도 모르고서 타신학과 타교단과 대화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이러한 문제를 고려해 교수회에 제안해 교수들이 각각 자기 분야에서 칼뱅 신학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논문들을 써서 책으로 내게 했다. 이것이 교수단 공저로 나온 ‘칼빈 신학의 현대적 이해’였다.
나는 한신대에 재직하면서 교무과장으로서 학생들의 생활과 행위가 목사 후보생답게 되도록 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것을 경건 훈련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러한 차원 높은 말, 또는 통속적인 말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칫 그런 말은 형식적인 외모의 경건을 조장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학생들이 학교의 정한 규정과 생활에 자연스럽게 따라가도록 지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22) 한신대 재직 중 안식년 맞아 예일대 연구교수로 유학
박사학위 받고 귀국하라는 아내 설득에
가족 생계로 망설이던 중 WCC서 장학금
노회 도움으로 아내와 딸들까지 오게 돼
이장식 교수의 딸 현이 1969년 미국에서 유학 중인 아버지께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 이때만 해도 현은 자신이 그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아내는 결혼 후 5~6년간을 가사에만 매달리며 어린 아이들을 키웠다. 그러다 어느 정도 아이들이 크자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아내는 한신대 대학원에 입학해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하기로 했다. 학교와 집이 한 캠퍼스에 있으니 그만큼 공부하는 데 편하긴 했지만 역시 가정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무렵 나는 한신대 10년 근속 후 처음으로 안식년을 맞이했다. 1968년 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산학기금위원회의 장학금을 받고 미국 예일대 신학대학의 연구교수로 가게 됐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내게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아시아 고대 교회역사를 연구하던 내게 필요한 도서가 신학대학 도서관과 예일대 중앙도서관에 많았다. 여기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후에 나는 ‘아시아 고대 기독교사’를 출판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아내의 석사 졸업 소식을 들었다. 나는 아내의 석사 졸업을 축하하며 브로치 하나를 선물로 사서 보냈다. 아내는 그것이 내게 받은 첫 선물이라며 오늘날까지도 간직하고 있다.
예일대에서의 한해는 정말 잠깐이었다. 아쉽지만 귀국길에 오르려는데 아내가 그런 나를 말렸다. 이왕 간 거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난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박사 학위 유무가 교수하는 데 있어서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런 내 생각이 모자란 것임을 당시엔 몰랐다. 근래엔 박사 학위 없이는 신학대학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게 됐으니 사정이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
아내의 말은 고마웠지만 내가 공부하는 동안 가족의 생활이 걱정됐다. 학비도 문제였다. 50이 육박한 나이에 힘든 공부를 해낼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아내의 계속된 설득에 마지못해 우선 WCC 신학기금 위원장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되돌아온 답은 내가 공부하는 동안 장학금을 주겠다는 승낙의 메시지였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미국 아이오와주 두뷰크에 있는 아퀴나스 신학교에 입학했다.
계성중학교 때부터 받기 시작한 장학금을 캐나다 퀸즈신학대, 뉴욕의 유니언신학교, 예일대에서도 받았다. 여기에 박사학위를 위한 장학금도 받게 됐으니 참으로 예수님과 그의 교회 덕택이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었다.
놀라운 일은 여기서 다가 아니었다. 가족 생계를 위해 입학 전 3개월 동안 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 장로교 노회의 여름 캠프에서 잡일을 담당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몇몇 목사님들로부터 가족의 편도 여비를 후원받게 됐다.
사실 나는 가족 일부를 미국으로 데려올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아내 역시 그걸 바라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분들의 도움으로 69년 11월 초 아내는 세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서울에는 어머니와 두 아들, 조카가 남았다. 이들 생활은 내 퇴직금 분할 선불금으로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23) 아내의 헌신으로 1년 8개월 만에 박사학위 취득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생계 도맡은 아내
미국의 경제 악화로 해고… 가족 모두 귀국
한신대 복귀 않고 계명대 교수 겸 교목으로
이장식 교수의 아내 박동근 사모가 세 딸과 함께 미국 두뷰크 집 앞에서 찍은 사진.
두뷰크의 우리 가족은 어느 길가의 집 2층을 얻어 입주했다. 아내는 자동차 면허를 쉽게 딴 다음 500달러를 주고 중고차 한 대를 구입했다. 우린 두뷰크의 장로교회에 다녔고, 아내는 친절한 교인들을 통해 쉽게 직장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내가 학업에 열중하는 사이 아내는 여러 일을 했다. 첫 일자리는 꽃을 심고 키운 다음 화분에 옮겨 심는 일이었다.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임금이 적었다. 얼마간 이 일을 하다 아내는 맥도널드 공장 직공으로 채용됐다. 유학생 가족 비자라 정식 취직이 불가능하단 말에 우리 가족은 미국 영주권을 바로 신청했다. 이렇게 해서 아내는 정식으로 직업을 갖게 됐다. 공구 박스를 사서 날마다 공장에 출근했다.
아내의 노력 덕에 69년 9월 시작한 학위 공부를 71년 5월에 마칠 수 있었다. 아내는 가정과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시내에 있는 클라크대학 대학원 야간부에서 교육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우리 가족은 미국 정착과 귀국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신청했던 영주권도 나왔고, 아내는 미국에 머물 경우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약속받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생계 걱정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은 경제 악화로 많은 근로자의 해고 소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아내도 이 여파로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를 당했다. 난 한신대 복직을 당연시하고 한신대에 가족 귀국 여비 보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실망스러웠다. 가족 여비를 학교 돈으로 빌려주면 이자를 붙여서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0년부터 20년 동안 한신대와 인연을 갖고 온 사람에게 그리 큰돈이 아닌 여비의 이자를 물라는 것은 내겐 섭섭한 처사였다.
결국 난 한신대 복귀를 단념했다. 단지 여비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신대 이사회가 교수의 교내 사택 제도를 폐지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귀국하면 사택을 비우고 밖에 나가서 집을 얻어야 할 텐데 내겐 그렇게 할 만한 돈도 없었다. 퇴직금도 모두 가불해 쓴 처지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대구 계명대로 행선지를 틀었다. 계명대는 내가 박사 공부를 마칠 무렵 학장으로 계시던 신태식 선생님 편으로 수차례 청빙 편지를 보내왔었다. 신 학장님은 미국장로교 선교부에 연락을 취해 우리 가족 여비까지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그해 7월 하순 나는 한신대 수유리 신학교 사택으로 돌아와 대구로 갈 짐을 챙겼다. 오랜만에 뵌 어머니는 고생스러웠던 지난 세월을 내가 박사가 돼 돌아온 것으로 속량 받은 듯이 기뻐하셨다.
계명대에서 나는 교수 겸 교목의 직책을 갖고 학생들의 채플 시간을 인도했다. 신 학장님은 내가 계명대에 부임한 지 1년도 안 돼서 교육대학원장과 부학장 직책을 맡겼다. 아내도 계명대 부속전문대학 보육과의 전임강사로서 유아교육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 학장님은 보육과의 부설유치원 원장직을 아내에게 맡겼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24) 반정부적 설교로 학생 소요 부추겼다며 교목서 해임
종합대학 승격에 목말랐던 계명대
정부와 원만한 관계 유지하려 애써
지도하던 학생들 유신반대 시위에…
육영수(가운데) 여사의 계명대 방문 당시 찍은 사진. 오른쪽 위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이장식 교수다.
대구로 내려온 지 두 달만인 1971년 9월 29일 아침 어머니께서 76세의 나이로 그만 운명하셨다. 어머니는 세수하고 부엌에 나와 아내 옆에서 말린 생선을 손보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다. 방으로 옮기고 의사를 불러왔으나 이미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 본인은 편하게 눈을 감으셨지만, 자식 된 내겐 너무 충격이 컸다. 나와 아내가 미국에서 돌아와 이제 좀 편하게 모시려고 마음먹었는데, 자식의 소원도 부질없는 것이 됐다. 일찍이 남편과 장남이 세상을 떠난 후, 하나 남은 아들을 위해 수고만 하셨던 어머니였다. 이를 생각하면 슬픔이 더욱 깊어졌다.
이 무렵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하면서 이북과의 체제적 대결을 위해 남한에 유신체제를 실시했다. 이로 인해 인권 유린 사태가 빚어졌고 자유를 억압당하게 되자 대학생들의 항의와 시위가 연일 일어났다.
그러나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고 불렸던 박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인기는 좋았다. 한 번은 육 여사가 계명대에서 강연한 적이 있었다. 육 여사는 큰 환영을 받고 서울로 돌아갔는데, 이때 계명대 학생들을 청와대로 초대하겠다는 약속도 하셨다. 이 약속에 따라 나는 학생들을 인솔해 처음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봤다.
당시 신태식 학장님은 계명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고자 했다. 때문에 당시 문교부나 정부 당국자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해왔다. 또한 학교 내 소요 사태가 발생하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그런데 75년 어느 가을날 일이 터졌다. 학생 채플 시간이 돼서 나가보니 채플실 문이 닫혀 있고 채플이 없다는 게시가 붙어 있었다. 이날은 대구 시내의 한 신부가 와서 설교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오지 않도록 이미 연락이 갔다는 것이다.
나는 그 까닭을 몰랐는데 신 학장님이 이런 조치를 취했다고 했다. 사연을 알아보니 내가 지도하던 ‘성빈회’라는 기독학생클럽 학생들이 이날 채플 시간을 이용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구국기도회를 열기로 했다고 한다. 신 학장님은 이를 미리 막기 위해 채플을 폐쇄한 것이다.
신 학장님은 내가 그 학생들의 지도 교수였으므로 나 역시 학생들의 계획에 동조했거나 아니면 묵과한 것으로 짐작하고 계셨다. 신 학장님을 만나러 갔더니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으나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신 학장님은 나를 불러 교목직의 해임을 언도하셨다. 성빈회 학생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었지만, 해임 사유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후에 나는 몇몇 교수로부터 평소 내가 채플 시간에 한 설교가 반정부적인 암시가 있어서 학생들을 자극했단 얘기도 들었다.
아무튼 이때 신 학장님의 나에 대한 기대가 아주 사라진 듯했다. 한마디 말씀도 없이 아내의 부속유치원 원장직 해임을 유치원 교사들에게 선언했다. 아내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무척 당혹해 했다.
결국 나는 4년 6개월의 계명대 생활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한신대 이사회에서 다시 학교로 복귀해달란 요청이 있어서 우린 서울로 짐을 쌌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25) 비기독교 학생들, 교정에 위패 놓고 돼지 삶아 절까지
군부의 시민 학살로 한신대 학생 희생
학우 추모하려 학내서 미신행위 벌여
혼란 시대라 대학 당국자도 눈감아줘
한신대가 1986년 5월 27일 경기캠퍼스 교정에 세운 류동운 열사 추모비. 한신대 신학과 79학번인 류 열사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참가했다 희생 당했다. 한신대 제공
서울에 올라온 우리 가족은 한강변에 있는 한강 맨션에 입주했다. 아파트를 살 만한 돈이 없었으나 나이 50이 넘어 전셋집에서 살 수 없다는 장모님의 주장에 따라 장인의 도움과 은행 빚을 얻어 집을 구입했다.
내가 대구 계명대에 있는 동안 한신대에서는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열렬했다. 학교가 무기 휴학 조치를 받은 일도 있었고, 김정준 학장을 비롯한 교수들이 항의 표시로 삭발을 했으며 김 학장은 교기를 칼로 찢기도 했다. 일부 학생들은 경찰에 끌려가서 구금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내세운 유신체제는 많은 부작용을 빚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통치 권력 인수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들로 나라를 어지럽혔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군사정권의 폭정에 대한 광주시민의 항거였는데, 군부의 시민 학살은 한국의 군사정권 사상 가장 큰 과오였다.
이때 한신대 신학생 한 명이 희생됐고, 전교생이 그를 애도했다. 나 역시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1년간 영국 유학 중이라 이 소식을 영국에서 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아내도 애도의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해 기독교 선교를 위해 세운 학교에서 있어선 안 될 일이 일어났다. 비기독교 학생들이 희생된 학우를 추모하기 위해 교정에 위패를 만들고 돼지를 잡아 술잔을 두르며 절을 하는 게 아닌가. 기독교 대학에선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 미신행위를 대학 당국자는 관용하고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비참함을 전 국민이 규탄하던 이때, 비기독교인 학생들의 그 행위를 미신이라고 해서 못하게 할 만한 용감한 신학생이나 기독교인 교수나 학장이 있었더라면 도리어 친정부 부류라고 미움을 샀을지도 모른다.
한 신학생이 정의를 위해 희생된 건 사실이지만 그가 신주로서 제물을 받고 절을 받는다면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 어긋나는 것이다. 혼란시대에는 혼돈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럴 때도 ‘예’와 ‘아니요’를 구별할 수 있는 식견이 선생이나 지도자에겐 있어야 한다.
81년 한신대는 기존의 대학원 외에 신학대학원을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난 이 신학대학원 초대 원장이 됐다. 이 무렵 나는 그동안 쓴 논문들을 엮어서 ‘평신도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런데 이 책이 문공부 검열에 걸렸다.
화근이 된 논문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기독교사상에 발표한 것이었다. 중국의 모택동이나 북한의 김일성이나 남한의 박 대통령이 형식은 서로 달라도 독재임에는 다 같다고 쓴 게 걸림돌이 됐다. 이 책은 노태우 정권 들어 해빙시대에 접어들면서 검열에서 풀렸다.
아내가 영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우리는 살고 있던 아파트를 세놓고 세검정에 있는 2층 주택으로 이사했다. 아내는 곧바로 안양의 대신대에서 학생들에게 유아교육을 가르치게 됐다. 아내의 교계 활동도 활발해졌는데 한국여신학자협의회 부회장으로, 서울 YWCA 교육위원으로, 그리고 기장 여신도회 서울연합 회장으로 활동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26) 정년으로 은퇴… 케냐 장로교신학교서 인생 2막 열어
퇴직 후 몇몇 신학대에 강사로 출강하다
케냐 신학대에 있던 한 목사님의 청빙에
정년 퇴직 앞둔 아내와 함께 떠나게 돼
이장식 교수가 1986년 한신대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마지막 말씀을 전하고 있다.
1986년 7월 내 은퇴 시기가 다가왔다. 난 한신대로부터 명예 교수의 명칭을 얻었다. 50년 4월 한신대를 졸업하고 전임강사로 봉직한 후 지금까지 36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그중 대구 계명대에서의 재직 4년 6개월을 빼면 32년간 한신대 교수로 재직한 셈이다.
한신대 전체 교수들은 돈을 모아서 한신대학 이름과 마크를 넣은 굵직한 금반지를 선물로 내게 줬다. 난 이 반지를 항시 끼고 다니면서 교수들의 호의를 늘 되새겼다. 전국신학대학협의회에서는 내 30년 신학교육의 공을 치하한다는 의미로 감사패를 줬다.
정년 은퇴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홀가분함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직 더 가르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 아이들도 장성해 출가하면서 살던 집이 텅 빈 집 같이 됐다. 나는 아내의 제안에 따라 살던 집을 팔고 안양에 위치한 좀 더 작은 규모의 집으로 이사를 갔다.
아파트를 사고 남은 돈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기증하고 ‘혜암장학금’이라고 이름 붙였다. 중학교 때부터 장학금으로 공부했던 나였다. 언젠가는 적은 돈이나마 갚아야 한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가 계속 대신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으므로 당장 생활에 큰 곤란은 없었다. 나도 몇 군데 대학에 강사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출강하러 나간 대학들은 안양에서 다 멀었다. 수유리 한신대 캠퍼스도 멀었지만, 냉천동의 감리교신학대학과 광나루의 장로회신학대학도 가려면 한참이 걸렸다. 그러나 이렇게 가도 반정부 학생 시위로 강의실이 비어 있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난 출강 의욕을 잃었고, 인력이 부족한 외국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마침 케냐 세인트 폴 신학대에 있던 유부웅 목사로부터 케냐 장로교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보지 않겠냐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유 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내는 대신대 정년 은퇴를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사임하고 나와 함께 케냐로 가기로 결정했다. 내 나이 70, 아내 나이 60때였다.
나는 후원 단체 없이 케냐로 곧장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몇몇 목사님께서 후원교회를 찾아서 매월 선교비를 보내주시기로 했다. 이중표 목사님이 회장이 되고 조원길 목사가 총무가 돼서 후원회를 이끌어가기로 했다.
외국 선교를 생각해본 일이 없었을 때 김재준 목사님이 별세하기 2년 전 내게 친필 휘호를 주신 적이 있다. 난 이것을 족자로 만들어서 방안 벽에 걸어뒀다. 그 글은 한문으로 ‘鵬飛雲外, 渺茫無際(붕비운외, 묘망무제)’라고 쓰여 있었다. ‘큰 새가 구름 밖으로 멀리 끝 간 데 없이 날아가서 묘연해 보이지 않는다’라는 뜻이었다. 훗날 이 글을 다시 보니 김 목사님이 내 아프리카 선교여행을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아내는 90년 11월 27일 김포공항에서 출발해 케냐로 향했다. 중간에 인도 뭄바이 공항에서 8시간 기다린 뒤 다시 비행기를 타고 30간 넘게 걸려 케냐에 도착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27) 교회사 강의로 본격 사역… 후원자들에 선교 서신 보내
케냐의 자연·교회에 대해 자세히 알려
서신 모아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출간
아내는 이듬해 기독교 교육 강의 맡아
이장식 교수 부부가 케냐 도고토 동아프리카장로교회 교단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머물렀던 집. 이 교수 부부 뒤로 이들의 발이 돼준 자동차가 보인다.
케냐 입국 후 나와 아내는 당분간 나이로비에 있는 성공회교회에 속한 여인숙에 머물게 됐다. 도착 이튿날 유부웅 목사가 케냐인 구미 목사를 대동하고 찾아왔다. 구미 목사는 수년 전 내가 장신대에 출강했을 때 내 강의를 들었던 사람이었다.
우린 유 목사를 따라 리무루에 있는 그의 사택에 가서 유 목사가 가르치고 있다는 성바울 신학대학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교수 몇 분과 인사를 나눴다. 기억나는 건 이 신학교에 네덜란드에서 온 한 교수가 있었는데, 머리에 큰 부상을 입어 붕대를 감고 있었다. 밤에 도둑이 들어 판가(큰 칼 모양의 농기구)로 머릴 쳐서 생긴 상처라고 했다. 집집마다 창문에 철창이 붙어 있어서 쉽게 도둑이 들어오진 못하게 돼 있지만 떼를 지어 오면 막을 수가 없다고 했다.
얼마 후 구미 목사가 우릴 나이로비 인근 도고토에 있는 동아프리카장로교회(PCEA) 교단 신학교 졸업식장에 데려다 줬다. 이곳이 우리가 섬길 곳이었다. 낡고 허름한 2층 건물에서 300여명이 졸업식을 진행 중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건 졸업식이 엄숙하기보다 웃음과 유머, 노래와 춤으로 엮어진 화기애애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나와 아내는 이 졸업식에서 학교 관계자 및 학생들에게 첫 인사를 했다. 그간 이곳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두골 박사가 은퇴하면서 생긴 빈자리를 내가 채우게 됐다. 집도 두골 박사 집을 사용하게 됐다.
1991년부터 본격적인 케냐에서의 선교 사역이 시작됐다. PCEA는 케냐 200여 개신교 교파들 가운데에서 세 번째로 큰 교단이었다. 1891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로 시작됐고, 도고토에 선교 본부가 있었다. 여기가 교단 본산지다 보니 여러 기관이 들어서 있었는데, 케냐와 인근 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초등학교가 있었다. 교단 최초 현지인 목사 이름을 따서 무사 기타우 초등학교라고 불리고 있었다. 또한 1907년 동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세워진 자그마한 목조 교회당이 아직도 서 있어서 주일학교 교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난 본국에서 우릴 후원하는 후원자들에게 우리가 하는 일과 함께 케냐의 자연, 문화 그리고 케냐의 교회에 대한 되도록 자세한 내용을 알리고 싶었다. 이런 이유로 선교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7년 정도 지난 후에 케냐에서 쓴 선교서신을 세어 보니 모두 42통 정도 됐다. 이 편지를 모아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1998)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책을 쓴 뒤에도 가끔 선교서신을 썼다.
나는 91년 5월 8일 교단 신학교에서 처음으로 교회사 강의를 시작했다. 아내는 그 이듬해 5월 학기부터 기독교교육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간혹 이웃마을 교회 요청을 받아 200~300㎞ 떨어진 거리를 운전해 다녀오곤 했는데 이때마다 아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12년 된 일본 헌 차를 사서 타고 다녔는데 수차례 사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핸들이 흔들리거나 차 뒷바퀴가 빠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28) 목회자 양성 위해 신학교 짓다 교단 재정 어려워져
서신 통해 한국교회에 딱한 사정 알려
한국과 미국 교포 교회서 장학금 전달
선교 헌금으로 마을 최초 유치원 세워
이장식(아랫줄 왼쪽에서 세 번째) 교수와 박동근(아랫줄 맨 왼쪽) 사모가 PCEA신학교 제자 및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동아프리카장로교회(PCEA) 총회장 무인디 목사와 증경 총회장 키옹고 목사, 직전 총회장이면서 신학교 학장이던 완자우 박사 등을 1992년 봄 우리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오찬을 즐기던 중 무인디 목사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PCEA교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 선교 동역자 관계를 맺고 싶다며 내 의견을 물었다. 난 두 교단이 함께 협력하면 선이 되겠다 싶었다.
난 곧바로 무인디 목사의 말을 편지로 당시 기장 총회장인 김수배 목사에게 전했다. 기장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기장 총회는 그해 9월 무인디 총회장을 정식으로 초청했고, PCEA는 아프리카 교회로서는 아시아 교회와 선교 동역자 관계를 맺은 최초의 교회가 됐다.
나와 아내의 케냐에서의 주된 사역은 목회자 양성이었다. 목회자가 크게 부족한 아프리카 땅에선 목회자 양산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재정이 빈약한 이 대륙에서는 자비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적었다.
우리는 이 신학생들을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때때로 작은 볼펜이라도 생기면 나눠 주거나, 학급별로 사진을 찍어서 나눠 주기도 했다. 졸업생들이 졸업 앨범은 고사하고 전체 사진 한 장도 갖지 않고 뿔뿔이 헤어지는 이 신학교에서, 아내는 중요한 행사 때마다 재학생 및 교수들과 찍은 사진을 확대해 액자에 넣어 도서관에 걸어 놨다.
우리가 케냐에 온 지 5년째 되던 해 PCEA 대학교 새 교사가 완공됐다. 우리가 왔을 때 골조 공사가 거의 끝났었는데, 교단 재정 사정으로 지연되면서 5년이 더 걸렸다. 이 신학교 건축으로 인해 학교 운영이 한동안 극도로 어려웠다. 신입생을 제대로 모집하지 못한 때가 두 번이나 있었고, 학교를 일시 문 닫아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나와 아내는 선교서신을 통해 한국교회에 이 딱한 사정을 알렸다. 그 결과 한국의 교회들과 미국 교포 교회들로부터 장학금이 송금돼 왔다. 이렇게 10년간 우리를 통한 장학금 총액이 약 12만 달러나 됐다. 이 돈은 전액 신학교 회계 통장에 입금돼 학교 운영에 직접 사용됐다.
신학교가 있는 도고토에서 3㎞ 떨어진 곳에 다고레티 어린이집이 있었다. 지역 노회 목사들과 장로들이 운영위원들과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정부의 도움은 별로 없고 순전히 교회와 사회 유지들의 원조로 운영해가고 있었다.
나와 아내는 이 어린이집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마침 대구 동원교회가 보내준 선교 헌금 800여 달러로 젖소 한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 돼지 세 마리를 사다 기부했다. 이 어린이집은 이런 가축을 키워서 운영상 도움을 얻고 있었다.
도고토 마을에는 신학교와 남녀고등학교, 초등학교 등이 있었지만 유치원은 없었다. 아내는 지역 키무리 교회 담임 크고 목사와 의논해서 유치원을 세우기로 했다. 기장 서울여신도회가 3년 동안 연 1500 달러씩 보내준 돈으로 시작했다. 예장 통합 측 순천 장로교회도 700달러의 건축비를 보탰다. 교실 세 개를 먼저 지어 원아 2개 반을 모집했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29) 케냐서 15년 사역 마치고 안식처 ‘광명의 집’으로 귀국
아프리카의 단순한 외래 선교사 아닌
공동체 일원이 되기를 소망하며 사역
뒤이을 선교사 없어 계속 귀국 미루다…
이장식 교수 아내 박동근 사모가 케냐 키무리던 유치원 원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유치원 원아가 늘면서 아내는 유치원 독립 건물을 지을 필요를 느꼈다. 약 4만5000달러의 비용을 들여 유치원 교사를 우리 집 가까운 곳에 지었다. 석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한국식 유치원이었다.
유치원 건물 정초석에는 아내가 이 유치원을 설립하고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유치원 이름은 지역 이름인 키무리(Kimuri)에 ‘Dawn(새벽)’을 붙였는데, 이는 아내의 이름에 들어가는 동녘 동(東)과 뜻이 통한다.
나와 아내는 아프리카 땅에서 단순한 외래 선교사가 아니라 이곳 공동체의 일원이 되길 소망했다. 다행히 이웃들은 우리의 모습을 좋게 봐줬다. 유치원 어린이들은 우릴 보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인사했고, 이들의 부모도 밝은 미소로 우릴 대했다. 이렇게 나와 아내는 케냐에서 15년간 사역했다. 유치원뿐 아니라 교회당도 한국교회의 도움을 받아 여러 곳에 세웠다.
케냐에서의 사역이 10년 이상 되자 나이도 있고 귀국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쉽게 돌아갈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릴 이어 선교사로 올 기장 교단 선교사가 없었다. 기장 총회가 공개적으로 초청 공고까지 냈고 몇몇 뜻있다는 분이 와서 보고도 갔지만 최종 결정 단계에서 결렬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편으론 우리가 아주 귀국했을 때 있을 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몇 년을 기다리다 한국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박찬섭 목사님 내외가 PCEA와 본격적 협력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또한 기쁜 소식은 경기도 화성시에 세워진 광명의 집 입주 허락이 난 것이었다.
2004년 11월 27일 나는 PCEA 신학대 졸업식에 참석해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학생들의 졸업을 축하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모두 아쉬워했다. 그리고 12월 6일 교수회에 우리의 귀국 계획을 밝혔다. 동료들 역시 이별을 아쉬워했다.
이듬해 우리는 오랜 타지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리고 우리의, 땅에서의 마지막 안식처 광명의 집으로 향했다. 광명의 집은 은퇴한 노목사들을 위한 집이었다. 농천교회 나광덕 장로와 김명희 집사 부부가 거액의 사재를 들여 지은 집으로 주변에 나지막한 푸른 산들이 둘러져 있고 옆에는 큰 호수가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게다가 점심과 저녁은 광명의 집 모든 가족들이 함께 공동 식사를 하고 아침식사만 각 부부가 해결한다고 하니 은퇴 후 사실상 준비된 집도, 아무런 수입도 없을 우리에겐 완벽하게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곳이었다.
여기 와보니 80대 은퇴 목사 3가정, 70대 3가정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평생을 교회를 위해 몸 바쳐 일하던 은퇴 목사들과 공동생활을 하게 됐으니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나 좋은 수양생활이 될 거 같았다. 남은 생 동안 자녀들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 염려 끼치지 않고 잘 지내다 하나님 앞으로 편히 갈 수 있게 기도했던 우리의 기도가 이뤄진 것이다. 우리는 202호를 배정받았다.
***[역경의 열매] 이장식 (30·끝) 평생을 후학 위해 강단에 서… 이들 좋은 목회자 되길
지난 한 세기 주님 은혜로 뜻 있게 살아
교회는 참된 통회의 믿음으로 나아가고
제자들, 욕심 없이 교회만 바라봤으면…
이장식 교수와 박동근 사모가 경기도 화성시 ‘광명의 집’ 앞마당에서 난간에 기댄 채 미소 짓고 있다.
케냐에서 돌아와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선 내게 마지막 봉사의 자리를 주셨다. 논쟁과 다툼이 많은 한국 개신교계에서 초교파적으로 신학자들을 규합해 신학연구소를 개설했다. 우린 매년 2회씩 연구지를 출판했고, 연구소는 에큐메니컬 신학연구소로 발전하게 됐다. 이 신학연구소는 내 호를 따 ‘혜암신학연구소’라 이름 붙여졌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내 나이 100세가 됐다. 죽음의 공포가 가장 심했던 지난 한 세기를 뜻 있게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였다. 물질적으로 빈곤한 케냐에서 평안한 인간미를 서로 나누며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 주시는 은혜로 인함이었다. 또한 이 나이, 이 건강의 나를 든든히 옆에서 보살펴 주는 아흔 된 아내가 있으니 이 또한 특별한 은혜가 아닌가 싶다. 그저 감사할 것들뿐이다.
늘 글을 써왔던 터라 요즘도 난 몇 시간씩 앉은 자리에서 글을 쓴다. 짧은 한시를 주로 쓰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제목은 ‘일몰’이다. 내 삶을 하루로 표현한다면 지금은 아마 해가 지기 직전인 일몰일 것이다.
‘山高海深(산고해심) 路程險難(노정험난) 山戰水戰(산전수전) 伴侶老弱(반려노약) 西山日沒(서산일몰) 江大水深(강대수심) 彼岸視野(피안시야) 誰待我乎(수대아호).’ 산은 높고 바다는 깊으며 갈 길이 험하고 어려워 산과 바다에서 싸우고 싸웠다. 이제 아내도 늙고 약해지고, 해는 서산으로 저물어 간다. 넓은 강 깊은 물가에 이르러 저 건너편 언덕이 보인다. 그곳에서 누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까.
이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이 태어났으나 자기가 태어날 것을 알고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또 이렇게 세상에 태어나서 인생의 수많은 날을 미리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만약 이런 분이 있다면 그는 우리의 형질이 형성되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알고 보고 계신 하나님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진리를 읊은 시편 시인의 고백을 읽으면서 지나온 생의 그 많은 날들이 내가 미리 정한 날들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이제 남은 바람은 아무쪼록 우리 교회들이 참된 통회의 믿음으로 나아가고, 이로 말미암아 인류 역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평화와 정의, 생명의 밝은 역사로 발전했으면 한다. 평생을 후학을 위해 강단에 섰는데, 이들에게 바라는 건 그저 좋은 목회자들이 됐으면 하는 것이다. 물질 욕심 없이, 명예 욕심 없이 교회만 봤으면 한다.
새벽 일어나 기도를 드리는 지금 흩어져 있는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 그리고 함께했던 동역자들, 외국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매일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도, 나도, 아내도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주님 주신 소명대로 맡은 바 충성을 다하며 살길 기도한다. 삶의 고단함 가운데서도 늘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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